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어려워
- 감독
- 황보민정
- 제작년도
- 2007
(그림1) <홍길동>(신동헌, 1967) 신문광고, ‘한국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나왔다 홍길동’ 1) (그림2) <호피와 차돌바위>(신동헌, 1967) 신문광고. ‘약속대로 또 나왔다!’ 영화의 예고편을 TBC-TV를 통해 매일저녁 광고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2) 어쩌면 ‘홍길동(洪吉童)’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허균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인 ‘홍길동’은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견본용 이름이 되었다.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고 의를 실천하고자 한 가상의 위인이자 의적(義賊, Dark Hero), 홍길동이 평범한 인물의 대명사가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허균의 한글소설 『홍길동전』(16세기 경)에서 탄생한 홍길동이 이렇게 유명해진 데에는 아마 이 두 형제의 역할이 혁혁하지 않았을까. 동생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1300여회 연재)에서 홍길동은 그 모습을 찾고, 형 신동헌 감독의 한국 최초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에서는 드디어, 말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간 소실된 줄 알았던 그 <홍길동>이 2008년 5월 41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스크린에 걸렸다. <소년 용자 길동(少年勇者ギルドン)>이란 제목으로 일본에 수출되었던 이 영화는 일본 오사카 필름아카이브에 일본어판 16밀리 네거티브 필름으로 소장되어 있었다. 이를 복제해 한국에 남아있던 사운드 필름과 동기화시켜 복원, 10년 전 다시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그림3) 신동우의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소년조선일보》에 1965년에서 1969년까지 연재) 3) 당시 신문기사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듯이 <홍길동>이 개봉된 1967년은 ‘특수오락영화 붐’이었다. 특수영화란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같은 공상과학 영화, <흥부와 놀부>(강태웅) 같은 인형극 영화는 물론 <홍길동>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 등 이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장르의 영화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이런 특수영화는 ‘사랑 타령의 극영화에 식상한 관객에게 무한한 공상과 스릴을 맛볼 수 있게 하는 돌파구’이기도 했다. 4)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들 장르는 전통적으로 어린이를 대상 관객으로 하는 장르로 일컬어지던 것이기도 했는데, 당시 이렇게 특수영화가 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만을 대상으로 한 잡지와 신문들을 보고 자라 나름의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일군의 관객으로 성장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1950년대 후반부터 디즈니 영화들을 수입 상영해 수익을 내던 세기상사는 이 해에 애니메이션 <홍길동>과 공상과학 영화 <우주괴인 왕마귀>(권혁진)를 통해 국내 기술로 셀-애니메이션과 특수 효과를 선보이며 어린이 영화의 장에 선두로 나섰다. 신동헌의 <홍길동>은 1967년 1월 21일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이어 만들어진 <호피와 차돌바위>는 여름방학이 한창이던 8월 15일 또 다시 스크린에서 어린이 관객과 만났다. (그림4) 당시 방송인 전영우, 여성 산악인 김정심, 한글학자 양주동, 극작가 이서구 같은 명사들이 등장해 광고했던 한독약품의 소화제 훼스탈 광고에 신동헌 감독도 기용되었다. 5) 화백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신동헌(申東憲, 1927~2017)의 일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만화의 모든 유형-만화 삽화와 한 칸 만화, 서술형 만화와 단행본 만화,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화까지-을 만날 수 있다. 그는 회화에서 만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그림과 연관된 모든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한 가히, 한국만화사를 관통하는 인물이다. 그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곱 형제 중 다섯째로 나서 자랐다. 벽성공립보통학교와 회령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중학교를 다니면서 음악부, 도서부, 미술부에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했다. 학창 시절, 일본의 학생잡지 《형설시대》와 《학생》에는 그가 그려 보낸 만화가 당선되어 실린 적도 있었다. 졸업 후 고향에서 초등학교의 교편을 잡다가 해방을 맞았고, 서울로 내려와서는 학원 교재 삽화일과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서울대학교 예과 이과 갑류에 진학하였다. 충무로에서 ‘코주부’로 유명한 김용환 화백을 만나 인연을 맺어 『스티브의 모험』(1947)을 간행한 것이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기 대부분은 인천, 거제, 동래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탈출, 부산 《연합신문》 문화부에 전속만화가로 근무하면서 4컷 만화 「주태백」을 그렸다. 한국전쟁 후 서울로 올라온 신동헌은 《민국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 잡지 《여원》, 《새벗》, 《학원》 등에서 본격적인 만화가로 활동하였다. 그가 신문사의 전속만화가에서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의 길로 옮겨가게 된 것은 1960년이었다. 이 해 3월부터 극장과 텔레비전 광고에서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달부의 ‘럭키 치약’ 애니메이션 광고, 엄도식의 ‘활명수’ 애니메이션 광고가 인기를 끌었고, 신동헌 역시 진로소주의 제안으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에 뛰어들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는 극장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1961년 12월 KBS가 개국하면서 이를 텔레비전용 16미리로 축소 프린트로 만들어 송출했다. 6) 그는 자신의 집에 ‘신동헌프로덕션’을 차려놓고, 해외 전문 서적을 찾아가며 애니메이션 제작기법을 연구했다. 