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증
- 감독
- 이상빈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박영규, 이주명, 임종민, 정윤희, 지연주, 신재훈, 최재영, 김유신, 이종서, 신중섭, 이단비, 우수정, 박효진, 박정근, 공대유, 이윤선, 노수람, 이기웅, 아오이 츠카사, 임미주, 정지은, 강길우, 연지해, 강희중, 한동희, 나소이
이와사키 아키라 환영회 중 문예봉(좌)과 한은진(우)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영화의 발흥 이래 재현의 사실성에 대한 추구는 극장가의 화두로 떠올랐다. 카메라가 구현해 낸 재현의 정밀성은 실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이 늘어나면서 선행매체인 연극 역시 사실적 환영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연극과 영화가 하나의 공간을 함께 점유하며 관객을 나눠 가졌던 식민지 조선의 극장 속에서 그 영향관계는 훨씬 긴밀했을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획득한 ‘여배우’는 재현의 사실성에 대한 식민지 조선 극장문화의 지향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존재였다. 재래의 관습이었던 여형배우는 여배우의 등장과 함께 전근대적 유습으로 낙인찍혔다. 이것은 배우와 배역의 생물학적 동일성이 여성성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어 근원적인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였다. 무대와 스크린의 주역으로 급부상한 여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공의 시선 속에 노출된 육체의 감각적 즉물성이야말로 여배우의 지위를 굳건한 지반 위에 올려놓은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든 시각적 쾌락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었으며, 여배우들의 육체는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 앞에서 품평의 대상으로 격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욱이 여배우들을 향한 응시는 극장 속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모든 이들은 직업적 영역에서의 공공적 삶뿐 아니라 일상을 영위하는 개인으로서 사적인 삶 또한 살아간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표현이 함의하듯 두 영역의 분계선을 명확히 하는 일은 누구라도 품을 법한 보편적 욕망이겠지만, 유독 여배우에게만큼은 직업과 일상의 분리가 허용되지 않았다. 우수진이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여배우가 문화적으로 ‘ 구성 ’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주1 육체를 통해 현시된 여배우의 존재감은 재현의 사실성을 담보했지만, 그로 인해 생겨난 강력한 동일시의 기제와 이에 기반한 극장 체험의 여파는 관객들로 하여금 허구적 배역과 실제 배우의 삶을 혼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배우의 사생활은 ‘스캔들’의 형식으로 소비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여성의 사회활동을 억압했던 전통적 관념이 맞물린 결과, 여배우의 ‘사생활’은 단순한 관심거리의 수준을 넘어 도덕적 단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 사회에 여배우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던 이월화 또한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배우 활동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웠던 그는 기생과 여급 일을 병행한 바 있다. 이월화에게 사치와 허영심이 강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워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편 토월회가 해산한 후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던 복혜숙 은 ‘비너스’라는 카페를 직접 운영하면서 마찬가지로 비난의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좌) 이월화 (사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우) 복혜숙 특히 성욕이 강한 여성이나 신여성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경우, 사생활 또한 문란할 것이라는 의혹의 시선에 둘러싸였다. 이러한 시선은 비단 식민지 조선의 배우들뿐 아니라 할리우드의 영화 스타들에게도 투사되었는데, 그들의 사생활을 다룬 가십성 기사들이 신문 연예란의 단골 메뉴였던 것은 대중적 관심의 향배를 잘 보여준다. 여배우들은 수없이 애인을 갈아치우는 왕성한 남성 편력을 지닌 이들로 지목되었으며, 사소한 이유로 이혼을 일삼는 부도덕한 존재라 낙인찍혔다. 물론, 스타의 화려한 삶과 막대한 재력에 대해 찬탄하는 시선도 엿볼 수 있다. 