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밀
- 감독
- 김재형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방주환, 홍지석, 신승호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비평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보면 늘 표정이 어두워지게 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아보려 한다. 밝은 얘기를 하고 싶다. 나는 지금 웃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또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한 남자가 어둠 속에서 등장한다. 이만희 감독의 1967년 작 < 원점 >의 오프닝이다. 양복 차림의 남자는 서류 가방을 든 채 건물의 지붕 위를 걷는다. 그는 곧 옥상을 통해 건물에 잠입하여 어떤 중요한 서류를 훔치는데, 그러다 이를 방해하는 악당을 만나 몸싸움을 펼치게 되고, 결국 그 자를 살해하게 된다. 이 13분짜리 오프닝 시퀀스에는 이게 전부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상한 부분들이 많다. 그에 관한 자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정성일 평론가가 목소리 코멘터리를 남긴 KOFA코멘터리극장 영상 을 통해 확인하면 좋을 것이고,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특별한 부분은 악당의 사인이다. 영화에서 악당은 ‘끼임사’한다. 남자를 잡으려다가 건물 문 앞의 내려오는 셔터에 얼굴이 끼어서 말이다. 끼인 얼굴의 표정은 밝지 않지만, 나는 지금 이 장면을 떠올리며 킥킥거리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장면의 웃음 포인트는 이 끼임으로 인해 남자가 자신의 본 목적인 서류를 챙겨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악당이 셔터에 끼이는 순간, 남자의 서류 가방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셔터와 딱딱한 서류 가방 사이에 악당이 끼는 바람에, 남자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원치 않는 살인을 저지른 것도 억울한데, 그로 인해 자신의 작업에 실패까지 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더 눈길이 가는 것은 분명 악당이다. 악당은 비록 범인을 잡는 것에는 실패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니 자신의 얼굴을 내려오는 셔터에 바쳐(또는 받쳐), 회사의 중요한 기밀이 유출되는 것을 막아낸다. 영화는 그의 끼인 얼굴을 잠깐 동안 보여주는데(그리고 곧이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이 오른다)… 아, 나는 지금껏 본 영화 중에서 이토록 짠한 악당의 퇴장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것일까. 과연 무엇을 위해 그곳에 자신의 얼굴을 밀어 넣었던 걸까. 대체 그 페이퍼엔 무엇이 적혀 있던 것일까. 악당과 몸싸움을 하기 직전, 페이퍼를 훔치려는 양복 차림의 남자(석구) 페이퍼에 적힌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땐 웃게 되지만, 비평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늘 어두운 표정을 짓게 된다. 비평 같은 걸 쓰려고 할 때 내 얼굴은 마치 어디에 끼인 듯한 표정이 되곤 하지만, ‘페이퍼에 무엇이 적혀 있었던 것일까’ 같은 비평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상상을 할 때는 만면에 미소가 번진다. 예전엔 그 끼인 자리에서, 영화와 현실 사이의 비좁은 틈에 내 큰 머리를 억지로 들이민 채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면, 언젠가부턴 그냥 자연스럽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곳에서 출발해 보려 노력하고 있다. 그게 내 작업과 미래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따져보는 건 이제는 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비평에 대해 생각할 때는, 그에 관한 걱정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표정이 어두워지는 거고, 또다시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등장하는 거고, 그러면 나는 황급히 13분 뒤로 넘어가 끼임사한 또 다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런데 바닥에 누워 있는 이 남자. 