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화산장
- 감독
- 이두용
- 제작년도
- 1980
- 출연
- 남궁원, 김윤미, 전양자, 한은진, 신우철, 이해룡, 태일, 현길수, 박달, 한국남, 정규영, 주상호, 최석, 정지희, 국정숙, 한명환, 박부양, 오희찬, 황건, 유서연
이두용의 < 귀화산장 >은 1981년작이다. 대표작인 < 피막 >과 거의 동시에 개봉된 영화이다. 그 앞뒤로 < 최후의 증인 >과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가 개봉되었으니 이 정도면 이두용 경력의 정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어떤 재미를 기대해도 될까? 미안하지만 아니다. 재미를 따진다면 위 문장에 언급된 다른 작품을 건드리는 게 낫다. 개인적으로는 <최후의 증인>을 추천한다. 네 편 중 가장 통속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영화가 세월이 지나면서 가장 재미없는 영화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영화의 재미가 관객들의 가치기준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냥 재미만 있으면 되지”라는 말을 아주 쉽게 하는데 대부분 영화들이 유통기한을 넘기지 못하는 건 바로 그 “재미만 있으면 되지” 정신 때문이다. <귀화산장>은 <디아볼리크> 장르에 속하는 영화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디아볼리크>는 개봉 직후 엄청난 양의 아류작들을 생산해냈고 그들은 거의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냈다. 주인공은 살인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사건을 커버한다. 그 뒤로 주인공의 주변을 귀신일 수도 있고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는 희생자가 뒤를 따른다. 그 정체는 감독이나 작가 맘이다. (심지어 <디아볼리크> 리메이크들도 다들 결말이 제각각이다.) 이 영화들을 만든 감독들 중 일부는 심지어 클루조의 영화를 안 봤을 수도 있다. 원작이 번역되었으니 그걸 읽고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귀화산장>의 주인공은 한민우라는 의사다. 자기 이름을 단 의원을 갖고 있고 얼마 전에 중요한 과학적 연구를 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장모님은 신이 나서 사위에게 종합병원을 차려주겠단다(옛날 한국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남자들의 욕망 중 하나는 부잣집 딸과 결혼해 한몫잡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린 이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제목이 뜨기도 전에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미쓰 리, 그러니까 간호사 경아를 성폭행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경아는 임신했다고 알리고 한민우의 별장에 눌러앉는다. (별장은 7,80년대 한국 호러와 스릴러 장르의 단골 무대이다. 당시 영화를 자주 본 관객들은 그 건축학적 분위기에 익숙할 것이다.) 한민우는 실랑이를 벌이던 중 경아를 밀치고 경아는 죽는다. 한민우는 시체를 우물에 버린다. 하지만 경아의 시체는 사라지고 빨간 옷을 입은 경아 또는 경아의 유령이 면도칼을 휘두르며 한민우 주변을 맴돈다. 그렇다. 익숙한 <디아볼리크>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 마의 계단 >에서도 벌어졌다. 하지만 <마의 계단>은 남자 주인공의 치졸함을 단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었다. <귀화산장>에서는 어떻게든 남자에게 알리바이를 주려고 기를 쓴다. 그 중 가장 어이가 없는 부분은 분명 앞에서 벌어졌던 성폭행을 없는 것처럼 만들려는 시도이다. 알고 봤더니 그것도 경아가 성폭행으로 한민우를 몰고 갔고 경아는 아직도 한민우를 사랑하고 있고. 미치겠다. 영화는 당시 권력을 가진 남자들의 끔찍함을 모르지는 않는다. 이를 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가정부를 좀 건드렸다가 난처해진‘ 한민우 친구의 엄살 떠는 대사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과연 이 영화를 만든 남자들이 그 상황의 비열함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의심이 간다. 영화를 닫는 결정적인 대사가 “여자를 조심하라”라면 더욱 그렇다. 7,80년대 한국영화는 한국의 부당한 남성우월주의 시스템 때문에 고통받는 여자들을 연민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도배가 되어 있다. 소재만 따진다면 페미니즘 영화가 따로 없다. 하지만 이들 영화 상당수는 3S 정책의 결과물인 한국 에로 영화 장르와 겹쳐지기도 했다. 관객들은 영화 속 주인공 여자들을 동정하고 연민했다. 하지만 그들이 건드리기 쉬운 예쁘고 젊은 여자들이라는 사실에 흥분했다. 아마 그들은 주인공의 무력함 뿐만 아니라 비극적 결말에도 자극 받았을 것이다. 이두용이 <귀화산장>을 만든 남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본다면 관객들은 <피막>이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의 미심쩍은 부분을 관대하게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고 난 뒤에도 그럴 수 있을까.