신능파(넬슨 신), 정병권, 김대중, 신동철, 신동우 등 애니메이터와 컬러리스트들을 훈련시켜 가면서 진로소주의 세 편의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었다. (그림5) 진로소주 두 번째 광고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 (그림6) 진로소주 세 번째 광고 ‘파라다이스’ 첫 번째 광고는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에 연료로 진로소주를 넣는 것이 그 내용이고, 두 번째는 ‘의견일치 진미의 진로’라는 내레이션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직장인들이 진로소주를 마시러 술집에 들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 번째 제작한 ‘파라다이스’ 광고는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라는 광고 음악에 맞추어 제작한 것으로, 선원들이 파라다이스 섬에 내려 그곳의 여인들과 소주를 즐기는 내용이다. 이는 그가 신문사 기자의 자격으로 해군 함정을 타고 하와이까지 항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당시 이 광고에 삽입한 음악은 부산 MBC 피디였던 손권식이 작사하고, 허영철이 작곡한 것이었다. 노래에 맞추어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이 방식, ‘선녹음 후작화’ 기법을 사용한 것은 텔레비전 광고로서는 일대 혁신을 꾀한 것이었다. 음악과 동작이 리듬감 있게 맞아떨어지는 애니메이션 화면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그 이후 신동헌프로덕션에는 제약회사, 양조회사, 섬유회사, 전자회사의 극장용·방송용 애니메이션 광고 문의가 쇄도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사용은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 일부와 애니메이션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순수 애니메이션 작품이나 어린이 대상의 애니메이션 작품들로 애니메이션의 제작의 포문을 열은 영화 선진국들과는 달리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계몽이나 선전을 위한 뉴스/문화영화를 제작하던 국립영화제작소를 제외하면 민간에서는 애니메이션 광고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계몽과 상품 프로파간다에 활용되는 중요한 매체로 출발하고 있었다는 점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들은 애니메이션과 대중을 보다 친숙하게 해주는 매개였던 데다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 인력들의 실질적 훈련의 장이기도 했다. (그림7) 신동헌이 제작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중,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이 제공하는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갖인 이 한표로’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장면 그가 만든 애니메이션 광고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을 무렵, 장면 정부는 공명선거 중요성 인식을 위한 선거홍보 문화영화 <공명선거의 노래>(1960) 7) 의 제작을 신동헌프로덕션에 의뢰했다. 당시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국립영화제작소 이전의 담당기관)은 제5대 국회의원선거를 맞아 ‘공명선거의 노래’를 통해, 4·19혁명 이후 새롭게 제정된 양원제를 담은 선거법을 국민에게 알리고자 했다. 신동헌 감독이 제작한 이 문화영화의 후반부 3분가량의 애니메이션은, ‘선거일 7월 29일이 참다운 민주주의 기초를 이룩할 뜻 같은 날이므로, 불의와 부정을 물리치고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의사로 공명한 선거를 실시해야하고, 민의원과 참의원 두 번의 투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애니메이션 광고 영화와 정부 부처에서 의뢰하는 문화영화의 애니메이션 부분 제작을 통해 신동헌은 24프레임을 사용하는 디즈니의 ‘선녹음 후작화’ 방식을 실험하며 애니메이션 노하우를 축적했다. 이렇게 경험이 무르익은 그는 드디어 애니메이션 영화에 도전한다. 영화 선진국에서는 이미 40여 년 전부터 만들어져 왔던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순간이었다. (그림8) 신동우의 연재만화 단행본 『홍길동』 1권 표지(근일문화사, 1968년 발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획된 장편만화영화 「홍길동전」이 만화가 신동헌 씨의 총지휘로 완성되었다. 상영시간 1시간 15분의 만화영화 「홍길동전」은 일반에 널리 알려진 고전소설 「홍길동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양민을 괴롭히는 양반에 소년 「홍길동」이 반기를 든다는 이야기에 현대적인 「코믹」 「스타일」도 가미되었다고 한다. 66년 6월에 제작에 착수하여 6만 여 장의 그림을 그려 7개월 만에 제작 완료되었다. 일반영화완 달리 연기 「로케」 「세트」 등이 필요 없지만 「홍길동전」엔 백 80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애니메이터」 50여 명, 채색원 130여 명). 한국에선 처음 시도된 일이라 상상 이상의 노력이 들었고 많은 NG를 내야했다는 것. 화면의 한 동작에 필요한 그림이 60여 장씩이나 들었다고 한다. 녹음도 「배터런」성우인 김수일·이춘사 등이 맡았고 음악은 전정근. 【세기상사 제작】 8) 1967년 1월 21일 공개된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개봉해 8만 5천 명을 동원하는 파격적인 흥행을 거두며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같은 해 제6회 대종상 문화영화상도 수상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홍길동>은 1966년 한남동 세기상사의 촬영소 지하에서 수십 명의 동화부 스태프들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그간 애니메이션 광고 작업을 진행해 전문 인력을 양성했다지만 장편 영화를 위해서는 그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보름이나 개봉을 연기하며 작업했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제작이 이루어졌다. 이 영화는 미군들이 쓰다 남은 정찰용 필름의 젤라틴을 양잿물에 벗긴 셀룰로이드 위에 비닐 컬러 (vinyl color) 물감이 없어 포스터 컬러(poster color) 물감을 칠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수채화용 포스터 컬러 물감은 뜨거운 카메라 조명 아래서 금방 말라 비틀어져버렸다. 