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음식기행
- 감독
- 윤길용
- 제작년도
- 2004
- 출연
- 양미경
사진: Marry Ellen Mark, “ Apocalypse Now ”, IMDb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 지옥의 묵시록 >(1979)은 당시 일본 개봉 제목 ‘地獄の黙示録’을 그대로 활용해 번역되었으나, 원제 ‘Apocalypse Now’는 사실 ‘바로 지금 이곳이 지옥’ 또는 ‘지금 이 순간이 세상의 종말’이라는 처연한 고발, 좌절, 참회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개봉한 지 무척 오랜 시간이 흘렀고(감독 확장판(Redux, 2001)을 기점으로 해도) 이후 직접적 영향을 받은 수작들이 여럿 등장했음에도, 여전히 ‘탁월한 전쟁 영화 중 하나’ 정도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지옥의 묵시록>은 걸작이라는 평가를 넘어 문명과 야만, 이성과 광기, 그리고 예술과 역사-현실의 경계를 짓이기는 정교하며 무자비한 실험이다. 이 영화는 내게 전쟁의 잔혹함을 넘어, 소리와 이미지가 어떻게 관객을 사로잡고 내면의 심연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는 음악을 비롯한 창작 작업의 범위를 넘어 내 삶 전반에 깊이 스며들었다. 영화는 문명의 야만을 파헤쳤다고 평가받는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1899)을 기반으로 하지만, 식민 시절 콩고에서 베트남 전쟁으로 배경을 치환한 단순한 서술적 흐름에 기대지 않는다. 몽환적인 편집과 공간을 압도하는 사운드 디자인, 그리고 음산하게 폭발하는 음악들이 혼재하며 관객을 전장의 무질서 속으로 밀어 넣는다. 스무 살 무렵 친구의 강권으로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영화를 통해 감각적으로 압도되는 경험을 했다. 특히 록 밴드 더 도어스(The Doors)의 <The End>(1967)가 흐르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불타는 정글 위를 비행하는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와 주인공 윌라드 대위(마틴 쉰)가 머무는 숙소 천장팬의 움직임이 하나의 악보처럼 맞물릴 때, 나는 영화 속에서 음악이 보조적 역할을 하는 배경음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심리적 공간을 창조하는 도구임을 깨달았다. 불타는 정글과 헬리콥터, 천장팬, 그리고 윌라드 대위가 겹쳐지는 영화 초반부 영화 속 서사의 시작점인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은 니체적 의미에서 초인적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 전체를 기준으로 무척 적은 분량인 그의 대사는 한 음절 한 음절이 묵직한 무게를 공유하며 관객을 사로잡는다. “공포는 얼굴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공포와 친하게 지내야 해(Horror has a face... and you must make a friend of horror.)”라는 그의 읊조림은 전쟁터의 참혹한 현실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한계를 암시하며 질문한다. 영화에서 음악은 영상의 보조재가 아니라 핵심으로 자리하며 인물들의 심리, 이념, 광기를 대변한다. 헬리콥터 부대가 민가를 향해 무차별적 공격을 퍼붓는 유명한 장면에서 흐르는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Ride of the Valkyries: Prelude to Act III)>은 단순한 감정 고양의 장치가 아니라, 전쟁 자체를 하나의 장엄한 스펙터클로 완성하며 폭력에 대한 고발과 창작-예술의 경계, 동시에 오락 산업으로서의 영화라는 뒤엉킨 모순적 현실마저 깨진 거울마냥 선연하게 드러낸다. 커츠 대령, <발퀴레의 기행>이 흐르는 전투 장면 (사진: "Apocalypse Now"( 1 , 2 , 3 ), IMDb) 모임 별은 지난 25년간 소속이 없는 독립적인 밴드이자 브랜딩/디자인 스튜디오로 활동해왔다. 우리 팀은 분명 통상적인 영화음악 감독은 아니지만, <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에 참여한 이후 꾸준히 학생 영화, 실험 영화, 저자본 영화 작업들에 참여해 왔다. 가능한 상업적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기 위해 애써온 우리에게, <지옥의 묵시록>의 제작 과정에서 감독과 출연진, 스태프가 함께 만들어낸 예측 불가능성의 미학과 실험 정신은 여전히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다. 