전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던 그들의 천문학적 주급이나 으리으리한 대저택은 물론이고 사치스러운 취미활동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열악한 조선의 연예계에서 여배우는 헐리우드 스타와 같은 동경의 대상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즉, 여배우는 자신의 힘으로 직업적 성취를 이뤄낸 당당한 여성이 아닌, 생활난에 시달리는 가련한 존재이거나 끝내 ‘첩살이’ 신세를 피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을 지닌 이들로 인식될 따름이었다. 여배우의 전도, 남배우의 전도- 이것이야말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할 문제이다. 오늘날 만사가 초창 혁신기에 잇는 조선에 잇서서 더 크게 더 탐탁하게 바랄 수는 업다고 치드라도 인생의 흥망을 기약하는 청춘기에 잇서서 다시 돌이키기 쉽지 않은 직업에 몸을 붙이게 되는 때 장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없을 수는 없다. 우선 여배우 여류 무용가가 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 대답은 극히 간단하다. 『아무래도 시집을 가야지』 여자로서는- 더욱히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하기가 어려운 조선의 여성에게는 마지막 닥치는 문제는 반드시 이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에게로 가게 될까. 『첩!』 그것이야 참으로 참으로 예술가를 극도로 모욕하는 말이다. 『재산가의 부인!』 그것은 좋기는 하나 졸연히 얻어 걸리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으니 재산가치고 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여배우니 무엇이니 하는 동안에 어느덧 이십이 넘고 나서 사면을 둘러보아야 모두가 기혼 남자들뿐이다. 『그러면 착실한 신사』 아직도 조선서는 소위 착실하다는 청년 쳐 놓고는 사리 잡힌 가정 쳐 놓고는 배우 안해이나 여배우 며느리 얻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머리 길게 기르고 누더기 가튼 양복을 입고 다니는 같은 경우 같은 식경에 도취되어 있는 예술가이나 그렇지 않으면 처음에는 펄펄 뛰다가도 나중에는 하는 수 업시 『하는 수 있나. 사랑만 해 주면 그만이지. 첩 노릇이라도 해야지!』 눈물겨운 탄식이나 나아올 것이다. 이미 여배우 노릇을 하든 사람이 그러하였으며 장차 나아올 여배우의 운명이 그러하다. 이것은 여배우 자신의 잘못도 아니요 그 단체 그 사회의 죄도 아니다. 오직 조선의 민도가 일반의 머리가 아즉도 예술- 더욱히 무대예술에 존경을 갖지 못한 탓이다. 그러함으로 적어도 배우 노릇을 하고자 나서는 분은 우선 이담에 크게 고려를 하야 사랑에서 사랑으로 자유스럽게 날아다니랴는 무거운 결심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더라도 상당한 배우자가 나기까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기막힌 결심을 갖든지. 『잘 놀면 그만이지』 여배우 노릇을 부자의 눈을 호리는 수단으로 알고 무대를 매음부의 전람회 같이 알든지 이 세 가지 길의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29 』, 1035쪽 이춘풍, “ 생활로 본 그들의 내막 - 배우, 레뷰껄, 딴써 등등 ”(5), 《중외일보》, 1929. 11. 12. 이춘풍이 연재한 글은 사뭇 직설적이면서도 신랄하다(‘이춘풍’은 이서구 의 필명으로 추정된다). 그는 여배우를 비롯하여 여류 무용가나 레뷰걸과 같은 여성 연예인들의 생활상을 자조섞인 어조로 소개했다. 그의 글 속에서 여성 연예인의 생활상은 사실상 성노동자의 삶과 유비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자립하기 어려운” 조선 여성의 처지에서 결혼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재산가의 부인”이 되자니 그들은 대부분 조혼을 해서 본부인이 있는 상태이고, “착실한 신사”에게 시집가자니 집안의 반대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나마 여배우들의 사정을 이해해 줄 법한 이들은 “가난한 예술가”들뿐이겠지만, 그게 싫다면 누군가의 “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여배우들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서구는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한 식민지 조선 사회 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던 여배우의 처지를 동정한다. 그가 보기에 결국 여배우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뿐이었다. 방종한 여성이 되어 자유를 구가하거나, 결혼 자체를 포기하거나, 아예 대놓고 “부자의 눈”을 홀리기 위해 극장을 “매음부의 전람회”처럼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영화 < 아리랑 >(나운규, 1926)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일선 은 배우 활동을 오래 이어나가지 못하고 능주(전남 화순군) 지역 부호의 자제인 양승환과 결혼하게 된다. 이른바 ‘신일선당’이라고 불렸던 열성팬들은 그의 결혼 소식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정성껏 행복을 빌어 주었다. 이는 신일선이 <아리랑>에서 쌓아올린 이미지와도 관련된 반응일 것이다. 