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땐
- 감독
- 다니엘 쉴러
- 제작년도
- 2015
2010년, 제 14회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한 저예산 영화가 상영되었다. 초저예산 영화로서는 생각보다 진지하게 구현된 CG, 당시로서는 그리 흔하지 않았던 인터넷 커뮤니티 담론을 전면 수용한 영화로 소소한 화제를 일으켰다. 이 바람을 타고 ‘장기하가 에드우드를 만났을 때’(영화평론가 이동진), ‘지구를 지켜라 이후 가장 발칙한 데뷔작(영화평론가 김도훈) 등의 평을 들으며 극장 개봉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B급 영화, 맛이 간 영화, 아무튼 뭔가 이상한 영화에 꽂혀있던 나는 그 실체를 확인하러 한 달음에..!는 아니고 버스를 타고 걸어서 이대 후문 필름 포럼에 갔던 것이다. 좌석에 앉아 있으니 불이 꺼졌고 영화가 시작하나 보다 싶어 시선을 앞에 두었던 그 때, 갑자기 스크린 옆의 문이 열리며 왼손으로는 턱 밑에 둔 핸드폰으로 플래쉬를 켜 얼굴을 비추고, 오른팔은 위쪽으로 쭉 편 채 스크린 중앙까지 말없이 걸어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불이 켜졌다. 사내는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불청객을 만든 이응일이올시다.(‘이올시다’라고 하시지는 않았을텐데, 상황과 분위기가 너무 잘 어울려 그냥 그렇게 기억하기로 했다.) 갑자기 이 영화를 떠올린 이유는 역시 ‘삐용삐용 B무비 시즌 2’에 원고를 쓰기 위해서이다. 시즌 1을 할 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지루한 영화만 잔뜩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옛날에도 지금은 흉내도 못 낼 ‘충분히 맛이 가버린’ 영화들이 있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박노식 감독의 < 왜? >나 최영철 감독의 < 삿갓 쓴 장고 > 같은 영화들은 지금 생각해도 (두 영화는 정 반대 방향에 있긴 하지만) 매우 썩 훌륭하게 미친 그런 영화들이었다. 하지만 이 때 소개한 영화들은 영상자료원에 직접 방문하지 않으면 볼 수 없었다. 그 땐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끝내주는 영화들이 있으니 영상 도서관에 오셔서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2023년에 다시 ‘삐용 삐용 B 무비’를 시작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채널도 아주 좋은 영화가 많이 올라가 있고, 여러 OTT를 통해서 영화를 접하기 매우 쉬운 환경이 된 지금, 찾아보기 어려운 영화라는 건 예전보다 마음의 거리가 훨씬 멀게 느껴진다. 이번 시즌에서 소개할 3편의 영화는 되도록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하리라 마음을 먹었고, 그래서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이 바로 이응일 감독의 < 불청객 >이다. 이응일 감독은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 영화 전편을 올려놓아서 누구나 손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서울시 관악구의 어느 자취방. 고시생 진식은 오늘도 공부에 여념이 없다. 함께 살고 있는 취준생 강영과 응일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빠져 자고 있지만, 시골에 혼자 계시는 홀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그는 오늘도 양치를 하며 민사소송법 제90조 소송대리권의 범위...를 중얼중얼 외우고 있다. 그 때 택배가 하나 도착한다. 택배에는 ‘개봉이파괘되면계약을성맆댄것으로간주함니다’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다. 꺼림칙한 마음에 쉽사리 열지 못하던 그 때, 방금 잠에서 깬 응일이 방에서 나와 택배를 뜯어 버린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은하계 론리스타 금융그룹에서 포인트를 관리하는 ‘포인트맨’. 그는 진식, 강영, 응일의 수명을 지금 포인트로 적립하면 나중에 영원한 삶으로 전환하여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이상한 소리를 한다. 그들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허튼 소리에 당황하며 거부한다. 이에 화가 난 포인트맨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라!’라고 일갈하며 이들의 자취방을 우주 어딘가로 날려버린다. 여기서부터, 이들의 모험이 시작된다. SF를 독립, 아니 이 정도라면 개인 영화라고 부르는게 더 어울리지 않나 싶은 규모에서 시도하는건 매우 드문 일이다. 개념이나 논리적인 부분으로 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눈으로 보이는 우주를 구현하겠다는 야심은 대단하다. 특히 영화의 가장 주요한 아이디어인 ‘자취방 창문 밖은 우주’라는 점을 쉽게 처리하고자 한다면 그냥 말로만 때웠으면 될 텐데 굳이 창문을 열고 우주를 보여주며 불사조 성운, 블랙홀까지 구현하고 있다. (우리 같은 백수가 밖에 더 있어! 라고 외치는 장면 뒤에 국회의사당이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장면이 붙어있다.) 