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광인
- 감독
- 왕룡위
- 제작년도
- 1985
- 출연
- Siu-Ho Chin, Chan-Peng Chang, 왕룡위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뻥튀기 제조기가 돌아가는 방에서 한 쌍의 남녀가 섹스한다. “과자 만드는” 자동기계는 계속해서 뻥튀기를 내뿜고, 인물들은 날아오는 뻥튀기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심지어 수북이 쌓인 뻥튀기 위에 누워 관계에 몰두한다.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울 이 기괴한 장면은 김기영 감독의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1978) 전반부에 나온다. ‘죽음에 관한 몇 가지 에피소드’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일명 ‘뻥튀기 섹스신’은 작품 내적으로 그리 중요한 장면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중요했다. 영화를 열심히 보러 다니며 영화사의 이런저런 사소한 에피소드들(이를테면 훗날 누벨바그로 통칭된 무리 중에서도 자크 리베트의 비평적 안목이 특히 탁월해서 다 함께 신작을 보고 나면 다들 리베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든가 하는 별거 아닌 일화들. 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아니면 클로드 샤브롤이었던가?)을 줍기 좋아했던 시절에, 어디선가 ‘뻥튀기 섹스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미친 영화는 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를 처음 본 건 KMDb VOD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래 이 작품은 4K로 복원되어 블루레이가 출시되었고, 지금은 국내 OTT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로 글을 시작한 건, 이 지면의 제목인 ‘비평, 안녕하십니까’의 기획이 내 오랜 고민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미친 영화를 찾고 싶다는 게 그것이다. 영화글을 쓰다 보니 원고 작성, 관객과의 대화 진행, 심사 참여, 영화제 프로그래머 재직 등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필요에 따라 예전 영화도 종종 찾아보지만, 일의 특성상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수많은 장, 단편영화를 보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다. 출품 공모를 열고 예심을 진행하는 영화제나 기획 프로그램 등의 선정의 변을 살펴보면 출품작이 매년 최다를 갱신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점점 더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심사를 진행하는데도 다양한 선정의 변에서 비슷한 뉘앙스가 읽힐 때가 있다. 영화가 점점 더 잘 만들어지고 있다는 거다. 이야기는 모난 구석이 없고 만듦새도 안정적이다. 혹은 적어도 그런 결과물을 지향한다. 비단 심사 과정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여러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거나 지난한 과정을 통과해 극장 개봉의 문턱을 넘은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균형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 돈과 시간을 투자해 극장에 가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해야 한다는 압력이 내외부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는 물론 쉽게 간과해도 좋을 영역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재능을 발굴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 틈에서 때로는 작게 읊조리게 된다. “미친 영화가 보고 싶다….” 근래 제작되는 영화들의 경향을 짚으며 비판하는 건 어쩌면 쉬운 일이다. 단편영화를 장편영화의 축소판처럼 생각한다든지, 개인의 내면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보편적인 서사에 안전하게 겹쳐두며 미궁에 빠지는 것을 회피한다든지, 상상된 소시민적 이미지에 기대며 다양한 갈등과 여러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린다든지. 단편영화에서 거대 자본이 들어간 상업영화에 이르기까지, 실망과 안타까움은 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굳이 길게 늘어놓지는 않으려고 한다. “너는 왜 미치지 않았니?”라고 묻는 대신, 미친 영화가 보고 싶다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음에 대해 좀 더 말하면 좋을 것 같다.