신일선은 주인공 영진( 나운규 )의 여동생 영희 역을 맡았는데, 호색한의 위협을 받는 순진무구하고 어린 여동생의 모습이 관객들의 동정심을 유발했기에 그러한 이미지가 배우 신일선에게도 겹쳐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다만, 양승환에게는 본처가 있었기에 결국 신일선도 ‘첩살이’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게다가 신일선이 가난한 집안살림을 돕기 위해 친오빠의 강권으로 양승환과 결혼하게 된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정 여론이 빠르게 확산되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영화계를 떠났지만 신일선의 근황, 특히 그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견뎌내고 있다는 소식이 지속적으로 전해졌던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신일선 이야기는 여배우의 박복한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 사례로 거론되었던 것이다. 신일선 반대로 사랑을 쟁취하려 하는 여배우의 적극성은 어디까지나 남성 편력에 불과하다고 치부되는 데 그쳤다. 잔인하게도 여배우의 사랑이 진실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사 사건’과 연관되었을 때, 즉 죽음을 담보로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했다. 조선의 유명 성악가이자, 토월회에서 배우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던 윤심덕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다수의 연애 스캔들에 휩싸여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지나, 극작가이자 연극운동가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실종된 이후 ‘낭만적 사랑’의 화신으로 재규정되기에 이른다. 영화 < 아리랑 후편 >(이구영, 1930)에서 신일선의 뒤를 이어 ‘영희’ 역으로 출연했던 임송서 역시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음독자살을 택한 바 있다. 미수 사건에 그치진 했지만 이애리수 의 ‘정사 사건’도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유행가 가수이자 배우로 인기가 높았던 이애리수는 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배동필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약속했으나, 배동필의 부모는 여배우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며 극력 반대했고, 결국 그들은 다음 생에서라도 못 다한 사랑을 이루고자 동반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들의 소식은 신문 지상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결국 배동필의 부모가 이애리수의 연예계 은퇴를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훗날 배동필의 본처가 찾아오게 되자 위협을 느낀 이애리수는 재차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으며, 작고할 때까지 자신의 연예계 활동 이력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고 전해진다. (좌) 윤심덕 (우) 이애리수 이처럼 여배우를 둘러싼 시각은 냉랭했으며, 때로는 음험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배우들은 대상화된 육체의 지위에 머물기보다 예술의 주체 로 거듭나기 원했으며,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담론장에 기입하기 시작한다. 변화의 전조는 1930년대에 접어들며 점차 가시화되었다. 1931년에는 ‘Y.Y생’이라는 필명을 내세운 필자가 《동아일보》를 통해 “여배우 언 파레이드”라는 제목으로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을 소개하는 장문의 글을 연재한 바 있다. *주2 비슷한 시기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무대 스타- 순방기”는 매 회차마다 남성 배우와 여성 배우를 한 쌍으로 묶어 주요 활동이력과 연기의 고유한 스타일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1934년에 서광제 는 《조선중앙일보》 지면을 빌려 헐리우드의 여배우들을 다룬 “세계영화계 행각”을 연재했는데, 이 글들은 여배우를 가십의 대상으로 다루기보다 예술의 완성을 위해 정진하는 직업적 전문인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춘풍이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여배우는 이제 공공적 담론장에서 ‘예술가’로 조명받게 된 것이다. 특히 ‘여배우’가 타고난 외형이나 신체적 조건을 전시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기예’를 연마하기 위해 기울여 온 노력을 전경화 한다는 점에서 시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여배우들의 목소리가 인터뷰나 대담을 통해 노출되는 사례도 빈번해졌다. 