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더씨: 마법 산호초를 찾아서
- 감독
- 피터 팝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더크 페트릭, 에밀리아 슐레, 안드레아스 보우라니, 베로니카 페레스, 한네스 야에니케, 김아롱, 정의진
1. …지돈 씨, 이 시대는 이상한 시기이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팽창하나 경련적인 변화의 물결의 시대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모순적 효과를 동시적으로 확대합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변화의 시대가 권력관계의 잔인함을 지워내지는 않고, 오히려 다양한 방식들로 권력관계들을 강화하면서 내파의 지점으로 이끕니다… 1) 연재를 시작한지 반년 가까이 지났지만 우리가 만들 에세이 필름의 제작비는 한푼도 모이지 않았다. 투자자나 제작자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연재 조회 수는 매회 마다 정확히 반토막이 났고 이렇게 계속 쪼개진다면 쿼크 입자 수준까지 내려갈 지경이었다, 라는 말로 JD가 지난 회를 시작한지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조회 수가 반토막을 넘어 1/3토막이 났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지난 반년 동안 우리의 연재를 읽고 뭐라도 반응을 보여준 사람은 셋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영화평론가들이다. 임재철: 아니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었다는데 무슨 길을 잃었냐고. 내가 보기엔 한국 영화에 들어간 적도 없는데, 안 그래? (직접 들음) 유운성: 제가 문근영 배우를 좋아하긴 하죠, 하하. 집에 싸인도 있고… (전해 들음) 오진우: 연재된 글들을 보고 웃어본 적은 없지만 응원합니다 (인스타그램에서 봄) 세 분 평론가에게 마음 속 깊은 감사와 우정을 전한다. 영화라는 우정. 하지만 지금 JD와 내게 필요한 건 일반적인 우정이 아니다. 영화라는 우정을 가능하게 하는 우정이라고 할까? 그건 만들어진 영화를 통해서야 비로소 가능한 우정이고, 영화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물적조건(=돈)과 뗄 수 없는 우정이다. 물론 모든 우정이 영화가 될 필요는 없다. 모든 영화가 우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냥 이렇게 말해야겠다. 영화라는 우정은 우정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온라인 상영관을 통해 <초국지소지천황>을 봤다. 1971년, 감독 하라 마사토와 일군의 배우들은 [고지키]로 알려진 역사와 신화에 관한 오래된 책을 바탕으로 이 16mm 영화를 촬영했다. 하라는 당시 촬영을 끝내지 못했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혼자 슈퍼8 카메라로 촬영을 재개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돌아보고, 신화는 외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물리적인 의미로는 촬영될 수 없지만, 영화 그 자체 혹은 영화 만들기 과정에 깃드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2) 몇 번의 재편집을 거쳐 현재의 형태로 만들어진 <초국지소지천황>은 완성되지 못한 16mm 푸티지와 촬영지에서 촬영지로 움직이는 1인칭 시점의 8mm 촬영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이미지들이 흘러가는 동안 하라는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떠들고, 때로는 직접 노래를 하기도 한다. 일종의 로드무비이자 영화일기, 에세이 필름, 바르트가 말한 글쓰기-의지(scripturire)에 빗대자면 순전한 응시-의지로 이루어진 영화라고 할까. 뷰파인더를 바라보는 동시에 렌즈를 바라보는 하라는 말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영화를 위해 희생한 과거도, 바칠 현재도 갖고 있지 않다.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모든 걸 갖고 있다.” 나도 20대 초반의 촉망 받는 영화 감독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텐데. 나는 마흔을 넘긴 서평가이지만 서평은 쓰지 않고,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섰지만 영화도 좋아하지 않는다(내가 쓴 [담배와 영화]라는 책의 부제는 ‘나는 어떻게 흡연을 멈추고 영화를 증오하게 되었나’다). 우정을 싫어하진 않지만 우정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건 싫다(진정한 우정은 우정이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식의 고색창연한 로맨티시즘의 발로일 수 있다). 영화를 위해 희생한 과거도 바칠 현재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건 우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라 마사토의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능의 카메라와 편집 프로그램에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느낀다(심지어 여기엔 ‘하지만’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2. “얼굴에서, 얼굴에서! 얼굴은 얼간이들을 위해 만들어졌군!” 3) 얼굴은 보편적이 아니라고 들뢰즈는 말했어요, 라고 JD는 말했다. 그건 백인 그 자체이고, 그리스도이며, 유럽인이고, 에즈라 파운드가 뭔가 관능적인 인간이라 부른 것, 요컨대 평범한 색정광(érotomanie)이며,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보편적인 것의 얼굴, 한 마디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거죠. 4) JD는 계속해서 말한다. -얼굴은 우리를 비인간성으로 이끄는 일종의 정치와도 같은 것, 따라서 인간이 운명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은 얼굴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기표화와 주관화로 작동하는 기계이자, 인종차별주의 및 민족중심주의를 산출하고 강화시키며 얼굴의 선별에 이용되는 기계인 얼굴성이라는 추상적 기계로부터 도망치는 거라나 뭐라나… 5) 밤이었고, 우리는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KTX 066호 열차를 타고 있었다. 긴 하루였다. 정지돈과 박솔뫼, 그리고 나는 삼요소라는 이름의 서점에서 오후 1시부터 밤 9시까지 독자들과 함께 하는 세 개의 세션을 진행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박솔뫼가 예매한 기차는 15분 먼저 출발했고, 둘만 남아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었다. 창작과 비평에 대해서, 문학과 사회에 대해서, 문학이라는 좁은 동네에 대해서, 자음과 모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고, 우리가 처한 상황과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해야 하지만 하지 못한 것들, 그리고 절대 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우리는 최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온라인 상영관을 통해 본 두 편의 영화, 하라 마사토의 <초국지소지천황>과 크리스 페티와 이안 싱클레어의 <런던 순환도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런던 순환도로>는 크리스 페티와 이안 싱클레어가 세계에서 가장 큰 바이패스인 M25 외곽순환도로에 관해 만든 작품으로 일종의 로드무비이자, 사회학적인 비평, 한 세기 전의 미래파 문학 속으로의 영화적인 여행이고,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두 인물 사이의 영화적 대화이다. 6) 두 영화는 여러모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일단 듀얼 스크린이라고 하나? 독립된 두 개의 화면이 동시에 흐르며 내레이션을 통해 진행된다는 것, 일종의 로드무비이자 영화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는 부분 등이 그렇다. 물론 다른 점은 더 많다. 하나는 사회(학)적-비평적-대화-외부를 향하는 영화(<런던 순환도로>)고 다른 하나는 신화적-시적-독백-내부를 향하는 영화(<초국지소지천황>)라는 것. 그중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하라는 카메라를 바라보지만 페티와 싱클레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열이면 열 <초국지소지천황>을 더 예술적이라고 말할 거예요. -왜죠? -일종의 진정성일까요. <런던 순환도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학적인 일화들을 다양한 레퍼런스들을 통해 배열하고 보여주는데 그걸 하나로 묶어주는 건 런던 순환도로죠. 따라서 이건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 일종의 교양다큐 같은 걸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예요. 반면 <초국지소지천황>의 모든 이미지와 이야기를 묶어주는 건 결국 하라 마사토라는 개인이에요. 실제로 감독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시네마와 내 얼굴을 마주하겠다, 대적하겠다, 내 얼굴을 보여주겠다, 뭐 이런 다짐을 몇 차례 반복하잖아요. 그런 감독의 행위가, 정확히 말하면 그런 감독의 얼굴이 영화에 진정성을 주입하는 거죠. -저는 사실 그 부분이 싫더라고요. -진정성을 주입하는 부분이요? -카메라로 자기 얼굴을 찍는 부분이요. 코로나19가 유행한 이후 나는 내가 얼굴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화에 나오는 얼굴만 그런 게 아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 상점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얼굴이 발산하는 정보가 너무 많아 종종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말 그대로 TMI. 언젠가부터 길을 걷고 마트에 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상적인 행위들이 훨씬 수월해졌는데, 그건 물론 마스크 때문이다. 얼굴, 얼마나 소름끼치는가. 들뢰즈는 말한다. 자연스럽게도 얼굴은 모공들, 평평한 부분들, 뿌연 부분들, 빛나는 부분들, 하얀 부분들, 구멍들을 가진 달의 풍경이다. 얼굴을 비인간화하기 위해 그것을 클로즈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커다란 판(gros plan)이며, 자연스럽게 비인간적이며, 괴물적인 복면이다. 7) 영화의 일반적 얼굴은 바로 제국주의의 얼굴이며, 자본주의에 의해 집요하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구축된 세계적 질서의 얼굴이지 않은가? 8) -그래서 우리 연재가 자본주의가 구축한 세계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완벽하게 정교한 얼굴 가면을 계속해서 바꾸어 쓰는 요원들이 등장하는 < 미션 임파서블 >에서 시작했던 거군요. 소름… 그러므로 비약하면, JD가 말했다. 우리의 에세이 필름은 영원히 지금 여기서 씌어져야 합니다. 기록, 확인, 재현, 묘사의 조작이 아니라 언어학자들이 수행동사라고 부르는 것, 정확히 말해 발화하는 행위 외에 어떤 언표도 가지지 아니하는 그런 진귀한 언술적인 형태. 