그 때문에 컬러리스트가 붓을 들고 촬영 현장에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림9) <홍길동>의 주요 장면. 잘 알려졌다시피 원작 「풍운아 홍길동」은 신동헌의 동생인 만화가 신동우(1936~1994)가 허균의 『홍길동전』을 모티프로 해박한 역사 지식을 총동원하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미해 재탄생시킨 것이었다. 신동우가 원작자였지만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는 신동헌의 조수로 활약했다. 지면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는 배경과 인물, 움직임의 표현에 있어서, 또 서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도 매체 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례로, 신동헌은 원작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의 배경을 한국적인 것이 아닌 보다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가상적 공간으로 바꾸었다. 또 만화 「풍운아 홍길동」에서 홍길동의 눈은 까만 점으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애니메이션 <홍길동>에서는 캐릭터의 다양한 표정과 감정을 담기 위해서 실제 사람의 눈처럼 눈동자를 그려 넣는 방식을 택했다. ‘선녹음 후작화’ 방식으로 <홍길동>은 성우들의 녹음을 먼저 진행했는데 홍길동은 역은 KBS 성우 공채 1기의 김수일이, 차돌바위는 TBC성우 4기로 데뷔한 여성 성우인 김순원이 맡았다. 먼저 녹음을 진행한 성우들의 대화에서 원작자나 감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좋은 효과와 감정이 드러나 후작화에 반영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과정에서 알아낸 큰 수확이었다. 미국의 ‘월트 디즈니 같은 만화왕국’을 꿈꾸었던 신동헌은 <홍길동>을 제작하고 난 직후 한국 만화영화의 가능성은 크다고 믿고 있었다.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그가 고민한 것은 ‘외국의 것을 흉내 내지 않고 우리대로의 동작의 선을 확립해야한다. 우리 만화영화의 한국적인 동작을 어떻게 창안할 것인가’였다. 9) (그림10) <호피와 차돌바위>(1967) 타이틀 크레딧 (그림11) <홍길동>에 등장했던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뜻의 차돌바위 (그림12) <호피와 차돌바위> 포스터 <홍길동>이 대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제작과 배급에서 세기상사와 갈등을 빚었다. 납품 일자를 어겼다고 수익을 배분해주지 않았고, 이런 갈등은 이후 작품에 재투자로 이어지기 만무했다. 하지만 국내 유일의 애니메이션 기술력을 가진 신동헌프로덕션은 곧 합동영화사의 제안으로 만든 <호피와 차돌바위>를 같은 해 개봉했다. 원화 6만 장을 그려 상영시간 75분짜리로 찍었고, 그 제작비로 1천만 원이 소요되었다. 사실 <홍길동>을 만들면서 신동헌은 <속 홍길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세기상사와의 갈등으로 속편이 여의치 않자 스핀오프(spin-off) 시리즈격인 <호피와 차돌바위>로 선회했다. 호피는 호랑이 가죽을 쓴 의로운 인물이라는, 차돌바위는 ‘야무지고 단단한 작은 돌’이라는 의미의 마치 배트맨과 로빈을 연상시키는 이 짝패는 「풍운아 홍길동」에서 단역으로 등장하는, 신동우가 창조한 서브캐릭터였다. 세기상사와의 생겨날 수 있는 판권문제를 염두 했던 신동헌은 『홍길동전』이나 <홍길동>에는 없는 <호피와 차돌바위>를 후속으로 한 것이었다. 중국과의 경계 지역인 함경도 회령이 고향이었던 신동헌, 신동우 형제답게 이 영화에서는 여진족이 서사상의 적으로 설정되어 있다. 호피(명호)의 아버지(유세진 장군)가 정벌하던 오랑캐 여진족, 호피의 아버지를 모함한 사또 최진달, 또 그 사또가 연합한 세력인 여진의 욕심 많은 괴물 도마술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어린이 관객들에게 반공 의식을 고양시키는 계몽적인 장면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사상의 적은 ‘여진족’으로 명시되지만 은유적으로 이는 북한의 공산세력을 뜻하는 것이다. 삭풍 선생 : 이 역적무리들. 봐라, 이것이 최진달 일파가 우리나라를 도마술에게 바치겠다는 문서다. 정신 차려라, 호피야. 북녘의 야만인의 피에 굶주린 발톱이 우리나라의 땅을 짓밟으려고 노리고 있는 이때에, 너 같은 젊은 놈이 그 좋은 칼솜씨를 지니고도, 나라를 위해서 일 해보겠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도둑질만 일삼다니. 부끄러워 할 줄 알아라, 이놈아. 우리의 조상들은 자기의 목숨을 투계와 같이 버리며 몇 천 년 몇 만 년 동안 이 나라를 지켜왔다. 알겠느냐? 북쪽 오랑캐들은 이 나라를 삼킬려고 호시탐탐 그 기회만을 노려왔으니. (그림13) <호피와 차돌바위>(1967) 중 삭풍 선생의 뼈아픈 훈계를 듣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호피의 모습 하지만 <홍길동>은 물론 <호피와 차돌바위>까지 흥행 수익을 둘러싸고 제작사와 갈등을 겪으면서 신동헌은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에서 손을 뗀다. 영화제작사들은 흥행 수입만을 챙기고 애니메이션 제작 재투자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작 신동헌 감독은 오히려 재정난에 빠졌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극영화보다도 제작비가 더 많이 들고, 제작 소요 기간도 길며, 오랜기간 숙련된 전문 기술 인력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기술력을 가진 인력과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영화제작사 간의 불협화음이 한동안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발전에 장애가 되었던 아쉬운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림14)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타이틀 크레딧 장면들 신동헌 감독이 이렇게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와 안타까운 결별을 했지만,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은 일부 극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말띠 신부>(김기덕, 1966)의 오프닝 크레딧은 조애희가 부르는 주제가 “말띠 신부”(음악 최창근, 작사 유호)의 멜로디에 맞추어 등장인물 커플을 애니메이션으로 캐리커쳐하여 소개하는데 이를 신동헌이 담당했다. 