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늪의 참개구리(인형영화)
- 감독
- 리인철, 손종권
- 제작년도
- 1999
사진: “ 71 Fragmente einer Chronologie des Zufalls ”, IMDb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종종 같은 꿈을 반복해서 꿀 때가 있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과 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같은’ 꿈이란 것에 몇 가지 패턴이 있다는 걸 발견하는데, 이를테면 다른 장소, 다른 시간 안에서 같은 서사가 진행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서사의 인과가 불분명한 채로 이미지만 반복되어 같은 꿈으로 남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험에서 남겨진 찝찝한 신비로움은 꿈에서 깨고 난 ‘상태’ 그 자체에 대한 공통된 감각이라 입을 모았다. 마치 어마어마한 양의 끈적거리고 미끄덩거리는 무언가가 나를 결박하고 있는 것만 같던 그 찝찝함은 아마 삶에 대한 미스터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꿈 속 이미지의 실체보다는 이미지를 인식한 후의 상태가 보다 더 큰 것을 남겼다. 파편화된 이미지는 여백을 활성화 시키고 그 여백 사이로 이미지를 인식한 자만의 사유가 들어갈 틈이 생긴다. 이때 꿈은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니기도 하다. 미하엘 하네케의 <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 >(1994)은 스무 살 무렵 어느 극장의 기획전에서 본 영화이다. 하네케의 영화는 매섭고 잔인한 구석이 있어 구태여 찾아 보거나 크게 좋아하지 않았더랬다. 하지만 ‘우연의 연대기(Chronologie des Zufalls)’와 ‘71개의 단편(71 Fragmente)’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내 멋대로 어떤 이미지들을 나열하게 만들어 관람을 미루지 않고 극장으로 향하게 한 이유가 됐다. (덧, 관람 후에 이 영화가 폭력의 3부작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았고, 역시 제목만 보고 상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의 영화였지만서도)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은 우연을 연대기 순으로 펼쳐 보임과 동시에 그 우연들의 연대가 일으킨 어떤 비극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진: “ 71 Fragmente einer Chronologie des Zufalls ”, IMDb 영화는 흩어진 71개의 씬(조각)들을 시간(연대기) 순으로, 어떤 비극이 초래되기까지 일상의 면면들을 다소 건조하고 냉랭한 온도로 보여준다. 비극을 점점 앞당기는 파편들 중 막스(루카스 미코)가 올려 보던 고층 빌딩과 차가운 물이 고인 바닥을 연이어 보여주던 두 컷의 서스펜스는 무섭게 남아있다. 그의 마음에 죽음이 어떤 형태로 방아쇠를 당길지 내내 아슬아슬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마음은 라두(가브리엘 코스민 우르데스)라는 소년이 불완전형의 희망을 품고 국경을 건널 때의 모습과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러 차로 향하던 막스의 모습과 대조되어 그들을 부감으로 내려다 보던 우리에게 불완전했던 희망을 비극으로 완성시킬 권한과 이에 대한 냉소적 시각을 함께 부여한다. 이렇게 71개의 씬들이 담고 있는 서로 전혀 무관한 인물들의 이야기는 뉴스의 한 꼭지, 한 문장의 세그먼트로 그저 둔감하게 마무리된다. 전쟁 속 아비규환의 모습들과 사실 여부를 떠나 미디어의 콘텐츠로 소비될 뿐인 세상의 크고 작은 소식들이 영화 안에서 계속해서 중계되었는데, 지극히 평범했던 일상 또한 나란히 그 안에 편입돼 버리고 만다. 파편화된 서사의 나열을 통한 다각적 프레이밍 형식은 채널의 소유권을 관객에게 이전시키며 영화 속 인물들의 퍼즐을 현실의 스펙터클로 자리잡게 만들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관객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흩어진 퍼즐들 사이의 암흑을 비집고 들어갈 사유의 주체가 결국 관객이라는 지점에서, 이 영화는 막스와 라두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이 영화의 미디어 속 폭력을 응시하는 데에 수동적 소비의 지양을 재촉하며 부디 오늘 먹을 물고기는 제발 스스로 던진 그물로 건져 올리라고 권하는 도덕적 질문보다도, 영화가 취한 형식적 경로가 영화에 대한 큰 인상으로 더 깊게 남아 있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가 모든 면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평범한 일상에 대한 세심한 설계로 외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미시적 접근을 통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내적 시각의 개입을 거시적으로 소유하게끔 설계한 영화라는 점이, 내가 감응하는 영화의 형태를 그리는 데에 있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진: “71 Fragmente einer Chronologie des Zufalls”, IMDb ( 좌 , 우 )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도 여전히 구조적으로나 인과적으로 이미지 사이에 발생하거나 끼어들 수 있는 틈 혹은 여백을 중요하게 여기며 지내고 있다. 