신카나리아 는 유명 여성인사들의 새해 포부를 밝히는 지면을 통해 장차 연극을 연구하며 일생을 배우로 살아가리라 다짐했으며, 새해에는 연극 이론서를 집중적으로 독파할 것이라 밝혔다. *주3 1933년에 《매일신보》가 개최한 신년 좌담회에 참석했던 이경설과 이애리수는 여배우의 사생활이 난잡할 것이란 세간의 추측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여배우가 오히려 남배우들보다 “책임 있게 일을 잘 한다”고 주장했다. *주4 최초의 조선어 발성영화 < 춘향전 >(이명우, 1935)의 주역이었던 문예봉 은 발성영화에 좀 더 “적합한 억양”을 연구하겠다고 밝혔으며, 극예술연구회의 대표적 여배우인 김복진 또한 “어린애 역부터 늙은이 역까지” 어떠한 역할이 주어지더라도 철저히 연구하여 제몫을 해낼 것이라 다짐했다. *주5 1937년에 《동아일보》를 통해 장기간 연재된 “스타의 기염” 시리즈에서도 여배우들의 포부를 엿볼 수 있다. 차홍녀 , 한은진 , 남궁선과 같은 연극배우는 물론이고, 문예봉, 김소영 을 비롯한 영화배우들까지 총망라된 이 시리즈에서 여배우들은 자신이 곧 예술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좌) “여배우 언 파레이드”에서 다뤄진 복혜숙 (사진: “ 여우언파레이드 영화편 (9) 인기도 한떄런가 복혜숙양 ”, 《동아일보》, 1931. 8. 9.) (우) "스타의 기염"에서 다뤄진 남궁선 (사진: “ 스타의 기염 (2) 그 보푸계획자랑야심 극은 일생사업연극인 남궁선 ”, 《동아일보》, 1937. 11. 25.) 같은 맥락에서 < 미몽(죽음의 자장가) >(양주남, 1936)의 한 장면에 주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발성영화로 알려진 이 작품의 주연배우는 당대의 최고 인기스타였던 문예봉이었다. <미몽>의 주인공 애순(문예봉)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가정까지 버렸던 인물로, 그의 일탈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어찌보면 이른바 ‘신여성’에 대한 처벌 서사처럼 보이는 작품이지만, 실제로 <미몽(죽음의 자장가)>을 둘러싼 해석의 결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래의 쇼트들은 내연남인 창건과 함께 무용 공연에 참석했던 애순이 박경림( 조택원 )의 독무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구성한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미몽(죽음의 자장가)>에서 온전한 형태의 시선 편집(eyeline match)이 거의 유일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시선의 주체와 시선의 대상을 연속적으로 배치하게 될 경우, 시각 주체의 욕망과 그것이 투사된 대상의 정체를 가리키게 된다. 그렇다면 <미몽(죽음의 자장가)>에서 이 장면만큼 주인공 애순의 욕망이 직설적으로 노출된 순간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몽(죽음의 자장가)> 중 이 장면이 문제적인 것은 시선의 엇갈림을 통해 식민지기의 극장 속에 착종된 욕망 들을 압축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즉, 객석에 앉은 애순의 모습은 시선의 주체인 동시에 시선의 대상으로서 포착된다. 시선의 주체로서 애순은 무용가의 춤에 대한 애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주변 남성들의 시선 속에서 대상화된 존재로 재현되고 있다. 더욱이 그들의 응시는 창건이 자리를 비운 직후부터 보다 노골적으로 이어진다. 더욱이 객석에 앉은 애순을 향한 남성들의 응시는 부재하는 창건의 자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이 남성의 울타리를 벗어날 경우, 무제한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남성들의 왜곡된 시선은 애순의 주체성을 훼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순은 시각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며, 잡담을 주고받는 산만한 남성들과 달리 무용가의 춤에 집중하면서 극장의 본래 취지에 걸맞는 ‘이상적 관객’의 형상을 드러낸다. 이 장면이야말로 <미몽(죽음의 자장가)>이 지닌 미묘한 해석의 결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데, <미몽>은 ‘신여성’을 부정적 표상으로 낙인찍고 대상화하려는 사회적 시각을 보여주면서도, 이러한 시각으로 결코 포합될 수 없는 여성의 주체성 또한 재현해 내기 때문이다. ‘애순’의 모습처럼 식민지 조선의 여배우들은 그들을 둘러싼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폭압적인 시선을 예술적 주체를 향한 주목으로 바꿔놓기 원했던 이들이었다. 사회의 무지함에 대해 항변하는 대신 그들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겸허히 채우고자 했으며, 극장문화의 공진화적 발전을 목표로 삼았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영화가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한 바 있다. 기계장치의 냉혹한 메커니즘 속에 짓눌린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인간성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지만 영화를 통해 해방의 서사를 발견한다. 