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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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고다르를 베끼면서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우리들 사이에 '한국고전영화'란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걸까? 『한+ 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문화예술에서 논하는 고전이란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한 가치를 지닌 사상집이나 문예 작품"을 일컫는단다. "모범"이란 표현에 딴지를 걸고 싶어지긴 하나, '세계고전문학'이나 '클래식 음악' 같은 말이 통용되는 바를 떠올려보면 그래도 말뜻에 납득이 가긴 한다. 그런데 '한국고전영화'라? 나로선 이 말을 기어이 꺼내려다가도 결국엔 어색해서 주춤하게 된다. 과연 한국영화에 있어 고전이란 무얼 지칭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무엇이 고전일 수 있을까. 당신의 생각이 정말 궁금한데, 왜냐하면 나는 이 물음 모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쟁점, 한국영화에 고전기가 있다면 이는 언제부터 언제인가? 달리 말해 한국영화의 뼈대가 세워진 시기는 언제인가? 한반도에 영화 기술이 들어오고 식민지 조선인들이 그것을 활용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일까, 아니면 이 시기를 포함해 한반도 영화계의 짧은 해빙기였던 광복 전후일까, 그도 아니면 한국전쟁부터 5.16 쿠데타 직전까지인 이승만 정부 전후일까, 이도 아니면... 확언하기 어렵다. 사실 고전영화라는 말 자체가 실은 '옛날 영화'를 좀 더 고상하게 부르려는 세속적 용어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나, 미국이나 일본의 영화사 연구에서 고전기라는 범주가 이런 용법을 넘어 이론 안에서도 ('파벌'에 따라 구분은 상이할지언정) 어느 정도 설정되어있다는 걸 떠올리면, 한국영화의 경우는 역시나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는 식민지나 군사 정권의 경험을 가진 비 서구 국가들의 공통적인 현상이 아닐까? 하지만 (발리우드 스타일이 일찍이 굳게 자리 잡은) 인도나 (빈곤한 환경으로 인한 문화적 혼종성을 오히려 '내수용'으로 스타일화한) 브라질의 영화사를 떠올리니 금방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요컨대 한국영화사에 있어 "일제강점기"나 "유신 체제 시기" 같은 사회적 구분은 가능하더라도 자체적인 '고전기'에의 설정 및 구분은 임의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어째서? 아마 21세기 전까지 한국영화가 스스로 독자적인 문화로서 성립된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오해를 피하고자 서둘러 덧붙이건대, 나는 윗세대 영화인들의 문화적 투쟁을 폄하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들 다수의 오만한 행보와 의심스러운 작업에 대해선 깊은 불만이 있어도, 그들의 투쟁의 결과를 향유하며 살아가는 입장인 만큼 투쟁 자체에 대해선 오히려 깊은 존경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런 투쟁이 (사실 현재진행형으로) 오랫동안 이어진 것은 역시 한국영화가 독자적인 문화는 아니란 의식을 모두가 갖고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우리는 1998년 필름 발굴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국가가 일제강점기 때의 영화를 단 한 편도 소유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고, 1970년 이후 외국영화 수입쿼터제를 충족하기 위해 수많은 한국영화가 제작되기'만' 했음을 알고 있으며, 제작이고 비평이고 무관하게 1980년대의 '신세대'들이 총체적인 고립무원의 환경에서 활동을 겨우겨우 이어갔음을 알고 있고, 같은 1980년에 공개되었음에도 (당시 국산영화 최대 흥행작이었던) 〈 미워도 다시 한번 '80 〉 대신 〈 전원일기 〉를 '옛날'의 지표로 흔히 떠올리고 있다. 역사의 연속이나 단절을 논하기도 전에 이미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지 못해 독자적인 문화로 선 적이 없고, 그러니 (우스꽝스럽게도, 선후배의 엄격한 계열은 있어도) 스타일과 방법론에 있어 표준이나 관습으로 삼을 역사적 대상이 내부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에 고전기는 역시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두 번째 쟁점, 한국영화에 있어 고전으로 기능하는 영화가 얼마나 있나? 아마도 이 물음에 당신은 즉각 김기영의 이름을 거론할 것이다. 그래, 확실히 창작자든 관객이든 한국영화와 깊이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 하녀 〉를 비롯한 김기영의 영화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아니, 그 이전에 이 조건 자체를 뒤집어봐야 하지 않을까. 