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 감독
- 김강
우리는 이미 안다(고 생각한다). 심훈의 <상록수>는 식민지시대 대표 농촌계몽소설이며, 영화 < 상록수 >는 1960년대 계몽적 문예영화다. 대중의 상식에서 문예영화는 문학작품의 충실한 재현이다. 신상옥 의 <상록수>는 사실 이러한 문예영화적 충실성에서 벗어나는데, 오늘날 우리가 <상록수>를 발견의 영화로 재고해야 한다면 신상옥만의 각색과 연출의 특이성에 놓여있을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신상옥의 대표 문예영화는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다. 하지만 1961년 명보극장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이어 선보인 영화가 <상록수>였음을 기억하는 자는 드물다. <상록수>는 < 동심초 >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이어지는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 신상옥 영화의 고유한 아름다움, 즉 풍경을 정서로 이어가는 로케이션 촬영의 형식적인 특징을 잇고 있다. 다른 한편 < 로맨스 빠빠 > 및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이어지는 한국적 교양의 보편적 지평을 넓히는 영화로 과잉과 신파성을 배제한 담백한 연출도 <상록수>로 이어진다. 영화 <상록수>는 식민지 영화인 심훈 의 이루지 못한 영화의 꿈이었다. 소설가,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심훈은 영화 < 장한몽 >(1926)의 주연 배우, 영화소설 <탈춤>(1926)을 비롯한 다수의 시나리오 작가, 영화 < 먼동이 틀 때 >(1927)의 감독이자 1920년대 중반 이후 중요한 글들을 남긴 영화평론가였다. 스스로도 “처음부터 문필로써 미염(米鹽)의 대를 얻으려 함이 본망(本望)이 아니었”으며 벽촌에 은거할 때조차 생활이 단조로울수록 “‘인’이 박힌 것처럼 영화”를 애착했던 시네필이었다. 1) 심훈의 영화 <상록수>는 당시 신문연재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고려영화사에서 감독 심훈, 촬영 양세웅, 주연 강흥식에다 총 출연 2000명이 넘는 대규모 발성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시나리오만 남긴 채 심훈은 36세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좌측부터 영화 <상록수>의 각본 심훈, 주연 강홍식, 촬영 양세웅, 제공 이창용(동아일보,1936.3.18.) 소설 <상록수>는 잘 알려져 있듯 1961년 신상옥 감독에 의해, 1978년 임권택 감독에 의해 2차례 영화화되었다. 신상옥의 <상록수>는 원작 및 심훈(의 시나리오)과 임권택의 동명 영화와 상당히 다른 전개를 보인다. 소설 <상록수>는 동혁의 시점에서 시작해 서신 왕래라는 장치를 통해 자연스럽게 동혁과 영신의 시점을 오가다 최후에는 동혁의 시점에서 끝난다. 심훈의 남겨진 시나리오도 남주인공 ‘동혁’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임권택의 영화 <상록수> 역시 동혁과 그의 고향마을 농우회를 중심으로 사건이 펼쳐지며 영신의 야학활동은 영신의 전언을 통해 플래시백 장면으로 에피소드화 된다. 반면 신상옥의 <상록수>는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여성인물 영신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깊은 산골마을에 버스가 도착하고 짐을 싸매고 온 아가씨가 버스에서 내려 깊은 산골의 호젓한 길을 걸어간다. 배경으로 놓인 눈 덮인 산맥은 그녀가 겪을 인생에 대한 인유적 풍경인 양 놓여있다. 마치 2차례 영화화 된 <무정>이 원작소설처럼 근대적 지식인 이형식을 중심으로 한 계몽과 각성의 서사가 아니라 구여성 영채를 중심으로 한 ‘영채전’의 멜로드라마로 소비되었듯, 대다수 한국인들의 관람의 무의식 속에서 (영화와 소설을 포괄한 서사체로서의) ‘상록수’는 헌신적인 여선생 채영신의 이야기로 기억되는데, 그 기억의 원형을 제공한 영화가 신상옥의 <상록수>인 것이다. ‘상록수’에 대한 원형적인 서사로 기억되면서도 오랜 기간 동안 신상옥의 <상록수>가 저평가된 까닭은 무엇일까. <상록수>가 2차례 영화화된 시기는 1961년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회의)시절부터 1978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 말기에 이르는 시기다. 그런 탓인지 영화화 된 <상록수>는 박정희 정권기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계몽영화로 알려져 있다. <상록수>가 개봉한 것은 1961년 9월 20일이었다. 