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의 나날
- 감독
- 김예원
- 제작년도
- 2014
일단 < 클로즈 유어 아이즈 >(빅토르 에리세, 2023)를 골랐다. 이 영화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 룸 넥스트 도어 >(2024) 사이에서 몇 초 망설였는데 그래도 빅토르 에리세의 신작을 넣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에리세의 영화를 내 리스트에 넣을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올까. 어떤 때는 이 정도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스페인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파블로 베르헤르의 < 로봇 드림 >(2023)인데, 아직 쌍둥이 빌딩이 건재했던 1980년대 뉴욕을 기가 막히게 재현한 애니메이션이다. 거기에 절절한 로봇과 개가 주인공인 멜로드라마를 넣어서. 오로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만 가능한 마법이다. 애니메이션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오시야마 키요타카의 < 룩백 >(2024)이다. 창작과 창작자에 대해 깊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짧지만 강렬하고 아름다운 예술가 영화다. 예술가 영화도 두 편이 더 있다. 하나는 위에 언급한 <클로즈 유어 아이즈>. 다른 하나는 모나 아샤쉐의 < 리틀 걸 블루 >(2023)로, 감독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여러분이 프랑스어권 유성애자 여성작가의 피학적인 오토 픽션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무언가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를 멀리하시기 바란다. 하지만 그런다면 여러분은 마리옹 코티아르가 펼친 최고의 명연 하나를 놓치게 된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냐고? 그렇긴 한데 그와 상관없이 감독은 코티아르에게 자기 어머니 역을 시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해가 간다. 모녀 이야기는 <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조지 밀러, 2024)의 도입부를 여는 중요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꼭 필요한 무언가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2015)가 그랬던 것처럼 끝내주게 재미있는 액션물이고, 이 영화의 실망스러운 흥행성적은 관객들이 뭘 모를 때가 많다는 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알려준다. 하긴 관객들은 개봉 당시 존 카펜터의 < 괴물 >(1982)도 대충 넘겼다. 그냥 그렇다고. 로즈 글래스의 < 러브 라이즈 블리딩 >(2023)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는 필름 누아르로, 몸과 섹스와 퀴어성에 대해 정말 신나고 뻔뻔스러운 장면들을 엮어대는 오락물이다. 아, 그리고 재미 이야기가 계속 나와서 하는 말인데, 션 베이커의 < 아노라 >(2024)와 모함마드 라술로프의 < 신성한 나무의 씨앗 >(2024)이 주는 재미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성노동자가 연결된 계급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룬 인디 영화와 마흐사 아미니 시위를 다룬 사회파 이란 영화가 이렇게 갑자기 대중적으로 (심지어 거의 고전 할리우드스럽게) 재미있어지면 관객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움과는 별도로 재미있는 영화들이 주는 즐거움을 주제의 무게나 구질구질함을 두려워하며 버릴 필요는 없다. 한국영화를 두 편 골랐다. 더 고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사방에 종말론적 예언이 나팔처럼 울려퍼지고 있었지만 올해 한국영화를 보는 경험은 여러모로 즐거웠다. 그런 경험을 제공해준 영화가 주류영화가 아니었을 뿐이다. 올해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퀴어, 특히 여성 퀴어 영화들의 공습으로, 어떤 때는 네 편의 영화가 동시에 극장에 걸려 다들 어리둥절해 하기도 했다. 당사자성 넘치는 사실주의극인 <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부터 올해 가장 뻔뻔스러운 길티 플레저인 < 히든 페이스 >(김대우, 2024)까지 다양하기도 했다. 