고전이란 이미 그 자체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후적인 (재)평가 속에서 (위태롭게) 성립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가령 에드거 앨런 포우가 오늘날 같은 문학의 정전에 등재되도록 선제적으로 상징투쟁을 벌인 건 당대의 미국인들이 아니라 샤를 보를레르를 위시한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이었으며, 이 상징투쟁의 영향은 포우가 죽고 한 세기 이후에야 미국에 도달했다. 또 오랫동안 잊혀졌던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바흐 사후 세간에 재발견된 것은 물론 젊은 펠릭스 멘델스존의 강력한 열정 때문이기도 했으나, 관습을 타파한 새로운 예술적 장을 마련하고자 한 (멘델스존을 포함한) 신세대 음악가들의 전투적인 의식과, 국가와 종교에 대한 세간의 믿음을 굳건히 하고자 한 지식인들의 계산적인 의식이 예기치 않게 연합하여 이끌어낸 결과였다고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김기영이 1990년대에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당대의 영화광들에게 공통적인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식? '우리에게도 컬트영화가 필요하다'라는 '국제적'인 의식. 많은 연구자와 비평가들이 합의했듯, 오늘까지 이어지는 김기영의 위상은 여기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에 더해, 영화사 연구자 금동현은 「협잡꾼 당신-『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1)」에서 김기영의 1971년 이후 영화들이 대부분 (해외 영화제 실적을 중요시한 문화융성정책에 따라) 시체스 국제영화제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음을 지적하며, "해외를 경유하여" "한국 혹은 한국영화라는 구조에 순응/활용하는 김기영의 행위성"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발을 내딛으면 우리는 "여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조건들에 의해 뒤틀린 (...) 한국영화의 부정교합 자체가 도착적인 미학으로 승화된 것"으로서, 곧 가장 한국영화적인 한국영화로서 김기영의 영화들을 재정의하는 영화평론가 유운성의 「이식과 기생 : 봉준호의 < 기생충 >을 계기로 다시 읽는 임화의 영화론」과 마주치게 된다. 그렇다면 김기영의 '귀환'은 역사의 관점에선 필연적인 결과였을까? 확신할 수야 없지만, 90년대 이후의 김기영 수용에 또 다른 (무)의식이 있었으리란 '잠재적인' 가설은 분명 흥미진진하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한국영화가 가진 것은 집단적인 스타일과 방법론이 자의적으로 형성된 고전기가 아니라, 각각의 스타일과 방법론 사이에 일말의 계열을 만든 환경인 게다. 한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김기영 같은 취급을 받은 이는 결국엔 김기영뿐이었다. 물론 이만희와 임권택 역시 한국영화사의 만신전에 올랐다. 하지만 이만희는 2005년 〈 휴일 〉의 발견과 함께 뒤늦게 관객들을 (다시) 자극한 경우였고, 임권택은 이미 영화계 내외에서 한국영화의 아버지상으로 군림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그를 제작자에게나 관객에게나 (부정적인 의미에서) 예외로 취급받도록 만들었다. (내친김에 부연하자면, 나는 한국영화의 가장 이질적인 작가는 다름 아닌 임권택이라고 보는 쪽이다) 요컨대 이들에겐 김기영 만큼의 폭넓은 애정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2000년대 들어 대기업 자본의 (재)진입으로 인해 통째로 재편되기 시작한 한국영화산업은 충무로에 기반을 둔 21세기 이전의 영화 혹은 영화인들 대부분을 망각과 은퇴로 몰아넣었고, 한국영화사에는 또 한 번의 극심한 단절이 일어났다. 예컨대 이순재는 알아도 김지미를 아는 한국의 2~30대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한국영화에는 고전으로 기능하는 영화가 터무니없이 적은 것이다. (한국의 문학과 대중음악에서도 비슷한 단절이 일어났었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쟁점, 그렇다면 추후에 21세기 이전의 한국영화들이 고전으로 성립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터무니없는 도박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곧장 대답을 내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입을 떼보자. 지금 같은 단절의 상황이 연속되는 한은 역시나 어렵지 않을까? 이는 앞서 언급한 '대중적' 단절만 지시하지는 않는다. 옛날 한국영화를 새로운 고전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엔 (결코 많지는 않은) 국내 시네필들의 몫일 터이다. 