조금 더 과격하게는 집착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삶의 무작위성을 내포하고 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또 여백이라는 것을 생성하기 위해 이토록 애를 쓰는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우연한 것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을 때가 잦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연의 연대기로 설명해야만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 환상과 희망이랄 것이 그렇게 거창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작은 것들의 프랙털을 파고드는 취미를 생성시킨 정도였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동양화에서는 빈 공간의 여백을 먹이 지난 자리의 존재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로 다룬다. 그 사이에서 이미지와 여백이 관계하며 획득하는 힘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가 동양화에 매료되어 공부를 했던 이유기도 하다.) 어떤 이유든 간에 기능하며 존재하는 모든 관계들이 여백과 함께 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늘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니기도 한 종류의 감각들을 무작위적으로 쫓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틈에 자리잡았던 사유들이 쌓이고 쌓여 보이는 이미지와 함께 불확정적인 어떤 엔딩으로 향한다. 어떤 엔딩으로 향할 때 이 모든 이미지들의 연대가 기능하도록 실현시킨다는 건 정말이지 멋진 일이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2024) 중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 글을 쓸 때 이야기와 함께 인물들이 머리 속에서 춤을 추고 있을 때가 있다. 그들이 추는 춤에 나까지 신이나 음악을 틀어주는데 간혹 음악을 잠깐이라도 잘못 틀어버리면 어느샌가 그들은 사라지고 없다. 올해 초, 지난해 촬영한 두 번째 장편을 편집하고 있었다. 삶의 파편들이 추는 춤에 맞춰 음악을 트는 일이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을 떠올린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 파편들이 기능하며 관계 맺었던 연대가 떠올랐다. 그 경로를 통한 무형의 엔딩은 관객만이 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영화는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닌 것이다. 같은 꿈이 남긴 그 찝찝한 신비로움은 어쩌면 무작위적 삶을 견뎌내는 데 피할 수 없는 감각처럼 느껴진다. 우연의 연대기적 파편 속에서 누군가는 지금 국경을 건너고 있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있으며, 누군가는 총기를 훔치고 있고, 누군가는 고독한 밤을 이기지 못해 딸에게 전화를 걸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찝찝함 속에서도 신비로움을 느끼고 서로를 궁금해하고 서로를 그리워한다. 그러곤 다시 71개 혹은 그보다 많은 하루가 시작되겠지. <이어지는 땅>(2022) 중 조희영(영화감독) l 곤혹스런 사태를 받아들이는 데 특출나 영화를 만들고 있다. <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2024), < 이어지는 땅 >(2022) 등 연출.
