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에 후회는 없다
- 감독
- 구로사와 아키라
- 제작년도
- 1946
- 출연
- 하라 세츠코, 후지타 스스무, 오오코우치 덴지로, 수기무라 하루코, 미요시 에이코, 코도 코쿠텐, 코노 아키타케, 시무라 다케시, 후카미 타이조, 시미즈 마사오, 타나카 하루오, 히카리 카즈, 하라 치사코
영화에서 오마주(homage)라는 말은 누벨바그 세대와 함께 도착했다. 그들은 파리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학습’했고, 그런 다음 자신들이 경배하는 위대한 거장들의 영화에 대한 존경을 자신의 영화에 담기를 원했다.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의 첫 장면, 미셀과 그의 애인이 파리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은 로셀리니의 < 이탈리아 여행 >의 첫 장면이다. 영화 장면 안에 등장한 오마주는 영화사에 시네필 세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누벨바그 세대가 존경을 바쳤던 대부분의 거장들이 영화가 태어난 1895년과 거의 동시에 태어났다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들은 문법을 만들었고, 개념을 발명했으며, 과학이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하나의 역사, 하나의 전통, 임권택 을 시네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신에게 아마도 가장 낯설게 들리는 표현일 것이다. 우리들이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영화를 보기 위해 거리를 떠돌 때 임권택은 영화를 찍으면서 길거리와 세트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임권택은 취미에서 시작한 영화감독이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직업감독이었다. 하지만 임권택의 1960년대 영화들에서 불규칙하지만 반복해서 마주치는 이상한 명단이 있다. 오마주를 바치는 것만 같은 영화들. 리메이크라고 하기에는 원작이 너무 희미하고, 그저 아이디어를 가져왔다고 하기에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흔적을 남겨놓은 영화들. < 남자는 안 팔려 >와 빌리 와일더의 < 뜨거운 것이 좋아 >. < 바람같은 사나이 >와 존 스타제스의 <황야의 칠형제>.(그때 임권택은 <황야의 칠형제>의 원본인 <칠인의 사무라이>를 아직 보지 못했다) < 30년만의 대결 >과 존 포드의 < 아일랜드의 연풍 >. 게다가 그 영화들과 원작을 연결시켜 질문할 때마자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셨다. “그때 그 영화를 너무 재미있게 본 거에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나는 그 대답을 하시는 순간의 표정에서 기쁨의 시간을 읽는다. 그 대답에서 임권택 감독님은 자신의 영화를 뒤로 밀어버리고 그 바탕에 있는 밑그림으로서의 영화, 아마도 기억 안의 원(原)텍스트라고 불러야 할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기원에로 거슬러 올라갔다. 영화를 본다는 경험, 임권택은 영화를 체계적으로 ‘학습’할 수 없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벨바그 세대는 앙드레 바쟁의 지도를 받았고, 앙리 랑그루아의 프로그램으로 고전을 보았으며, 서점에서 수많은 영화서적을 구할 수 있었다. 임권택은 첫 영화를 1962년에 찍었다. 그때까지 그는 단 한 권의 영화책도 읽을 수 없었다. 영화를 만드는 법을 배움. 배운다는 문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어떻게 배울 것인가. 학교 바깥에서 영화를 배운다는 문제. 혼자서 스스로 영화를 배운다는 문제 앞에 서야 했을 때 임권택은 (고전이 아니라) 개봉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갔다. 그가 좋아한 영화들, 자기가 감탄한 장면들. 하지만 제한적인 목록. 임권택은 그때 한국전쟁이 막 끝난 다음 폐허와 다름없는 서울에 있었다. 한 가지 사실을 환기시켜 주겠다. 그때 아직 남한에는 텔레비전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무도 임권택에게 영화에서의 미학적 문제에 대한 질문의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을 때 임권택은 무엇이 영화에서 가치 있는가, 에 관한 질문을 정식화시킬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정반대의 자리에 있던 하이데거와 아도르노는 거의 동시에 예술에서의 진리, 라는 질문을 서로 다른 빙식으로 제기하였다. 누벨바그 세대들은 틀림없이 그들의 지도자 앙드레 바쟁이 귀도 아리스타르코와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은 주제인가 형식인가를 놓고 논쟁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사회적 내용과 주제에 우선하는 미학적 형식의 기준. 영화에서의 질문의 위계질서. 이 논쟁은 아마도 하나의 강령이 되었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임권택은 새로운 영화의 시작과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었다. 그 안에 들어왔지만 수수께끼와 같은 질서들. 쇼트의 접속. 왜 어느 순간에는 기적 같은 경험을 안겨주는데 어느 자리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것일까. 이 문제가 단순하게 시나리오나 대사, 연기의 결함이나 부족에서 멈추지 않고 영화의 내재적 시청각 기호들의 오작동으로 귀결될 때 이 예술은 세계의 무질서에 대해 항상 자기의 질서, 세계와의 사이에서 가져보는 자기의 규칙, 세계와 영화를 연결하는 순간 사이의 연결의 미학에로 이어지는 질문에 이끌렸을 것이다. 임권택의 질문. 그때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을 찾았다. 왜 어떤 영화는 나를 즐겁게 만들고 어떤 영화는 그렇지 않은가. 그 즐거움은 무엇인가. 즐거움의 즐거움, 즐거움의 정체. 정체의 이면. 이면의 질서. 질서의 규칙들, 그 즐거움은 어떻게 이루어져있는가. 심지어 임권택은 그런 영화중의 한 편을 프린트를 구해서 그 즐거움의 순간을 프레임 단위로 들여다보았다. 그때는 영화를 손 안에 넣을 기회가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아직 텔레비전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마도 편집실에서 릴을 걸어놓고 보았을 것이다. 그런 영화중의 한 편이 조지 스티븐스의 웨스턴 <세인>이었다. 임권택은 이 영화에서 맛 본 즐거움의 체험을 몇 번이고 말했다. 1956년 11월 2일에 서울에 개봉한 영화. (그때는 대도시에 먼저 개봉한 다음 프린트가 지방 소도시로 배급되었다) 임권택이 정창화 의 연출부를 할 때였다. 1953년 파라마운트가 테크니컬러로 제작한 < 셰인 >은 웨스턴의 영화사에서 < 하이 눈 >과 함께 고전 웨스턴의 시대를 끝내고 이 장르를 변덕스럽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셰인>에게 찬사를 바쳤고(미국 영화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는 웨스턴사상 베스트 10에 선정했다) 누군가는 이 영화에 탄식을 했다. 앙드레 바쟁은 이 영화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그는 <셰인>을 ‘쉬르 웨스턴(Sur-western, 이 정의를 휴 그레이는 영어로 옮기면서 ‘Super western’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이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박상규는 이 표현을 ‘초(超)웨스턴’으로 옮겼다. 쉬르레알리슴(超現實主義)에서 가져온 접두어일 텐데 또 다른 오해의 여지가 있다. 여기서는 ‘발음’으로 옮겼다)’이라고 불렀다. 바쟁은 이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쉬르 웨스턴’들은 고전 웨스턴들과 달리 자신이 웨스턴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이 장르 바깥에서, 이를테면 사회적이거나 도덕적인, 그리고 심리적이거나 정치적인, 혹은 다른 미학적이거나 에로틱한 무언가. 말하자면 이 장르 바깥으로부터 무언가를 가져와 자신의 수치를 정당화시키고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라고 공격하였다. (‘웨스턴의 진화’) 여기서는 <셰인>을 공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반대로 바쟁은 <셰인>을 공격하면서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매혹에 대해서 어떤 찬사의 글보다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다. 먼저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셰인>은 1889년 존슨 카운티 전쟁, 혹은 와이오밍 평원 전쟁으로 알려진 개척민과 토지 소유주들 사이에서 벌어진 유혈참극에서 느슨하게 가져온 이야기이다. <셰인>보다 본격적으로 이 소재를 다룬 영화는 마이클 치미노의 < 천국의 문 >이다. 가난한 개척민 마을에 허름한 차림에 점잖고 예의바른 총잡이 한명이 찾아든다. 셰인이라는 이름의 남자. 아무도 이 사람을 알지 못하고 그 자신도 과거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이 낯선 남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이 마을의 조 스타렛이다 그는 가난하지만 정숙한 아내 마리안과 어린 아들 조이와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걱정은 토지 소유주 라이커와 그 일당이 계속해서 이들이 힘들게 개척한 땅에서 쫓아내려는 것이다. 라이커와 그의 일당이 폭력을 행사할 때 과묵하고 조용한 셰인은 숨겨져 있던 그의 솜씨를 보여준다. 조이는 그 모습을 보고 셰인을 영웅처럼 존경하고 조의 아내 마리안도 자신도 모르게 이 남자에게 이끌린다. 그걸 셰인도 알지만 모른 척 한다. 라이커는 개척민들을 몰아내기 위해 쌍권총 총잡이 잭 윌슨을 고용한다. 검은 옷을 입은 이 사내는 도착하자마자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을 해치운다. 라이커는 조 스타렛에게 대결을 하자고 제안하지만 셰인이 대신 그 자리에 간다. 그리고 순식간에 총을 뽑아 잭 윌슨과 라이커를 해치운다. 셰인은 거기까지 쫓아온 조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와이오밍 평원 저편으로 떠난다. 어린 소년 조이가 멀어져가는 셰인을 향해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대사 중의 하나를 외친다. “돌아와요, 셰인” 평원의 메아리. 바쟁은 <셰인>이 신화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바쟁에게 웨스턴은 비극의 윤리학이었다) 이 영화에서 셰인은 성배를 찾는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 중의 한명인) 것처럼 보이며, 게다가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그저 신비로운 복장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웃듯이 말한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셰인>을 매혹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놓쳤다. 신화와 비극의 거리. 신비로운 주인공. 나는 거기에 이 주인공의 특징을 한 가지 더하고 싶다. 아무런 목표가 없는 주인공. 바쟁의 표현을 빌린다면 불가능한 목표에 이르기 위한 무한정한 방랑. 대지를 떠돌아야 하는 ‘나그네’(‘Wanderer’는 '산책자‘가 아니다)의 멜랑코리. 그래서 이 주인공은 무엇보다 우울하다. 이 우울한 주인공은 목표가 없기 때문에 종종 우유부단하게 보인다. 그 우울한 우유부단이 보는 쪽을 매혹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안고 있는 슬픔. 왜 세계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라고 자기 스스로에게 부여한 고난의 슬픔에 머물 때, 거기서 발생하는 세계와 나 사이의 불화. 그 불화하는 세계가 역사에 기대어 있을 때 그 역사의 무게 아래에 눌려 찌그러지지 않기 위해 거기서 물러났을 때, 그래서 그 불화에 들어서지 않기 위해 그 입구를 스스로 차단했을 때, 나는 역사의 시간 안에서 삭제되는 것이다. 그때 경험하는 우울한 우유부단은 세상 안에 있으면서 역사 바깥에 놓여있는 자리, 이것도 아니면서 저것도 아닌 (아감벤이 쓰는 표현을 빌리면) 시시한 자리에 가는 행위의 제스처이다. 임권택에게 <셰인>과 (펠리니의) <길>은 보는 쪽의 자리에서만 말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같은 영화이다. 어쩌면 둘 중 한 쪽, <셰인>과 < 풍운의 검객 > 중 어느 한 편만을 보았다면, 그래서 다른 한 쪽을 줄거리만으로 알고 있다면 다른 한 편이 잘 떠오르지 않을 만큼 두 편의 영화는 멀리서 쳐다보는 서사가 아니라 그 안에서 들여다보는 장면의 디테일에서 서로 겹친다. 한 가지 사실을 더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임권택은 처음부터 조선시대 사극을 자신의 영화적 무대로 삼았다. 이미 세 번째 영화 < 망부석 >에서 사도세자와 그의 아내 혜경궁 홍씨, 그리고 정조의 이야기를 궁궐 안을 무대로 실타래처럼 얽은 이야기를 풀어헤치고 묶으면서 고유한 유형의 매듭으로 고유한 장소를 만들어냈다. 분명히 임권택은 조선시대 사극의 대가인 신상옥 으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임권택은 늘 겸손하게 그건 내가 연출부를 했던 정창화 감독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그리고 그건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모든 인물들을 감싸 안는 정념의 연쇄고리들은 전적으로 임권택의 것이다. 하지만 <풍운의 검객>은 이상하게도 <망부석> 혹은 < 십년세도 >에서 보여주었던 조선시대 사극의 사료적 근거가 반사하는 것만 같은 장소의 질서, 인물들 사이의 위계질서. 질서가 빚어내는 운명, 그 안에서의 복종과 같은 역사와 서사 사이의 유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둘 사이의 친화성이 희미해졌다. 그 유사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조선시대는 기괴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워졌고 그 대신 거의 절대적이었던 질서의 체제, 그래서 숨 막힐 것처럼 촘촘하게 그 곁에 연이어 이어 붙여놓았던 제도의 고유한 거리들의 일부가 사러지거나 거의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대신 여기에 들어선 것은 조선시대 바깥에서 온 것 같은 인물의 등장이다. 이따금 전시하는 거의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는 무술. 왜 여기에 왔는지 설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화 안에서도 설명하지 않)는 인물. 길을 잃지 않기 위한 가이드로서의 줄거리. 하지만 <풍운의 검객>은 줄거리의 독후감과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의 감상의 디테일 사이의 간극이 이상할 정도로 큰 영화라는 걸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 바란다.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조선시대. 왕은 병석에 누워있고 간신들이 날뛰고 있는 시절.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최괄은 희빈 문소이와 함께 왕이 별세하면 문소이가 낳은 아들 달지를 왕위에 옹립하기 위해 자객들을 보내서 왕자들을 차례로 제거한다. 어느 날 밤 어린 왕자를 해하려는 순간 복면을 쓴 검객이 나타나 그들을 물리친다. 그 무렵 한양 주막가에 자신을 방갓이라 칭하는 나그네가 한 명 나타나 뛰어난 무술 솜씨를 보여준다. 그의 무술을 높이 평가한 달지는 그를 자신의 수하에 둔다. 그런 방갓을 보고 달지가 관심을 기울이는 기생 연화가 연모하는 마음을 품는다. 방갓은 최괄의 집에 매달린 초롱에 화재를 일으킨 다음 몰래 빠져나가 옥에 갇힌 영의정 김종성의 딸 난실을 구한다. 그때 우연히 그걸 달지의 집을 방문한 연화가 보게 된다. 난실은 자신을 구해준 방갓에게 감사의 뜻으로 자신의 노리개를 건네주면서 연모하는 마음을 품는다. (기이한 우연과 사건이 겹친 다음) 달지는 방갓이 자신을 방해하려는 목적을 지녔음을 알고 그를 제거하려고 한다. 