같은 해 10월 11일, 유달영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은 농촌계몽을 소재로 한 영화 <상록수>를 국민에게 추천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이듬해인 1962년 1월 19일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은 젊은 지식인들이 농촌진흥을 위해 삶을 바친 소재를 다룬 심훈 원작의 영화에 깊은 감명을 받아 <상록수>와 같은 영화를 많이 만들어 농촌으로 보내도록 지시한다. 박정희가 <상록수>를 좋아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며, 유달영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은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인 ‘최용신’의 전기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일련의 과정은 <상록수>라는 영화가 자체의 작품성을 떠나 5.16 군사 쿠데타와 군부정권에 의해 ‘사후적’으로 정권의 계몽영화의 상징이 된 과정을 보여준다. 이렇듯 전형적 농촌 계몽영화라는 표지는 영화 <상록수>를 정권홍보용 문화정치 영화라는 관념으로 둘러쌓아 두었던 것은 아닐까. <상록수>가 신상옥에 의해 영화화 되면서 1960년대식 개발주의 영웅서사로 자리매김했다는 역사학의 평가는 영화 자체가 의도하지 않았던 역사적 우연들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는 아닐까. 신상옥의 <상록수>는 시작부터 영신의 시골행을 보여주며 맑고 깨끗한 여성 주도적 서사를 분명히 했다. 소설의 전개과정과 달리 영화는 영신이 청석골에 들어가 야학을 일구고 농촌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과정을 덤덤히 보여준다. 그저 나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고학으로 학문을 익혔고 이념과 생활이 일치했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 입장도 분명했다. 영화 속 동혁과의 만남은 과거회상으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영신 중심 시점은 임권택의 <상록수>가 동혁과 농우회 즉 남성 영웅과 남성 집단성을 강조한 경우와 반대가 된다. 신상옥과 임권택의 두 영화의 각본은 김강윤으로 동일하므로 이 차이는 연출의 차이임이 분명하다. “여자가 배우면 생지랄이야”라며 딸 교육을 홀대하는 시골 어른들을 설득해서 여자도 배우면 판사도 하고 변호사도 한다고 부드럽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품성,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독립적인 면모, 사랑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일도 중요한 굳건하고 부드러운 성격. 영신이 이끌어가는 여성 중심적 서사는 신상옥 감독이 195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온 멜로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에 대한 섬세한 연출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구시대적이며 내성적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달리 진취적이며 자립적인 여성 영신을 선보인 <상록수>가 신상옥 감독의 연이은 문예물이며 주연배우 또한 최은희라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1) 심훈, 「다시금 본질을 구명하고 영화의 상도에로」, <조선일보> 1935.7.13. >> 상록수 고화질 VOD 보러가기 <<
해방 후 스무 번째 배출된 배우 최남현(崔湳鉉)은 해방 후 스무 번째 영화계에 진출한 배우이다. 주증녀(<돌아온 어머니>(이규환)), 황정순(<여성일기>(홍성기)), 주선태(<청춘행로>(장황연)), 황해(<성벽을 뚫고>(한형모))와는 1949년 데뷔 동기인 셈이다. 그가 첫 선 보인 <돌아온 어머니>는 남편이 원양어선을 타고 나간 사이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던 아내(김연실 분)가 아편중독으로 죽고, 원양어선에서 돌아온 남편은 고아가 된 아들을 어렵게 찾게 된다는 얘기다.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내 역을 맡은 김연실(1911~1997)이 월북하고 최남현은 연극으로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가 영화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기영(金綺泳)의 감독 데뷔작 <죽엄의 상자>(1955)부터였다. 