한데 그들이 영화 제작 환경에 편입되는 것도, 옛날 한국영화를 끈질기게 보러 다니는 것도, 아예 이런저런 극장을 다니며 영화 관람을 지속하는 것도 요원한 게 요즈음의 상황이지 않던가? 한국영화를 이루는 행위자들은 갈수록 서로 간의 마주침과 뒤섞임 없이 분열되기만 하고 있다. 이 행위자들에게 책임을 온전히 돌리려는 것도, 행위자들이 서로 반드시 마주치고 뒤섞여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상황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대다수의 국내 시네필들은 (어느 시대의 작품이건 간에) 한국영화에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다. (2010년대 전후로 한국영화사 연구의 헤게모니가 국문학과로 옮겨간 것은 그 결과이자 원인일 테다) 후기 자본주의 하에서 '국제적인 것'이 대도시와 대도시 간의 연결로서 블록으로만 환원되는 것과 유사하게, 국내 시네필들은 한국영화와 거의 단절된 채 '국제적인 것'에 스스로의 위치를 잡는다. 그 원인에 대한 규명은 본고에서 책임지고 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므로 넘어가야겠지만, 하여튼 옛날 한국영화의 낮은 접근성은 (불균질한 더빙을 비롯한) 형식적 층위의 어색함에서만 기인하지는 않는 것이다. 부끄럽게 고백하자면 비평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 역시도 이런 상황의 바깥에 있지는 않아서, 불과 몇 주 전인 5월 7일에 강수연 배우 1주기 추모전의 일환으로 상영된 〈 경마장 가는 길 〉을 (거의 8년 만에 다시) 보고 나서야 나는 앞선 쟁점들을 포함한 '한국(고전)영화'를 문제다운 문제로 여기게 되었다. '한국'도 '영화'도 '한국영화'도 온전히 믿지 않는 장선우의 태도가 이 영화를 통해 순식간에 전염됐다고나 할까? 그동안 옛날 한국영화들을 찾아보고 그에 관한 연구들을 찾아보았어도, 또 동시대의 믿을 만한 동료들이 한국영화와 씨름한 결과물들에 지지를 보냈어도 나는 결국 '한국(고전)영화'를 개입해야 할 문제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혹은 다소 의무적으로 수행한 제스쳐들을 갖고 스스로가 이미 개입하고 있다 착각했던 건 아닐까. 말하자면 이 글은 그런 늦은 깨달음에 따라 서둘러 쓴 반성문이라 해도 좋다. 이렇게, '한국고전영화'는 몹시 잠정적인 개념으로 남는다. 하면 우리는 이런 잠정성에 대해 어떤 리액션을 취해야 하는가? 리액션으로서 큐레이션에 대해선 영화연구자 박진희가 이미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 – 나의 경우」를 통해 솔직하고 재밌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럼 리액션으로서 비평이나 연구는? 실망스럽게도 많은 이들은 두 개의 우회로만을 길로 인식하고 있던 것 같다. 이미 고전으로 꼽힌 작품들만 텍스트로 삼거나, 아니면 사회적 압력에 주목해 한국영화사를 연민해야 할 상처투성이로만 기술하거나. 나는 그 대신에, (21세기 이전의 한국영화들이 고전으로 성립될 리 만무한) 당장은 이 잠정성을 고스란히 전면화하는 길을 택하고 싶다. 허황된 관념이 된 '한국영화'가 환희에 이른 지 얼마 안 돼 금방 처참히 붕괴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 붕괴가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 있어 (실패와 망각과 단절과 분열로 나타났던) 오랜 기반이었음을 적극적으로 증언해야 하지 않을까? 다만 붕괴가 새로운 사유를 가능케 하리라는 식의 역전적 논리가 아닌, 붕괴 속에서 하여튼 '한국(고전)영화'라는 것이 잠정적으로나마 존재해왔다는 식의 '경험론적' 논리를 갖고서 말이다. 지난날 전복적이라 여겨졌던 형식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게 대안 우파들인 요즈음에 역전적 논리는 부정적인 조건의 부정성을 간과할 위험이 크다. 그러니 (헤이든 화이트를 따라)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기반이 주어진다는 것을 명심한 채 말을 이어가자. 가령, (한국의 모든 문화예술이 그렇지만) 이념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 있어 어떤 기형적인 형체로써 ‘반복’되어왔는가? 금동현과 유운성이 간접적으로 일러주었듯 한국영화에 있어 붕괴와 반복은 한 몸이다. 달리 말해 붕괴의 반복이야말로 한국영화의 조건이요 전통이다. 그렇기에 나는 새로운 것 대신 오래된 것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리와 단절된, 하나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오래된 것을. ‘한국영화’와의 대면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1.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한국고전영화를 보는 이유는 전부 비디오에세이 만들기와 관련이 있다. 한국고전영화를 ‘본다’기보다 다음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해 ‘탐색’하는 것이다. 누가 들으면 ‘비디오에세이깨나 만드나 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부끄럽게도 그건 아니다. 