최근 담당한 영화 < 폭설 >(윤수익, 2023)에서는 서퍼들의 몸을 때리는 차디찬 겨울 파도소리와 낡은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들에서 뽑아낸 극한적 소음들을, < 힘을 낼 시간 >(남궁선, 2024)에서는 클래식 기타 연주와 랜덤 알고리즘 베이스의 VST 악기 패턴들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꾸준히 작은 실험들을 수행 중이다. 귀를 사로잡는 음률 보다는 반복되는 패턴 속에 미묘하고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주어, 청자가 음악을 뚜렷이 인식하지 않는 상태로 영화 속 서사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폭설>과 <힘을 낼 시간>의 음악 (이미지 클릭) 짧지 않은 세월이 지나 돌아보니 ‘업계 표준’에서 벗어난 활동 방식과 작법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다양한 예술가들, 기관, 기업들과 함께 예술, 상업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새로운 시도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가진 여러 실무 담당자의 고마운 배려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또한 새로이 작업을 시작하는 독립적인 젊은 예술가들과 기획자들에게 작게나마 실질적 도움이 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고 있고, 새삼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다짐한다. 코폴라는 <지옥의 묵시록>을 만들며 마주한 끊임없는 문제와 막대한 혼돈을 고스란히 작품 안에 담아내며 영화를 완성했다. 불확실성과 모순의 한복판에서 탄생한 작품은 단순한 작가의 종속물, 재현물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온전한 실체가 되었다. <지옥의 묵시록>이 없었다면, 내가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혹시라도 아직 영화를 감상하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1979년의 최초 개봉 버전, 2001년 공개된 리덕스(Redux), 2019년 파이널 컷(Final Cut) 중 단연 리덕스 를 추천드린다. 조태상(모임 별 작곡가, 디자이너) l 모임 별( Byul.org )은 우연히 만난 친구들의 술자리 시낭송회에서 시작되었다. 기본적으로 여전히 친한 친구들의 술모임이며,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며 녹음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일상을 기록 중이다. 김경렴, 서현정, 최원겸, 황소윤, 오태경, 김수빈, 조태상, 장용석, 이선주로 구성되어 있다. 조태상은 모임 별에서 작곡과 디자인을 담당한다. 2012년 정규음반 <아편굴 처녀가 들려준 이야기>, 2017년 <밤도깨비들을 위한 선곡집>, 2019년 <주인 없는 금>, 2024년 <우리 개> 등을 발매했고, <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 < 힘을 낼 시간 >(남궁선, 2024) 등의 영화에 음악 작업으로 참여했다.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영화감독의 투신자살 시퀀스로 담긴 충격적인 영화가 있다. 심지어 연기한 사람은 해당 영화의 감독( 이장호 ) 본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인공들이 웃통을 벗어 던지고 국회의사당에서 기괴한 춤을 추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바로 1984년 개봉작, 영화 < 바보선언 >의 도입부와 결말이다. 개봉 연도를 보면 금세 눈치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제5공화국 전두환 독재 정권의 악행이 가장 극에 치달을 때 제작되고 개봉된 영화이다.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을 검색해 보면, 이 영화는 서슬 퍼런 정부의 검열을 피하여 어떻게든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자포자기한 상태(김동원, 2008)’에서 만들어진 괴작이자 걸작이라는 평이 대다수이다. 