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그밤
- 감독
- 데이빗 그린
- 제작년도
- 1992
- 출연
- Sharon Gless, 윌리엄 맥나마라, 폴 셰러
스페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을 꼽으라고 질문한다면 가장 먼저 대답할 이름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일 것이다. 첫 영화 개봉 이후 올해로 데뷔 41년을 맞은 그는 평균적으로 2년에 한 번씩 신작을 내놓으며 필모그래피를 꾸준히 확장하고 있다. 감독의 영화적 유니버스는 더욱 거대하고 견고해졌으며 이제는 많은 일반 관객을 그의 세계로 견인하고 있다. 알모도바르의 악동 기질이 드러나는 초창기 키치 영화는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약과 동성애 등 자극적인 소재와 묘사 또한 이에 한몫했다. 그러나 근래 작품들은 내러티브나 표현방식이 순화되고 세련되어졌다. 감독의 연륜과 함께 그의 영화도 성숙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일관된 관심이 여성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감독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상정한 영화에서 남성을 부재하거나 있어도 무능한 안타고니스트로 묘사한다. < 내가 뭘 잘못했길래 >, < 하이힐 >, < 귀향 >의 남편들은 폭력적이고 외도를 일삼아 아내와 딸에게 죽임을 당한다. <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에서 유일한 여주인공의 희망인 아들은 교통사고로 죽고, 남편과 친구는 성전환을 해서 가슴을 달고 나타난다. 심지어 수녀 로사의 아버지는 치매 환자다. 반면 여성은 외연의 유약함에도 불구하고 내면이 강인하고 억척스러운 캐릭터로 묘사된다. 여성들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남성으로부터 물리적, 정신적으로 독립해낸다. 오늘날 독립적 여성 캐릭터는 이미 정체성을 완고히 하고 있지만 80년대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주인공들의 설정은 파격적이었다. <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에서 자신을 임신시키고 떠난 남자의 목숨을 구한 뒤 당당히 이별을 고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는 짜릿함 마저 느껴진다. 알모도바르는 여성이 자식과 어머니에게 갖는 애정을 최상위의 감정으로 생각함이 틀림없다. < 하이힐 >, < 귀향 >, < 줄리에타 >는 십여년 동안 떨어져 지낸 모녀의 관계를 기반하고 있다.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바라는 사랑과 그것의 결핍으로 인한 그리움, 비뚤어진 질투까지, 모녀가 느낄 수 있는 회환을 다각도로 그려낸다. “마약 중독자가 한번 약에 다시 손을 대면 몇 년을 끊고 살았더라도 다시 빠져들고 말지. 오랫동안 네 생각을 참으며 지냈지만 널 찾을 희망에 다시 빠져버렸어. 그 바보 같은 희망이 힘들게 쌓은 새 인생을 산산이 조각내버렸지. 내겐 남은 게 없어. 너만 존재할 뿐. 네가 없다는 공허함이 내 삶을 파괴하고 있어.” <줄리에타> 줄리에타의 일기 중. “난 평생 엄마를 따라하며 살았어요. 엄마가 떠난 이후로 모든 면에서 엄마랑 경쟁하려 했다고요. 하지만 단 한 번 내가 이겼었죠. 마누엘! 난 그와 결혼했죠. 엄마가 할 줄 알았는데! (…) 어렸을 때 난 귀찮게 하는 것 밖에 못했어요. 하지만 그때조차도 늘 엄마를 돕고 싶었다고요. 엄마를 너무 좋아했으니까.” <하이힐> 레베카 대사 중.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가슴 한쪽에 켜켜이 눌려있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남편에 대한 결핍은 영화의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여성들의 근원적 아픔일 것이다. 알모도바르 영화 속 여성들은 이 아픔을 다시금 여성간의 연대를 통해 극복한다. 동질감, 모성애로 응축된 그들의 의리는 남성들이 외치는 의리보다 더욱 소리 없이 끈끈하고 질기다. 여성들이 소파에서 모여 수다를 하는 장면들은 알모도바르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알모도바르는 미장센에 무척 공을 들이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80년대의 작품을 근래에 다시 보더라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주인공들의 의상과 세트, 그리고 갤러리에 와있는 듯한 회화의 향연은 내러티브에 종속되어 있는 영화를 거부라도 하는 듯 시각적으로 환기를 준다. 게다가 빨강, 파랑, 초록 등, 원색에 대한 그의 태도는 애정을 넘어 집착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쉬어가는 퀴즈, 알모도바르 영화의 여주인공이 타는 자동차의 색깔은? 눈치챘겠지만 정답은 빨강이다. <하이힐>의 저명한 아나운서 레베카(빅토리아 아브릴 扮)가 타는 차, <귀향>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 扮)의 어머니가 트렁크에 숨어있던 차, < 브로큰 임브레이스 >에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扮)가 죽음을 맞이하는 차, <줄리에타>의 줄리에타(엠마 수아레스 扮)가 떠난 딸을 찾으러 갈 때 타는 차 등. 인물의 상황에 따라 기종은 달라지지만 여주인공의 승용차가 빨간색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감독은 종종 버드 아이즈 뷰로 도로를 지나는 여주인공의 자동차의 모습을 담는다. 특히 초록이 우거진 숲길을 종과 횡으로 지나는 빨간 자동차 장면은 보색의 대비로 더욱 잔상이 각인된다. 빨간 자동차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시대와 장르를 그야말로 종과 횡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관념이 아닐까? 빨간 자동차와 함께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영화를 연결하는 유니버스로 시야를 확장해보자.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반복적으로 다시 출연시키며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감독들은 새로운 배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특정한 배역을 더욱 진짜처럼 믿게 하고 싶어서 혹은 뉴 페이스를 통해 새로운 분위기로의 전환을 꾀하기 위해서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발굴한다. 그러나 알모도바르는 일루전의 고조나 분위기의 전환보다는 자신만의 색을 더욱 강조하는 편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의 영화에서는 주연부터 단역에 이르기까지 전작에서 봐온 익숙한 배우가 늘 다시 등장한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세실리아 로스, 페넬로페 크루즈, 카르멘 마우라, 마리사 파레데스는 대표적인 감독의 페르소나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 라이브 플레쉬 >에서 버스에서 아기를 낳는 창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임신한 연약하고 순수한 수녀, <귀향>에서 억척스럽고 강한 엄마,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매력적인 여배우를 연기했다. 