처음에 등장한 양복 차림의 그 남자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앞서 얘기한 <원점>의 오프닝은, 분명 두 인물이 등장하긴 하지만 결국 한 명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나와, 또 다른 나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기서 나는 중요한 페이퍼를 훔치러 잠입한 남자이기도 하고, 그걸 막기 위해 싸우는 악당이기도 하다. 훔치는 데 실패한 사람이기도 하고, 지키는 데 성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에 성공하고 무엇에 실패한 것인지, 보고 싶지만 동시에 보고 싶지 않은 그 내용이 무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실 더 알고 싶은 건 정성일 평론가의 페이퍼에 무엇이 적혀 있을까이다. 그가 진행하는 영화 토크 행사에 한 번이라도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궁금해할 그 두꺼운 A4 페이퍼 뭉치를 훔치고 싶다. (그라면 지금까지 작성한 모든 페이퍼들에 표지를 붙여 오래된 캐비닛에 연도별로 보관하고 있지 않을까?) 그걸 보면 뭔가 깨달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이를 막으려는 또 다른 내가 있다. 다른 사람의 페이퍼를 절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나. 그리고 다른 사람의 페이퍼를 보지 않은 채 온전히 나의 방법으로 써낸 나의 페이퍼를 읽고 있는 내가 있다. 그는 웃고 있다. 그럼 정성일 평론가는 <원점>의 코멘터리 원고를 쓸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페이퍼에 적힌 내용보다 그가 그걸 적을 때 지은 표정이 더 궁금하다. 페이퍼를 훔치려는 남자(훔치는 데 실패한 사람)와 그를 막으려는 악당(지키는 데 성공한 사람) 나의 원점을 떠올리면 씨네21 사무실로 당선 인터뷰를 하러 갔던 날이 생각난다. 속으론 정말 기분이 좋았지만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주 가끔은, 비평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다가 평소보다 더 어두운 표정이 지어질 때는, 그 인터뷰를 하러 가지 않았어야 했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임순례 감독의 < 제보자 >(2014)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박해일 이 연기한 탐사보도 PD 윤민철이 하는 대사다. “제보자 마음 바뀌기 전에 인터뷰부터 따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본 영화 속의 나만 알고 있(다고 믿)는 무언가를 다른 이들에게 ‘제보’하는 것이 영화평론가가 하는 작업이라면, 나는 애초에 그 제보를 하지 않아야 했거나 했더라도 인터뷰를 하지 않아야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혼자만의 작업으로 만족하지 않고 인터뷰를 해버렸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 평론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기에, 자꾸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계속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마음 바뀐 평론가의 얼굴을 떠올린다. 언젠가 마주칠지도 모르는 그 얼굴을 상상하면, 표정이 영 밝을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속으론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했던 때가 훨씬 많았다. 그럴 때마다 마음도 왔다 갔다 하고 표정도 이랬다저랬다 했지만, <원점>은 13분 지점에 멈춘 채 그대로 있다. 이쯤에서 <원점>의 결말이나 다른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겠으나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아보려 한다. 그게 궁금하다면 정성일 평론가의 코멘터리 영상을 보시기를 권한다. 대신 나는 웃는 얼굴로, 내가 선택한 이 끼인 곳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께 묻는다.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계시는가. 그 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으신가. 나의 페이퍼에 어떤 말들이 적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 앞으로 내 캐비닛에 쌓아 놓은 재밌는 제보 거리들을 공개할 수 있는 자리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기꺼이 얼굴을 들이밀 준비가 되어 있다. <제보자> 중 김철홍(영화평론가) l 영화에서 봤다고 하면서 이상한 말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 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최우수상 당선.