최괄은 방갓이 무술이 뛰어남을 알고 또 다른 무술의 고수인 백운선생을 부른다. 한편 연화는 방갓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난실에게 끌린다고 오해하고 그가 난실과 은거하고 있는 산 속의 암자를 달지에게 알려준다. 달지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백운선생이 방갓을 찾아냈을 때 알게 되는 것은 방갓이 백운선생의 제자라는 사실이다. 백운선생은 방갓이 살생을 일삼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꾸짖는다. 스승의 부름 앞에 제자는 저항하지 않고 항복한 다음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해였음을 연화가 백운선생에게 알리고, 백운선생은 감옥에 갇힌 방갓을 구한다. 백운선생은 상소문을 올려 최괄과 문소이가 역적모의를 했음을 알리고 다시 떠나지만 달지에게 죽음을 당한다. 방갓은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여기고 연화와 난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막아선 달지를 물리친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갓을 지켜보던 소년은 떠나가는 방갓의 등 뒤에서 큰 소리로 부른다. “아저씨” 하지만 그 소리는 바람소리에 묻힌다. 방갓은 뒤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분명히 <풍운의 검객>은 <망부석> 혹은 <십년세도>로부터 멀어졌다. 아쉽게도 나는 그 사이에 놓인 < 영화마마 >, < 왕과 상노 >, < 닐니리 >, < 청사초롱 >을 (네가 프린트가 사라져서) 보지 못했다. 네 편의 영화. 나는 그 영화들을 건너뛰면서 상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단절이라고 할 만한 정도의 태도를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설명해도 <풍운의 검객>은 조선시대에 머물고 있다. 장르로서 반복 안의 차이. 그리고 디테일에서의 차이 안의 반복. 그 안에서 일부 인물들은 그들 자신이 놓여있는 시대에 복종하고 있지만 일부 인물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이 부정은 저항이 아니라 억압된 것을 인정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의 어떤 결과가 자유를 얻게 된다, 라는 프로이트의 설명을 고스란히 따라 가보고 싶게 만든다. 나는 여기서 앙드레 바쟁의 웨스턴에 대한 견해를 뒤집어 다시 세우고 싶다. 왜 그럴 필요가 있는가. 바쟁은 쉬르-웨스턴의 영화들을 공격하면서 이 영화들이 자기가 놓여진 시대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냉전시대의 매카시 ‘레드 페이퍼’를 알리바이로 삼는 것으로부터 이 장르를 구해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나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과도하게 뒤집어 쓴 알리바이. 하지만 영화가 자기의 책임, 모순, 법적인 제도, 복잡한 층위에서 요구하는 정치적인 상황, 경제적인 관계, 그 안에서 하나의 통일을 부여하려는 예술의 전투 혹은 타협, 그 전투 혹은 타협의 주관적인 결정과 객관적인 한계, 그 모든 것의 결정으로서의 역사를 형식의 일시적인 진공상태로 정지시키는 것에 대해서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제 자리로 돌아간 영화. 나는 재빨리 원래의 자리에 돌아오고 싶다. <풍운의 검객> 안의 새로운 인물들, 가까스로 세워놓은 배경을 어지럽히는 행동들, 이 행동이 만들어내는 사건. 그것들은 임권택이 이제까지 복종했던 조선시대 사극에 대한 하나의 시험이다. 어떤 시험? 임권택에게 할리우드 영화들, 그 중에서도 웨스턴 영화들, 그 중에서도 (바쟁의 분류에 따르면) 쉬르-웨스턴들은 이상적인 유토피아 모델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극 모델 안에서 웨스턴 영화를, 쉬르-웨스턴을, <셰인>을 진행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라는 하나의 시험. 그 둘은 겹쳐놓아도 괜찮은 것일까. 그 둘은 서로 공존 가능한 것일까. 그 둘은 분명히 다르지만 그러나 어딘가에서 닮은 것을 찾아낼 수는 없을까. 모방은 탐색이다. 무엇에 대한? 유사한 기호들.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라는 시험. 하지만 이건 위험한 시험이다. 왜냐하면 서로 완전히 다른 배경의 무대는 그것이 작동되기 시작할 때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때려 부술 지도 모른다. 이 폭력적인 접근의 교집합. 이때 교집합의 자리에 놓인 주인공은 이유 없는 자신의 고난 앞에서 아무 것도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우유부단해지고 그 공허한 행위 속에서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러 관점에서 다시 정의내릴 수 있는 <풍운의 검객>은 이 수수께끼의 검객 방갓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개연성을 놓고 질문을 하면 의문이 떠오른다. 방갓은 왜 한양 한 복판에 나타난 것일까. 그는 왜 어린 왕자와 옥에 갇힌 난실을 구하는 것일까. 왕자도, 난실도 그가 누군지 모른다. 그는 왜 목숨을 걸고 최괄과 희빈 문소이의 음모를 방해하는 것일까. 그 이유가 시나리오에는 있다. 방갓은 수문장 손호관의 아들 손용운으로 그의 가족이 최괄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어린 나이에 혼자 살아남은 다음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 방갓의 모든 행위를 이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로 옮기면서 방갓의 사연, 차라리 손용운이라는 인물 자체를 삭제시켜 버렸다. 우리는 끝까지 방갓의 사연을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추론은 그 스스로 내내 쓰고 다니면서 자신을 ‘방갓’이라고 부르는 모자를 통해 희미하게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삿갓과 달리 방갓은 부모의 상(喪)을 당한 상제가 외출을 할 때 쓰는 모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누구도 방갓에게 부모의 상을 당한 슬픔에 대해서 위로하거나 질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모자는 내용 없는 기호로 그와 함께 내내 머문다. <풍운의 검객>에는 대사가 없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이를테면 최괄의 하인들, 달지의 부하들. 장안의 오가는 백성들. 하지만 방갓을 쓴 사람은 방갓뿐이다. 그럼으로써 방갓은 그 모두로부터 방갓을 분리해내는 기호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두 번째 특별한 점. 방갓은 자기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 약속은 살생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물론 살인에 대해서는 불교, 유교, 그리고 기독교, 같은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다. 여기서 방갓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살인의 위협을 가하는 경우에도 그를 물리치거나 무력화시킬 뿐 거기서 멈추는 그 자신과의 약속에 있다. 그 약속이 스승 백운도사와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한참 뒤에 방갓을 에워싼 달지의 수많은 부하들의 칼과 맞서야 할 때, 그래서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칼등 대신 칼날을 휘둘러야 했을 때, 그때 그 자리에 나타난 백운도사의 입을 통해서이다. 이 약속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영웅의 조건. 단지 뛰어난 무술과 빼어난 지략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다. 그래서 방갓에게 선과 덕을 요구한다고 말하면 그건 요점을 놓친 것이다. 영웅이 영웅이 되는 순간은 그가 시련이라는 시험을 통과하고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이다. 임권택은 이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에 틀림없다. 그의 주인공들은 종종 이 시련을 통과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신체의 일부를 상실하거나 부서졌다. 그 시련은 점점 혹독해졌으며 임권택의 ‘다찌마와리’ 액션 장르영화 시기에는 잔혹함을 넘어서서 (상황에서) 기괴하고 (감정적으로) 굴욕적이며 차라리 거기서 멈춰 서서 그 과정 자체에서 어떤 기쁨을 누리는 것만 같은 도착으로까지 밀고 나아갔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이 과정은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 심지어 1970년대 새마을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은 운동의 지도자로 거듭 나기 위해서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아마도 이 과정의 가장 복잡하고 기이한 정식화는 이청준의 원작 소설을 빌려 한(恨)을 품어야만 더 높은 예술의 경지에 이룰 수 있다는 판소리 예술가들에 관한 두 편의 영화 < 서편제 >와 < 천년학 >일 것이다. 나는 이미 반복해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밀고 나아갈 것이다. <풍운의 검객>에서 임권택은 이 질문을 아직 정식화시키지 않았다. 대신 주인공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조선시대 안에 어떤 틈을 만들어내고 있다. 차라리 주인공을 조선시대로부터 소외시키면서 장르와의 사이를 분리시키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주인공 방갓이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고 영웅이 되면서 그 자신에게 충만하면 할수록 조선시대는 점점 공허해진다는 것이다. <풍운의 검객>은 (바쟁의 정리에 의지해서 말하자면) <셰인>이 웨스턴에서 한 것을 조선시대에 대해서 하고 있는 중이다. 임권택은 자기가 시작했던 무대를 자기의 방법으로 부정하는 중이다. 방갓은 이 공허한 무대에서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기호들 사이를 오가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걸고 무언가를 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그걸 왜 하는 지 끝내 알지 못한다. 무언가, 라는 행위와 왜, 라는 이유, 사이의 간극에서 방갓은 영웅의 시련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지만 그 시련의 대가는 그에게 무의미한 조선시대로부터 거의 우주적인 텅 빈 영화 바깥의 세계에로 어떤 선택의 여지없이 다시 떠나야한다는 운명적인 결론이다. 그때 이 우주는 어둠 속으로 무엇이든지 집어삼켜버린 다음 소멸시켜버리는 심연에 다름 아니다. 임권택은 영웅적인 죽음대신 차라리 여기서 영웅적인 소멸을 선택한다. 죽음과 소멸 사이의 간극. 이 절망적인 매혹, 나는 아무 것도 세상에 남기지 않고 사라버리고 싶습니다. 세상이 내게 부여한 임무가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그걸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호의 밤. <풍운의 검객>에서 영웅적인 과정은 사실상 소멸 앞에서의 잠시 동안의 머뭇거림이다. 하지만 세 번째 특별한 점에 비교하면 두 번째 특징은 아무 것도 아니다. <셰인>에서 셰인은 마리안이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마리안과의 로맨스를 외면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호의를 베풀어준 그녀의 남편 조 스타렛과의 우정 때문이다. 물론 마리안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제스처를 노출시킬 뿐이다. 좀 더 복잡한 설명도 있다. 셰인은 이 마을에 머물 생각이 없기 때문에. 단지 이 마을뿐만 아니라 어떤 공동체에도 머물 생각이 없기 때문에 마리안이 아닌 누구와의 로맨스도 거절했을 것이다, 라는 가설이다. 왜 웨스턴의 주인공이 광야(wildness)에서 공동체에 왔다가 다시 광야로 떠나가는지에 관한 긴 이론이 있다. 하지만 그 이론은 우리의 논점과 아무 상관이 없다. 단지 세 번 밖에 총을 뽑지 않는 <셰인>은 셰인과 마리안과의 감정적 긴장에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점에서 웨스턴이라기보다는 로맨스 멜로드라마에 더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풍운의 검객>도 로맨스에 더 가까운 (일종의) 기사도 서사이다. 처음에는 방갓이 달지의 아흔 아홉 칸 대궐 같은 저택에서 벌이는 신출귀몰하는 지략과 음모의 모험극처럼 시작하지만 이 서사 안으로 연화와 난실이 들어오자 갑자기 두 여자가 방갓에게 보내는 정념의 로맨스로 바뀐다. 연화는 방갓을 보자마자 그가 이 서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달지가 그녀에게 보내는 관심을 외면한다. 난실은 방갓이 그녀를 옥에서 구하자마자 처음 보는 그에게 자신이 품고 있던 노리개를 건네주면서 (연인들 사이에 나누는) 정표로 삼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방갓을 사이에 두고 난실과 연화는 사랑, 질투, 분노, 원망, 하여튼 그녀들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서로 경쟁적인 로맨스의 감정을 조금도 숨길 생각 없이 드러내놓고 신호를 보낸다. 이때 방갓은 둘 사이의 선택에서 어떤 고민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둘 중 누구도 선택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방갓은 그녀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둘 사이에 균형을 맞추면서 항상 친절한 태도로 대하지만 어떤 장면에서도 로맨스의 신호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는 둘 중 누군가에게 실망을 시킬까 두려워 거짓 거절을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거절하는 척 하는 사랑. 우리들이 로맨스 소설에서 이미 읽은 냉담한 실패를 목표로 한 사랑의 거짓 제스처. 거절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의 변주들). 방갓이 이 로맨스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서사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서사 바깥에서 누군가 (이를테면 집에서 기다리는 그의 아내) 방갓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며. (그래서 어딘가를 가야하는 도중에 벌어진 일에 말려든 것이 아니며) 거기에 또 다른 계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알고 보니 이 일은 왕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임무였다, 라는 이중 플롯) 아무 것도 숨기지 않은 두 여자의 속마음. 무조건적인 정념. 오히려 삼각관계에 놓여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일관되고 단조롭게 설명할 수 없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진행되는 방갓의 거절은 오히려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여기서 누구도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는 걸 먼저 계산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때 어떤 로맨스도 받아들이지 않는 방갓의 선택은 그의 적들에게 살생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약속과 결합하면서 그가 ‘나그네’라기보다는 불가에 입문한 승려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풍운의 검객>에서 불교의 어떤 기호도 발견할 수 없으며, 또한 그런 가르침을 내린 방갓의 스승 백운도사도 스님이 아니다. 