변화무쌍한 역할이 무색할 정도로 수려한 연기를 보여준 그녀는 모두가 손꼽는 대표적인 알모도바르의 페르소나이다. 초기작 < 나쁜 버릇 >에서부터 꾸준히 등장했던 고(故) 커스 람프리브는 엄마, 할머니, 이웃 등 단역으로 출연하며 웃음을 주는 씬스틸러이기도 했다. 마블의 팬들은 마블 유니버스가 총 망라되어있는 < 어벤져스: 엔드게임 >에서 히어로들이 한 명씩 등장할 때마다 반가움의 환호성을 질러봤을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팬들 역시 그의 영화에서 새로운 캐릭터로 분하는 친근한 배우를 보며 가슴이 쿵쾅거리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배우를 통해 감독의 전 작품들을 상기하다보면 어느새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에서 유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페르소나 컨벤션 외에도, 감독은 독특한 방식들을 통해 자신의 전작들을 연결한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 扮)와 마테오 블랑코(루이스 호마르 扮)가 찍은 코미디 <여인과 가방>은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을 오마주한 작품이다. 영화의 말미에 <여인과 가방>의 편집본을 다시 보는 장면에서 비로소 관객들은 알모도바르의 그로부터 20년 전의 개봉작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의 장면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며 무릎을 탁 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종국에 친구가 된 마뉴엘라(세실리아 로스 扮)와 위마 로조(마리사 파레데스 扮)는 3년 뒤 < 그녀에게 >에서 야외공연 관람석에 앉아있는 모습을 통해 깜짝 등장하기도 한다. 마치 관객에게 그녀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며 근황을 전해주는 것 같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아들 방에 걸려있던 피나 바우쉬의 포스터는 <그녀에게>의 베니그노(하비에 카마라 扮)의 손에 들려 다시 한번 영화는 연결된다. <욕망의 법칙>에서는 영화 감독인 파블로(유세비오 폰셀라 扮)를 통해 장 콕도의 희곡 <휴먼 보이스>에 대한 애정을 단편적으로 대리하게 하지만 13년 뒤 < 휴먼 보이스 >를 내놓으며 애정에 방점을 찍는다. 이처럼 감독은 자신의 영화, 인물, 오브제, 그리고 소재 등을 자신의 작품에 재투영하며 전작과 연결고리를 채운다. 악동과 성자, 고집불통과 재기발랄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 같은 알모도바르의 유니버스는 다음편에서도 계속된다. 3부작으로 구성된 "알모도바르 유니버스"의 1편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는 여기까지다. 앞으로 2편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3편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현실의 순환」가 연재된다. 나가며... “돌아온 과거와의 우연한 만남이 두려웠지. 내 삶이 흔들릴까봐. 추억으로 가득한 그 밤이 두려웠지. 내 꿈이 뒤 엉킬까봐. 하지만 도망치던 나그네는 곧 발길을 멈추리라. 모든 걸 앗아간 망각이 내 오랜 망상들을 죽였다 해도 내 마음속엔 아직도 실낱 같은 희망이 남아있지. 귀향. 주름진 이마 세월의 눈이 쌓인 백발이 되어 귀향을 하네. 인생은 한 순간. 뜨거운 눈빛은 널 찾아 그림자 속을 헤메고 생각하면 눈물만 흐르는 달콤한 추억에 의지해 내 영혼은 힘을 얻네 ” <귀향> 라이문다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 《귀향》의 가사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
홍상수 의 열아홉 번째 영화 < 밤의 해변에서 혼자 >에서 독일 함부르크 해변에 서 있던 영희( 김민희 )를 업고 간 (1부의) 검은 옷의 남자는 그녀를 (2부의) 강릉에 데려다 놓는다. 그곳엔 폐인처럼 지내다 겨우 신작 준비에 들어간 영희의 옛 애인인 감독 상원( 문성근 )도 와 있다. 사실 홍상수에게 강릉은 낯선 곳이 아니다. 그가 영화에서 공간이 아닌 ‘장소’를 선택해왔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선택은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영화 < 강원도의 힘 >의 주인공 지숙( 오윤홍 )도 강릉을 두 번 찾아간다. 지숙의 (첫 번째) 강릉행 여정은 상권( 백종학 )에 의해서 느슨하게 반복된다. 그런데 상권이 지숙과 같은 강릉행 기차를 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관객들은 지숙의 이야기(편의상 1부)와 상권의 이야기(편의상 2부)를 포개 놓고 ‘부지런히’ 빈칸을 채워 나가기 시작한다. 지숙 일행이 지나쳤던 여자에게 상권은 ‘인상이 깨끗하다며’ 지분대고, 1부에서 사고사로 알려졌던 여자의 죽음은 2부에서 상권의 신고로 인해 살인 사건으로 밝혀진다. 낙산사를 찾은 지숙이 남긴 기와불사 메시지(‘어머니 건강하세요’) 역시 2부에서 상권이 발견하고, 지숙이 집 앞에서 발견한 낙서(‘조금 더 긴 호흡으로 기다리자’)를 상권이 썼다는 것도 관객들은 나중에 알게 된다. 영화는 1부에서 던진 질문을 2부에서 답하기도 하고, 1부에서 무의미하게 보였던 것들의 의미를 2부에서 채워 주기도 한다. 두 개의 시간이 교차하고 공간이 중첩되면서 만들어낸 (반복과) 차이를 발견하고, 그 공백을 능동적으로 메우는 것은 사실 홍상수 영화를 보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라고, ‘부지런한’ 관객들은 이후 17편의 영화를 거쳐오면서 열심히 학습해 왔다. 실제로 그 과정은 너무나 매혹적이라 관객들은 홍상수가 만들어 놓은 미로에 기꺼이 빠져들곤 했다. 홍상수의 영화들 20편 가까운 영화를 거치면서 홍상수 의 ‘차이와 반복’도 발전(혹은 변주)을 거듭해 왔다.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른 인물들에 의해 반복 재현되면서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오! 수정 >) 꿈이나 판타지를 경유하여 반복되기도 하며(< 다른 나라에서 >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서로 다른/같은 인물들이 동일한/다른 공간을 반복하면서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강원도의 힘 > < 생활의 발견 > < 잘 알지도 못하면서 > < 하하하 >). 