KBS본부 출범에 대한 <추노> 곽정환 PD의 격려
- 제작년도
- 2010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조금 식상한 표현이지만 영화제, 그리고 영화 시상식을 우리는 ‘영화인들의 축제’라고 부른다. 한 해 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어낸 감독, 스태프와 배우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영화팬들 또한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과 그에 참여한 배우, 스태프들이 상을 받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영화에 깃든 자신만의 추억들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영화인 중 누군가가 “그저 상(賞)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말한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다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상이라는 것은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거나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에 대해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명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때, 정말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이 상에 어마어마한 보상이 붙어있어서 영화사에는 회사의 존폐가, 감독에게는 차기작의 유무가 걸려있었고, 이로 인해 매년 이 상을 둘러싸고 갖은 암투와 비리들이 횡행하며 영화계에 온갖 잡음을 만들어냈다. 대종상 타면, 그 상 타는 데서 심사위원들한테 로비를 해서 해마다, 지금까지도, 문제가 있었지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영화계에 스캔들이 생기고 그렇지요. 또 유명한 사람들이 거의 심사위원 안 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뭐 예술회원, 유명한 작가, 다 거의 심사시켜야 된다 그래 갖고. 또 (로비 받은 게) 걸려서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그런 추악한 일이 오랫동안 계속 돼…. - 호현찬 , 2004 영화평론가인 호현찬이 말하는 것처럼 최근에도 대종상에서는 수상작 선정 과정과 영화인들의 시상식 불참 등 해마다 논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지만, 1990년대 이전과 이후의 논란들은 성격이 많이 다르다. 여기서는 1980년대까지, 대종상 하나가 정말 중요했던 이유 와 그것이 불러일으킨 다양한 스캔들 에 집중할 것이다. 사실 1990년대와 그 이후 시기 대종상과 관련된 논란들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아주 쉽게, 그리고 정말 훌륭하게 정리된 글들이 많아서 굳이 영화인들의 입을 빌릴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에 비해, 궁금하고 흥미롭지 않은가? 기록도 많이 남아있지 않은 옛날 옛날에 대종상을 놓고 영화인들 간에 온갖 정치와 거래가 오갔다는데, 당사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지만 이를 알아보려면 우선 우리가 당시 대종상과 영화산업의 성격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지점들이 있다. 조금 지루하겠지만, 이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간결하게 하고 넘어가겠다. 나라에서 주는 상 대종상은 공보부 주최로 1962년 3월 30일 국립극장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남녀 주⋅조연상을 포함해 총 16개 부문에 대한 시상이 이루어졌다. 당시 대부분의 상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에서 가져가면서, 신필름은 훌륭한 스태프들을 데리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사로 명성을 굳혀갔다. 각종 신문과 잡지 기사에서도 이러한 신필름의 약진에 주목하는 한편, 처음으로 제정된 영화 시상식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데에 대해 고무적인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62년 3월 30일에 열린 제1회 대종상 시상식 사진 하지만 이러한 찬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종상 시상식에 대한 불만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제2회 대종상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영일 은 대종상 심사위원 명단이 발표된 직후 신문 지면을 통해 대종상 심사위원들의 전문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버려야 할 전문가 기피증, 대종상 심사위 구성에 일언”, 《동아일보》, 1963. 2. 28. 6면 기사 *주1 ). 그렇지만 심사위원들의 교체 없이 제2회 대종상 시상식은 예정대로 3월 8일에 진행되었다. 그런데 대종상에 대한 논란은 시상식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대종상 시상과 더불어 해외영화제에 출품할 작품도 함께 선정했는데, 이게 영화제작자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제작가협회에서는 며칠 후 아시아영화제 출품작 선정에 대한 건의서를 공보부에 진정했다. 11일 저녁 6시에 모인 제작가협회 이사회에서는 공보부 당국에 대하여 아시아영화제 및 백림영화제 출품작품 선정을 재심해줄 것을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 근본적인 저의는 이번 대종상심사와 영화제 출품선정의 결과에 대한 영화가의 비등한 반발 여론에 비추어 심사결과에 대한 불만불신의 표기로 짐작된다. 영화계 일부에서는 이번 심사를 ‘보이코트’하자는 여론도 높았으나, 재심으로 출품작품을 엄선하자는 결정에 이르렀다. - “아주영화제 출품작 재심 건의키로”, 《동아일보》, 1963. 3. 12. 6면 기사 이전 해 대종상 시상식에서 제기된 불만을 의식한 것인지, 공보부는 제3회 대종상 시상식을 앞두고 영화평론가와 연극영화과 교수 등을 심사위원단에 포함시켰고, *주2 해외영화제 출품작의 경우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추후에 별도 선정하는 것으로 방식을 변경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1964년 제3회 대종상부터 “우수영화를 장려하는 보상책”으로 대종상 수상작에 대해 ‘외화쿼터’를 지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외화쿼터 주어, 대종상시상식”, 《경향신문》, 1964. 3. 5. 8면 기사). 대종상은 (공보부) 영화과에서 맹글었어요, 우리가. … ‘우리나라 대표적인 영화제를 하나 맹글자, 영화상을’ 그래서 ‘상의 이름을 뭘루 허느냐?’ 게 생각허다가 ‘대종상으로 허자’ 이렇게 된 거예요. (우수영화) 장려를 말로만 허믄 또 시비가 되니까, 실제적인 실리를 주는 방향으로 허자. 그게 뭐냐? 쿼터. 우수헌 영화 장려하는 방법으로 쿼터를… 뭐 이렇게 된 거죠. - 이성철, 2009, 309~310쪽 1961년부터 공보부 공보국 영화과장으로 일했던 이성철은 대종상을 만들게 된 배경에 덧붙여, 우수영화 제작 장려 및 그 보상의 일환으로 ‘쿼터’가 주어지게 된 과정에 대해 언급했다. 아무래도 ‘상(賞)’이니까, 무언가 그에 맞는 적절한 혜택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일종의 보상으로서 주어진 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쿼터’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쿼터란 국가에서 배정해주는 외국영화 수입 권한을 뜻한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갈등의 씨앗은 바로 이 ‘외화쿼터’로부터 나온다. 외화쿼터라는 것은 왜 그렇게 영화인들에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억’ 소리 나는 쿼터의 가치 1963년 1차 영화법 개정 이후 영화제작사와 외화수입업을 일원화시키는 동시에 이들 영화사의 수는 국가에서 등록제를 통해 조절하고 있었다(영화업 등록제는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으로 허가제로 바뀌며, 기존 20개사에서 거의 절반 수준인 12개로 줄어든다). 