또 이어령의 원작을 영화화한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은 신동헌프로덕션의 크레딧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철훈이 구상한 소설 내용을 재현하는 장면이 있는데 신동헌이 만든 애니메이션이 10분가량 들어있다. (그림1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중에서 신동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부분 그 외에도 TBC의 풍자해학 사극 <여보 정선달>(1971~1974)에도 신동헌이 참여했다. 인물 좋고 재주가 비상한 조선의 정선달이 전국을 유랑하며 각종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인데, 드라마 주제가에 맞추어 타이틀 크레딧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MBC의 장수 어린이프로그램 <뽀뽀뽀>(1983~1992)에도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뽀뽀뽀>의 고정 캐릭터들이 연기하는 배경을 그려 넣었고, 동화적인 이야기를 구성하는 꼭지에서는 예의 신동헌의 애니메이션 작업이 빛을 발했다. 2008년 유실되었던 필름을 되찾은 후 그는 애니메이션 관련 인터뷰나 강연으로 맹활약했고, 2014년 제14회 만화의 날에 기념공로상을 받았다. (그림16) <뽀뽀뽀>(MBC, 1989년 1월 9일) 중 애니메이션을 활용해 만든 장면들 신동헌 감독을 회고하면서 다시 궁금한 점이 생겼다. 한국 최초의 극장용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인 <홍길동>은 ‘프랑스 아네시영화제(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기로 결정되었다’는 신문기사가 있지만 10) , 실제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하지는 않은 것 같다. 1967년 <홍길동>이 앤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출품되었더라면, 신동헌 감독이 직접 참관했더라면 우리나라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에서 진행한 『2008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신동헌』 편에 실린 필자의 「신동헌 해제」와 구술문,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출시된 DVD <홍길동>에 포함된 필자의 「신동헌 감독 소개」를 참조해 재구성하였습니다. 1) 《동아일보》 1967년 1월 19일 5면. 2) 《경향신문》 1967년 8월 12일 5면. 3) 《소년조선일보》 1965년 9월 11일. 4) “[연예오락] 특수 오락영화 「붐」. 괴수물·만화 등, 영화로 뒤쫓는 우주시대 국내기술로 제작 가능”, 《한국일보》 1967년 6월 18일자 7면. 5) 《동아일보》 1972년 1월 4일. 6) 광고정보센터 한국광고 100년 홈페이지 http://data.adic.co.kr/ 참고. 7)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공명선거의 노래>는 “공명선거의 노래”(1분 41초)와 “살기 좋고 밝은 나라, 내가 가진 이 한 표로”(3분 8초)의 두 개 영상으로 나뉘어 있다. 신동헌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은 후자의 영상이다. 해당 홈페이지에는 이 문화영화의 제작년도가 1961년으로 오기되었다. 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목록(1950~1993)』, 37쪽;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 http://www.ehistory.kr. 8) “첫 선보인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전」, 7개월간 6만 여 장 그려”, 《한국일보》 1967년 1월 19일자 7면. 9) “만화영화 전망과 가능성, 『홍길동』이 던진 문제점”, 《동아일보》 1967년 1월 28일 5면. 10) “만화영화 홍길동 아네시영화제 출품”, 동아일보, 1967년 4월 25일 5면.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1980년대 전성기를 맞이했던 장르를 꼽는다면 ‘종교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멸종된 건 아니다. 최근 < 일사각오 >(권혁만, 2016) 같은 영화가 소박한 흥행을 거두었고, 김수환 추기경(< 바보야 >(2011)), 법정 스님(< 법정 스님의 의자 >(2011)), 옥한흠 목사(< 제자, 옥한흠 >(2014) 등 종교인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들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울지마, 톤즈 >(2010)나 < 소명 >(2009)처럼 오지의 성자들에 대한 작품도 있다. 다른 건 소속된 리그다. 최근 종교 관련 작품들이 다양성 영화의 범주에 속한다면, 1980년대의 종교 영화는 메인 스트림 안에 있었다. 이 영화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당시로선 큰 흥행인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했으며, 사극일 경우 거대 예산이 들어간 대작이었다. 특정 종교의 역사, 인물, 교리 등을 테마로 삼는 종교 영화는 1980년대 상업영화의 한 축이었으며, 비록 그 종교의 신도들을 중심으로 하지만 강한 대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 가톨릭, 불교는 물론이고 증산도를 다룬 < 화평의 길 >( 강대진 , 1984), 무속을 소재로 한 < 피막 >( 이두용 , 1981) < 무녀의 밤 >( 변장호 , 1982) < 불의 딸 >( 임권택 , 1983) < 태 >( 하명중 , 1986) < 업 >(이두용, 1988) 등이 이어졌고, 수련을 통한 초능력을 다룬 < 단 >( 김행수 , 1986)이나 사이비 종교에 대한 < 백백교 >( 최영철 , 1993) 등도 있었다. 1980년대 이전에도 기독교와 가톨릭을 다룬 종교 영화들은 있었다. 그 영화들은 사극, 전쟁 영화, 반공 영화 등에 걸쳐 실존적 철학과 이념적 갈등과 역사적 사실 등을 다루었다. 유현목 감독의 < 순교자 >(1965) 최하원 감독의 < 새남터의 북소리 >(1972) 이성구 감독의 < 악마의 제자들 >(1974)과 <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 >(1973) 당대 종교 영화 트렌드의 중심은 기독교였다. 조짐은 1970년대 말부터 있었고 1980년대 초반까지 주요작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기독교 영화의 붐이 일기 시작했던 걸까? 이것은 당시 기독교의 부흥과 깊은 관계가 있다.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5일 동안 열렸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 대회엔 전국 각지의 크리스천이 300만 명 이상 모였다. 이후 1974년엔 김준곤 목사의 엑스플로 대회가 있었고, 1977년엔 민족 복음화 성회, 1980년엔 세계 복음화 성회, 1984년엔 선교 100주년 대성회 그리고 88 세계 복음화 대성회 등이 이어졌다. 이 시기 뉴스에서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운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접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1980년대 중반에 오면 ‘1,000만 기독교인’이라는 자체 집계가 발표된다. 