세상이 바뀌는 걸 느낄 수 있는데, 그 때문에 드라마 < 정년이 >(2024)의 비겁함이 더 짜증난다. 오정민 의 < 장손 >(2023)은 거의 임권택 과 이두용 의 직통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이다. 이러면 당연히 올드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텐데, 아니다. 이 영화도 ‘재미있다.’ 거의 1세기에 가까운 한반도의 역사를 가족사에 녹여낸 재주, 대한민국 가부장제에 대한 냉정한 고찰만큼이나 신기한 건 이런 주제로 신선한 재미를 끌어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열 편 중 아홉 편은 호오도를 떠나 대중적으로 매우 재미있다. 마지막으로 고른 영화가 남궁선 의 < 힘을 낼 시간 >(2024)이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이유로 내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열다섯 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케이팝 아이돌에 대한 영화라는 것이다. 수없이 이야기하는 거 같은데,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면 전보를 쳐라’라는 옛 할리우드의 격언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놓고 뻔뻔스럽게 교훈과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재미있고 훌륭한 영화들은 많다. 전보로 전달한 텍스트의 다발과, 주제에 공감하는 작가와 감독, 배우들이 결합한 결과물의 차이는 엄청나다. 당연히 ’공익영화’는 비하 단어가 될 수 없다. 다른 모든 영화가 그렇듯 좋은 공익영화와 나쁜 공익영화 그리고 그 사이에 걸쳐진 광대한 스펙트럼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힘을 낼 시간>은 여러모로 일단 효율적인 공익영화다.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러닝타임 안에서, 선정적인 실제 사건의 구체적인 재현 없이 한국 연예계의 문제점들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정리해서 보여주는 영화가 얼마나 되는가. 이것만 해도 엄청난 성취인데, <힘을 낼 시간>은 이 모든 정보와 메시지를 다 담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매력적이다. 공익영화로서의 기능은 영화의 매력에 어떤 핸디캡도 되지 않는다.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이 영화의 다음 성취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지금까지 케이팝이라는 장르에 봉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상물을 만들려는 시도는 많았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초창기의 시도는 김기영 (동명이인이다)의 < 진실게임 >(2000)이다. 아마 더 이전 작품도 있을 거고 사실 여기서 정확한 경계선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 그래도 20년은 더 됐다. 하지만 성공작이 뭐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다들 주저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들은 < 내일부터 우리는 >(윤성호, 2017), < 아이돌 권한대행 >(윤성호, 박현진, 2017), <탑 매니지먼트>(2022)로 이어지는 윤성호 의 시리즈들이다. 만드는 사람들의 아이돌 문화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개성적인 유머 속에서 조화를 이룬 작품들인데 이 작품들이 아이돌 스토리텔링의 주류가 된 적은 없다. 아쉽게도. 나머지는 대부분 성공보다는 실패로 기억된다. 그 중 가장 처참한 실패는 아무래도 드라마 <청춘시대 2>(2017)였던 거 같은데. 일단 이 시리즈는 왜 아이돌 이야기를 왜 굳이 거기서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건 여러모로 최악의 오타쿠적 선택이었다. <힘을 낼 시간>은 소위 ’망돌‘이라는 소재를 공유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면에서 <청춘시대 2>와 반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장점이다. 일단 영화는 왜 이 영화가 ‘망돌들’의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한 아주 명쾌하고 당연한 이유를 갖고 있다. 주인공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세 주인공 중 망돌은 ‘파이브 갓 차일드‘라는 남자 아이돌 그룹 멤버였던 태희( 현우석 )뿐이다. 