어떨 땐 현실이 영화를 반복하기도 하고(< 극장전 >), 영화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시간’이 반복되기도 하며(< 자유의 언덕 >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 유사한 사건을 모르는 척 서로 다른 인물들이 반복하기도(< 북촌 방향 >), 서로 다른 사건이 같은 인물(배우)에 의해 반복되기도 한다(<극장전> <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 심지어 최근작 두 편(< 밤의 해변에서 혼자 > < 그 후 >)은 홍상수 자신의 현실을 영화가 스스로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차이-반복’의 틈새는 커지기도, 혹은 작아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영화 ‘내(內)’ 리듬 이외에 홍상수의 필모그래피를 가로지르는 영화 ‘간(間)’ 리듬도 흥미로운 고민거리이지만, 여기에서 논의하는 건 적절치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차이-반복-틈새’라는 ‘운동’을 학습해온 관객들은 그 관성(慣性)으로 인해 (능동적이다 못해) 무리할 정도로 영화의 틈새를 메우려 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차이와 반복 사이에 남겨진 나머지, 잘 의미화되지 않는 ‘잉여’에 대해서는 슬며시 눈감아 버리고 만다. 홍상수는 날카롭게 (마치 퍼즐을 배치하는 것처럼) 이 점을 파고든다. 산에 오르다 지숙이 발견한 금붕어는 상권이 키우게 된 금붕어 일리 없다. 그리고 지숙이 산 채로 묻었기 때문에 상권의 금붕어가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것도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를 보는 관객들은 두 개의 사건을 지숙과 상권, 그리고 죽은 태아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고 싶어진다. 두 개의 우연한 독립 사건을 ‘차이-반복-틈새’의 운동 안에 슬며시 밀어 넣은 건 홍상수이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건 관객들이다. 그러니 홍상수가 영화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매번 ‘관객들이 그렇게 봤다면 그게 맞는 것’이라고 대답해 온 건 그냥 하는 말의 유희가 아니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운동의 관성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 운동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간과하기 쉬워진다는 점이다. 이건 마치 자전거 바퀴의 반복적인 회전 운동만을 지켜보고 있으면 이 자전거가 어디로 나가는지 절대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도 홍상수이지만, 핸들을 잡고 있는 것 역시 그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홍상수의 게임의 규칙, 그 처음으로 돌아가 그의 운동이 어디로 향하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그것만이 쳇바퀴 도는 것 같은 홍상수 영화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그의 게임의 규칙의 출발점이기도 한 <강원도의 힘>을 보는 것이 중요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 강원도의 힘 >에서 지숙과 상권이 교차/반복하는 여정은 첫 번째 강릉행 일 뿐, 지숙의 두 번째 강릉행은 ‘차이-반복’의 패턴에서 벗어나 있다. 게다가 친구들과 함께 ‘우연히’ 결정한 첫 번째 여정과는 달리 두 번째 여정은 지숙이 오롯이 혼자 결정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두 번째 강릉행이 첫 번째 강릉행을 ‘반복’ 하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두 번째 강릉행은 앞서 언급한 홍상수 영화의 ‘잉여’처럼 보인다. 이제 우리는 지숙의 두 번째 강릉 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환기하기 위한 조금 자세한 줄거리. 대학생 지숙은 두 명의 친구와 함께 1박 2일 강릉 여행을 떠난다. 민박집을 찾던 지숙 일행은 우연히 경찰관( 김유석 )을 알게 되고 도움도 받는다. 그날 저녁, 일행과 함께 술을 마친 경찰관은 술에 취한 지숙을 초소로 데려가 섹스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다음 날, 지숙과 친구들은 서울로 돌아온다. 며칠 후 지숙은 경찰을 만나겠다며 다시 강릉으로 떠나고, 그와 하룻밤을 보낸다. 한편, 강릉으로 가던 지숙 일행의 기차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대학 강사 상권이 타고 있다. 유부남인 그는 최근까지 이어왔던 지숙과의 연인관계를 정리하고 후배의 권유로 강릉 여행에 나선 것이다. 길을 묻는 낯선 여자에게 한눈을 팔고, 급기야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상권도 서울로 돌아온다. 며칠 후 기다렸던 교수 임용 소식을 듣게 된 그는 지숙에게 다시 만나자고 연락한다. 목욕탕의 저울, 낙서 첫 번째 강릉행의 끝, 지숙일행은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다음 장면에서 지숙은 공중목욕탕에 가고 탕에 들어갔다가 나와 몸무게를 잰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 적힌 (상권의) 낙서를 발견하고 수건을 꺼내 지운다. 다시 숏이 바뀌면 친구의 집에 찾아온 지숙이 다시 강릉에 가기로 했다고 말하며 거짓말을 해 달라고 부탁한다. 걱정스럽다는 친구의 모습을 뒤로하고 지숙은 강릉으로 향한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 지숙은 왜 다시 강릉에 가는 걸까? 가장 쉬운 답. 경찰을 만나기 위해서. 친구에게 한 말에 따르면 강릉에서 돌아온 지숙은 그와 몇 번 통화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자신을 겁탈하려다 실패한, 한 번밖에 만난 적 없는 경찰을 만나러 (지숙의 말에 따르면) 하루 만에 돌아올 수도 없는 길을 떠난다는 건 무리한 해석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첫 번째 강릉행과 두 번째 강릉행 사이의 두 개의 장면(목욕탕, 낙서)이 의미를 잃고 만다. 잘 알려진 것처럼 홍상수 는 숏을 낭비하는 감독이 아니다. 그러니 이 두 개의 장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목욕탕 장면. 탕에서 나온 지숙이 체중계에 올라간다. 그리고 자신의 몸무게를 한참을 바라본다. 카메라 역시 그녀를 따라 체중을 바라보다 심지어 그녀가 체중계에 내려선 다음 바늘이 영점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체중계 앞을 한참 지키고 서 있다. 그녀의 몸무게를 보여주는 것이 왜 이토록 필요했던 것일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영화의 후반부, 지숙이 상권과 다시 만나는 장면까지 기다려야 한다. 2부의 상권 이야기가 한참 지나간 다음, 상권은 지숙에게 다시 연락한다. 그리고 둘은 (이전에 그래왔던 듯) 모텔로 가 섹스를 시도한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며 섹스를 하려는 상권에게 지숙은 ‘애 떼는 수술’을 했다고 말한다. 