재작년에 어도비 프리미어 프로그램을 구입한 이후 계속해서 결과물들을 산출하고 있기는 하나 누군가와 함께하는 작업이 아닌 이상 혼자 하는 것들은 다 재미를 위해 하는 것일 뿐이어서 그냥 폴더에 담아두기만 한다.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영화를 본다’라고 얘기하는 지점에서 이미 나는 ‘땡’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수년 전 미디액트에서 ‘오디오비주얼크리틱’을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이 들으면 혀를 차실 얘기이기 때문이다. 영상을 영상으로서 비평하는 시도로서 ‘오디오비주얼크리틱’이 의미 있는 작업이 되려면 역시나 그 작업의 최종 목적지는 여러 영상을 짜깁기해서 그럴듯하게 붙여놓고 거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깔아서 산출하는 mp4 파일이 아니라, 상대하고 있는 대상(물)과 그 대상(물)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적절한 통찰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자체로 매혹적인 또 하나의 작품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시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영화를 이것저것 보다가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비디오에세이를 만든다고 하면 그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겠다고 작정하고 그것에 걸맞은 영상을 탐색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행위이다. 하지만 그 수업에서 선생님들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안 보던 고전영화들을 본다면, 그것 자체로도 좋은 일이라고. 사실 ‘한국고전영화’야말로 아도르노가 정리한 대로 “문화적으로 형성된 특수한 대상에 대한 고찰”1)이라고 하는 에세이적 방법론의 대상으로 삼기에 가장 좋은 소재다. 여튼 그런 불순한 목적으로 한국고전영화를 보는데,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소재를 말하기 위해 내가 만들다가 만 한 편의 비디오에세이 <60년대 샐러리맨의 하루>를 말해보려 한다. 1959년작 < 여사장 >(한형모)부터 < 구봉서의 벼락부자 >(김수용, 1961), < 삼등과장 >(이봉래, 1961), < 월급쟁이 >(이봉래, 1962), < 골목안 풍경 >(박종호, 1962), < 두고만 보세요 >(김봉환, 1964), < 떠날 때는 말없이 >(김기덕, 1964), < 회전의자 >(이형표, 1966), < 억울하면 출세하라 >(심우섭, 1969) 등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 사이의 영화에서 직장인들의 출퇴근, 회의, 월급날, 신입사원 채용, 면접, 점심시간, 사내연애, 근무 중 농땡이 부리기, 상사의 꾸지람 등의 장면들을 골라 붙여 만든 것이다. 부끄럽게도 어느 정도 만들고 나서 조금은 재밌지 않나 하는 생각에 몇 명에게는 보여주고 반응을 살핀 적도 있었다. 그중 몇 명으로부터는 냉철한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려는 생각으로 처박아 두었다. 이 <60년대 샐러리맨의 하루>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 오발탄 >(유현목, 1961)을 갖다 쓴 부분인데, 바로 김진규의 직장 동료인 여성 타이피스트가 등장하는 두 장면이 그것이다. 첫 번째 장면은 계리사사무소에서 상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타이피스트가 분첩을 꺼내 찍어 바르며 “육시랄하게 시간도 안 가지”라고 말하고 김진규에게 상사 없을 때나 쉬지 언제 쉬냐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곧바로 상사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 타이피스트는 후다닥 분첩을 집어넣고 다시 바쁜 손동작으로 타자기를 친다. 두 번째 장면은 이들이 퇴근하는 장면으로, 타이피스트가 “월급도 받았는데 집에 그냥 가냐”며 김진규를 낚으려고 하다 김진규가 “월급을 아내에게 주는 것도 멋진 일이다”며 거절하니 “흥, 재~미없어”하고 사라지는 장면이다. 타이피스트가 쌩하고 사라지자 혼자 남은 김진규는 이가 아파 볼을 만지면서 제 갈 길을 가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노잼인증’을 당해 겸연쩍은 느낌으로 빠르게 자리를 뜨는 느낌으로도 보인다. 원작을 읽지 않아서 이 장면이 원작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진규 같은, 즉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짊어진 것 같은 매사 진지하기만 한 직장 동료에게 어떻게도 손쓸 수 없는 더없이 적절한 공격 타이밍으로 촌철살인의 일갈을 할 수 있는 젊은이 특유의 여유랄까,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오발탄>의 보석 같은 장면이었다. 