여자 아이돌 그룹 ‘러브앤리즈’의 멤버 수민( 최성은 )과 사랑(하서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제법 히트한 노래도 한 편 이상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래보다는 이 팀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더 먼저 떠올리고 제대로 정산을 못 받고 은퇴한 건 태희와 다를 게 없다. 하여간 이 셋은 전재산 98만원을 챙겨들고 제주도 여행을 오는데, 그만 첫날에 한 명이 사고를 내 돈 대부분을 날려버린다. 이 정도면 너무 어이가 없어 슬슬 웃음이 나오는 가학적인 블랙 코미디를 기대해 볼 만도 한 상황이다. 이 영화의 감독이 얼마 전에 < 십개월의 미래 >(2020)를 만든 남궁선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보다 평화롭고 진지한 길을 간다. 세 사람은 귤 따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고 자기들을 알아보는 케이팝 팬도 만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힐링’이라는 단어를 빼고 설명을 할 수가 없다. 따분하게 들린다면 미안하지만, <힘을 낼 시간>은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치유의 과정에 대한 영화이고 여기에 진지하다. 이 영화에서 치유라는 단어는 결코 가볍게 쓰이지 않는다. <힘을 낼 시간>의 가장 큰 장점은 ‘좋은 의미로’ 머글스럽다는 것이다. 이 영화엔 다른 케이팝 아이돌 관련 작품들에서 쉽게 발견되는 징그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케이팝 아이돌의 친숙한 이미지를 따르고 그걸 페티시적으로 활용하는 대신 부당한 노동 조건 속에서 시달리다 버려진 젊은 노동자들을 그린다. 이 영화가 정공 공익영화로 기능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게 쓰면 무지 재미없게 들리는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은 대부분 대중적 재미가 풍부한 작품이다. 그건 일단 이 진지함의 정공법이 드라마에서 제대로 작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영화엔 더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오타쿠적인 선택 대부분을 피해가고 있고 일부러 아이돌 캐스팅도 하지 않은 영화인데도 여전히 아이돌스러운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대 장면 하나 나오지 않고 ‘가상의 아이돌 그룹 만들기 게임’에 집착하지 않으며 골수팬을 등장시키지 않는데도 영화는 부서진 홀로그램 조각처럼 케이팝 그룹을 이루는 수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노력한 팬이라면 러브앤리즈 팬픽을 쓰는 게 가능할 정도다. 영화의 의도는 전혀 아니겠지만. <힘을 낼 시간>은 최선 또는 최악의 타이밍에 개봉한다.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정치 상황이 모든 이슈를 잡아먹었으니 개봉하는 영화에겐 타격이 크다. 하지만 뉴진스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사람들이 아이돌의 노동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바로 그 정치적 상황 속에서 수많은 아이돌 팬들이 응원봉을 국회 앞에서 휘두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 이 영화에 맞는 시기가 있을까. 듀나(영화평론가) l SF 작가이고 영화 컬럼니스트다. 영화 관련 저서로는 『가능한 꿈의 공간들』(2015),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2022),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2019),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2020) 등이 있다.