상업영화에 비교할 수는 없는 CG이지만, 영화 전체의 톤앤매너와 착붙는 퀄리티를 가지고 있어서 이 만듦새 자체가 영화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여러번 돌려볼 수록, 이상하게 촬영과 CG가 절묘하게 훌륭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데 이거 혹시 진짜 되게 잘한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이 글을 다 쓸무렵에는 아. 진짜 잘 만든거 맞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농담들이 정말 재밌어서 많이 웃었는데, 잠에서 깨자마자 괜시리 반복적으로 리코더를 찾는 강영이나(중반부 쯤에 왜인지 ‘울밑에 선 봉선화’를 연주한다), 포인트맨의 초능력으로 갑자기 영어만 사용하게 된 응일, 포인트맨과 싸우다가 ‘열심히 공부해서... 고시에 합격해서...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 호강시켜드려야 되는데... 이젠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씁쓸히 되뇌이는 진식 등 전반적으로 뜬금없고 어설프며 지금 보면 예스러운 농담들이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고시생, 취준생이라는 신분으로 학생도 사회인도 아닌 어색한 위치가 되어 곰팡이 가득한 자취방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청년들. 그들에게 ‘수명’을 강탈하려는 포인트맨. 그는 자취방 브라더스의 수명을 앗아가려는 명분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성공한 사업가와 정치인을 욕만 할 뿐. 그들을 따라잡려 노력할 의지도 없는 녀석들! 인구는 해마다 감소하는데 결혼도 하지 않고 애도 낳지 않으며 산소와 영양분을 소비하며 지구의 공간만 차지하는 놈들! 너희는 잉여인간이야! 쓰레기 같은 쓰레기들! 빌어먹을 루저들! 내가 너희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을 할 기회를 주겠다.” 그 보람된 일은 수명을 포인트로 바꿔 미국 앨러배마에 거주 중인, 민간의료보험을 경영하며 국가에 헌신한 77세의 잭 도슨씨에게 넘기는 것이다. 너무 직접적이라 뭐 더 해설이 필요없는 정도의 직유다. 마치 UCC를 보는 듯한 화질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2006년쯤부터 촬영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괜찮은 화질이었을 것이다. (SONY의 PD-150을 사용했다고 한다.) 4K, 8K도 접하기 쉬운 지금 본다면 아쉬울 순 있지만, 이 부분만 견딘다면 굉장히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글을 쓰며 여러번 돌려보았는데, 묘한 것이 개봉 당시에 봤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재밌고, 이야기 또한 더욱 시의적절하게 느껴져 웃다가 괜히 좀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누구나 꼭 한 번쯤은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2010년에 봤을 때보다 훨~씬 크게 들었다. 이응일 감독은 <불청객> 이후 몇 편의 단편, 웹드라마 등을 연출했고 현재는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신다고 한다. 언젠가의 그의 작품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 이런 재능을 단 한편으로 갈음하는 건 관객으로서 정말이지 너무도 아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불청객>은 이응일 감독의 유튜브 채널 ‘토토모’에서 관람할 수 있다.
감독에게서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는, 일종의 ‘상태’라는 게 있다. 그것은 한 개인이 닿을 수 있는 최상의 컨디션에 여러 가지 외부 요인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 발생하는 공기 같은 것인데, 감독을 비롯해 참여하는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재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시너지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누군가는 그 ‘상태’의 숙주로 아예 태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꾸준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양질의 에너지를 자신의 팀에 지속적으로 전파하며 좋은 영화들을 부침 없이 만들어낸다. 보통 천재 내지는 거장이라고 분류되는 소수들이 그렇다. 그 특수한 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감독들은 안타깝게도 그 ‘상태’라는 것을 스스로 조절할 수가 없다. 매뉴얼이라는 게 존재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유기농 건강 식단으로 다다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꾸준한 운동이나 맹렬한 독서 따위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상태 안에 놓이기를, 밖으로 내쳐지기를 반복하며 재능의 기회와 실책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뿐이다. 영화 작업은 그래서 고되다. 