삶은 영화를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영화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입니다. 이른바 포스트-얼굴Post-Ulgul!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천천히 눈이 감겼다. 강연 준비를 하느라 밤을 꼴딱 샌 탓이다. 우리 열차는 곧 광명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내리실 때는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시고…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안내 방송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부디 우리의 영화에도 광명(光明)이 있기를, 가능하면 우리의 삶에도, 지저스 크라이스트… 3. …지돈 씨, 저는 오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근본적인 계획입니다. 돈을 벌겠습니다. 아주 많이. 예술, 세계, 미래 다 좋지만 일단 돈부터 벌겠습니다. 돈을 벌면 세트부터 짓겠습니다. 촬영 들어가는 날에는 저는 감독 의자에 앉아 있을게요. 햇살이 워낙 좋으니까요. 지돈 씨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9) JD가 어느 글에서 쓴 것처럼 나는 불확신의 픽션을 가진 사람, 약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며, 뭔가를 이루겠다는 욕심이나 기분 같은 게 없어서 주도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다만 어쩌다보니 무언가를 하고 있는, 말하자면 세상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구원이든 종말이든 그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아니다.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스스로의 운명을 조종하고 얼굴로부터 도망갈 수 있도록.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박솔뫼와 정지돈과 내가 대전의 삼요소에서 진행한 세션 중 하나는 독자들과 함께 즉석에서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3명의 작가와 9명의 오프라인 참가자 그리고 10명 남짓한 온라인 참가자가 함께 ‘대전만세!’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 대전에 관한 소설을 써달라는 대전관광공사의 의뢰를 받고 대전에 도착한 금정연이 원고료가 든 서류가방을 들고 영화를 보러 대전아트시네마에 갔다가 엉뚱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홍콩과 마카오, 런던과 대천 해수욕장을 오가며 벌어지는 환상적인 이야기인데,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극장 앞자리에 앉아 있던 양조위가 금정연에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다. “도망가자.” 그러니까 가능하다면 그런 방식으로 도망가면 좋겠다는 말이다… 우리가 얻는 가장 단순한 아이디어 중 하나는 누군가 울고 있을 때 얻게 되는 아이디어다, 라고 존 케이지는 썼다. 뒤샹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울고 있었다. 몇 년 후 같은 도시의 같은 지역에서, 거의 같은 이유로, 라우셴버그는 울고 있었다. 11) 그래서 얻게 된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존 케이지는 쓰지 않는다. 존 케이지가 늘 그렇듯이. 나도 울고 있었다. 집이었고 평범한 저녁이었다. 아이를 목욕시키고 옷을 입히려는데 커튼 뒤에 숨어서 나오질 않았다. 우리 아가가 없어졌네, 어디 갔지, 엉엉. 내가 우는 시늉을 하자 아이가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아빠 우는 거야? 응, 우는 거야.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아이가 말했다. 내가 여기에 숨을 테니까 아빠 울어. 알겠다고 하고 계속 우는 시늉을 하는데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커튼 튀에 숨어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지, 왜 우는 거지’… -우리 아이가 없어져서 울고 있었지. 약간 뻘쭘한 기분으로 내가 말했다. -나는 이빨이 튼튼한 아기 상어 포크레인인데. -이빨이 튼튼한 아기 상어 포크레인이구나. 이빨이 튼튼한 아기 상어 포크레인 어디 있어? -여기 숨어 있어. -거기 있었구나! 이빨이 튼튼한 아기 상어 포크레인, 이리 와서 옷 입자. 그러자 아이가 말했다. -나는 엄청 빠른 소방차 뽀로론데? -아, 엄청 빠른 소방차 뽀로로구나…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다 그런 것처럼 우리 아이 역시 변신의 귀재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쓰레기를 줍거나(청소차) 호스로 불을 끄는 시늉을 하거나(소방차) 폴짝 폴짝 뛰면서 개굴개굴 울거나(개구리) 인상을 쓴 채 거실을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돌며(돛새치 혹은 중장비차) 논다. 그렇담, 나는 생각했다. 나도 이것저것 따지고 재며 생각할 것 없이 그냥 감독이 되면 되는 거 아닌가? 로지 브라이도티는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에서 이렇게 말한다. 요점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즉 고전적 양태로 존재하기Being보다 오히려 결국에 우리가 돌연변이, 변화, 변형을 어떻게 재현하고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또는 로리 앤더슨이 현명하게 말했듯, 요즘에는 분위기moods가 존재의 방식modes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것은 변화를 창출하고 즐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이점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불안감의 원천입니다. 12) 4. …마지막으로 르네 도말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한 번 더 인용하겠습니다. 주려고 하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한다.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한다.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살게 된다. 13) 지돈 씨,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홍상수의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홍상수가 내가 되고 싶은 감독의 이상형에 가까웠기 때문은 아니고, 때마침 개봉을 앞둔 홍상수의 신작 제목이 < 당신 얼굴 앞에서 >였기 때문이다. -우연은 중요하죠. 저희 어머니는 정의당의 이정미 대선 경선후보를 지지하는데, 저희 어머니 성함도 이정미거든요. -고마워요 지돈 씨, 언제나 적절한 예를 들어주시네요… 우연은 또 있다. 로지 브라이도티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유일한 상수 는 변화지만, 그것은 단순한 과정도 아니고 단선적인 과정도 아니다… 14) -근데 정말 브라이도티 말이 맞더라고요. -뭐가요, 상수는 변한다고요? -네, 그리고 그건 단순한 과정도 아니고 단선적인 과정도 아니던데요. 내가 마지막으로 본 홍상수 영화는 < 자유의 언덕 >과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였는데, 그때 나는 홍상수 영화의 반복되는 어떤 정서, 느낌, 분위기에 조금은 질려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김민희와 정재영이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 같은 것. 그런데 지금은… -먼저 < 풀잎들 > 넷플릭스에 있어서 봤는데, 완전 트위터를 영화로 옮겨 놓은 것 같더라고요. 카페가 트위터고 각각의 테이블마다 멘션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구석에 앉은 김민희가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일방적으로 혼자 비계인용 달고, 그러다 갓생 사는 동생 커플 만나서 괜히 화내고, 다시 돌아와서 밤 늦게까지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랑 멘션을 섞고 결국 트친 되고… -그게 그런 내용이었어요? -그리고 < 도망친 여자 >도 봤는데 처음엔 경기도 외곽의 빌라에 사는 지인의 집을 방문하고 북촌에 있는 아는 언니 집을 방문하는데 두 집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구해줘! 홈즈’ 극장판 같은 건가? 아니면 각각의 집을 방문한 한국 남자들에 대한 일종의 생태학? 그런데 마지막에 들른 극장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는 장면을 보면서 깨달았죠. 아, 이건 씨네필들을 풍자하는 영화구나. 김민희=도망친 여자=씨네필이구나. -네??? -지돈 씨, 생각해보세요. 첫 번째로 방문한 경기도 빌라에서 김민희는 CCTV를 통해 이웃집 여자를 만나는 지인을 훔쳐봅니다. 두 번째로 방문한 북촌의 빌라에서는 도어락 모니터를 통해 스토킹하는 시인을 훔쳐보고요. 세 번째로 방문한 극장에서 일하는 대학 친구를 우연히 만나고, 한때 김민희의 연인이었으나 지금은 대학 친구의 남편이 된 작가를 마주치고 찝찝한 이야기를 나눈 후에 도망치듯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잖아요. 모르시겠어요? -(대체 무슨 소린지)??? -그렇지만 제일 좋았던 건 < 클레어의 카메라 >였는데요, 저는 그것이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영화에 어떤 힌트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 1)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로지 브라이도티, 김은주 옮김, 꿈꾼문고, 2020) 13쪽 2)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홈페이지의 영화 소개 참고 3) <누벨 바그>(장 뤽 고다르, 1990) 4) [천 개의 고원](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338쪽 참고 5) [영화 속의 얼굴](자크 오몽, 김호영 옮김, 마음산책, 2006) 307쪽 참고 6)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홈페이지의 영화 소개 참고 7)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앞의 책, 362쪽 8) 자크 오몽, 앞의 책, 308쪽 9) <기생충>(봉준호, 2019) 중에서 기우의 편지를 변형함 10)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정지돈, 문학동네, 2021) 43쪽 참고 11) [사일런스](존 케이지, 나현영 옮김, 오픈하우스, 2014) 131쪽 12)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로지 브라이도티, 김은주 옮김, 꿈꾼문고, 2020) 15쪽 13) [마운트 아날로그](르네 도말, 오종은, 이모션북스, 2014) 14) 변신 495쪽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경기도로 이사한 후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한번 서울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서울 서대문구에서 태어났고, 마포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독립한 후에는 줄곧 은평구에 살았다. 