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 감독
- 부성철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이승기, 신민아, 노민우, 박수진, 변희봉, 윤유선, 성동일, 효민, 김호창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공상에 지나지 않지만, 흥미로운 화두와 재미를 선사하는 건 사실이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 만약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쓰러지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현장에서 안중근 의사는 사살되고, 이듬해인 1910년 조선이 일본과 합병되어 초대통독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을지 모른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 불법집회 무산을 시작으로, 1921년 이노우에 2대 조선총독 위임. 1932년 상해 홍구 공원, 윤봉길 의사 현장에서 사살. 1936년 미일 연합군 2차 세계대전 참전. 1943년 일본군 만주국 점령. 1945년 베를린 원폭투하, 2차 세계대전 종료. 1960년 일본 UN 상임이사국 가입. 1965년 사쿠라 1호 위성 발사. 1988년 나고야 올림픽 개최. 2002년 일본 월드컵 개최. 그리고 바야흐로 동아시아 일대가 일본 제국이란 이름 아래 대동아 공영권으로 재통합된 지 약 100년의 시간을 맞이하는 2009년. <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대체역사물이다. 비록 이 설정은 복거일의 장편소설 『비명을 찾아서』에 크게 빚지고 있지만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혹은 금기시될 수 있는) 소재와 큰 스케일을 들고 나와 귀추를 주목시켰다. 2002년 당시 제작비가 80억 가까이 들어간 이 영화는 야심찬 한국산 블록버스터였다. 2년에 걸친 시나리오 작업과 압도적인 거대한 세트, 미니어처 특수효과와 CG를 동원한 참신한 비주얼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톱스타 장동건 과 나카무라 토오루를 각각 투톱으로 배치한 캐스팅 또한 화제작에 걸맞았다. 거기에 한국의 신구 와 안길강 , 천호진 그리고 일본의 다이몬 마사아키와 미츠이시 켄 등 훌륭한 조연진들이 든든하게 뒷받침해주었고, 영화상 중요 모티브가 되는 ‘월령’에 대한 설명은 무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특별출연해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다. 거기에 중국과 일본을 로케한 실감 나는 영상은 대체역사 판타지에 그럴듯한 분위기와 상황을 설정해주었다. 개봉당시 원안을 제공한 <비명을 찾아서>와 입장 차이가 불거지며 소송에 걸리는 등 영화 외적으로도 크게 이슈화되었지만, 그런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감성적인 연출과 개연성이 떨어지는 캐릭터, 균형감을 잃어버린 판타지로 인해 전국 300만이 채 안 되는 흥행에 그치고 말았다. 영화의 절반 이상이 일본어로 진행되고, 일본 배우들이 등장하기에 일본에도 수출되었지만, 항일 관련 내용으로 인해 그들 반응 역시 떨떠름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초반의 박력 있는 인트로 몽타주와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과 토요토미 히데요시 동상이 서 있는 광화문 거리 등을 묘사한 충격적인 비주얼 등은 나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동준 이 담당한 당대 최고 스케일의 음악도 물론! 기획영화의 산실이던 신씨네에서 < 결혼 이야기2 >로 94년 데뷔한 이동준 은 굵직굵직한 화제작들의 음악을 잇달아 담당하며 주목받았다. < 구미호 >와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범상치 않은 작품들로 예행연습을 끝낸 그는 강제규 감독과 함께한 < 은행나무침대 >로 한국영화음악의 레퍼런스를 제시했으며, 칸 영화제에 출품됐을 때 미국의 영화전문지 ‘버라이어티’로부터 “바실 폴리두리스와 엔니오 모리꼬네를 합쳐놓은 듯하다”라는 극찬을 듣기도 했다. 이미 91년 <황조가>로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음악상을 수상하며 한국형 스코어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던 그는 이후 < 초록물고기 >와 < 지상만가 >같은 드라마부터 < 쉬리 >, < 유령 >, < 퇴마록 >, < 리베라 메 >와 < 천년호 >, < 태극기 휘날리며 >로 이어지는 흥행대작들을 섭렵하며 규모와 감동을 동시에 충족시켰다. 누누이 한스 짐머를 좋아한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던 만큼 그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지만, 최근 할리우드의 거의 모든 블록버스터들이 이 스타일을 유행처럼 좇아가고 있기에 하나의 경향이나 방법론적인 선택으로 보는 게 옳을 듯싶다. 물론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 지구를 지켜라! >같은 블랙 코미디와 < 로망스 >같은 격정 멜로의 라틴 사운드, <대왕의 길>과 <미망>같은 사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변호사>나 <아이리스>시리즈 등의 TV음악과 <난타>, <락햄릿>같은 공연음악과 <배터리> 등의 게임 음악까지 활동 폭을 넓혀가며 전천후 작곡가로 거듭났다. 