검열을 피하고자 극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행으로 채워놓고, 촬영조차도 기행 그 자체였던 사실 덕분에 역설적으로 1980년대 초반,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초현대적인 함의와 시사점을 주는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신군부 검열 당국이 풍자와 해학에 조예가 깊었거나, 혹은 영화를 보는 눈(교양)을 더욱 갖췄더라면 이 영화 또한 가위질을 당했을 수 있었겠으나 천만다행으로 그러지 못했던 듯 하다. 덕분에 우리는 1980년대 초반 서울을 중심으로, 비인간적인 현대사회(혹은 정치 환경)에서 소외당한 이들이 거니는 한국의 도시공간을 ‘괴상한 시각’으로 2024년 지금 이 시점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는 어떤 공간이 어떤 시각으로 담겨져 있는지 주요 장면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하월곡동 빈민가 영화의 인트로는 주인공인 동칠( 김명곤 )이 하월곡동 빈민촌 주거지를 걸어 내려오는 시퀀스로부터 시작된다. 수 초 동안 마을 주민들이 마치 축제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노는 모습을 카메라는 잠시 비추는데, 이 영화에서 ‘인간적인 도시공동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사실상 마지막 장면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다리가 불편한 동칠이지만, 수많은 자동차가 오고가는 큰길에는 횡단보도가 없기 때문에 육교를 지나가야만 한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 지역들에서는 재개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며 영화 속에 담긴 야트막한 서민 주거지의 모습은 머지 않아 완전히 사라질 지도 모른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하월곡동 빈민가.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였다. 하월곡동의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한데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 이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일지도 모른다. 명동과 을지로입구 아마 동칠은 영화 속에서도 잠시 비춰진 8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한 것일까, 다음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명동과 을지로입구 일대를 비춘다. 깔끔하게 정리된 길가, 산뜻한 중형차(현대 그라나다), 고동빛깔의 미도파 백화점과 갓 개업한 롯데백화점 본점과 누가 봐도 썩 세련되지 못한 모습의 동칠은 내내 부조화를 이룬다. 카메라가 미도파와 롯데백화점을 올려다보는 씬은 영화 < 오발탄 >(유현목, 1961)에서 주인공 철호( 김진규 )가 이 부근을 걷는 씬을 연상케한다. 촬영 각도와 흑백·컬러 여부가 다르긴 하지만, 소외되었거나 불쌍한 시민과 화려한 서울 속 백화점 간의 대비만한 극적인 표현 수단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끊임없는 자동차의 행렬과 미도파 백화점(좌측), 롯데백화점 명동본점(우측)이 추레한 차림의 동칠 뒤편을 장식한다. 당대 최고급 승용차였던 현대 그라나다와, 명동 거리를 정처없이 누비는 동칠의 조우. 이대 앞과 신촌 이윽고 동칠은 청계5가 부근의 어느 빌딩에서 투신한 의문의 영화감독의 옷가지와 장신구 등을 탈취한다. 카메라는 빌딩의 옥상에서 청계고가도로와 그 인근 평화시장을 훑다가, 이화여대 정문 앞 번화가를 타임랩스로 추적한다. 장장 1분 동안 이어지는 이 시퀀스는 4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감탄을 절로 자아낼 정도로 지극히 현대적이다. 일부러 간판과 옷차림과 자동차만을 옛날 것을 가져다가 요즘 찍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1983년의 이대 앞은 40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건너뛰어 2024년 시청자의 눈동자에 내리꽂힌다. 나아가 이대 앞의 상권은 육교에서 동칠이 한눈에 반한 ‘가짜 여대생’ 혜영( 이보희 )이 도시적인 소비를 마음껏 누리는 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부족함 없이 해낸다. 실은 매춘부이지만 그림 같은 대학생의 생활을 동경하는 혜영과, 그 뒤를 쫓는 동칠, 그리고 이 둘을 포착하는 카메라를 통해 우리는 1983년의 대학가 상권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다. 