매 시기 영화법 시행령에 따라 허가된 영화사의 수나 외화수입쿼터의 수가 늘었다 줄었다 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영화산업은 소수의 영화사들이 제한된 ‘쿼터’ 숫자를 놓고 경쟁하는 독과점 체제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외국영화 수입편수 및 상영편수(1964~1985) 위의 표를 보면, 그래도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는 1년에 50~70편 정도의 외국영화가 배정⋅수입되었다(쿼터 수와 실제 검열을 받은 영화의 수가 다른 이유는 이전 해의 쿼터의 ‘이월’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표]에서 상영편수가 실제 수입편수보다 많은데, 이는 전 해에 수입되었지만 상영되지 못한 영화가 개봉하거나, 인기 있는 영화를 재상영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이후 수입추천(외화쿼터) 수가 줄면서, 외국영화의 수입이나 상영이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외화쿼터를 둘러싼 각종 문제 역시 19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 더 심각해진다. 그때는 외화를 들여오면 1년에 20~25편이야. 그러니까 외국영화를 보려고 하면 하여튼 1년에 고것밖에 못 봐. 다른 작품은 들여오지를 못하니까. 그러니까 아주 그건 정말 커다란 특혜지, 그냥. 그 대신에 쿼터를 어떻게 해서 얻느냐. 1년에 4작품을 해야 돼. 그래야 인정을 받아, 영화사 영업하는 걸. 그러고 저 우수작품 뭐, 대종상 에서 상을 탔다든지, 뭐 아세아영화제 이런 외국 가서 (상을) 탔다든지 그러면 쿼터 하나씩 나왔다고. … 또 뭐 반공영화를 만들면은 좀 점수를 줬고. … 그렇게 하고 인제 수출을 많이 해서 실적을 올려서 (쿼터를) 타는 수가 있고. 여러 가지 정책이 그렇게 돼 있었지. - 강범구 , 2011 , 268쪽 외국영화도 상을 타면 쿼터 하나. 근데 쿼터 값이 얼마냐면, 국산영화 한 편 제작하는데 700만 원 내지 800만 원인데, 쿼터 하나 값이 1,500만 원이었어 , 외화 들여오는 거. - 최경옥 , 2008, 143쪽 그게 내가 파라마운트(극장)에 있을 당시니까, 66년도부터 72년도까지 있었거든요? 나도 거기서 외화를 우리 사장님이 쿼타를 사오고 팔고 해가지고, 나도 그때 쿼타를 사가지고 네 편을 수입해 봤거든요. 쿼타를 사고 팔고 했지, 그때는. (쿼터 하나에) 천만 원 했나? 그거 하나 있음으로 해서 내가 수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거니까. {그때 개봉관이 60원 정도할 때} 맞어, 60원. {그럼 억 단위네요, 지금은?} 크지. 그 당시에 60원 하면 요즘은 (입장료가) 6천 원이니까, 100배인가? 10억인가, 지금 돈으로? - 김성근 , 2010, 122~123쪽 그 대종상에서 작품상 타면 외화수입쿼터 하나 준 거야, 그냥. 그 외화쿼터 하나, 수입권을 얻으면 요새 가치로 봐서 약 한 50억 돼, 50억. 가서 외국영화 하나 괜찮은 거, 외국영화 수입을 무제한 개방해 놓은 게 아니고 1년에 20편, 24편 내외 수입쿼터로 맨들어 놨기 때문에, 우리나라 들어오면 그냥 어떤 거든지 그건 (관객이) 30~40만 들어간다니까? 음, 그러니깐 외국 나가서 한 10억 주고, 판권 10억 주고 외국영화 하나 사왔다 이거야. 근데 이게 여기서 100억이 되니 이게 얼마나 되냐, 돈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 황금알 채 생긴 거위야. 그래서 그냥 서로가 별짓을 다하고, 인제 사회상은 그랬어요. - 김영효 , 2013, 430~431쪽 위의 구술도 대체로 이 시기의 상황들을 설명하고 있다. 김영효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외화는 일단 상영을 하면 그게 어떤 영화든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30~40만의 관객들을 끌어올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영화사들은 위험성이 큰 한국영화 제작보다 외국영화 수입⋅상영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최소의 비용만을 가지고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통해 획득한 외화쿼터를 가지고 외국영화를 수입해서 상영하거나, 아니면 그 쿼터 자체를 팔아서 이득을 챙기자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강범구 감독의 구술에서 이 외화쿼터 획득 방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각 회사들은 할당된 한국영화 제작 편수를 채우거나, 우수영화로 선정되거나, 대종상을 수상하거나(시기에 따라 걸린 상의 개수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최우수작품상, 우수반공영화상을 수상하면 1편씩 쿼터가 지급됨), 해외 수출 실적이 있거나,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거나 하는 방법으로 외화쿼터를 하나씩 얻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1년 동안 영화사들은 최소한의 예산을 가지고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한다(제작권도 쿼터가 있어서, 이 숫자도 매해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 4편의 영화에는 우수(반공)영화 또는 대종상용 영화 1편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외화쿼터 외에도 추가로 1편의 외화쿼터를 더 얻을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신필름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구술자 최경옥의 말에 따르면, 한국영화 1편 제작에 7~800만 원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고도 이익을 남기려면 외화쿼터 2개는 필수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김영효 감독이나 외화수입사와 극장에서 일했던 김성근의 구술을 보면 그냥 외화쿼터를 팔았을 때는 오늘날 물가로 약 10억 원의 가치가, 직접 외화를 수입해서 상영했을 때는 적어도 50억 원의 이익이 보장되었다(심지어 이 역시 10년 전 물가를 기준한 것으로, 2024년의 물가를 반영하면 더 큰 금액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은 최소 10~50억의 가치를 갖고 있었고, 수입해온 외화가 흥행에 성공하게 되면 김영효 감독의 말처럼 100억 이상의 가치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종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이 나올만 했다. 대종상을 잡아라!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대종상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먼저 로비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대종상이 문제가 된 것은, 70년대 중반 이후부터예요. 형식은 이런 겁니다. 심사위원을 누가 맡았다 하면은, 그 심사위원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로비대상으로 정해 만나는 거예요 . 가령 당시 심사위원 가운데 소설가가 있다면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 하겠다’ 이런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래서 영화화하기 어려운 소재라도 원작료를 주고 입수하는 거예요. 그거 안 받을 수 있어요? 명분이 있는데. 그게 시가(市價)보다 많아요. 그런 식으로 로비를 합니다. 그 당시 Y 모라는 유명한 심사위원이 있었습니다. 각계에 문어발식으로 관계했던 문화계의 마당발이었죠. 이런 사람들은 A영화상, B영화상 다 해요. 그럼 A영화상에서 로비 받아가지고 안 된 경우가 있어요. 로빈 받았지만 작품이 밀리니까. 그러면 B영화상 시상식 때 그것을 갚아요. 그럼 이쪽에선 불만이죠. 저쪽은 쿼터가 걸려 있고, 이쪽은 상금이 없다 보니까. 이런 식이에요. - 김종원 , 2008, 355쪽 누구한테 욕먹을 소리겠지만은, 대한민국 영화 대종상은 절대 정상으로 한 영화가 없어. 보믄 뒷거래가 다 있어. …내 누구라고 얘긴 하지 않지만은 대종상 시상날이야. 