무해한 풍경과 친절한 예의 한낮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길가 한편의 나무 그늘 아래 귀가 잘 안 들리는 할머니가 농작물을 작은 소쿠리에 담아 팔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길목에서 할머니는 맹목적일 정도로 성실하게 자리를 지킨다. 매일 늦은 오후 퇴근해 자전거를 타고 동생이 있는 집에 돌아가는 계란장수 청년은 말도 없이 비닐봉투에 계란 다섯 개를 담아 할머니에게 주고 떠난다. 눈이 부시도록 쨍한 연두 빛 논밭을 가르며 달려가는 자전거 위로 분홍과 연보라가 섞인 노을이 하늘에 스며든다. 홍의정 감독의 첫 장편영화 < 소리도 없이 >는 인스타그램의 여행 포스팅에 등장할 법한 무해하고 환상적인 풍경을 오프닝의 시체 처리 장면 바로 다음에 붙인다. 시골 장터의 평범한 계란 장수처럼 보였던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은 조직 폭력배들에게 고문과 살인을 위한 장소를 제공하고 깔끔하게 시체처리까지 해주는 사업장을 운영 중이다. 이들의 일은 공유오피스 대여사업처럼 일상적이고 체계화되어 있다. 꼼꼼하게 우비, 고무장갑, 위생모자를 착용하던 창복은 자신이 입은 노란색 우비가 태인이 어린 시절 입던 것이라며 회상에 젖기까지 한다. 때리는 사람의 신장에 맞춰 사람을 매달고, 피가 묻지 않게 겉옷을 보관해주고, 바닥에 넓게 비닐을 깔아주는 작업과정은 전문적이고 분업화되어있다. 이들은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업계의 프로다. 하지만 창복과 태인은 왜 그 사람이 납치되어 살해당하는지 절대 묻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잠시 그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고 안타까워할 수는 있어도 거기까지이다. 곧 살해당할 그는 조립라인 위의 처리해야할 일거리에 불과하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은 그들의 몫이 아니다. 폭력과 살인의 끄트머리에서 포장과 폐기를 담당하는 창복과 태인은 스스로를 악인이라 생각지 않는다. 특히 창복은 죄를 사해줄 것이라 믿는 다종다양한 종교에 기대 죄책감을 가볍게 털어 버리고, 근면성실과 겸손을 강조하며 지루한 충고를 쏟아내고, 소소한 배려와 선행을 베풀며 자신을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이라 믿는다. 창복은 ‘다 너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기복신앙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다. 태인은 불만이 있어 보이지만 창복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는다. 태인은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누구도 그의 의견을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마지막 ‘판단’을 내린 후 생각을 멈춰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는 더 이상 소통하기를 거부한다. 창복과 태인은 가능한 다른 이들의 삶에 얽히지 않으며 그들의 세계를 최대한 축소하고 경량화한다. 그들의 삶에 타인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류하고 돈 벌며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친절과 예의이다. 이 영화에서는 언뜻 악인과 선인의 경계가 모호해 보인다. 드러난 행위만 보면 모두가 성실하게 자기 일 잘 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예의바른 태도가 도덕과 윤리를 대치한다. 그들은 꼬박꼬박 ‘선생님’ ‘실장님’ ‘부장님’이라 부르며 서로를 높이는 호칭을 붙이고 존대를 한다. 일이 끝나면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말도 잊지 않는다. 조직 폭력배 실장은 태인이 말을 안(못) 한다고 하자 입을 크게 벌리고 천천히 말하며 입술을 읽게 하는 ‘배려’를 베푼다. 유괴 아동을 인계한 범죄자들은 아이들이 잠시라도 편하게 머물도록 알록달록한 가구와 장난감이 있는 놀이방을 갖춰둔다. 하지만 이 모든 친절과 예의범절, 상대방을 배려하는 ‘선한’ 행위에 실제로 타인의 의향과 행위의 맥락은 빠져있다. 그들이 공들여 제공하는 태도와 형식은 자기 목적과 이익을 위한 것이다. <소리도 없이>는 오프닝에서 상세한 시체처리 과정과 목가적인 농촌풍경을 붙여, 형식과 내용의 뒤틀어짐, 순간적인 기분과 지속적인 정동의 불일치, 사건의 맥락과 단발적 행동의 모순이 팽배한 동시대성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창복의 ‘노란색 우비’ 대사는 둘이 오래 함께 일한 사이좋은 직장 선후배나 유사 부자관계인 것처럼 들리지만, 곱씹어보면 창복이 태인을 어릴 때부터 착취해왔다는 사실을 가늠해볼 수 있다. 혹은 창복이 태인을 납치한 걸 수도 있다. 창복과 태인의 관계에서 태인은 분명 피해자다. 토끼의 기지와 별주부의 어리숙함 홍의정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 때 <별주부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별주부전>에서 별주부는 용왕의 병 치료에 쓸 약으로 토끼의 간을 구하기 위해 뭍으로 올라온다. 