번화하기 그지 없는 이화여대 정문 앞의 풍경. 지금도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대 앞 골목을 누비는 여대생들과 차량의 행렬. 40년이 지난 지금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이 씬을 재현하면 어떨까. 이런 혜영을 어떻게든 납치하고자 하는 동칠은 우연히 마주친 자동차 정비공인 육덕( 이희성 )의 택시에 올라타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포니 택시가 이대 앞과 신촌 기차역 앞을 위험천만하게 종횡무진하며 사실상 카 체이스와 비슷한 활약을 펼치는 점도 볼 만한 부분이다. 16분 언저리에 누가봐도 교통 통제라곤 없이 이대 정문으로 포니 택시가 돌진하는 씬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거 무슨 짓인가?” 싶을 정도로 제법 긴박한 느낌을 준다. 이대 정문으로 돌진하는 육덕의 택시. 깜짝 놀란 학생들과 달려나온 경비원의 모습이 뚜렷하게 담겼다. 청량리역 앞 광장 40분부터 45분까지 장장 5분 동안, 이번에는 청량리역 앞 광장에서의 시퀀스가 이어진다. 이대 앞 시퀀스가 그랬듯이, 제법 멀리서 망원렌즈로 인파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주인공들을 담아내는 데에 여념이 없다. 어떻게든 ‘장사’를 하려고 남자에게 접근하는 혜영,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고군분투하는 동칠과 육덕의 씬이 교차되는 와중에,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인파의 모습은 한 편의 역전 광장 다큐멘터리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화 속 모습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지금은 화려하기 그지 없는 롯데백화점과 코앞에 들어선 200미터급 초고층 주상복합, 현대적인 버스 승강장으로 인해 이 시절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당시에 갓 등장했던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롯데리아의 광고, 청량리역 맞은편의 미주아파트와 그 상가건물의 모습만이 40년 전과 지금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여겨진다. 망원으로 담아낸 청량리역 앞 광장 씬. '장사' 대상을 물색하는 화면 정가운데의 혜영 너머로 지하철 출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당시의 고급 유행 식품이었던 롯데리아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육덕과 동칠의 뒷모습. 태안군 연포해수욕장 동칠과 육덕, 그리고 혜영은 매춘부의 거주지에서 도망쳐 나와 충남 태안군의 연포해수욕장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아마도 이 셋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사이 좋게 버스를 타고 태안으로 향했을 것이다. 54분경, 즐겁게 뛰노는 세 사람의 머리 위로 큼지막하게 비춰지는 ‘연포해변무대’라는 여섯 글자는 이 곳을 찾지 않았던 이라 할지라도 단박에 촬영장소를 캐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지금도 야외 무대는 리뉴얼을 거쳐서 그대로 존속하고 있으며, 부근에는 이 영화의 촬영 기념비까지 세워져 있다고 하니, <바보선언>의 ‘성지순례’ 코스로서 안성맞춤아라 할 수 있겠다. 연포해수욕장의 야외무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세 사람.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혜영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후, 동칠과 육덕은 대관령의 목장에서 그들의 방법으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픈 ‘장례’ 의식을 치러준다. 그리고 이 둘은 비가 쏟아지는 국회의사당 앞, 여의도 광장에서 또다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막판에 이르러서는 웃통까지 벗어 던진다. 이대 앞과 청량리역 앞 광장에서 그랬듯이, 이 장면도 사전에 촬영 허가 없이 기습적으로 찍은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런 장면을 찍겠다고 사전에 촬영 허가를 낸다고 해서, 수리될 가능성은 0에 수렴할 것이다. 