부산 금정구 금정경찰서에서 보낸 군생활을 제외하면 서울의 서북 3구, 그 안에서도 반경 10키로미터가 넘지 않는 좁은 장소에서 평생을 산 셈이다. 개굴개굴. 그런 내게 사람들의 말은 토머스 울프와 이문열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두 작가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그들 모두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경기도에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울로 돌아가고 싶기는커녕 오히려 꼭 서울에 살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건 내가 (갈 곳 없는) 프리랜서이고, 이사를 통해 아내의 출퇴근길은 (조금이나마) 편해졌으며, 아내와 나 모두 문화생활(정확히 말하면 외출)을 즐기지 않는 성격이고, 아이의 학군이나 사교육 같은 걸 신경 쓸 필요가 (아직은) 없는 데다가, 가족 중에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녀야 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전보다 적은 주거비용으로 삶의 질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높아졌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변화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게 요즘 제가 부동산에 꽂힌 이유에요. -그래서 이제 부동산 투자라도 하실 건가요. -아직은요. 대신 아내와 함께 일요일마다 ‘구해줘! 홈즈’를 챙겨보고 있어요. -그게 뭐지? 드라마에요? [셜록] 같은? -이사를 계획 중인 시청자가 사연을 보내면 연예인들이 대신 예산과 조건에 맞는 집을 보러 다니는 예능이에요. 열심히 보고 공부해서 부동산 전문가로 거듭나려고요. 지돈 씨도 나중에 이사 생각 있으면 말해요, 제가 잘 해드릴게요. -…그건 마치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출발! 비디오 여행’을 꼭 챙겨본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지돈 씨, 저는 ‘출발! 비디오 여행’ 같은 건 보지 않아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JD를 바라보았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접은 후로는요. 조셉 맨키위즈의 영화 <유령과 뮈어 부인>과 마그리트 뒤라스와 도미니크 노게즈의 대담집 [말의 색채]는 모두 부동산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루시 뮈어는 독립을 선언한다.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1년 전에 죽은 남편까지 들먹이며 만류하지만 뮈어 부인의 의지를 꺾진 못한다. 부동산을 찾은 루시는 수상할 정도로 저렴한 바닷가 저택을 발견하고, 중개업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임대 계약을 맺는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성격 더러운 전 주인의 유령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뒤라스는 대뜸 자신을 매혹시켜 < 나탈리 그랑제 >를 만들게 한 집에 대한 이야기로 대담을 연다. 생애 처음 소유한 집. 정원에 창고까지 딸린 집은 당시 그녀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매우 비쌌지만,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겨우 살 수 있었다고. 그러면서 대수롭지 않게 덧붙인다. "내 책을 각색한 영화들이 너무 좋지 않아서 내가 직접 해도 그 정도는 만들 수 있거나 그보다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1) 두 가지 교훈이 있다. 하나. 싸고 좋은 매물은 없고 집과 사람, 사람과 유령 사이에도 궁합은 있다. 둘. 혹시라도 문필 활동으로 생계를 꾸릴 생각이라면 최소한 프랑스에서는 태어났어야 한다, 그것도 백 년쯤 전에, 되도록이면 마르그리트 뒤라스로… 한국에도 부동산을 다룬 작품은 많지만 부동산 이야기로 시작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일단 떠오르는 건 이윤기 감독의 2008년 영화 < 멋진 하루 >다. 검은 화면 위로 오프닝 크레딧이 흐르면,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린다. -마석? 그게 어디야? -춘천 가는 길 어디라나 뭐라나? 아무튼 뭐 사자마자 두 배쯤 올랐대. 지금은 한 평당 70이라던데. -그럼 얼마나 번 건데? 걔는? -40에 샀다니까 30에 100해서… 삼 천? 그쯤 되겠네 -삼 천? (사이) 삼 천… -한 방에. 봐 봐, 얘 몇 주째 안 보이잖아. 전화도 잘 안 받아. 나는 구글에 '마석 땅값'을 검색한다. 가장 처음에 나오는 2019년 6월의 기사("'드디어 호재 터졌다!' 남양주 마석역 일대 땅값 후끈")에 따르면 GTX 건설과 지하철 6호선 연장 계획이 동시에 발표되면서 마석역 인근 당 평당 평균 가격은 2017년 250만원, 2018년 350만원이었던 것이 2019년에는 450만원으로 치솟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2020년과 2021년에는…? (알기 싫음) 담배를 나눠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이 향하는 곳은 스크린 경마장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부동산과 경마, 그리고 1년 전 350만원을 빌리고 잠적한 남자(하정우)에게 빚을 받아내기 위해 경마장을 찾은 여자(전도연)에서 시작하는 영화인 셈이다. 과연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촉발된 전세계적인 경제위기의 한복판에 개봉한 영화답다고 할까. 돈이 없다며 느물느물하게 잡아 떼던 남자는 돈을 받기 전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여자에게 오늘 안으로 어떻게든 해결하겠다고 큰소리친다. 어떻게? 다른 여자들의 돈을 빌려서… 남자를 믿을 수 없는 여자는 남자와 동행하기로 하고, 카메라는 그런 둘을 따라간다. 옛 연인에게 돈을 갚기 위해 다른 여자들에게 돈을 빌려야 하는데도 어째선지 무사태평하기만 한 남자와 옛 연인에게 빌려준 돈을 받는데 어쩐지 본인이 직접 운전까지하며 돈을 꾸러 다니는 것만 같은 기분에 자꾸 울컥하는 여자의 하루. 그런데 나는 왜 여기서 영화의 줄거리를 꼬치꼬치 늘어놓고 있는 걸까? 서평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다. 분량을 채우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영화가 캐릭터 무비라는 것,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대책없이 낙관적이고 유연한 성격의 남자와 안 그래도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이유없이 예민하고 불안한 성격의 여자가 티격태격 하면서도 그들에게 주어진 미션을 완료하고 헤어져 다시 각자의 길을 걸어가지만 함께 했던 짧은 시간의 영향으로 그들 모두 그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여운을 남기는 종류의 영화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변화하는 사람은 여자 한 명뿐이라고 해야겠지만.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을 남녀로 바꾼 다음 긴 이야기를 단 하루로 압축한 것 같은 이야기, '한국남자 조병운(하정우)' 같은 느낌으로… 영화가 중간을 지날 무렵, 경마장을 나설 때부터 남자가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의 비밀이 밝혀진다. 남자는 돈이 없어 전세금을 빼고 가방 하나에 살림을 넣은 채 친구 집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면 이 영화를 사업이 망하고 이혼까지 한 속편한 무주택자와 파혼하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해 언제 길바닥으로 나앉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하위 중산층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단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한 마디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런 종류의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고, 혹은 내겐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고, 어쩌면 이 문제는 인생보다 큰지도 몰라. 나는 머리도 식힐겸 <멋진 하루>가 담고 있는 2008년 서울의 이곳저곳 -- 개발 이전의 용산과 잠수교와 종로 뒷골목과 이태원 언덕길과 서소문 아파트와 연희동 사러가마트 등 -- 을 직접 둘러보면서 시간 속에 잠시 존재했던 어떤 것을 영원에 가깝게 붙잡아 고정시키는 이미지의 유령적인 성격에 대해 생각하며 그것이 우리의 에세이필름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찬찬히 고민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서울을 향하는 9701번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 (편집자 주: 다음은 K정연이 JD에게 보낸 메일을 전재한 것이다. 시나리오를 위한 준비작업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K정연이 원고를 완성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록 불완전한 메모의 형식이나마 독자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JD의 동의를 받아 여기에 올린다. 전체적인 내용이나 분위기 모두 본 원고와는 동떨어져 있어 구태여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미리 밝힌다.) 서평을 쓰지 않는 서평가 K정연은 마감공포증 때문에 지금까지 그가 추구해오던 약간의 재치 있는 문필 활동을 그만두고 정지돈과 함게 한국 영화에 대한 에세이 필름을 만들기로 한다. 어느 날 그는 9701번 버스를 타고 서오릉을 지나던 중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영화 평론가 유운성을 우연히 마주친다. 구산역에서 내리는 유운성을 따라 충동적으로 버스에서 내리는 K정연. 구산동 도서관 마을에서 봉산의 이름없는 묘지로, 맘스터치에서 불광천으로 향하는 유운성의 행보를 쫓는 그의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 "희망 없이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편이 낫다. 희망 없이 수다를 떠는 데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냉소주의자의 태도다. 다만, 희망을 낙관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낙관이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둘러싼 요인들로 미루어볼 때 얼마간 바람직한 미래가 가능하다고 진단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주식시장이 낙관적이라거나 부동산 시장이 안정화도리 것이라고 전망하는 경제 전문가의 발언 따위를 떠올려보라. 희망은 여건에 비추어 미래를 낙관하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응시하는 일이다. 