이때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두 여자, 난실과 연화의 대조적인 사회적 신분이다. <풍운의 검객>의 무대가 조선시대라는 것을 환기시키겠다. 난실은 영의정 김종성의 무남독녀 영애이다. 조선시대에 시기별로 그 지위가 변하였으나 (<풍운의 검객>은 정확한 연대를 표기하지 않았다) 한때 의정부 최고의 자리였으며 그 아래 좌의정과 우의정을 두고 조선의 국사를 결정하던 자리. 그 지위의 근대적인 번역은 갑오개혁에 이르러 고종의 명에 따라 영의정을 총리대신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봉건제 왕권국가에서 임금 바로 아래의 관직.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딸. 연화는 그녀가 아무리 호사스러운 장안의 기방(妓房) 여주인이라 할지라도 유교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기생의 신분이다. 우리는 ‘춘향전’에서 서예와 가무에 능한 성춘향은 어머니가 기생이지만 그녀는 엄연히 기방에 등록하지 않은 여염집 규수인데도 기생의 딸이라는 이유로 남원 사또 변학도에게 술시중을 들지 않는다고 불려가 고초를 당하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방갓이 두 여자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는 선택은 그 둘이 반대의 자리가 아니라 비대칭의 위치에 있다. 여기서 조선시대는 임권택의 영화 안으로 이상한 우회를 거쳐 회귀한다. 내면화된 조선. 오른 쪽에는 난실이 있다. 영의정 김종성의 가문이 지금은 최괄과 희빈 문송이의 음모로 화(禍)를 당하고 난실이 한양 바깥으로 쫓겨나 그녀의 몸종처럼 데리고 다니는 어린 소년과 지내고 있지만 그 음모를 밝히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으면 난실은 다시 명문가의 자리에로 되돌아갈 것이다. 지금 바로 그것을 하기 위해 방갓은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게 <풍운의 검객> 서사의 전부이다. 이때 이 서사의 무대로서의 역사는 감정의 세계가 아니라 왕조차 복종해야하는 질서에 지배받고 있는 국가이다. 무대는 배경에서 멈추지 않고 그 서사의 토대라는 더도 덜도 아닌 근거의 지평을 인정해야 한다. 영화가 끝난 다음, 그러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난 다음의 첫 번째 장면을 떠올려보자. 지금 한양 바깥 산속 암자에서 지내는 처지이지만 난실이 다시 복권하고 원래의 자리에 갔을 때 방갓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없다. 난실은 지금이 예외의 상태이지만 방갓에게 원래의 자리라는 것은 없다. 나그네의 자리. 일시적인 잉여의 위치. 조선시대는 신분사회였고, 양반은 사회의 기득권을 소유하고 있는 계층이었으며 그들을 천민들과 분리하였다. 난실은 그 중에서도 최고위층의 사대부 집안, (한 번 더) 그 중에서도 영의정의 자식이다. 난실이 방갓을 허락한다 할지라도 그녀의 (어쩌면 남아있는) 가족, 가족의 친척들, 그녀가 되돌아온 사대부, 그들을 둘러싼 선비들, 그 모두를 구성하는 신분사회인 조선은 방갓이 그들 사회에 진입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관한 사극영화의 멜로드라마 서사들. 양반집 따님, 혹은 남편을 잃은 과부가 하인과 사랑에 빠졌다가 맞이하는 비극에 관한 이야기들. <풍운의 검객>은 방갓이 난실의 로맨스 제안을 받아들이면 마지막 장면 디음 장면은 정확하게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멜로드라마 영화를 반복하는 비극의 첫 장면이 될 것이다. 이번에는 왼 쪽을 볼 차례이다. 이때 연화는 난실의 반대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둘은 옆이 아니라 위와 아래의 자리에 완강하게, 거의 불변의 위치에서, 사회적 조건 아래, 고정된 상태로 머물 것이다. 조선시대에 기생은 신분 중에서도 가장 낮은 천민에 해당했다. 물론 기생들 사이에서도 다섯으로 나뉜 등급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 으뜸인 일패기생(一牌妓生)은 임금 앞에서만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아마도 달지를 상대하는 연화는 문무백관만을 상대하는 이패기생(二牌妓生)이었을 것이며, 이패기생 중에는 가무와 서예로 한양 장안에서도 그 명성이 드높은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신분이 상승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조선은 유교의 원리가 가치였던 사회였다. 남녀유별, 남녀칠세부동석, 의 가치아래 남자들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권하는 여자들은 유교라는 텍스트를 난잡하게 만들고 올바른 도덕적 삶에 대한 타락의 사례가 되었다. 도덕은 유교에서 명령이다. 나는 똑같은 가정을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방갓은 난실대신 연화를 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이상한 장면. 방갓은 난실의 노리개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연화의 기방을 찾는다. (그런데 이게 위험을 무릅쓸만한 일인가) 연화는 그때 자기를 보고 싶어 찾아온 것으로 오해하고 방갓에게 안겨 자기의 속마음을 고백한다. 이때 방갓은 매장하게도 난실의 노리개를 찾으러 왔다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방갓의 태도에 관한 질문, 이 방문을 통해서 방갓은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표면적인 진정한 목표는 (이 이중적인 표현을 주의 깊게 읽어주기 바란다) 노리개가 아니라 연화를 실망시킴으로써 그녀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론. 가장 단순하게 그 행위가 다른 남은 선택인 난실을 위한 것이라면, 혹은 반대로 연화를 실망시킴으로써 자신에 대한 감정을 바꿔놓기 위해서라면, 어느 쪽을 향하건 사랑의 퍼포먼스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방갓은 어느 쪽도 선택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이 공허한 방문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이때 방갓을 둘로 찢어서 생각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방갓은 자시니 난실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현실적인 연화에게도 향한다. 방갓은 정말 연화를 받아들일 마음으로 자신의 진정한 상대는 연화라는 대상에게 일시적인 판단을 했을 수 있다. 그래서 난실의 노리개는 핑계이며 연화와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여기에 왔(을 수 있)다. 그런데 마치 방갓의 속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연화는 흠모하는 자기 마음을 고백한다. 만일 그런 마음으로 여기에 왔다면 방갓은 왜 그 고백을 거절하는가. 여기에 도착하는 전까지 방갓에게 연화는 어떤 대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도착하여 고백을 듣는 순간 어떤 대상이 연화가 되는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서로 완전히 다른 자리라는 것이다. 도착하기 전까지 연화는 대상이긴 하지만 방갓이 알 수 없는 어떤 존재였다. 그러므로 연화는 방갓에게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연화가 자신을 방갓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이라는 대상으로 고정시키는 순간 연화는 즉시 단순하게 사랑의 감정에 고정된 존재로 축소된다. 그러므로 질문은 단순해진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왜 여기서 질문은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가 아니라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라고 옮겨진 것일까. 로맨스 서사의 무대가 조선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을 다시 번역하면 당신은 기생인 나를, 천민인 나를, 유교의 가치 아래 세상 사람들이 경멸하는 나를, 그런 나의 연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로 옮겨질 수 있다. 방갓이 거절하는 것은 연화가 아니라 연화가 놓인 사회적 위치이다.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나그네인 방갓이 그걸 거절할만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지금 당신이 이 선택의 남은 절반을 잠깐 잊은 것이다. 신분사회의 로맨스. 난실과의 일시적지만 이 맹목적인 로맨스는 방갓을 상상할 수 있는 (하지만 임금을 제외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려놓는다. 방갓은 영의정 김종성의 딸 난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방갓은 두 개의 선택 사이에서 (셰인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 태도에서는 별 차이 없이) 우유부단해진다. 어떤 우유부단? 난실의 사랑을 받을 때 방갓은 그 사랑의 대상의 자리에 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뒤로 물러나고, 연화의 사랑을 받을 때 방갓은 자신이 난실의 사랑을 받는 자리로부터 내려갈 생각이 없기 때문에 뒤로 물러난다. 이때 이 두 개의 뒤로 물러남이 비대칭의 이유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방갓이 어떤 계산도 없이 로맨스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 방갓은 조선시대 안에서 계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계산의 비대칭이 방갓을 우유부단한 슬픔에 빠지게 만든다. 이것이 방갓의 선택할 수 없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것 사이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선택 이후의 선택은 방갓이 조선시대로부터 완전히 물러나는 것이다. 임권택은 퇴각의 마지막 자리에 <셰인>과 마찬가지로 클라이맥스를 배치하였다. 셰인은 마지막 시퀀스에서 전문적인 해결사인 총잡이 잭 윌슨과 대결을 벌인다. <셰인>에 매혹된 관객은 누구나 이 마지막 대결 장면을 언급한다. <풍운의 검객>에서 가장 공들인 장면은 방갓과 달지 사이의 단 한 번의 마지막 대결 씬이다. 이미 최괄과 희빈 문소이는 백운도사가 올린 상소문으로 연화석상에서 나라의 명을 받고 대역 죄인으로 포도청 금부(禁府)에 의해 구금되었으며. 방갓은 난실과 연화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길을 떠나던 중이었다. 떠나가는 방갓을 따라온 건 난실을 모시던 어린 소년 시종과 그 자리에서 구금을 피해 달아난 달지뿐이다. 물론 시종 소년의 역할은 영화 내내 거의 존재감이 없다가 이 마지막 장면에서 방갓과 달지의 대결을 바라보는 증인의 시선으로서의 역할, 말하자면 <셰인>에서 셰인과 잭 윌슨의 대결을 바라보는 증인의 존재이자 신화를 완성시키는 임무를 가진 마리안의 어린 아들 조의 자리이며, 그런 다음 떠나가는 방갓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의 존재로서 거기 있는 것이다. 총에서 칼로 바뀐 조선시대를 무대로 한 대결, 웨스턴 영화의 마을 중심에 자리한 술집 바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산등성이 들판에로의 이동.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단지 산등성이 언덕 풀밭을 흔드는 정도를 넘어서서 들판 전체를 흔드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바람과 함께 어디에선가 안개가 몰려온다. 화면은 일부가 정도로 짙은 안개. 바람결에 그 안개가 사방을 덮는다. 안개를 제외하면 이상할 정도로 이 장면은 구로사와 아키라가 1943년에 만든 첫 영화 < 스가타 산슈로(姿三四郞) >의 마지막 대결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한 마디로 굉장한 시퀀스. 물론 임권택은 그때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영화는 1998년 10월 20일 일본대중문화 개방정책에 따른 허가까지 한국에 수입이 금지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1967년은 극장이 아니면 영화를 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고, 임권택은 해외에 1978년에 처음 나가보았다. 하지만 단지 들판에서 바람이 분다는 설정에서 멈추지 않고 방갓과 달지가 서로 마주보는 장면의 구도 일부는,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심지어 본 적도 없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첫 영화의 영향 아래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씬의 디테일은 임권택 스타일의 특별한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이 씬이 <풍운의 검객> 전체로부터 마치 떨어져 나온 다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오직 여기서만 씬 전체에서 장소의 위와 아래, 그 장소와 관계하는 기후의 변화와 그것이 서사에 관여하여 만들어내는 미장센의 효과, 그 안에서의 동선의 이동과 그 동선을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으로 이루어지는 몇 겹의 배치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단조롭던 이 영화의 동선과 장소의 배치는 오로지 이 장면만을 위해서 마치 숨겨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아마도 방갓이 달지와 마주치는 장면은 소년의 시선의 위치 때문에 산등성이 언덕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달지는 떠나는 방갓을 멈춰 세운다. “이봐, 결판을 내야지” “싫다” “그건 네 생각이고, 어차피 너와 나는 끝장을 봐야하는 입장이다” “싫다,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웃기지마라” 그리고 달지가 칼을 뽑아든다. 방갓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갓을 벗는다. 그런데 그런 다음 그 둘은 그 자리에서 갑자기 산 비탈길 아래로 위치를 옮긴다. 마치 위에서 소년이 내려다보기에 좋은 위치로 옮겨야한다는 듯이 그렇게 이동한다. 이때 화면을 채우는 것은 갑작스러운 바람소리이다. 조금 전까지 평화롭던 이 산등성이에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단지 장르의 약속 이상으로 그 바람이 너무 세고 큰 규모로 불기 시작하기 때문에 기이하고 심지어 초현실적인 감흥마저 불러일으킨다. 이때 이 대결장면은 임권택의 스타일을 보여준다. 어떤 스타일? 이 대결 장면이 2분 40초에 이르는데도 임권택은 서로를 마주보는 방갓과 달지 사이를 서로 다른 위치에서 찍은 쇼트를 마주보게 만든 다음(shot_reverse shot) 둘 사이만을 번갈아 오갈 뿐이다. 이 대결에서 달지가 칼을 휘두르는 찰나의 순간은 세 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방갓은 마지막 순간 단 한 번 칼을 휘두를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방갓은 그 한 번으로 달지의 양쪽 무릎을 베어 그를 땅에 무릎 꿇게 만든다. 임권택은 이 씬에서 액션의 디테일 대신 서로 마주보는 시선의 교환, 그때마다 위치를 옮겨 찍은 카메라의 위치와 구도, 무엇보다도 바람소리와 화면을 덮치는 것만 같은 안개로 진행한다. 최소의 액션. 이때 씬의 진행에서 위계질서는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것일까. 디테일들 사이의 위계질서. 이때 임권택이 거기서 찾은 디테일은 서사의 안쪽으로부터 말 그대로 표면, 영화라는 표면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영화의 표면, 영화라는 표면. 표면의 광경. 광경의 디테일에 관한 방법론. 나는 거의 멈춰 서다시피 이 마지막 씬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임권택은 분명히 거기서 무언가 새로운 기쁨을 발견했다. 마치 마지막 씬의 기쁨을 위해서 이미 만든 영화의 전부를 바꿔도 상관없다는 것만 같은 태도. 