< 빈집 >에서 방랑자 주인공 태석(재희)이 비어 있는 집들을 떠돌아다니는 스산한 세계부터 투명인간이 출몰하는 미스터리한 세계까지 서사의 순열은 이야기의 초점을 누구에게 귀속할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현실로, 무엇을 상상의 세계로 규정할 것인지를 두고 서사가 길을 잃기 때문이다. 이러한 효과는 플롯의 끝에서 장자의 다음과 같은 문구로 강조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그 귀착지는 교도관에게 거듭 구타를 당하고도 상처를 입지 않고 죽어가는 태석의 꿈으로, 또는 남편과 공존할 수 있게 된 선화(이승연)의 꿈으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에 세 번째 해석을 더해야 한다. 이미지는 실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태석은 투명인간이 되는 법을 학습하였다. 세 가지 해석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영화 안에 새겨져 있다. 표제어로 쓰이는 ‘빈집’은 장소, 공백, 고립이라는 관념을 전달하면서 존재하는 것보다 부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의 첫 번째 쇼트는 그물망 뒤 조각상을 보여주고 다음 쇼트는 보이지 않는 골프공이 그물망에 부딪히는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 골프채 타격음과 함께 들린다. 이때 초점이 맞지 않는 조각상과 그물의 롱 쇼트는 시공간의 좌표에 대한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첫 쇼트에 등장한 조각상과 그물이 태석이 선화를 만나는 집에 놓인 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이는 사물이 전달하는 가치를 하나의 극에서 다른 극으로 전환하는 전형적인 김기덕식 수사학을 전제한다. 몰래 들어간 첫 번째 집에서 어린 아들이 태석이 수리한 장난감 총을 발사하여 엄마를 상해하는 장면에서도 이미지의 전환이 발생한다. 고생스러운 가족여행으로 불만이 가득한 엄마를 향해 소년이 플라스틱 총알을 발사하자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리지만 이어지는 쇼트는 창문 밖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태석을 보여주는 식이다. 가족 간 불화와 폭력은 두 번째 방문지인 선화의 집으로 전이된다. 아내를 학대하는 남편을 향해 태석은 골프공을 발사한다. 소년의 플라스틱 총알은 태석의 골프공이 되고, 그것은 소년-태석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어 학대를 저지하는 사물로 기능한다. 커플을 이룬 태석과 선화가 자신의 집에 침입하여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한 권투선수가 태석을 폭행하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태석을 때리는 권투선수 대신 권투선수의 사진을 클로즈업한다. 남편이 선화를 학대할 때 분노한 태석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과 같은 패턴이다. 이처럼 우리는 두 주인공의 침묵을 채우는 것과 유사하게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간극을 채우는 이미지와 대면한다. 이처럼 <빈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침묵이다. 태석은 대사가 없지만 선화는 영화의 마지막 몇 분 동안 “사랑해요”와 “식사하세요”라는 두 마디 대사를 말한다. 대사는 없지만 다른 수단을 통해 의미가 전달된다. 예를 들어 웃음과 울음은 대화의 중요한 요소이다. 가혹한 폭행 뒤에 욕조에서 우는 선화, 골프 연습을 하다 무고한 여자를 피투성이로 만든 뒤 우는 태석의 모습 따위를 볼 수 있다. 누군가 감정을 드러내면 상대방이 이에 반응하기 때문에 이 모든 장면은 대화의 기능을 한다. 때론 클로즈업이 이와 같은 기능을 대신한다. 클로즈업은 시공간의 좌표로부터 얼굴을 추상화하여 정서를 표현하는 기교이다. 태석과 선화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숙고해 보자. 대화는 없고,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의 침묵하는 얼굴이 역전된 쇼트들을 통해 제시된다. 태석과 선화가 서로를 바라볼 때, 우리는 표정이 없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 놀라움, 혐오감, 피곤함, 그리고 용서를 읽는다. 해석적 표면으로서의 얼굴의 위상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태석의 얼굴은 벽에 걸린 선화의 사진과 나란히 배치된다. 태석은 경찰의 심문을 받을 때 침묵을 유지한다. 심문이 끝난 후 경찰은 죽은 노인이 정원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는 선화가 심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태석 만이 제공할 수 있는 정보이다. 따라서 침묵은 일종의 내러티브 장치로 관객들이 텍스트의 폭정에서 벗어나 이미 말해진 레퍼토리들을 기초로 하여 스스로 빈칸을 채우도록 돕는다. 더 나아가 예측을 통해 관객은 사건의 과정을 설정하고 세계의 구조에 대한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태석과 선화가 빈집에 거주할 때 그들의 은밀한 동거가 들통날 것인지 아닐지를 추측하는 것도 이러한 매커니즘을 통해서이다. 텍스트는 관객의 예측을 확인하거나 부정하기 위해 작동한다. 따라서 두 방랑자가 권투 선수의 집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그 집에 다가오는 자동차의 쇼트는 마침내 저들의 존재가 드러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그렇게 되면 텍스트는 관객의 예측을 확인시켜준다. 