심지어 ‘육시랄’이라는 욕설의 처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 대사엔 욕설이라곤 전혀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외의 영화들에서도 사무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에서 김숙일, 도금봉, 최지희 같은 여배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단역 여배우들이 김승호나 김희갑, 주선태 같은 문제적 상사들에게 속 시원한 한마디를 날리는 모습은 꽤나 자주 볼 수 있었고, 대사뿐 아니라 존재 자체로도 전통적인 규범이나 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전후 세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군의 여배우들 즉, 노경희, 양미희, 나애심, 안나영, 김의향 같은 배우들의 활약도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이중에 < 서울의 휴일 >(이용민, 1956)과 < 화심 >(신경균, 1958) 등에서 너무나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 양미희의 팬을 자처하며 그녀의 필모를 깨기 위해 보게 됐던 홍성기 감독의 < 열애 >(1955)에서, 나는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새로운 고찰의 국면을 만나게 되었다. 2. 한국고전영화를 가끔이지만 조금씩 보다 보니 어느 순간 한국고전영화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화를 보는 데에 익숙하고 안 하고 할 게 뭐가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고전영화를 픽션으로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는 쪽이다. 바꿔 말하면, 한국고전영화에서 내가 목격하는 ‘과거의 한국’이나 ‘과거의 한국인’은 내가 아는 현실의 그것과는 너무 다르거나, 반대로 내가 아는 현실의 그것들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이들의 작용이 픽션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영화’의 외피를 쓴 무의식의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잘 찍고 내러티브가 깔끔하게 떨어지는 영화를 볼 때도 뭔가 뒷맛이 씁쓸하고, 내러티브가 산만하고 완성하기에 급급했다 싶은 영화를 볼 때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 면에서 한국고전영화는 내게 있어 재미가 있다/없다, 이해가 잘 된다/안 된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충분히 익숙한가 아닌가의 단순한 문제였던 것 같다. 다만 ‘익숙해진다’는 것은 한국고전영화의 ‘디폴트값’을 알아챘다는 뜻이어서, 익숙해지게 되면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특이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왜 특이하게 여겨질까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가끔 의외의 재미가 찾아오기도 한다. 홍성기 감독의 <열애>를 본 후, 나는 내가 배우 ‘석금성’과 ‘복혜숙’을 혼동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열애>에 나오는 복혜숙은 출연뿐 아니라 영화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내레이션을 담당하고 있기도 한데, 그 목소리가 석금성의 목소리인 걸로 착각이 되었던지 나는 <열애>의 그 인물을 한참이 지난 뒤까지도 ‘석금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닮은 꼴 배우를 헷갈리는 일은 흔한 일이다. ‘닮았다’ ‘안 닮았다’라고 하는 조형적 유사성에 근거한 판단조차 개인의 이미지 경험이나 레퍼런스에 영향받기 때문에 심지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닮지 않은 배우들도 가끔은 헷갈림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복혜숙과 석금성은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동그란 얼굴에 눈이 새까맣고, 항상 깔끔하게 뒤로 빗어넘긴 머리를 하고 있는 게 약간 비슷하다. 심지어 음성도 걸걸하면서 중저음인 게 비슷하다. 하지만 내가 헷갈린 건 그 둘이 외양과 음성이 비슷해서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복혜숙’이란 배우가 있고 ‘석금성’이란 배우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영화에서 할머니 역으로 많이 등장하는 그 사람을 나는 ‘한 명의 사람’으로 뭉뚱그려 생각했었다. 그 사람이 어떨 때는 착하게 나오고(복혜숙), 어떨 땐 고약하게도 나온다고(석금성) 생각했던 것이다. 왼쪽은 24세의 석금성이고 오른쪽은 26세의 복혜숙의 모습이다. 둘 다 토월회에 몸담고 있던 시절. 