임권택의 1960년대 영화를 설명할 때 대부분 고통의 감정으로 다루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본 것은 분명히 기쁨의 정념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고통 안에 숨어있던 기쁨을 끌어내려고 애쓸 것이다. 물론 기쁨이 비가시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매번의 쇼트라는 양태 안에 담겨있는 속성의 표현이라면, 그래서 그 표현이 영화를 견디게 해주는 실존적인 상태라면,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서 정념의 형상에 관한 설명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실패를 무릅쓰고 이 형상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 거듭 되돌아올 것이다. 그걸 해낼 수 있다면 임권택 영화에서 거의 다루어진 적이 없는 디테일을 경유하여 정념의 형상에 관한 표현의 순간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에 기반한 외교 정책은 부재했고 식민지배의 역사적 책임은 온전히 제기되지도 못한 채 ‘경제난 해결’이라는 미명으로 ‘경제협력자금’ 3억 달러에 협상은 서둘러 종결되었다.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태평양 냉전 질서 아래서 종용된 화해였고 굴복이었다. 그 결과 국민적 반발은 극에 달했고, 1964년 4월에는 박정희 정권을 탄생시킨 ‘민족적 민주주의’가 기만적인 구호였음을 폭로하는 ‘화형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6.3 학생운동으로 확대된 시민적 저항은 결국 위수령과 계엄령이 발동되면서 진압되었는데, 협정이 체결된 7차 한일회담은 그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열린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한일협정은 ‘굴욕외교’, ‘구걸협상’으로 표상되었다. 식민지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이 가질법한 분노와 울분이 투영된 현실인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신(新) 식민지적 종속 관계를 예기하는 모종의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지점은 일본에 대한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정서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잉여, 혹은 복합적이고 양가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식적인 민족 서사의 문법과 달리 대중문화를 매개로 사적영역에서 작동하는 일본에 대한 정서는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식민지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의 근본적인 비극은 헤게모니를 지닌 식민국의 문화적 감성을 향수(享受/鄕愁)하게 된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장은 이러한 대중의 부인된(disavowed) 욕망을 기민하게 포착해냈다. 거리의 가판대를 메운 ‘왜색잡지’와 다방에서 들려오는 일본 대중가요는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일본을 우선 알고 거기에 대처할 민족적 주체성 확립해야 한다”는 논리는 “노도처럼 밀려들어와 우리의 말초신경을 간지럽히는” 1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금기와 선망이 착종된 양가감정의 표현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영화계에서는 한일친선과 문화교류 문제가 적극적으로 논의된다. 물론, 일본영화 수입과 한일 합작영화에 기대를 거는 측은 외국영화 수입업자들이었다. 방화제작자들은 일본과의 합작영화는 미끼일 뿐이며, 이를 통해 일본 자본이 국내 영화제작계에 유입되면 한국영화는 일본의 영화산업에 종속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정책당국의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국민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민족주의 정서에 기대어 일본대중문화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1965년에 내려진 <동백 아가씨> 방송금지 조치는 단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수입업자의 입장에서는 일본영화 수입이 개방되면 그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이 분명했기에 자신들의 뜻을 인적교류에서부터 단계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했다. <잊지 못할 모정(Typhon sur Nagasaki, 1957)>를 수입 배급했던 세기상사는 누구보다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행위 주체였다. ‘한국영화’ 최초로 일본배우가 캐스팅되어 논란이 되었던 <총독의 딸>(1965)은 세기상사가 제작한 영화로 제작단계에서부터 공보부와 마찰을 빚었다. 세기상사는 공보부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촬영을 진행했고, 결국 영화는 상영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있다고 하여 정책당국이 일본문화를 전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었다. 일본과의 수교를 맺은 박정희 정부로서는 자유아시아의 우방이자 이웃으로서 일본과의 친선과 우호를 강조해야 했기에 한편으로는 교류의 방식과 정도를 제시해야 했다 2 . 이와 같이 일관된 원칙이 작동될 수 없는 틈으로 일본영화계와의 교류를 시도하려는 기획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는데, 제작의 측면에서는 일본과의 인적 교류와 로케이션 촬영을 확대해나갔다면, 외화수입의 측면에서는 일본인 배우가 출연한 서구 영화를 수입 상영함으로써 일본을 금지하는 제도적 기준을 완화시키려 노력했다. 일본영화에 대한 문화적 금기의 핵심은 배우였다. “제작신고에는 일본에서 필요한 장면만 찍겠다”고 로케이션 촬영 승인을 받은 뒤 현지에서 일본 배우를 출연시킴에 따라 촬영중지를 통보 받은 <고안>(최무룡, 1966) 3 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의 공보부의 입장은 “로케와 일본인의 기술지도는 무방하나 일본배우의 출연은 아직 허가할 수 없다” 4 는 것이었다. 일본 배우의 출연은 외국영화를 수입하는 데도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1965년 MGM에서 제작한 <8월15야(夜)의 찻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1956)>의 경우,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 출연하여 국제적인 인지를 얻은 교 마치코(京マチ子)를 비롯하여 다수의 일본 배우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수입추천을 승인 받지 못했다. 이후 세기상사는 진정서를 제출하며 지속적인 민원을 통해 수입 및 상영 허가를 취득하게 된다. <잊지 못할 모정>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경우인데, 심의 서류에는 세기상사가 자신들의 기획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일수교의 논리와 검열행정의 내적인 일관성 그리고 상영보류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거론하여 행정당국을 압박하는 정황들이 담겨 있다. 사실, 이브 샴피(Yves Ciampi)가 연출한 <잊지 못할 모정>은 1957년에 제작된 영화로 나가사키의 조선소에서 일하는 선박 기사 말샤크(Jean Marais)와 노리코(기시 게이코, 岸 惠子)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어 왜색시비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세기상사는 1964년 9월 영화를 수입한 뒤 1966년에 상영 허가 신청을 접수한다. 1966년 시점에서 외화 수입과 상영 과정은 크게 1. 외국영화 수입추천허가 절차, 2. 상영허가 승인 절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하에서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 중인 <잊지 못할 모정>의 심의 서류를 중심으로 수입과 상영 과정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1. 외국영화수입추천허가 1962년 1월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영화업자는 외국영화를 수입‧상영하기 위해서 공보부에 ‘외국영화 수입추천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뒤 승인을 얻어야 했다. 영화 시장에서 외국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았고, 이들 영화가 야기하는 사상과 풍속의 문제 또한 컸기에 영화검열 행정에서 외화수입을 통제, 관리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1956년 문교부에서 영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우수영화 포상제도로 외국영화수입 쿼터를 배정하면서 정부는 보다 효율적으로 외화 관리를 할 수 있었는데, 5.16 이후 검열권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추천허가절차’가 신설되었다 5 . 이는 수입된 외화가 상영되지 못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는 의미가 있으나 수입업자들은 사전검열의 형태로 ‘수입추천허가’를 받아야 했다 6 . 수입추천을 받기 위해 영화수업업체는 영화 제명 및 원제, 제작주체, 필름종별 및 규격, 권수, 판권대금과 같은 영화에 대한 제반 정보를 담은 ‘허가신청서’를 비롯하여, 영화의 원문 대본 1통과 국문 대본 3통, 그리고 수입면장 및 기타 요청 서류들을 구비하여 공보부에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정적 절차가 제한과 통제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국영화 수입과정은 외환관리법을 비롯하여 통관절차에 따른 관계 법령을 준수해야 했기에, 공보부는 상공부, 서울세관, 외환은행과 긴밀히 협력하며 통상에 필요한 절차를 일원화하여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검열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근본적으로 통치 합리성을 제고하려는 국가 이성의 산물인 만큼, 개별 텍스트에 대한 검열과정은 일반 행정업무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수입추천단계와 관련된 서류들은 아래와 같다. 1) 외국영화 수입추천 허가신청서 제출(1964.9.10.) <잊지 못할 모정> 수입추천 허가신청서 영화 <잊지 못할 모정>의 수입사인 세기상사는 1964년 9월 10일 공보부에게 영화수입추천 허가를 위한 신청서를 제출한다. 신청인은 한국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 유성엽이며,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1964.9.14.)하여 공보부의 승인을 받았다.(1964,9.15.) 신청서에는 영화의 제작 정보만이 아니라 종별(천연색, 와이드스크린)과 규격(35mm, 12권, 3편) 및 판권대금(US $4,000)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영화필름과 원문 대본 1통(번역문 포함), 국문 대본 3통 그리고 수입면장 및 기타자료를 첨부했음을 알 수 있다. 기타자료에는 리버티상사와 체결한 계약서 사본과 영문으로 된 전신(cable), 그리고 외화수입쿼터 배정서와 각서가 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전신을 통해서는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는데, 한국에서 통용되는 라이센스 기한은 10년이며 신용장 개설 은행 정보를 비롯한 결제 기한(1964.9.30.)이 명시되어 있다. 공보부에서 외환은행 기관장에게 보낸 배정서에는 외화수입권을 배정받은 대한영화주식회사의 외화수입업무를 세기상사가 대행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잊지 못할 모정> 수입 추천 신청 단계에서 세기상사가 제출한 각서 수입추천 단계에서 눈에 띄는 것이 각서인데, 총 두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세기상사 대표이사 이기동의 이름으로 공보부에 보내는 것으로서, 각서에는 “영화의 왜색 및 감독의 사상관계나 기타 귀부의 심사 기준에 저촉되는 경우에는 하시든지”(언제든지) 공보부의 지시대로 따르겠다 내용을 담고 있다. 수기로 작성된 다른 종류의 각서는 모두 2통인데, 모두 한국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작성된 것으로서, “필름이 도착 즉시 실사고사를 받을 것”이며 “고사규정에 저촉되거나 상영이 불허가 되는 경우에는” “신용장 개설을 비롯한 제반 책임을 본인이 부담”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후 상영 허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참조해볼 때, 책임을 소재를 정하는 각서가 강력한 구속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기타자료에는 수기로 작성한 영화 해설과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다. 동일한 양식의 서류가 3부인 점을 미루어보아, 외화수입 절차를 담당하는 주무부처인 상공부와 서울세관 그리고 외환은행에게 각각 보낸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담은 해설인데,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악의 결산>으로 발란서의 제일선 감독으로 각광을 받은 바 있는 “이브 샴피” 감독이 처음으로 시도한 동양색체가 짙은 감명 깊은 명화 이다. 이 영화제작을 위해 제작기간 2년, 구상에 3년, 광대한 오픈 세트 등 영화사상 공전의 스케일의 획기적 거작이다. 특기할 것은 일본 나가사키시를 방불케 하는 광대한 오픈세트를 건조했다는 사실이다. 출연인 너무나 유명한 불란서의 일급 배우 “장 마레-”와 상대역인 세기의 미녀 “다니엘 다류-”, 조연엔 일본의 인기 여우 “기시 게이코”가 각각 출연하여 초연을 보여주고 있다. (강조는 인용자) 영화가 일본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일본인 여성과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에서 드러나는 ‘일본색체’는 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입사는 이를 “동양색체”로 설명하고 있는데,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나가사키’도 사실 “일본 나가사키를 방불케 하는 광대한 오픈 세트”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 영화가 프랑스 감독과 배우가 주축을 이룬 작품임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수입대행사인 세기상사는 서류심사만으로 수입 추천을 승인해야 하는 행정절차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영화 <잊지 못할 모정> 수입추천 통지 본 영화는 불란서 파테시네마 델라필름사가 1956년도 제작한 작품으로서 선박소에 근무하는 우수한 청년 기사 말사크는 친구의 소개로 '노리'라는 처녀를 알게 되어 사랑하는 중 우연히 그의 옛 애인 후란스와즈가 나타나 고민하게 된다. 말사크는 후란스와즈를 잊기 위해 출장을 떠난다. 돌아오는 날 밤, 나가사끼엔 심한 태풍이 불어 ‘노리’를 염려하며 그녀를 찾았으나 건물에 깔려 이미 숨을 거두고 이러한 사실을 본 후란스와즈는 그를 단념하고 나가사끼를 떠난다는 내용. (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영화사에서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공보부에서는 유관 부처로 협조 공문을 보내는데, 참고 항목으로 부기된 내용에서는 영화에서 기시 게이코가 분한 노리코의 이름이 ‘노리’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세기상사가 제출한 자료에 근거한 것인데, ‘노리코’의 이름을 ‘노리’로 명명함으로써 왜색 시비를 비켜가고자 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관계기관에 수입추천 서류를 발송한 다음날인 1964년 10월 2일, 공보부에서는 한국영화주식회사 유성엽 앞으로 ‘외국영화 수입추천’ 건에 대해 관계 기관에서 추천을 하였다는 공문을 보낸다. 