근데 인제 그날 6시부터, 6시 반부터 시상식을 하는데, 그날 최우수작품을 갖다 결정하는 날이 그때가 5시 반쯤 될 때, 막 거기서 회의를 하는데, 그 안에서 인제 투표를 허는 거야. 하기 직전에 누가 문을 탁 여는 거야. 문을 탁 열어가지고 “어이구, 죄송합니다. 이거 미안합니다.” 문을 닫은 거야, 그 사람이, 응? 그 사람은 왜 그거 문을 열었겠느냐? 자기가 만난 사람들 있잖아. 자기가 만난 사람들이 자길 잊을 수도 있잖어? 그니까 도장 찍을라고 문을 연 거야, 일부러. 그러구선 모르는 척하고 “어구, 이거 잘못 찾았습니다.” 문을 탁 닫은 거야. 그러니 그 만났던 사람들은 소름이 끼칠 거 아니야. 잘못했다간 나중에 탈이 날 거 아니야. 그 < 경찰관 >(이두용, 1978)이라는 영화가 있었어, 합동영화사. 그러구 우성영화사에서 < 세종대왕 >(최인현, 1978)이란 영화를 맨들었어. 막말로 대한민국 사람들 다 갖다 보여줘서, “이 영화가 좋으냐, 저 영화가 좋으냐?” 할 때 영화적으로 좋은 건<세종대왕>이 좋대는 건 다 인정될 거야. 돈도 많이 들었고. 그런 영화가 결과적으로 6:5로 졌어. … 쿼터가 걸린 데는 쫙 시커먼 게 쫓아댕겼으니까, 그때. - 양춘 , 2009, 210~211쪽 (상) 제17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경찰관> (하) 남녀조연상⋅미술상을 받은 <세종대왕> 위 구술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은 우성영화사에서 말 그대로 ‘대종상을 노리고 만든’ 제작비 2억 5천여만 원에, 등장 인원만 16,000명이 동원된 대작 사극이다. 거기에다 교육성을 강조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부터 자료제공과 협찬을 받는 한편, 역사학자 10명의 고증⋅감수를 받았다. 그러나 흥행업자들로부터 영화적 재미가 없는 ‘교과서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외면당해, 완성한 지 4년이나 지난 1982년 3월 5일 대한극장 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열심히 구애를 했으나 대종상에 외면당하고, 심지어 극장과 관객에게까지 버림받은 비운의 대작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영화제작자 양춘의 구술에서 언급된 합동영화사는 대종상 스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특히 우성사와 합동영화사의 대종상 경쟁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더 앞서 이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에 대해 들어보자. 최훈 감독이 감독한 그걸 골랐는데, 얘길 들어보니깐 얘기가 쪼금 낯익은 것 같기고 해서 시나리오를 봤더니 시나리오가 표절이라. 그래서 이걸 좋은 영화로 만들 순 있지만 소위 대종상이나 우수영화로 내놓기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세 번인가를 뜯어 고쳤어, 시나리오를. 그걸 뜯어 고쳐가지고 < 수선화 >(최훈, 1973)로 결정을 졌어. 그 최훈 감독이 대종상을 한 번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후보작을 고르자 그래서 최훈 감독을 줬고,또 출연자들도 좀 그렇게 대종상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고르자 그래서 장동휘 씨 뭐 이래 가지고 배역진을 골라가지고 시작을 했고. … {그런데 이게 감독상하고 몇 가지 상을 받기는 했는데, 작품상은 못 받았더라고요} 작품상은 아마 < 비련의 벙어리 삼용 >(변장호, 1973)이 받았나? - 박행철 , 2014 , 295~297쪽 그다음에 <비련의 벙어리 삼용>을 우성영화사에서 했더니… 아침에 사장한테 대종상에서 11개 부문이 상이라고 연락을 받았어요. 근데 그때 대종상에는 쿼터가 붙어 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나오니까 김용덕 씨가 나한테 뭐라고 그러냐면 “밤에 대가릴 짤라 갔어요.” “그게 무신 소리요?” 그랬더니, 최우수작품상에만 쿼터가 붙어 있는데 나머진 다 놔두고 최우수작품상만 딴 데로 돌렸다 이거야. “그럼 어떻게 된 거요?” 그랬더니, 합동영화사에서 만든 < 홍의장군 >(이두용, 1973)이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태권도영홥니다. 그게 대종상 작품상 탈 영화가 못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엊그저께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에 대종상을 휩쓸어 버리면 우린 뭐냐! 이거 우리를 아주 그냥 밟어 버리는 거 아니냐!” 굵직굵직한 회사 다섯 사람이 안기부국장을 만나자고 그래서, “이건 말이 안된다. <벙어리 삼룡> *주3 은 포르노영화다” (웃음) 그때 국시가 ‘자국안보’ 이런 거였어요. 그럼 “대통령의 뜻을 따르려면 <홍의장군>이 상을 타야지, 어떻게 포르노영화 상을 주느냐.” 국장이 어떨결에 “<홍의장군>이 타야지.” 그래서, 그때 문공부에서 주관을 했으니까, 상당한 돈도 오고 갔대요. 그러니까 밤에 소집을 했어, 심사위원들. “다시 심사해라. 국책영화에다 상을 줘야지 말이 되냐?” 그래서 심사위원들이 다시 투표를 해서 작품상을 <홍의장군>으로 바꿔쳤어요. 그러니깐 영화계가 “말이 되냐, 어떻게 <홍의장군>이 작품상이냐?” 그리고 심사위원들이 “우리는 <홍의장군>을 뽑은 일이 없다. 안기부가 동원을 했다” 막 시끄러워지니까 문공부도 골 아파지고. 이걸 수습할라고 그러는데 여론이 워낙 나빠지니까. 그래서 그러면 <벙어리 삼룡>도 쿼터를 하나 더 주자. 그래서 우수작품상까지 쿼터를 타 먹었어요. - 변장호 , 2016, 122~123쪽 <수선화>(좌)와 <비련의 벙어리 삼용>(우)은 모두 우성영화사 작품으로 제1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수선화>는 감독상⋅각본상⋅편집상⋅녹음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우수작품상⋅촬영상⋅여우주연상⋅여우조연상⋅음악상⋅미술상⋅조명상을 수상해, 총 11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제작자 박행철은 1970년대 우성사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수선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대종상을 노리고 기획된 것으로, 사실 일본영화 < 24개의 눈동자 >(기노시타 게이스케, 1954) 시나리오를 각색한 것이었다. 그러나 표절작은 대종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원작과 차이를 만들기 위해 세 번의 시나리오 수정을 거쳤다. 그리고 아직까지 대종상을 받지 못한 뉴 페이스 최훈 감독에게 기회를 주고, 캐스팅은 ‘대종상이 사랑하는’ 배우들로 뽑았다. 그 결과 <수선화>는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녹음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작품상은 받지 못했다. 박행철은 자신이 작품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 빼앗겼다고 기억했다(<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같은 우성사 작품이다). 하지만 박행철의 기억과는 다르게 <비련의 벙어리 삼용> 역시 작품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최우수작품상은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홍의장군>에게 돌아갔다(변장호 감독은 <홍의장군>을 태권도영화라고 표현했지만, 이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상을 다룬 대작 사극영화이다). 변장호 감독의 구술은 한 줄 한 줄이 정말 흥미로운데, 무엇보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을 비롯한 ‘친구들’이 달려가서 “엊그제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의 상을 휩쓸어” 버리는 것에 대해 항의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 후, 한국영화제작업은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변경되면서 기존 영화사의 몇몇이 정리되고, 소수의 신생 회사들이 새롭게 인정받았다. 이중에서도 우성사는 가장 그 설립 시기가 늦었는데, 이를 가지고 기존 영화사 대표들이 몰려가서 텃새를 부렸다는 것이다. 