이후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1955)을 비롯,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 <유전의 애수>(유현목, 1956), <아리랑>(김소동), <잃어버린 청춘>(유현목), <봉이 김선달>(이상 1957, 한홍렬), <돈>(김소동), <자유결혼>(이병일), <인생차압>(이상 1958, 유현목), <오 내고향>(김소동), <젊은 아내>(이강천),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이상 1959, 전창근), <흙>(권영순, 1960), <어부들>(강대진, 1961), <인목대비>(안현철, 1962), <또순이>(박상호, 1963), <혈맥>(김수용, 1963), <추풍령>(전범성, 1965), <하숙생>(정진우, 1966), <싸리골의 신화>(이만희, 1967), <망각>(이만희, 1967), <내시>(신상옥, 1968) 등에 주연과 조연으로 기용된다. [사진] 영화 <돈>에서의 최남현, 왼쪽은 배우 김승호 최남현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최무룡 주연)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진섭은 그의 역할에 대해 “전 화면을 통해 압권이며 무대경험에서 쌓은 액팅이 오버함이 없이 적으나 자연스러운 연기” ( 「능한 연출, 능한 연기 / ‘유전의 애수’를 보고」, 『한국일보』, 1956.07.26) 였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런 호평에 힘입어 1년도 안 돼 타이틀 롤을 맡은 <봉이 김선달>로 ‘최남현이라는 배우의 하나의 지위를 주장’ (「비교적 정돈된 야담영화 / 최남현의 ‘봉이 김선달’」, 『한국일보』, 1957.10.25) 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서게 된다. 이후 탈세와 횡령을 일삼다 법망에서 벗어나려 거짓 자살극까지 꾸민 아우(김승호)에게 "생눈 파먹은 날도적"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형 이중건(<인생차압>),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정책에 맞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스승(<이름 없는 별들>), 드센 아내의 성화 속에 품팔이로 어렵게 살아가는 남산기슭 해방촌의 ‘3.8따라지’ 깡통영감(<혈맥>), 국군 낙오병을 숨겨줘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결단을 내려야하는 산골마을의 강노인(<싸리골의 신화>) 등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진] <혈맥>에서의 최남현과 김승호(왼쪽) 이를테면 <봉이 김선달>, <인생차압> 등에서 보인 해학적인 요소, 처녀를 유린하고, 남의 애인을 가로챈 <유전의 애수>의 건달(인수 역), 피폐한 농촌에서 고리대금으로 농민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돈>의 억조, 딸(윤정희)을 왕의 후궁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을 시켜 딸이 사랑하는 하급 관리의 아들(신성일)을 성불구자로 만드는 <내시>의 김찬판 등 악역과 <이름 없는 별들>의 역사 교사 송선생,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싸리골의 신화>의 주인공 강노인이 보인 카리스마적 면모가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최남현. (사진제공 : 김종원) 그러나 최남현은 배우로서 절정기에 이른 1968년 어느 날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져 카메라 앞에 다시 나서지 못하게 된다. 10여 년에 걸친 투병생활 끝에 1977년 유현목 감독의 <문>을 계기로 재기, <한네의 승천>(하길종, 1977), <고가(古家)>(조문진, 1977), <족보>(1978, 임권택), <심봤다>(정진우, 1979), <짝코>(임권택, 1980), <물보라>(김수용, 1980) 등에 출연했으나 예전과 같은 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화의 물결 속에 전통을 고수하려는 <고가>의 주인공 김노인, 아집에 사로잡힌 <물보라>의 지초시, 뜬 구름 같이 살아온 <심봤다>의 조연, 인생을 달관한 <짝코>의 배역에서 열연하였다. [사진] <물보라>에서의 최남현. 아래는 하용수 광물성의 카리스마와 최다 출연 기록 노경에 접어들면서 기세가 많이 꺾이긴 했으나 누가 뭐라 하든 최남현은 개성이 강한 성격파 배우였다. 그의 연기에서는 쇳소리가 난다. 갱도의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광물성의 낮은 울림- 최남현 연기의 장점은 누구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내려 한 데에 있다. (김종원, 「인물영화사 / 중후한 조연 최남현」, 『일간스포츠』, 1987.07.08) 하지만 그에게는 1미터 75센티의 훤칠한 키와 상대를 꿰뚫어 보는듯한 눈매, 중후한 외모가 풍기는 무게감이 있는 반면 유연성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그 대신 뛰어난 연기감각과 형상력,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이런 결과는 결국 제1회 부일영화상 조연남우상(1958, <인생차압>), 제4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화부문 대상(1967, <싸리골의 신화>), 대종상 남우조연상(1966, <추풍령>) 등의 수상으로 나타났다. [사진] <싸리골의 신화>에서의 최남현. 