별주부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며 수궁으로 토끼를 유인하지만, 토끼는 육지에 간을 두고 왔다는 기지를 발휘해 목숨을 구한다. <소리도 없이>에서 태인은 별주부이고 유괴 아동 초희(문승아)가 토끼다. 납치된 초희는 토끼 가면까지 쓰고 있다. 창복과 태인은 유괴조차 자기들의 의지로 행하지 않는다. 영화는 ‘의도치 않게’, ‘엉겁결에’를 강조한다. 수동성의 강조는 가해자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현실에서 ‘어쩔 수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다, 피치 못했다’는 모두 가해자들의 반복되는 전형적인 대사가 아닌가? 처음에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진행되는 사건 속에서 선택의 계기는 늘 존재했다. 분명 피해가 발생했고 돈을 받아내기 위한 인질이 된 초희는 그 피해자이다. 그런데 가해자가 분명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질적인 세계의 초희가 태인의 삶의 반경에 들어오게 되면서 태인은 처음으로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피해자인 초희가 역으로 자신과 동생을 도와주는 행동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초희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창복과 태인의 기분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난장판인 집안을 치우고 태인의 동생 문주를 씻기고 식사예절을 가르친다. 방치되어있던 문주는 교육을 잘 받은 중산층 가족의 초희를 만나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태인조차도 이러한 초희에게 마음을 연다. 마음의 동요는 타인을 인지하게 하고 그것은 생각과 판단을 요청한다. 별주부 역시 창복과 태인처럼 자기 의지보다는 용왕에 대한 충심과 자기 관직의 수호를 위해 움직인다. 이 우화에서 토끼는 낯선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상황을 판단한다. 뭍에서도 토끼는 약자이기 때문에 늘 포식자들의 눈치를 보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기위해선 머리가 좋아야 한다. 용왕이 간을 원할 때 발휘한 기지는 갑자기 생겨난 능력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들만 귀하게 여기는 집안에서 차별을 받으며 자랐을 초희는 부모의 맘에 들기 위해 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속내를 숨기며 살아왔을 것이다. 태인의 집에서 초희가 한 행동은 토끼의 기지와 유사하다. 그렇다고 태인과 문주, 부모를 향한 초희의 마음이 완전히 가짜인 것은 아니다. 그들 사이의 감정의 교류는 순간적으로 진짜일 수 있다. 태인이 초희를 장기밀매업자에게 보냈지만 마음을 바꿔 구한 것, 초희가 무서울까봐 화장실 밖에서 손뼉을 쳐준 것, 유괴와 몸값 요구에 참여했지만 가족들에게 돌려보낸 것도 진짜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별적 선행이 애초의 가해를 뒤집을 순 없다. 반복해 말하지만 태인은 유괴범이고 가해자이며, 초희는 유괴된 아동이며 피해자이다. 영화는 이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태인을 약자이자 피해자로 만드는 창복을 제거한다. 태인의 선택을 대리하는 창복이 사라지면서 태인은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게 된다. 그 순간에 태인은 조직폭력배 실장이 죽으면서 남기고 간 양복을 입는다. 양복은 좁디좁은 자신의 세계 밖의 다른 삶을 상징한다. 그러나 선악을 판단하고 도덕과 가치를 사유하는 주체적 삶은 그리 쉽지 않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태인은 자신의 선택으로 가장 선한 일을 했다고 판단한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유괴범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홍의정 감독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피해 생존자이자 머리를 잘 쓰는 주체적인 토끼보다는 어리숙하고 용왕의 말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별주부에 감정이입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별주부는 용왕만큼은 아니지만 토끼를 납치한 가해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초희는 가해자를 정확하게 지목하고 호명한다. 태인은 그 지명이 힘에 겨운 듯 도망치며 동경했던 ‘사유하는 주체’의 양복을 벗어 던진다. 도덕이 사라진 시대의 알레고리 발터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낭만주의 예술에서 상징에 비해 폄하 당하던 수사인 알레고리를 재개념화하고 조명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상징은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순간적으로 총체성을 이루며 명징하고 스스로 완결성을 갖는 아름다운 기호이다. 