이 ‘텃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구술자가 들려준 다른 내용의 구술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것이라 변장호 감독의 기억이 완전 거짓이나 과장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변장호 감독 구술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결말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홍의장군>이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데 대해 온 영화계가 반발하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우수작품상인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도 쿼터 하나가 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대종상에는 최우수작품상 외에도 쿼터가 주어지는 부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우수반공영화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워낙 이 부문도 경쟁이 심했기 때문에 영화제작자들은 머리를 잘 써야 했다. 각 영화사의 라인업을 들여다보면 일반적으로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을 만한 작품으로 문예영화(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 예산이 많이 들어간 대작 역사영화, 새마을운동을 강조한 휴먼 드라마류의 영화들을 한두 편 제작하고,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린 전쟁액션영화나 첩보영화(이는 007 유행의 영향도 있었다)를 한 편 정도 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앙정보부가 아주 막강한, 영화계에 못된 행세를 한 거지. 대종상에도 관여를 해가지고 뭐 뒤에서 압력해서 “이것 줘라” 이런 정도까지. 중앙정보부에서 파견 나온 사람이 영화계를 좌지우지 했다고 해도 맞는 정도로. … {그 압박 수단은 주로 검열…} 그렇죠. 검열 가지고 하는 거죠. 그때는 검열해서 우수영화, 좋은 영화, 또 외국 나가서 상을 타고 그러면 외국영화 쿼터를 하나씩 주고 그러니깐 그 사람들이 입김이 굉장히 셌다고 봐야죠. … < 지옥의 49일 >(이두용, 1979)이라는 이두용 감독의 울릉도 가서 찍은 영화가 있어요. 근데 그게 사실은 우수영화가 될 정도가 아닌데, 그게 반공영화라는 걸로 해가지고 그걸 압력을 좀 넣었다든지 뭐 어떻게 해가지고, 심사위원들한테 금일봉식으로 이렇게 나눠주고 어떻게 해가지고 그게 상을 탄 적도 있고 뭐 그런 예가 있어요. … 그렇게 하는 이유가 그 상을 타기 위해서 반공영화를 한 거죠, 그 당시에는. 그러고 이제 암암리에 “반공영화 좀 하나 해” {우수영화 타기 위해서?} 어어.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게 사실이에요. - 주종호 , 2017, 156~157쪽 < 땅울림 >(설태호, 1980)은, 대종상에서 다 휩쓸 줄 알았어요. 어떻게 됐어? 심사하는데 대종상에서, 박암 만 조연상 탁 타버렸어. 그리고 또 뭐 하나 타고 그랬어. 그러구 이 양반이 화가 났어요. 중앙극장 사장이거든? 그래서 중앙극장에서 약간 (상영)한 것 같아요. 근데 손님들이 잘 안 들지만, 군에서는 괜찮았어요. … 우리 대종상 못 탔잖아요? 다 되는 걸로 알았거든요? 근데 안됐어요. 근데 누가 됐는가 하면, 임권택 이 한 < 짝코 >(임권택, 1980) 있지요? <짝코>가 당선된 작품이에요. 그래가지고 거기서 이제 작품상 탔어요. … {결국에 제작자는 쿼터 받아서 외화 수입하고자 하는 마음이 좀} 음, 그게 앞서는 거예요. 다! 그땐 다 그랬어요. 경제적으로 {수지를 맞추려면} 그렇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데요. - 설태호 , 2010, 251~260쪽 <땅울림>은 제19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리고 있었지만, 남우조연상 하나를 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설태호 감독의 <땅울림>은 대영영화사(영화사 대표 김인동 은 중앙극장을 운영했다)에서 국방부의 후원을 받아 제작된 군민 합작영화로, 제작 기간만 1년이 걸린 대작영화였다. 국방부로부터 제작비 일부와 각종 무기, 탱크, 전차, 화약 등을 지원받아 영화의 스케일도 크고, 총격⋅폭파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비슷한 시기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 인천(오! 인천) >보다 볼 만하다!). 그러나 그 경쟁 상대가 <짝코>라니. 그저 운이 없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지만, 엄청난 제작비와 시간을 들인 대영영화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쉬운 결과였을 것이다. 이렇듯 모두가 당시 상황 속에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본인이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는 ‘나의 상’을 빼앗는 가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가 대종상을 받을 때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지만, 상을 겨냥해 만든 작품이 막상 그 상을 받지 못했을 때는 빼앗긴 것으로 표현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사실 누가 상을 빼앗았고, 어떻게 상을 빼앗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오늘날의 시점에서 당시 대종상을 둘러싼 구술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던 이들이 느꼈던 자괴감과 그 자괴감을 뚫고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그것을 모종의 암투로 인해 타인에게 빼앗겼을 때 느꼈을 좌절감 또는 그래도 ‘상을 받을 만큼의 작품을 만들었다’라는 자부심 사이에서 요동치는 이들의 양가적인 감정과 그 기억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이 시기 한국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의 문제로 연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 주1. 이영일의 해당 기사가 게재되기 전에 공개된 제2회 대종상 심사위원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강영수(대한일보 주필), 유건호(조선일보 편집국장),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유석진(의사), 최정희(작가), 김대현(작곡가), 남홍우(교수), 심태진(명성여중고 교장), 김정환(미술가), 신용성(경향신문 사회부장), 이용상(공보부 공보국장). 주2. 제3회 대종상 심사위원은 다음과 같다. 정충량(평론가), 유건호(언론인), 여석기(고려대 교수), 이청기(영화평론가), 김붕구(서울 문리대 교수), 양광남(중앙대 영화연극과 주임), 박권상(언론인),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이순근(교육평론가), 김진환(공보부 공보국장 서리), 강영수(언론인). 심사방식도 완전합의제로 변경되었으며, 기준 또한 이전보다 분명해졌는데 "①자기 목소리로 녹음하지 않은 연기 ②‘오리지널’이 아닌 음악 ③표절작품"은 수상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 ("6일에 대종상시상식", 《조선일보》, 1964. 3. 5. 5면 기사; "제3회 대종상 수상자 결정", 《동아일보》, 1964. 3. 7. 5면 기사 참조.) 주3. <비련의 벙어리 삼용>(변장호, 1973)을 의미한다. ※ 인용 구술 목록 한국영상자료원, 「호현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이채, 2005.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1: 최경옥⋅박행철⋅최승민⋅김갑의』, 한국영상자료원, 2008.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2: 임원식⋅이형표⋅이상현⋅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2008.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4권: 양춘』, 한국영상자료원, 2009.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이성철』, 한국영상자료원, 2009. 권용숙,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성근』, 한국영상자료원, 2010. 김승경,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설태호』, 한국영상자료원, 2010. 권용숙, 『2011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강범구』, 한국영상자료원, 2011. 김승경, 『2013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영효』, 한국영상자료원, 2013. 김승경, 『2014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2권: 박행철』, 한국영상자료원, 2014. 이정아,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5권: 변장호』, 한국영상자료원, 2016. 공영민⋅송영애, 『2017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70년대 한국영화계의 변동: 조관희⋅주종호』, 한국영상자료원, 2017.