왼쪽 박기태 최남현은 1918년 1월 7일 김소월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최찬수와 박이윤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나온 후, 법관이나 은행가를 지망하는 급우들과는 달리 무대를 동경했다. 해방 이듬해에 월남하여 극예술협회(신협의 전신)에 들어갔으나 한동안 잔심부름을 하며 따분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런 그에게 출연의 기회가 온 것은 1944년 스물여섯 살 때였다. <은하수>라는 연극이었다. <범선 천우호(帆船 天佑號)>(1949)의 무대에 오를 무렵 영화 <돌아온 어머니>에 발탁됐으나 6.25전쟁으로 후속작이 이어지지 못했다. 그 대신 <명우 추해당(秋海棠)>(상록극회, 1951), <통곡>(극협, 1952) 등 연극 활동을 하며 어려운 전란기를 보냈다. 영화 촬영이 계속된 뒤에도 <한강은 흐른다>(신협, 1958) 등에 출연하여 연극과의 인연을 끊지 않았다. 공연이 없는 날엔 주선태, 박암 등 극협 단원들과 술로 회포를 풀었다. [사진]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에서의 최남현 최남현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외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80년대 이후에는 술과 마작, 화투놀이로 소일하다시피 했고, 장기간의 투병으로 고급주택 등 모든 재산을 날렸다. 말년에는 양로원 생활을 하며 병상에 있는 아내까지 뒷바라지하다가 1990년 1월 7일 일흔 한 살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마지막 출연작은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 사건을 다룬 신상옥 감독의 <마유미>(1990, 단역)였다. 30대 초반부터 노역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스크린을 누볐던 최남현은 40여 년 동안 720여 편에 출연하는 최다 기록을 세웠다. *
청진은 1930년대 후반부터 대도시로 급성장한 곳으로 1943년 인근의 함경북도 도청소재지인 나남읍을 포함하여 청진부가 되었다. 당시 이곳에는 8개관의 영화관이 있었다. 이는 경성 다음으로 많은 숫자로 급격한 도시화의 결과물이다. ① 청진좌(淸津座), 청진극장(淸津劇場) 청진의 대표적인 극장으로 연극과 영화 상영 외에도 다양한 행사들이 이곳에서 열렸다. 정확한 설립일은 알 수 없다. 1921년 무렵 이곳에서 부민대회가 열린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설립되었을 것이다. (<청진부민대회(淸津府民大會)>, 《매일신보》, 1921.05.04) 1932년 1월 23일 오후 11시 경 영화를 상영하던 중 필름에 불이 붙어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다 .(<淸津座全燒>,《朝鮮新聞》, 1932.01.26) 이후 재건되면서 이름을 청진극장으로 바꾼 듯 보인다. 청진극장은 청진부 서송향정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2층 벽돌건물로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쓰모토(松本浩德), 지배인은 마쓰모토(松本時雄)였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으며 총 객석수는 765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② 대화극장(大和劇場), 동보대화극장(東寶大和劇場) 동보대화극장은 청진부 포항정에 1936년경 3층 콘크리트 건물로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건립 당시 명칭은 대화극장이었으며 도호영화사가 극장을 운영하면서 동보대화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동보영화이며 지배인은 다카시마(高島次)이다. 총 객석 수는 678석이었다. 해방 이후 이름을 다시 대화극장으로 바꾸었다. ③ 제국관(帝國館) 청진부 북성정에 있던 제국관은 1926년 건립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35년 11월 27일 밤 영화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영사기사 조수 1명이 질식사 하는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으며 1938년에는 영사 중 발생한 화재로 영화관이 소실되기도 했다. 