1. 금정연의 문자를 씹었다. 종종 있는 일이다. 그는 문자를 보내고 나는 씹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내가 멘션을 보내고 금정연이 씹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금이 간다거나 어색한 상황이 발생하진 않는다. 적어도 지난 금정연의 원고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는 지난 원고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했다. “(JD는) 여전히 답이 없다. 말풍선도…” 금정연이 나의 답장을 기다렸다니. 어떻게 임창정 얘기를 꺼내고도 내 답장을 기다릴 수가 있지? 임창정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내가 만약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면 그건 오로지 임창정 탓이다. 한국 남자가 나오는 악몽을 꾼다면 그는 임창정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고 한국 남자가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는 <소주 한잔>일 것이며 한국 남자가 시비를 건다면 그는 17대1로 싸운 자신의 과거를 자랑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임창정이야말로 한국 영화의 부인된 무언가이며 아무리 외면해도 기어코 돌아오는 실재의 찌꺼기다. 우연히 홍대나 건대의 술집이나 거리(혹은 그와 유사한 모든 먹자골목)를 지나치기라도 하면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우리를 습격하지 않는가. 나는 왜 그의 바이브레이션만 들어도 식은땀이 날까.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이건 임창정이라는 배우이자 가수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라캉의 저 유명한 말을 생각해보라. “성적 관계 같은 것은 없다.” 다시 말하면 임창정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임창정에 대해서 말해야한다. 2. 하지만 임창정에 대해 말하려면 윤제균에 대해 말해야한다고, 나는 소전서림에서 만난 문윤기에게 말했다. 윤제균이요? 윤기씨는 그런 이름은 생전 처음 들어본다는 듯 말했다. < 색즉시공 >(2002)이 개봉했을 때 그는 아마 초등학생이었으니 그럴수도 있다. 나는 윤기씨에게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트라우마가 내 입을 봉하고 성대를 틀어막았다. 게다가 임창정에 대해 말하려면 이병헌과 최민수와 류승룡과 김상진과 신재호/신동엽에 대해서도 말해야하지 않나. 이 이름들은 무엇이며 이렇게 목록화 되는 이유가 뭐냐고는 묻지 말길. 나는 그 세계가 궁금하지도 그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도 그 세계를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영화과에 입학한 이후 영화를 피해 이십여년을 도망다닌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니까.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 영화가 턱밑까지 칼을 들이 밀었고 마감을 알리는 메일은 벌써 일주일 전에 도착했다. 여느 때처럼 마감과 글쓰기의 고통 때문에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진심) 말해야할 때가 왔다는 의미이다. 3. 이쯤에서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유추의 방식으로 연결될 하나의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장 루이 셰페르의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가 그것인데, 나는 이 책의 서문을 다음과 같이 편집한 후 적용할 것이다. 관객에게 영화는 무엇보다도 영화에 대한 분석이 제시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등장한다. 이야기가 이들 ‘괴물들’에게 역할(의미)을 부여하기 이전에, 이야기와 관계없이, ‘괴물들’은 그것이 나타나는 순간에 이미 무언가 알 수 없는 의미 자체로서 관객인 나에게 도래하는 것이었다. 스크린 위에 나타난 무언가는 바로 내 속에 도래하고 그곳에 들어와 일정한 장소를 점유한다. 내가 고찰하고 싶은 것은 영화와 함께 태어나 여전히 고착되어 있는 이상한 감정 – 이미지를 계속 받아들이면서 여전히 남게 되는, 말하자면 부식토와 같은 물질적인 감정에 대해서이다. 이것이 영화와 개인의 삶의 어떤 표현되지 않는 부분 사이에 사적인 연결을 갖게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내 삶의 가장 숨겨진 부분이며 내 삶에서 가장 굴종에 처해진 부분이기라도 하듯이, 침묵에 빠지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말하려 해도 실어증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영화화된 행위에 대한 상상적인 참여를 통해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스크린의 형식이나 존재에 우리를 투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삶 속에서 성장한다. 영화는 현실적인 어떤 것의 현실화 혹은 전용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이란 잠정적으로 관객처럼 사는 어떤 것이다. 