즉, 배우는 카메라라는 기계장치 앞에서 끊임없이 시험받게 되지만, 그 가혹한 테스트를 의연하게 버텨낼 뿐 아니라 적극적 상호침투를 통해 가장 인간다운 형상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대상화된 육체의 지위를 넘어 예술적 주체로 발돋움하기 원했던 식민지 조선 여배우들의 인정투쟁이야말로, 영화를 현대사회의 냉혹한 논리에 ‘복수’를 가하는 장치라고 보았던 발터 벤야민의 생각과 상통하는 대목이 아닐까? *** 주1. 우수진, 「여배우의 사회문화적 구성과 이월화」, 『현대문학의 연구』 82, 한국문학연구학회, 2024. 주2. ‘Y.Y생’은 김유영의 필명으로 추정된다. 주3. 기사, “직업여성의 가두에서 맛는 1931년 - 신산한 그들의 생활에서 새해의 출발을 보자!”, 《조선일보》, 1932. 1. 2. 주4. 기사, “직업여성의 좌담회”, 《매일신보》, 1933. 1. 3. 주5. 기사, “백화요란한 음악, 미술, 극, 영화, 무용 각계의 성관 - 예원에 활약하는 여성들”, 《동아일보》, 1936. 1. 1.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지루한 영화를 보는 것만큼 우리를 소외시키는 경험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몰입감과 소외감을 동시에 느끼도록 함으로써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고, 길을 잃게도 하며, 끝내 좌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혼란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두 가지 중 하나이다. 첫 번째 스토리를 해석하는 인지 활동에 몰두하는 것, 두 번째 혼란을 유발하는 퍼즐을 풀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혼란 자체를 경험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혼란에 투항할 때 발생하는 쾌감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다. 혼란의 출구를 찾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나, 때로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보는 것이 즐거움을 제공할 수도 있다. 방향감각의 상실은 모 아니면 도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가 어떤 종류의 혼란에 처해 있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영화의 성취를 이해하는 데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해피엔드 >(1999)는 이와 같은 관람의 속성 안에서 혼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엿보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외환위기가 조성한 환란의 무드 아래 실업과 파산, 자멸의 사연들이 곳곳에 넘쳐나고 세기말의 불확실성과 새로운 세기에 대한 불안이 교차하던 20세기 말 한국 사회의 공기를 배음으로 깔고 있다. 성별 위계질서의 변화, 여성 권리의 부상, 근대적 국가 정체성과 남성성에 대한 회의(懷疑), 가부장제의 위기 따위로 요약되는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징후들을 드러낸다. 영화의 도입부는 불륜과 추리, 애틋한 로맨스를 골자로 하는 대중 소설에 탐닉하는 남자 서민기(최민식)를 등장시켜 두 가지 중추적인 플롯 포인트를 설정한다. 플롯의 핵심을 이루는 사건은 민기의 부인인 최보라(전도연)와 그녀의 애인 김일범(주진모), 그리고 민기의 뿌리뽑힌 관계 사이에서 벌어진다. 민기는 (아마도) IMF의 여파 속에 실직한 뒤 딸을 돌보고 공원에서 소설을 읽는 한가로움에서 보람을 느끼는 전직 은행원이다. 민기의 아내 보라는 어학원을 운영하는 성공한 커리어우먼으로 군대에 징집되어 몇 년 전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 일범과 혼외관계에 빠져 있다. 처음에는 보라와 민기를 묶는 불운한 결혼을 제외하고는 인물들이 거의 교차하지 않는다. 보라와 일범은 열정적인 연애와 사진 촬영에 몰두하면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민기는 자신의 도피처인 헌책방에서 매일 탐정 소설과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에서 성취감을 느낀다. 민기가 탐닉한 세계는 보라와 일범이 누리는 세계와 닮아있는데, 우리가 영화를 통해 전달받게 될 사연은 바로 이 두 장르(탐정 + 로맨스)를 결합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서로에게 매료된 불륜 커플이 섹스 이상의 것을 갈망하는 동안 민기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면서 점진적으로 파국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간다. 조용한 탐정의 역할을 수행하던 민기가 평정심을 잃게 되는 이유는 보라가 일범을 만나기 위해 아이에게 수면제를 탄 우유를 먹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이다. 민기의 상처 난 가부장의식이 발동하는 순간 살의도 피어난다. <해피엔드>의 전체적인 톤은 무기력하고 조용히 인간을 갉아먹는 메스꺼움 같은 불안, 때때로 폭발적인 폭력으로 표출되는 비극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극중 보라가 지저분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연이 캐릭터에 부여한 감정적 깊이 때문에 우리는 그녀에게 동정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보라는 항상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민기는 금욕적이고 심지어 시들어있는 모습이다. 