이 시퀀스는 사전 지식 없이 보더라도, 동칠과 육덕이 작중에서 겪어 온 부조리함과 그에 기인한 울분을 국회의사당으로 대표되는 ‘국가’를 향해서 남김없이 토해내는 의미로 단박에 이해될 수 있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촬영할 당시의 제11대 국회에는 야당다운 야당이라곤 일절 존재하지 않았으며, 전두환이 속한 여당 민주정의당과, 국가가 개입한 ‘관제 야당’만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만큼 이 시퀀스는 더더욱 그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군사정권의 거수기 역할을 하던 제11대 '괴뢰 국회' 앞에서 반라의 광기를 보여주는 동칠과 육덕의 뒷모습. 이상으로 꼭 40년 전에 개봉한 영화, <바보선언>의 주요 공간을 짧게나마 돌아보았다. <바보선언>은 감독 스스로가 평했듯이 제대로 ‘각을 잡고’ 찍은 것이 아니라 군부독재와 검열이라는 사회적 한계를 어떻게든 비집고 들면서 제작된 덕분에, 당대의 공간적 배경이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꾸밈없이 담겨진 영화가 되었다. 40년 전과 비교하여 물질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도시 곳곳이 말끔하게 새단장을 거친 지금이지만, 영자원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채널 에 올라온 이 영화의 덧글란에 ‘걸작’이라는 상찬이 계속해서 달리는 것은 분명 이 영화가 지금의 우리 사회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는 뜻일 것이다. 참고문헌 김동원, “ 사전검열이 만들어낸 명작 <바보선언>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2008. 9. 2. 김성욱, “ [한국영화걸작선]바보선언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홈페이지, 2012. 11. 28. 김영준(도시공학 연구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토끼가 부러워. 고민이 없거든. 자기라는 것이 없고 그저 토끼라는 것밖에 몰라.” - < 바보사냥 >(김기영, 1984) 중 토끼를 부러워하는 세 남녀가 토끼섬을 찾아 떠나고 있다. 이게 웬 깜찍한 발상인가 싶은데 실상은 꽤 심오하다. 세 주인공 중 두 남자 강식( 배규빈 )과 홍익( 김병학 )은 정신병동에서 이제 막 탈출한 사람들이고, 한 여자 석호( 엄심정 ) 역시 만만찮게 특이하여 통상적 대화가 잘 안 통하는 인간이다. 여하튼 세 사람이 왜 토끼섬을 찾느냐 하면 그곳이 이들의 이상적인 대안 세계인 탓이다. 강식은 공해 공포증으로 인해 인간의 손이 닿은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완연한 원시의 자연 사회를 원한다. 그 방법이라 하니 무인도에 벌과 토끼만 풀어 놓고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생태계를 자생시킨단 것이다. 사회에 살면서 자살 강박에 시달리던 홍익은 강식을 따라 토끼섬을 쫓고, 탄광 마을에서 아버지를 잃은 석호도 둘을 따라나선다. 이 괴기한 여정과 인물들의 특이함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영화평론가란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영화기자로서 영화평론가란 분들을 자주 만난다. 아마 대한민국의 모든 직업 중에 영화평론가들과 가장 자주 이야기하고 만나는 직무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래서 ‘비평, 안녕하십니까’에 연재를 청탁받았나 싶기도 하다. 청탁을 덥석 물어버리고 “영화비평가의 일상과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는 ‘비평, 안녕하십니까’의 기획 의도를 들은 뒤엔 꽤 놀라버렸다. 지난해 12월 무렵인가에 영화평론가들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기획해 본 적 있는 탓이다. 평소 자주 만나는 영화평론가께 이 다큐멘터리의 시놉시스를 얘기하자마자 “그런 걸 왜 만들어요···”라며 아주 작은 반발을 듣긴 했으나 지금도 그 꿈엔 변함이 없다. 그들의 일상이 개인적으로 너무 궁금하다거나 그들에게 기막힌 사연이 있어 보여서는 아니다. 자고로 영화는 재밌어야 하는데 그들의 일상을 찍는다면 분명히 재밌는 무언가가 나올 것 같단 확신이 있었을 뿐이다. 영화평론가들이라 하여 모두가 항시 재밌는 사람이라는 등 완전한 공통점을 갖고 있진 않다. 모든 편의점 점주님이 똑같은 사람은 아니듯 모든 영화평론가를 하나로 묶기는 다소 어렵다. 