희망은 낙관이라고 하는 타협을 용인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긍정하는 일이다. 주식시장이나 부동산 시장에 대한 전망을 내놓기보다는 그것들을 없애버리자고 요구하는 것이 희망이다…" 2) 창백해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K정연.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문자 메시지 보낸다. -JD, 당신은 시네마가 인생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나요? 쏘옥, 문자가 발송되는 소리와 함께 K정연 쓰러지면 손에서 미끌어지는 핸드폰. 띵 하는 메시지 수신음과 함께 JD의 문자가 액정에 표시된다. -JD: ??? 시간 흐르면 비 내리는 밤의 불광천. 헤드랜턴을 쓴 JD가 수풀 사이를 뒤지고 있다. 아! 탄성을 지르는 JD. 정신을 잃은 채 반쯤 개천에 잠긴 K정연의 모습이 보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담요를 뒤집어 쓰고 코코아를 마시던 K정연이 대답한다. -유운성 선생님을 만났어요. -유운성쌤 이요? 유운성 쌤은 어디 갔는데요? -모르겠어요. 천변의 벤치에 앉더니, 저 멀리 레인보우 브릿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있잖아요, 과거의 문 같은 거. 움직이지도 앉고 한참을 앉아 있더군요. 저는 가야했어요. 마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마감을 생각하자마자 갑자기 어지러워지더니 모든 게 깜깜해졌어요. 이렇게 말하는 지금도… 병원 진료실. 의사가 K정연에게 말한다.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마감공포증입니다. -선생님, 담당 편집자에게 제가 입원을 해야 해서 원고를 마감할 수 없다고 전화 한통만 해주시겠어요?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K정연.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그런데 놀지도 않고 일도 안 한다면? 빠르게 교차 편집 되는 장면들. 다양한 시간, 다양한 날씨 아래 거리에 있는 K정연. 불안한듯 고개를 돌리면 시선 끝에 걸리는 빨간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남성의 흐릿한 모습. 유운성이다. 쫓아가보지만 매번 잡히지 않고 사라지는 유운성. 절규하는 K정연. 캄캄한 공간. 푸른 조명이 켜지면 수백 수천 개로 보이는 K정연의 모습. 거울 방이다. 잠시 후 붉은 조명과 함께 거울 속 K정연의 모습이 유운성의 뒷모습으로 바뀐다. 다시 장면 바뀌면 다양한 시대, 다양한 공장을 나서는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그런데 모두 유운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중 한 명의 유운성을 뒤쫓는 K정연. 정확한 시대도 장소도 알 수 없는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가다 마침내 유운성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한다! 벽을 보고 선 유운성에게 다가가는 K정연.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데 유운성의 셔츠를 쥐는데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유운성. K정연이 쥐었던 손을 펴면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USB. -루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K정연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JD. 서럽게 우는 K정연에게 묻는다. -무서운 꿈을 꾸었나요. -아니요. -슬픈 꿈을 꾸었나요. -아니요. -그럼… -하룬 해도 파로키 하지 않는 꿈이었습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JD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K정연. -지돈 씨, 저는 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가끔은, 실은 자주, 너무 지겹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요. -세상에는 두 부류의 평론가가 있습니다. 진과 성. 진 쪽의 평론가에는 이동진과 김영진이 있고, 성 쪽의 평론가에는 정성일과 유운성이 있는 식으로요. -그건 성명학인가요. -분류학이라고 해두죠. -하지만 저는 진도 아니고 성도 아닌 걸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자리도 있는 법이죠. 이를테면, 진과 성의 사이 같은 곳이. -?? -진과 성의 사이에 있는 정. 그게 바로 정연씨의 자리랍니다. 자, 저를 따라해보세요. 진! 정! 성! -진 정 성…? -바로 그겁니다! 진정성!!! K정연이 JD에게 손을 내민다. 손바닥 위에 놓인 USB. 겉면에는 "cinema, 2004"라는 글씨가 흐릿하게 보인다. -이건…? -꿈 속에서… 제게… -2004년이라면, 라브 디아즈의 < 필리핀 가족의 진화 >일까요? -글쎄요… -리산드로 알론소의 < 죽은 사람들 >일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 도플갱어 >? 그건 2003년이지. 그럼 < 밝은미래 >? 아냐 그건 2002년이고. 아니면 홍상수의 <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보면 알겠죠. 조심스럽게 노트북에 USB를 꼽는 K정연. 곧바로 자동재생으로 영화가 재생된다. 주인공이 불분명한 예식장안 풍경 예식이 끝난 듯 신부의 부케를 받으려 한쪽으로 몰려서는 여자들 신부가 등뒤로 부케를 던지고 날아오르는 부케를 향해 손을 뻗는 여자들 부케가 첫 번째 손을 튕겨서 다음 손을 거쳐서 통통 튕겨나가고 이 손 저 손을 차례로 튕겨나가다가 허공을 뱅그르르 돌던 부케가 왠 막대사탕을 들고 있는 손안으로 쏙- 들어간다. 카메라 빠지면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고선 이빨이 빠진 여자 아이가 방긋하고 웃는다. 여자아이 손에 들린 부케를 놀란 눈으로 보는 여자들. 그 위로 타이틀. “어린신부” 3) 1) 마르그리트 뒤라스.도미니크 노게즈, [말의 색채], 유지나 옮김, 미메시스, 2006 2) 유운성, '시네마, 역량과 유령 사이에서', [씨네21] 1300호 3) 필름메이커스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어린 신부> 시나리오에서 인용했다. https://www.filmmakers.co.kr/koreanScreenplays/54717 *** 그 외에도 히치콕의 < 현기증 > 뤽 베송의 < 루시 > 하룬 파로키의 <110년 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황인찬의 시 '무화과숲' 중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등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힌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먼저 제목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 둘째 어머니 >(1971)는 그 제목 때문에 첩, 혹은 소실, 별실, 여부인, (예전에는 이렇게도 불렀는데) 작은 댁, 그러니까 돈 많은 집안 남자들이 본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조선시대 태조 이후로는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여러 이유로 따로 둔 또 한 명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라는 선입견을 가질지 모르겠다. 이 불합리한 관습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그래서 1960년대까지 멜로드라마에서 이 관습으로 인한 서사는 조선시대 사극에 머물지 않고 전후 근대와 여전히 남겨진 봉건이 카오스처럼 뒤섞인 채 또 다른 비애극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둘째 어머니>에서 ‘둘째 어머니’는 두 남매를 둔 남자가 두 남매를 가진 여자와 재혼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은 ‘두번째 부인’이라는 표현이 올바를 것이다. 이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까닭은 단지 제목을 정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두 표현은 서로 완전히 다른 뜻이며, 그 맥락도 다르며. 그 말의 용법, 대상, 상황, 법적인 지위와 권리, 사회적인 시선에서도 다르다. 그런데 이야기 안에서 두 번째 어머니의 지위는 처음과 달리 점점 둘째 어머니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마도 그 대목에서부터, 그걸 어느 장면이라고 설명하기는 까다롭지만, <둘째 어머니>는 비애극이라고 멈출 수 있는 순간을 지나쳐서 점점 기괴해진다. 단지 비애의 정서가 과잉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일까.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그 장면들, 거기에 있는 감정의 표지들, 그것들이 지칭하는 대상의 반응, 그들 사이를 구성하는 비애의 형상들이 지나치게 정확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반성적 차원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일단 이 서사가 요구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자 임권택 은 마치 그 문법에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감정의 내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내면 안으로 들어가서, 더 들어가서, 더 깊이 들어가면서, 기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심급이 작동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둘째 어머니>가 임권택의 가장 이상한 영화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처음 볼 때도 그러했고 다시 볼 때도 그러했다. 그때 벌어지는 일은 이 영화 안에서 서사의 내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심급의 형식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걸 전도되었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이상한 이야기를 먼저 소개하겠다. 아마도 장황하겠지만 참고 읽어주기 바란다. 그런 까닭은 감정의 변곡점이 지속적으로 출몰하면서 서사를 이리저리 구부러뜨리고 서로 다른 성질의 힘들이 여기저기로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객관적으로 (하지만 영화를 본 다음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나열해볼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 흥열은 어린 두 남매 형태와 형자와 함께 살고 있는 홀아비이다. 남옥은 어린 두 남매 윤호와 윤숙과 함께 사는 홀어미이다. 흥열은 남옥에게 구혼을 하고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런데 형태와 형자는 자신들의 집에 들어와 사는 윤호와 윤숙을 미워하고 괴롭힌다. 윤호와 형태가 싸움이 나자 말리러 온 엄마 남옥은 형태의 편을 들고 윤호를 나무란다. 그러자 윤호는 도망치듯 달아난다. 아버지 흥열이 밤거리 버스 종점에서 윤호를 찾고 둘은 함께 포장마차에서 다정하게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일요일에 흥열은 윤호만 데리고 사냥을 간다. 