※ 섬뜩한 이미지들이 많으니 심약한 분들은 주의를 요합니다 한국 공포영화의 주기는 파란만장하다. 196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장르는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상상력은 다양했다. < 악의 꽃 >(1961, 이용민)처럼 흡혈 식물을 소재로 한 영화도 있었고, < 불가사리 >(1962, 김명제)와 < 대괴수 용가리 >(1967, 김기덕)같은 괴수 영화도 있었다.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였던 이용민 감독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 살인마 >(1965)나 < 목 없는 미녀 >(1966) 같은 걸작을 내놓았다. < 월하의 공동묘지 >(1967, 권철휘)는 한국 공포영화의 정전이 되었고, 유현목 감독의 <한>(1967)은 큰 흥행을 기록하며 ‘옴니버스 호러’의 전통을 세웠고 속편으로 이어졌다. 당대 최고의 영화사였던 신필름도 이 장르에 결코 무관하지 않았는데 < 천년호 >(1969, 신상옥), < 사녀 >(1969, 신상옥)는 당대의 흥행작이었다. 박윤교 감독의 <마계의 딸>(1983) 1960년대에 ‘준 메이저’ 장르로 시작한 한국 호러는 197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용민, 박윤교, 이유섭, 김인수 등의 감독들이 꾸준히 작품을 이어갔고 사극의 서브 장르로서 1960년대의 유산을 양적으로 확장시켰다. < 설야의 여곡성 >(1972, 임원직), < 며느리의 한 >(1972, 박윤교) 등이 이때 등장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크리처 쪽으로 트렌드 변화가 왔다. < 반수반인 >(1975, 김기)의 늑대 인간, < 정형미인 >(1975, 장일호)의 고양이 인간, < 원무 >(1976, 박윤교)의 미이라 등 더 이상 소복을 입지 않는 공포영화가 등장했다. 대만, 홍콩, 필리핀, 태국 등과도 합작이 활발히 이뤄졌다. 남자의 등을 어루만지는 귀신의 손길. <삼국여한>(1982. 김인수)의 한 장면. <깊은 밤 갑자기>(1981. 고영남)의 이기선은 세련되면서도 당돌하지만 한편으론 백치미를 지닌, 복합적 이미지의 배우였다. 1980년대 마지막 호러인 <하녀의 방>(1987. 김인수). 이 시기에 이르면 호러와 에로의 경계를 거의 무너진다. 1980년대 호러의 가장 큰 특징은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exploitation film)의 경향이다. 즉 ‘노골적인 상업영화’라는 강력한 상업적 의지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진행된 한국영화의 산업적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1970년대에는 크리처와 합작이 그 타개책이었다면, 1980년대엔 에로티시즘과 하드고어였다. 1980년대 호러에 새로운 것은 없다. 대신 표현 수위의 강도를 상승시키며 생존하려 했다. ‘여인의 한과 피맺힌 복수’라는 전통적 가치는 오롯이 살아 있지만, 그 정서와 방법론과 비주얼은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에로틱 호러’의 창궐은 시대정신에 발맞춘 것이었다. < 애마부인 >(1982, 정인엽)을 기점으로 충무로에 불기 시작한 ‘살색 열풍’은 모든 장르를 잠식했다. 단지 ‘야한 영화’가 양산되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크게 보면 ‘선정주의’의 확장이었다. 성적 표현뿐만 아니었다. 액션 스펙터클이든 폭력 묘사든 감정 표출이든 ‘80년대식 표현’은 이전에 비해 한두 눈금 더 올라가 있었고, 호러 장르는 그 표현에 최적의 토양이었다. 당대의 에로티시즘 영화와 일맥상통했던 ‘1980년대산 호러’는 비주얼의 관능성과 폭력성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김인수 감독은 상징적 인물이었다. 1990년대엔 비디오 시장으로 건너가 <젖 소부인 바람났네 >(1995)를 연출하며 거대한 족적을 남긴 그는, 1980년대에 마치 그 예행연습이라도 하듯 끈적끈적한 공포영화를 선보였다. 그가 1982년에 연출한 < 삼국여한 >의 예고편 문구인 “치정과 욕정이 얽힌 성인용 공포 드라마”는 당대 공포영화 감독들의 좌우명이었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옴니버스 호러였던 <삼국여한>은 단순한 에로티시즘이 아니라 도착적 성을 다룬 ‘섹스 과잉 공포’로서 여기에 하드고어를 결합했다. 그의 < 미녀 공동묘지 >(1985)에는 시체와의 섹스까지 등장하니, 1980년대 한국 호러의 성적 상상력은 에로티시즘에서 사도마조히즘을 거쳐 네크로맨틱에 이르는 여정이었던 셈이다. ‘호러 장인’ 박윤교 감독의 < 춘색호곡 >(1981)의 오프닝도 ‘섹슈얼 호러’라 불러도 될 만큼, 그의 전작들과는 확연히 다른 톤이었고 < 천년백랑 >(1983)에서는 근친적 삼각관계를 보여준다. <춘색호곡>과 <한녀>(1981, 이유섭)의 ‘귀신 액션’. 스타일과 비주얼도 더욱 자극적이며 적나라한 양상을 띠었다. 그 결과물 중 하나는 호러와 무협 액션의 결합이었다. 이 시기 귀신들에게 텀블링은 기본이었으며 피아노 줄을 달고 경공술을 선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춘색호곡>은 대표적이며, 한중일 콘셉트의 옴니버스 영화인 만큼 <삼국여한>은 중국식 무협과 사무라이 액션 등을 선보였다. 