본편에 대한 수입추천 허가승인 절차가 완료된 후, 1964년 12월 11일 대한영화사는 예고편 통관을 위한 품의서를 공보부에 제출한다. 예고편은 총 10권으로 한 편당 1권임을 감안해볼 때, 10편의 예고편이 들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보부는 12월 22일자로 서울세관에 협조공문을 제출하면서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수입추천 허가절차가 마무리된다. 2. 상영허가 승인 절차 1966년 1월 6일, 세기영화사는 수입한 영화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한다. 영화가 수입된 절차가 완료된 시기가 1964년 12월 22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영화가 수입된 지 1년이 지난 시점까지 상영허가는 신청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추론컨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일협정을 둘러싼 시민적 저항이 극에 달했기에 상황의 변화를 지켜봤던 것이라 생각된다. 아니면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정 체결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 일본영화 수입개방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가늠해보고자 논란이 될 만한 영화를 수입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영화 수입을 주도한 것은 한국영화주식회사라기보다 세기상사라 할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세기상사는 12월 9일자로 외국영화 수입추천 명의변경 신청서를 양도증 사본과 함께 공보부에 제출한다. 이로써 세기상사는 수입대행업무가 아닌 영화를 수입, 배급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상영허가를 둘러싸고 공보부와 세기상사는 마찰을 빚게 된다. 공보부의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민족주의 정서가 반정부적인 방향으로 표출되는 데 대한 부담감으로 영화 상영을 보류할 필요성이 있었다. 반면 세기상사의 입장에서는 공보부의 수입추천허가에 의해 수입된 영화를 공보부가 상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절차의 합리성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했다. 다음은 4차에 걸친 상영허가 신청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다. 1) 제1차 시도 (1)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서 제출(1966.1.6.) 1966년 1월 6일 세기상사는 공보부에 <잊지 못할 모정>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해당 서류에는 수입신청허가 시와 동일하게 영화에 대한 제반 정보와 영화필름, 대본 및 별첨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시세완납증명서를 비롯하여 필름 입고증, 문화영화수속필증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는 1966년 12월 2차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지기 이전 시점이어서 62년 영화법의 시행령을 따르는데, 문화영화수속필증은 일반 극영화 상영 시 문화영화의 의무상영 조항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점은 <고래>라는 제명의 문화영화의 제작사가 세기상사주식회사라는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문화영화는 정부가 제공하는 공보영화 차원을 넘어 계몽성을 핵심적인 속성으로 갖춘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아우르는 역사적 개념인데, 문화영화의 의무상영이 제도화되면서 문화영화를 제작하는 민간회사가 생겨나기도 했다 7 . (2) 외국영화 상영허가 보류(1966.1.11.) <잊지 못할 모정> 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보류 통보 서류 발신: 공보부 장관 수신: 세기상사주식회사 우기동 제목: 외국영화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보류통보 위하가 66.1.10자로 제출한 외국영화 <잊지 못할 모정>의 상영허가 신청은 동 영화를 심사 결과 당부 방침에 의하여 상영허가가 보류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끝. 부내 참고: 본 영화는 왜색이 농후한 영화임 . 세기상사는 상영허가 신청 당시 연소자 관람 신청서도 함께 제출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수입 추천까지 받은 영화가 상영보류 통보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3) 중앙정보부에서의 재심의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의견 통보 검열서류에는 없지만, 1월 11일자로 상영보류를 통보받은 세기영화사는 재심을 청구한 것으로 보인다. 위 서류에서 알 수 있듯이, 1966년 1월 29일 중앙정보부에서는 “65년 1월 12일(66년의 오기)”자로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해 재심을 진행하였다. 중앙정보부가 심의에 참여하여 의견서를 보내는 경우는 일반적인 절차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즉, 공보부가 당시의 정세를 고려하여 정무적인 판단을 내림에 있어 중앙정보부의 의견을 요청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4) 외국영화 상영보류 최종 통보(1966.3.28.) 중앙정보부는 해당 영화가 “보안상 지장이 없음으로 공보부 장관이 적의 판단 조치”할 것을 주문하는데, 공보부에서는 1966년 3월 28일자로 세기상사에게 다시 한 번 상영보류 통보를 내린다. 이유는 1차와 동일하다. 2) 제2차 시도 (1) 진정서 제출(1966.3.29.) <잊지 못할 모정> 수입 관련 세기상사가 공보부 장관에게 보낸 진정서 첫 페이지 진정서 수신: 공보부장관 귀하/ 제목: 진정서 귀부의 1966년 3월 28일 자 공보영 1733.2~2959에 의한 외국영화 상영허가신청에 대한 불허가 통보는 감사히 복송하였읍니다. 취송(就悚) 본건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귀부의 정책상 이유로 당분간 허가할 수 없다는 통보취지에 대하여는 폐사(弊社)로서도 타의 없이 충분히 이해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폐사로서 본건 "잊지 못할 모정"에 관하여 국내상영예정하에 (1) 서기 1964년 10월 2일 자로 귀부의 수입추천을 받고 (2) 동시에 신용장을 개설하고 (3) 서기 1966년 1월 6일 자로 통관절차를 필하여 서기 1966년 1월 10일 자로 귀부에 상영허가신청에 이르기까지 막중한 자금을 투입하여 동 필름은 완전 국내물품으로 되어 있는 즉 상영치 않으면 안 될 불가피한 고충에 직면하고 있는 실상 을 보살펴 주시고 더욱 본건과 견연(牽連)지어서 기왕 국내에서 상영한 바 있는 소위 왜색영화의 경우를 대조적인 면에서 돌이켜보시더라도 국교정상화 이전에 있어 한 때 한일 간의 격앙된 국민감정에 아무런 자극됨이 없이 (1) <흑선>, <전장과 영원히>, <8.15의 찻집>, <해병에 동경에 가다>, <벽안의 나비 부인>, <카이강의 다리>, <원한의 도곡리 철교> 등을 상영한 선례 를 상기하시와 보살펴주시고, 특히 본건 "잊지 못할 모정"의 경우는 문화교류의 성과면에서 보더라도 음악 및 미술과 문학 등이 불란서의 문화적 지반을 기조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2차 대전 당시 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일본 장기(인용자: 나가사키) 등을 배경으로 하여 본 영화를 제작함에 이른 불일 간 국민감정의 순화는 목하 한일 국교정상화가 실현된 차제에 있어 무형의 정책적 PR에 도움이 되는 좋은 하나의 선도적 동인이 됨에 족할 것이며 , 더욱 한일국교 정상화의 당면한 중요 과정에 비추어보더라도 한일 간 문화교류의 계단적인(인용자: 단계적인의 오기) 일책으로써 이상 진정들인 수단에 정황을 현찰하시와 본건 영화 "잊지 못할 모정"이 상영되도록 허가하여 주시압기 바라옵고 자이 진정서를 올리나이다. 세기상사주식회사 대표이사 우기동 (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2번에 걸친 상영보류 통보를 받은 세기상사는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공보부 장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한다. 진정의 핵심은 공보부가 고시한 행정 절차에 따라 수입추천을 받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고, 일본인이 출연하거나 참여한 영화가 상영된 선례가 이미 있고, 국교 정상화가 실현된 시점에 해당 영화가 정책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홍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진정에 대한 회신(1966.4.4.) 공보부는 1966년 3월 30일자로 제출된 진정서에 대해서 1966년 3월 28일에 통보한 바와 같이 당분간 허가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간략하게 통보한다. 세기상사가 상영불허가 판단의 불합리성을 조목조목 짚은 것과 대조적으로, 공보부에서는 별다른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당분간 허락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한 것이다. 3) 제3차 시도 (1) 외국영화 산영허가 신청 사유서(1966.8.4.) 세기상사는 공보부의 보류 통보를 일단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본 동보가 제작한 작품으로 특히 감독 및 기타 기술진영 전원이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제작된 동경 올림픽 영화가 상영허가”를 받게 되자 세기상사는 다시금 상영허가를 신청한다. 반려 이유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영화 상영허가를 보류했다면, ‘동경 올림픽 영화’ 또한 개봉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진정에 대한 회신(1966.9.12.) 공보부는 별다른 이유 없이 다시금 진정 내용에 대해 불가 통보를 한다. 다만, 달라진 점은 “당부정책 상” 허가할 수 없다는 부분을 수정하여 “당부정책이 변경될 때가지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영화 상영 허가를 보류한 것은 기관의 정책적 일관성에 의해서라기보다 당시의 정무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세기상사의 입장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4) 제4차 시도 (1)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서 두 번의 진정이 묵살되지 세기상사는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를 다시금 신청하게 된다. 서류상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류 작성일은 1966년 8월 3일이나, 이를 접수한 시점은 9월 14일이라는 사실이다. 즉, 두 번째 진정을 통해 해법을 찾으려 했던 시도가 어그러지자 행정 당국의 비일관적인 처사를 비판하는 ‘신청사유서’와 함께 상영허가 절차를 새롭게 밟음으로써 공보부를 압박하는 전략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회신(1966.10.10.) <잊지 못할 모정> 수입에 대한 방침을 밝힌 공보부 내부 메모 반복된 진정과 신청사유서를 통해 공보부의 행정적 실책을 지목함으로써 공보부는 그에 대한 해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1966년 10월 10일자로 세기상사로 통보된 상영허가 보류 판정은 이전과는 달리 그 이유가 상세히 부가되어 있다. 판정이 핵심 이유를 요약한 메모의 내용을 보면 해당 영화가 “불란서 제작이라고 하나 일본 가요(歌謠), 민속(民俗), 무용(舞踊) 등이 처음서 끝까지 강하게 나타나 일부분을 삭제(削除)할 수도 없는 영화이므로 한일 영화교류가 시작(始作)될 때까지 상영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5) 제5차 시도 1966년 12월 20일, 세기상사는 다시금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해당 서류 또한 앞서와 동일하게 8월 3일에 작성된 것이지만, 접수는 4개월 뒤인 12월 20일이 이루어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세기상사는 별도의 진정서나 사유서 없이 영화의 상영허가를 신청하는데, 공보부에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이를 승인한다. 공보부의 <잊지 못할 모정> 상영 허가 통보 서류 결국 5번째 상영허가 신청을 낸 끝에 공보부에서는 해당 영화에 대한 상영허가를 통보한다. 그러나 내부결재 문서에는 국내상영이 무방하다고 판단한 근거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해당 영화의 줄거리만을 요약해놓았다. 다만 실사 검열을 통해 화면 6개처, 녹음 9개처를 삭제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를 통해 유추해본다면 공보부가 문제 삼았던 ‘왜색시비’는 정책 당국의 입장에서는 정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영화가 프랑스에서 제작되었던 만큼 일본에 대한 서구의 이국적 취향을 충족시킬 요소들이 과도하여 왜색이 매우 짙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세기상사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 영화를 개봉하였는데, 심의 서류를 토대로 이를 재구성해 볼 때 검열 당국과 시장 주체들 사이의 권력 관계가 일방적으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민족의 자주성(4) - 영화, 음악」, 《경향신문》, 1965.12.22. 2. 이화진, 「‘65년 체제’의 시각 정치와 <총독의 딸>」, 『한국근대문학연구』 18(1), 2017, 282-283쪽. - 이 논문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65년 체제’ 아래서 일본을 특정한 방식으로 (비)가시화하는 시각장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극장에 상영된 적도 없이 영화사의 서술로부터 배제된 <총독의 딸>의 제작 과정과 심의 단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3. 서울방송국 연속극 <동경 나그네>의 영화화한 작품으로 최무룡이 제작 및 감독을 맡았으나, 결국 촬영이 무산되어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 여파로 최무룡은 김지미와 이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4. 「TBC의 〈동경 나그네〉 일본 현지 촬영 중지령」, 《중앙일보》 1966.12.03. 5. 우수영화 제작에 대한 포상으로 외국영화수입쿼터 배분과 영화법 개정에 대한 논의는 조준형, 「지배하는 국가와 교활한 시장」, 이순진, 이승희 편, 『한국영화와 민주주의』, 선인, 2011, 311-346쪽 참조. 6. 수입추천허가신청 단계에서 제한을 두는 경우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심의 서류 해제」(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를 참조할 것. 7. 1960년대 문화영화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조준형, 「문화영화의 제도화 과정: 1960~70년대 영화법과 관련 정책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지워진 한국영화사 – 문화영화의 안과 밖』, 한국영상자료원, 2014, 75~114쪽 참조.
