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이
- 감독
- 장건재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구교환, 신현빈, 김지영, 박호산, 곽동연, 남다름
* 본 영화글은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영화+글’ 시리즈 3: 영화 비평 쓰기> 과제 선정작입니다. 1. ‘아빠는 빅가든 하나 만들 거야’ 제이콥(스티븐 연)이 무성히 자란 풀 가운데 서서 그의 딸과 아들에게 선언하듯 외친다. 특히 ‘빅가든’이라는 단어를 뱉는 순간, 그의 유창한 발음 덕분에 이 장면은 오랫동안 관객의 기억에 남는다. 이 장면은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 미나리 >에는 그가 유창한 영어 실력을 숨기려다 이내 관객들에게 들키고 마는 장면들이 몇몇 있다. 원어민임을 감안한다면 그의 한국어는 자연스러운 편이다. 다만 한국어보다 완벽한 영어 발음으로 인해 그의 언어적 정체성이 탄로나는 것이다. 이처럼 <미나리>는 관객들에게 이질감을 발생시킨다.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연히 발생한 이러한 이질감은 <미나리>가 전하는 주제와도 분명히 닿아있다. <미나리>는 한국인 이민자 1세대의 미국 정착기이다. 이들의 서사는 동양인 이민자들이 겪은 설움으로, 또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했던 모든 이민자들의 고통으로 연이어 확장되며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민자들은 낯선 문화를 견디며 끊임없이 섞이는 과정을 겪어왔을 것이다. 언어는 그 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먼저 부딪치는 벽이었을 테니, 어쩌면 관객들이 영화관에서 잠시 마주하는 이질감은 이민자들이 항상 경험했던 당황스러운 순간의 단면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나름의 방식으로 이것을 극복해나간다. 화투나 한약처럼 ‘한국적인 것’이 등장하고, 처음에는 제이슨(앨런 김)이 이를 거부한다. 이내 순자(윤여정)의 설득이 이어지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식이다. 정이삭 감독은 이렇게 ‘낯선 땅’과 ‘한국적인 것’을 섞어나간다. <미나리>가 전하는 희망은 이 섞임의 과정 안에 있다. 하지만 이내 물음이 생긴다. 이 섞임의 과정 뒤에 ‘무엇이 소멸되고 무엇이 남는가’라는 질문이다. 연일 이어지는 해외 영화제 수상 소식은 이 영화가 전하는 희망에 특별한 울림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글은 <미나리>가 전하는 희망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은폐되는 희생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모니카(한예리)가 달리는 차 안에서 운전 중인 남편에게 푸념하듯 말한다. ‘일요일엔 그냥 일하는 게 낫겠어’. 두 사람의 얼굴은 스크린에 온전히 담기지 않는다. 제이콥의 운전하는 오른 손과 백미러에 비친 그의 두 눈, 그리고 보조석에 앉은 모니카의 뒷모습이 전부이다. 연이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제이슨과 순자의 모습이 보인다. 함께 동행한 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 장면은 제이슨의 시선임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짧은 장면의 시선과 영화 전체의 시선은 일치한다. <미나리>는 제이슨이 바라 본 그의 가족사(史)인 것이다. 차 안의 시선은 차창 밖으로 향한다. 미나리 가족의 조력자 폴(윌 패튼)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간다. 제이콥이 차를 세우고 폴과 짧은 대화를 나눈다. 폴은 ‘십자가’가 자신의 교회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오랜만에 교회에 다녀오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차 안에서 푸념을 하고 있는 모니카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여기서 또다시 물음이 생긴다. 미나리 가족에게 폴은 어떤 존재일까. 특히(어쩌면 감독의 눈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폴은 어떤 존재로 비춰질까. 돌아온 주일에 제이콥과 모니카는 교회에 가지 않는다. 앤과 제이슨이 덩그러니 교회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다. 목사의 설교가 이어진다. 그의 뒤에는 십자가가 걸려있다. 앤마저 나가고 제이슨은 지루한 표정으로 혼자 남는다. 이어지는 장면은 폴이 자신의 교회인 십자가를 지고 마을을 지나는 장면이다. 파란색 하늘과 초록색 언덕이 정확히 1:1로 화면을 가르는 이 전경 샷은 유난히 수평적인 구도를 강조하고 있다. 교회버스 차창 너머로 폴을 발견한 제이슨이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제이슨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버스 안의 아이들이 폴을 조롱했기 때문이다. 감독이 폴에게 부여한 정체성은 한마디로 기독교인(Christian)이다. 