이른바 ‘대부흥의 시대’였다. 자고 나면 교회가 생겨나던 시절, 기독교 영화에 대한 잠재적 수요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이때 < 사랑의 원자탄 >(강대진, 1977)이 포문을 열었고 뒤를 이은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임원식 , 1981)는 서울 관객 20만 명 이상을 동원한 흥행작이었다. 다음 해 < 죽으면 살리라 >(강대진, 1982) < 하늘 가는 밝은 길 >( 김성호 , 1982)이 나왔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신앙을 실천했던 손양원 주기철 안이숙 등이 주인공이었던 이 영화들은 한참 교세를 확장하던 시기 기독교인들에겐 일종의 교재였다. 실화 영화로서 이 작품들이 지닌 이분법적이고 감정적이며 극적인 감수성은 절절한 간증이 되어 신도들의 가슴을 쳤다. 가톨릭도 마찬가지였다. 최하원 감독은 < 초대 받은 사람들 >(1981)과 < 초대 받은 성웅들 >(1984)를 내놓는다. ‘천주교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초대 받은 사람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약 15만 5,000명의 서울 관객을 모은 흥행작. <초대 받은 성웅들>은 ‘천주교 조선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며 서울 대교구의 지원으로 제작되었다. 최인현 감독의 < 소명 >(1984)도 200주년 기념작. 이 작품들은 이승훈 김대건 이벽 등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올 시기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그린다. 특히 1984년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며 가톨릭의 열기가 뜨거웠던 해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까지 만들어진 주요 종교 영화들의 중심 테마는 순교와 박해였다. 이 영화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겪었던 참혹한 역사를 재현하기 위해 하드고어에 가까운 표현을 하기도 했다. <사랑의 원자탄>은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해방 후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다. 그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들였다. (상단 오른쪽)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 거부로 결국 옥사한 그의 이야기는 <하늘 가는 밝은 길>과 <일사각오>로도 영화화되었다. (하단) 최하원 감독의 <초대 받은 사람들>과 <초대 받은 성웅들>. 가톨릭이 조선에 들어오던 시기 겪었던 박해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처럼 1980년대 초 기독교와 가톨릭이 이끈 종교 영화의 열풍은 종교적 이벤트와 신도의 양적 성장을 토대로, 억압 받았던 수난의 역사를 환기시키는 영화들의 만남이 빚어낸 결과였다. 이 영화들을 통해 기독교와 가톨릭은, 신분제 사회와 식민지 체제에서 평등 사상과 민족 정신을 주장하고 지켰던 종교로서 일종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 흥미로운 건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사례다. 원래는 1977년에 제작되어 개봉 예정이었지만, 유신 정권은 이 영화에서 불온한(?) 기운을 감지했다. 일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신사 참배에 저항하는 주기철 목사(신영균)의 모습을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세력으로 여겼던 모양. 그래서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던 영화는 198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고, 큰 흥행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종교 영화들이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 전진했던 걸까? 그렇지 않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의 한국영화는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 시기 충무로는 산업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당시 한국 사회에서 떠오르던 종교 이슈를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의 큰 흥행은 자극제 역할을 했고(이 영화는 속편이 기획되기도 했다), 무산되긴 했지만 <정의가 나를 부를 때> <빛을 마셔라> <이천석 목사> 등도 제작될 예정이었다. 기독 영화인들의 모임도 큰 역할을 했다. 1970년대에 모이기 시작한 그들은 1976년 ‘새롭게 하소서’라는 공연으로 연예인 선교의 단초를 마련했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에는 개런티 없이 참여하기도 했다. 신영균 고은아 를 비롯 최민수 의 어머니인 강효실 , < 예수 천당 >( 홍의봉 , 1991)의 이영후 , 그리고 임동진 문오장 구봉서 곽규석 윤복희 (가수) 송도영 (성우) 등이 대표적 인물. 한편 종교적 테마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감독들도 등장했는데 복음주의적 입장의 강대진 감독은 <사랑의 원자탄>과 <죽으면 살리라>를(그런데 1984년에는 증산도에 대한 <화평의 길>을 연출하기도 했다), 실존주의적 입장의 유현목 감독은 < 사람의 아들 >(1981)과 < 상한 갈대 >(1984)를, 선교적 입장의 홍의봉 감독은 < 휴거 >(1990) < 천국의 비밀 >(1990) < 예수 천당 >을 내놓았다. 여기서 1980년대 종교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이장호 감독과 이동철(본명 이철용) 작가다. 그들은 한국 종교 영화에 본격적으로 ‘민중’의 개념을 가져왔다. 기독교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찬송가였다. 이 영화들의 OST는 대부분 찬송가 멜로디의 변주였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를 거부했고,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리다 해방을 맞이해 극적으로 살아난 안이숙의 이야기인 <죽으면 살리라>. 가수인 윤복희가 주인공을 맡아, 특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들려준다. 이 시기 기독교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는 ‘회개’였다. <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에서 최자실 목사는 빈민촌에서 교회를 세우고, 희망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킨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무당( 김을동 )이 회개하는 대목이다. 