변영주 감독이 < 화차 >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분명히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전작에 대한 본인의 열패감이 컸었고, 각본 집필 내내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자학적으로 싸워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화차 최종 시나리오를 탈고하는 데까지는 몇 개월 혹은 몇 분기 정도의 상식적인 지각이 아닌 몇 년 단위의 불가사의한 지연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메가폰을 7년 만에 잡게 된다. 마침내 7년이라는 시간은 이 중견 감독의 ‘상태’에 대한 외부적인 평가를 야박하게 매기도록 만들었다. 적은 예산과 빠듯한 일정. 이야기의 특성상 공간 이동이 잦고 시점과 시간의 변화가 유독 많은 작품으로서는 치명적인 핸디캡이었다. 심지어, 원작은 미야베 미유키의 베스트셀러 소설이었다. ‘변영주’를 둘러싼 의심에 대한 답만 제시한다고 끝나는 게임이 아니었다. 원작의 명성에 견주어 ‘왜 한국에서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야만 했는가’에 대한 명쾌한 답안도 동시에 필요한 일이었다. 이 정도로 우려와 의심이 팽배한 토양 위에서 감독 스스로 좋은 ‘상태’를 자가 발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화차’는 애당초 충무로 기대작이 아니었다. 결과 값은, 말하자면 보기 좋게 호쾌한 쪽이었다. 영화는 선언적으로 훌륭했다. 방대한 원작의 군살을 발라낸 안목이 좋아 기초 공사는 튼튼했고, 위에 심어진 캐릭터들은 수입품 느낌을 깔끔히 지워냈다. 다소 복잡할 수 있는 이야기의 균형이 특히 잘 잡혀있는데, 원작과 달리 약혼자 문호( 이선균 )를 주인공으로 위치 이동했던 절묘한 노림수가 그 일등 공신이었다. 약혼자의 감정을 자연스레 따르며 퇴물 형사 종근( 조성하 )의 수사로부터 도움을 받게끔 설계된 이야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경선( 김민희 )을 느끼고 동시에 사건을 읽어야만 하는 양 쪽의 노고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렸다. 마침내 모든 감정과 수사의 플롯이 하나의 꼭짓점으로 모이게 되는 후반으로 갈수록 감정이 휘몰아치며 자칫 과잉의 신파로 빠지기 십상이었지만, 그 땐 차갑고 지적인 음악이 꾸준히 경계하며 솜씨 좋게 중심을 잡아준다.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특성상 맹목적인 핸드 헬드로 긴장감을 보충하려는 함정에도 역시 쉽사리 빠졌을 법 하지만, 촬영은 테크닉에의 과욕을 덜어낸 대신 명확한 콘셉트하에 쇼트 바이 쇼트, 우직한 미장센을 마침내 지켜낸다. 사실상 가장 위험했던 함정은, 이 이야기의 주제에 있었다. 원작은 일본의 사회파 소설이었고, 감독은 ‘낮은 목소리’의 변영주 였다. 다시 말하자면 메시지를 내세우며 웅변 형식으로 영화의 모자란 미덕을 손쉽게 충당하기에 적당한 조건들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사회를 통해 개인을 읽는 원작의 방식을 거꾸로 택했다.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던 대목이었을 것이다. 보다 더 깊이, 직접적으로 사회상을 담아낼만한 그릇이었던 것만큼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영화는 주제적인 측면보다 장르의 컨벤션에 더 무게를 두는 용단을 내린다.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존재 증명이 필수였던 감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렸던 이 선택을, 나는 지지한다. 이것이 훨씬 더 감독에게 현실적이고 관객들에게는 보다 영화적이었을 거라고, 나는 읽기 때문이다. 결국 돌아보면 너무나 긴 시간이었고, 온통 부비트랩이었다. 그 사이 감독은 수도 없이 많은 실책을 저지를 수 있었다. 나빠도 한참 나빠질만한, 피로감이 묻어 나와도 흥건했을 법한 조건들이었다. 그러나 불가능이라고 여겨져 오던 그 자가 발전을 감독은 마침내 해냈다. 그리고 악에 바치지 않은 자연스런 방식으로 ‘좋은 상태’에 접어들었고, 걸맞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사실, 작품 자체 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바깥을 읽었을 때 훨씬 더 크게 확장되는 감동의 기록이다. 물론, 나는 영화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읽는 것에 아무런 망설임이 없다. 감독으로서의 내게 영화는 단지 하나의 작품이 아닌 그런 거대한 과정, 그 전부를 포함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영화는 몇 가지의 기준점으로도 또렷이 남게 될 것이다. 일단 김민희 조성하를 비롯한 배우들의 입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 영화로서 그럴 것이고, 배우 이희준이나 김동영 촬영감독 같은 새롭고 젊은 피를 충무로에 수혈한 공로로서도 그럴 것이며, <낮은 목소리> 이후 오랜만에 ‘영화제작소 보임’이라는 반가운 이름을 부활시킨 의미로서도 그러할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 산업권 내에서 생존해내기 위해 오늘도 척박한 환경과 고통스럽게 싸우고 있는 수많은 감독들에게 하나의 비전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맥락에서, 더욱 그렇다. 그리고 미래는 이렇게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화차를 기점으로 변영주 는 비로소 영화를 즐기면서 만들 수 있게 되었다’라고. 재능 있는 감독이 자신의 재능을 누리고 만끽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큰 재미가 또 있겠나. ‘좋은 상태’의 변영주는, < 화차 >가 겨우 첫 페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