남기남 감독의 < 흑삼귀 >(1985)는 강시 영화를 좀 더 하드고어 버전으로 만든 듯한데, 1970년대 액션 전문 배우였던 권영문이 등장하며, 도사 캐릭터의 활약이 펼쳐진다. <천년백랑>의 후반부는 호러보다는 무협 액션에 가깝다. <깊은 밤 갑자기>는 다양한 광학 효과로 그로테스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효과는 1980년대 호러의 클리셰였다. <천년백랑>에서 사람이 여우로 변하는 장면. 디졸브를 이용해 꽤 그럴듯하게 변신을 표현한다. <공포의 축제>와 <월하의 사미인곡>. 특수분장의 기술적 발전을 토대로 호러 비주얼을 만들어낸다. <삼원녀>의 잘린 팔과 <제4의 공포>의 잘린 머리. 다양한 효과들이 호러 장르의 시각적 쾌감을 위해 사용되었다. 1980년대 호러는, 지금 보면 약간 조잡하게도 느껴지지만 다양한 광학 효과를 통해 기괴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화면을 흐리는 블러 효과를 비롯, 렌즈를 통해 왜상을 만들고 프리즘 효과를 냈으며, 이중노출이나 디졸브 등을 통해 변신이나 빙의를 표현하기도 했다. 여기엔 대부분 자극적인 사운드가 결합되어 그로테스크한 기운을 더했다. 특수효과와 특수분장도 빼놓을 수 없다. 소복 소매에서 흰 연기가 나오는 <원한의 공동묘지> 스타일의 초보적 수준도 있었지만, 때론 실감나는 수준을 보여주었다. 이 분야의 기술적 발전 역사에서 1980년대는 초기에 해당하는데, 자본의 취약성에 때문에 그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당시 공포영화가 원하던 ‘쎈’ 표현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켰다. 신체를 절단하고 괴물 같은 얼굴을 필요로 했던 하드고어 콘셉트가 대거 등장할 수 있었던 건 그런 이유다. 특히 김철석(특수효과)과 장인한(분장)이 만난 < 월녀의 한 >(1980, 김인수), < 마계의 딸 >(1983, 박윤교), < 제4의 공포 >(1984, 노진섭), < 월하의 사미인곡 >(1985, 박윤교) 등은 이 분야의 초석이 된 작품들이다. 기술적 발전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영화도 있다. 김인수 감독의 <제4의 공포>와 < 공포의 축제 >(1986)는 기형적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영화다. < 한녀 >(1981, 이유섭)은 경성 시대를 배경으로 성형 수술을 소재로 한다. < 삼원녀 >(1981, 김시현)와 <삼국여한>엔 팔이나 머리가 잘리는 신체 절단 요소가 있으며, <월하의 사미인곡>이나 <여곡성> 등 1980년대 중반 사극 호러에 오면 더욱 괴물 같은 메이크업을 선보인다. <관 속의 드라큘라>와 <흡혈귀 야녀>. 서양의 뱀파이어 캐릭터는 1980년대에 직접 도입되거나 귀신으로 변형된다.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인 <괴시>, 좀비 연쇄 살인마가 등장하는 <육체의 문>. <제4의 공포>와 <여곡성>. 메이크업을 통한 섬뜩한 ‘괴물적 캐릭터’의 탄생. ‘스네이크플로이테이션 무비’(snakeploitation)라고 불러도 무방할 <인사대전>. 이 영화에서 뱀은 무차별한 학살의 대상이며, 건물 한 채를 혼란에 빠뜨리는 재난의 원인이며, 인간과 액션 대결을 하는 가공할 만한 크리처다. 1960~70년대의 전통적 공포영화에서 벗어나 더욱 자극적인 요소로 호소하려는 1980년대 호러의 노력 중 하나는 이국적 요소의 도입이었다. 중국인 며느리의 한을 담은 <삼원녀>나 중국과 일본의 요소를 끌어들인 <삼국여한>, 혹은 국적 불명의 <흑삼귀> 등은 대표적이다. 여기에 한동안 한국영화에선 선보이지 않았거나 최초로 등장하는 호러 크리처들이 등장했다. 흡혈귀들이 대표적인데, 사극 공포영화에서 여자 귀신들은 종종 흡혈을 하며 <삼국여한>에는 관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아먹는 귀신마저 등장한다. 주목할 만한 영화는 < 관 속의 드라큘라 >(1982, 이형표)다. 영미권의 호러 캐릭터인 드라큘라를 도입해 한국적 맥락에서 퇴마를 가한다. < 흡혈귀 야녀 >(1981, 김인수)는 기존의 사극 귀신에 흡혈의 모티브를 두드러지게 결합시킨다. 좀비 영화도 등장한다. < 괴시 >(1981, 강범구)는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로 평가되는데, 해충 박멸을 위한 초음파 실험이 시체들을 깨어나게 한다는 설정이다(방사능이 원인이 되었던 조지 로메로의 <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1968)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기환 감독의 <육체의 문>(1981)엔 좀비 연쇄살인마가 등장해 여자들을 연달아 살해한다. <제4의 공포>엔 화상으로 흉측한 얼굴을 지니게 된 남자가 마치 미이라처럼 얼굴을 붕대로 휘감고 등장하며, <여곡성>엔 괴물처럼 변해버린 마님이 등장한다. 독사에 물린 여자가 뱀파이어가 되는 < 몽녀한 >(1984, 강범구)과 기형 인간이 등장하는 <공포의 축제>도 언급할 만한 영화다. 동물들도 한몫 했다. 고양이, 뱀, 까마귀 등의 동물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한의 매개체’가 되는 전통적 소재였는데 1980년대에 와서는 더욱 끔찍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바로 ‘학살’의 대상이 된 것. 