그는 첫 등장부터 매번 ‘예수의 이름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폴(Paul)의 이름이 성경 속 인물인 바오로(Paul)와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주일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고행을 재현하는 그의 모습은 유럽의 끝까지 건너가며 선교에 헌신한 바오로 사도의 삶과 닮았다. 미국은 기독교(Protestant) 정신 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또한 미국은 다민족이 공생하는 다양성 국가이기도 하다. 아칸소 교회는 마을 주류의 공간이며, 동시에 이주민들을 수용하는 공존의 장이다. 모니카는 한인교회에서 상처받은 기억이 있는 듯하다. 병아리 감별소에서 만난 한국인 동료는 그녀에게 ‘여기까지 온 한인들은 저마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귀띔해준다. 아칸소 교회는 미나리 가족을 열렬히 환영하지만 모니카는 결국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반면 폴은 마을에서 비주류에 속한다. 아이들이 교회버스에서 폴을 조롱하는 장면은 단번에 그가 처한 마을 내 위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감독은 정작 미나리 가족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교회 아닌 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감독은 그를 통해 진정한 기독교인은 주일에만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변의 이웃에게 끊임없이 건너가는(Cross)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 ‘십자가 아저씨’ 폴은 감독이 내세우는 이상적인 인간상인 것이다. 3. 영화는 폴에 대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어디에 사는지, 가족은 있는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 미나리 가족의 조력자로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함에도 그에 대한 소개를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이다. 그는 우연히 영화 안으로 투입되고선, 할 일을 마치고 홀연히 퇴장한다. 아마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폴이라는 인물 자체가 아니라 영화 안에서 그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인 듯하다. 그는 감독의 말을 전달하는 일종의 영화적 장치인 셈이다. <미나리>에 대한 현지의 반응을 살펴보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영화’라는 평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진실을 들춰보면 이민자들의 정착 역사에 폴과 같은 이상적인 조력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종차별로 얼룩진 이방인 혐오의 역사가 현실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영화 안에서 폴은 가장 이질감이 느껴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인위적인 말과 행동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영화 초반부의 이질감의 본질이 ‘낯선 땅’과 ‘한국적인 것’ 사이의 마찰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감독은 의도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소멸시킨다. 한국에서 건너 온 친정 엄마 ‘순자’는 ‘한국적인 것’의 원천이다. 하지만 이내 중풍과 같은 병에 걸려 정신이 쇠약해진다. 순자는 천장에서 이상한 것을 본다. 뇌졸중 환자에게 발견되는 흔한 섬망 증상이다. 모니카는 이를 보고 다름 아닌 폴에게 퇴마 의식(Exorcism)을 부탁한다. 이 괴이한 의식은 감독이 폴에게 부여한 최종 임무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감독은 <미나리>를 통해 줄곧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익숙함을 벗어나 낯선 것에 몸을 섞어라.’ 이를 위해 감독은 제이슨의 ‘미국인’ 친구 손에 화투장을 쥐어주고, ‘한인’들을 위해 재배한 제이콥의 채소들을 불태운다. 또 미국인들은 하나같이 미나리 가족에게 친절하지만, 한인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와 같은 설정의 정점에 있는 존재가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 폴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민자들의 현실 속에 집집마다 헌신적으로 그들을 조력하는 폴과 같은 비주류 백인 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폴’의 존재는 다양성을 수용하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또한 이방인들이 낯선 땅에 섞이며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차별과 수모를 고작 ‘한인들 사이의 따돌림’ 정도로 축소시킨다. 