단란한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있지만 보라는 새로 찾은 사랑의 포로가 되었고, 일범은 두 번째 이별을 상상할 수 없다. 민기는 이미 파탄이 난 부부관계에 큰 미련이 없지만, 가정을 파괴할 생각이 없으며 보라가 가족의 안위를 해칠 행동을 했을 때 분노한다. 어떤 캐릭터도 완전히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고, 그들의 행동이 완전히 정당화되지도 않는다. 모두 현실에서 벗어나 섹스와 혼외정사, 사진 또는 책을 통해 자신만의 위안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인물들이 거짓에 의존할 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은 거짓에 의해 자극을 받는다. 하지만 환상(거짓)에 오래 빠져들수록 현실의 위기는 깊어진다. ‘거짓의 위기’를 통과하는 이 인물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해피엔드>는 어떤 의미에서 경제적 몰락이 결혼, 성 역할, 고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사회적 논평이자 심리적 황폐화, 그리고 일부 관객들에게는 가슴 아픈 로맨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하여 보라가 떠다니는 풍등을 붙잡으려 애쓰는 <해피엔드>의 몽환적인 라스트 신은 주목할 만하다. 이 장면은 한국영화 사상 가장 아름답고 수수께끼 같은 결말 중 하나이다. 클라이맥스에서 엔딩으로 이어지는 20여 분의 시퀀스는 이전까지 느슨하게 얽혀 있던 서사의 실타래를 태피스트리로 묶어내려는 시도로부터 도리어 멀어진다. 이 신으로 넘어옿기 전 민기는 잔혹한 방식으로 보라를 살해했다. 이야기 안에서 처음으로 응집력 있는 흐름이 발생하고 가시적인 잔학 행위가 벌어지는 국면이다. 촘촘한 형식과 정서적 강렬함을 가진 이 영화의 모호한 결말 구조는 곱씹어볼 만한 여지를 남긴다. 이 혼란스러운 이중 결말은 먼저 민기가 보라를 살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뒤에는 보라의 죽음을 의심하게 하는 호환되지 않는 결말이 이어진다. 혼란, 우발성, 자의성에 기초한 정지우의 영화를 돌이켜보면 이 이중 결말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연결고리를 미묘하게 도입하여 관객의 반응을 수정하게 만드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감독이다. 여기서 정지우는 실패한 관계의 잔해 위에서도 낙관적인 미래를 갈망하는 사람들에 관한 탁월한 미장센을 전개한다. 거울이 놓인 화장실에서 민기가 ‘장미빛 인생’이라고 적힌 성냥 케이스 안에 보관된 은반지를 변기 속에 던져버리고 폴라로이드 사진 안에서 행복하게 웃는 보라의 이미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 녹아내리는 모양으로 타들어 가는 사진은 아파트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는 보라의 이미지로 오버랩된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보라의 시점으로 주황색 풍등이 바람이 실려 떠오르고 걸쇠에 잠시 걸려 보라의 눈앞에 머무르던 풍등이 다시 하늘로 솟아오른다. 손을 뻗어 그것을 잡으려는 보라의 제스쳐에도 불구하고 풍등은 잡히지 않는다. 이어지는 쇼트에서 온화한 햇살 아래 아이와 함께 잠들어있던 민기가 깨어난다. 보라는 그의 곁에 없는 것 같다. 민기는 보라를 살해한 것인가 또는 풍등을 잡으려는 보라의 애절한 몸짓은 민기의 꿈인가? 정지우는 확실히 혼란과 방향 감각의 상실에 관심이 있는 작가이다. < 사랑니 >(2005)와 < 모던 보이 >(2008), < 은교 >(2012)로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는 자의적이고 우발적인 사건들에 직면함으로써 방향 감각을 잃는 인간에 대한 탐구로 요약될 수 있다. <해피엔드>의 결말이 야기하는 혼란과 방향 감각 상실은 영화의 의미와 방법 모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련의 신들의 교환은 현실과 바깥을 왕래하면서 이야기의 목표가 성취되었다는 안도감을 주지 않는다. 결과 없는 원인, 울림 없는 행동, 긴장의 끈이 풀려버리는 이 결론은 민기가 읽고 있는 소설과 비슷하다. 민기의 살인 행각과 소설은 모두 허구이지만 죽음은 실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가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를 관객들이 모두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예술이 삶을 모방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개념을 가지고 노는 이 영화의 방식이다. <해피엔드>를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남성의 불안과 폭력에 대한 비판적인 해부도를 제시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교한 카메라 워크와 편집은 여성 캐릭터가 다양한 비판적 관점을 대변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실, 진실과 허구가 뒤섞인 후기 자본주의 도식 아래서 곪아 터진 분노의 초상화를 통해 남성 관음증의 폭력성과 여성의 새로운 주체성에 대처하지 못하는 남성의 무능력을 그려낸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내러티브와 비유적 전략은 허구의 인물에게 우연적인 것이 반드시 관객에게 자의적인 것으로 경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따라서 방향 감각 상실은 영화의 에너지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증폭시켜 우리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하게 한다. 