이러한 침묵의 매커니즘은 영화의 초반부까지만 작동한다. 태석이 감옥에 갇히고 투명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면서 관객은 개연성의 세계에서 초현실적인 세계로 서사가 순환하는 것을 목격한다. 교도소라는 상징적인 헤테로토피아에서 태석이 투명 골프공과 투명 골프채로 연습하는 장면에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건, 특이점, 전환점이 있다. 1부에서 부재가 단순히 하나의 가치였다면, 서사의 세계가 순치된 2부에는 부재로 인해서 표시되는 것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골프공과 클럽의 부재가 골프공을 타격하는 소리로 표시될 때 부재는 현전(現前)과 양면을 이루게 된다. 태석의 변신과 대칭을 이루는 선화의 변신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선화는 태석을 대동하고 자신의 사진을 찍어온 사진작가의 집을 점거한다. 사진 속 선화의 몸은 폭행으로 상한 그녀의 몸과 대조를 이룬다. 태석은 빈집에 침입하여 자신의 몸에서 빠져 나오지만 선화는 자신의 육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선화가 사진을 벽에서 떼어내어 재구성하는 모습에서 상한 육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녀의 욕망과 좌절이 드러난다. 이 장면은 태석의 보이지 않는 골프 게임과 유사한 사건이자 주체성을 획득하려는 선화의 의지를 드러낸다. 다음 날 선화는 태석이 하는 것처럼 손빨래를 하고 있다. 태석이 감옥에 가는 동안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선화는 남자와의 관계를 거부하고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외출을 하는 등 이전과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선화가 살아남은 것은 반항을 통해서가 아니며 새로운 질서, 새로운 존재의 상태를 확립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새로운 존재의 모습은 폭력과 권력이 아닌 환대와 공존의 양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선화는 남편의 권력과 폭력을 약화시키면서 동시에 남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잠시 침묵을 깨고 남편(실질적으로 그의 뒤에 있는 태석)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한다. 남편은 선화의 생경한 고백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가 태석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선화를 끌어안는다. 선화가 부정했던 상징의 도구로서 “사랑해요”라는 말은 이제 기만의 장치로 전락하였다. 선화가 터득한 생존 전략은 타인을 오류에 빠지게 하는 의미의 표면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태석이라는 투명인간을 모른 채 남편이 그 빈칸을 채우게 함으로써 세 사람의 공존이 가능해진 것이다. 태석의 손바닥에 그려진 눈의 형상은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작품 ‘잘못된 거울’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의 시각이 가진 한계와 속임수, 그리고 주관성을 초래할 수 있는 지각의 오류를 표현한 거울상은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나온다. 선화의 집에서 태석은 빈번하게 유리에 반사된 이미지로 재현된다. 태석은 투명인간이 됨으로써 바로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법을 배운다. 아이러니하게도 태석은 교도관의 시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카메라 자체의 시선, 그리고 관객의 시선에서도 벗어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재를 인정해야 보거나 이해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교도관은 투명인간이 된 태석을 감지할 수 있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선화는 180도로 볼 수 있는 거울을 통해 그의 존재를 볼 수 있게 된다. 적대감을 화해하는 영화적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새로운 지각의 차원이 우리들에게 열렸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아프리카를 무대로 펼쳐지는 모험과 로맨스의 대작 오락물’에서 존 포드의 이름을 보게 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 모감보 >는 여러 면에서 예외적인 포드 영화다. 먼저 눈에 띄는 건 배우들이다. 