감독은 무엇을 위해 이러한 허구적인 존재 ‘폴’을 창조하였을까. 그리고 감독이 설치한 이 영화적 장치는 무엇을 옹호하고 무엇을 배제시키는가. 어쩌면 뇌졸중에 걸린 순자가 천장에서 봤던 ‘헛것’은 감독이 창조한 허상 ‘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미나리가 개봉한 지 6개월이 지났다. 결국 <미나리>가 전하는 희망의 종착역은 ‘미국 땅에 단단히 뿌리내린 이방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독의 꿈은 미국의 가장 권위있는 영화 시상식에서 현실이 되었다. 영화의 밖에서 영화의 이데아(Idea)가 실현된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이 코로나 팬데믹 상황 속에 미국 내 동양인 혐오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유난히도 미국 땅에서 열렬한 환대를 받은 영화 <미나리>. 이 영화가 전하는 희망은 진정 보편적인가, 아니라면 그것은 시기상 ‘그들’이 간절히 듣고 싶었던 환상은 아니었을까.
앞서 소개한 <THE OA> <키딩>이 집에서 보기 좋은 작품이었다면 이번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극장에서 꼭 보고 싶어서 준비한 영화다. 아마존 프라임에서 볼 수 있는 <사운드 오브 메탈>.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나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을 극장에서 즐기고픈 욕망에 흽싸일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듣고 싶은’ 본능을 채우고 싶어진다. <사운드 오브 메탈>을 보고 나면, 결국 우리에게 남는 건 시작과 끝에서 나는 소리다. 고막까지 울리는 쇳소리와 정적. 먼저 우리의 주인공 루벤을 만나보자. 헤비메탈 그룹 블랙하몬의 드러머 루벤은 자신의 연인이자 보컬 루이즈와 공연을 하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예전엔 약물 중독자였지만 지금은 약을 끊었다. 불행 끝, 행복 시작. 이제 그에겐 열정을 쏟아낼 드럼이 있고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해피엔딩에서 시작한다. 음악으로 약물 중독을 이겨낸 주인공의 화끈한 공연. 어느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어울리지 않는가? 그런데 행복한 주인공 루벤은 갑자기, 이렇게 밖에 설명이 안된다. 정말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청력을 상실한다. 간혹 영화는 ‘개연성’이란 항목으로 그 이유를 찾고자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사고는 대부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발생한다. 청력을 잃은 루벤은 자신이 듣지도 못하는 드럼을 쳐보지만 무의미하다. 영화를 보는 우리도, 더는 드럼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루 아침에 청력을 상실한 루벤에게 의사는 말한다. “잃은 청력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여기까지가 영화 시작 후, 18분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 뒤로 150분 동안, 소리를 되찾기 위한 루벤의 사투가 이어진다. 현재, 이 영화는 아마존 프라임, 구글 무비, 네이버 시리즈온 등에서 지금 바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이 글을 통해, 극장 상영 추진 시위를 벌이는 이유는 딱 하나다. 소리가 듣고 싶어서. 미치도록 극장에서 <사운드 오브 메탈>의 소리를 듣고 싶다. 아니, 루벤이 청력을 잃은 이유로 영화 대부분이 조용하게 유지되는 이 영화를 굳이 듣기 위해서 극장 상영을 원한다고? 초반에 쨍하게 울리는 드럼 소리가 전부인데? 이해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거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영화로 쌓아올린 영화사를 들여다봐야할 것 같다. 알다시피 1927년 10월, 소리가 들리는 영화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가 개봉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자막으로 상황과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던 영화가 이젠 말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세상이 내는 소리를 담게 됐다. 그때만 해도 일부 영화인들은 소리(Sound)가 생긴 영화가, 결국엔 영화를 망치게 될 것이라 말했지만 현대 영화에서 소리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영화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가끔 이미지보다 소리로 그 영화를 기억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 샤이닝 > 메인 타이틀곡을 들으면 구불진 길을 따라 오버룩 호텔로 향하는 한 가족이 떠오르고 < E.T .> Flying 테마곡을 들으면 자전거에 외계인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꼬마가 생각난다. 