사진 출처: 석금성-1930년 1월 8일 자 《조선일보》, 복혜숙-1931년 8월 9일 자 《동아일보》 복혜숙과 석금성을 빠르게 구별하기 위해 찾은 김남석의 『조선의 여배우들』(국학자료원, 2006)은 연배마저 비슷한(복혜숙이 1904년생, 석금성이 1907년생으로 세 살 차이) 이 두 사람이 토월회라는 신극단체에서 함께 활동했던 인연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김수용 감독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1957년 여름 < 배뱅이굿 >을 찍기 위해 충청도 온양에 머물렀을 때 사이가 굉장히 나빠 각기 다른 민박을 쓰면서 서로를 비방했다고 썼다. 2) 석금성은 워낙 동료 연예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었고 3) , 실제로 모 배우가 석금성의 거친 성격을 증언하기도 했다고 영화사연구자 L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복혜숙이 남긴 ‘나의 교유록(交遊錄)’ 4) 을 보면 복혜숙의 성격도 만만치 않다. 토월회에서 활동하다 영화계에 들어왔고 영화에선 둘 다 주로 할머니 역을 했던 공통점도 있으니 거의 지척에서 서로를 봤을 텐데 사이가 안 좋았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니 두 배우에 대한 흥미가 더 커졌다. 3. 1904년생 복혜숙과 1907년생 석금성은 각각 10대 후반에 신극 단체인 토월회에 입단해 타고난 끼를 바탕으로 각각 인기 여배우로 거듭났지만 토월회 입단 전후로 기생 활동을 할 정도로 당시의 불안정한 쇼비즈니스계를 통과하고 있었다. 5) 20~30대 시절 영화에 단발적으로 출연했지만(복혜숙은 < 농중조 >(1926), 석금성은 < 심청 >(1937))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은 40대 전후의 나이였다(복혜숙은 < 수업료 >(최인규, 1940)에서 영달이 할머니로, 석금성은 < 마음의 고향 >(윤용규, 1949)에서 최은희 어머니로). 이들보다 불과 10살가량이 어린 문예봉, 김신재, 김소영 등이 당시 조선에 형성되기 시작하던 영화 저널리즘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현숙하고 정갈한 이미지로 전시 체제 프로파간다의 얼굴이 되어가는 동안, 복혜숙과 석금성은 현실 세계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이미 ‘여성’보다는 ‘모성’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복혜숙은 <수업료>에 영달이 할머니로 출연했을 때 고작 37세였다. 그녀의 당시 나이를 알고 <수업료>를 다시 봤더니 그냥 할머니 분장한 젊은이여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바로 그다음에 출연한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에서만 해도 그는 치마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라디오를 할부로 구매하는 활달한 커리어우먼으로 등장하는데, 그 후로 맡은 역할은 거의 다 온정적인 할머니나 어머니, 유모, 식모 같은 것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석금성은 <마음의 고향>에서 최은희의 완고한 친정어머니로 등장하는데 그 이후 < 그 여자의 일생 >(김한일, 1957), < 자유결혼 >(이병일, 1958), < 촌색씨 >(박영환, 1958) 등에서 표독스러울 정도의 거친 모성을 연기하거나 아예 무당(< 김약국의 딸들 >(유현목, 1963)이나 < 강화도령 >(신상옥, 1963), < 만고강산 >(최인현, 1968)) 같은 강렬한 역을 연기했다.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이후 연거푸 전형적인 역할에만 캐스팅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출중한 연기력은 안타깝게도 개점휴업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6) 내가 이들을 혼동한 데에는 연달아 비슷한 역(온정적인 어머니냐 완고한 어머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으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연유도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두 사람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이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했을 수 있을 것 같다. 복혜숙은 자신이 ‘연기’를 좋아하고 원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기 때문에 연기를 지속하기 위해 기생 활동이나 다방 마담을 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고 7) 대한영화배우협회, 성우협회 회장을 맡는 등 영화계 대표 ‘인싸’였다. 심지어 임화수도 복혜숙 앞에서는 꼼짝을 못 했다고. 8) 하지만 석금성은 데뷔 전 기생 이력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하거나 9) 연예인 친구보다는 평범한 주부들이나 동네 부인들과 주로 어울리다가 흔히 말하는 '주부도박단' 사건에 두 번이나 연루되는 등의 사정으로 봤을 때 연예계에서는 전형적인 '아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부자>(권영순, 1958)에서 55세의 나이로 10대 처녀 시절을 연기하고 있는 복혜숙. 