좋아하는 영화감독의 명단이 궁금합니다. 이건 영화감독을 만났을 때 꺼내 들기 가장 어려운 질문 중의 하나이다. 이 질문 속에는 취향의 지평을 지나쳐가는 질문 안의 질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보, 지식, 체험, 감흥, (미적인, 혹은 정치적인, 때로 은밀하게 사적인) 판단, 무엇보다도 수용의 태도. 영화비평가들은 이런 질문을 받아들면 대부분 약간 젠체하면서 새침하고 교활하게 균형을 맞춰가면서 개인적인 척하는 공식적인 대답을 한다. 그런데 감독들은 이 질문 앞에서 이제까지의 자신의 작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그들의 영화를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종종 모순을 일으키거나 혹은 일시적인 행동처럼 보이거나 아니면 때로 심술궂어 보이는 것만 같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명단을 꺼내 들면서 개인적인 대답을 한다. 잉그마르 베르이만은 <007 포 유어 아이즈 온리>가 흥미롭다고 대답했다. 홍상수 는 <젊은 날의 링컨>, <이른 여름>, <저항>, <라딸랑뜨>, (등등과 함께) 열 편중의 하나로 뤼미에르 형제의 <항구를 떠나는 배>를 “떠올리는 순간이 좋다”고 대답했다. 봉준호 는 어떤 경우에도 <큐어>과 <조디악>을 빼놓는 법이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1931년 판 오리지널 <프랑켄슈타인>을 포함시켰다. 가이 매딘은 (고레-에다의) <애프터 라이프>를 포함시켰다. 몬테 헬만은 열 편 중의 하나로 장 이모우의 <연인>을 뽑아 들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코스타-가브라스의 <Z>를 넣었다. 이런 명단은 끝이 없다. 물론 여기서 명단의 우열은 아무 의미가 없다. 임권택 감독님에게 망설이던 끝에 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법이 없어요. 내 영화도 만들고 나면 다시 보지 않아요. 그런데 단 한 편, 펠리니의 <길>은 두 번을 보았어요. 그게 그렇게 쓸쓸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마음에 남는 거요” 그러면 어떤 영화감독들을 좋아하십니까? “그때는 영화를 볼 데가 극장밖에 없었으니까, 텔레비전이 나왔을 때는 내가 영화 찍으러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였으니까, 존 포드,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 그렇게 세 명이지, 제일 싫어했던 이름은 힛치콕이지, 그 칼부림 하는 영화를 한 번 보고는 다시는 볼 생각을 안 했으니까” 임권택 감독님은 <사이코>를 말하면서 (비유법이 아니라 정말로) 몸서리를 쳤다. 우선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임권택 세대는 <카비리아의 밤>이 마지막 펠리니 영화였다. 임권택은 <달콤한 생활>부터 펠리니 영화를 보지 못했다. 만일 1963년에 임권택이 <8 1/2>을 보았다면 그 ‘이후’의 영화에서 어떤 영향을 볼 수 있었을까, 라고 상상해보고 싶어진다. (임권택 감독님은 아직도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이 상상은 단순하게 귀결되지 않을 것이다. 영향이라는 불안.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응답이다. 하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투쟁의 긍정과 긍정의 투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영화사가 개인적인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사이에는 그 무대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거부와 저항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하나의 설명을 덧붙이고 싶다. 충무로의 첫 번째 세대들, 유현목 , 김기영 , 신상옥 , 김수용 은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 완전히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은 < 자전거 도둑 >이나 < 무방비도시 >에 거의 영향 받지 않았다. 내가 이 영화 제목들을 꺼내 들었을 때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대답은 무미건조하게 “좋은 영화들이지요”라고 말한 게 전부이다. 임권택을 리얼리즘 영화의 카테고리에 넣고 싶어 하는 비평들은 이 취향의 명단 앞에서 머뭇거릴 것이다. . <아일랜드의 연풍>(존 포드, 1952) 이 명단을 염두에 두고 읽어나가기 바란다. 임권택의 영화를 차례로 보다가 세 편의 영화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될 것이다. 하나는 < 남자는 안팔려 >이고 다른 하나는 <바람같은 사나이>이고, 마지막 하나는 < 30년만의 대결 >이다. 아쉽지만 <남자는 안팔려>는 프린트가 유실되어 우리가 볼 수 없다. 나는 이미 < 바람 같은 사나이 >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를 각색한) 존 스타제스의 <황야의 7형제>를 각색한 영화라는 것을 이미 설명했다. 임권택은 수없이 많은 원작소설을 각색했고, 텔레비전 드라마를 각색했고, 라디오 드라마를 각색했다. 그리고 세 편의 할리우드 영화를 각색했다. <남자는 안팔려>는 빌리 와일더의 <뜨거운 것이 좋아>를 변주한 리메이크 영화이다. 그리고 <30년만의 대결>은 존 포드의 < 아일랜드의 연풍 >(지금은 <말 없는 사나이>라는 원제(The Quite Man)로 잘 알려졌지만 여기서는 국내 개봉제목으로 쓰겠다)의 리메이크이다. 먼저 첫인상을 고백해야겠다. <30년만의 대결>을 처음 보기 전까지 누구도 내게 이 영화가 <아일랜드의 연풍>의 리메이크라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는 무방비 상태였다. 어느 장면부터 처음 보는 이 영화를 어디선가 이미 보았다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최무룡과 박노식이 김지미를 사이에 두고 동네에서 주먹싸움을 시작할 때 누구라도 <아일랜드의 연풍>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임권택 감독님에게 혹시 이 영화가 존 포드의 <아일랜드의 연풍>을 다시 한 번, 이라고 말을 꺼내자마자 그거를 리메이크 한 거요, 라고 바로 말을 이어받으면서 그 영화를 정말 재미있게 보았거든, 이라고 덧붙였다. “내가 <제17 포로수용소>와 그 영화 두 편이 제일 재미있게 본 영화요” 1955년 11월 15일에 단성사에서 개봉한 이 영화를 임권택은 (아마도) 연출부를 하면서 보았(을 것이)다. 그런 다음 <30년만의 대결>을 제작할 때 누구도 <아일랜드의 연풍>을 다시 꺼내 들어 참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아직 비디오가 발명되지 않았으며, 한국에는 시네마테크가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기억에 의존해서 작업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처하게도 자막에 각본 송장배, 각색 박남주라고 되어있다. 누군가 기억을 더듬으며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현장용 각본을 썼겠지만, 각색은 이 과정에서 무슨 역할을 한 것일까. 왜 어디에도 원작을 밝히지 않은 것일까. 그때 한국은 국제 저작권협회에 가입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원하면 비틀즈의 곡도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하였으며, 충무로 녹음실에서는 음반 라이브러리에 보관된 음반을 자유롭게 꺼내 들어 자신의 영화에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저작권 여부의 진실은 이 글의 목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흥미로운 방점. 17년 전에 본 영화의 기억, 그리고 감흥. 무엇이 남고 무엇이 지워졌을까. 그런 다음 기억의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었던 <아일랜드의 연풍>은 어떤 영화였을까. 나는 여기서 존 포드의 <아일랜드의 연풍>에 대해서 쓰지는 않을 생각이다. (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이미 허문영이 ‘존 포드 이야기’ 연재에서 좋은 글을 썼다 .) 대신 임권택은 존 포드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라는 오랜 질문에 질문해볼 생각이다. 나는 대답의 자리에 질문을 잘못 쓴 것이 아니라 두 번 질문이라고 썼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이 임권택의 ‘자리에서’ 해보는 것이라면 두 번째 질문은 임권택의 ‘자리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다. 우선 1971년이라는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그 해에 임권택은 일곱 편의 영화를 찍었다. < 요검 >,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 <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 < 둘째어머니 >, < 명동 삼국지 >, < 원한의 두 꼽추 >, 그리고 <30년만의 대결>. 이 영화들을 다른 방식으로 소개할 수도 있다. 무국적 무협영화 두 편, ‘다찌마와리’ 액션영화 네 편, 멜로드라마 한 편,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 한 편. 그저 뒤죽박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명단. 여기서는 어떤 일관성도 발견할 수 없다. 그 말은 한 감독으로서 말 그대로 주문을 받아서 찍어내듯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임권택의 고통스러운 시간. 그는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 다음 영화를 준비할 틈도 없이 그렇게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쩌면 자신이 가장 재미있게 보았다고 기억하는 영화를 떠올리면서 존경하는 존 포드의 영화를 만들었던 시간, 1971년이라는 참혹했던 그 해에 <30년만의 대결>을 만들었던 자리는 임권택의 잠시나마 즐거웠던 시간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라고 가정해본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기의 이상할 정도로 비참하고, 우울하고, 참담하고, 어둡고, 대부분 비극으로 끝나버린 영화들 속에서 드물게도 명랑하고 쾌활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사실을 환기시키겠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이따금 유머를 간직한 장면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시종일관 로맨틱하고, 밝고, 명랑한 영화를 찾는 것은 거의 드문 일이다. 대규와 판수 옥희 먼저 <아일랜드의 연풍>과 <30년만의 대결>의 서사에서 인물들의 배치에 관한 차이를 설명하겠다. <아일랜드의 연풍>은 션 쏘튼이 기차를 타고 미국을 떠나 고향인 아일랜드의 (가상의 마을) 이니스프리에 정착하기 위해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중에 밝혀지기는 하지만 션 쏘튼은 권투시합에서 그만 상대방이 죽는 결과에 다시는 주먹을 사용하지 않기로 맹세한다. 운명처럼 션 쏘튼 이웃에 사는 메리(모린 오하라)에게 반하고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그러나 메리의 오빠 레드 윌(빅터 맥라글렌)은 지참금을 내놓지 않는다. 션 쏘튼은 그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아일랜드 여자인 메리에게는 모든 것이 달린 자존심의 문제이다. 션 쏘튼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오빠 레드 윌에게 대결을 신청하고 온 마을로 이어지는 주먹 싸움의 장관이 펼쳐진다, 라고 썼지만 사실 5분 동안 이어지는 이 클라이맥스에서 정작 션 쏘튼과 오빠 레드 윌의 싸움 쇼트는 얼마 되지 않는다. 존 포드는 이 시퀀스를 구경꾼들과 이웃 사람들, 동네 주민들이 집단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동선으로 연결하면서 역동적으로 만든다. 물론 디테일의 아름다움은 다른 데 있고, 존 포드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션 쏘튼과 메리 사이의 보기 드물게 성숙한 사랑의 감정선이다. 게다가 거의 천국처럼 색채 설계된 이니스프리의 테크니컬러는 <아일랜드의 연풍>을 존 포드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중의 하나로 끌어올린다. <30년만의 대결>은 대규(최무룡)과 판수(박노식)이 박포장기를 두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표현을 빌리면) “죽마고우”지만 30년 전에 한 여자(김지미)를 동시에 사랑했고,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고향을 떠나갔다. 그런 옥희가 남편을 여의고 딸 지향과 함께 고향에 돌아온다. 대규는 상처를 하고 아들 웅(김희라)와 함께 목장을 하고 지내고, 판 수는 아내와 아들 민(윤양하)과 함께 양계장을 하며 지낸다. 이 마을의 두 명의 부자. 옥희가 돌아오자 두 사람은 다시 대결을 시작한다. 문제는 고향에서 농지 제방이 무너지면서 시작한다. 비만 오면 매번 물난리를 겪는 고향에 옥희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저수지를 만들 결심을 하지만 그건 큰돈이 드는 개간사업이다. 여차저차 한 우여곡절 끝에 옥희는 한 달 후까지 돈을 갚지 못하면 판수와 결혼하겠다는 약속어음을 쓰고 돈을 빌린다. 하지만 판수는 속임수를 쓰고 옥희는 결혼을 해야 하는 처지에 빠지자 마음에 끌리는 대규와 도망칠 생각을 한다. 떠나는 그들 앞에 판수의 아들이 나타나 그래도 이건 아버지에게 이야기는 해야 하지 않냐고 가로막는다. 대규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기다리는 판수 앞에 나타나 옥희를 앞에 두고 주먹 대결을 벌인다. 밤이 올 때까지 다투던 두 사람은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앞에 두고 마지막 주먹을 주고받는다. 그런 다음 판수는 대규를 업고 옥희의 별장에 가서 내려놓은 다음 “나란 놈은 말야, 이제 마누라의 자장가가 그리워졌다구”라고 껄껄 웃으며 그들 곁을 떠난다. “나란 놈은 말야, 이제 마누라의 자장가가 그리워졌다구” <아일랜드의 연풍>은 션 쏘튼을 주인공으로 하여 메리와의 로맨스를 통해서 고향이라는 상상적 공동체를 배워나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론 여기서 공동체는 다소 복잡한 이데올로기적 봉쇄 속에 1952년 매카시 냉전 체제하의 미국에 대한 ‘어떤’ 진실을 불편하게 포함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존 웨인이라는 스타 기호는 하나의 부조리기 되어간다. (잘 알려진 대로 보수주의자이지만 극우파를 혐오했던) 존 포드는 그걸 충분히 의식하고 있으며, 또한 그걸 어떻게 다뤄야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나는 1955년 정창화의 연출부를 하던 임권택이 미국의 정치적 상황과 할리우드의 복잡한 네트워크와 그 안에 놓여진 해석들 사이의 상호경쟁적인 모순들을 들여다보면서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라고 <아일랜드의 연풍>을 이해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그때는 한국전쟁이 휴전한 지 채 삼년이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조셉 매카시의 ‘빨갱이 사냥’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금지된 정치적 용어였다. 임권택이 <아일랜드의 연풍>의 이야기에 이끌린 행복은 특권화된 장소로서의 고향일 것이다. 아마, 아마 그럴 것이다. 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고향 이야기를 반복해서 했다. 그때 그의 집은 지금 살고 있는 세계 바깥에 놓여있었다. 갈 수 없는 집. 그 집이 놓여있는 고향이라는 장소. 그때 임권택이 가정하는 그 고향은 아직 한국전쟁이 도착하지 않은 곳이다. 거기서 임권택이 유지하려는 역사적 거리는 아직 미학적으로 형식화되지 않았고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으로 긴장을 잃지 않은 상태로 불안하게 머물러 있었다. 션 쏘튼은 자기가 돌아가고 싶을 때 고향에 돌아왔고 그런 다음 거기서 사랑이라는 시련을 견디면서 받아들여진다. 임권택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존 포드는 션 쏘튼과 함께 미국을 등지고 고향에 돌아가지만 임권택은 옥희라는 여자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시작한다. 우리는 옥희가 왜 대규와 판수 두 남자를 외면하고 다른 남자를 선택한 다음 고향을 떠나갔는지 끝까지 알지 못한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어디에서도 옥희가 자신과 사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볼 수 없다. 심지어 옥희의 딸조차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옥희는 고향에 돌아와서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단 한 순간도 더듬지 않는다. 차라리 잠시 고향에 여행 온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아니, 그렇다 할지라도 옥희는 고향의 목가적 풍경을 조금도 즐기지 않는다. 옥희를 동네 사람들은 설씨네 과수원집 딸이라고 부른다. 옥희는 단 한 번도 과수원을 방문하지 않는다. 정말 고향에 과수원이 있기는 한 것일까. <30년만의 대결>을 보면서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대규와 달아나기로 결심한 장면을 제외하면) 옥희가 외부에 전혀 외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선의를 가장하여 다시 떠날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저수지라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공사. 