이동철 원작의 < 꼬방동네 사람들 >은 빈민촌의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그 중엔 고물 장수 목사가 있다. 그는 영화의 결말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다. < 과부춤 >은 천민 자본주의 시대의 기독교를 이야기한다. 부흥회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교회의 모습이 풍자된다. 그 시작은 < 낮은 데로 임하소서 >(1982)였다. 안요한 목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청준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갑작스러운 실명으로 삶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주인공이 신의 부름을 받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종교적 체험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한 인물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기존의 한국 종교 영화가 담지 못했던 풍경을 보여준다. 그것은 도시 빈민의 모습이다. 안요한(이영호)은 시력을 잃은 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판자촌에 교회를 세우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한다. 이러한 모습은 이동철 작가 원작인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인)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에도 등장한다. 영화에는 리어카를 끌며 고물 장사를 하는 목사( 송재호 ) 캐릭터가 있는데, 그는 ‘꼬방동네’(빈민촌) 사람들에게 예수의 메시지를 전한다. 당시 한국 기독교는 대형화와 함께 중산층화를 겪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소외 당한 자들에 대한 시선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민중 교회가 등장했는데, 이런 흐름을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한 매체가 바로 영화였다. 이런 시각은 창녀촌을 배경으로 한 < 밤을 기다리는 해바라기 >( 엄종선 , 1982) 같은 영화에서 간접적으로, 의도하지 않게 드러나기도 했고, 김진홍 목사의 빈민 선교 이야기인 < 새벽을 깨우리로다 >( 이기원 , 1990) 같은 영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김수형 , 1982)은 한국 대형 교회의 상징인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최자실 목사(송도영)의 일대기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 이장호 감독, 이동철 원작의 <과부춤>(1984)은 본격적인 종교 영화는 아니지만, 당대 한국 기독교를 적나라하게 풍자한 수작이다. 광적인 부흥회, 돈에 눈먼 목사, 교회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 신도 등 <과부춤>은 ‘천만 기독교인’ 시대의 이면을 들춘다. 이 영화는 단순한 기독교 비판에 그치지 않고, 종교 없인 살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멘털리티를 보여주며, 그 이면엔 ‘가난’이라는 사회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 세상에 대한 당대 기독교 영화의 관심은 불교 영화와도 일맥 상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 만다라 >를 시작으로 1980년대 불교 영화는 끊임없이 속세와 종교적 깨달음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중광 스님의 이야기인 < 허튼 소리 >(김수용, 1986)를 비롯해 < 아제 아제 바라아제 >(임권택, 1989) < 우담바라 >( 김양득 , 1989)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정지영 , 1991) 그리고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배용균 , 1989)까지 이 시기 불교 영화엔 사바 세계에 대한 미련과 번민이 있다. 종종 멜로드라마 장르의 관습에 갇히기도 하지만(유난히 비구니 캐릭터가 많았던 건 그런 이유일까?), 관념적 화두에 머물지 않고 세상과의 관계를 중시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이후 임 감독은 <비구니>를 만들려 했지만, 촬영 도중 중단되어 결국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법난 이후 불교계와 정권은 갈등을 빚었고, 그 와중에 조계종은 이 영화의 제작을 반대하여 결국 중단 사태까지 간 것. 이후 감독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비구니>의 한을 풀었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한국을 넘어, 세계 불교 영화의 대표작이다. 이 영화를 전후로 충무로에 잠깐 불교 영화의 붐이 일었다. 실존주의자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 이문열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이 시기 종교 영화의 클리셰 중 하나는 초월적인 기적의 순간을 시각화하는 것이었다. <초대 받은 사람들>에서 정혜(원미경)의 가슴에 십자가 빛이 새겨진다. 1980년대 종교계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군사 정권의 군홧발 아래서, 개신교 지도자들은 전두환에게 달려가 조찬 기도회를 열어주었고, 불교계는 10.27법난(1980년)을 겪으며 초토화되었다. 가톨릭은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 되었다. 기복 신앙의 전통은 계속 이어졌고, ‘종교 과잉’과 ‘사이비’의 시대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이 카오스 속에서 ‘영적 상품’으로 기획된 종교 영화들은 전반기엔 기독교 영화가, 하반기엔 불교 영화가 중심을 이루며 1980년대를 장식했다. 하지만 1990년대 기획 영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 영화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기업 자본에게 ‘종교’는 매력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이 부활한 건 2010년 전후 즈음. 몇 편의 다큐멘터리가 다시 신앙과 선교와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후 주기철 목사에 대한 <일사각오>를 비롯 < 신이 보낸 사람 >( 김진무 , 2014) < 로마서 8:37 >( 신연식 , 2017) < 산상수훈 >(유영의, 2017) 등의 극영화가 등장하고 있다.