이미지와 경험적인 정동이 섞인 기억의 삶이다. 이것은 영화를 신체의 일부, 자신의 신체임에도 우리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부분처럼 사용하는 습관에 대한 것이다. 다시 정리해보자. 장 루이 셰페르는 영화가 불러오는 시뮬레이션이 실제의 세계로부터 빌려온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게다가 이 시뮬레이션은 그 시뮬레이션의 모상인 영화보다 선행하는 것이며 계속해서 지속된다. 이 시뮬레이션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지각하는 어떤 신체의 운명 속에서 욕망했던 것이다. 지젝은 사본의 사본인 예술이 직접적인 첫번째 층위인 사본-물질적 현실과 경쟁하지 않고 오히려 이데아 자체와 경쟁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물질적 대상을 복사할 때 사실상 복사되는 것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제3의) 이데아라고 말이다. “플라톤이 예술의 위협에 그토록 당혹스럽게 반응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이데아는 곧 현실이 복사될 때 나타나는 그 무엇이다. 사본(현실)의 사본(영화)의 사본인 셰페르의 시물레이션은 바로 이와 유사한 매커니즘을 가진다. 그것은 영화로부터 복사되어나온 환영이지만 영화보다 선행하는 현실보다 선행하는 무언가로 구성되며 그러므로 현실은 곧 영화가 시뮬레이션 될 때 일어나는 그 무엇인가의 복사물이 된다. 이러한 매커니즘은 빙크스 볼링의 경우처럼 영화의 수준 따위는 따지지 않는다. 따지는 방법도 모르며 안다한들 그 기준은 기이한 전-의식적인 단계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괴물이다. 문제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이 괴물이 괴물이 아닌 것처럼 군다는 사실이다. 4. 그러나 비천한 영화란 무엇일까. 정연씨를 통해, 마테리알의 오픈 스페이스를 통해 비천한 영화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너무나 적절한 작명이라는 생각을 했다. 비천한 영화는 디테일과 뉘앙스는 다르지만 유사한 형태로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해왔다. 보통은 길티 플레저라는 이름으로, 요즘 말로는 쿠소 영화, 언젠가는 시네마 지옥이라는 명명하에 우리를 울리고 웃기지 않았나. 하지만 여기에도 혼란의 여지는 있다. 에드 우드와 같은 유형의 감독에 의해 만들어지는 망작 또는 괴작은 비천한 영화에 속할 수 있을까? 괴작과 망작을 한 묶음에 넣을 수 있을까? 유년의 기억을 차지하는 길티 플레저 영화들은 뻔하고 전형적이지만 망작은 아니지 않나? 이를테면 정연씨가 사랑하는 < 콘에어 >(1997)는 러닝 셔츠를 입고 턱걸이를 하는 니콜라스 케이지를 상상만해도 입안의 콜라가 뿜어져 나오지만, 생각보다 좋은(?) 영화 아닌가. 내가 초등학교 때 가장 사랑한 영화 는 < 록키 4 >(1987)였다. < 록키 1 >(1976)도 아니고 <록키 2>(1980)도 아닌, 4탄. 한 영화 잡지에서 <록키 4>를 최악의 시리즈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천하의 졸작으로 평가한 걸 본 이후 나는 어디서도 <록키 4>를 인생 영화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다시 논점으로 돌아가면 비천한 영화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1) 범작 2) 망작 3) 괴작. 하지만 진정 중요한 것은 비천한 영화들이 기거하는 시네마 지옥 속에서 이 세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비천한 영화 대부분은 개인의 기억에 속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기준이 의미를 (거의) 상실한다. 중요한 건 이 영화들을 사랑했다는 기억을 비천하게 만드는 사회와 나와 영화의 관계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진짜 비천한 것은 영화가 아니다. 이들 사이의 위계와 위상이, 비천함의 지정학이 행위자들을 비천하게 만든다. 어른이 된다는 것, 나아가 씨네필이 된다는 것은 이 비천함을 숨기거나 잊고 부정하는 것이다. 영화잡지의 리스트, 선생님들의 평론, 커뮤니티의 평가들이 우리를 그러한 길로 이끈다. 물론 다른 길도 있다. 리스트를 부정하고 선생님들의 뒤통수를 치고 커뮤니티를 혁신하려는 이들은 부인된 비천함 속에서, 사회가 어둠 속으로 쫓아낸 네트워크 속에서 뭔가를 찾아내고 비천함 그 자체의 미학화를 시도한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껏 봐왔던 명명들이다. 하지만 이 작업은 극도의 섬세함과 정치적 현명함을 요구한다. 