그제서야 우리는 지숙이 체중계 위에서 보고 있던 것이 자신의 몸무게가 아니라 자신의 체중에서 제거된 아이의 몸무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숙은 체중계 위에서 떠나간, 아니 자신이 ‘살해’한 아이의 몸무게를 참혹하게 바라본 것이다. 우리의 눈엔 보이지 않지만 지숙에게는 너무나 명백한 아이의 빈자리를 홍상수 는 이 숏을 통해 보여준 셈이다. 이제 우리는 지숙의 중절수술 시점을 기준으로 첫 번째 강릉행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첫 번째 여정에서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에 대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와불사, 생매장 다시 처음. 강릉에 도착한 지숙과 친구들은 해변가에 앉아서 노래를 부른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 광산 노동자로 일하던 아버지가 딸을 잃고 슬퍼하며 부르던 노래. ‘영영’ 인지 ‘너는’인지 가사를 놓고 반복하며 노래를 하는 친구들을 두고 지숙은 더 이상 부르기 싫다는 듯 가요집에서 가장 행복하고 신나는 노래를 찾아 선창하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 행복하길...’ ) 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지숙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커피숍에 들어온 지숙은 고3 때 자신을 짝사랑하던 동네 친구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간신히 살았지만 병원에 입원한 후 소식도 알지 못하는 그 아이를 지숙은 문득 강릉에 와서 떠올린 것이다. 온천에 가겠다는 친구들과 헤어져 지숙은 (굳이) 혼자 낙산사로 향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절에서 방생한 거북이 두 마리를 본다. 방생(放生). 불교 경전, ‘금광명경(金光明經)’에 나오는 유수장자는 늪에서 말라 죽어가는 물고기들을 구해낸다. 마치 영화는, 아니 강릉은 죽음으로 이끌리는 지숙을 삶으로 끌어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낙산사에 오른 지숙은 불상 앞에서 절을 한 뒤 기와불사를 한다. (1부에서 기와불사를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2부에서 상권이 지숙의 기와불사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어머니 건강하세요.’ 가족을 향해 남긴 유서와 같은 메시지. 먼저 떠나는 자신 대신 오래 살아남아 달라는 기원. 혹은 죽지 말아 달라는 부탁.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산길에서 발견한 ‘살아 있는’ 물고기를 그대로 매장해버리는 지숙의 단호함에는 어떤 결단의 공기가 서려 있다. 아이를 임신한 지숙은 어쩌면 (아이와 함께 동반) 자살을 하기 위해 강릉을 찾아온 것은 아닐까? 자살이라던 낯선 여자의 죽음은 같이 있던 남자에 의한 살인으로 밝혀진다. 자살과 살인(낙태)의 흐릿한 경계. 지금 지숙을 그 경계에 서서 자신의 죽음을 막으려는 강릉의 ‘힘’과 겨루고 있는 중이다. “미안해” 하루밖에 남지 않은 강릉에서의 마지막 밤,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들은 (마치 지숙의 자살을 방조라도 하듯) 지숙을 ‘상투적’이라며 비난한 다음, 그 자리에 혼자 남겨두고 자리를 떠난다. (강릉역에 도착해 길도 알지 못하는 지숙을 덩그러니 혼자 두고 역에 숨어 그녀가 헤매는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던 두 친구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오히려 그녀의 자살을 막는 건 그 자리를 지키는 경찰이다. 술에 취한 그는 지숙을 ‘초소’로 데려간다. 초소(哨所). 경계와 감시를 하는 곳. 혹은 죽음으로부터 지숙을 지키는 장소. 경찰과 함께 (어쩌면 덕분에) 지숙은 그 밤을 무사히 넘긴다. 이렇게 지숙이 죽음을 넘겼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 강원도의 힘 >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인 이튿날 아침 민박집 앞에서의 숏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마치 큰 병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듯 지숙이 민박집 앞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다. 어젯밤에 사라진 친구들은 지숙의 흐트러진 머리를 대신 묶어주며 지숙 앞에 와서 미안하다며 사과한다. 무엇이 미안해서? 너를 자살하도록 내버려 두어서 미안해. “사람을 이런 데서 혼자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딨어요?” 이렇게 돌아온 서울에서 지숙은 함께 죽는 대신 아이만 죽게 하는 선택을 한다. (목욕탕 장면) 하지만 죄책감의 시달리는 지숙 앞에 상권의 메시지가 도착한다. (집 앞 낙서 장면) 지숙이 두 번째 강릉행을 결정하는 건 아마도 살고 싶어서였던 건 아닐까? 아이를 죽이고도 끝나지 않는 굴레, 이 ‘긴 호흡’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마도 죽음밖에 없다고 지숙은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자살)을 (다시 한번) 막기 위해 지숙은 강릉으로 향한다. 이 두 장면이 없었다면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이상한 장면(지숙이 자신을 늦게 데리러 온 경찰에게 이상할 정도로 심하게 화를 내는 장면)은 성립하지 않는다. 강릉에 도착해 경찰의 차에 탄 지숙은 사력을 다해 그에게 화를 낸다. “사람을 이런 데서 혼자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딨어요?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요? (...)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가긴 어딜 가?” 히스테리에 가까운 지숙의 분노는 ‘불안한 나를 혼자 죽게 하지 말아요. 제발 나를 살려주세요’라는 절박한 외침처럼 들린다. 그렇게 강릉에 찾아온 지숙을 경찰이 모텔로 데려가 (마치 상권처럼) 섹스를 하려 들 때 지숙은 경찰의 머리를 마구 때리며 거부한다. 머쓱해 진 경찰이 ‘내가 술 깰게’ 라고 말하며 고쳐 앉고, 지숙이 잠깐 화장실에 가자 자살이라도 하려는 듯 베란다로 나가 난간 밖으로 몸을 내민다. 하지만 난간 끝에 매달려 있던 경찰은 이내 다시 주섬주섬 방 안으로 들어온다. 생각해보면 홍상수 의 영화에서 섹스에 실패한 남자가 자살을 떠올리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아니 차라리 섹스와 죽음이 가깝게 붙어 있다고나 할까? < 극장전 >의 상원( 이기우 )도 영실( 엄지원 )과의 섹스가 잘 되지 않자 깨끗하게 죽고 싶다고 말하고 수면제를 사와 (결국 실패가 예정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건 자살시도 자체가 아니라 이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실패한 자살의 반복. 