그런데 꿩 사냥을 하던 중 윤호가 실수로 벼랑에 매달리자 흥열은 윤호를 구하고 그 자신은 떨어져 죽는다. 여기서 일단 이야기가 중단된다. (영화가 시작하고 25분 46초) 그리고 십 오년이 흐른다. 형태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형자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 하지만 윤호는 아버지 흥열의 장례식 날 가출을 한 다음 가족과 소식을 끊고 서울 명동에서 건달로 살아간다. 윤숙은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지낸다. 엄마 남옥은 남편 흥열이 세상을 떠난 다음 집안이 몰락했는데도 형태와 형자의 뒷바라지를 하기위해 쉬지 않고 삯바느질 일을 한다. 서울에 갈 때마다 오빠를 찾던 윤숙은 윤호를 만나지만 윤호는 엄마에게 자기를 만났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오빠를 만나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윤숙은 기차에서 그날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동오를 만난다. 윤숙에게 한 눈에 반한 동오는 그녀를 자신의 신붓감으로 생각하고 부모에게 소개하려고 한다. 동오는 건축기사를 꿈꾸는 부잣집 아들이다. 그런데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 온 형자가 우연히 동오를 보고 그를 유혹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형자의 학교 등록을 알아보기 위해 윤숙이 서울에 간 동안 약속장소에 대신 나간 형자는 동오에게 핑계를 만들어 데이트를 한 다음 섬에 가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관계를 가진다. 윤숙은 동오에게 실망하고 떠나고, 동오는 형자에게 키스를 거절하고 떠난다. 그런 다음 이 년이 지난 어느 날 형자는 갓난아이를 안고 고향에 돌아온다. 엄마 남옥은 그 아이가 동오와의 사이에서 낳은 것이라 짐작한다. 그때 동오가 찾아와서 형자에게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는 윤숙이라고 말한다. 그때 엄마 남옥은 동오에게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서 이모 집에 가서 윤숙을 만나보면 안다고 말한다. 고백을 하기 위해 윤숙을 방문한 동오는 형자의 아이를 돌보고 있는 윤숙을 보고 자기를 잊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고 오해하고 떠난다. 윤숙이 그건 오해라고 설명하려고 하자 엄마 남옥은 언니 형자를 위해서 네가 포기하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형자와 동오의 약혼식이 결정된다. 약혼식 날 윤숙은 음독자살을 한다. 형자와 약혼을 하기로 했다는 편지를 받고 여동생을 만나러 온 오빠 윤호가 윤숙을 발견하고 병원에 데려간다. 약혼식을 중단하고 병원에 엄마 남옥과 형자, 동오가 찾아온다. 엄마 남옥이 병실에 누워있는 딸 윤숙을 만나려하자 윤호가 막아서면서 거절한다. 그리고 엄마 남옥에게 자격이 없다고 꾸짖으면서 딸 윤숙에게 준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엄마 남옥이 아들 윤호의 뺨을 때리면서 나는 너희들에게 내 젊음을 주었다, 라고 시작하는 긴 항변을 한 다음 사과를 하고 떠난다. 그때 병실에게 깨어난 윤숙이 아직도 정신을 잃은 채 엄마를 찾는 것을 보고 윤호가 달려나와 엄마에게 사과한다. 엄마 남옥과 형자, 윤호와 윤숙은 동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서 형자 아이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 형자와 아이, 그리고 그 아이의 아버지는 함께 떠난다. 아마도 소설처럼 읽었다면 중간에 내가 무언가를 빠트렸거나 혹은 착각을 일으켰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대목이 있었을 것이다. 똑같은 느낌을 나는 영화를 보면서 가졌다. 첫 번째 질문. <둘째 어머니>에는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지만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사에서도 말끔히 지워진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이 영화는 1972년 1월 13일에 개봉했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을 그 한 해 전, 1971년 현재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동오가 형자의 유혹에 굴복하고 윤숙을 떠나간 것이 이년 전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1969년에 윤숙은 동오를 만났고, 두 사람은 사랑의 언어를 나누었으며, 어른이 된 오빠 윤호를 만났고, 그 해에 형자의 오빠 형태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을 것이다. 아직 셈이 끝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15년 전에 윤호를 대신하여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아버지 흥열과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이 있다. 1954년. 한국전쟁이 휴전을 한 그 해 다음의 해. 그런데 우리는 <둘째 어머니>에서 어떤 전쟁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휴전 직후 제작된 많은 영화들은 의도적으로 전쟁을 지웠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거기에 있지 않다. 남옥은 두 남매를 키우고 있고, 흥열도 두 남매를 키우고 있다. 두 집은 마치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다. 그 나이를 미루어 보건데 각자의 부모 아래 해방 직전, 혹은 직후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남옥의 남편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상하게도 윤호와 윤숙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친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맞은 편을 향해서 똑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질문. 마치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것만 같은 구조. 흥열의 아내는 어디로 간 것일까. 마찬가지로 이상하게도 형태와 형자는 자신들의 친어머니를 단 한 순간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아버지, 자신들의 어머니와 살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평생 동안 말하고 (혹은 말하지 않고) 반응한다. (혹은 반응하지 않는다) 나는 구태여 <둘째 어머니>를 비애극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비극과의 구분을 벤야민에 따라 엄밀하게 나눈 것이 아니다. 여기서 구분은 서사의 무대 안와 외부에 있다. 이 서사로부터 한 걸음만 외부로 나가면 진짜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해방 전후의 남한. 그리고 한국전쟁. 그것이 어떤 비극인지 임권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내내 그걸 찍은 영화감독이다. 임권택은 이 셈을 해보고 여기서 재빨리 안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비극과 비애극 사이의 울타리. 그 울타리 안에서 (그러므로 같은 말이지만 영화 안에서) 금지된 질문, 금지된 호명. 형태와 형자, 그리고 윤호와 윤숙은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둘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원형이 판본이다. 그때 <둘째 어머니>의 비애의 무대는 무언가를 발설할까 두려워하는 어떤 비밀의 전제조건을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 느껴진다. 어떤 비밀? 진공상태에 놓인 시간. 갑자기 세계의 시간은 여기서 닫혔고, 그들은 예외 없이 그 안에서 활동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필사적으로 진짜 비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디에 갔느냐는 질문을 막기 위해서,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해방 직후에, 한국전쟁 중에 어떻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막기 위해서, 비애극에서 멈춘다. 지금 임권택에게 비애는 방어의 감정이다. 먼저 그걸 말해야 이 기이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는 도피의 장소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일 도피의 장소라면 <둘째 어머니>는 행복한 삶을 어떻게 해서든지 만들어내는 과정이 그 중심에 있어야 했다. 서로 다른 두 남매는 화해를 하고 그들 부모의 뜻처럼 하나의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아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드라마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둘째 어머니>는 형자와 윤숙, 혹은 형자와 엄마 남옥, 차라리 형자와 남옥 가족과의 화해의 드라마가 전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마치 형자를 아이와 그 아이의 아버지와 함께 남옥의 가족으로부터 쫓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여기서 행복한 삶, 이라고 말한 것은 왜 그 삶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면 안 되냐는 것이다. 그들은 드라마의 셈을 끝내고 진정한 화해를 하자마자 행복한 삶을 기다리지 않고 영화를 끝낸다. 나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 아버지 흥열은 윤호의 마음을 열기위해 오로지 그와 시간을 보내면서 사냥을 한다. 아버지 흥열은 이 갈등에 권위를 갖고 있는 유일한 중재자였다. 말 그대로 아버지. 공정한 아버지. 자애로운 아버지. 하지만 임권택은 마치 이 행복에 저항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서 여기에 관여하기를 결심한 것처럼, 더 이상 행복해지지 않게 서둘러 균형을 깨트린다. 아버지 흥열은 가장 먼저 퇴장하는 인물이다. 이때 질문은 무엇인가. 그 저항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두 번째 질문. <둘째 어머니>는 보는 동안 종종 누가 주인공인지를 놓치게 된다. ‘둘째 어머니’ 남옥이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남옥은 그렇게 자주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종 외곽으로 물러나버린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오히려 아버지 흥열이 죽고 난 다음 남매들이 어른이 되자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사람은 윤숙이다. 그런 다음 마치 이야기는 윤숙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처럼 이루어져 있다. 약간 관점을 바꾸면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비애극의 주인공은 자기의 상황에 감옥처럼 갇혀있는 자이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이야기가 안겨주는 모든 시련을 견뎌야한다. 