이보다 더 생산적인 활동이 있을까?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김정민 감독의 < 감자 >는 한편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영화이기 이전에 여러 기괴한 볼거리를 과시적으로 전시하는 쇼에 가깝다.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강원도 어느 감자밭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둘러싼 경찰, 농부, 천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원씬 원컷으로 촬영한 이 단편영화의 매력은 원시성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원시성이란 영화가 역사적으로 말하기(telling)를 획득하기 이전부터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보여주기(showing)의 역량과 관련이 있다. <감자>는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 고구마밭을 감자밭이라고 우기는 농부, 감자밭에서 경찰을 내쫓으려는 천치 사이에서 우발적, 기습적, 충격적으로 발생하는 대사, 몸짓, 사건을 활용해 끊임없이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특징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스릴러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의 얼개를 가지고 있다. 스릴러 장르의 관습이 그러한 것처럼 <감자>에도 미스터리한 사건과 인물이 있고, 사건을 둘러싸고 쫓고 쫓기는 긴장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미궁에 빠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방식으로 서사를 진행하기보다는 핵심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황과 관련된 다양한 볼거리를 전시한다. 을씨년스러운 강원도 어느 바닷가 근방에 있는 감자밭의 풍경, 배우들의 다소 별난 몸짓, 관객의 예측을 벗어나는 우발적 상황 등이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이다. 이와 더불어 바닷가가 보이는 어느 밭을 익스트림 롱샷으로 보여주는 오프닝이나 줌인, 패닝, 틸팅 등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따라가면서 프레임의 경계를 확장하는 카메라의 움직임 또한 이 영화의 볼거리이다. 시각적으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는 이 영화의 특징은 ‘어트랙션 영화(cinema of attraction)’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영화학자 톰 거닝은 아직 영화라는 매체에 서사가 도입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의 핵심적인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어트랙션 영화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그는 초기 무성영화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관음증적인 시선을 유발하기 위해 시각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이론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어트랙션 몽타주를 개념적으로 참고했는데, 에이젠슈테인이 말하는 어트랙션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서커스, 보드빌, 놀이공원 등과 같은 근대적인 여가 문화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로테스크한 연극에서 나타나는 기괴한 무대, 의상, 연기와 관련이 있다. 에이젠슈테인은 어트랙션이 공격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감각, 심리,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어트랙션에 관한 이런 논의에 따르면, 영화에서 쓰이는 어트랙션은 관객이 다양한 볼거리를 바라보면서 작품 속 세계를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에 가깝다. <감자>를 구성하는 여러 기괴한 이미지들은 이 작품을 하나의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깝게 만든다. 이 영화의 웃음 코드는 특정 상황에 대한 오인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배우들의 기괴한 몸짓에 기초한다. 통상적으로 코미디 영화에서 오인은 특정 상황에 대한 등장인물의 무지로부터 발생한다. 예를 들어, 길거리를 어느 인물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이 그러하다. <감자>의 오인은 이야기가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유지된다. 