침체 속에 거둔 70년대 이후의 수확 1970년대 이후의 양상은 1960년대와 비교할 때 양이나 질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점은 황정순이 <팔도강산>(배석인, 1967) 류의 국책영화에 기용되면서 그동안 호흡을 맞춰온 김승호 대신 희극배우 김희갑이 그 자리를 메웠다는 사실이다.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김수용, 1970),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등이 그런 예다. 노부부가 일본에 사는 아들의 초청을 받아 엑스포70 세계박람회를 관람(<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하거나, 전국 각지에 있는 자식들을 찾아 유람 여행하는 동안 변화된 한국의 발전상을 에피소드에 끼워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이렇게 달라진 제작 환경 아래서 황정순은 1970년대에 비극적인 수절의 이면을 그린 <홍살문>(변장호, 1972) 등 60여 편에 출연했다. 60년대에 비해 절반가량 줄어든 실적이다. 속편 등 유사 기획으로 작품성보다는 흥행 위주의 영화가 대세인 가운데 아들을 국가대표 골게터로 키웠으나 신장염을 앓게 되자 콩팥까지 이식해 주는 <어머니의 영광>(김기, 1973)의 생선장수, 벙어리 청소부 아들과 4남 2녀의 손자, 손녀들까지 돌보는 <슬픔이 파도를 넘을 때>(조문진, 1978)의 헌신적인 할머니, 동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불목의 위기를 화해로 풀어내는 <장마>(유현목, 1979)의 외할머니 등 여러 형태의 모성애를 보여 주었다. 이 가운데 연기력이 가장 돋보인 것이 유현목 감독의 <장마>였다. 화면을 줄곧 적시는 지루한 장맛비 속에 외손자와 나누는 콩깍지의 교감, 설움조차도 발효시킨 푸념 조의 독백은 선율처럼 느끼게 했다. 황정순 최고의 연기라 할 수 있다. [사진] 영화 <장마>에서 황정순과 김신재(오른쪽) 1980년대 이후의 출연작은 <피막>(이두용, 1980),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여자의 함정>(이경태, 1982), <가고파>(곽정환, 1984), <88 짝궁들>(서윤모, 1984), <장남>(이두용, 1984) 등 10여 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이두용 감독의 <피막>과 <장남>에서의 연기가 관심을 끈다. <피막>에서는 장손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무당을 불러 굿을 하게 하는 강인한 노마님의 모습이, <장남>은 핵가족시대 노인의 소외감이 묻어나는 표정연기가 일품이었다. [사진] 영화 <장남>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김일해 황정순은 이렇게 연극무대에서 다듬은 특유의 발성과 응집력을 무기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열녀문>(신상옥, 1962)으로 대표되는 한은진과 쌍벽을 이루며 1960년대 전후의 한국영화계에 대들보 역할을 했다. ‘탱크’라는 말을 들으며 다진 연기력 황정순은 1925년 8월 20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에서 난산 끝에 10남매 중 일곱 번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산모는 몸이 약한 마흔이 넘은 고령자였다. 딸이 백일이 지나 건강을 되찾자 황씨 일가는 시흥을 떠나 외가가 있는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정순이 세 살 때, 바다로 나간 아버지가 익사체가 되어 돌아오는 큰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긴 채무까지 짊어지고 험한 품팔이 일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어렵게 들어간 인천 박문여자중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정순은 이 무렵 프랑스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탐정소설 <아르센 뤼팡>에 빠졌다. 신출귀몰하는 괴도신사의 이야기다. 그러나 열네 살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본 ‘타잔’ 영화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황정순은 어느새 배우지망생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울에 사는 사촌 언니(황금순)를 믿고 가출한 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로 찾아갔다. 무턱대고 졸라 얻어낸 것이 대사 없이 처녀들 사이에 끼어 낄낄거리며 지나가는 <산송장>의 행인 역이었다. 1940년이었다. 그동안 딸의 ‘광대 짓’을 극구 말리던 노모도 제물에 지쳤는지 묵인했다. 그 사이 2차세계대전이 터졌다. 극단 ‘호화선’(1941년)의 연구생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못가 해체되는 불운을 겪었다. 해방 후에는 중앙방송국 전속 성우(1945년)가 되었다. 그녀의 본격적인 활동은 6.25 직전 극단 ‘신협’의 <뇌우(雷雨)> 공연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물꼬를 튼 연극 활동은 6,25 때 대구로 피란 온 ‘신협’의 <자명고>(1951. 1, 대구)와 <햄릿>(1951. 9, 대구), <맥베드>(1951. 10, 마산) 등에 출연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뒤이어 <은장도>(1953, 시공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5, 시공관) 등의 무대에 섰고, 56년에는 중앙국립극단 전속 단원이 되었다. 이즈음에 출연한 작품이 제1회 공연작 <원술랑>과 제2회 공연작 <뇌우(雷雨)>였다. 두 연극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5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150만명(1955년 기준)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는 두 연극에서 김유신 장군의 아내 지소 부인과, 노씨 집안의 하녀로 들어간 사봉 역을 맡았다. 특히 젊은 나이로 노파 역까지 소화한 <원술랑>의 지소 부인 역은 관객들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햄릿>(1957, 시공관) 등 여러 작품에서 공연한 바 있는 김동원은 몸을 아끼지 않은 그녀의 열정을 보고 단원들은 ‘탱크’라는 별명을 붙였다 (김동원, 『미수의 커튼콜』 2003, 태학사, 188쪽) 고 했다. 황정순이 1949년 영화 <파시>에 출연한 후 6년 동안 스크린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기 그녀는 이미 신접살림을 하는 새댁이었다. 1953년 3년의 열애 끝에 의사 이영복과 결혼했다. 이와 함께 이날 한꺼번에 두 딸과 아들 하나를 얻었다. 스물일곱 살 때였다. 하지만 결혼 30년 만에 남편이 먼저 가버렸다. 그의 연기를 받쳐준 것은 무대 경험을 통해 축적한 발성법과 육체언어로 인식한 연기동작, 투철한 직업의식에 따른 작품해석과 성격분석이었다. 이례적으로 현대적인 풍모와 카리스마를 보여준 <육체의 고백>의 서구적인 ‘밤의 여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삶의 질곡과 모진 풍상을 겪은 억척스런 아내이거나 엄격하면서도 인자한 어머니, 가난하지만 건강하게 살아가는 서민적인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사진]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황정순 황정순은 영화계에서 은퇴한 후 2006년 여배우로서는 처음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으나 이후 발병한 치매로 고생하다가 2014년 2월 17일 아흔 살의 나이로 400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46년에 이르는 영화의 삶을 거두었다. * 연도별 출연 편수는 통계에서 빠진 부분이 있을 것으로 판단돼 증가될 수 있음.