경찰이 난간을 다시 기어 올라올 때, 우리는 안도하면서 영화 초반, 지숙이 이야기한 (자살에서 살아 돌아온) 친구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죽음을 생각하며 강릉을 다시 찾은 지숙도 아마 ‘살아’ 돌아갈 것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통곡을 하는 지숙의 울음 속엔 (자신이) 살았다는 안도와 (자신이 살기 위해 결국) 죽어야/죽여야 했던 아이에 대한 애도가 뒤섞여 있다. 그 후 상권이 다시 찾아와 섹스를 하려 들 때, 지숙은 임신시키려는 것이냐며 “나도 좀 살아야겠어요.” 라고 말한다. 다시 강릉 행을 반복하며 죽음을 떠올리지/실행하지 않겠다는 지숙의 다짐은 병원을 나서며 담배를 끊고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동수( 김상경 )(< 극장전 >), 죽음의 문턱에 선 영희를 업어 강릉으로 데려온 검은 옷의 남자(< 밤의 해변에서 혼자 >), 과거의 애인 창숙( 김새벽 )을 반복하지 않고 출판사를 박차고 나와 눈을 맞으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아름( 김민희 )(< 그 후 >)(아직도 나는 아름이 출판사에 다시 방문하는 에필로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과 닮아 있다. 차이와 반복의 운동에서 벗어난 ‘잉여’는 차이와 반복의 운동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 ‘잉여’들이 홍상수 의 게임의 규칙의 단단한 힘의 균형에 균열을 가져오는 것이다. 상권은 과거를 반복하지만 그 자리에 지숙은 없다. 교수로 임용된 상권은 속물 같은 동료 교수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 옆 테이블에서 인사 온 여학생을 탐욕스럽게 바라본다. 아마도 똑같은 방식으로 상권은 지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건 그가 교수가 되든 되지 않든 강원도에서 어떠한 배움도 얻지 못한 상권의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이다. 상권도 지숙처럼 ‘눈물’을 흘리지만 그건 먼지가 만들어낸 ‘인공/가짜’ 눈물일 뿐이다. (“눈에 뭐가 들어갔었나 봐.”) 섹스에 대한 상권의 끊임없는 집착은 (죽음에 이끌리는 지숙과는 달리) 삶에 대한 집착에 다른 말처럼 보인다. ( 홍상수 의 남자들이 섹스에 실패할 때 죽음을 떠올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설악산 권금성 정상에서 아슬아슬한 산행을 하는 이들을 보면서 자신과는 다른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라며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그런 상권의 모습을 횟집 수족관에서 ‘살아 있는’ 물고기와 병치시킨다. 살아 있지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 “임신시키려고 그래요?”, 사라진 금붕어 하지만 동시에 섹스는 그들에게 두려운 대상이기도 하다. ‘사랑해’라고 말하며 지숙과 섹스를 하려던 상권은 그녀가 “임신시키려고 그래요?”라고 말하자 멈칫한다. 이후 십 여 편의 영화를 돌아온 우리는 홍상수 의 남자들이 ‘사랑’라고 말할 때 이것이 곧 ‘섹스 하고 싶어’의 다른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 밤과 낮 >의 성남( 김영호 )을 제외하면 이 말을 부인에게 한 (유부)남은 없었다는 점도 함께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성남조차 부인의 임신 소식에 불안해한다. (성남의 목욕탕 꿈 장면을 떠올려 보라.) < 극장전 >에서 상원에게 (부인도 여자친구도 아닌) ‘첩’이 되어주겠다는 영실의 말은 섹스는 하지만 부인/가족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여기엔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 오! 수정 >)이지만, 그 짝이 ‘부인-임신-가족’으로 이어지는 것은 필사적으로 막고 싶어하는 일종의 저항감이 깃들어 있다. 마치 이 저항감을 반영이라도 하는 듯 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족은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어딘가 한쪽이 비어 있는 형태(<극장전> < 하하하 > < 다른 나라에서 >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로 나타난다. < 그 후 >에서 창숙과 사랑에 빠져 새벽에 집을 도망치듯 나오던 봉완( 권해효 )은 ‘아빠’라고 부르는 (부인 혹은 딸, 결국은 가족) 소리를 못 들은 척 하고 떠나 버린다. (부인의 임신, 혹은 딸의 등장에) ‘집’으로 돌아온 성남과 봉완이 오래가지 않아 또다시 집을 떠날 것이라는 예감은 근거 없는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상권은 아파트 주차장에서 갑작스럽게 후진하는 차에 부인과 아들이 치일 뻔 하자 불같이 화를 낸다. 하지만 아이/부인이 죽을 뻔한 것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아이/부인이 죽었으면 하는 자신의 은밀한 소망을 깨달은 데서 오는 두려움처럼 보인다. (이 장면에서 상권의 가족은 어디론가 외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이 외출은 주차장에서의 에피소드를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상권에게 아이와 부인은 속물에 가까운 교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이유이자 ‘사랑’하는 여자들과의 섹스를 숨겨야 하는 번거로운 방해물에 불과하다. 강릉에 다녀온 다음, 사라진 한 마리의 금붕어가 어디로 갔는지 상권은 알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지숙은 아마도 다시는 상권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 다시는 죽지 않기 위해서. 어쩌면 죽음의 반대편에서 ‘산다’는 건, 탐욕스럽고(교수 임용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간 노교수는 상권이 잊고 놓고 간 우산을 흡족하게 바라본다.), 속물 스러운(상권은 자신의 심부름을 했던 여직원에게 잔돈을 가지겠냐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고, 지나가는 개에 물릴까봐 전전긍긍하며, 원했던 교수직을 힘들게 얻은 다음 동료들과 고작 취중 섹스의 쾌감이나 논해야 한다.) 것일지도 모른다, 라고 < 강원도의 힘 >은 말한다. 이 영화 한편으로 홍상수 영화 모두를 아우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누군가 (홍상수의 ‘베스트’가 아니라) ‘홍상수 영화는 결국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 강원도의 힘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20년을 돌아 이제 <강원도의 힘>을 다시 생각해볼 시간이다.