홍콩과의 합작 영화인 < 인사대전 >(1983, 김선경)은 < 홀로코스트 >(1980, 루게로 데오타도)를 연상시킬 정도로 수많은 뱀들을 무차별로 죽인다. <원한의 공동묘지>에선 수많은 고양이들이 죽임을 당하는데, 이런 살풍경은 이전 호러에선 좀처럼 접하기 힘든 잔인한 스펙터클이었다. <여곡성>엔 전설의 ‘지렁이 국수’ 장면이 있다. <망령의 웨딩 드레스>의 계단 신. 김기영 감독의 미장센을 연상시킨다. <깊은 밤 갑자기>에서 무당의 딸인 하녀는 주술적 위력과 함께 섹슈얼한 힘으로 집을 장악한다. 1980년대 공포영화의 트렌드 중 하나는 별장이나 외딴 곳의 저택을 배경으로 하는, 굳이 이름 붙인다면 이른바 ‘맨션 호러’의 등장이다. 할리우드의 ‘하우스 호러’가 집에 깃든 악령이나 저주로부터 섬뜩한 기운을 가져온다면, ‘맨션 호러’는 집 자체에 영혼을 부여하진 않는다. 대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젊은 여자와 중년 남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며, 여기서 억울한 죽음과 복수극이 벌어진다. 그런 면에서 < 하녀 >(1960, 김기영)나 < 마의 계단 >(1964, 이만희) 같은 1960년대 한국 스릴러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할 듯하다. 1980년대 ‘맨션 호러’는 공포 장르의 공간을 확장하려는 의도 속에서 과거의 유산을 되살리는 시도였다. 그 전형은 < 망령의 웨딩드레스 >(1981, 박윤교)다. 회사를 운영하는 남자는 우연히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여자를 자신의 별장 하녀로 고용한다. 그녀는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마치 <하녀>의 하녀처럼 남자를 차지하겠다고 위협한다. 이에 남자는 여자를 죽이고 우물에 던져버리지만, 마치 <마의 계단>처럼 그녀는 다시 출몰한다. 귀신인지 산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구도는 < 귀화산장 >(1981, 이두용)에서 병원장과 간호사의 관계로 변주되며, <깊은 밤 갑자기>에선 주술적 요소가 가해진다. 특히 <깊은 밤 갑자기>는 전원 저택의 안주인(김영애) 캐릭터에 초점을 맞춰 망상 속에서 미쳐가는 여성을 보여준다. <살인마>를 리메이크 한 < 목없는 여 살인마 >(1985, 김영한). 외딴 폐가와 병원을 오가는 <제4의 공포> 등도 같은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작품들. 한편 < 악녀의 밀실 >(1984, 김선경)이나 < 요색유희 >(1985, 강대선)는 집에 깃든 악령의 존재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1980년대, 작게나마 호러 전문 배우진이 형성된다. 정세혁과 박암은 대표적. 사진은 <망령의 웨딩 드레스>와 <삼국여한>이다. <미녀 공동묘지>의 진봉진과 곽은경. 그들도 1980년대 한국 공포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우들이다. 1980년대 호러엔 이국적 이미지의 배우들이 종종 등장했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괴시>의 유광옥, <여곡성>의 홍명진, <월녀의 한>의 박병순, <제4의 공포>의 정현숙. 서양의 호러가 가톨릭 사제를 주로 퇴마사로 내세운다면, 한국의 공포영화엔 대사나 법사의 존재가 있었고 십자가 대신 불교의 상징인 ‘卍’(만)이 있었다. <여곡성>과 <월녀의 한>에 등장하는 ‘卍’. 1980년대 한국 공포영화는 흥행을 위해 좀 더 강렬한 이미지와 스토리로 관객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영화산업의 전반적인 침체와 낙후한 자본 구조 속에서 장르적 진화를 이루지 못하고 클리셰를 반복했다. 그 결과 1980년대 중반이 되면 충무로에서 더 이상 호러는 생산되지 않는 멸종 상황에 이르며, 이 암흑기는 < 여고괴담 >(1998, 박기형)이 등장할 때까지 이어진다. 10년 넘게 제작되지 않은 셈인데, <여고괴담> 이후 2000년대 초중반에 왕성하게 부활한 호러는 2010년 이후엔 다시 침체기에 들어섰다. 한국영화의 수많은 장르들 중에서 가장 격렬한 흥망의 사이클을 보여주는 장르, 호러. 지금은 잠시 침체되었지만 언제 또 새로운 모습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며 등장할지 모른다. <원한의 공동묘지>의 마지막 신을 장식하는 자막은 그 이유를 잘 설명한다. “원한은 죽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 가슴속에 맴돌고 있다.”
한국 장르 영화의 계보에서 이두용 감독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는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했고, 그 모든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주었다. ‘액션’이 주종목이었지만, 경력 초기의 멜로드라마도 당대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최후의 증인>(1980) 같은 미스터리나 <귀화산장>(1980) 같은 호러 스릴러에서도 그의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병태의 감격시대>(1975)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만들기도 했고, <경찰관>(1978), <장남>(1984) 같은 리얼한 톤의 드라마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시대극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궁중 사극인 <내시>(1986)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같은 엄격한 형식미와 <뽕>(1985) 같은 서민 희극을 오가며 수작을 뽑아냈다. <초분>(1977), <물도리 동>(1979), <피막>(1980) 등에선 샤머니즘이라는 테마를 다루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인 <아리랑>(2003)은 흑백 무성영화였다. 