주연을 맡은 당대의 톱스타 클락 게이블, 애바 가드너, 그레이스 켈리는 이 영화 외엔 포드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반면 신부를 맡은 단역 데니스 오데아(Denis O’Dea)를 제외하면 포드 사단에 속한 배우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프리카가 공간적 배경인 영화도 <모감보>가 유일하다. 각본을 쓴 존 리 마인(John Lee Mahin)은 이 영화가 포드와의 첫 작업이며 6년 뒤의 < 기병대 The Horse Soldiers >(1959)가 포드와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공동작업이다. 촬영을 맡은 로버트 서티스(Robert Surtees)는 < 솔로몬왕의 보고 King Solomon’s Mines > < 벤허 > 등의 대작을 찍었으며 역시 < 모감보 >가 포드와의 유일한 공동작업이다. 존 포드가 자신의 영화적 고향 모뉴먼트 밸리 혹은 미국도 아니며 가족의 실제 고향 아일랜드도 아닌 머나먼 이국땅에서 낯선 배우들, 낯선 스태프들과 만든 이례적인 영화가 <모감보>다. <솔로몬왕의 보고>(1950), <아프리카의 여왕>(1951), <킬리만자로의 눈>(1952) 개봉 당시에 「뉴욕타임스」의 유명한 평론가 보슬리 크라우더는 이 영화를 “또 하나의 아프리카 사파리 영화”라고 불렀다. 당시 할리우드에는 < 솔로몬왕의 보고 >(캠튼 베넷, 앤드류 마튼 감독/데보라 커, 스튜어트 그랜저 주연, 1950), < 아프리카의 여왕 The African Queen >(존 휴스턴 감독/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주연, 1951), <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 >(헨리 킹 감독/그레고리 펙, 수잔 헤이워드, 애바 가드너 주연, 1952)과 같은, 빅 스타를 내세우고 미지의 땅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모험과 로맨스를 배합해 관객의 이국 취향을 만족시키는 영화들이 유행했다. 당대의 관객이나 평자들에게 < 모감보 >는 ‘Great White Hunter’ 멜로드라마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런 영화들의 아류로 비쳤던 것 같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1990년에 내놓은 < 추악한 사냥꾼 White Hunter Black Heart >은 <아프리카의 여왕> 촬영 당시 존 휴스턴 감독의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이자, 이 장르의 패러디이다.)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당대의 평론가들은 물론이고, 존 포드 열광자들 중에서도 이 영화를 주목하는 이는 드물다. 린지 앤더슨은 < 모감보 >가 “오락과 도피를 위한 외도이며, 콘셉트도 야심적이지 않고 결과도 신통치 않은 영화”라고 잘라 말한 뒤 어떤 논평도 덧붙이지 않는다(『About John Ford』). 앤드루 새리스 역시 “작가의 영화라기보다는 장인의 영화”이며 “포드의 이름을 들어본 적 없고 그의 개인적 프로젝트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 온 마을의 수다 The Whole Town’s Talking >(1935)와 함께 포드의 가장 즐길만한 영화”라고 적고 있다. 다만 새리스는 “이 도피주의적인 빅 스타 오락물이 (대중영화로서)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데도, 대중영화 지향적인 비평가들조차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덧붙인다.(『John Ford Movie Mystery』) 생전의 포드를 만난 진지한 인터뷰어들도 이 영화엔 별다른 관심이 없어, 포드가 이 이례적인 프로젝트를 왜 시작했는지, 어떤 구상으로 촬영했고 결과에 대해 어떤 소회를 가졌는지에 대한 발언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반면 당시 언론의 연예란에는 이 영화가 뜨거운 이슈였는데, 영화 자체 때문이 아니라, 세 주연 배우가 톱스타이자 당대의 바람둥이였고, 촬영현장에서 얽히고설킨 염문을 끝없이 낳았기 때문이다. < 모감보 >는 메이저 스튜디오 밖에서 만들어진 포드의 개인적 영화들(< 도망자 > < 웨건 마스터 > < 태양은 밝게 빛난다 > < 라이징 오브 더 문 >)이 겪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소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기묘한 소외를 겪은 셈이다. 전후의 존 포드가 개인적 프로젝트(위의 네 편과 < 말없는 사나이 > 등)의 제작비 마련을 위해 스튜디오 납품용으로 당대의 상업적 장르인 서부극을 찍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형적인 오락물처럼 보이는 < 모감보 > 역시 같은 의도로 만들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오늘의 우리에게 <모감보>가 흥미롭게 보이는 이유는, 스스로는 충분히 의식하지 않았더라도, 포드가 완전히 다른 세팅으로 또 다른 서부극을 찍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드는 자신의 서부극이 서부의 역사를 충실히 기록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서부극뿐만 아니라 서부극적인 비서부극이 보여주는 바는, 포드의 서부극이 실화에 바탕한 이야기의 충실한 재현이라기보다 바르트적인 의미에서 신화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애바 가드너, 클락 게이블, 그레이스 켈리 줄거리는 이렇다. 