이후 재건된 제국관은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조필원(창씨명 祥原弼顯), 지배인은 조재정(祥原載正)이었으며 객석은 489석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④ 공락관(共樂館), 일본극장(日本劇場) 청진부 신암동에 건립된 공락관은 공회당 겸 극장으로 1924년 11월 개관했다. (<공락관낙성식(落成式)>, 《시대일보》, 1924.11.06) 극장 설립은 주식발행을 통해 자금을 모아 이루어졌으며 청진에서 조선인이 경영하던 대표적인 극장으로 관객들 역시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1934년 1월 7일, 온돌의 과열로 인해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을 당시 공락관의 운영자는 조필현(趙弼顯)이었다. 공락관이 전소되자 청진 시민들은 기부금과 은행대출로 총 공비 1만 3천원을 들여 새로운 극장을 낙성했다. 공락관에서는 영화와 연극 외에 공회당으로 각종 단체의 행사장으로 활용되었다. 박노홍에 의하면 2층 벽돌 건물로 무대도 연극하기 알맞았다고 하며 1940년대에는 연극과 악극으로 프로를 채웠다고 한다. 1943년 당시에는 이름을 일본극장으로 바꾼 상태였으며 흥행주는 마쓰시타(松下和三郞)였다. 총 872석의 극장으로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⑤ 소화좌(昭和座), 소화극장(昭和劇場) 소화좌는 청진부 포항정 청진역 바로 앞에 있었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35년 10월 청송유치원의 율동대회가 소화좌에서 개최된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1935년 무렵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간도 대성중학교 후원 순회연주회(1936년 3월), 청진천주교청년회 주최 순교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성극 공연(1937년 8월), 협동예술좌 순회공연(1939년 10월)에 관한 기사가 발견된다. 1940년대 들어 소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듯 보이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키타 미노루(牧田稔), 총 좌석수는 616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⑥ 초뢰좌(初賴座) 청진부 초뢰정에 자리 잡은 대극장으로 1927년 나남극장주식회사가 설립했다. 나남극장주식회사의 취체역은 스기노(杉野政吉)였다. 영화상영관으로 큰 인기를 끌던 초뢰좌는 1932년 1월 22일 관객들의 실화로 전소되었다. 그러나 주주총회에서 재건축을 결정하여 관객 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근대식 극장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기노(杉野政吉), 지배인은 우치다(內田福次郞)이다. 총객석수는 948석의 극장으로 해방 후에도 존속했다. ⑦ 청진문화극장(淸津文化劇場) 건립일은 알 수 없다. 청진부 포항정에 있었던 극장으로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이토(齊藤武久), 총 객석수는 350석이었다. ⑧ 중앙관(中央館) 청진부 수남정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개관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다케무라(竹村英作)이며 총 객석수는 85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나남극장(羅南劇場) 1943년 청진부에 흡수된 나남읍에 위치했던 극장으로 1920년 말 설립되었으나 1922년 2월 14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손해액은 3만원에 달했다 .(<羅南劇場全燒>, 《京城日報》, 1922.02.16) 청진 외에 함북지역의 다른 극장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⑩ 유취좌(遊聚座) 성진의 유취좌는 1934년 주식발행을 통해 만들어진 주식회사유취좌에서 설립한 영화관으로 성진부 성진읍 본정 120번지에 있었다. 설립 당시 대표는 나츠메(夏目十郞兵衛)였다. 유취좌의 낙성은 1935년 2월 5일에 이루어졌는데 총 건축비는 1만 8천원이 들었다. (<성진 유취좌 낙성(落成)>, 《조선중앙일보》, 1935.02.16) 한동안 성진부 유일의 흥행장이었기에 일본인과 조선인들 모두 이 극장을 활용하여 각종 행사와 오락들을 즐겼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야타(宮田資嘉吉), 지배인은 마츠모토(松本豊治)이며 총 객석수는 568석이었다. ⑪ 성진문화극장(城津文化劇場) 성진부 본정에 있었던 극장으로 언제 개관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마나 마사오(山名正雄)였으며 총 객석수는 300석이었다. ⑫ 나진극장 나진부 욱정에 있었던 극장으로 언제 개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33년 10월 폭풍으로 