한국영화사에서 이두용 감독처럼 넓은 스펙트럼을 지녔던 감독은 흔치 않다. 물론 이러한 다재다능함을 긍정적으로만 볼 순 없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는 생존을 위해 영화산업이 요구하는 ‘제품’을 끊임없이 찍어내야 했던 감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그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1970~80년대는 한국영화의 거대한 모순기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하강기를 맞이했다. 1973년에 제정된 ‘유신영화법’은 국책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진흥공사’를 설립시켰다. 외화 수입이 제한된 상황에서, 영화 산업은 흥행성이 보장된 외화 쿼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허가제에 의해 살아남은 몇몇 영화사들은 쿼터 확보를 위해 한국영화를 만들었고 ‘방화’라는 이름으로 비하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시스템에 철저히 적응해 기능공이 되는 것이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도대체 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일관성이 없는” 필모그래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흥행 감독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데뷔 초기 합동영화사의 전속 감독이 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반복되는 장르 영화 속에서 서서히 장인이 되었다. 다행히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고 1970년대 말부터 서서히 작가의 영역으로 옮겨 갔다. 이것은 특유의 기질 때문이었다. 이두용 감독의 인생과 영화 경력을 살펴보면, 그에겐 때론 무모하게 보일 정도의 개척자 정신이 있었다.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그는 멈추는 순간 뒤처진다는 걸 깨달았다. 기본적으로는 산업의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이두용 감독은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갔다. 당대의 트렌드였던 신파 멜로로 시작한 그의 경력은 태권도를 기반으로 한 발차기 액션 영화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후 그는 액션 연출력을 발판으로, 다른 영화인들은 모두 충무로라는 우물 안 개구리던 시절에 <아메리칸 방문객>(1976)으로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시도한다. <피막>으로 베니스영화제에,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에 초청 받았으며, 한국 영화감독으로는 최초로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작업한 <침묵의 암살자>(1988)를 내놓았다. 1980년대엔 자신의 제작사를 차렸고 이후 영화 수입과 극장 경영까지 겸했다. 비록 무산되었지만 1980년대엔 충무로 감독으로서 TV 영화를 연출하려 시도했고, <아리랑>을 들고 북한에 건너가 남북 합작 프로젝트를 논의하기도 했다. 흥행성과 작품성, 창작 활동과 비즈니스, 장르 영화와 작가 영화…. 그의 좌충우돌 영화 인생은 언제나 양 극단 사이에서 진동했다. <최후의 증인> 같은 영화는 검열에 의해 사지절단 되었고, IMF로 극장 사업을 접어야 했으며, 제작자의 외화 쿼터를 위해 봉사하듯 영화를 찍기도 했지만,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었다. 우리가 이두용의 영화 인생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이 부분, 즉 장르 영화 장인으로서 지녔던 생명력이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만의 주제 의식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국의 영화제에 의해 먼저 발견된 후 한국의 평단에 의해 평가되었다. ** 이두용 감독은 1941년(호적엔1942년)에 서울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였고, 아버지는 간장 공장 기술자였다. 학창 시절엔 친구들과 극장에 몰려다니던 활극 영화광이었고, 미술에 뛰어난 소질을 지닌 학생이었다. 영화에 대한 꿈을 점점 키워나가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우연하게 충무로의 일원이 된다. 