정작 해방이 됐으나 영화계는 휴면상태였다. 옛 조선영화사 자리에 영화건설본부라는 문패를 달고 만든 25분 분량의 <해방뉴스>(촬영 김학성, 편집 박기채)가 공개된 게 고작이었다( 중앙신문, 「일요특집, 찬란한 예원(藝苑) 풍경」, 1945.11.11.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라도 우리의 영화가 생산된 것( 최용달 「해방뉴스 평」, 예술통신, 1945.10.25. )이 기꺼울 정도였다.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로이드의 구두방>(해롤드 로이드 주연) 유의 슬랩스틱 코미디나 <소년의 거리>(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와 같은 외국영화가 볼거리였다. 이런 시대에 1946년 최초의 항일 광복영화가 나왔다.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가 그것이다. 이해 3월부터 10월 사이에 거의 두 달 간격으로 나온 기록영화 <안중근 사기(史記)>(이구영), <제주도 풍토기>(이용민)와 아동영화 <똘똘이의 모험>(이규환)에 이은 네 번째 한국영화계의 결실이다. 미군정 치하였다. 불과 1년 전 일본제국 의 특공대 지원을 촉구하는 <사랑과 맹서>(1945)와 같은 어용영화를 만든 최 감독이 광복영화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진 1] 해방 후 최초의 극영화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의 한 장면 묻힐 뻔했던 ‘자유만세’의 단역 <자유만세>에는 한동안 한국영화사에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인물이 등장한다. 폭약을 운반한 죄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끌려가다가 감옥에서 탈출한 지하 조직책 최한승(전창근)에 의해 구출되는 중절모의 사나이, 바로 박동지 역의 김승호가 그 사람이다. 1 보잘 것 없는 이 단역배우가 뒷날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긋는 주역이 되리라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 2] <자유만세>에 출연한 김승호. 영화로는 데뷔작이다 아무튼 김승호는 이듬해 <자유만세>의 주인공 전창근에 의해 16밀리 농촌계몽영화 <해방된 내 고향>(1947)과 밀수의 근절을 촉구하는 경찰청 지원의 <밤의 태양>(1948, 박기채)에 각기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 뒤 10여 년 동안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사이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8월 김승호는 서울에 남아 있는 영화, 연극인들과 함께 명동성당에 갇혔다. 해방 후 월북했던 배우 심영이 인민군 중좌의 계급장을 달고 나타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때 북으로 끌려갈 뻔했다. 하지만 의정부 근교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1.4후퇴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정부가 환도할 무렵 그는 대전에 머물며 자신이 창단한 극단 ‘배협’의 공연을 계속했다. <망향>(1952, 대전시공관), <허무한 사랑>, <그들의 가는 길>(1953, 시공관), <유관순>(1954, 대전극장) 등이 이때의 레퍼토리이다( 도완석, 「대전·충청 연예인실록, 전쟁참화 속에서 ‘배협’ 무대 이어져」 중도일보, 2016.4.30. ). <허무한 사랑>에서는 연출을 담당했다. 그가 다시 영화 활동을 재개한 것은 1955년 김기영의 감독 데뷔작 <양산도>(김기영, 1955)부터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웃을래야 웃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영화’( 허백년, 「양산도가 제기한 문제점」, 조선일보, 1955.11.6. )라는 등의 혹평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런데 1년 뒤 출연한 이병일 감독의 <시집가는 날>(1956)이 작품성과 함께 그가 주연한 맹진사의 연기가 호평을 받으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풍토색이 강한 민속극으로서도 일류의 가치가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유머요 풍자가 이만큼 자연스럽게 표현된 국산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신영화, 풍토색 강한 민속극」, 한국일보, 1957.2.14.) 는 작품평에 이어 “더욱이 맹진사(김승호)의 숙달된 연기는 영화를 결정적으로 살려주었다”( 「신영화, 한국적 아이로니, 시집가는 날」 조선일보, 1957.2.15. )는 과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자 평론가인 이봉래 역시 “연기 면에 있어서는 김승호의 역연이 압권이었다. 자기 역에 대한 해석이 정확하였고 등장인물과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그 호흡이 잘 어울렸다” ( 「희극영화의 가능성, 영화 ‘시집가는 날’에서」, 조선일보, 1967.2.19 )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 3] <시집가는 날>에서 맹진사 역으로 출연한 김승호 조선조 때 맹진사댁과 김판서 댁의 혼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양반사회의 위선과 구습, 결혼제도의 모순을 희극적 아이러니로 빚어낸 <시집가는 날>(오영진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맹진사댁 경사’의 개명)은 결국 제4회 아시아영화제 특별희극상을 받음으로써 국내 작품이 해외에서 거둔 최초의 성과로 기록된다. 김승호는 이런 후광에 힘입어 1957년 한 해 동안 <오해마세요>(권영순)를 비롯한 <봉이 김선달>(한홍열), <아리랑>(김소동), <풍운의 궁전>(정창화) 등 15편, 58년엔 <돈>(김소동), <초설>(김기영),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생명>(이강천), <인생차압>(유현목), <마도의 향불>(신경균) 등 20편에 출연하고, 59년엔 <곰>(조긍하),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전창근), <육체의 길>(조긍하) <불멸의 성좌>(유진식) 등으로 비로소 30편선(34편)을 돌파하여 ‘김승호 시대’를 예고한다. 1960년에는 <피 묻은 대결>(김묵), <로맨스 빠빠>(신상옥), <흙>(권영순), <박서방>(강대진), <저 언덕을 넘어서>(박성복) 등 25편으로 전년도에 비해 10여 편이 줄긴 했으나 61년부터 <주마등>(이만희), <마부>(강대진). <삼등과장>(이봉래). <노다지>(정창화), <어부들>(강대진),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등 32편에 이어 62년 <월급쟁이>(이봉래), <전쟁과 노인>(임권택), <감나무골의 공서방>(김응천), <진시황제와 만리장성>(권영순) 등 다시 34편을 소화하는 저력을 과시한다. [사진 4] <돈>(김소동, 1958)에 출연한 김승호.