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사실 미친 영화가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미쳤다!”라는 감탄사는 소위 웰메이드 영화를 보고서도 쓸 수 있다. 변태적일 정도로 탐미적이거나 철학적 질문을 깊이 탐구했거나 대사를 잘 썼을 때도 이 감탄사를 마구 남발할 수 있다. 어쩌면 본인의 취향을 건드리는 모든 요소에 우리는 미쳤다며 나름의 찬사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미치다”라는 말은 보통의 것과 다른, 상식에서 벗어난, 일상을 뒤집는 무언가를 묘사하는 단어로, 동사이면서 상태를 설명하는데 주로 쓰인다. 그렇다면 아주 넓은 의미에서, 이미 일반적인 수준에서 굳어진 영화의 관습을 탈피하는 (비)자발적인 선택에 ‘미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될까? 글쎄, 아직 충분하지도, 재밌지도 않다. ‘미친 영화’를 생각하는 마음은 꽤 모순적이다. 구체적인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이 개인적인 욕망은 나름대로 그 용례를 정교화하고 싶은 충동과 닿아있다. 페미니즘 문학 비평의 주요한 길을 제시한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저작 『다락방의 미친 여자』(2022)나, 최근 타계한 국내 1세대 여성 사진작가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처럼 사회, 문화적 함의 속에서 ‘광기’를 재정의하고자 하는 작업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동시에 광기 역시 우리 시대의 굳어진 수식어나 레토릭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다 세밀한 탐색 없이 광기라는 단어만 쥐고 모험하는 건 이제 무척이나 (안전하기 때문에 더) 위험한 일로 느껴진다. 다른 한편, ‘미친 영화’를 찾고 싶은 마음은 내게 지극히 개인사적인 맥락에서 작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장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에 대한 감상보다 훨씬 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름의 해답은 미친 영화를 찾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다시 찾는 데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너무 감상적이기 때문에 한 가지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한때 내게 중요하게 와닿았던 비평적 시선 중 하나는 ‘정치적인 영화’를 정치영화가 아니라 영화 속의 정치적인 것과 함께 생각하자는 거였다. 나는 이 말을 정치라는 것을 (정치인, 정당, 선거 등으로 대표되는) 현실 정치에 가두지 않고 끊임없이 작동하는 역학이자 태도로 사고하면서, ‘영화’를 전방위적으로 둘러싼 각종 갈등과 조건을 응시하는, 작품의 선택을 봐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했다. “존 포드야말로 가장 브레히트적인 감독”이라고 말했다던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일화와 더불어, 내게 이러한 말과 시선들은 ‘분명히 있지만 딱딱한 것은 아닌’ 어떤 기준, 항상 개별 작품들과의 밀접한 교통을 통해서만 감지되는 그 무언가를 찾아내는 작업 방식을 제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중요했다. 정치적인 것이나 브레히트적인 것, 그리고 ‘미친 것’과 그 효과는 언제나 같은 형식을 통해 성취되지 않는다. 광인의 출현이나 해괴한 장면의 등장만으로 그것이 (내가 찾는) 미친 영화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일단은 이 질문을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던 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로 돌아가 보려고 한다. © 파이오니어픽쳐스필름(주)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의 괴인처럼 불리는 김기영의 작품 중에서도 파격적인 편에 속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주인공 영걸( 김정철 )은 웬 여자가 건네는 오렌지 주스를 먹고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지만 목숨을 부지한다. 이후 계속해서 죽음과 삶의 충동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는 그의 앞에, 의지만 있으면 죽지 않을 수 있다고 외치는 책장수가 나타나 해골이 되어서까지 입을 나불거리는 한편, 2000년 전 신라 공명왕 시대에 동굴에 들어가 백골이 된 여성이 환생해 간을 먹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이 여성이 ‘뻥튀기 섹스신’의 주인공이다.) 뼈를 통해 인류학을 연구하는 이 박사( 남궁원 )의 조수가 된 영걸은 이 박사의 딸 경미( 김자옥 )와 기묘한 관계를 맺는 동시에 이 박사에게 배달되는 의문의 해골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에도 연루된다. 