당시 미술 선생이 영화 포스터 그리는 일을 했는데, 심부름으로 동성영화사의 만리동 스튜디오에 갔다가 처음으로 영화 현장을 접한 것. 이후 그는 이강천 감독 연출부에서 스크립터 일을 하며 영화계에 발을 내딛었고, 1950년대 말에 몇 편의 영화를 거치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짧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스물두 살의 나이에 감독을 꿈꾼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을 설득해 거의 집 한 채 값의 거금을 받아 <여승>이라는 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연출했던 것. 하지만 극장 배급을 책임지기로 한 흥행사가 돈을 가지고 도망가면서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금전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했지만 교훈은 있었다. 제대로 영화를 배운 후 감독이 되어야겠다는 깨달음이었다. 제대 후 이두용 감독은 세 명의 감독 연출부에서 일하며 많은 걸 배웠다. 전홍직 감독은 어떻게 해야 영화가 흥행하는지 잘 알고 있는 ‘기획자’였다. 일본 유학파인 김수동 감독은 콘티의 정확성과 압축해서 명료하게 표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정소영 감독은 배우의 감정을 끌어내는 데 탁월했다. 무려 7편의 영화를 함께 한 정소영 감독은 이두용 감독의 데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정 감독은 <미워도 다시 한 번>(1968)으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며 신파 멜로드라마의 트렌드를 만들어냈는데, 이두용 감독의 첫 작품 <잃어버린 면사포>(1970)도 그 계열이었던 것. 기획자 방규식은 정소영 감독의 제작부장이었고, 시나리오 작가 김수현도 정소영 사단의 일원이었다. 이 영화로 시작해 <작은 새>(1974)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멜로는 당대의 트렌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이었다. 가부장제에서 신음하는 여성의 비극적 운명을 강조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성애를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대신 여성의 상황을 더욱 가혹하게 몰고, 그 기저에 ‘가난’이라는 경제적 계급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테마는 <초분> 이후 일련의 샤머니즘 영화와 사극으로 이어지며 변형된다. 여성의 비극을 개인사의 차원이 아닌, 역사와 사회에 의해 구조화된 모순의 결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두용 감독의 전성기는 액션 장르와 함께 찾아온다. 변화의 원인은 신파 멜로에 대한 염증이었고, 좀 더 영화적인 기능을 살리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액션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는 외국 시장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는데, 이것도 액션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되었다. 영세한 제작 환경을 극복하고 외국 관객들에게 관심을 끌 만한 영화는 액션 밖엔 없었다. 박노식이 출연하는 <날벼락>(1971), 호러와 무협이 결합된 <야오귀>(1971), 범죄 액션 <체포령>(1972), 전쟁 액션<홍의장군>(1973) 등이 있었지만, 진짜 시작은 <용호대련>(1974)이었다. 그는 대규모 오디션을 통해 액션 배우를 꿈꾸는 전국의 유단자들을 끌어 모았고, 재미 교포인 ‘챠리 셸’ 한용철을 주인공으로 발차기를 중심으로 하는 태권도 액션 영화를 발명했다. 1974년 한 해에만 <용호대련>,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분노의 왼발>, <돌아온 외다리(속)>, 그리고 <배신자>까지 한용철 주연의 액션 영화 6편이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들은 당대의 신드롬이었다. 하지만 한용철은 이두용 감독과 결별했고, 이후 이두용 감독은 강대희와 <무장해제>(1975)를, LA의 태권도 사범인 정준(준 청)과 <아메리카 방문객>(1976)을 찍는다. <비밀객(속)>(1976)부터 <해결사>(1981)까지는 신우철과 안태섭이 액션을 맡았고, <돌아이>(1985)는 당대 최고의 아이돌 가수였던 전영록을 카메라 앞에 세워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흥미로운 건 이두용 액션이 지닌 사회적 의미였다. 유신 헌법 이후 갈수록 엄혹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호쾌한 발차기가 작렬하는 그의 액션은 대중에게 정서적 탈출구였고, 오승욱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뭔가에 억눌린 모든 것을 폭발시키는 파워풀한 액션”이었다. 배우들이 “으악!” 