‘혹시 내가 아는 그 백승빈 ?’ 십몇 년 전의 일이다. 싸이월드 방명록에 내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한 줄 글이 올라온다. 그 누군가는 십 대 초중반 시절의 내 정신을 지배했던 이웃집 형이다. 고3 수험생이 되어 그만둘 때까지 한때 나의 수학 과외 선생이었던 그는, 매년 새로 배정되는 우리 반 담임에 관해 꼭 필요한 논평을 해주던 졸업생 선배였고, 일요일 새벽이면 오락실 셔터문을 두드려 가장 먼저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기 앞에 나란히 앉던 친구이기도 했다. 한 살 차이도 괜히 주눅 들곤 하는 어린 시절에 한 번도 같은 건물로 등하교해본 적 없는 세 살 터울의 사이였지만, 우리는 5층짜리 아담한 아파트의 아랫집 윗집에 사는 이웃이었고, 엄마들끼리도 친했으므로 어렵거나 어색하지 않게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형이 없었고 그가 외동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레 형제처럼 지냈다. 형은 야구를 좋아해서 집에 야구장비가 많았다. 그와 취미를 공유하는데 내 운동신경이 형편없다는 사실은 그다지 장애가 되지 않았다. 형은 인내심이 많았고 나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정확히 말해, 흥미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지. 단순히 공을 주고받는 행위에 어떤 우주적 의미나 숨은 재미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그래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2017년 현재, 당장에라도 이 외딴 섬 같은 작업실을 뛰쳐나가 미친 듯 노를 저어 형과 캐치볼을 하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그 시간에 내가 단순히 흥미를 잃지 않으려고 애만 쓴 것은 아닌 게 확실하다. 캐치볼이 건전한 취미라고 한다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은 그 형의 위험한 습관이었다. 높고 폭이 좁은 담장이나 담벼락, 펜스나 철봉을 발견하면 굳이 그 위를 억지로 기어올라 아슬아슬 걸어보곤 했다. 겁이 많고 의심이 많은 아이인 나는 그를 따라 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럴 생각은 1도 없었지만, 위험천만하게 땅으로 착지하며 별일 아닌 척하던 형은 내게 절대로 자기를 따라 하지 마라고만 했다. 그것만 제외하면, 형은 공부 잘하는 모범생에, 운동도 다 잘하고, (일부러 져주지 않으면) 스트리트 파이터에 관한 한, 동네 레전드급이었기 때문에 십 대 초중반의 내 정신을 지배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존재였다. 오늘 이 글에서 소개할, 윌리엄 맥스웰의 「안녕, 내일 또 만나」라는 책 속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당시 내가 되고 싶어 하던 유의 아이였고, 나는 어떻게든 노력해 닮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는 얘기다. “너 칼라 보노프 알아?” 어느 날 저녁, 과외 수업 도중에 형이 묻는다. 나는 그게 뭐냐고 질문으로 대답하고, 그는 가방에서 AIWA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내며 침착하게 설명해준다. “칼라 보노프는 사람이고, 가수야.” 곧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낀 우리는 잔잔한 기타 반주와 함께, 영롱한 목소리의 여자가 나지막이 부르기 시작하는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듣는다. 마치 영어 듣기 평가할 때처럼의 집중력이라, “배 먹어라” 하면서 들어온 엄마가 책상 위에 배 두 쪽을 깎아놓은 접시를 놓고 가도 우리는 이어폰을 빼지 않는다. 당시의 내 귀엔, 엠씨스퀘어 숙면 모드에 가사를 붙여놓은 것처럼 들리는 그 곡은 ‘The Water is Wide’라는 제목의 노래다. 지금부터 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깔아놓고, 윌리엄 맥스웰의 「안녕, 내일 또 만나 So Long, See You Tomorrow」라는 책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윌리엄 맥스웰 윌리엄 맥스웰은 1936년부터 1975년까지 약 40년간 「뉴요커」 매거진의 편집장이었고, 「안녕, 내일 또 만나」는 그가 일흔두 살이 되던 1980년에 출간된 책이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어린 시절 함께 논 적이 있던 친구와 그의 가족을 둘러싼 비극을 대체로 담담하고 아주 사려 깊게 전달하는 이야기지만, 그 아래로 짙게 드리워진 노작가의 회한 섞인 어조는 이 이야기가 작가 본인의 어린 시절 경험을 토대로 한, ‘자전적 메타픽션’이라는 사실 때문에 조금은 더 구슬프게 들린다. 맥스웰 본인인 내레이터 ‘나’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면서 새로 재편되는 과정을 겪고 있는 예민한 소년이다. 그러던 중에 잠시 평범한 며칠 동안을 함께 놀았던 친구 ‘클레터스’는 ‘나’가 겪은 것과는 다른 이유로, 그 또한 자신의 세계가 송두리째 뒤바뀌는 사건을 겪게 된다. 여기서 두 아이가 겪은 일에 (독자들이 꼭 기억할 만한)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책은 어느 겨울 새벽, 조용한 마을 농장을 울리는 한 발의 총소리로 시작한다. 죽은 사람은 ‘로이드 윌슨’이라는 삼십 대 남자, 총을 쏜 사람은 친구였던 ‘클레런스 스미스’라는 사십 대 남자였는데, 이들은 서로 이웃에 살던 가난한 소작농들이었다. 깊은 우애와 끝없는 권태를 함께 나누던 이들 가족 사이에 언제부턴가 비밀스러운 불륜이 있었고, 우애와 권태는 폭력과 살인으로 변질되어 결국 모든 것이 끝장나 버린 것이다. 여기서 내레이터인 ‘나’와 함께 놀던 친구 ‘클레터스’는 살인자 클레런스 스미스의 아들이었고, 그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파토 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두 소년도 그렇게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몇 년 뒤, 시카고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두 소년은 복도를 지나치다 우연히 마주친다. 