사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은 이상하다기보다는 황당한 쪽이다. 신라 시대에 잠들었다가 깨어난 여성은 갑자기 동성동본 사이의 결혼에 대해 걱정하고, 목이 잘린 영걸이 책장수의 전언처럼 눈을 떠 “의지!”를 외치며, 사람은 복면을 뒤집어쓰고는 나비가 된다. 황당무계한 장면들이 계속되는 와중에 그 중심에 죽음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원고를 쓰기 위해 다시 본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분명 독특했지만 동시에 처연한 영화이기도 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남자가 현실인지 꿈인지 모르는 일련의 일들을 겪다가 결국에는 죽지 않았으니 “귀찮지만 더 살아줘야겠다”라고 읊조리는 영화라니. 사실 주인공의 죽음이란 한 편의 영화에 드리운 종결의 감각을 형상화하는 가장 직설적인 사건일 것이다. 주인공이 죽으면 대개 영화 역시 끝나야 한다. 혹은 한 편의 영화는 언젠가는 끝나야 한다. 어쩌면 영화란 시작과 동시에 종결을 미루고 지연하다가 결국 끝을 마주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음악이나 연극처럼 시간을 조건으로 삼는 예술이 대개 그러하겠지만.) 그 지연의 방식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꽉 짜인 서사를 통해서, 인물의 사소한 행동을 통해서, 끊임없는 사건들의 도입을 통해서 영화가 끝나는 시간은 저 뒤로 밀려난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내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별안간 그 모든 것이 영걸의 망상이었던 것처럼 묘사하며 영화를 닫는다. 이 석연치 않은 순환 구조야말로 내게는 모종의 ‘미친 것’이 작동하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미치고 싶지만 미칠 수 없고, 미치지 못해서 미쳐버리는 어떤 무기력의 영화 만들기. 혹시 영화의 ‘미친 것’을 찾는다는 건 일종의 상처를 찾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미친 영화’의 특정한 외양이나 형식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앓고 있습니까? 아마도 비평이란 그러한 질문과 함께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평, 안녕하십니까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손시내(영화평론가) l 영화웹진 《 REVERSE 》에 글을 쓰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한다. 팟캐스트 ‘영화카페, 카페 크리틱’에서 영화 이야기를 나눈다.
임시연 감독이 연출한 < 햄스터 죽이기 >의 주인공 효정은 존재감이 없는 아이다. 그녀는 15살 동갑내기 수정과 일란성 쌍둥이로 맺어진 관계이지만, 두 사람의 삶은 극명하게 구분된다. 수정이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사춘기에 접어든 학생으로 그려지는 것과 달리 효정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불분명한 상태로 그려진다. 수정은 신분과 소속이 분명하지만, 효정은 신분과 소속이 불분명하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효정을 수정으로 착각하는 일이 잦을 정도로 효정의 존재론적인 지위는 불분명하다. 영화 초반, 효정은 내레이션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5년 전 엄마는 쌍둥이를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이건 마지막으로 내가 김효정이었던 때의 이야기이다.” 이 독백이 암시하는 것처럼, <햄스터 죽이기>는 타자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비교적 덤덤하게 그리는 작품이다. 도플갱어는 오랜 시간 동안 문학과 영화의 주요 소재로 쓰였다. 사전적으로 도플갱어는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을 뜻하며, 그것은 자아의 증식, 복제, 분할, 분열 등과 같은 함축적 의미를 포함한다. 도플갱어가 자아의 증식에 가까운 경우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욕망의 발현과 관련이 있으며, 도플갱어가 자아의 분열에 가까운 경우 그것은 이성에 의한 억압과 관련이 있다. 