하지만 이 둘은 오히려 생애 말기에 연기자로서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또 다시 공통분모를 형성한다. 둘은 토월회 50주년 기념행사에 나란히 참여해 연극 <이대감 망할대감> 공연을 같이 하기도 했고, 10) 복혜숙은 79세에 사망하기 전까지 약 10여 년간, 석금성은 89세에 사망하기 전까지 약 10여 년간 활발하게 활동했다. 76세의 나이로 < 사랑의 조건 >(김수용, 1979)에서 한겨울 눈밭 한가운데서 연기를 펼친 복혜숙이나, 80세 넘어서 출연한 TV문학관 <사평역>, KBS 설특집 드라마 <너도 늙어봐라>, SBS 드라마 <분례기>,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 등에서 엄청난 존재감과 명연기를 선보인 석금성을 보면 생애 마지막 나날까지도 꾸준한 자기 관리로 일을 해나갔던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모습에 존경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유작인 SBS 드라마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1993)에 출연한 석금성의 모습. 4. "악역을 많이 맡아 욕을 무던히 먹어서인지 오래 살지요? 이제까지 살면서 한숨도 많이 쉬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이제는 오늘 일은 오늘, 내일 일은 내일 하는 식으로 산답니다.” 1983년의 인터뷰에서 석금성은 이렇게 말했다. 덧붙여 “지난해에 선배인 복혜숙 씨마저 타계하는 바람에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말했다. 복혜숙은 72년의 인터뷰에서 토월회의 가장 큰 성과로 1929년에 공연했던 <아리랑고개>를 언급하며 “처녀 봉이(석금성)가 일본인에게 농토를 빼앗긴 아버지를 따라 괴나리 봇짐을 들고 간도로 가면서 사랑하는 총각과 이별하는 구슬픈 장면이 나오는 것인데, 석금성의 눈물을 따라 온 극장 안이 울음바다가 됐으며 임검경관마저 같이 울었다”고 회고했다. 11) 이는 두 사람이 서로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흔적으로, 내가 찾은 바로는 이 두 개가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한 장 발견했다. 《동아일보》 1981년 5월 14일 자 11면. 함께 찍었다기보다 단순히 한 공간에서 찍힌 사진 같기도 하다. 복혜숙과 석금성은 복혜숙의 남편인 김성진을 사이에 두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는 미지수이지만 아마도 1973년에 있었던 토월회 50주년 행사 때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토월회에서 데뷔했다는 것 말고는 사실상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는 두 사람을 무리하게 묶어서 생각을 한다는 생각도 했지만 내가 두 사람의 행적을 파악하며 느낀 건, 진부하게도 ‘마지막에 살아남는 자가 승자’라는 문구이다. 두 사람은 그 어느 여배우보다도 길게 살았고, 길게 연기했다. 올해 40대에 접어들어 ‘위기의 중년’을 체감하는 나로서는 그 어떤 누구의 조언보다도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점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한 다음 비디오에세이에 대한 계획은 우선 여기까지이다. ※ '시청각연구인'이라는 바이라인에 대한 추가 설명: 지난해까지는 원고 쓸 일이 있으면 '한국영상자료원 직원'이라는 직함을 썼고 그전까지는 항상 '중앙대 대학원 박사과정생'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영상자료원 직원도 아니고 중앙대 박사과정생으로서 뭔가를 수행하고 있지도 않아 이 원고를 다 써놓고 '영화연구자'라는 표현을 이름 옆에 달아두고는 있었지만 뭔가 찝찝했다. '연구자'라고 하는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영어의 researcher가 아닌 scholar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쓰기 부담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영상자료원 4층 사무실의 복사기 앞에서 출력물이 나오길 기다리며 뭔가를 심사숙고 하고 있는 김기호 차장님을 봤다. 김기호 차장님은 복원팀에서 오랜 기간 아키비스트로 일했고 지금은 학예연구팀에서 조금은 다른 연구들을 수행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내가 팀을 떠났기 때문에 자세한 건 모른다.) 순간 그 어떤 연구자보다 자신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찰하는 김기호 차장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 KOFA Issue paper vol. 1 , vol. 2 )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대학원 따위(표준국어대사전에서 '따위'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1번, 2번 용례에 해당. 3번 아님)의 제도적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해서 저 사람을 '연구자'라고 부르지 못할 일은 없기는 하나 '연구자'보다 그럴듯한 표현이 없을까 하다가 '연구인'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시청각연구인'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됐다. 