더 강조하지 않아도 소리는 영화에서 매우 중요해졌다. 그런데, 어떤 영화들은 일부러 소리를 줄인다. 그것을 우린 무음 또는 정적이라 부른다. 그 중에서도 또 어떤 영화들은 귀에 들리지 않지만 머리에는 ‘들리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영화가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그걸 영화에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사운드 오브 메탈>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강렬하게 퍼지는 드럼의 쇳소리로 시작한 영화가, 10분 즈음 고장 난 헤드폰을 낀 것처럼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루벤은 귀를 두드려보지만 들리는 건 삐--- 소리뿐이다. 나 역시 이어폰이 고장 났는지 확인해 보기도 하고, 귀를 손바닥으로 때려보기도 했는데, 실은 영화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 소리가 들리지 않는 순간, 느껴지는 싸늘함. 그 고요함이 만드는 공포. 루벤은 정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됐다. 이제 영화를 보는 우리도 이 들리지 않는 소리에 적응해야만 한다. 근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이 소리에 적응하지 못한 루벤은 아는 사람 소개로 ‘청각 장애 공동체’가 사는 마을로 향한다. 루벤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수화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웃고 떠드는 곳. 루벤은 연인 루이즈와 다시 만난 날을 기약하며 머물게 됐지만,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걸 알게 하는 건 루벤의 표정과 행동에 더해지는, ’정적’이다.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이 영화에서 ’정적’은 두 종류다. 하나는 웅웅거리는 소음과 함께 희미하게 들리는 일상의 소리. 다른 하나는 루벤을 제외한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다. 한마디로, 첫 번째 정적은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두 번째 정적’을 어떻게라도 들으려고 하는 루벤의 사투가 만들어낸 정적이다. 그래서일까? 루벤이 청각 장애 공동체에 적응할수록 영화는 첫 번째 정적이 아닌 두 번째 정적을 들려준다. 하지만, 두 번째 정적은 다르게 말해서 루벤이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루벤은 들리지도 않는 드럼을 치기 시작하고, 영화에선 다시 첫 번째 정적이 들려온다. 그 말은 루벤이 그곳을 떠난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모두가 알아챈다. 영화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소리(Sound)는 루벤 그 자체라고. 자연스럽게 영화명이 ‘사운드 오브 메탈’인 비밀도 풀리게 된다. 메탈 음악처럼 단단한 루벤이 여러 일을 겪게 되면서 나는 내면의 울림을 소리를 담았기 때문. 그렇게 생각하고 직역하면 영화명은 ‘루벤의 소리’가 된다. 하지만, 아직 소개하지 않은 루벤의 진짜 소리가 남았다. 내가 극장에서 듣고 싶은 소리. 공동체에서 나온 뒤, 영화는 굉음을 내며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메탈 음악처럼 질주한다. 로벤은 소리를 듣게 해준다는 임플란트를 심고, 연인 루이즈를 찾아간다. 약 끊고 해피엔딩을 맞이했듯, 소리를 되찾으면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거라 믿었지만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심지어 소리마저도 불완전하다. 의사 말에 따르면, 그건 진짜 듣는 게 아니라 기계를 통해 뇌가 듣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루벤, 그에게 남은 건 뒤통수와 귀에 어설프게 걸쳐진 기계뿐이다. 이제 루벤은 어떤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는 걸까? 루벤은 어느 ‘정적’도 선택하지 못한다. 두 번째 정적인 일상의 소리는 들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임플란트를 심어 기계음까지 섞인 첫 번째 정적도 듣고 싶지 않다. 루벤은 짜증 섞인 감정을 담아 귀에서 기계를 뽑아 버린다. 갑자기 이어지는 무음에 가까운 정적. 그런데? 앞서 경험한 공포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귀로 들리진 않지만, 느껴지는 무언가. 그때부터 영화가 들려준 것은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매우 특별한 소리다. 들을 수 없는데 더 잘 들리는 소리. 이게 착각이라도 좋다. 분명 루벤과 우린 뭔가를 듣고 있다. 이 부분을 다시 듣고 싶다. 실망한 루벤은 공원에 위치한 의자에 힘없이 앉아있다. 그의 눈앞엔 스케이트보드를 가지고 노는 두 명의 아이가 보인다. 그가 듣는 정적은 기계음으로 표현되는 괴이한 소리다. 사실상 소음에 가까운 정적. 그때! 기계를 벗자 사실상 무음 상태가 된다. 완전한 정적. 