하지만 ‘나’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그를 아는 척하지 않고 지나가 버리고, 그 후 평생 자신의 그런 행동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이에 대한 윌리엄 맥스웰의 고백이 담긴, 책의 두 번째 챕터 첫 문단을 옮겨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작농의 피살 사건을 50년도 넘게 기억하는 건 첫째, 살인자가 내가 아는 이의 아버지였고, 둘째,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는 나중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이 없었다면 나는 그 사건을 아마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회상록이란 이름을 이 글에 붙여도 된다면) 이 회상록은 그때 내 잘못을 우회적으로 사과하려는 헛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바로, 책의 마지막 문단을 옮겨 적어 그의 ‘헛된 시도’가 어떤 질문과 대답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는지를 얘기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책을 읽을 분들을 위해 그냥 생략하기로 한다. 윌리엄 맥스웰이 이 오랜 이야기의 육중한 문을 어떻게 조심스럽고 사려 깊게 닫고 있는지를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로지 혼자서 구경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읽은 「안녕, 내일 또 만나」라는 책은, 윌리엄 맥스웰이 지난 수십 년간 이야기를 읽고 편집하고 만들어 오면서 해온, 자신의 작가적 고민을, 오래전 고등학교 복도에서 모른 척하고 지나가 버렸던 그 친구에게 보내는 회한 어린 사과문의 형태로 고스란히 담아낸,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다. ‘앨리스 먼로’ 같은 대작가가, 자신이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자기가 썼던 모든 글들을 윌리엄 맥스웰이 해냈던 방식대로 완성하겠다는 말에 소름이 돋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혹시 내가 아는 그 백승빈 ?’ 이쯤에서, 배경음악으로 깔아놓았던 ‘The Water is Wide’를 한 번 더 리플레이 시켜놓고 이웃집 그 형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 그 일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고 그 형은 재수생이던 어느 가을날 밤에 일어난다. 몇 달 전 같은 아파트의 윗집 아랫집에 살던 지난 5년을 끝으로, 우리 가족은 버스로 2코스가량 떨어진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 천천히 걸어가도 이십 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곳인 데다 그 전에 살던 곳과 별반 다르지 않는 평수와 구조의 아파트인데, 왜 굳이 이사까지 간 건지 지금도 난 잘 모르겠다. 그날 나는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으로 와서 “엄마, 라면!” 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마침, 온 집안을 벨 소리로 흔들어대는 전화를 신속하게 받아낸 엄마는 잠시 뒤, 내 방문을 벌컥 열어 라면은 네가 끓여 먹으라며 급하게 나갈 준비를 한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이 밤에 어디 가는 거냐고 묻는다. “502호 아줌마 죽었단다.” 502호 아줌마라면... 그 형의 엄만데. 막 벗었던 교복 바지를 다시 추켜올린 나는, 라면은 됐고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한다. 어딜 따라 오냐고 막 소리치는 엄마를 기필코 따라나선 나는 그 어둑한 밤길을 미친 듯이 함께 달린다. 엄마의 입에서 ‘자살’이라는 단어가 들리고 나서부터는 심장이 쿵쾅거려 뛰는 게 겁이 나지만, 우리는 서로의 손을 더 세게 꽉 잡으면서 저 멀리, 텔레비전 뉴스에서 많이 본 것 같은, 한 곳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자동차 불빛들을 향해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와 동시에, 점점 더 잘 들리게 되는 누군가의 괴성 소리, 그것은... 형의 목소리다. 아파트 주차장을 둘러싼 구경꾼들과 각층의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수십 명의 주민들이 웅성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것은, 그 형이 누군가의 차 위에 올라가서 괴성을 지르며 야구 배트로 차를 내려치고 있는 장면이다. 창문이 박살 나고 지붕이 내려앉던 그 커다랗고 까맣고 비싸 보이는 차의 소유주는 502호 아저씨, 그러니까 그 형의 아버지다. 지금 형은 타오르고 있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다. 놀란 엄마는 이웃집 아줌마들에게 달려가 숨어버리지만 나는 구경꾼들 사이에 꼼짝 못 하고 서 있기만 한다. 미리 도착해 있는 경찰들도 들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형을 어쩔 수 없다는 듯 보고만 있다. 그러다 곧 형이 미끌, 한다. 구경꾼들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소리가 터진다. 바닥으로 쿵, 떨어진 형이 이내 구겨진 자세가 되자 순식간에 달려간 경찰들이 그를 제압한다. 그것도 내가 처음 본 모습이다. 높은 곳에서 형이 떨어진 것 말이다. 형은 이내 또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로 울부짖으며 연신 쌍욕을 내뱉는다. 누군가를 죽일 거라는 말이 내 귀에 꽂힌다. 형이 경찰들에 끌려가며 차에 태워지는 모습을 나는 점점 뒤로 물러가면서 끝까지 쳐다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나는 이제 뒤 돌아 걸어간다. 무섭고 타오르는 것은 절대로 못 본 사람처럼 조용히 걸어서, 집으로. 가로등 불빛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어두운 갓길로만 걸어서, 형을 태운 경찰차가 지나가더라도 어둠 속의 나를 발견하지 못하게 갓길로만 걸어서 집으로 간다. 다음 날 아침에 엄마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남편의 오랜 불륜 사실을 알고 난 502호 아줌마가 그날 저녁에 화장실에서 목을 맸으며, 그 모습을 학원에서 돌아온 형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엄마에게 물으니, 엄마는 네가 뭘 어떻게 하긴 하냐는 듯 의뭉스런 얼굴이 되었다. 502호 아저씨에 대한 내 기억은 마주칠 때마다 내게 용돈 하라고 만 원씩이나 주는 고마운 분이었는데 이제 고마움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바뀌었고,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곧 트라우마로 바뀔 참이었다. 