저수지는 혹시 매거핀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이상할정도로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여기서 약간 용기를 내서 인용하고 싶다. “이 방법을 적용하기 위해 첫 걸음을 내디디면 꿈 전체가 아니라 꿈 내용의 일부에만 주의를 기울여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자에게 꿈과 관련하여 무슨 생각이 떠오르느냐고 물어보면 대개 정신적으로 아무 것도 포착하지 못한다. 그러나 꿈을 여러 부분으로 분할시켜 제시하면 환자는 각 꿈-부분의 배후 사고라고 부를 수 있는 일련의 생각들을 떠올린다. (중략) 내 방법은 전체적 해석이 아니라 부분적 해석이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 김인순 옮김) 물론 임권택을 환자라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태를 추상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나는 판수의 마지막 대사에서 어떤 입구를 찾은 것만 같았다. “...(중략) 자장가가 그리워졌다구” 자장가. 잠들기 위해서 부르는 노래. 요점은 <30년만의 대결>을 일종의 백일몽처럼 가정한 다음 그 안으로 들어갈 때 전체와 만나는 대신 부분적으로 분할시켜 이 이상할 정도로 즐거운 영화 내부에서 난처하게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대목들만을 향해서 질문한다면 우리는 질문 안의 질문과 대면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무대를 먼저 돌아보자. 이 마을에는 두 명의 부자가 있다. 한 명은 판수이고, 다른 한 명은 대규이다. 한 명은 양계장을 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목장을 하고 있다. 영화는 판수의 집과 대규의 집, 양계장과 목장을 오간다. 이 마을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은 우기가 다가오고 장마가 지면 제방이 무너져 농사를 망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는 단 한 장면도 논밭을 보여준 적이 없다. 더 이상한 것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마을 사람들 중에서 양계장이나 목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볼 수 없다. 양계장이나 목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과 한 눈에 구별되는 복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 분주하게 양계장과 목장을 오가는 마을 사람들은 마치 서로 다른 고장에 사는 것처럼 겹치지 않는다. 양계장과 목장, 그리고 농사. 물론 그들은 하나의 공간에서 공존할 수 있다. 하지만 공존의 양식을 우리는 끝내 보지 못한다. <아일랜드의 연풍>에서의 이니스프리가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매일 매일의 일상의 축제처럼 함께 어우러지는 천국이라면 <30년만의 대결>의 고향은 (끝내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둘로 분리된 생산양식이 공존하는 가운데 현재의 토대가 보이지 않는 (니코 풀란챠스의 표현을 빌려) 비-장소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일종의 신기루. 임권택의 고향에는 무언가 어긋난 질서가 있다. 옥희는 왜 돌아왔는가. 혹시 이 어긋난 질서를 교정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얼핏 보기에는 매거핀처럼 보이는 저수지가 사실은 가장 강력한 교정수단인 것은 아닐까. 이때 이 고향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양쪽으로 찢어져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판수와 대규, 양계장과 목장을 단순히 두 개의 힘이 대립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가 과거에로 되돌아가고 있다면 다른 하나는 미래를 약속하는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판수는 영화 내내 한복을 입고 동네를 돌아다니고 (서울에서 온) 옥희를 만난다. 그의 집은 전통적인 한옥의 구조를 갖추었고 방안에는 오래된 자개장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아내도 부부싸움을 하고 집을 나갈 때까지 내내 한복을 입고 있으며, 아들 민은 가까스로 농촌을 벗어난 것 같은 면바지와 셔츠를 입고 다닌다. (지금의 우리들이 볼 때에는 다소 기괴하게도 민의 의상은 그때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새마을 지도자처럼 보인다) 반면 대규는 마치 도시생활을 하다 돌아온 것처럼 청바지를 입고 때로는 선글라스도 쓰고 다닌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아무도 청바지를 입은 사람을 볼 수 없다. 청바지와 선글라스는 부의 상징이 아니다. 대규는 양옥의 양식으로 지어진 집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아들 웅은 가죽 바지와 재킷을 입고 오토바이를 몰고 다닌다. 오토바이는 이상할 정도로 이 농촌의 풍경과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시끄러운 오토바이 모터 소리는 등장할 때마다 목가적인 풍경의 고요함을 깨트리곤 한다. 대규가 옥희와 함께 고향에서 달아나기 위해 머플러를 하고 댄디한 감각의 재킷을 입고 나타난 모습은 판수에게서 상상하기 힘든 의상이다. 그 둘은 어느 쪽도 고향에 긍정적인 가치를 제시하지 못한다. 판수는 과도할 정도로 고리타분하고 회고적인 과거로 돌아서고 대규는 무언가 어색하고 종종 불협화음을 불러일으키는 미래가 지나치게 서둘러 도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그 둘 사이에는 이상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구두쇠라는 사실이다. 그건 단순히 자신의 재산에 대해서 과도하리만큼 집착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 둘은 ‘충분히’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여전히’ 빈곤하다고 여긴다. 충분히 부자인데도 여전히 빈곤한 것은 자신의 재산에 채워야 할 공백을 셈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공백은 재산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두쇠는 그 불가능성을 재산의 물신성으로 환원하기 시작한다. 억압과 부인 사이의 도착적 관계. 신경증적 불안과 현실적 불안이 페티시즘을 매개로 결합한다. 이때 옥희는 그 간극 사이에 끼어들어서 그 물신성을 무효로 만든다. 여기까지는 단순하다. 하지만, 하지만 당신은 이걸 도식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 물론 이 설정이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이 장면의 재료들이 반대로 우리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어렵지 않게 대립의 상황에로 데려갈 때 이 백일몽이 의도하는 바를 명백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옛 것과 새 것. 지나가고 있는 시간과 다가오는 시간. 그 간극을 연결 짓기 위해 옥희가 나타났다. 만일 옥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고향의 간극은 그냥 찢어져나갔을 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 두 개의 힘이 서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임권택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대규와 판수가 장기를 두고 있고 마을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몰려들었다. 판수는 자기가 이겼다고 장 받아라, 라고 외치지만 대규는 멍이야, 라고 하면서 비기는 장기를 만든다. 비김수를 쓰면 한 쪽이 판을 엎거나 포기를 하(거나 양보를 하)기 전에는 밤을 새워도 끝나지 않는 법이다. 장기판을 덮고 판수는 대규에게 그러면 팔씨름으로 승부를 내자고 한다. 이것도 요지부동 박빙의 승부로 이어진다. 이 균형을 깨는 건 누군가 달려와 서울 간 설씨 과수원네 딸이 돌아왔어요, 라는 외침이다. <30년만의 대결>은 정확하게 거기서 시작한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힘의 긴장관계. 그 사이에 갑자기 끼어들어온 옥희. 나는 이걸 다소 아이러니하게 정식화시키고 싶다. 옥희는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안에 있었는데 바깥에서 나타난 것이다. 임권택은 여기에 완전히 매혹되었음에 틀림없다. 여기서 옥희는 아무 것도 상징하지 않는다. 그렇게 다가가면 <30년만의 대결>이 담고 있는 즐거운 기분을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눈 감은 척 지나간 가장 이상한 설정을 건드릴 것이다. 질문 안의 질문. 대규와 판수를 비교하면서 한 쪽은 전통, 다른 한 쪽은 근대, 라는 식으로 도식을 세웠다. 그런데 우리의 가설을 전복시키기라도 하듯 서울에서 내려 온 옥희는 막 도착하자마자 방문한 대규와 판수를 한복을 입고 맞이한다. 마치 옥희가 고향에서 그들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다음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에게서 서울의 어떤 흔적도 볼 수 없다. 옥희는 줄곧 한복을 입고 생활한다. 심지어 자신의 생일잔치를 하는 자리에서도 촛불을 켠 케이크를 가져다놓고 서양의 생일 축하곡을 부르면서 한복을 입고 앉아있는 어색한 장면을 연출한다. (하지만 이 의상의 일관성이 계산된 연출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옥희는 저수지 공사를 위해서 과수원을 내놓고, 그런데 그걸 사려던 부동산 사업가가 내놓은 약속어음이 부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갑자기 도회적인 복장을 하고 문 앞에 나타난다. 그런 다음 옥희는 다시 한복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이 장면을 예외로 하고...) 옥희가 한복을 벗어던지는 건 대규와 함께 고향을 떠나는 장면이 전부이다. 이건 무얼 말하는 것일까. 이 영화가 1971년의 영화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 싶다. 나는 여기서 에드아루트 푹스를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풍속으로서의 역사. 사생활로서의 유물론. 일상생활의 사소한 디테일들 사이의 변증법. 옥희는 서울에서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그때 서울에서 가시적인 풍경 앞에 형상화된 여성성은 두 종류의 여자로 나뉘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여자들. 가정생활을 하는 여자들. 물론 실제의 한국 사회는 그때 청계천과 구로공단에서 ‘공순이’들을 착취하기 시작했고, 유한 부르주아 계급의 상징이었던 ‘여대생’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었고, 정반대의 자리에서 밤의 길거리에서 타락한 요부의 에로틱한 이미지를 도시화로 옮겨놓은 성매매 산업이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풍경 저 너머에 매우 제한적이거나 그림자 아래 숨겨져 있었다. 나는 지금 1971년의 풍경을 말하는 중이다. 이때 사회생활을 하는 여자들은 (경험해보지도 않은) 1950년대 미국 산업사회의 ‘오피스 레이디’의 복장을 마치 자신들의 교복처럼 입었다. 근대의 레디메이드. 혹은 근대화 식민지로서의 지체된 데자뷔.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한국 사회에서는 OL(Office Lady)이라고 불렀다. 반대로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 여성들은 자신이 직장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신 설명하기라도 하듯 하나의 표시로서 전통적인 한복을 입었다. 나는 근대의 물결, 산업의 세계, 자본의 현장에 있지 않답니다, 라는 걸 의미하는 사회적인 모드의 양식. 복식의 수사학은 (바르뜨가 잘 설명한 것처럼) 은유가 빈곤한 개인적인 시학이자 (부르디외가 설명한 것처럼) 구별의 사회학이기도 하다. 1971년의 여성들은 아직 미혼이었을 때는 한복을 명절에만 입다가 결혼을 하면 마치 그것이 하나의 의무적인 의상인 것처럼 일상에서 입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도시에서 생활하는 여성이 한복을 입은 것은 이중적인 기호가 되었다. 하나는 나는 직장을 다니지 않습니다, 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남편이 있습니다, 라는 이중의 기호. 그때 한복에는 유교적인 가치의 맥락 속에서 전통적인 의미가 더해졌다. 나는 집에서 가정을 지키는 정숙한 아내입니다, 라는 하나의 모델에 자기를 기입하기. 옥희가 고향에 돌아와 대규와 판수 앞에서 전시하는 복장은 정확하게 그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에 하나의 의미를 더하고 싶다. 옥희의 한복에서 결핍된 것은 무엇인가. 그건 물론 남편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옥희가 고향에 돌아와 전시하는 복장은 나는 정숙한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라고도 읽힐 수 있다. 누구에게? 대규와 판수에게. 돌아온 옥희에게 대규와 판수는 단 한 마디도 옥희의 전 남편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옥희는 단 한 마디도 전 남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이 금지의 단어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에는 어떤 애도도 없다. 서울을 괄호 친 채 추억과 향수만이 이들을 감싼다. 잃어버린 시간, 되찾은 시간. 대규와 웅 부자 판수와 민 부자 옥희와 지향 모녀 세 번째 이상한 설정. 대규와 판수, 그리고 옥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각자 한 명의 자식이 있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물려받았다기보다는 마치 삶 자체를 ‘카피’한 것처럼 보인다. 아들은 아버지와 대결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 그건 대규의 아들 웅이나 판수의 아들 민 두 사람 모두 동일하다. (아버지가 바람이 나자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난 다음 민이 잠시 판수에게 저항하지만 그건 잠깐 동안 불평을 늘어놓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들은 마치 얌전하게 지내기만 하면 아버지가 재산을 물려주기로 약속한 것처럼 순종적일 뿐만 아니라 종종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설명적으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무엇보다 서사의 전반부에서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를 연출하는 것은 민과 웅이 옥희 딸 지향을 보자마자 경쟁적으로 구애를 할 때이다. 그들은 아버지 세대의 실패에서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 것처럼 다시 한번 반복한다. 이때 민과 웅은 그들의 아버지들이 겪지 못한 똑같은 딜레마에 동시에 빠진다. 그들은 한 눈에 자신의 아버지 대규와 판수가 옥희와 재혼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 그렇게 되면 새 어머니 옥희를 모시는 순간 지향을 상대방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을 못 견디게 만든다. 아버지의 이득은 자신의 상실로 이어지기 때문에 차라리 아버지의 상실을 기대하면서 상대방의 아버지의 이득을 기대하게 된다. 말하자면 두 명의 아들은 두 명의 아버지의 이해관계와 동일한 상호 모순의 계산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아일랜드의 연풍>에는 없는 구도이다. 물론 이 문제는 심각하게 진행된다기보다 서사 전체에서 가벼운 기분전환에 가깝다. 갈등은 간단하게 해결된다. 지향은 그녀의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뉴욕에 있는 애인이 갈등의 과정에서 적당한 순간에 나타나 민과 웅의 구애를 무효로 만든다. 지향은 약간의 미련도 없이 그들을 뒤로 하고 떠난다. 그런 다음 지향은 애인과 함께 영화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런데 잠시만 멈춰보자. 지향은 분명히 자신의 어머니가 저수지 공사를 위해 과수원을 내놓았고 그 과정에서 부도가 난 (거짓) 약속어음 때문에 곤궁에 처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어머니 곁을 미련 없이 떠난다. 단순한 갈등 속에 포함된 이해하기 힘든 서사 내부의 인과관계 사이의 불연속성들. 하지만 갈등이 단순하다고 해서 그것이 포함하는 의미마저 단순한 것은 아니다. 나는 먼저 갈등을 건드리고 난 다음 지향의 이상한 선택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등장할 때 갈등은 이미 예고된 것이다. 이때 갈등은 양쪽 방향으로 향한다. 하나는 아들의 자리에 무언가를 물려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자리에서 하나의 시간이 끝나고 하나의 사건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30년만의 대결>에서는 기이하게도 어떤 아들도 아버지와 대결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아버지도 아들을 위한 자리를 남겨놓지 않는다. 이건 무얼 말하는 것일까. <30년만의 대결>에는 시간이 없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임권택은 시간의 진공상태에 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임권택에게 가장 즐거운 것은 고향에 돌아왔지만 거기서 어떤 시간도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백일몽적인 환상. 시간 없는 장소. 과거에 머물러 있는 판수와 그를 둘러싼 미장센들. 아직 고향에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은 대규. 