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벗어나고자 일확천금을 꿈꾸다 사기 당하는 순박한 농민 역을 맡았다 63년에는 <굴비>(김수용), <로맨스그레이>(신상옥), <아버지 결혼하세요>(김용덕), <혈맥>(김수용) 등 23편(총 제작 편수 148편)에 출연했는데, 이 결과는 <가정교사>와 <청춘교실>로 청춘영화 붐을 일으키며 인기 스타로 떠오른 신인 신성일이 이 해에 출연한 21편보다 많은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46세에 이른 중년이었다. 64년에는 <월급봉투>(김수용), <비련의 왕비 달기>(최인현, 약풍), <명동에 밤이 오면>(이형표) 등 33편, 65년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임원식, 나봉한), <마포 사는 황부자>(이봉래), <배비장>(신상옥) 등 35편, 66년 <하루살이 인생>(권혁진), <아빠의 청춘>(정승문), <대폭군>(1966, 임원식) 등 26편, 67년 <만선>(김수용), <역마>(김강윤), <돌무지>(정창화) 등 17편, 68년 <장군의 수염>(이성구), <풍운>(권영순), <영원한 모정>(김기덕) 등 9편, 69년 <허공에 진 청춘>(정원), <사화산>(고영남), <마법선>(이창근) 등 2편, 1971년 <족보>(고영남) 1편 등 이렇게 김승호는 23년에 이르는 영화의 삶을 통해 모두 3백14편을 남겼다. 김승호표 서민영화의 형성과 넉살 후시 녹음시대였지만 그는 거의 성우에 의존하지 않았다. 표피적인 몸의 표현만이 아니라 감정이 실린 음성연기까지 갖춘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려 했다. 그의 사극에서는 서민연기와는 다른 카리스마가 있었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 전창근), <요화 배정자>(1966, 이규웅)의 고종황제, <진시황제와 만리장성>(1962, 권영순)의 진시황제는 물론 <대폭군>(1966)의 묘장왕,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 임원식)의 대원군, 그 밖의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1956, 김소동), <평양기생 계월향>(1962, 이태환)의 배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 5] <대폭군>에 출연한 김승호 김승호 연기의 또 다른 면모는 넉살과 딴청으로 비벼낸 해학과 풍자이다. 무남독녀를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려다 오히려 제가 만든 덫에 걸리고 마는 <시집가는 날>(1956)의 맹 진사, 돈 에 눈이 멀어 횡령, 공문서 위조 따위의 불법 행위를 벌이다가 법망에 걸리자 위장 자살극을 벌이는 <인생차압>(1958)의 모리배 이중생, 새 부임지에 와서도 엽색행각을 버리지 못하는 <배비장>(1958)의 제주 목사 등이 이런 유형이다. 특히 <인생차압>은 금전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타산적인 탐욕의 허상을 시니컬하게 표출하여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뭐라 해도 그의 연기 본령은 서민의 애환과 삶을 꿰뚫어 보고 엮어내는 데에 있다. 사채 꾼의 꼬임에 빠져 노름판에 끼어들었다가 재산을 날리는 <돈>(1958)의 농사꾼, 술에 찌들어 살아가는 <곰>(1959)의 무식한 목수, 우직하고 성실하나 가족에게 유독 권위적인 <박서방>(1960)의 연탄아궁이 수리공, 두 남매를 키워 아들을 고등고시에 합격시킨 <마부>(1961)의 홀아비, 밀수배의 농간에 놀아나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감나무골의 공서방>(1962)의 고리대금업자, 복덕방 간판을 내걸었으나 찾는 사람이 없는 <혈맥>(1963)의 복덕방 영감, 리어카를 장만하는 것이 소망인 한강 다리 밑의 <지게꾼>(1963), 아내와 함께 서울에 사는 자식들을 보러 왔다가 수모를 겪고 돌아가는 <굴비>(1963)의 시골 노인, 고된 일을 하며 아들을 성공시킨 <하루살이 인생>(1966)의 하역부, 두 명의 자식을 바다에 잃고도 어부 일을 버리지 못한 <만선>(1967)의 곰치, 옛정을 찾아 시골장터를 찾는 <역마(驛馬)>(1967)의 체 장수 노인 등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 비록 <로맨스 빠빠>(보험회사의 직원)나 <삼등과장>(운수회사 출장소장)의 경우처럼 그럴 듯하게 보인 도시의 샐러리맨도 불황으로 실직하거나 상관의 눈치나 보는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외관상 한복과 양복의 차이가 있을 분 이런 배역들이 김승호표 서민영화를 형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했다. [사진 6]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성실한 가장의 역할로 출연한 <로맨스 빠빠>의 김승호 [사진 7] 시대에 뒤떨어진 마부의 역할로 출연한 김승호, 좌측은 맏아들 역할의 신영균 그의 출연작 중에는 영화사에서 언급되는 대다수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단 한 번의 외도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시골 은행 간부의 인생유전기 <육체의 길>(1959)을 비롯한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박서방>, <로맨스 빠빠>, <마부>, <삼등과장>, <굴비>, <로맨스그레이>, <혈맥> 등 흑백영화와 노련한 형사 역을 맡아 사진작가(신성일)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헤쳐 나간 유일한 색채영화 <장군의 수염>(1968, 이성구)이 그 예이다. 이상의 작품은 바로 김승호 연기의 베스트10에 해당된다. [사진 8] <장군의 수염>에서 노련한 형사 역할로 출연한 김승호, 좌측은 김성옥 듬직한 체구와 선이 굵은 얼굴, 특유의 발성과 연기력으로 서민적 애환을 만들어낸 연기파 김승호는 오손 웰스다운 중후함과 찰리 채플린적 풍자의 양면성을 보여 주었다 (김종원, 「서민적 체취와 정서 녹여낸 늦둥이 국민배우: 김승호의 생애와 연기」 문화관광부 선정 문화인물 ‘김승호 회고전’ 책자) . 그의 영화 활동은 광복의 격동기에 시작되어 1950년대의 도약기를 거쳐 60년대에 피크를 이루며 대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어떤 시련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것을 서민의 삶과 정서로 녹여내려 했다. 당면한 현실을 이해타산으로 넘기려 하기 보다는 운명으로 수용하고 굽힌 자세로 헤쳐 나가려 했다. 때로는 <육체의 길>의 경우처럼 과장된 연기로 리얼리티를 떨어트리기도 했지만 <인생차압>의 이중생이나 <로맨스그레이>의 저명교수처럼 임기응변과 넉살로 극복하려 했다. 그래서 김승호 연기에는 해학적인 요소와 함께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짙게 묻어난다. 1.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삼애사, 1969, 157쪽)에는 전창근 감독의 <해방된 내 고향>(1947)이, 또 다른 그의 저서 『평전 한국영화인 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265쪽) 김승호 편에는 <밤의 태양>으로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고 기술하였다. 그 밖의 연구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