케냐의 밀림 지역에 터를 잡은 빅터(클락 게이블)는 두 백인 및 원주민 조력자들과 함께 맹수를 포획해 유럽의 동물원과 서커스단에 파는 백인 사냥꾼(white hunter)이다. 어느 날 밤무대 무희처럼 보이는 켈리(애바 가드너)가 도착해 빅터와 짧은 인연을 맺지만 빅터는 그녀를 부담스러워한다. 곧이어 젊은 영국 인류학자 도날드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린다(그레이스 켈리)가 사파리 여행을 위해 이곳에 온다. 빅터와 린다는 곧 사랑에 빠지지만 이를 숨기고, 네 남녀는 고릴라 거주 지역을 향한 위험한 사파리 여행을 떠난다. #0 거의 지적되지 않는 점이지만 < 모감보 >는 < 역마차 >(1939)와 많은 면에서 흡사하다. 이주민들의 불안정하고 작은 마을, 온갖 위험이 도사린 야생 지역(초원과 밀림/황야)을 차례로 통과하는 여정, 적대적 토착민들(아프리카 원주민과 맹수/인디언)의 위협, 주인공 남녀의 결합이라는 주요 모티프들을 두 영화는 공유한다. 고릴라 지역 원정대는 마치 서부의 평원을 지나는 마차 행렬처럼 찍혀 있다.(#0) 운송수단은 마차에서 지프와 카누로 달라졌지만, 빅터 일행의 지프와 카누가 역마차처럼 두세 곳의 토착민 마을을 경유해 최종목적지에 이르는 구성은 같으며, 승객 캐릭터들도 유사하다. 야생의 삶에 익숙한 유능하고 과묵한 단독자인 주인공(빅터/링고 키드)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프/마차에는 지금 문명화된 지역에서 온 숙녀(린다/루시)와 창녀 혹은 유사 창녀(켈리/댈러스)가 타고 있으며 숙녀는 창녀를 경계한다. 물론 < 모감보 >의 지프와 카누에는 주정뱅이 철학자도 없고(주정뱅이는 있지만 철학자는 아니다), 이상심리의 도박사도 위선적인 절도범도 없다는 점에서 캐릭터 구성은 훨씬 단조롭다. 또한 링고 키드의 여정은 복수를 향한 것인 반면 빅터의 여정은 로맨스(다른 남자의 아내를 얻기 위한)를 향한다는 차이도 있다. 하지만 여정의 끝에 주인공과 창녀의 결합(빅터-켈리/링고 키드-댈러스)이 이뤄진다는 결말은 완전히 같다. <역마차>의 링고 키드 / <모감보>의 빅터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 역마차 >에는 공동체가 있지만 < 모감보 >에는 공동체가 없다는 점이다. <역마차>의 마을은 문명화의 도정에 있다. 이 불안정한 공동체에는 문명의 완성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외부의 위협(인디언 제로니모)과 내부의 위협(악당 플러머 형제)이 있으며 동시에 문명의 악덕(은행가의 탐욕과 범죄, 창녀와 주정뱅이 철학자를 추방하는 위선의 율법)도 이미 만연해 있다. 링고 키드는 사적인 복수심의 발로라 해도 악당들을 제거해 사실상 공동체의 문명화에 기여했지만, 이젠 살인자가 된 그를 위한 공동체 내부의 자리는 감옥이나 교수대 외에 없다. 그는 떠나야 한다. 문명화의 도정에 있는 서부 공동체의 딜레마는 오늘은 폭력적 영웅이 필요하지만 내일은 그를 추방해야 하는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웅의 폭력 행사와 (자기)추방은 모두 공동체의 도덕적 요청인 것이다. <역마차>라는 서부극 서사에서 공동체의 도덕은 영웅의 윤리와 긴장하고 대립하는 중심 모티프이다. < 모감보 >에는 빅터가 거주하는 마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그의 윤리와 긴장하는 공동체의 도덕 같은 건 없다. 이 마을은 사실상 빅터가 사장인 비즈니스 조직에 가깝다. 그의 표면적 목적은 더 많은 동물을 잡아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일 뿐이다. 물론 그의 근본적 동기가 돈벌이인지 도피인지는 모호하긴 하지만, 이곳은 온전히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빅터의 소왕국과도 같은 곳이다. <모감보>의 서사가 < 역마차 >에 비해 얇아 보이는 건 캐릭터 구성의 단조로움 때문이라기보다 영웅의 비극적 운명을 요구하는 공동체의 잔혹한 도덕이라는 모티프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차이 하나는, 당연해 보이는 말이긴 하지만, < 모감보 >에는 공동체가 없으므로 공동체의 바깥도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서사의 외부 혹은 서사의 초월적 층위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 역마차 >의 링고 키드는 댈러스와 함께 지평선 너머를 향해 떠난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멕시코라는 특정 지역이라기보다 공동체의 바깥, 주정뱅이 철학자 닥 분의 표현을 빌리면 ‘문명의 축복을 벗어난’ 미지의 땅이다. < 황야의 결투 >의 와이어트 업, < 수색자 >의 이산 에드워즈도 그곳을 향해 떠났다. < 웨건 마스터 >의 인물들은 평생 그곳을 찾아 떠돌아다닐 것이다. 