「검열서류를 통해 본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 I」에서 살펴보았듯이 <오대복덕방> 사건으로 한창 강화된 검열 속에서, <내것이 더 좋아>는 세 차례에 걸친 시나리오 검열과 실사검열 이후의 (조건부) 상영허가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대본의 상당 부분이 삭제되거나 수정되어야할 것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필름 자체에는 검열의 흔적이 그다지 기입되지 않았으며, 그럼으로써 서영춘 코미디의 ‘불온함’을 잘 드러낸 영화였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 이 영화는 구봉서와 서영춘이 공동주연을 맡고 있으나 서영춘이 여장남자 역할을 하면서 극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중심인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서영춘 코미디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영춘이 중심인물을 맡았던 <내 것이 더 좋아>는 ‘저속’을 검열 차원에서 단속했다는 의미에서, 매우 문제적인 영화였다. 한국영화사에서 1968년부터 1971년은 ‘섹스영화’가 ‘폭발’했던 시기였다. 특히 1969년에는 ‘섹스’가 한국영화의 주류로 부상했다고 할 수 있는데, 남성동성애를 다룬 김수용 감독의 <시발점>과 동성애적 표현 수위가 상당히 높았던 신상옥 감독의 <내시> 등이 이 해 제작된 영화들이었다. 또한, 이 해 이형표, 신상옥, 박종호는 외설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 제작되었던 <내 것이 더 좋아>는 동성애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제기하는 영화였다.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상경한 성춘(서영춘)은 가진 돈을 몽땅 소매치기 당한 뒤, 우연히 식당에서 만난 봉수(구봉서)에게 얹혀 살게 된다. 봉수는 성춘 만한 덩치를 가진 ‘여편네’와 함께 살다가 얼마 전 헤어진 상태로, 하숙집 아주머니가 맞선을 주선한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자 얼결에 성춘을 시골에서 올라온 ‘본 마누라’라고 소개한다. 이때부터 여장을 하게 된 성춘은 봉수와 함께 살면서 자신의 여성성을 마음껏 뽐낸다. 한편, 맞은 편 집에 살고 있는 부부 역시 여성 동성애 부부로, 두 쌍의 동성 부부가 엮이게 되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성춘은 부부 중 아내 역할을 하는 분임(고은아)에게 마음을 두고, 그녀에게 “정상적인 부부”의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결국 성춘은 분임과, 봉수는 강자(이금희)와 연결되면서 두 쌍의 동성 커플은 두 쌍의 남녀 커플로 ‘정상화’된다. 그런데 제작신고 시 제출했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는 이와 상당히 다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하루만 재워주겠다고 성춘을 집으로 데려 갔던 봉수가 먼저 성춘에게 “마누라”가 될 것을 제안하는 다음의 장면이다. #20. 봉수의 방 성춘: ... 근데 혼자 사세유? 봉수: 그래 한달 전에 내쫓았어! 난 여자라면 신물이 난다구! 여편네라구 어디서 바가지만 박박 긁구 귀찮구 재수없는 존재란 말야.. 하다가 성춘을 천천히 뜯어본다. 성춘: 뭐가 잘못 됐시유? 봉수: 너 밥도 잘한다고 했지? 성춘: 그쯤이야 누워 코풀기지 뭐유. 힛힛... 봉수: 그럼 너 내 마누라 안돼볼래? 성춘: 예? 마누라유? 제가유? 아이고메... 남자가 어찌 여자가 된단 말이예유? 봉수: 그럼 넌 아내로서 언제까지나 이 집에서 살아두 되는 거야 성춘: 허지만 난 가수가 될려고 왔지, 아내가 될려고온 건 아닌데유? 봉수: 야 여기 살면서 저 전축으로 열심히 배워서 가수가 되는 길을 더듬어 보는 거야! 성춘: 오라 그것도 좋은 생각이유! 봉수: 그럼 우리 간단히 초례나 올릴까? 성춘: 어떻게유? 봉수: 찬물 떠놓고 올리면 되는 거지. 예식장에 갈 필요가 없잖아. 성춘: 허지만 여자옷도 한 벌 없는데. 봉수: 옷이 왜 없겠니. 봐라 보구만 죽으라구! 하며 양복장 문을 드르륵 열어 보인다. 쪼옥 걸려있는 옷가지들. 봉수: 양장에 한복에 수두룩하다! 먼저 살던 여편네가 등치가 너만 했으니까 잘 맞을거야. 아무거나 골라 입으라구. 난 냉수 떠올게. 하며 나간다. 놓여지는 냉수 한 그릇. 밤이다. 정한수 떠놓고 마주서서 예를 올리고 있는 봉수와 성춘. 봉수가 절하면 성춘도 절하고. 봉수: 우리 두 부부 일생을 화목하게 지내도록 해 주시고 아들 딸 낳고 백년해로하게 해 주시옵소서. 성춘: 여봐. 아들 딸을 어떻게 낳아 봉수: 글쎄 우선 그렇게 해두는 거야. 자! 식은 끝났구.... 사랑의 선물로 키쓰나 한 번 하자! 하며 성춘의 뺨에 입술을 갖다댄다. 봉수: 아이 따거! 야 수염이나 좀 깎어라! 성춘: 정말 별꼴이야... 에이 퇴! 봉수: 여보 이제부터 우린 부부야. 남편 말 잘 듣고 착한 아내가 되라구! 이어지는 첫날 밤, 봉수와 성춘이 자고 있는데, “서로 다리와 다리를 엉키구 부둥켜 안고 자고 있는 두 사람의 꼴이 가관”이다. 다음 날 아침 봉수는 “그럼 다녀오리다”하는 인사와 함께 성춘의 뺨에 뽀뽀를 하고 출근하며, 퇴근하는 길에는 성춘에게 주기 위해 “케키집”에 들러 “케키상자”를 들고 나온다. 현재 남아 있는 영화에서는 이 장면들이 모두 삭제되었으며, 봉수가 성춘을 끊임없이 ‘이 새끼야’ 등으로 칭하고 구박하는 장면과 대사로 대치되었다. 두 사람이 애정을 표현하거나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장면 역시 성춘을 귀찮아하고 내보내고 싶어하는 봉수의 대사들로 바뀌는데, 검열 이후 재녹음된 이 대사들은 화면의 입모양과 동조되지 않는다. 한편, 맞은 편 집에 살고 있는 여성 동성애 부부에 대해서는 ‘부부’임을 암시할 수 있는 모든 단어들을 지워져 있다.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서는 처음 분임과 강자를 본 성춘이 부부냐고 묻자 봉수는 “그야 부부지만 예사 부부가 아니지”, “동성연애를 하고 있는 거야”라고 대답한다. 동성연애가 뭐냐고 묻는 성춘에게 “여자끼리 남편이 되구 여편네가 되구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거지.”라고 대답한다. (그림 1) <내 것이 더 좋아>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신 #20 분임-강자 부부의 성적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내는 이 대화는 영화에서 저들이 부부냐고 묻는 성춘의 질문에 “아니야. 둘 다 여자야.”라는 봉수의 대답으로 부정되고 축소된다. ‘부부’라는 표현이나 ‘남편’이라고 칭하는 분임의 대사 역시 ‘강자 씨’ 등의 일반적인 호칭으로 대치되며, 이들의 관계를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들도 대부분 삭제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애정 표현 또한 거의 삭제된다. 그런데 여성 커플의 다정한 장면이 대부분 삭제된 것과 달리, 남성 커플의 애정 행각은 좀 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성춘이 “여보 나 예쁘지? 난 당신이 좋아 죽겠어”라고 애교를 부리는 모습, 노래 자랑 대회에 나가 ‘코미디언 서영춘’의 레퍼토리 중 하나인 “삐빠빠룰라”를 부를 때 다정하게 봉수의 이름을 부르고 “여보”라고 칭하는 장면, 팔짱을 끼고 음식을 서로 먹여주며 데이트 하는 장면 등 이들의 애정이 드러나는 부분은 그대로 남겨진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오가는 서영춘의 행위가 ‘코믹함’을 위해 상당수 남겨질 수 있었던 반면 여성 동성애를 묘사하는 장면은 삭제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당대 검열이 구분했던 ‘불온’의 위계를 짐작해볼 수 있다. 다시 검열 서류로 돌아가 보자. 전술했듯이, 이 영화는 제작신고 시 시나리오 검열에서 제작불가 통보를 받았다. 