소리와 함께 나뒹군다고 ‘으악새 영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두용 표 액션’의 힘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무장해제>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실제 왕궁에서 촬영되었으며, <해결사>는 세트 없이 도심 한가운데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액션을 보여준다. <돌아이>는 카 체이스 같은 현대적 액션을 시도했다. *** 액션은 이두용 감독을 대표하는 장르지만 그는 종종 회의를 느끼곤 했다. 액션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시선은 멸시에 가까웠다. 이때 우연히 제안 받은 <초분>(1977)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커다란 분기점이 된다. 무속적인 소재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이 시작되었으며, 이 영화들을 통해 ‘억압 받는 인간’이라는 테마가 드러났다. 그리고 사극에선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저항하는 자들을 통해 그 테마는 더욱 명확해진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가 대표적이며, 특히 이 영화의 정제된 스타일은 이두용 감독의 미장센이 정점에 올랐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세계무대에 알려진 것도 <초분> 이후 영화들 덕분이다. <피막>은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부문 특별상에 수상하는 I.S.D.A.P 상을 수상했고,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 받는다. 서구 비평가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한국영화는 바로 이두용의 작품들이었으며, 혹자는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 영화와 비교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의 시선엔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했지만, 이전까지 국내의 그 어떤 평론가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두용 감독의 텍스트는 서구를 경유해 비로소 자국의 평단을 자극했다. <경찰관> 같은 리얼한 톤의 서민 드라마나 가족이라는 테마를 진지하게 접근한 <장남>, 실화를 바탕으로 인권 문제를 제기한 <청송으로 가는 길>(1990), 그리고 노부부의 삶을 다룬<애>(1999) 등 장르적 요소를 제거하고 정직하게 드라마로 승부할 때도 이두용 감독의 연출력은 빛난다. 특히 <장남>은 가족을 다룬 한국영화의 계보에 아직도 최고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두용 감독의 가장 위대한 영화적 유산은 <최후의 증인>일 것이다. 당대 충무로의 최대 역량이 결집되었던 이 영화는 누군가의 밀고로 혹독한 검열을 거쳐야 했고, 제작자와 감독은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영화는 한 시간 가까이 잘려나간 상태에서 상영되었고, 개봉 날 극장에 들어갔던 이두용 감독은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이후 한 세대 가까이 잊혀져있던 이 영화는 2006년 감독판으로 복원되면서 지금의 관객들과 다시 만났다. 전설이 현실이 되어 눈 앞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두용 감독은 2002년에 만든 60번째 영화 <아리랑>를 마지막으로 현업에서 물러났다. 대사 없이 초당 18프레임의 동작으로 진행되며 변사의 설명이 곁들여진 흑백 영화다. 이후 오랜 기간 동안 품어 왔던 <월광무> 프로젝트를, 남북 합작 방식으로 완성하기 위해 추진했지만 상황은 쉽지 않았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에 대해서는 애증이랄까…. 영화 때문에 겪은 갖가지 일들에 대해 후회는 안 하지만, 이젠 뭔가 내 직업에 대한 어떤 결과를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영화고, 내 존재의 이유를 영화를 통해서 드러내야 한다는 것. 영화를 통해 삶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 영화로 내 삶의 큰 매듭을 짓고 싶다.” 부디 노장의 작은 소망이 이뤄지길 기원한다. [사진1] 조감독 시절의 이두용 감독. <속 미워도 다시 한 번>(1969) 현장이다. 오른쪽부터 주연을 맡은 신영균, 정소영 감독, 이두용 감독이다. 이두용 감독은 정소영 감독 연출부로 7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사진2] 1970년 <잃어버린 면사포>로 데뷔한 이두용 감독은 한 동안 신파 멜로드라마를 만든다. <댁의 아빠도 이렇읍니까>(1971)는 두 번째 영화로 전작의 흥행세를 이었다. 배우 문희, 황정순과 스태프들 그리고 이두용 감독(맨 왼쪽)이 함께 했다. [사진3] 1974년 한 해 동안 이두용 감독은 <용호대련>을 시작으로 여섯 편의 태권도 영화를 내놓았고, 그 모든 영화에서 발차기의 주인공은 ‘차리 셸’ 한영철이었다. 사진은 <돌아온 외다리>(1974)의 한 장면. [사진4] 이두용 감독의 작품 세계는1977년 <초분>부터 변화한다. 