일찍이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도플갱어의 의미를 자아의 분할, 구분, 교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억압된 대상이 회귀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도플갱어는 억압된 주관성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합리적인 이성에 대한 반발을 표현하고자 했던 낭만주의 문학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의 혼란한 사회상을 다룬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영화에서 자주 나타났다. < 프라하의 학생 >(1913),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1919), < 노스페라투 >(1922), < 마부제 박사 >(1922)가 도플갱어를 영화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작품들은 거울 이미지, 괴물, 광인 등으로 도플갱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인물과 그것의 유령적인 대응물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도플갱어는 누군가의 조력자이거나 반대로 누군가의 장애물일 수 있다. 도플갱어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자아와 타자는 서로 운명 공동체를 형성한다. <햄스터 죽이기>의 효정과 수정 또한 하나의 세계를 공유한다. 두 사람은 모종의 협상을 맺고서 서로의 분신이 되기로 약속한다. 수정은 효정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를 수 있는지 묻는다. 파우스트적인 거래에 가까운 이 협상이 맺어진 결과 수정은 효정을 대신해 집을 지키고 그동안 효정은 수정을 대신해 학교에 간다. 영화는 효정의 변화된 삶에 주목한다. 그녀는 수정의 명찰이 붙은 교복을 입고, 수정이 다니는 학교에 가서, 수정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수정을 대신해서 시험을 본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효정은 자신을 수정이라고 믿는 사람들 앞에서 수정을 연기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효정의 억압된 욕구가 현실로 회귀하고, 그녀가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효정의 욕망은 그녀가 수정의 분신이 되었을 때만 달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한계를 갖는다. 또한, 효정이 수정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그녀의 소원 성취는 일시적으로 혹은 무기한 유예된다. 이것은 타자의 도플갱어가 된 한 인간의 비극적 결말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모든 도플갱어는 누군가의 분신이라는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서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 <햄스터 죽이기>는 우화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의미로 읽힐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삽입한다. 이 영화는 한 쌍의 햄스터가 있을 때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도플갱어로 맺어진 효정과 수정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 초반, 수정은 학교 앞에서 사 온 것이라면서 한 쌍의 햄스터를 집에 들인다. 수정이 햄스터에 대해서 비교적 무심한 것과 달리 효정은 케이지 안에 들어 있는 한 쌍의 햄스터를 유심히 관찰한다. 햄스터를 관찰하는 효정의 모습은 이 영화 전체의 구조와 어우러져 관객인 우리가 그림 속의 그림을 바라보는 듯한 착시를 경험하게 만든다. 관객이 효정과 수정 사이에 나타나는 도플갱어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효정은 한 쌍의 햄스터 사이에서 나타나는 도플갱어의 관계를 바라본다. 이 미장아빔(mise en abyme)의 구조에 의해서 영화의 안과 밖 모두 도플갱어가 관계의 중심을 이루는 세계처럼 지각된다. 그리고 이 액자식 구조 속에서 관찰자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문자 그대로 잡아먹는 잔인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욕망이 도착적인 행위로 나타난 것인 동시에 먹는 행위를 통해서 정령, 타자, 초월적 존재가 현현(incarnation)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타자의 그림자에 갇힌 도플갱어를 넘어서 타자를 집어삼킨 도플갱어의 모습에서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햄스터 죽이기> 후반부의 일부 장면은 너와 나의 구분이 무너진 도플갱어의 관계를 암시한다. 효정이 두 마리 햄스터 중 한 마리의 사체를 화단에 묻고 난 직후 그녀는 교복을 입은 수정과 마주한다. 여기서 영화는 효정과 수정의 모습을 각각 풀 샷, 바스트 샷, 클로즈업 샷으로 담은 이미지를 쇼트와 역-쇼트 구조 속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이 쇼트들의 교환 속에서 효정의 얼굴과 수정의 얼굴은 서로 대칭을 이루고, 그 교환의 구조 속에서 두 사람의 얼굴은 증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더불어, 영화의 마지막 장면 또한 효정과 수정을 구분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명찰이 없는 교복을 입었기에 효정인지 수정인지가 구분이 되지 않는 누군가가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근데 쥐새끼도 제 자식은 알아보는 게 아닌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그것은 분명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 영화 속 누군가의 자조 섞인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리라.