내 주변에는 확실히 '박사'라고 하는 학계에서 인증한 소위 '메이카'를 갖고 계신 연구자 선배님들도 많지만 내가 그들을 존경한다면 그건 '메이카'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항상 꾸준히 우리의 삶과 사회가 노출하는 모순들을 자신의 연구영역 안에서 이리저리 관찰하고 연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메이카'를 취득하지 못한 때문도 있지만 일단 나는 김기호 차장님 같은 '시청각연구인'을 표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말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보고자 한다. *** 1) Translated from the German by R. Hullot-Kentor and F. Will, 'The Essay as Form', New German Critique , No. 32. (Spring-Summer, 1984), p.151 2) 김수용,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한국의 여배우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공식블로그, 2014. (https://siwff.tistory.com/503) 3) '77세의 원로여우 석금성 씨 20년 만에 <백구야...>로 컴백하면서 또 악역', 《경향신문》, 1983년 1월 29일 자. 4) 복혜숙이 1981년 4월부터 두 달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5) 석금성은 데뷔 전 기생이었고 데뷔 후에는 권번생활을 하지 않았으나, 복혜숙은 오히려 데뷔 후에 이름이 알려진 것을 이용해 권번에 적을 두고 기생 활동 및 기생 교육 활동을 했다. 복혜숙, '나의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6> 복혜숙⑯: 권번시절', 《동아일보》 1981년 5월 11일 자; 김정은, 「일제시대 기생과 여배우의 관계: 대표적인 여배우를 중심으로」, 숙명여대 석사학위논문, 2007.; 이승연, 송지영, 「일제시대 인천권번에 대한 연구: 용동권번을 중심으로」, 『인천학 연구』 6, 2007.2. 6) 약간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준 영화도 있기는 했다. <오부자>(권영순, 1958)에서 복혜숙은 55세의 나이에 10대 처녀 시절을 연기했는데 어딜 가나 사람들을 웃겼다는 복혜숙의 진가가 이 영화에서 조금이지만 발휘되고 있다. 석금성은 <고려장>(김기영, 1963)에서 그나마 전형적인 표독스러운 계모를 탈피한 연기를 할 수 있었는데, 그의 강렬한 이목구비가 오히려 이런 톤 다운된 역할에 잘 어울리는 것으로 봤을 때, 그가 다양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는 점이 정말 안타깝다. 7) 복혜숙은 권번 활동이 적잖은 돈벌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최성해, 이월화, 김소진 등 토월회 멤버들과 함께 권번을 드나들었으며, 권번에서 돈을 벌어 연극을 하자고 의기투합했었다고 한다. 복혜숙은 특히 권번에서 기생들에게 일본어와 현대무용을 가르치기도 하고 후에 판소리 명창이 된 박녹주와 콤비를 이뤄 손님들을 웃겼다고 한다. 복혜숙,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2> 초창기의 여배우 복혜숙⑫: 초창기의 여배우', 《동아일보》 1981년 5월 1일 자;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6> 복혜숙⑯: 권번시절', 《동아일보》 1981년 5월 11일자. 8) 복혜숙,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6> 복혜숙 26: UN군 환영 연극', 《동아일보》 1981년 5월 25일 자. 9) 석금성은 1930년대의 언론 인터뷰에서 토월회 배우 데뷔 전 이력을 '개인 사정'이라고 표현하는 정도였고, 언론들도 '쓰라린 세파에 몸을 적시고 있었던' 시기 정도로 완곡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의 생애 후반기 인터뷰들은 토월회 입단 전에 그녀가 진명고녀 졸업생이었다고 쓰고 있다. '대리석 같은 여인 - 눈물을 흘리는 역이 적역, 신흥 토월회 스타편 - 석금성', 《조선일보》 1930년 1월 8일 자; '석금성 여사 - 처녀와 귀부인이 적역', 《동아일보》 1931년 6월 17일 자; '77세의 원로여우 석금성 씨 20년 만에 <백구야...>로 컴백하면서 또 악역', 《경향신문》, 1983년 1월 29일 자. 10) '토월회 창립 50돌 기념 공연', 《조선일보》 1973년 10월 23일 자. 11) '내가 겪은 20세기 (25) 복혜숙 여사', 《경향신문》, 1972년 6월 23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