무엇보다 남장여자, 여장남자를 등장시켜 동성애 커플을 다뤘다는 것과 여장남자의 ‘저속한 행동’이 문제가 되었으며,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고 돈을 안 내는 도주 및 사기 행각, 도둑놈의 도둑질 행위, 깡패들의 돈 갈취 행위 등도 불가의 사유로 지적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검열에 의해 여장 남자의 저속한 행위로 규정되어 삭제되어야 할 것으로 구체적으로 지적된 것들이 매우 일상적인 행위들이며 또한 이 영화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들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검열에서 지적한 ‘저속한 행동’에는 빨래하는 것, 시장보고 음식하는 것, “식모노릇”, 마사지 하는 것, 여장남자의 부부생활, 산부인과 소동, 얼굴을 할퀴는 등의 난동, 남장 여인 부부 침실에 뛰어드는 행위가 포함된다. (그림 2) 작성자 불명, 「극영화 “내 것이 더 좋아” 각본심의의견」, 1968.11.(추정) 이 심의의견서는 ‘씨나리오검토의견’이라는 제목이 명시된, 일정한 형식이 있는 문서 네 건(심사 날짜가 11월로 되어 있는 것 두 건, 심사 날짜가 12월로 되어 있고 ‘재심분’이라고 표기된 것 두 건)과 달리 수기로 쓰여 있으며 특정한 문서의 형식이 없다. 그리고 당부의견에서 영화 제작 ‘불가 또는 개작 통보’ 중 불가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두고 있다. 제작 불가 판정을 받은 한 달 뒤인 12월 10일, 제작자인 합동영화사의 곽정환은 27곳의 대사를 삭제하거나 삽입했다고 하면서, 시나리오의 재심을 요청했다. 현재 남아 있는 서류상으로 볼 때, 이 영화는 12월 14일 시나리오검토의견에서 또 다시 불가 판정을 받았으나 12월 23일 검토에서는 제작 ‘가’ 판정을 받았다. 재검토 이후 10일 간의 공백을 두고 다시 한 번 검토가 이루어진 것인데, 12월 26일 제작사에 통보된 「제작신고수리 및 시정사항통보」에 “12월 23일에 제출된 극영화 ‘내것이 더 좋아’에 대한 검토”라고 명시된 것으로 미루어, 이 문건은 12월 14일 이루어졌던 재검토에서 제작 불가 판정을 받은 이후 한 차례 더 수정이 이루어진 뒤 세 번째 시나리오 검열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12월 26일에 통보된 검열의 내용에서 지적하는 바 역시 그 이전에 적시되었던 불가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림 3) 공보부, 「극영화 “내 것이 더 좋아” 제작신고수리 및 시정사항 통보」, 1968.12.26.) 이 통보서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수정된 시나리오 중 12곳을 더 삭제하거나 시정하도록 요청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지적은 “동성끼리 부부를 가장하여 생활하는 설정 자체가 불건전”하기 때문에 “모든 장면 묘사는 어디까지나 가벼운 넌센스 코메디 스타일의 텃치로 건전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동성 부부관계의 애정 묘사 등 비정상적인 표현을 일체 삭제”하라고 주문한다. 또한 “여장남자의 저속하고 추잡한 모든 장면이나 대사를 건전하게 시정”하고 “동성부부가 서로 성감을 느끼는 듯한 일체의 묘사를 삭제하거나 달리 시정”하도록 지시한다. 이는 곧 동성애는 그 자체가 “불건전”하고 “비정상적”인 것이므로, 삭제되어야 하거나 혹은 “가벼운 넌센스 코메디 스타일의 텃취”로 그려질 때만 “건전”하게 취급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의미인 셈이다. 즉, ‘동성 부부’라는 설정 자체가 없어지면 이 영화의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제작이 불가능한데, 제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동성애자 부부’임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가벼운 넌센스 코메디 스타일의 텃취”를 통해 이 영화의 불온함을 가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벼운 넌센스 코메디”의 웃음 유발 장치로 활용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요소들은 ‘저급’하므로 삭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검열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 지키면서 코미디영화의 형식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따라서 이 영화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딜레마 속에 놓인 이 영화가 살아남은 방식이다. 앞서 언급했던 내용들을 포함하여 재검열을 위해 자진 삭제하였다고 제시한 부분을 제외하고, 제작신고 수리 시 시정사항으로 통보된 내용들, 그리고 필름 검열합격 후 삭제 또는 단축할 제한사항으로 지적된 26개의 장면 또는 대사 대부분이 필름에 남아있다. (그림 4) 공보부, 「장편영화 “내 것이 더 좋아” 검열합격」, 1968.12.31. 서류에 따르면 심지어 이 영화는 사전제작 위반작이었는데, 1차 개작 이후에도 두 차례에 걸친 시나리오 검열과 실사 검열을 거치면서 “불건전”하고 “비정상적”이라고 지적되어 ‘시정’ 혹은 ‘삭제’되어야 했던 부분들은 대부분 서류상으로만 삭제되었던 것이다. 임검까지 가능했던 당시의 검열 속에서 ‘저속’하므로 삭제되어야 했던 이 영화는 삭제되지 않은 ‘저속’함으로 남은 경우였다. 서영춘 코미디와의 비교를 위해 이 영화와 거의 동시기에 제작되었던 구봉서의 코미디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 후반 구봉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남자와 기생>(심우섭, 1969)이나 <남자 식모>(심우섭, 1968), 그리고 <남자 미용사>(심우섭, 1968)는 검열에서 훨씬 관대한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들에서 구봉서는 여장을 하고 시장을 보며, 청소와 식사준비, 바느질 등의 집안일을 도맡고 마사지를 하기도 한다. 특히 <남자와 기생>에서 구봉서는 여장을 하고 요정에서 남성들에게 술과 웃음을 파는 기생 역할을 맡는다. 그럼에도 검열에서 구봉서의 코미디는 서영춘의 코미디와 결이 다른 것으로 취급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구봉서의 ‘남자 시리즈’는 검열에서 대체로 ‘건전’하며 ‘명랑’한 ‘풍자 코미디’로 평가 받았다. <남자기생>은 제목이 “너무나 직선적인 퇴영적 인상”이 강하므로 “건전한 이메지의 것”으로 개제하라는 지적에 따라 <남자와 기생>으로 변경되었고 그 외 섹슈얼리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들에 ‘주의’를 요하면서 “각별히 저속하지 않게 묘사”할 것을 주문하는 정도가 검열에서 지적된 내용이었다. (그림 5)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극영화 “남자 기생” 각본심의결과통고서」, 1968.9.14. <남자 식모>에서는 여성 식모들을 비하하거나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듯한 발언들, 예를 들어 “식모 주제에”, “예쁜 식모라도”, “여자 식모들 살맛이 나는데” 등의 대사 등을 삭제하라고 지시한 것을 제외하면, 제명에 대한 언급 정도가 검열에서 지적한 사항이었다. “제명은 일기경박하고 저속한 감 불무하나 작품자체가 코메디텃취이고 주인공이 남성이기 때문에 원제명을 인정”한다는 것 정도의 언급이 있을 뿐이다. (그림 6)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극영화 “남자식모” 각본심의결과보고서」, 1968.3.29. 1967년까지 ‘씨나리오심의의견서’ 또는 ‘각본심의의견서’였던 사전 시나리오 검열서류는 1968년 초 ‘각본심의결과보고서’를 거쳐 1968년 4월 이후 ‘각본심의결과통고서’로 변모했다. 한편, <남자와 기생>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남자기생 태호(구봉서)가 요정에서 술 마시는 남자들을 앞에 놓고 춤과 노래로 풍자하는 대목인데, 검열에서 일부 삭제되었다. 삭제된 부분은 “네놈들 때문에 우리들은 돈벌이 잘 되지만 너희들도 국가를 위해 무언가 할 생각을 해 보아라”라는 대사였는데, 노골적으로 교훈을 설파하는 구절이 삭제된 것이다. 