반면 알레고리는 우연적이고 무정형적이며 여러 시간적 계기 속에서 다의적으로 해석되고 역사적 번역과 파편적 몽타주의 작동을 요구한다. 알레고리에서 의미는 은폐되어있음으로 해서 소통의 (불)가능성과 다의성이라는 의미작용 그 자체를 노출시킨다. <소리도 없이>는 <별주부전>처럼 피해와 가해, 즉 도덕의 알레고리이다. 벤야민이 재개념화한 알레고리처럼 현대 사회에서 피해와 개해의 문제는 명징하지 않으며 복잡하다.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이라는 통일된 정형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위치도 다중적이고 뒤집어질 수 있다. 피해자는 주체적이고 똑똑할 수 있다. 가해자는 소소한 선행을 베풀고 예의바르거나 어리숙할 수 있다. 또한 한 사건에서 가해자인 이가 다른 사건에서는 피해자일 수 있다. 게다가 현대의 소비주의 사회에서 가치와 형식은 쉽게 뒤집어진다. 무해한 아름다운 풍경, 선행, 예의 이런 것들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모두가 고객이고 모든 행위가 ‘손해 보지 않으려는’ 거래일뿐인 시대에 단순히 서비스의 형식일 뿐이다. ‘착한 가격’, ‘착한 소비’처럼 말이다. 역으로 사람은 손쉽게 상품이 된다. 유괴범과 장기밀매업자들의 대화에서 아이들은 고객 만족을 위해 품질을 유지해야 하는 거래 품목일 뿐이다. 도덕이 사라진 시대, 피해자와 가해자의 정형화된 모습도 부재하고 그 위치성도 복합적인 시대에, 알레고리의 서사는 그 불일치와 혼란을 드러낸다. 그러나 알레고리가 각 사건에 분명히 존재하는 피해와 가해 사실을 지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알레고리는 피해와 가해가 발생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양상이 기대한 바와 다르다며 혼란스러워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고전 서사 <별주부전>이 토끼의 ‘간계’와 별주부의 ‘충심과 어리숙함’을 강조하며 순간적으로 감정이입을 뒤집지만 납치 사건에서 피해자는 토끼요 가해자는 별주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피해와 가해의 서사와 캐릭터는 복잡하고 기대를 벗어나 혼란스럽게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피해자와 가해자 혹은 피해와 가해 사실을 규정하고 밝혀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양복의 무게 태인은 양복을 입으면서 처음으로 생각하는 주체가 된다. 그의 삶에서 이 계기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 그는 사유와 판단의 주체로서 가해자임을 받아들인 것인가, 아니면 사유 없는 행동을 수행하며 테이프에 녹음된 기도소리에 기대어 살아갈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즉석 사진의 인화과정처럼 검은 무지 화면 이후 서서히 드러나는 ‘소리도 없이’라는 제목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영화는 태인처럼 뒤늦게 자신을 호명한다. 자신도 알지 못하게, 의도치 않게 ‘괴물’이 된 태인은 사유를 통해 대면한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이 영화의 처음 제목은 ‘소리도 없이 괴물이 된다’였다). 타이틀씬 이후 영화는 창복, 태인, 초희, 문주가 따뜻한 햇살 아래 즉석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멜랑콜리한 이 사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희가 부모에게 보낼 사진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었던 사진과 비교해 무엇이 더 진실인가. 둘 다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저 순간의 넷은 즐거웠지만 그렇다고 초희가 유괴된 아동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이미지는 상징처럼 순간적이다. 순간을 포착한 스냅 사진 이미지는 알레고리 속에서 총체화를 방해하는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의미작용이 가능해진다. 말하기를 멈췄던 태인은 그 스스로가 소통불가능성 시대 의미작용의 알레고리였다. 사유를 시작하고 가해자가 스스로 가해자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소통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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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 KOFA가 주목한 2018년 한국영화’의 리스트가 발표됐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이 리스트에 참여한 초기에는 열 편의 작품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다. 10편에 다 넣지 못한 작품의 수가 항상 대여섯 편 이상이 되었다. 