대규와 판수의 공존. 그 둘 사이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균형의 긴장상태. 임권택이 여기서 즐기는 것은 고향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고립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30년만의 대결> 속에서의 고향은 고색창연하면서도 (마을사람들의 초가지붕으로 둘러싸인 동네) 이상하게 모던하고 (젖소들이 유유히 노니는 유럽풍의 목장), 종종 퇴행적이면서도 (단 한 대의 버스도 다니지 않는 외진 동네) 때로 급진적이다. (웅은 1960년대 도쿄의 시부야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모터사이클족(族)들과 어울린다) 이때 지향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이미 웅과 민이 그들의 아버지 대규와 판수의 카피라는 것을 설명했다. 웅과 민은 왜 동시에 지향에게 매혹된 것일까. 고향의 수상한 점. 지향(과 옥희 집에서 일하는 젊은 가정부)를 제외하고 이곳에서는 단 한 명도 젊은 여자를 볼 수 없다. 좀 우스꽝스러운 추론. 그러니 웅과 민이 어떤 여자와도 데이트를 하지 못하면서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웅과 민은 어느 쪽도 자신의 고향 애인을 외면하고 지향에게 이끌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외면하는 것은 아내와 이혼하기 위해 애쓰는 판수이다. (물론 대규는 이미 상처(喪妻)했기 때문에 구태여 그런 수고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나는 매혹의 요점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향은 여기서 조금도 매력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눈에 웅과 민을 사로잡은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건 지향 자신도 자기가 그걸 갖고 있다고 알지 못하는 그 어떤 힘, 그런데 웅과 민에게만 의미가 있는 그 어떤 것이라고 가정해볼 수 없을까. 혹시 웅과 민이 지향에게 끌리는 것은 그녀가 서울에서 왔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한 번 더 환기하는 1971년의 상황, 서울과 ‘시골’의 격차는 단지 지리적인 것 이상으로 근대의 지체된 시간적 간극의 물화이기도 했다. 나는 구태여 시골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곳은 지방 도시가 아니다. 하루 종일 기다려도 버스 한 대 볼 수 없는 마을. 대규는 옥희와 이 마을에서 도망치려할 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를 이용하는 대신 언덕을 걸어서 읍내까지 갈 생각이었다. 360도로 카메라가 둘러보아도(round_panning) 그저 산과 논밭과 언덕과 가로수가 소실점으로 수렴되는 길만이 보이는 동네. 여기에 갑자기 ‘출현한’ 지향은 웅과 민에게 단지 서울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기호 그 자체일 것이다. 그저 풍문으로 전하는 서울. 그때 웅과 민은 지향에게 서울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다가간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지향은 세 개의 가능성을 품고있는 매혹의 근거였던 것은 아닐까. 어떤 세 개의 가능성? 아버지를 떠날 수 있는 가능성. 집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 고향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 <30년만의 대결>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이 모든 설정의 이면에는 고향을 떠날 수 있는 계기로 가득 넘쳐난다. <젊은 날의 링컨>(존 포드, 1939) 당황스러운 말이긴 하지만 <30년만의 대결>은 (미학적인 성취는 일단 제쳐둔 상태에서) <아일랜드의 연풍>에 가까이 가져다놓으면 놓을수록 마치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사의 결들이 점점 더 완강해진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서 유사점이라곤 클라이맥스의 순간에 두 사내가 주먹으로 싸우면서 서로의 우정을 나누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라는 의문에 빠지게 된다. 나는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고 싶다. 임권택은 존 포드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임권택은 <아일랜드의 연풍>에서 무엇을 즐긴 것일까. 존 포드에 대한 많은 글들은 풍경에 대해서 언급한다.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존 포드는 풍경이 아니라 장소의 영화를 찍고 있다. 그리고 그 장소를 성립시키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한다. 하나의 장소라는 문제. 그때 그 장소는 종종 무심하고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는 것처럼 거기 있지만 하여튼 거기서 등장인물들은 살아야하고, 견뎌야하고. 배워야하고, 기쁨을 찾아야 한다. 거기서 그들은 매번 결단을 내려야한다. 이 장소에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 거기서 영화가 시작하고 거기서 영화가 끝난다. 존 포드는 영화에서 드라마가 행위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심리적인 장면을 연출한 적이 없다. 존 포드는 행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표현하긴 했지만 여기서 애쓰는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 자체가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종종 기적처럼 보인다. 하나의 과정. 존 포드의 방법론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론이 무엇보다 아름답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날의 링컨>은 성장의 장소를 찍고 있는 중이다. 정확하게 똑같은 의미에서 <아일랜드의 연풍>은 휴식의 장소로서의 이니스프리를 성립시키기 위해 애쓰는 영화이다. 여기서 임권택이 즐긴 것은 휴식이고, 그가 배운 것은 그것을 성립시켜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1971년의 임권택은 지친 몸을 이끌고 이 휴식의 장소에 와서 허송세월을 보내버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막 영화에 도착했던 자신의 젊은 날의 순간에 잠시 머문다. <아일랜드의 연풍>을 보면서 잠시나마 누렸던 꿈결 같은 귀향의 시간. 아마도 그때 전라남도 장성은 아일랜드의 이니스프리만큼이나 먼 곳이었을 것이다. 갈 수 없는 곳.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장성과 한국전쟁 이후의 장성은 얼마나 다른 곳이었을까. 소설 <태백산맥>에서 빨치산들 토벌의 무대에 되었던 곳 중의 하나. 그 피비린내 나는 역사. 물론 비평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30년만의 대결>을 말하면서 이 영화의 씬들 사이에 묻어나는 정감을 완전히 치워버리면 우리는 해야 할 말이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영화는 개념적인 영화가 아니다. 임권택은 열렬한 시네필이 아니다. 아직은 <30년만의 대결>이 성숙하지 않은 임권택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기서 옥희가 돌아온 고향이 임권택이 그 자신의 고향에 이끌리기 시작하는 증후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나는 임권택의 영화(들)에서 은밀한 고향의 선을 탐색해왔다. 그는 아주 느리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30년만의 대결>은 < 바람 같은 사나이 >와 < 아내들의 행진 > 사이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을 이어주는 영화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단순하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다른 한 편으로 물 쓰듯이 낭비해버렸지만 마음 한 구석에 존 포드라는 위대한 이름을 가슴에 품었던 젊은 날의 청춘에 대한 호소를 담은 그 자신만의 내밀한 예술의 세계가 있다. 영화라는 특수한 세계.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삶. 먹고 산다는 근거. 이 세계는 돈 밖에 모르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여튼 여기는 예술의 세계이다. 현실적인 세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품어야하는 이 세계의 진정성에 대한 의지. 정창화의 연출부를 하면서 품어보았을 어떤 꿈. 틀림없이 수백 번도, 수천 번도 더 가져보았을 꿈. 임권택은 몇 차례이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미국영화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런 영화를 만들어야지, 이런 생각을 해보았죠, 그리고 그걸 버리면서 내 영화를 찾아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비로소 한 거지요” 아마 그것이 또 다른 하나의 선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선이 더 있을 것이다. 그건 자기 삶의 궁핍함에 대항하는 백일몽과도 같은 환상의 세계였을 것이다.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 몰래 숨어서라도 기쁨을 하여튼 유지하려는 안간힘. 프로이트의 가설. 그런데 마치 임권택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적 조건을 더 나쁜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것만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만들었다. 1971년의 영화들의 목록. 임권택은 고통과 비애로 가득 찬 세계를 그 자리에로 되돌아오듯이 반복해서 다루었다. 그의 주인공들은 비참했고(< 황야의 독수리 >), 더럽혀졌고(<둘째 어머니>), 종종 신체절단의 시련을 이겨내야 했으며(< 애꾸눈 박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원한의 두 꼽추>), 그런 다음 쫓겨나듯이 자기의 세계에서 퇴장해야만 했다.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오랫동안 그의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실존적인 현실때문이 아니라 타락한 로맨스가 요구하는 규칙에 따라 그렇게 행동했다. <30년만의 대결>은 마치 거기에 반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승하는 로맨틱한 감정에 모든 힘을 집중시킨다. 세 개의 선. 고향의 선. 예술의 선. 로맨스의 선. <30년만의 대결>이 내게 흥미로운 것은 이 세 개의 선이 완전히 서로 뒤엉켜버렸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연풍>의 이니스프리 처음의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존 포드의 이니스프리와 임권택의 고향 사이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이니스프리는 에덴동산이지만 임권택의 고향은 애당초 가져본 적이 없는 에덴이라는 것이다. <30년만의 대결>에서 옥희는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교회를 찾아가 목사를 자신의 멘토처럼 여기면서 모든 것을 의논하지만 정작 목사는 여기서 가장 무능하고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팔려가듯이 옥희가 판수와 결혼을 해야 할 때조차 속수무책으로 주례를 진행해야하는 입장에 놓이는데도 그걸 그저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이때 이 영화는 세상에 어떤 믿음도, 기대도, 신념도, 희망도 없음을 부지불식간에 내비친다. 다소 괴이하게도 임권택의 고향은 한 치의 용서도 없이 자본주의적인 거래의 양식 아래 규칙이 집행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협상도 없다. 계약을 맺으면 그것은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고향의 법칙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그 안에서 로맨스가 버틴다. <아일랜드의 연풍>에서 지참금을 줄 수 없다고 버티는 약혼녀 메리의 오빠 레드 윌과 주먹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30년만의 대결>은 아주 멀리 떨어져있다. 결혼식을 피해 도망치던 옥희와 대규 앞에 판수의 아들 민이 나타나서 가로 막았을 때 대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 교회로 되돌아간다. 그런 다음 판수에게 목장 문서를 내민다. 그러자 판수는 그 문서를 불태워버린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판수는 여기서 자신에게 돈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 제스처는 정반대이다. 판수는 그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물론 ‘구두쇠’ 판수는 그 돈이 탐날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 돈을 받으면 판수는 대규와 싸움을 할 수 있는 명분을 잃게 될 것이다. 정확하게 그 돈은 거래이다. 그 돈을 거절함으로써 판수는 대규와 싸울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이다. 이 로맨스는 거래로 시작해서 거래로 끝난다. 그러므로 대규는 이 권리를 산 판수에게 승리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우리는 이미 판수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지 보았다. 집에서 ‘결혼 행진곡’을 틀어놓고 웨딩 마치 연습을 하는 판수를 보고 민이 녹음기를 집어던지면서 아버지는 집을 나간 어머니는 생각도 하지 않느냐, 라고 소리치고 나갈 때 혼자 남은 판수는 중얼거린다. “질 수가 없어, 질 수가 없어” 판수는 30년 동안 사랑한 옥희를 잊을 수가 없어, 포기할 수가 없어, 놓칠 수가 없어, 라고 말하지 않았다. 판수의 목표는 옥희와 결혼하는 것아 아니라 대규가 옥희와 결혼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규가 제공해야 할 대가는 옥희를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판수와의 이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대규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규는 하루 종일 주먹 싸움 끝에 늦은 저녁 대폿집에서 막걸리 잔을 앞에 두고 판수의 주먹에 결국 나가떨어진다. 정말 대규는 쓰러진 것일까. 판수가 대규를 등에 업고 옥희에게 데려다 준 다음 호기롭게 떠나자 이게 그저 ‘한바탕 쇼’라는 듯이 슬쩍 눈을 뜨고 조용히 지켜보자는 신호를 장난스럽게 보낸다.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이것은 낮의 풍경이 아니라 어두컴컴하고 우울한 밤의 정경이다. 로맨스는 여기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존 포드를 존경하던 그 예술의 세계도 거의 희미해져서 잘 분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남은 것은 이제 판수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대규와 옥희가 고향을 떠나가는 일만 남았다. 이 마지막 장면은 둘 중 양자선택 속에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지 거의 알기 힘들다. <30년만의 대결>은 결국 판수를 아내에게 되돌려 보내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제 발로 돌아온 옥희가 어쩔 수없이 제 발로 다시 고향을 떠나야 하는 이야기인가. 이 명랑한 영화의 이면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계획과 목적을 향해서 부산하게 계산한 다음 비밀스러이 상대방을 이용하고 전유하려는 싸움이 펼쳐진다. 그걸 로맨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임권택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에서 로맨스는 항상 근대에 밀려나가면서 애처롭게 뒤돌아보는 것이다. 임권택은 그걸 어디선가 보기는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더 이상 경험해볼 수 없는 것처럼 다룬다. 그러므로 나는 약간 대담하게 <30년만의 대결>을 정의 내려 보고 싶다. 이 영화는 조건의 영화이다. 어떤 조건?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했던 도약의 자리에로 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영화. 그는 계속해서 질질 끌려가고 있는 것만 같은 이 과정을 어디서 끊을 수 있는 지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 잡초 >를 자기가 제작하고 연출하기 전의 일이다. 여기서는 그걸 영화 안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다. 미세한 변화들. 하지만 되풀이되는 실패들. 그러면서 어딘가에 기대서라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하는 장면들. 효과들은 잘 발휘되지 않고 있으며 무언가 의심만이 둘러싸고 어수선하게 활동하는 중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한 변화를 감지하였다. 무엇보다도 이제까지 자기 영화로부터 낯설어지기 시작하는 임권택.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풍경의 쇼트들, 그 낯섦. 그보다 더 분명한 변화의 조짐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