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1. 2016년 12월 16일. 마르코 벨로치오는 가족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향인 이탈리아 북부 피아첸차로 전 가족들을 불러 모은다. 레티치아, 조르조, 마리아, 알베르토 등 생존해 있는 그의 형제자매들이 배우자와 아들딸, 손주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마르코의 형제자매들은 다들 정정해 보이지만 나이들은 80줄을 훌쩍 넘겼으니 어쩌면 살아생전에 모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벨로치오 감독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가족영화를 찍겠다고 했지만 뭘 하고 싶은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토로하고는 곧 “천사였다는 카밀로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우리에게 알린다. 그러니 그의 말은 카밀로에 관한 영화를 찍으려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죄책감, 후회, 회한이라는 단어를 꺼내기에는 이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는 그의 쓰라린 탄식에는 이 가족의 비극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은 그간의 시간이, 그 오랜 회피가, 그 질긴 침묵이 내포되어 있다. 카밀로에 관해, 카밀로가 품은 깊은 우울과 고통에 관해 몰랐던 이는 마르코만이 아니다. 지식인인 조르조 형도 아무것도 이해 못 했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도 몰랐고, 가여운 누이들도 아는 게 없었다. 여든 한살의 노감독은 ‘죽기 전에 이 일을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가족의 비극을 재현하고 결국 기억하기”로. 그 결심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카밀로는 누구인가. 그는 마르코 벨로치오의 쌍둥이 동생이다. 1939년 2차 대전이 발발한 해에 카밀로는 마르코가 태어나고 3시간 뒤에 거의 질식 상태로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1968년 12월 26일, 카밀로는 29살의 나이에 스스로 목을 맸다. 그 사이의 시간, <마르크스 캔 웨이트>가 탐문하는 시간은 카밀로가 이 세상에 존재했던 그 29년의 시간이다. 마르코 벨로치오는 그의 쌍둥이 동생을 세상으로 불러내기 위해 최대한 많은 이미지들을 끌어 모은다. 8mm 카메라로 찍은 홈 비디오 영상과 가족사진들, 당시 이탈리아의 사회정치사를 담은 아카이브 푸티지, 그리고 벨로치오의 극영화 클립들. 그 이미지들이 가족과 지인의 대화 장면과 인터뷰 영상에 픽션영화 같은 드라마틱한 활력과 논픽션의 운명적 생기를 덧입힌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이미지는 카밀로의 얼굴이다. 부드러움과 우울이 깃든 그의 얼굴은 부서질 듯한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음미하게 하는 매혹의 이미지지만 동시에 옅은 통증을 불러오는 슬픔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물론 그 인상은 그가 살아남아 쌍둥이 형제 마르코의 나이에 이르렀다면 결코 얻지 못할 것이기도 하다. 카밀로의 부서질 듯한 연약한 아름다움은 너무 이른 때에, 자신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세상을 스스로 따돌리며 불시에 사그라졌다. 그러나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이 영화의 목표가 아니다. 관객인 우리는 물론, 벨로치오 형제자매들이 자신들의 모든 기억을 끄집어내고서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지점. 어떤 언어로도, 어떤 지성으로도, 어떤 예술로도, 한 인간에 관한 온전한 이해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 실패는 필연적이고 근원적이다. 이 영화의 저 깊은 하부에 내재된 어떤 쓰라린 느낌은 우리 존재의 근원적 비극을 희미하게 지시하고 있다. 마르코 벨로치오가 이들 가족의 비극을 보편적인 차원의 이야기로 환원하여 한 개인의 후회와 죄책감을 희석시키려 했다는 뜻이 아니다. 차라리 그는 카밀로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고백하고 거기서 자신이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것, 듣고도 흘려버린 것을 여기 기록해 두기로 한다. 그가 지금, 이제서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재현하고 기억하는 것 외에 뭐가 있을까. 