굳이 공통점을 도출해 보자면 대개 자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정도일까. 그들이 <바보사냥>의 강식처럼 극심한 공해 공포증에 시달려서는 아닐 것이고, ‘비평, 안녕하십니까’에서 박예지 , 이광호 평론가가 먼저 밝혔듯 다소간의 현실적인 생활상에 결부한 문제일 순 있겠다. 또 굳이 찾아보자면 수상할 정도로 카톡 답장이 느리고 전화를 안 받는단 정도일까. 특히 원고 마감에 관한 연락이라면 더욱더···. 또 영화평론가들은 각자의 의견이나 취향에 꽤 강고한 편이다. 겉으론 조용조용, 다소 유순해 보이며 실제로 아주 친절하신 평론가조차도 맘속의 칼을 갈아 글 쓸 때가 많다. 놀랄 때가 잦다. 이 강고함에서 평론가 개인 간의 지극한 차이가 나타나고, 이것이 바로 진정 재밌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치킨집에서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고 칠 때 평론가 A는 절대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며 양배추샐러드만 우걱우걱 먹고 평론가 B는 무조건 바삭한 게 좋다며 치킨의 껍질만 뜯어 먹는다. 당황한 영화기자 한 명은 결국 닭의 맨살만 먹게 된다. 눈치를 보던 B가 “기자님 이거 맛있으니까 드셔보세요”라며 치킨 껍질을 주섬주섬 건네준다. 그래서 잘 받아먹고 맛있다고 대답하면 막상 상대가 실망해 버리는, 그런 신묘한 일을 종종 겪어본 적이 있다. “그런 걸 왜 만들어요···”라니.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퍽 과장한 우화이지만 이 우의의 골자야말로 영화평론가란 업의 중요 조건을 설명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왼쪽부터 강식(배규빈), 석호(엄심정), 홍익(김병학) 1970~80년대를 거쳐온 유명 시네필 한 분(평론가 C)의 주위로 젊은 영화평론가 몇몇이 모인 자리에 있던 적이 있다. C 선생님은 영화평론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강고한 ‘베팅’임을 역설하셨다. 특정 영화에 대한 지지와 비판을 확고히 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자신이 틀렸다면 판돈을 모두 잃을 결사의 각오로 임해야 한다. 한번 닭고기를 안 먹기로 했다면 아무리 입에 집어넣어도 안 먹어야 한다. 살면서 처음 듣는 의견이 아닌 데다가, 독립 영화잡지를 출판했을 때 영화 저널리즘의 본질은 비판과 발굴 두 개뿐이라고 말하고 다닌 전적도 있기에 아주 신선한 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말씀으로 들었을 땐 감상이 남달랐다. 원래 알고도 안 하는 것이 가장 나쁜 법이다. 혼자 반성하던 때와 직접 혼났을 때의 차이가 극명했고, 이 ‘베팅론’의 현재적 가능성을 속으로 남몰래 타진해 보기도 했다. 이 가능성의 타진이 혼자만의 고민은 아닌 듯싶다. 송경원 씨네21 편집장은 팟캐스트 ‘ 조용한 생활 ’을 통해 말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의 완성도에 주목하는 시네마의 시대는 지났고,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의 해석 과정이 가장 중요”해졌단 것이다. 강덕구 평론가를 필두로 모인 팟캐스트 ‘ 회랑 ’에서도 엇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제는 어떤 영화나 예술을 대하는 원본성의 경험이 자기 자신에게만 남아있다. 내가 느낀 경험만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배경에서 모든 비평가의 글은 점차 에세이로 변할 것”이란 맥락이다. 요컨대 이광호 평론가의 말처럼 “취향은 이제 가능성의 벡터를 상실”했다. 타인에게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이 취향을 글과 이론으로 견고하게 정제해 특정 영화를 정전으로 수출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워진 시대다. 그러나 위와 같은 한계를 거꾸로 매달아 바라볼 수도 있겠다. 영화평론가들의 자아란 C 선생님의 말씀처럼 여전히, 심지어 더욱더 비대해질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객관적으로 남을 설득하기가 아주 무용한 상황일 때, 본인의 생각과 세상의 여론이 서로를 너그러이 흡수할 수 없을 때야말로, 모호한 타협을 요구하기보단 외려 세상을 매질하는 비평적 태도를 견지해야 할 수도 있겠단 뜻이다. 누군가를 크게 해치는 일만 아니라면야 지나치게 그리고 그럴듯하게 자기 말만 하는 강식과 홍익과 석호들의 비평적 에세이가 읽고 싶달까. 