그래서 매번 깊은 고심 끝에 그만큼의 작품을 제외시켜야 했다. 그런데 근래 몇 해에는 그런 작품의 수가 한두 편 정도밖에 안 된다. 글쎄다, 정확한 이유는 나 자신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계속 참여하다 보니 내 결정 기준이 단호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사이에 한국영화가 빈곤해진 탓인지 좀 더 생각해볼 문제다. 후자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말했듯이 올해도 10편을 선택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고, 내가 선택한 작품과 전체 결과는 언제나처럼 적당한 선에서 사무송(使無訟)한 모양새다.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해 아쉬운 작품의 리뷰를 의뢰받고 고민했다. 개인의 리스트를 별도로 발표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작품을 골라야 할지가 그 이유였다. 내 리스트와 상관없이 우선 몇몇 작품의 제목을 (ㄱㄴㄷ 순으로) 언급만 하자면 < 1급기밀 >( 홍기선 ), < 곤지암 >( 정범식 ), < 누에치던 방 >( 이완민 ), < 인랑 >( 김지운 ), < 춘천, 춘천 >( 장우진 ), < 파란입이 달린 얼굴 >(김수정)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독립영화, 상업영화의 구분과 별개로 각자의 영역에서 제 역할을 했고 또렷한 목소리를 낸 작품들이다. 위 작품들은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작년 한국영화를 풍성하게 만든 이름들임을 확신한다. 리뷰 대상으로 선택한 작품은 < 홈 >이다. 신인 감독 김종우 의 데뷔작인 <홈>은 작년 5월 30일에 개봉해 8천 명 정도의 관객을 모았다. 비평적인 수난은 더욱 심해서 이 영화를 제대로 조명한 글을 거의 보지 못했다. 연말에 발표된 리스트에서 이 영화가 언급조차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청소년 인물, 가족과 사회를 다루는 점잖은 태도나 영화가 이야기하는 소중한 주제를 감안하면 이 영화가 감내해야 했을 외면의 정도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나는 작년에 정부 정책을 다루는 매체에 이 영화에 관한 칼럼을 보낸 적이 있다. 리뷰는 아니었고, 영화가 다루는 이런저런 문제를 놓고 정책적인 해결책 등을 물어보는 글이었다. <홈>의 특성은 그러한 데 있다. 눈물을 흘리거나 감동을 받는 선에서 영화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런 경험이 실제 생활로 넘어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주인공 소년에게 닥친 환경의 안타까움이 질문으로 이어지고 해결 방안은 없을까, 라고 생각하는 데 이르는 것이다. 변화를 초래하는 경험을 보통 다큐멘터리로부터 얻곤 하던 나로선 각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줄거리를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홈>은 졸지에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년의 이야기다. 고아는 아닌데 고아보다 더한 상황이 준호( 이효제 분)에게 일어난다. 소년의 가족 관계는 조금 복잡하다. 준호의 어머니는 준호의 아빠와 이혼한 상황에서 다른 유부남 강원재( 허준석 분)와 관계를 맺었고 그들 사이에서 성호( 임태풍 분)가 태어났다. 원재는 부인과의 사이에 딸 지영( 김하나 분)을 두었다. 어느 날 아침, 원재의 부인이 준호의 엄마를 찾아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교통사고가 발생해, 두 여인은 의식불명의 상태로 나란히 병실에 누워 있게 된다. 원재가 아들 성호를 데려가면서 준호는 홀로 집에 남는다. 소년의 처지를 가엽게 여긴 원재는 준호에게 두 동생과 함께 살 기회를 만들어 주는데, 원재의 착한 결정은 상황을 알아차린 처가의 분을 사고 만다. 청소년이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이 종종 범하는 실수는 아이와 성인 사이를 이분법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 아이들은 지나치게 순수하고, 때가 묻은 폭력적인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파괴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더 이상 고전적이지도 않고 별다른 감동도 주지 못한다. 영화가 두 개의 세계 사이로 선명하게 그어놓은 선이 작위적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어른들의 시선 아래 만들어진 영화는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왜곡하기도 한다. 