전괴되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개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나진극장은 재건되었는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니하라(谷原信夫), 총 객석수는 905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⑬ 아오지극장 아오지읍 회암동에 있던 극장으로 건립연도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회암흥행사(灰岩興行社), 지배인은 마츠오카(松岡茂樹), 총 객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후 까지 존속했다. ⑭ 회암극장(灰岩劇場) 아오지읍 회암동에 있던 극장으로 건립연도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토(佐藤惣五郞), 지배인은 가나이(金井順郞), 총 객석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⑮ 만년좌(萬年座), 회령극장(會寧劇場) 회령의 만년좌에서는 1922년 무렵부터 공연기록이 발견된다. 이를 통해 1920년대 초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1928년 당시 만년좌의 주인은 일본인 마에다(前田政)였다. 마에다는 만년좌를 중심으로 주식회사 형태의 극장 설립을 추진하여 1932년 주식회사 회령극장이 설립된다. 같은 해 만년좌를 대신하여 회령극장이 신축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회령극장주식회사, 지배인은 이와모토(岩本三峯)였다. 이와모토는 창씨한 조선인이라고 전한다. 총 객석수 745석의 극장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⑯ 웅기좌(雄基座) 웅기읍에 있는 극장으로 1930년 남녀유학생웅변대회가 그곳에서 개최된 것으로 보아 그즈음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타카 타카노리(位高隆則)이며 총 객석수는 506석이었다. 해방 후 웅기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⑰ 주을극장(朱乙劇場) 주을읍에 있던 극장으로 구체적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 그 내역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27년도에 공연한다는 소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카미야(神谷賴正)이며 총 객석수 880석의 극장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⑱ 영안극장(永安劇場) 영안읍에 있던 극장이다. 설립연도는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사키(佐佐木太一郞)이며 총 객석 수는 285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⑲ 길주극장(吉州劇場) 길주읍에 있는 극장으로 1939년 협동예술좌의 순회공연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동수(東秀)이며 5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⑳ 남양극장(南陽劇場) 1940년 무렵 온성군 남양읍에 설립된 극장으로 김강연(金康燕)이 건립했다. 극장 설립에 맞춰 남양읍에서는 남양극우회가 창립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강연(창씨명 金城康燕)이며 총 객석수는 5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㉑ 무산극장(茂山劇場) 1940년 무렵 무산읍에 설립된 극장이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요나가(豊永保)이며 총 객석수는 703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5.02.16. 성진 유취좌 낙성(落成) 【성진】 성진의 유일한 오락긔관인 유취좌(遊聚座)는 작년 十一월 중부터 공비 一만 八천여원을 드려서 건축 중 준공되여 지난 五일 낙성식을 성대히 거행하엿다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22.02.17. 나남극장 전소(全燒), 손해는 삼만원 지나간 십사일 오젼 열시에 라남(羅南)에 오직 하나 되는 연극쟝 오락쟝에셔 불이 나셔 건물 젼부를 태워바렷다는대 손해는 약 삼만원이오 원인은 알 슈가 업다는대 그 건물은 개인의 쇼유인바 대졍 구년 말에 낙셩된 극쟝으로 다시 지으려면 상당히 날짜가 걸니겟다더라(나남) [자료] 《동아일보》, 1928.01.17. 