벨로치오 감독은 마음을 기울여,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끌어 모아 카밀로를 둘러싼 벨로치오 가족의 비극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한다. 여기에는 잊기 힘든, 실은 가장 가슴 아픈 두 개의 순간,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벨로치오 감독의 기억에 없고 두 번째 이야기는 그가 아주 잘 기억하고 있는 대목인데, 이 영화가 카밀로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마르코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전환점이 이쯤인 것 같다. 벨로치오 감독은 영화의 오프닝에서 그의 가족과 이 가족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긴 내레이션 이후에 한동안 가족의 증언을 듣는 성실한 청자의 위치를 고수한다. 그러다 형 알베르토가 카밀로가 죽기 몇 년 전에 마르코에게 쓴 편지 얘기를 꺼내자 벨로치오 감독이 즉각적으로 프레임 안으로 소환된다. “나한테 쓴 편지라고?” 감독은 편지 내용은커녕 그 편지를 받은 기억조차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알베르토 형은 자신에게 온 편지도 아닌데 그 편지 사본을 갖고 있다(알베르토는 이 영화에서 카밀로에 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이다.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인 형 파올로나 청각장애를 가진 누이 레티치아처럼 돌봐줘야 할 존재도 아니고 존경받는 좌파 지식인인 조르조 형이나 유명한 영화감독인 마르코처럼 선망의 대상도 아니었던, 오히려 카밀로와 가장 비슷하게, 평범해서 덜 관심 받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다음 씬에서 벨로치오 감독은 카밀로가 죽은 방에서 50여 년 전에 그가 보내온 편지(사본)를 꺼내 소리 내어 읽는다. 너무 늦어버린 수신, 마르코의 목소리로 듣는 카밀로의 절박한 요청이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불러온다. 비극적 결말이 아니라면, 어쩌면 범상하게 읽힐 짧은 편지. “사랑하는 마르코. 서로 못 만난 지 1년이 다 됐네. 나 입대하기 전에 둘이서 길게 얘기했지. 제대한 다음에 뭘 하면 좋을지 말이야.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 여전히 불확실하고 혼란스럽기만 해. 미래에 대해 고민해도 해답이 안 나와. 그날 저녁에 내가 꺼낸 말 있잖아. 나도 영화계에서 일해 보면 어떨까 하고. 정말로 어떻게 생각해? 말도 안 되는 생각일까, 아니면 고려해 봐도 될까? 답장 보낼 때 네 생각을 확실하게 말해주면 좋겠어. 그럼 이만 줄일게. 보고 싶다. 잘 지내. 사랑을 담아, 카밀로가.” 이 씬 다음에 벨로치오 감독의 딸 엘레나의 쇼트가 곧장 붙는다. “그래서 답장하셨어요?” 아버지의 답변이 두렵다는 눈빛으로 엘레나가 묻자 벨로치오 감독은 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잘 기억이 안 나. 54년이나 지난 일인걸.” “답장 안 하셨군요.” 아들 피에르 조르조가 아버지의 대답에 이렇게 응답하자 벨로치오 감독도 “그랬던 것 같아”라고 시인한다. 이 장면이 지켜보기 괴로운 이유는 자식들이 느낄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느끼고 있을, 모든 면에서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에서 오는 허망한 감정이 우리에게도 절절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리라. 응답하지 않은 죄,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죄. 이후 벨로치오 감독은 그 점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고 신부님께 털어놓는데, 그의 그런 고백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본 이들은 누구라도 알아챌 것이다. 그럼에도 반문해 보고 싶다.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죄책감에 관한 영화인가. 확신 없이 일단 말해보자면, 벨로치오 감독은 자신의 죄책감을 고백하기 위해 카밀로를 영화로 불러낸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너무나 늦어버렸지만 이제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물론 그건 영화를 만드는 일이다. 이 생각은 마지막 시퀀스에 가서야 들었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 카밀로에 관한 이야기들이 쌓여갈수록 자꾸만 그의 편지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이 이야기는 마지막 시퀀스에 가서 다시 말하기로 하자). 