그때 그(녀)는 홀린 것처럼 그 상황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면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에 관한 알리바이를 만들거나 혹은 운명처럼 받아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윤숙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시련은 어디서 오는가. 그녀에게 진정한 시련을 안겨주는 사람은 형자가 아니라 그녀의 친어머니 남옥이다. “윤숙아, 한 번만 더 참아라, 형자의 행복을 빌자” 윤숙은 반복되는 시련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행위에 이른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완전히 파괴하려는 결단. 만일 윤숙의 단 한 번의 시도가 성공했다면 모든 관계는 남김없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어머니 남옥은 “반드시 너희들에게 밝은 앞날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는 알라바이를 말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동오는 남옥과 형자의 거짓된 약혼식을 파혼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오해하고 그 대상을 파괴한 것이 자기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남은 삶 전체를 지내야했을 것이다. 정확하게 반대의 자리에서 형자는 모든 것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유일하게 사랑을 베푸는 대상인 여동생을 잃은 오빠 윤호는 어머니 남옥을 끝내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윤숙은 그렇게 시련을 받으면서 주인공이라는 자리의 특권을 얻게 된다. 하지만 왠지 이 설명이 영화를 보고 나면 충분하지 않다고 망설이게 된다. 왜 그러한가. 어머니 남옥은 자주 나오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어떤 결정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숙이 자살을 결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어머니에 대한 유일한 저항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오빠 윤호가 집을 떠난 다음 폭력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잠시 보여주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지 않은 까닭은 여전히 어머니가 무섭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왜 무서운가. 나는 동어반복의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남옥이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윤허가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옥이 아니라 어머니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끝내 저항하지 못한다. 형자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고 하면서 등록금을 유흥비로 써버리며 마치 계모인 남옥을 마음껏 착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아이를 낳은 다음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곳은 남옥이 기다리는 고향집이다. 남옥는 마치 이 모든 인물들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 중앙에 있으며 끝까지 그 힘을 잃지 않는다. 그 힘은 어디서 오는가. 한 번 더 같은 말을 하겠다. 남옥이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라는 자리의 힘. 이때 여기서 그 힘은 두 배가 된다. 왜 그러할 수 있는가.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까지 남옥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질문, 윤숙은 사랑의 대상이다. 그녀는 마치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사랑을 받는다. 나는 단지 지금 동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동오보다 더 윤숙을 사랑하는 사람은 오빠 윤호일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근친상간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 둘 사이에 드리워지지는 않는다. (서로 배다르기는 하지만) 임권택의 영화에서 남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는 것은 <서편제>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윤숙과 윤호 사이에서 이상할 정도로 서로를 잡아당기는 어떤 힘을 본다. 두 사람이 어른이 된 다음에 처음 만나는 장면. 서울에 올라온 윤숙은 명동의 사교 클럽을 돌아다니면서 윤호를 수소문한다. 윤호가 한 걸음 늦게 여동생 윤숙이 자기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거리를 찾아다닌다. 이때 윤호가 윤숙을 알아보는 장면은 그 둘 사이에 어떤 사랑의 정감이 감도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어느 거리에서 그저 우연처럼 마주치는 대신 윤호는 어두운 밤거리에서, 불빛도 충분하지 않은데, 윤숙이 등을 돌리고 불 꺼진 양장점의 옷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을 보고도 오랜 동안 보지 못한 여동생이라는 걸 알아본다. 아무 장소, 아무 시간, 심지어 등을 돌리고 있어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오랜 동안 보지 못한 내 동생, 나는 너를 언제든지 알아볼 수 있단다. 그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존재. 윤호는 내내 여동생 윤숙을 마음속에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만들어내는 어떤 기호들. 그걸 알아보는 건 그 기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이 가능한 일이다. 혹은 그 기호를 신호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전달되는 어떤 힘들. 그 힘은 무엇인가.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다음 그 둘은 반가움에 남매라고 하기에는 과잉할 정도로 껴안는다. 형식적인 시선의 교차로부터 육체적인 몸의 터치에로의 이행. 하지만 그 둘은 자신들의 반가움 사이에 무언가 과잉하고 있다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 장면을 기차 통로에서 동오와 윤숙이 마주치는 순간과 비교해보라. 기차 통로에 서 있는 윤숙을 그날 제대한 동오는 부딪치고 지나가면서 “실례 합니다”라고 인사한다. 그때 재빨리 임권택은 두 사람 사이에서 시선이 오가는 걸 보여준다. (shot_reverse shot) 시선이 무엇을 건드렸는지는 알지 못한다. 형식적인 교차로부터 심리적인 터치에로의 이행. 하지만 이 시선의 교환이 윤숙의 무언가를 건드렸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동오를 잃어버리는 대신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까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동오도 도덕적 수치 때문에 잠시 동안 윤숙을 포기하지만 결국 돌아와서 다시 윤숙에게서 사랑을 기대한다. 물론 윤호와 동오가 윤숙을 사이에 두고 사랑의 대결을 벌이지는 않는다. 반대로 윤호는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무려 이 년 동안 수소문 끝에 동오를 찾아와 윤숙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배달자의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자신이 배달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건 윤호가 사랑의 대상을 바라보는 대신 자기 자신을 사랑의 순환 안으로 밀어 넣는 행위이다. 둘 사이의 차이. 윤호와 윤숙 사이의 거리. 지나치게 가깝지만 그러나 끝내 좁혀지지 않는 거리. 이때 오빠의 자리는 사랑의 대상에 다가가는 것을 도와주는 척 하면서 계속해서 밀어내는 호명이다. 윤호는 동오를 만나서 윤숙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줄 때 윤호는 자발적으로 자기의 자리를 사랑이 진행되는 전체 퍼포먼스의 일부로 옮겨간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랑의 과정이 중단하지 않고 계속 진행될 수 있게 돕는 비결정상태의 역량의 일부, 좀 더 친절하게 사랑의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갑작스러운 도약의 계기, 말하자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제작방식에 뛰어든다. 어떤 방식? 사랑의 네트워크를 이어나가는 가능한 실행. 여기서 윤호가 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한 대답. 동오를 윤숙에게 발송하는 것이다. 역설적인 보충. 이때 윤호는 윤숙이 동오에게 발송하지 않은 편지이다. 나는 단지 비유적으로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장면. 동오는 윤숙을 만나러 오기 전에 먼저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그 편지는 윤숙에게 한 번은 도착하고 다음 한 번은 도착하지 않는다. 첫 번째 편지는 동오가 떠나면서 보낸 편지이다. 그런데 두 번째 편지는 돌아올 것을 약속하는 편지이다. 다시 시작하자는 다짐의 편지. 사랑의 편지, 하지만 이 편지는 도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엄마 남옥이 그 편지를 우체부에게서 받아본 다음 발신자를 확인하고 그 내용을 먼저 열어보기 때문이다. 행방불명된 편지. 나는 이야기를 다시 조금 앞 쪽으로 되돌리겠다. 네 번째 질문, 여기서 윤숙과 동오의 가장 이상한 장면은 (이 말을 주의 깊게 읽어주기 바란다) 있어야 할 장면이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 사라진 장면. 생략한 것이 아니라 들어올 틈이 없는 장면. 윤숙과 동오는 서로 시선을 교환한 다음 다시 만날 약속을 한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에서 동오는 윤숙을 자신이 부모에게 소개하겠다고 다시 약속한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약속을 한 날에 엄마 남옥이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고 윤숙은 병실을 지켜야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동오는 윤숙을 찾아와 남옥에게 인사를 한 다음 세 번이나 작별인사를 하면서 그 자리에 머물면서 자기를 소개한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윤숙과 동오의 데이트 장면의 전부이다. 무엇이 거기에 없는가. 동오가 윤숙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시간이 없고, 윤숙이 동오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이 없다. 