비천하되 너무 비천하지 않은 영화들로, 괴작이지만 망작은 아니고 범작이지만 윤리를 벗어나지 않고(아니면 아주 완전히 벗어났거나) 잊혀졌지만 스토리텔링 하기 좋은 영화를 선택할 것. 5. 하지만 내게 임창정은 비천한 영화도 시네마 지옥도 쿠소 영화도 아니다. 임창정은 현실에 뿌리내린 시뮬레이션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묻기도 했다. 왜 그렇게 임창정이 싫은건데? 다시 말하지만 나는 임창정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내가 싫어하는 건… 6.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하기로 한 <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1987) GV를 앞두고 금정연은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의 회고록 링크를 보냈다. 나는 스포츠서울 창간 편집국장이자 추리소설가인 이상우의 회고록 링크를 보냈다. 이태원과 이상우는 옛날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건달이자 영화제작자로 일세를 풍미했고 한 사람은 스포츠신문의 귀재이자 한국의 조르주 심농으로 알려져 있지만(안 알려져 있기도 하다) 두 사람은 한번도 함께 일을 하거나 마주치지 않았다. 최소한 회고록의 내용을 봤을 땐 그렇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정연씨와 내가 함께 한 GV의 픽션 속에서 잠깐이지만 마주했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는 6.10 민주항쟁이 있고 한달 후쯤 개봉한 작품으로 그해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관객 수는 약 28만명. 영화에 대해 할 얘기는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영화를 보면 알 것이다. 우리는 영화 보다 영화를 둘러싼 이야기를 주로 했다. 청춘영화의 계보나 당시 영화계의 상황 같은 것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과거의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의 곤혹스러움이었다. 만약 과거의 영화가 동시대의 영화를 뛰어넘는 걸작이라면 문제는 간단할 것이다. 과거의 영화가 역사의 과오를 되새기게 해주는 따위의 용도가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과거의 작품이 현재의 시각에서 안이한 범작일 때 발생한다. 스탠리 카벨의 말처럼 우리는 “결코 그 당시 알았던 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과거의 작품을 보고 이야기해야하는 걸까? 우리가 역사학자도 아닌데 말이다. 안 보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불가능한 태도다. 과거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아카이브와 네트워크를 경유한 너무 많은 과거가 현재에 존재한다. 우리는 이 범속한 과거들에 어떤 식으로건 응답 할 것을 요구받는다. 뭐라고 말할까? 그건 너무 비천하다고 무시하거나 그저 개인의 추억일 뿐이라고 뭉개고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7. 국문학자 권보드래는 기이할정도로 충격적이고 다층적인 3.1운동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직접성’과 ‘무매개성’을 동원한다. 파국과 유토피아가 함께 임박해 있다는 감각은 민중들의 시간성에 있어 직접성의 형식을 구성한다. 한편 무매개성은 문제가 좀 더 복잡하다. 3.1 운동은 일반적으로 기미독립선언서, 유관순 등으로 대표되어 왔다. 이러한 대표성에는 민족이나 진보라는 관념, 사회주의, 의회정치 등등이 매개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3.1 운동의 면면을 살펴보면 현실은 다르게 작동했다. 교통도 통신도 미비하고 변변한 조직체도 없는 시절에,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운동에 참여하고 사건을 일으켰다. 권보드래는 묻는다 “인민은 대표되고 재현되어야만 하는가? 개별 그대로, 인민의 존재 그대로 사건의 동력이 될 수는 없는가?” “매개되지 않고 대표되지 않는 세계가 가능할까.” 이를 한국 영화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특정 사조나 흥행, 감독이나 작품 등으로 매개되지 않고 대표되지 않는 한국 영화의 역사가 가능할까. 영화가 실재의 찌꺼기처럼 존재하며 현실을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시뮬레이션이라면, 그것을 개별 그대로의 동력으로, 사건으로 구조화할 순 없을까. 헤겔의 유명한 문구가 있다. “세계의 역사는 세계의 도살장이다.” 