민중기관 『공락관(共樂舘)』, 유지회(維持會)를 조직하고 대활동 함북 청진항에 잇는 공락관은 청진에 거주하는 시민 전체의 힘으로 건축된 집인 만치 그 역할이 공회당과 여(如)하야 시민들의 집회와 각 흥행단체에 마다 편의를 준지 五개성상이나 되엇스되 건축 당시의 부채를 우금(于今)껏 변상(辨償)치 못하야 채권자들의 독촉이 심한 일방 또한 유지도 곤란케 되엇슴으로 차(此)를 애석히 여기는 유지 몃 사람은 공락관유지회를 조직하고 활동을 하든 터에 금번 동회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내(來) 음(陰) 정초(正初)를 기(期)하야 상(賞)타는 활동사진대회를 개최키로 결정한 후 대활동을 개시하얏다는데 동 유지회는 사회 각 방면 인사들의 동정이 잇기를 원한다더라. (청진) [자료] 《동아일보》, 1934.01.09. 청진 유일의 집회소 공락관이 전소(全燒), 원인은 온돌, 손해는 一만 五천, 물건 끄내다 감독 소사(燒死) 【청진】 지난 七일 오전 一시경에 시내 신암동(新岩洞) 좌청용 끝에 웅입하엿든 청진 시민의 소유인 동시에 역사적 집회 장소인 공락관(共樂館)은 의외에도 숙직실 온돌에서 발화되어 말숙하게 빈터만 남기고 전소가 되엇다. 그 공락관에 감독책임 잇는 임덕재(林德在)(四三)는 무슨 중요한 물품이나 잇섯든지 불붓는 집속으로 들어갓다가 무참하게도 나올 길을 찾지 못하야 공락관과 함께 타버리엇다. 이 급보를 접한 소방조와 청진경찰서에서는 맹렬한 활동을 개시하엿으므로 마침 화근이 인가에는 범치 아니하엿다하며 그 손해는 대개 一만 五천원가량이라 한다. 이 공락관은 대정 十三년에 청진 유지가 모여 청진에 중심한 집회장소가 없으므로 크게 유감으로 녀겨 곧 발기하야 동년 十一월 경에 준공한 것이라 하며 현재 五천원의 보험에 들엇다는데 관리 대표인 김병윤(金秉倫)씨는 불원간 대책 협의회를 열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28.03.01. 지방논단, 공락관 문제, 일반시민에게 고함 / 청진 일기자 청진! 북선에서 가장 자랑하는 良港이오 북간도와 노령을 접경으로 물화 교통 상 관문일 것이다. 또한 여기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청진을 관찰할 때 기후로나 지역으로서 북선(北鮮)을 중심으로 하고 어느 방면으로든지 활동하랴고 하면 먼저 청진! 그곳에 간판을 부치는 것이 아닌가? 반면(反面)에서 이곳의 주인이오, 더욱 조선인의 현재나 장래를 생각한다면 열혈의 정성과 비상의 노력이며 공고한 단결을 요하는 것은 재론할 바 업슬 것이다. 그러타면 청진 일반 시민은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그 일례를 들기 위하야 기자는 이제 공락관유지회 흥행부와 일반시민의 태도를 좀 적어 보려고 한다. 二 먼저 공락관은 누구의 집이며 그 집의 사명은 얼마나 중차대한 것이냐? 조선인만 일만오천의 인구를 산(算)하는 청진에서 시민의 유일한 집회장소인 공락관은 오직 청진시민의 품속을 떠나서야 어떠케 그것이 조선인의 공회당이라는 존재를 시인할 수가 잇슬 것이랴! 큰일! 작은일? 이제 당장에 죽는다고 하야도 모여서 단결의 성(聲) 한번이라도 외쳐볼 곳도 공락관이오, 의분에 뛰고 참패자의 하소연을 서로 할 곳도 공락관이 아니냐? 그리하야 이 공락관 때문에 몃 사람의 피와 땀을 모아서 청진 공락관유지회 흥행부를 조직하고 우리의 어린이들이 색동저고리를 닙고 뛰어다니는 구(舊) 정월 一일부터 활동사진흥행을 시작하야 『빡따드의 도적』 『황금광시대』 『따크라대왕』 『동도』, 이것을 차례로 개봉하야가지고 지금까지 북선 몃 개소를 순회하는 중이다. 일반 단원이 북풍한설을 무릅쓰고 갖은 고통을 바드면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청진이란 제 곳으로 돌아올 때 누가 따뜻한 악수한번이라도 하여 주엇든지? 하는 기억조차 그들에게는 업다고 한다. 더욱이나 공락관에서 흥행을 하게 되면 어느 사람이든지 그들을 일종 풍류랑들의 작희(作戲)로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三 청진에 있는 유지라고 자처하는 제군! 사람은 언제든지 참 사람이 되기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공락관 그것이 제군들이 보기에는 풍류랑들의 작희장으로 보이는지? 혹은 어떤 이색이족(異色異族)의 향락장으로 보이는지? 나는 이곳저곳에서 날마다 듯는다. 술집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색녀의 웃음소리에 장단을 마추어 술잔을 쉴 새 업시 할트면서 뼈 업시 안저잇는 소위 유지 자칭 신사인 제군들의 추태망동의 그 소식을! 마작대회에서 밤은 새우고 매음녀의 밀실에서 낙원을 찾아보려고 애쓰는 제군아! 사회 그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기에 노력하기를 절실히 늣겨야 할 것이다. 四 반성하라! 사람이 되라. 유산자 유지 신사 제군이어! 매음녀의 누각이나 색주가의 발전을 축복하기에 급급하지 말고 공회당인 공락관의 발전은 고사하고 개인의 손에 방매되랴는 죽어가는 그 목숨만이라도 구하여라. 도박으로 천원이니! 칠백원이니 하지말고 진정한 선(線)에 서서 인간다운 일기를 작성하라 비록 자신은 대아를 망각하고 장래나 현재에 생의 의의를 모를지라도 두상(頭上)에 떠도는 대공리의 벼락을 면할 수 업슬 것을 각성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청진의 제군이어! 시각으로 비참한 패배의 설움을 늣긴바 있거든 분초를 다투어 반성 행진 성공 있기에 힘쓰기를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