이동준이 작업한 영화들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대한민국에서 작곡된 최상급의 블록버스터 스코어를 들려준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 정도의 박력과 규모를 간직한 한국영화 사운드트랙과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설립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단원들 대다수가 소련 말기 주요 악단의 악장이나 수석/부수석 급을 역임한 바 있는 100인조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았으며, 60인조 4부 혼성 합창단까지 합류시킨 그 위용은 가히 압도적이다. 스펙터클한 영상과 숙명적인 캐릭터들의 고뇌와 방황, 그리고 우정과 사랑을 장엄하고 화려한 사운드로 훌륭하게 포장하고 있으며, 탁월한 멜로디 감각을 자랑하는 이동준의 애수 어린 선율은 섬세한 연주와 감성으로 더욱 증폭되어 다가온다. 여전히 액션 씬에서 짐머레스크 스타일이 두드러지긴 하지만 <쉬리>나 <유령>에 비해 세련되어졌고, <은행나무침대>처럼 대금이나 소금, 북과 같은 전통악기와 여성의 한 맺힌 구음을 통해 한국적인 소리에 대한 접목을 꾀하고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거기에 일본의 타이고와 사쿠하치 등 전통악기를 동원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으며, 중간중간 라틴어로 노래하는 엄숙하고 청고한 소리는 드라마틱한 깊이와 다소 생경스러울 수 있는 SF 판타지에 그럴듯한 무게감을 선사한다. 오히려 이 스코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영화의 작은 그릇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이동준의 스코어는 강렬하고 소름 끼친다. 가장 임팩트 있게 다가오는 건 영화 도입부에 흐르는 ‘Prologue’다. 안중근 의사의 저격 실패를 구슬프고 애잔하게 담아낸 선율은 이내 파국의 시나리오로 접어들면서 오케스트라와 4부 혼성 합창단을 힘껏 몰아붙인다. 지난 100년간의 역사를 압축한 사진들을 보여주며 방점을 찍는 이 웅장한 칸타타는 무시무시한 전율과 흥분을 던져준다. 이는 영화상 가장 하이라이트에 등장하는 ‘REQUIEM’에서도 반복된다. 바실 폴리두리스나 한스 짐머를 연상케 하는 장중하고 무거운 사운드는 규모의 스코어가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극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곡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건 처연한 대금의 한 맺힌 소리다. 라틴어 합창도, 100인조 오케스트라도 감히 담을 수 없는 민족의 심지를 이 투박한 음색이 섬세하게 건든다. 종종 대금은 영화 전반에 깔리는 사쿠하치와 대치되며 두 주인공의 심정과 위치를 상징하기도 한다. ‘사카모토’와 ‘사이고’, ‘(후레이)센진’의 테마는 기타와 피아노, 바이올린 등 익숙한 음색과 쉽고 대중적인 멜로디를 통해 각각의 사연과 깊이에 접근해간다. 멜랑꼴리하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통해 각자의 입장에서 오는 아픔과 상처, 고통 등을 효과적으로 치유하고 있다. ‘Tempus Porta’은 전형적인 판타지 큐로 운명론적인 합창과 자유의지를 피력하는 여성 구음이 만나는 교감을 통해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의지와 변화가 동시에 읽히며, 테크노 리듬에 독특한 왜색 사운드를 가진 ‘Gayarang’은 류이치 사카모토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트랙으로 조선인 구역 술집 씬에 사용돼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액션 큐들이 전형적인 짐머 스타일을 표방하는 게 두고두고 아쉽긴 하지만, 국내에서 이처럼 명확하게 스타일과 스케일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지 않을까. 특히나 ‘Agit Attack’은 일본 마츠리를 상징하는 사쿠하치와 습격 사운드를 절묘하게 연계시키며 강력한 효과를 보여줬다. 이후 이동준은 이 경험을 발판 삼아 < 천년호 >와 < 각설탕 >에서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작업하며 더욱 원숙미 넘치는 영화음악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이처럼 강력한 파워와 규모, 화려하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한데 담아내진 못했다. 감정 과잉에 갖가지 실험과 피나는 노력이 복잡하게 얽혀 이동준의 과도기적인 장단점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사운드트랙이 가치가 있는 건 그 모든 걸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고 완성해냈다는 것이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넘치는, 90년대 블록버스터의 자화상을 정확하게 반추하는 의미심장한 사운드트랙이다. Track List 01. Prologue (#1) 02. Seoul, 2009 (#2) 03. ITO Center - Senjin (#4) 04. ITO Center - JBI (#5) 05. Last Of The Senjin (#6) 06. Theme Of Saigo (#10) 07. Gayarang (#12) 08. Theme Of Sakamoto (#13) 09. Theme Of Sakamoto (#21) 10. Youngodae (#22) 11. “INBODA” (Conspiracy)(#30) 12. JBI Escape (#31) 13. Theme Of The Senjin (#34) 14. Theme Of The Senjin (Guitar ver. #35) 15. Agit Attack (#36) 16. REQUIEM (#37) 17. Tempus Porta (The Gate Of The Time) (#45) 18. Friend...Enemy.. (#47) 19. Harbin Station (#48) 20. Again (#49) 21. Epilogue (#50) 22. Lost Memories (Special Track)