프랑코 모레티는 이 표현을 가져와 <문학의 도살장>을 썼다. 살아남은 소수의 문학과 사라져버린 다수의 문학. 추앙받는 소수의 영화와 비천해져버린 다수의 영화.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양적 연구도, 형식주의도 아날학파도 아니다. 흥미롭게도 권보드래는 <3월 1일의 밤> ‘나가는 글’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아직, 3.1 운동을 만나면 길을 잃는다.” 나는 정연씨에게 답장을 썼다. “임창정 신보가 나왔네요. 17집. 유튜브 링크 보냅니다. 노래제목은 <트로트가 싫어요> https://youtu.be/wsH0mv3yZEc 왠지 < 국제시장 >이 생각나네요..”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딩동. 문이 열리자마자 자넷(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분)은 다짜고짜 총을 겨눈다. 헝클어진 머리,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복잡한 얼굴로 총을 든 그녀의 손이 덜덜덜 떨린다. 그녀는 왜, 누구를 향해 총을 겨눈 것일까. 그 날은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자넷의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을 자축하기 위해 자넷 부부는 친구들을 초대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자넷의 절친인 에이프릴(패트리시아 클락슨 분)과 그녀의 남자친구 고프리드(브루노 강쯔 분). 뒤이어 차례로 들어오는 마사(체리 존스 분) 그리고 지니(에밀리 모티머 분). 마지막 손님은 톰(킬리언 머피 분)이다. 톰의 부인인 메리앤은 늦는다는 전언, 이로써 메리앤을 제외하고 올 손님은 다 왔다. 파티는 시작도 전에 불길했다. 손님 맞을 생각은 않고 시종일관 우울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 자넷의 남편 빌(티모시 스폴 분)을 필두로 에이프릴과 고프리드는 티격태격 작은 말다툼을 멈추지 않고, 톰은 들어오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해 콧속에 마약을 잔뜩 넣더니 권총을 품에 쑤셔 넣는다. 에이프릴이 축배사를 시작하려는 찰나 레즈비언 커플인 마사와 지니가 자신들의 세쌍둥이 임신소식을 먼저 발표하며 초를 치고, 에이프릴이 이 불길함에 화룡점정을 찍으니, 샴페인이 터지는 순간 날아간 뚜껑에 거실유리창이 와장창 박살난 것! 이 요란스런 시작은 그 날의 파티가 결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것을 현현한 것이었다. 출발테이프를 끊은 건 빌이었다. “내 상태가 안 좋다는군. 진단을 받았는데 결과가 별로야. 시한부라네.” 다들 놀라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정적을 깨는 사람은 톰. “망할 놈!” 위로는커녕 그 와중에 빌에게 욕을 하는 시츄에이션이라니! 하지만 빌이 욕을 얻어먹을 만했다. 그의 자백에 의하면 지난 2년간 그는 톰의 부인인 메리앤과 불륜관계였단다. 갈수록 태산인 건, 그 둘의 밀회를 도운 건 다름 아닌 빌의 친구인 마사이고, 대학시절 빌과 마사는 또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일이 이 지경이라 톰이 연신 외쳐대는 ‘씨발’이 매우 적절한 리액션으로 느껴질 정도다. 감독인 샐리 포터는 이 영화를 ‘비극을 둘러싼 희극’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유머와 위트를 통해 인간이 받는 고통의 모순을 말하고 싶었다고 덧붙인 걸 보면 결국 방점은 희극에 있지 않고 비극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이나 가까이서 보면 모두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을 대입한다면, 이 영화를 우리는 가까이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일 게다. 거실과 부엌, 화장실과 앞마당이 전부인 좁고 한정된 공간은 그래서 매우 적절하다. 갇힌 공간은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때문. 공간의 협소함으로 촉발되는 지루함은 71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으로 한 방에 해결했고, 모든 컬러가 배제된 흑백화면은 인물에 대한 편견을 제거시킴으로써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를 성공적으로 구현했다. 이 완벽한 삼합으로 우리는 감독의 완벽한 인질이 된다. 인간의 삶은 세 가지로 나뉜다. 공적인 삶, 사적인 삶, 그리고 비밀의 삶. 이 영화는 비밀의 삶이 어떻게 공적이고 사적인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통쾌하게 까발리며 진실과 진리(眞)은 항상 선(善)이 되는지, 선(善)은 늘 아름다울(美) 수 있는지를 대놓고 묻는다. “난 진실과 화해를 믿어. 