영화의 시작 부분은 대략 이러하다.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경찰이 밭에 도착하면, 농부가 경찰을 향해 걸어온다. 경찰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고구마밭의 주인을 찾는데, 농부는 그 밭이 감자밭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국내의 경우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감자라는 단어는 고구마라는 단어와 구분이 되지 않았다. 18세기에 중국으로부터 감자가 유입되기 전까지 국내에는 고구마라고 불리는 작물만 있었다. 하지만 감자가 국내에 들어온 이후 그것의 생김새가 고구마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고구마 또한 감자라고 불렸다. 고구마는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제 이름으로 불릴 수 있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감자>에서 한 농부가 고구마나 감자나 전부 감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마냥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다. 주목할 부분은 이 작품에서 농부가 감자라고 지칭하는 대상은 정작 감자도 고구마도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오히려 그 농부는 땅속에 묻힌 시체를 가리켜서 감자라고 우긴다. 영화는 감자밭에 파묻혀 있던 시신의 일부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농부에 의해서 유지된 오인의 상황에서 웃음기를 거둬들인다. 진실과 거짓의 위계가 무너져 내린 그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 경찰이 바라보는 농부는 더 이상 평범한 농부가 아니며 그가 바라보는 천치는 더 이상 인지능력이 부족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웃음 코드는 오인과 관련된 상황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상황, 사건, 몸짓과 관련이 있다. 과거 찰리 채플린과 같은 코미디 배우들이 자신들의 신체와 몸짓을 통해서 관객에게 웃음을 제공했던 것처럼, 이 작품 또한 배우들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거나, 무언가를 피해 달아나거나, 바닥을 기어가는 모습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 몸짓들은 롱테이크의 미학 속에서 사실적인 성격을 갖지만, 그 사실성을 위해 연출자와 배우들은 주변 환경을 이용하는 방법과 배우들 사이의 연기의 합을 수학적으로 미리 계산했을 것이다. 즉, 이 영화의 사실성은 논픽션에서 기대되는 우연적이고 비-연출적인 요소보다는 픽션에서 기대되는 계산적이고 연출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이 영화에서 배우들의 기괴한 몸짓 중 일부는 관객의 오인, 즉 특정 장면에 대한 관객의 예측이 실패하는 상황을 유도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신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 그러하다. 죽은 줄 알았던 신체가 살아 움직인다는 설정, 즉 산 주검(living dead)은 과거 어트랙션 영화가 즐겨 활용했던 소재 중 하나였다. <기이한 마차 사고(An Extraordinary Cab Accident)>(1903)의 경우 한 남성이 마차에 치여 숨지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죽은 줄 알았던 그 남성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어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짓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이러한 작품들은 교통사고, 살인, 죽음 등에 대한 공포를 활용해서 충격과 웃음을 동시에 제공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감자>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기괴한 볼거리로 가득한 상황, 사건, 몸짓을 만들어내는 작품들과 가족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시각적인 볼거리를 통해서 관객의 감각을 자극하고 지각에 혼란을 일으키는 이 작품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보여주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의 성찰을 제공한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영화적 경험,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에 관한 오인과 무지에 기초한 영화적 경험이다. 김정민 감독의 <감자>는 예술이 관객에게 호기심, 쾌락, 관음증을 자극하는 시각적인 볼거리이며, 그러한 바라보기의 경험이 일어나는 동안 관객의 상상력에 의한 판단과 오인이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시험한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보여주기의 충실성이 이야기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