포드 서부극에서 그 바깥이 서사를 영원한 미결의 여정으로 만든다. 영웅의 떠남이 사실상의 추방 심지어 죽음의 은유라고 해도 그에겐 적어도 떠남의 결정권이 주어졌고 무한한 광야로 시각화된 그 바깥은 감상적 위안마저 안겨주는 낭만적 외부였다. 포드의 서부극에 한정한다면 이 외부가 닫히는 건 1960년대의 두 서부극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와 < 샤이엔의 가을 >에서였다. 두 영화는 이 바깥의 최종적 폐쇄의 확인이라는 목적지에 이르는 길고 고단한 여정이었다. 아프리카라는 공간 < 모감보 >의 장소인 아프리카는 물리적으로는 미국 서부보다 훨씬 광대하고 더 아득한 미지의 땅이다. 하지만 이곳이 < 역마차 >의 서부보다 좁아 보이는 이유는 외부가 없는 달리 말해 초월적 층위의 장소가 상상될 수 없는 동질적 공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항상 일정한 위험이 일상인 장소이고 그 위험은 관리될 수 있을 뿐 근본적으로 제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더 깊은 정글로 가더라도 마찬가지다. 빅터는 무슨 이유에선지 문명을 떠나 이 외지고 위험한 곳에 정착했고(그의 개인사는 설명되지 않는다), 도시로 나간 적도 거의 없다. 그는 문명 공동체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달리 말하면 빅터는 < 역마차 >의 결말에서 링고 키드가 향해 떠난 곳에 이미 도착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계속 밀림 탐색에 나서겠지만 더 이상 미지의 땅을 향해 떠도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왕국으로 반복해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지만 더 이상 나아갈 곳도 없다. 말하자면 < 모감보 >의 정글은, 다른 층위의 장소를 향해 열린 곳이 아니라, 영웅이 자신을 최종적으로 유폐시킨 폐쇄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모감보>는 <역마차>의 변주이면서 동시에 후일담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모감보>를 포스트 서부극이라 말할 수도 있다. < 모감보 >가 ‘또 하나의 아프리카 사파리 영화’가 아니라 포드 서부극의 친족처럼 보이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존 포드는 메이저 스튜디오가 요구한 아프리카 사파리 장르를 수용하면서도 이 장르의 다른 영화들이 채용한 정글 모험의 일반적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예컨대 존 휴스턴의 < 아프리카의 여왕 >에서 작은 증기선에 올라탄 험프리 보가트와 캐서린 헵번의 주된 곤경은 끝없는 갈대숲과 진창, 엄청난 수의 모기떼, 강의 가파른 급류, 미친 폭우와 강풍과 같은 아프리카의 가혹한 자연환경이 초래한 것이다. 하지만 <모감보>는, 맹수의 등장을 제외하고는, 아프리카라는 장소를 특별한 공포와 매혹의 스펙터클로 만드는 데 무관심하다. 서부극의 주요 장르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설명은 널리 통용되지만, 포드 서부극에서 적대적 자연환경이 주된 모티프로 등장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자연재난 장르인 < 허리케인 >을 제외하면, 성서번안극에 가까운 유사서부극 < 3인의 대부 3 Godfathers >(1948)의 소금사막이 드문 예외다. 포드 서부극에서 자연 풍경은 오히려 깊이 침묵하는 초서사(超敍事) 혹은 비지(非知)의 심연이다. 적대적 자연으로 흔히 오인되는 것은 적대적 인디언이다. 백인의 이주민공동체와 대립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북미 인디언의 토착민공동체인 것이다. 백인 문명이 자연 지배적이고 인디언 문명이 자연 순응적이라고 해도, 이 대립은 분명히 하나의 문명과 또 다른 문명의 대립이며 투쟁이다. 인디언 공동체가 백인 공동체보다 도덕적으로도 지적으로도 더 우월한 것으로 묘사되는 < 아파치 요새 >보다 이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가 달빛이 흐르는 강을 사랑하는 건 분명하지만(< 젊은 날의 링컨 > < 모감보 > < 라이징 오브 더 문 >), 감독으로서의 존 포드는 자연을 공포 혹은 신비의 대상으로 드러내는 상투적 방식에 이끌린 적이 거의 없다. < 모감보 >에서 포드는 모험이 아니라 여정을 택한다. 사파리 장르의 강점인 맹폭한 자연 대 분투하는 인간이라는 구도를 활용하는 대신, < 역마차 >의 궤적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여정의 서사 안에서 <역마차>에서처럼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다. 적어도 <모감보>의 세계 안에서라면 아프리카의 자연은 빅터라는 유능한 영웅에게 거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빅터는 공동체와 절연한 단독자이며 그를 망칠 수 있는 건 이제 그 자신밖에 없다. 