그 공허함 속에서 루벤은 다시 두 아이를 바라본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난 들었다. 한 아이가 보드 위에 올라가자 다른 아이가 치는 박수소리를, 하늘에 뜬 해를 가린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루벤의 표정도 뭔가를 들은 느낌이다. 아마도 내가 들은 것과 비슷한 걸까. 물리적으로 들을 수 없는걸, 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개연성 없는 설명인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유성영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현실에서 들리는 소리를 표현해서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소리를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운드 오브 메탈>은 들리지 않지만 들리는 소리를 보여준다.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 순간 루벤 주변을 채운 정적을, 그건 영화가 제시한 하나의 소리였다. 그의 마지막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웃고 있지 않았을까? 나처럼 당신도, 영화의 시작을 알린 거친 메탈 음악처럼 끝에서 흘러나온 강렬한 정적의 울림도 들었으면 좋겠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해줬기 때문일까, <사운드 오브 메탈>은 93회 아카데미에서 음향편집상과 음향효과상이 합쳐진 최초의 음향상을 수상했다. 나는 극장에서 <사운드 오브 메탈>을 들을 날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한 번 쯤은 달리기를 해봤을 것이다. 운동회의 릴레이든, 체력장의 오래달리기든 하다못해 트레이드 밀을 달린 경험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호흡의 중요성이야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릴레이를 할 때는 바통을 움켜쥔 채 단박에 내달렸을 것이며, 오래달리기를 할 때는 앞으로의 거리를 생각하며 페이스를 조정하지 않았을까. 뭐가 됐든 너무 많이 삼켜서도 너무 빨리 내뱉어서도 안 된다. 적절한 호흡이 있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여기 성긴 듯 급박한 호흡으로 나아가는 영화가 있다. 바로 홍원찬 감독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두 가지 흐름의 호흡을 통해 방콕에서 펼쳐지는 두 남자의 살인극을 그린다. 내러티브적 헐거움이란 성긴 호흡과 감정적 이음새로 이뤄진 액션의 급박한 호흡이 바로 그 두 가지이다. 그렇다면 먼저 내러티브적 헐거움이란 어떤 의미일까. 엄밀히 따져 영화는 극을 견인하는 치밀하고 뚜렷한 개연성을 제시하진 않는다. 그러나 영화 속 개연성은 부족할지언정 분명 존재하며 그가 진정 필요한가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정보를 전하는 영화의 흐릿한 흐름이 전략적 호흡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관객은 러닝타임을 따라가는 내내 이야기의 명확한 인과성을 얻을 수 없다. 영화는 ‘인남(황정민)’이 왜 하필 일본으로 떠났는지, 어쩌다 암흑가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 심지어 복수의 원인이 되는 ‘영주(최희서)’와 과거 어떤 특별함을 가졌는지도 제시하지 않는다.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는 인남의 대사와 엘리베이터 속 단 하나의 총격 씬만이 둘의 과거를 압축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불분명하다. 인남은 그저 시간이 흘러 영주가 죽었다는 전화 한 통과 그녀의 아이가 행방불명되었음을 듣고 방콕으로 향한다. 인남의 대척자 ‘레이(이정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레이는 인남이 자신의 형을 죽였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인남을 쫓는다. 형제의 과거가 간략히 언급되긴 하나 그들만의 특별한 무언가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는 흘러가는 줄곧 맹목적 복수의 이유를 뒷받침할 형제의 우애나 연인의 사랑 더 나아가 조명될 법한 인남의 부성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죽어버린 과거의 인연만이 복수를 헐겁게 부여잡을 뿐 복수를 담아두는 줄거리의 개연성과 호흡은 다소 느슨하고 성겨 보인다. 이는 영화가 복수극이 아닌 살인극으로 전환되는 이유기도 하다. 더하여 이런 전개에 앞서 느슨한 개연성은 하나의 전략으로 영화적 전환을 뒷받침한다. 치밀한 복수의 이유와 계획이 제시되었다면 영화는 호쾌하게 질주할 수 없다.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족한 개연성은 극을 이끄는 하나의 주요한 호흡으로 거듭난다. 이는 급작스레 시작되는 복수의 긴장감을 내뱉는 날숨의 과정이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터 몰아쳐 올 액션의 시작을 전제하는 주요한 바탕으로서 영화의 장치가 된다. 영화는 이렇게 개연성의 필요를 물으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바로 속도감 있는 액션이다. 