천국과 지옥이 한꺼번에 있는 곳 이쯤에서 <바보사냥>의 두 남자를 재론할 수 있을 법한데, 두 남자의 기행이 전술한 비평적 태도와 매우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강식과 홍익은 토끼섬에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벌이에 매진한다. 한 번은 포장마차를 열었는데 식자재 거래처가 병아리를 참새라고 속이며 납품한 일을 알게 된다. 거래처 사장이 “요즘 시대에 어떻게 참새를 잡냐?”라며 다들 이렇게 장사한다고 넌지시 설득하지만, 삐약거리는 병아리의 목을 차마 비틀 수 없던 둘은 “병아리를 죽일 바엔 병원에 다시 들어가자!”라며 포장마차를 부수고 만다. 이 상황이 머릿속에서 변주돼 반가운 모습으로 재생된다. 요즘은 이런 게 영화라며 속삭이는 남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을 때, 버럭 화내며 극장에나 다시 들어가자고 외치는 불통 영화평론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다. 두 남자의 돈벌이는 더 비극적인 상황을 마주하기도 한다. 소에게 억지로 물을 가득 먹인 뒤 한껏 매질하여 소의 살이 불게 만들어야 한다. 도축할 때 고깃값을 더 받기 위해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둘의 질문에 작업 현장의 선배가 “이게 기술이고 예술이야!”라며 일갈하고, 소의 눈망울을 보며 부모님을 떠올린 홍익은 ‘어머니 죄송합니다. 당장 저녁 먹을 돈이 없어 두들깁니다.’라며 속으로 한탄한다. 어디에선가 본 상황 같다. 영화란 늘 기술과 예술의 경계에서 몸체를 불려야 하는 매체이며 필연적으로 양쪽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다. 그 간극 속의 영화평론가들은 저녁 먹을 돈을 위해서 타자를 흠씬 두들겨 성미에 맞지 않는 글을 써야 할 상황에 들어서기도 한다. 그러면서 고해하듯이 뇌까리지 않을까. ‘시네마여 죄송합니다. 전 오늘 몇만 원의 고료를 위해 싫어하는 영화를 무난하다고 썼습니다···’ 포장마차를 부수고 매질해야 하는 송아지를 바라보다가, 탄광에 다다른 강식과 홍익 강식과 홍익은 병아리의 경우와 비슷하게 결국 소의 매질을 그만둔다. 대신 소를 때리라고 시킨 사람들을 흠씬 두들겨 팬 뒤에 탄광 마을에 가서 광부 일을 시작한다. 그들이 들어간 어두운 무저갱은 흡사 극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탄광 마을의 한 아저씨가 이곳을 “천국과 지옥이 한꺼번에 있는 신비”의 공간이라 말하는데 이 선언이 신묘할 정도로 극장의 비유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비단 물리적 극장이 아닐지라도 영화광 각자가 뿌리내린 영화의 공간, 그곳이 독립예술영화관이든 골방의 컴퓨터 앞이든 멀티플렉스든 시네마테크든 비밀스러운 그들만의 온라인 커뮤니티이든 간에 그 어둠의 장소는 영화평론가들에겐 천국이자 지옥이 되기 마련이다. 이곳은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만끽하며 그것을 글로 재생산할 수 있는 유토피아이자,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끊임없이 세상에 설명하며 끊임없이 거부당해야 하는 디스토피아이기도 한 것이다. “토끼가 부러워. 고민이 없거든. 자기라는 것이 없고 그저 토끼라는 것밖에 몰라”라는 석호의 귀여운 싫증엔 다음과 같은 홍익의 맞장구가 이어졌다. “그에 반해 사람은 자기의식이 있고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아니까 한없이 불행하군.” 그렇다. 영화를 향한 자기의식이 너무도 뚜렷하여 되려 불행을 마주하는 족속, 다시 비유하자면 억지로라도 닭의 살이 아니라 껍질만을 원해야 하는 사람들, 하여 자유로운 토끼를 은근히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이 속성이 바로 영화평론가들의 주요 조건이자 가장 뚜렷한 공통점일 듯하다. 이 모순 속의 긴장에서 번지는 찌릿함을 다들 끊기 어려워한단 것 역시 비슷할 테다. <바보사냥>의 결말, 잦은 고초에도 홍익은 결국 토끼섬을 찾아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선다. 이 항해는 과연 타의 없이 자아와 자생만이 존재하는 곳을 향해 간 구원의 발로일까, 혹은 그저 타의에 떠밀려 도망치는 자의 흔들흔들 피난길일까. 둘 중 무엇이 됐든 우리도 결국은 섬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토끼가 부럽다. 이우빈(영화기자) l 친구가 없어서 영화 보러 다닌 1997년생. 《 씨네21 》 기자. 2023년 《 쿨투라 》 영화평론 신인상. 독립 영화잡지 《 섭씨 233 》 편집장. 비평 웹진 《 코아르 》 필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