하지만 근래 만들어진 어린이 혹은 청소년의 성장영화는 영화의 시선을 인물의 눈높이에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홈>의 제작사인 ‘아토’는 이 영화 외에도 < 우리들 >(2016, 윤가은), < 용순 >(2016, 신준), < 살아남은 아이 >(2017, 신동석) 등의 작품을 연이어 제작해왔다. 내면적으로 충실한 작품을 통해 한국영화의 경계를 확장하는 방식은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중학생인 준호의 나이로 치면 <홈>은 <우리들>과 <용순> 사이에 놓인다. 두 동생 앞에서는 어른스러워 보이는 준호는 아직 성인의 세계가 낯설고 두려운 소년이다. 무엇보다 성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다. 그런 준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곧 <홈>의 태도다. 엄마가 병실에 누운 후, 준호가 처한 상황은 급변한다. 영화는 덜컹거리는 상황을 곱게 포장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영화의 태도가 불편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소년의 시선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극중 복잡한 어른들의 관계, 어른들의 처지가 상세하게 그려지지 않은 건, 그것을 대하는 소년에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친부는 딱한 상황에 처한 아들을 거두지 않으며, 원재는 처가와의 갈등을 소년에게 설명할 길이 없다. 준호가 주변 상황에 대처하는 수준은 더욱 어수룩할 수밖에 없다. 어찌하지 못할 때마다 소년의 어깨는 자꾸 움츠러든다. 원재의 호의에 보답한답시고 편의점 물건을 훔쳐간 아이들과 싸움을 벌이고 끝내 물건을 되찾아온 장면에서는 눈물을 감추기 힘들다. 소년은 상처투성이의 입으로 온 힘을 다해 “같이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아니라 소년의 마음을 따라가다 얻게 되는 그런 출렁거림이 <홈>의 미덕이다. 소년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행복하게 사는 일은 <홈>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후반부에서 소년은 아주 어두운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소년에게 어마어마한 시련이 닥치는 것으로 끝맺지도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로 전개되는 과정은 얼핏, 준호라는 어린 존재가 세상에서 홀로 서는 성장담을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도입부로 돌아가 보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준호는 패스를 하지 않고 홀로 골을 시도하려다 실책을 범해 친구들로부터 책망을 받는다. 엔딩에 앞서 영화는 소년이 거쳐온 공간들을 한 번씩 마주한다. 그 공간을 거치며 보낸 시간 속에서 소년은 성장했을까. 영화의 엔딩, 다시 운동장에서 선 준호는 별 무리 없이 친구들과 함께 호흡을 나눈다. 표정도 밝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만 하면 되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일순간의 응원에 스스로 만족하고 떠나려던 나를 돌려세우고 만다. 카메라는 줄곧 소년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으나, 문득 나를 향한 시선을 느끼게 된다. <홈>은 ‘함께 사는 것’을 박탈당한 소년의 외로움에 관한 영화다, 소년에게 그런 세계를 던져주고도 담담하게 지내는 나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하는 영화다. 끝으로 소년 준호를 아름답게 연기한 배우 이효제가 연기상의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은, 이 영화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묻힌 것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글을 다 쓴 뒤 김종우 감독이 「씨네21」과 나눈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8살 때 형과 헤어졌다. 형은 영천 시골에 있었고 나는 부산으로 이사왔다. 형이 고등학생 때였는데, 그때부터 형은 혼자 살았다. 왜 형이랑 떨어져 사는지 몰랐는데, 중학생 때 어머니가 우리 가족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돌이켜보면 그때 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족관계를 떠나 당시 형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너무 힘들고 아팠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밝혔다. 영화에서 유달리 진실함이 느껴졌는데, 감독 자신에게서 출발한 이야기라 더 그랬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