그 대신 <둘째 어머니>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퀀스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오가 윤숙을 만나러 간 자리에 대신 나와 있는 형자와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다. 아마 이 장면들은 임권택의 모든 영화들 중에서 가장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 이상한 리듬과 자유간접화법의 시선으로 갑자기 세계가 팽창하듯이 펼쳐진다. 여기에 이야기가 도착할 때까지 <둘째 어머니>는 몇 개의 장소, 남옥의 집과 몇 개의 방, 제한적인 장소에서 계속해서 마치 여기서 나가면 저기로 나오듯이 반복해서 되돌아왔다. 그런데 형자가 동오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나무들이 늘어선 것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공허하리만큼 텅 비어있는 한 겨울의 교외로 옮겨갔을 때 마치 이 장소는 이제까지 진행하던 영화의 답답하리만큼 비좁은 네트워크들로 서로 촘촘히 이어진 무대로부터 탈출하여 바깥 세계로 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래서 심지어 이 시퀀스 전체가 윤숙이 중심에서 잠시 벗어난 틈을 이용해,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영화가 잠시 잠든 틈을 이용해 드러난 꿈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갑자기 장면은 강 위에 떠 있는 작은 보트를 타고 가는 동오와 형자에게로 옮겨간다. 우리가 내내 본 것은 남옥이 살고 있는 고택(古宅)의 전경과 그 실내의 이 방과 저 방, 그리고 이따금 방문하는 서울의 그 해 겨울의 건조하고 무질서한 건물들의 풍경이 전부였기 때문에 강 위에 흘러가는 보트에로 데려왔을 때 마치 영화 안에 있기는 하지만 이야기 바깥으로 나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이 사랑의 네트워크 사이에 자리한 심리적인 갈등과 가족으로 만들어진 위계질서가 비가시적인 드라마를 만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기서 형자와 동오의 데이트가 시작하는 강 위에 떠 있는 보트의 장면은 수수께끼처럼 보일만큼 회화적인 운동이 화면을 압도한다. 임권택은 그걸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강위에서 운동은 수평으로 진행된다. 강이라는 표면. 그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작은 보트. 보트의 수평 운동. 그런 다음 갑자기 형자와 동오가 보잘 것 없게 보일 정도로 하늘을 향해 높이 치솟은 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이때 이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수직의 선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하지만 임권택은 수평의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때 매우 이상한 운동이 나온다. 갑자기 텅 빈 화면에서, 정확히 말하면 나무들만 보이는 풍경에서, 일정한 거리만큼 물러나있는 카메라는 수평으로 왼쪽에서 (travelling_shot) 오른 쪽으로 이동한다. (S#_1) 그러면 그 수평 이동의 끝에 형자와 동오가 멀리 보인다. 이제까지 인물들에게 카메라가 달라붙어있었던 것만 같았기 때문에 이 운동은 마치 떨어져 나온 것처럼 자유롭게 느껴진다. 형자와 동오는 나무들 사이를 걷는다. 그때 걸어가는 형자와 동오를 수평으로 세워진 나무들 저 편에서 이번에는 그 반대 방향으로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이동하면서 멀리서 쳐다본다. (S#_2) 이 이상한 운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정한 거리만큼 물러나있던 형자가 다가와서 말을 하며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하지만 동오는 어색하게 걷는다. 그때 두 사람과 아무 상관도 없이, 그저 난데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강위 수면을 따라서 카메라가 수평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갑자기 나온다. (insert_shot) 텅 빈 강의 수면. 거기에 볼 것이라곤 카메라의 이동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다. 동오가 시선을 돌린 것도 아니다. 형자는 옆에 있는 동오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이 난데없는 장면은 무엇인가. 어색하긴 하지만 단 한 가지 설명만이 가능하다.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는 보트의 운동, 형자는 내리자마자 동오 몰래 보트를 묶어놓은 밧줄을 풀어버렸다. 동오와 형자로부터 멀어지는 보트. 그래서 보트는 지금 떠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이 떠내려가는 보트의 쇼트는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동오가 형자에게 이제 늦었으니 돌아가자고 말한 다음 한 번 더 나온다. 물론 동오와 형자는 그 보트를 발견하지 못한다. 떠내려가는 보트의 쇼트는 동오와 현자의 동선과 완전히 독립된 것이다. 두 개의 운동, 두 개의 보트의 쇼트. <들째 어머니> 안에서 특이한 사건이라고까지 부르고 싶은 이 장면들은 무엇을 향한 것일까. 여기서 내가 주의 깊게 본 것은 두 개의 운동, 두 개의 보트의 쇼트 사이의 공통점이 대상에서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이다. 어찌 해볼 수 없을 만큼 떨어져있는 거리. 여기 있어야하는 데 여기에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물론 그건 윤숙이다. 이때 윤숙 대신 갑작스럽게 풍경을 수평으로 이동하고 대화 사이에 끼어들듯이 지나가는 보트의 쇼트는 동오와 형자를 바라보는 도덕의 시선이다. 어찌해볼 수 없을 만큼 멀리 있지만 그러나 그 시선은 지금 여기서 바라보고 있다. 형자와 동오의 데이트 시퀀스 앞과 뒤에 윤숙의 씬이 마치 감싸듯이 놓여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제 이 질문들에 대해 대답할 차례이다. <둘째 어머니>에서 등장인물 모두를 괴롭히는 것은 누구도 끝내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대상 앞에서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누군가는 전부를 누군가는 부분을 포기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완전한 만족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인 것처럼 우울한 상태가 된다. 형자는 동오를 얻는데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동오는 윤숙에게 도착하지만 아마도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며, 윤숙은 동오가 자기에 안겨준 죄의 이면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윤호는 제 할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게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상태로 시작해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상태로 돌아간다. 그리고 ‘둘째 어머니’ 남옥이 남는다. 이 이야기의 수수께끼. 모든 순환은 번번이 남옥에게 이르면 갑자기 불투명한 상태가 되거나 목표를 잃거나 방향을 바꾸거나 대상이 부서진다. 우리는 매번 이 순환이 남옥을 올바르게 통과한다는 기분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남옥에게 도착하면 갑자기 불안을 맛보게 된다. 왜 그런 기분을 갖게 되는가. 남옥에게 도착하면 매번 무언가를 거기서 잘라내는 절단과 마주하게 된다. 무엇을 무엇으로 잘라내는가. 두 개의 장면. 첫 번째 장면. 어린 윤숙의 곰 인형에 대한 사랑. 어린 형자는 이 곰 인형을 뺏어간다. 그러자 엄마 남옥은 새 인형을 사줄 테니 언니에게 주렴, 하면서 달랜다. 그러자 오빠 윤호가 엄마 남옥에게 화를 내면서 말한다. 이 공 인형은 친 아버지가 사준 선물이에요. 물론 형자는 그걸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걸 남옥이 모를 리가 없다, 두 번째 장면. 엄마 남옥은 윤숙이 동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또한 동오가 윤숙을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남옥이 입원한 병원에 동오가 병간호를 하는 윤숙을 찾아와 밤 열한시까지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고 가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행복한 시퀀스이다. 그런데 형자가 동오를 원하자 엄마 남옥은 윤숙을 포기시키기 위해서 거의 모든 수단을 사용한다. 잘 알고 있는 남옥,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남옥은 번번이 친딸 윤숙대신 의붓딸 형자의 편에 서는 것일까. 객관적인 공정성에 따른 이해의 관점. 그때 그 둘의 선택은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곰 인형은 윤숙의 것이었고, 형자는 그것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다. 그런데 남옥은 그 곰 인형을 언니 형자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한다. 동오는 윤숙을 사랑하고 윤숙도 동오를 사랑한다. 그 둘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 사이에 들어온 형자이다. 그런데 남옥은 윤숙에게 동오와의 결혼을 형자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한다. 남옥은 윤숙에게 정확하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여기서 남옥이 윤숙에게 동오를 형자에게 양보하라고 요구하는 장면과, 그런 다음 윤숙이 음독자살을 시도해서 병원에 실려간 다음 남옥과 윤호가 나누는 대화는 다소 길지만 인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첫 번째 장면. 윤숙은 자신이 엄마 남옥의 함정에 빠져 동오가 자신을 포기하고 형자에게 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오씨만은 못 뺏기겠어요. 나를 짓밟고 형자 언니를 위하는 것도 한도가 있어요. 너무해요, 정말 모두 너무들 해요” 그러자 남옥은 마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이 말한다. “글쎄, 왜 그러니” 하지만 윤숙은 선언하듯이 말한다. “동오씨 만나겠어요. 그리고 애기를 언니 애기라고 분명히 말 하겠어요” 그리고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고 한다. 그러자 남옥은 “윤숙아”라고 부른 다음 돌아보는 윤숙의 뺨을 때린다. 그런 다음 말한다. “너 언제부터 이렇게 됐니, 너 언제부터 이렇게 엄마 앞에서 이렇게 도도해졌냐 말이다. 어서 가서 말해라. 언니는 애기가 누군 줄도 모르는 아이를 낳은 불순한 여자이니 언니를 버리고 너하고 결혼하자고 말이야, 그럼, 형자는 어떻게 하니, 그러면 형자는 집을 뛰쳐나가 또 다른 애비를 모르는 자식을 낳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오겠지, 그 꼴을 봐야겠어. 엄마가 그 꼴을 봐야겠느냐 말이다. 윤숙아, 넌 엄마의 친딸이야. 누가 뭐래도 난 친엄마야. 하지만 형자는 아무도 없지 않니. 지 오빠는 미국에 가 있고, 형자는 외로운 아이다, 그래서 타락한 거야, 이번에 우리 힘으로 구해줘야 하지 않겠니. 