이전까지 액션을 중심으로 한 장르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 영화부터 그는 미스터리 서사를 토대로 한 드라마의 세계로 접어들며 샤머니즘과 ‘한’의 테마를 다룬다. [사진5] 당대의 액션 스타 장동휘는 액션 전문 감독 이두용이 자신을 기용하지 않는 데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이두용 감독은 <경찰관>(19789)과 <선배>(1979)를 통해 장동휘의 진짜 매력을 드러냈다. [사진6] 이두용 감독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최후의 증인>(1980). 하지만 개봉 당시 이 영화는 검열에 의해 사지절단 되었고, 2003년이 되어서야 감독판으로 대중과 늦은 재회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2016년 4K로 디지털 복원되었다. [사진7] <피막>(1980)은 한국영화가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받은 이 영화는 감독 부문 특별상인 I.S.D.A.P를 수상했다. [사진8] <피막>(1980) 현장의 이두용 감독과 주연을 맡은 유지인. <생사의 고백>(1978)으로 이두용 감독과 인연을 맺은 유지인은 이 영화에서 강렬한 복수의 주인공이 된다. [사진9] <해결사>(1981)는 세트를 벗어나 리얼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도시 액션이다. 신우철과 황정리가 주인공을 맡았다. 숨겨진 걸작 중 하나이며, <돌아이>(1985)를 예견하게 하는 작품이다. [사진10]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는 최초로 칸영화제에 초청받은 한국영화였다.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되었고, 외국 평단의 큰 관심을 받았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장면이다. 통역 옆의 왼쪽이 이두용 감독이다. [사진11]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로 하와이영화제를 찾았을 때 해외 영화인들과 함께 한 이두용 감독. 왼쪽부터 홍콩의 임호 감독,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 중국의 장이모우와 첸카이거 감독,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 그리고 이두용 감독. [사진12] <낮과 밤>(1984)은 말 그대로 5대양6대주를 누비는 영화였고, 해외 로케이션에 강한 이두용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였다. 아프리카 현장에서 마사이족과 함께 촬영하는 모습. [사진13]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장남>(1984)은 이두용 감독의 자전적 영화이자, 한국 가족 영화의 걸작 중 한 편이다. 형제로 나오는 신성일, 김희라와 함께 현장에서 리허설을 하는 모습. [사진14] 1970년대 ‘발차기’에서 시작한 이두용 감독의 액션 연대기는 1980년대 이르러 <돌아이>(1985)에 도착한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카 액션과 패션 감각을 선보였던 영화로, 전영록은 이두용 감독의 새로운 액션 히어로가 된다. [사진15] <뽕>(1985)에서 ‘안협네’ 역을 맡은 이미숙. 나도향의 단편을 각색한 윤삼육의 시나리오는 여러 제작사를 돌아다니다가 이두용 감독을 만났고,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져 큰 흥행을 기록했다. 아직도 꾸준히 언급되는 ‘컬트’ 영화다. [사진16] 자신의 제작사 ‘두성영화’를 차린 이두용 감독은 창립 작품으로 <내시>(1986)를 만든다. 그의 최고 흥행작으로, 궁중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반란을 그린다. 당국의 정치적 해석으로 심의가 나지 않아 개봉에 애를 먹기도 했다. [사진17] 한국영화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할리우드에 초청 받아 연출한 <침묵의 암살자>(1988) 현장. 미국에선 <Silent Assassins>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교포 배우인 정준(준 청)과 필립 리가 출연한다. [사진18] 밑바닥 삶을 사는 인간을 향한 리얼한 시선. 걸레 스님 중광을 캐스팅 한<청송으로 가는 길>(1990)은 이두용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독특한 지점이다. 모스크바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사진19] IMF 시기, 두성영화의 마지막 작품으로 만든<애>(1999). 남궁원과 이경희가 노부부로 등장한다. <장남>에 이은 또 하나의 가족 영화로, 제대로 된 개봉을 거치지 못하고 묻혀 버린 수작이다. [사진20] 2002년에 만든 <아리랑> 현장의 이두용 감독. 나운규 시절의 영화 미학, 즉 흑백과 무성의 스타일로 만들었다. 노장의 녹슬지 않은 솜씨가 돋보인다. 이두용 감독의 60번째 영화다. * 이 글은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과 부산영화제가 공동 제작한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도서 『장르의 해결사 : 이두용』을 토대로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