1990년대를 열었던 한국영화계의 키워드는 ‘기획영화’였다. 한국영화산업에 대기업 자본이 유입되고 제작비가 증가하면서 기획자의 사전 조사와 아이디어에 따라 제작되는 영화가 충무로의 신조류를 형성한 것이다. 1990년 미국 직배가 안착하고 한국영화 고사상태라는 한탄이 나오던 시절, 대기업 투자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생생한 현실의 이야기를 담아내야 했고 변화가 불가피했다. 신철 대표가 이끄는 신씨네는 < 결혼 이야기 >(92, 김의석 )로 기획영화 시대의 포문을 열었던 젊은 기획자 집단의 선두주자였다. 신철 대표는 대학생이던 1978년 김수용 감독 연출부로 영화계에 입문했으며, 우성영화사 기획실, 피카디리 극장, 명보극장 기획실 등을 거치면서 외화 수입, 기획, 마케팅을 고루 경험했다. 1988년 영화 전문 기획사 신씨네를 설립하여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89), <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90), < 베를린 리포트 >(91), 그리고 < 결혼 이야기 >를 기획했다. <결혼 이야기>가 한국영화계에 던진 충격은 대단했다. 수많은 신혼부부를 인터뷰해서 이를 영화 속 에피소드로 풀어낸 이 영화는 현실의 삶에 밀착한 생동감 있는 기획으로 서울 개봉관 52만 명을 동원하였다. 코미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뒤바꾸면서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 트렌드를 형성하였고 삼성영상사업단의 투자를 받았으며 영화 속 PPL을 도입하는 등 여러 측면에서 이정표가 되었다. 신철 대표는 이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1992년 신씨네를 제작사로 변경 등록하고 < 미스터 맘마 >(92, 강우석 ), < 101번째 프로프즈 >(93)를 연이어 성공시켰다. 신철 대표는 이 작품들로 한국영화 코미디에 대한 관객의 인식을 가장 트렌드 한 장르 현상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후 그가 도전한 것은 할리우드 영화와 경쟁할 수 있는 특수효과, 컴퓨터 그래픽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CG를 도입한 첫 영화인 < 구미호 >(94)는 기대에 못 미치는 엉성한 결과와 스토리 구조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물론 < 은행나무 침대 >(96)에서는 진일보한 결과를 보여주면서 한국영화도 기술과 영화의 이야기를 얽어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 뿐만 아니라 IMF 체제에 본격 최루성 멜로로 복귀하면서 < 편지 >(97)와 < 약속 >(98)으로 시대의 공기와 호흡하는 재능을 다시 한번 알렸다. 한편, 그의 작품 이력에서 < 거짓말 >(99)은 이례적이다. 대중성에서 비껴있으면서 예술과 외설의 경계가 어디인지, 표현의 자유란 무엇인지 광범위한 논란을 일으킨 말 그대로의 문제작이었기 때문이다. 필름압수와 수색영장이 발부되는 등 등급 심의과정에서 ‘등급분류 보류’ 판정을 받아 표현의 자유와 등급제도의 변화에 섰던 작품이기도 하다. 떠들썩하게 대서특필되었던 이 영화에 대한 외설논란이 없었다면 등급분류보류 제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은 좀 더 지연되었을지도 모른다. 2000년대 이후 신철 대표가 보여준 행보는 대기업 투자, 기획영화, 장르 트렌드, CG에 이어 한국영화와 뉴미디어의 결합, 그리고 세계 진출이라는 과제로 나아가는 듯하다. 그는 인터넷 소설을 영화화 한 < 엽기적인 그녀 >(2001)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으로, 국내 488만 관객 뿐 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알려진 한국영화, 영화에서의 한류를 이끌어낸 작품의 제작자가 되었다. 차태현 , 전지현 을 한류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중화권에서 한국영화의 인기를 촉발하면서.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둘 수 있는 놀라운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으로 디지털 복원한 < 로보트 태권브이 >(2007)를 개봉함으로써, 한국의 대표적인 캐릭터인 <로버트 태권브이>를 원 소스 멀티 유즈의 핵심 콘텐츠로써 현재까지 다양하게 발굴하고 있다. 신철 대표의 영화인생은 당대의 트렌드를 최전방에서 뚫고 지나온 역사이다. < 결혼 이야기 >의 대기업 투자와 기획, < 구미호 >의 CG, <엽기적인 그녀>의 아시아 시장 없이 현재의 한국영화구조와 장르는 형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미래를 살아가는 기획자, 제작자인 그의 차기 행보가 기대된다. / 글: 김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