그해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다니며 학교를 다녔고, 대학입시성적에 만족하지 못했던 형은 재수생의 길을 선택해 학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 우리 가족이 왜 걸어서 이십 분 거리의 똑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간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이사를 가게 되면서 형과 내가 드물게 마주치는 일은 더 드물어 졌고,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초, 중학교와는 달리, 형이 다니지 않았던 학교여서 담임선생에 대해 형이 내게 해줄 논평도 없게 되었다. 우리는 조금씩 별말 없이 멀어지고 있었고, 엄마는 사람 사이란 게 원래 그런 거라고 했다. 한 번씩 들리는 얘기로 형은 그해에 대학에 가지 않았고, 바로 군대에 갔다고 했다. 나도 몇 년 뒤에 대학에 가고 얼마 뒤에 군대에 가면서 자연스럽게 그 형을 잊고 지냈다. 그러다 복학을 하고,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혹시 내가 아는 그 백승빈 ?’ 내 싸이월드 방명록에 그 형의 이름이 한 줄 글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후 며칠 동안이나 답글을 달지 않았다.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형의 이름을 본 순간, 언젠가 불길에 활활 타오르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던 내 몸짓이 생각났다. 나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형은 ‘내가 아는 백승빈 ?’ 이라고만 물었지만, 사실은 그 뒤에 ‘경찰차 안에서 이름을 몇 번이나 외쳤는데, 갓길에서 모른 척 고개 숙이고 걷던 그 백승빈 맞아?’ 를 생략한 것은 아닐까... 하는 식으로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런 걸 두고 죄책감이라고 하는 건가? 하지만 내가 그때 형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나?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경찰차 앞을 가로막고 창문을 두드리며 형을 울부짖었어야 했나? 그러다 다치니까 차 지붕에서 그만 내려오라는 얘기 정도나 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난, 갓길의 어둠 속에 숨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에 확인해본 방명록엔 형의 글이 삭제되어 있었고, 나는 그가 며칠 전 글을 남겼을 때 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순간, ‘혹시 내가 아는 백승빈 ?’ 뒤에 생략되었던 말은 (‘너 칼라 보노프 기억하냐?’) 정도였을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들었다. 참 얄궂기도 하지. 그래서 그날 나는 아마 울었던 것 같다. 칼라 보노프의 ‘The Water is Wide’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곡이 엠씨스퀘어 숙면 모드에 가사만 대충 붙인 것만 같았는데, 언젠가부터 내게 이 노래는 분노와 포효, 비탄과 오열을 예쁘게 숨기는 듯한 가사와 담담한 척하는 목소리에 꾹꾹 눌러 담아낸 아픈 이야기로 들린다. 그래서 일부러 찾아서 듣지는 않는다. 그 형도 생각나고, 이젠 세상에 없는 엄마의 손을 꽉 잡고 달려갔던 그 밤길도 생각나고, 뭐... 그렇다. 윌리엄 맥스웰은 나이 든 노인이 되어 오래 전 자신이 모른 척하고 지나쳤던 친구에게 소설의 형태로 아름다운 사과문을 남겼다. 죽기 전까지 수십 년 간, 나보코프, 업다이크, 샐린저, 치버, 오코너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읽고 쓰고 만들게 했던 그의 작가적 고민이 고스란히 마지막 장편소설 「안녕, 내일 또 만나」에 들어있다. ‘서로 상반된 감정이 너무 많이 얽혀 있어 우리는 삶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이야기꾼이 나서서 상황을 재배치하는 것일 터이다. 어쨌든 과거에 관한 한 우리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Too many conflicting emotional interests are involved for life ever to be wholly acceptable, and possibly it is the work of the storyteller to rearrange things so that they conform to this end. In any case, in talking about the past we lie with every breath we draw.’ 이 책을 내 마음대로 각색해 지금까지 보여준 영화의 주인공은 그 형이었다. 지난 시절에 관한 내 기억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재배치한 것도 있고, 상상에 가까운 짐작도 있다. 하지만, 형의 AIWA 워크맨을 통해 ‘칼라 보노프’를 같이 듣던 장면은 가짜일 수 없고, 차 지붕 위에서 활활 타오르다 떨어져 땅바닥에 구겨진 채 울부짖던 그의 모습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내 기억 속의 화신으로 남을 것이다. 형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기를 바란다. 당장에라도 이 외딴 섬 같은 작업실을 뛰쳐나가 미친 듯 노를 저어 그와 캐치볼을 하러 가고 싶다는 이 글 도입부의 내 마음을 형이 짐작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윌리엄 맥스웰의 방식을 감히 한 번 흉내 내며 이런 글을 써보았다. 내가 각색한 이 영화 안에서 형은, 언젠가 높은 곳에서 쿵, 하고 한 번 떨어졌지만 어떻게 해서 다시 꿋꿋하게 일어나 지금처럼 잘살게 되었는지를 기필코 보여주는, 당차고 아름다운 주인공일 것이다. 그런 주인공이라면 분명히 내게 다시 연락할 것이다. 그래서 별 말 없이 캐치볼을 하게 되는 거지. 그때 깔리는 사운드트랙이 칼라 보노프의 ‘The Water is Wide’라면 좀 이상한가? #1 펀 홈 #2 안녕, 내일 또 만나 #3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4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5 이모와의 여행, 그 외 몇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