난 전 세계를 향해 연설했어! 우리나라를 부당착취의 도살장에서 건져 내느라 헌신했다고!” 라고 사자후를 토해낸다고 해서 진(眞)에 가까운 자넷의 공적인 삶이 마냥 사적인 삶과 일치했던 건 아니다. 개인의 삶의 모습과 사회적 정의감은 별개의 층위를 갖는다. “가끔 이기기 위해선 확신에 가득한 ‘척’도 해야 한다”는 자넷 본인의 말마따나 그녀의 진(眞)은 선(善)이 아니라 위선(僞善)에 가까웠다. 아니, 딱 위선이었다. 사적인 삶에서는 외조를 하느라 자신을 희생했던 남편 빌에게 무심한 아내였고, 심지어 계속 울려대는 문자메시지 알림음은 그녀에게 비밀의 삶까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니 말 다했다. 진이 위선으로 연결되는 순간 이미 미는 존재할 수 없다. 미(美)가 실종된 자리엔 추(醜)가 남는다. 다른 사람들의 사정은 나을까. 그럴 리가! 지식인의 대명사인 대학교수 빌과 마사는 입으로는 온갖 격률을 다 쏟아내며 번지르르한 레토릭을 자랑하지만, 실상은 본심을 호도하느라 바쁘다. 정당정치, 합리주의, 페미니즘, 의료정책 등 각종 정치·사회 이슈들을 꺼내며 자신들이 정의의 수호자인 것처럼 굴지만, 그것들이 메리앤을 둘러싼 불륜과 적절히 조합되는 순간 그들 역시 위선자의 모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함을 증명한다. 왜 너의 신념이 바뀌었냐고 추궁당하면 이 한 마디로 자신을 변명하는 그들. “모든 건 변해. 늘 변한다고!” 상황이 이쯤 되니 성공한 금융맨으로 비싼 양복이나 처입는 속물 중의 속물 톰이 가장 순수해 보일 지경이다. 등장부터 고프리드와 옥신각신하던 에이프릴이 이 하극상의 끝에서 “우리사이가 여기서 젤 낫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미(美)가 아름다움인 것은 미가 바로 각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다움’은 곧 ‘앎’이므로. 비극이 미가 된다는 것은 비극이야말로 우리를 통절하게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비극의 미’를 이렇게 정의했다. 내가 앞서 진선미를 끌어들인 이유이자, 포터 감독이 희극을 가장한 ‘비극’을 연출한 이유일 것이다. ‘앎’을 전하기 위해서. 대체 어떤 앎이기에?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비밀의 속성에 대해 짚어야 한다. 외부에 당당히 드러낼 수 없는 욕망을 행위했을 때 그것은 곧 비밀이 된다. 또한 비밀은 대개 선의 반대를 품는다. 위선 혹은 악. 그래서 위선 혹은 악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 된다. 원래 이 모임의 목적은 ‘파티’였다. 우리가 쓰는 가장 화려한 가면의 향연인 파티. 욕망의 실체를 감춰주는 게 가면의 역할일 텐데, 그 거창하고도 눈부신 가면을 벗기면서 느끼는 쾌감이 감독이 지향한 길티 플레져였다. 그러나 남의 비밀을 아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진짜 비극은 내 가면이 벗겨져 보이기 싫었던 완연한 민낯이 드러나는 것. 나의 위선, 나의 악, 나의 욕망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저들을 비웃기 위해 가리켰던 손가락을 내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 “아리따운 메리앤! 그녀는 태풍의 눈이지. 늘 태풍의 눈이야.” 영화 초반 에이프릴은 메리앤을 두고 이렇게 말했었다. 태풍은 주변을 초토화시키지만 사실상 태풍의 중심 즉, 태풍의 눈에서는 하늘이 맑고 바람이 없는 고요한 상태가 유지된다. 이것이 태풍이 가진 모순이다. 파티의 모든 사람들은 메리앤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기고 부서졌다. 그러나 정작 메리앤 본인은 영화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마지막 ‘딩동’ 소리에 현관문이 열리면서 그녀가 등장하도록 되어 있지만 역시 그녀의 모습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 대체 그녀는 실재하는가 아닌가. 그녀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왜 ‘메리앤 없는, 그러나 메리앤이 중심이 된’ 스토리가 탄생했는가. 영화 내내 썅년 소리를 들어야 했던 그녀는 과연 누구이기에. 자넷의 손에는 여전히 총이 있고, 그녀는 정면으로 총구를 겨눈다. 자, 이제 다시 대답해보자. 그 총구는 누구를 향해 겨눈 것일까? 여전히 메리앤을 향해서인가? 만약 아니라면? 그럼 그 사람은, 총을 맞을 그 사람은, 총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사람, 바로 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