듬성하니 채워진 복수의 뒤를 짚어 가던 관객은 점차 희미해지는 복수 대신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받는다. 바로 인남과 레이의 쫓고 쫓기는 액션 활극이다. 사실 이런 영화적 변환은 복수의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영화의 장소가 방콕으로 옮겨온 뒤 인남은 복수의 단서를 얻기 위해 사람들을 고문하며 살해하지만 결국 영주의 복수라는 근원에 닿지 못한다. 레이 역시 인남을 향한 살의의 이유를 잃어버린다. 즉 이들의 파괴 행위는 곧 복수라는 행위의 파괴이다. 결국, 관객과 두 인물이 새로운 선택지를 택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렇게 둘의 파괴 행위를 호쾌한 액션으로 재생하며 이전의 헐거운 개연성은 오히려 복수를 벗어던질 장점이 된다. 아이만은 살려 줄 수 없느냐 말하던 인남이 어느 순간 태도를 바꾸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더 이상 쫓아오면 넌 내 손에 죽는다.” 인남이 레이에게 전하는 대사이다. 이는 곧 영화의 내적 전환을 확언한다. 관객은 레이에게 향하는 인남의 태도 변화를 통해 그의 목적성이 변화하였음을 깨닫는다. 영화의 초반 영주의 복수와 아이의 행방을 위해 피를 흘렸던 인남에게 새로운 목적이 부여된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결과이자 내러티브적 선택이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연인의 복수(그 이유 역시 확실치 않고 불친절한)를 성긴 호흡으로 채워 왔다. 남은 시간 앞으로 내달리기에는 그 이유도 호흡도 부족하다. 새로운 숨을 들이마셔야 한다. 그렇기에 인남은 복수가 아닌 살인을 선언한다. 자신과 작은 아이의 몸뚱이 하나 간수하기 힘든 곳에서 그는 인간의 살인을 목표로 새롭게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그렇게 인남과 레이의 싸움은 후반부로 향할수록 속도를 더해간다. 영화는 변화했고 헐거운 복수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피 끓는 투쟁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호흡의 매개는 무엇일까. 둘의 이야기가 액션을 위주로 변화되었다고 해도 영화는 분명 그 원동력을 가져야만 한다. 영화의 줄거리가 다소 힘을 잃었다고 해도 단지 그렇게 둘 수 없음만은 분명하다. 벌어져 가는 영화를 단단히 부여잡는 것은 바로 인남과 레이 두 주인공이 내뿜는 뜨거운 감정이다. 이것이 바로 점차 벌어져가는 복수를 접합시킬 아교이자 호흡이다. 이들이 가지는 맹목적 살의와 파괴성은 피를 연료로 삼아 영화를 불태운다. 하늘을 적시는 붉은 노을과 둘의 싸움으로 불타는 거리의 연기는 두 남자의 매연인 것이다. 영화는 두 인물의 대치와 그들이 표출하는 감정으로 달려가는 관객의 호흡을 다시 한번 정렬시킨다. 많은 대사는 필요치 않다. 둘의 눈빛과 부딪히는 육체만으로도 다소 심심했던 영화의 흐름은 활기를 띈다. 이런 영화적 흐름은 레이의 대사를 통해서도 구체화된다. 왜 그렇게 인남을 죽이고 싶어 하냐는 질문에 레이는 “더 이상 이유는 중요치 않아.”라고 답한다. 그렇다. 이는 곧 영화적 변화를 매듭짓는 결정타이며 극의 마무리를 내정하는 한 줄이 된다. 줄곧 언급했듯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복수와 그 과정에서 살인과 생존으로 옮겨갔다. 두 인물은 더 이상 복수의 원인과 결말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리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자 한다. 끈적한 살의를 품은 액션은 성기던 영화의 호흡을 급박하게 바꾼다. 치밀하지 못했던 복수로 비어있던 스크린의 빈틈은 이렇게 투쟁적인 들숨으로 가득 찬다. 마침내 숨은 영화의 말미 턱을 뚫고 뛰쳐나온다. 영화의 마지막, 인남과 레이는 부서진 자동차 속 피투성이가 된 채 나란히 죽어간다. 레이의 대사가 인상 깊다. “결국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인남은 레이를 그저 조용히 바라볼 뿐 어떤 말도 행동도 없다. 이는 곧 인남의 긍정이자 레이의 긍정이다. 둘은 죽어가는 와중 서로의 곁을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단순히 생명력을 잃어가는 몸은 문제가 아니다. 인남도 레이도 어느새 복수의 이유를 잃은 채 그저 서로를 죽이고자 달려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다. 조용히 앉아있더라도 더는 숨을 들이마셔 달릴 힘이 없다. 달릴 수 없다면 멈춰야 한다. 성긴 호흡으로 시작된 발걸음이 이리도 빠른 헐떡거림으로 바뀌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말이다. 느린 듯 성큼성큼 나아갔던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전력을 다하는 달음박질이 되었다. 호흡 역시 그에 따라 조금씩 거칠어져 흐트러진다. 영화가 빨라지는 만큼 거칠게 변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 어떤 달리기라도 결승선은 존재한다. 무엇을 보았든 무엇을 위해 달렸든 주자는 결국 결승선에서 멈춰 선다. 복수로 시작해 살인이란 생존으로 달려갔던 인남과 레이. 둘은 단지 죽음이란 선에 멈추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