이런 점들이 <모감보>를 <역마차>의 후일담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자신이 맹수이며 자기 내부에 모든 위협을 지닌 영웅이라는 점에서 빅터는 모던한 서부사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에서 그는 또 다른 맹수로부터 위협받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최상위 포식자다. 공동체의 율법도 외부의 위협도 사실상 부재한 곳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상적 먹이 사냥을 제외하면 짝짓기 말고 달리 무엇이 있을까.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겠다. < 모감보 >는 맹수의 짝짓기 영화다. < 모감보 >의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위협적인 맹수들이 등장하는 시퀀스들이 최상위 맹수인 빅터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맹수들은 빅터의 분신으로서 그의 정체를 암시하고 그의 위협을 상연하며 그의 불길한 미래를 예기한다는 것이다. #1 #2 #3 #4 이 영화에선 흑표범이 여러 번 등장한다. 첫 시퀀스에서 함정에 빠져 포획된 흑표범은 백인 조수의 실수로 그물을 뚫고 도망간다.(#1) 몇 장면 뒤에 린다는 혼자 산책을 나갔다 같은 함정에 빠지고 흑표범이 그녀를 향해 으르릉거리며 다가온다.(#2, #3) 뒤늦게 쫓아온 빅터는 흑표범을 쏜다.(#4) 여기 세 맹수가 있다. 첫째, 그물을 뚫고 탈출한 맹수. 둘째, 함정에 빠진 미녀에게 다가오는 위협적인 맹수. 셋째, 여인의 육신을 노리다 총을 맞고 쓰러지는 맹수. 첫째는 공동체를 탈주한 빅터의 전사에 해당될 것이며, 둘째는 자기도 모르게 함정에 빠진 린다에게 접근하고 있는 빅터의 현재에 해당될 것이다. 셋째는 결말부에 전개될 빅터의 미래에 해당될 것이다. #5 더 흥미로운 장면은 후반부에 있다. 고릴라 거주지역 부근 텐트에서 혼자 앉아있는 켈리 곁을 치타가 무심하게 지나간다.(#5) 켈리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놀라지만 치타는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맹수와 여인이 한 프레임에 담긴 유일한 장면이며, 촬영 현장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건을 재연한 장면이지만, 켈리에 대한 빅터의 미지근한 태도뿐만 아니라, 빅터와 켈리가 같은 종의 맹수임이 절묘하게 암시된다. 둘은 모두 문명이 아니라 정글에 속한 존재인 것이다. 린다와의 결합에 실패한 뒤, 빅터는 떠나려는 켈리를 붙잡으며 “함께 있어주면 좋겠소. 당신은 내게 어울리니까.”라고 말한다. 달콤한 구애의 언어를 기대했던 켈리는 “어울린다고?”라며 화를 내고 배에 올라탄다. 하지만 그녀는 곧 배에서 내려 빅터에게 달려온다. 빅터의 말대로 둘은 사랑한다기보다 어울리는 게 맞다. 빅터와 켈리의 결합에는 < 역마차 >의 링고 키드와 댈러스의 결합에서처럼 로맨틱한 감정교환 대신 동류의 존재로서의 확인만 존재한다. 비유컨대 < 모감보 >는 먼저 떠난 링고 키드에게 댈러스가 뒤늦게 찾아온 이야기다. 둘은 맹수로서 앞으로도 공동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정글에서 살아갈 것이다. 마지막 장면 이 마지막 장면은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아름답다기보다 처연하다. 여기엔 모종의 단념이 있기 때문이다. 린다가 일깨운 문명으로의 복귀 가능성, 로맨스, 열정의 회복이 모두 단념된다. 포드는 단념의 사유를 설명하지 않고 단념의 결정만 제시한다. 마치 단념이 빅터와 켈리의 운명이라는 듯. 이것이 자신을 정글에 유폐한 서부사나이의 삶이다. 그런데 < 모감보 >에는 이 모든 설명을 부질없게 만드는 시퀀스가 있다. 산책 도중 위험에 빠진 린다를 빅터가 구한 뒤에 둘이 돌아온다. 린다는 날렵한 초식 동물처럼 프레임을 재빨리 빠져나가다(#6) 나무 등걸에 기대 그를 바라보며(#7), 빅터라는 맹수를 피하듯 유혹한다. 급작스러운 폭풍우가 몰아치고 빅터가 린다를 안아 올리자 린다는 갑자기 빅터의 몸을 빨아들일 듯 안겨든다.(#8) 그런 다음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 이어진다. 남편이 잠든 린다의 방 앞에서, 빅터는 린다의 스카프를 벗기고 그녀의 목을 감싼 다음 거칠게 당긴다.(#9) 흔들리는 눈빛의 린다는 다가올 듯하다 돌아서 들어간다.(#10) #6 #7 #8 #9 #10 입맞춤조차 없지만 이 일련의 장면들에는 숨막힐듯한 유혹, 외설적 욕망과 섬뜩한 불안이 숨 가쁘게 교차한다. 이 영화의 드문 지지자인 태그 갤러거의 표현을 다시 옮기자면 여기엔 “절정, 사랑, 이해, 공포, 고통, 모욕, 분노, 두려움, 수치와 같은 수많은 감정들”이 한 장면에 모두 담겨있는 것이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포드를 무엇보다 위대한 디테일의 작가, 감정 표현의 마술사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적인 감상으로는, 이 시퀀스 하나만으로도 < 모감보 >를 포드의 걸작 반열에 올리고 싶어진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