검열 서류에서 따로 적시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 대사가 삭제된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코미디 영화에서 ‘국가’를 거론하는 것 자체의 ‘불온함’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진 삭제의 구절은 차치하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봉서 코미디에 대한 지적들은 서영춘 코미디가 ‘저속함’을 이유로 검열에 의해 제지되었던 것과 다른 결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즉, 구봉서가 영화에서 여장을 하거나 여자들의 직업(<남자 식모>, <남자 미용사>)에 도전하는 것은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타락한 사업가’나 ‘일부 유한계급의 여성들’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므로 대체로 “건전”하고 “명랑”한 것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반면, 서영춘의 여장은 이와 다른 위치에 놓인다. <내 것이 더 좋아>의 마지막 부분, 봉수와 크게 싸우고 집을 나가는 장면에서 성춘은, 내가 여태 갈 데가 없어 안간 줄 알아유! 너 인생이 불쌍해서 못갔다! 네 놈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여자 구실하다 그 좋은 육체마저 요렇게 갈비처럼 살이 쏙 빠졌다! 먹고 싶은 오징어 다리 하나 안 사먹고 하고 싶은 가수 한 번 못하고 너 구린내 나는 양말쪽 깁느라고 허송세월만 했어! 라고 화를 낸다. 생계를 위해서만 여장을 한 것이 아니라 봉수에 대한 연민과 애정으로 함께 살고 있었음을 고백한 성춘의 문제적 위치는 ‘남자시리즈’의 구봉서의 행위와 달리 ‘위험’하고 ‘불온’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성춘은 분임과 있는 장면에서는 남성성을 과시하지만, 봉수와 둘만 있는 자리에서는 항상 풀 메이크업에 브래지어까지 갖춰 예쁜 옷을 차려 입고 목소리도 가냘프게 변조하는 등 여성성을 적극 드러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느끼는 대상도 의미심장하다. 남성의 역할을 맡았던 이들끼리, 여성의 역할을 맡았던 이들끼리 사랑을 느껴 파트너를 바꾸는 마지막 씬은 ‘정상화’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동성애적 코드이다. 우여곡절 끝에, 삭제하라는 모든 부분을 삭제하지는 않은 채 개봉된 이 영화에는 검열로도 채 다 삭제하지 못한 ‘불건전한’ 성적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이영일은 한국영화전사 (2004)에서 1960년대 후반이 “저속취향의 풍조”를 보이는 “이상 현상”의 시기였다고 규정하면서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가 “서민대중 관객의 저속취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영일이 건전한sound 코미디로 언급했던 것이 사회적 교훈, 경구를 풍자적으로 그린 코미디들임을 감안할 때, 1960년대 후반 코미디가 ‘저속취향’이라고 단정한 이면에는 ‘풍자’하거나, 적어도 ‘풍속’을 그리는 ‘건전’한 코미디가 코미디의 위계상 상위에 놓인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당대를 살았던 평론가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영일을 비롯한 당대 평론가들이 이 시기의 코미디를 ‘저속취향’이라고 규정한 것은 이 코미디들이, 당대 검열의 언어를 통해 말하자면, 국가가 규율한 ‘명랑’과 ‘건전’으로 수렴되지 않는다고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서민대중’의 ‘취향’을 형성할 정도의 대중적 파급력과 일종의 장르성을 가진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재고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서영춘이 영화에서 담당했던 역할들이 주로 시골에서 올라온, 성적 정체성이 모호한 노동계급의 남성이었다는 점은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서영춘 코미디의 특성은 그가 맡은 캐릭터들의 성적, 계급적 위상에서 잘 드러난다. 먼저, 서영춘의 젠더 형상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는 경우(<여자가 더 좋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부장으로 복권되면서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결말(<내 것이 더 좋아>)이라고 해도, 서영춘의 코미디에는 ‘시각적’으로는 여성적인 포지션을 포기하지 않는 이른바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그로테스크한 신체’가 중심에 놓인다. 서영춘의 ‘그로테스크한 신체’는 회복되지 않은 ‘남성성’과 포기되지 않은 ‘여성성’의 기묘한 공존을 시각적으로 전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적 모호함은 특히 1960년대 후반이라는 경직된 시대에 맞닥뜨렸을 때 한층 더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서영춘의 코미디가 직업, 젠더, 섹슈얼리티, 가족과 같이 사회적으로 규정된 규범 및 영역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독해될 여지를 남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구봉서의 코미디가 ‘건전한’ 상식을 바탕으로 ‘남성성’을 재설정하면서 종결될 때, 서영춘 코미디는 ‘도착적’ 남성성과 성적 에너지를 드러냄으로써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서영춘 캐릭터의 계급성과 이로부터 비롯된 언어적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술했듯이 서영춘은 주로 시골에서 상경하여 곤란에 처한 구직자 역할이나 실직자, 수위, 중국집 배달부, 세탁소 직원 등 도시 하층계급의 저임금 노동자 역할을 맡으면서 비속어, 욕설, 그리고 욕망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한 날 것 그대로의 언어를 사용했다. ‘저속’한 언어를 활용한 코미디는 ‘건전’한 코미디가 줄 수 없는 해방감과 일탈의 만족을 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다소 뻔뻔할 정도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비속한 언어로 감정을 표출함으로 인해, 서영춘이 맡은 캐릭터들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가거나 간혹 골탕을 먹게 될 때도, 불쌍한 느낌과 연민을 자아내기 보다는 관객들에게 통쾌한 느낌을 주었다. 굳이 비교해서 말하자면, 동일시와 위안의 즐거움이 구봉서 코미디의 몫이었다면, 가학과 위반의 쾌감이 바로 서영춘 코미디의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요컨대, 서영춘의 코미디는 성정체성이 모호한 여장 남자, 시골에서 올라온 노동계급의 남성, 비속어와 욕설, 성적 뉘앙스가 담긴 저급한 언어의 사용 등으로 ‘저속’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정서의 규율’로서의 ‘명랑’과 ‘건전’을 벗어나는 위반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서영춘의 “그로테스크한 신체”와 하층 계급 남성의 ‘상’스럽고 생생한 언어는 “성스러운 것, 두려운 것, 권력, 지배체제”로부터의 “해방” 1) 을 선사해주는 것이자 ‘불온한’ 공범자로서의 웃음을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서영춘의 코미디 스타일은 검열을 통해 ‘저속함’으로 규정되었으나 시대가 강제했던 ‘명랑’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명랑’을 구현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으로써 그로테스크한 웃음과 위반의 쾌락을 근간으로 했던 서영춘 코미디는 ‘명랑하라’는 시대적 명제와 더불어 공생할 수 있었다. 1) 게리 솔 모슨, 캐릴 에머슨 지음, 바흐친의 산문학 , 2006. * 참고문헌 게리 솔 모슨, 캐릴 에머슨 지음, 오문석, 차승기, 이진형 옮김, 바흐친의 산문학 , 책세상, 2006. 박선영,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명랑’과 ‘저속’ - 서영춘코미디의 불온함과 검열의 문제」, 한국극예술학회, 한국극예술연구 51집, 2016.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 도서출판소도,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