강력하게 각인된 두 번째 순간은 쌍둥이 형제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의 대화에서 나오는데, 벨로치오 감독의 기억 속에 선명한 그 순간은 일찍이 <그 눈, 그 입>(1982)에서 재현된 바 있다. 1968년, 그러니까 카밀로가 죽던 그 해에 마르코는 제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카밀로에게 민중들의 투쟁에 동참하기를 권한다. 하필 1968년이다. 유럽 대륙에 혁명의 돌풍이 불기 시작한 해. 이 영화의 제목이 된 “마르크스는 나중에”(<Marx can Wait>)라는 대사는 마르코의 제안에 대한 카밀로의 대답이다. 말하자면 “내 문제부터 해결하고, 혁명은 나중에…….” 196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도 손꼽히는 좌파 감독으로 경력을 시작한 마르코 벨로치오가 강력한 정치 영화에 헌신하며 공산당에 가입한 해가 1968년이다. 벨로치오 감독은 카밀로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나눈 이 대화 역시 아들딸에게 들려준다. “카밀로가 꺼내는 힘든 얘기를 피하고 싶은 생각에 난 혁명 어쩌고 하는 헛소리만 늘어놨어.” 정치가 개인보다, 혁명이 가족보다 앞설 수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간에, “널 불행하게 만든 것은 부르주아이니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라는 이 흔해빠진 선동은 피상적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얼마나 무감하고 무성의한가. 2002년 벨로치오는 「더 인디펜던트 리뷰」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마르크시즘과 별 관련이 없는 내 생각들뿐이다. (...) 예술가로서 내게 변혁은 더 이상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2.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올해 칸영화제의 신설 섹션인 ‘칸 프리미어’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그리고 칸은 폐막식에서 그에게 명예 황금종려상을 안겼다. 이 영화로 상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 수상에는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 마르코 벨로치오는 사실상 데뷔작부터 줄기차게 가족의 문제를 다뤄왔고, 그 문제란 그 자신의 가족 이야기이기도 해서 그것을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총결산한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 캔 웨이트>에는 그의 픽션영화의 일부가 논픽션의 진술들 사이에 정확히 자기 자리를 찾아 이음매 없이 제시된다. 이를테면 벨로치오 형제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장남 파올로의 광기를 말할 때, <리프 인 더 다크>(1980)에서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소리 지르는 광인 시퀀스로 연결된다. 거기서 하얀 잠옷을 입은 천사 같은 꼬마들은 형의 광기를 피해 귀를 막고 테이블 아래로 숨어들거나 미친 듯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벨로치오의 형제자매들은 말한다. “우리 모두 파올로 형이 차라리 죽어버리길 바랬지만 누구도 그 광인과 한 방을 쓰는 카밀로 걱정은 안 했다.” 아, 가여운 카밀로. <호주머니 속의 주먹>(1965), <그 눈, 그 입>(1982), <내 어머니의 미소>(2002)도 그런 방식으로 벨로치오의 가족사와 재접속한다. 하지만 픽션은 픽션일 뿐, <마르크스 캔 웨이트>가 없었다면, 그 견고한 픽션의 세계는 그 자체로 온전히 남을 것이다.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그 세계에 균열을 낸다. 그 틈새로 가장 많이 노출되고 가장 큰 혼란을 겪는 것은 마르코 벨로치오 그 자신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벨로치오가 평생 탐구해온 가족의 비극상이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면,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픽션의 세계 뒤에 안전하게 몸을 숨겼던 그가 그 세계의 실재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겪는 자기발견의 과정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여든에 접어든 대가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을까 싶다가도 종종 말을 잇지 못하거나 더듬거리고 시선을 마주 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목격하면 우리에게도 얼마간의 두려움이 생겨난다. 이 비극을 감당할 수 있을까. 마르코와 그의 형제자매들은 그런 순간들조차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데, 대신 외상은 기이한 방식으로 깊이 남는다. 그들은 이 죽음을 어찌 받아들였던가. 