한 번만 더 참아라, 형자의 행복을 빌자” 그러자 윤숙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동오에게 가는 대신 자기 방으로 돌아온 다음 울면서 말한다. “전 못해요, 죽으면 죽었지 못해요” 남옥이 한 가지 몰랐던 것은 윤숙의 이 말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자살을 시도하는 선언이었다는 것이다. 윤숙은 약을 먹는다. 두 번째 장면. 병실에 윤숙이 누워있을 때 약혼식장에서 엄마 남옥이 달려온다. 그러자 윤호가 병실을 막아서고 엄마 남옥이 병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이 방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자 의사가 윤호에게 묻는다. “자네는 윤숙에게 무얼 해주었나?” 윤호가 대답한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옥을 가리키며) 이 분도 윤숙에게 준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이 다 주는 그 흔한 모정마저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부끄럽게 얼굴을 숙이고 있던 남옥이 윤호의 뺨을 때리면서 긴 대사를 한다. “괘씸한 놈, 준 게 없다고? 받은 게 없다고? 난 너희들에게 내 젊음을 주었어. 너희들 때문에 젊음이 시들어가는 걸 보고도 아까운 줄 몰랐다. 내가 재혼을 한 것도 너희들 때문이고 형태나 형자를 위한 것도 너희들 때문이었다. 난 형태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가문이 몰락했을 때,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최씨 가문을 지키는 게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게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에미, 내게 희생을 강요하고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아왔다. 그러면 반드시 너희들에게 밝은 앞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게 에미가 너희들에게 줄 수 있는 애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되다니, 사과 하마,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말아 주거라. 에미는 한 번도 에미를 위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그것만은 믿어줘” 형식적으로만 말하면 이 대사 장면은 김지미의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더빙이긴 하지만) 가장 훌륭한 연기중의 한 순간이다. 임권택은 이 장면의 대사를 나누지 않고 하나의 쇼트로 찍었다(long_take) 여기까지 이야기를 따라왔다면 이 대사가 얼마나 불합리한 지 누구라도 알 것이다. 그런데 기괴하다고 밖에 달리 말할 도리가 없는 이 장면에서 김지미는 (나는 의도적으로 배역이 아니라 배우의 이름을 쓰고 있다) 자신의 표정으로 그걸 설득해내고 있다. 이 장면은 그저 임권택의 김지미에 대한 믿음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말할 수 없는 쇼트이다. 이 두 개의 장면, 엄마 남옥이 윤숙에게 요구하는 장면과 병실 앞에서 윤호에게 자신을 설명하는 장면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세계이다. 어떤 세계? 회계 장부의 세계. 남옥은 계속해서 계산을 한다. 외로운 형자의 불행에 비하면 윤숙아, 너는 얼마나 행복하니. 친엄마가 곁에 있지 않니. 그러니 우리 힘으로 형자를 구해주어야 한다. 고개를 돌려 윤호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내 젊음을 가져갔어. 그런데 준 게 없다고, 받은 게 없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그게 내 의무라고 생각했어. 이 계산 앞에서 윤숙과 윤호는 어머니의 희생을 알지 못하는 배은망덕한 자식이 된다. 당신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이 계산이 어떻게 성립하나요. 이때 남옥의 결정적인 말, “(중략)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의무, 라는 무시무시한 말. 남옥은 자식들을 희생시키는 그 자리에 가서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을 의무라는 명령 아래 수행하는 중이다. 왜 그런 의무의 자리에 가야하나요. 이때 남옥의 계산은 이중장부가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머니의 장부이지만 그 장부의 행간에는 두 명의 어머니가 서로 다투고 있다. 얼핏 보면 이 두 명의 어머니가 윤호와 윤숙의 어머니와 형태와 형자의 어머니로 보이지만 여기서 진정한 인정투쟁은 남옥과 (형태와) 형숙의 친어머니 사이에서 벌어지는 중이다. 남옥이 얻고 싶어 하는 진정한 자리는 (미국에 간 다음 영화에서 완전히 사라진 형태와) 형숙의 친어머니의 권위이다. 남옥은 그걸 얻을 수 있다면 친딸 윤숙을 희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 이런 이상한 장부가 생겨난 것일까. 이때 이 기괴한 이야기를 성립시키는 요구의 동사, 그래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활동의 순환이 복종하는 힘은 남옥의 욕망이 아니라 의무에서 온 것이다, 어떤 의무? 남옥이 말을 빌리면 “최씨 가문을 지키”라는 명령. 그게 왜 의무가 되나요. 그걸 지키는 동안은 남옥은 최씨의 아내 자리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옥이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신이 그 누구의 아내도 아닌 상태의 미망인이 되는 것이다. 그게 왜 견딜 수 없나요. 그렇게 되면 윤호와 윤숙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기 때문이다. 이 이상한 순환의 논리. 그래서 남옥은 형태와 형자를 위해 “한 번 더 참아라”라고 요구하면서 그 행위가 “너희들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희생의 논리를 완성시킨다. 물론 이 논리의 허구를 지적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알겠어요, 어머니. 그런데 제 자리는 어디에 있나요. 윤숙의 반문. 하지만 윤숙은 반문하는 대신 자살의 행위를 택한다. 여기서 내가 궁금한 것은 남옥의 자리에서 이 수수께끼를 성립시키는 의무의 논리이다. 남옥의 희생이 통상적인 모성애에 관한 멜로드라마 판본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 의무의 논리가 남옥이라는 개인보다 더 큰 어머니의 자리에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옥은 동오를 사이에 놓고 동오와 윤숙, 그리고 동오와 형자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동오와 형자의 항을 선택했다. 이때 남옥의 의무가 바라보는 자리에서 그 선택은 (우리가 바라보기에는)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 사이에서 나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나쁜 선택과 더 나쁜 선택 사이에서 나쁜 선택을 한 것이다. 왜 윤숙과 동오가 더 나쁜 선택인가. 형자가 남옥 곁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은 남옥에게 상징적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포기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친어머니로서 윤숙에게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나쁜 편이 어머니로서 의무를 포기함으로써 상징적 어머니의 자리가 말소되는 더 나쁜 선택보다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남옥은 상징적 어머니의 자리가 폐제된 다음 그 장소가 텅 빈 상태의 공백으로 남겨지는 공허를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때 난처한 상황은 무엇인가. 남옥의 의무에 따른 행위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그녀 자신 안에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남옥이 차지한 자리가 어머니의 장소이기 때문에 이 세계의 질서에 관한 거의 절대적인 권리를 갖는다. 이때 이 의무의 행위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징적 어머니의 순환 회로를 고장 나게 만드는 것뿐이다. 윤숙은 자살을 시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순환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하지만 이것은 위험한 내기이다. 이 시도는 언제나 절반은 성공할 가능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치는 가장 우울한 순간은 이 중단이 그 누군가의 절망적인 자기 파괴의 시도 다음에야 도착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우리를 내내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은 의무가 아니라 이 의무의 행위를 중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무엇이 무엇을 잘라내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그 의무의 행위를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시도하는 상징적 어머니의 자리로부터 남옥을 잘라내는 유일한 시도로서 순환회로를 부수기 위해 그 회로를 성립시키는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분리의 순간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다행히도 윤숙의 시도는 실패한다. 그런 다음 이야기 안의 약속의 장치들은 등장인물들 모두를 재빨리 장르의 안전한 마지막 잠면, 그러니까 해피엔딩으로 되돌려 보낸다. 하지만 임권택은 그 결말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영화가 끝난 그 다음 장면에서 어떤 해피엔딩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형자와 제 시간에 맞춰 나타난 남자는 그들의 아이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년 동안 자신의 아이와 함께 사라진 자신의 아내 형자에 대해서 언제 질문을 던질까. 정확하게 같은 의미로 동오와 결혼한 윤숙은 언젠가 형자와 보낸 밤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동오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형자가 떠나간 다음 남옥은 이제부터 자신의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침묵은 언젠가 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균열을 내장하고 있는 엔딩에 아무 것도 보충하지 않는다. 그 대신 <둘째 어머니>에서 어머니에 관한 악순환의 이면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준 다음 물러난다. 아직 충분히 대답하지 않았다. 임권택은 어머니, 라는 자리에로 계속해서 되돌아올 것이다. 커다란 순환. 그러므로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어머니, 라는 의무의 악순환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