당시 카밀로의 사망 소식을 들은 모든 이들은 하나같이 어떤 불의의 사고를 떠올렸고, 심지어 현장에서 그의 시신을 수습했던 누이들은 지금도 그 죽음을 ‘실수’나 ‘사고’라고 믿는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자살한 아들이 지옥 불에 떨어질까 패닉에 빠진 신앙심 깊은 어머니를 위로하느라 마치 사고였다는 듯 자식들이 모두 연극을 꾸며댄 탓인데 이 선하고 가련한 누이들은 어쩌다 그 연극에 영원히 갇혀버리게 되었다. 아직도 카밀로의 죽음을 실수거나 사고라고 믿는 누이들은 유서가 있었다고 해도 “난 본 적이 없어”라는 말로 일축한다. 그들이 기억하는 카밀로는 어떤 사람이던가.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수영을 할라치면 팔을 휘저을 때마다 물에 가라앉았고, 학업에서는 날이 갈수록 쌍둥이 형과 엄청난 격차가 벌어져 낙제를 거듭하고, 군대에 가서는 변방으로 자꾸만 밀려났다. 형제 중 그를 가장 총애했던 아버지는 카밀로가 측량사가 되어 떼돈을 벌어 최신식 자동차를 타고 나타나는 것으로 라틴어와 그리스 철학을 공부한 그 잘난 형들에게 복수하기를 바랐지만 그건 그의 뜻과는 달랐다. 암으로 이르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장례에서 홀로 펑펑 울었던 그는 세상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느꼈다. 언제나 우스갯소리를 해대서 그 농담과 웃음 탓에 아무도 그의 내면의 고통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이가 있고 누구는 언제나 우울한 느낌이 드리워진 청년이라고도 했다. 소극적이고 불행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형들과의 끊임없는 비교에서 스스로를 실패자라 자책했던 그는 무엇보다 ‘애정의 관점에서 사막 같은 불모지’였던 가정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화초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더 많은 얘기들이 더해진대도 우리가 이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느끼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보다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문득 벨로치오가 이 영화로 무언가 다른 걸 시도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졌다. 가족 모임을 단체 사진 촬영으로 마무리한 다음, 에필로그처럼 덧붙은 단 하나의 쇼트 탓인가. 영화적 톤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도드라진 이 쇼트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유일한 픽션영화 쇼트라고 해도 될 법한데, 그래서인지 픽션의 상상력을 부추긴다.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 속에 저 멀리 돌다리를 걸어 전경으로 다가오는 벨로치오 감독이 보이고 곧 전경에서 프레임 인하여 아침조깅을 하는 청년의 뒷모습이 보인다. 청년은 카밀로가 죽기 직전에 다녔던 체육교육원의 이니셜 ISEF이 등 뒤에 박힌 운동복을 입고 있다. 청년이 감독의 곁을 스쳐 후경으로 달려가자 벨로치오는 돌아서서 그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는데, 이 광경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이 감정적 기습에 아름다운 선율의 배경음악도 가세하면서 내가 본 것 이상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돌다리 쇼트로 시작하여 크고 붉은 글씨체의 <마르크스 캔 웨이트>라는 영화 제목이 뜨고 카밀로와 마르코의 사진이 대화하듯 이어지다가 엔딩 타이틀에 이르는 그 (불)연속 편집이 저 깊은 감정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만 같다. 뒤돌아보는 벨로치오의 몸짓과 시선, 68년 그 뜨거운 거리를 메웠던 선명하게 붉은 구호를 아니러니하게 역전시킨 카밀로의 대답 ‘마르크스는 나중에’(“그래, 정치는 나중에”라는 마르코의 수긍이기도 한), 교차로 이어지는 카밀로와 마르코의 사진들.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에는 카밀로를 바라보는 마르코의 모습이 있고, 이십대인 카밀로의 흑백 사진들 위에 나이 들어가는 마르코의 컬러 사진이 쇼트와 역쇼트처럼 마치 대화처럼 배열된다. 이 쇼트의 연결 속에서 나는 앞서 마르코가 까마득히 잊어버린, 응답하지 않은 편지를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사랑하는 카밀로에게’로 시작되는(그리고 ‘사랑을 담아, 마르코가’로 끝나는), 벨로치오 감독의 뒤늦은 답장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자신의 쌍둥이 형제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던 그가 여기서는 카밀로를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그렇다면 결국 이 영화는 살아남은 자들의 자기위안을 위한 것 아닌가. 어쩌면 그럴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어라 말해도, <마르크스 캔 웨이트>가 품은 그 무거운 탄식과 이 영화가 안긴 깊은 감동은 조금도 희석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