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
- 감독
- 김동희
- 제작년도
- 2009
한 번 쯤은 달리기를 해봤을 것이다. 운동회의 릴레이든, 체력장의 오래달리기든 하다못해 트레이드 밀을 달린 경험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호흡의 중요성이야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릴레이를 할 때는 바통을 움켜쥔 채 단박에 내달렸을 것이며, 오래달리기를 할 때는 앞으로의 거리를 생각하며 페이스를 조정하지 않았을까. 뭐가 됐든 너무 많이 삼켜서도 너무 빨리 내뱉어서도 안 된다. 적절한 호흡이 있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여기 성긴 듯 급박한 호흡으로 나아가는 영화가 있다. 바로 홍원찬 감독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두 가지 흐름의 호흡을 통해 방콕에서 펼쳐지는 두 남자의 살인극을 그린다. 내러티브적 헐거움이란 성긴 호흡과 감정적 이음새로 이뤄진 액션의 급박한 호흡이 바로 그 두 가지이다. 그렇다면 먼저 내러티브적 헐거움이란 어떤 의미일까. 엄밀히 따져 영화는 극을 견인하는 치밀하고 뚜렷한 개연성을 제시하진 않는다. 그러나 영화 속 개연성은 부족할지언정 분명 존재하며 그가 진정 필요한가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정보를 전하는 영화의 흐릿한 흐름이 전략적 호흡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관객은 러닝타임을 따라가는 내내 이야기의 명확한 인과성을 얻을 수 없다. 영화는 ‘인남(황정민)’이 왜 하필 일본으로 떠났는지, 어쩌다 암흑가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 심지어 복수의 원인이 되는 ‘영주(최희서)’와 과거 어떤 특별함을 가졌는지도 제시하지 않는다.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는 인남의 대사와 엘리베이터 속 단 하나의 총격 씬만이 둘의 과거를 압축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불분명하다. 인남은 그저 시간이 흘러 영주가 죽었다는 전화 한 통과 그녀의 아이가 행방불명되었음을 듣고 방콕으로 향한다. 인남의 대척자 ‘레이(이정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레이는 인남이 자신의 형을 죽였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인남을 쫓는다. 형제의 과거가 간략히 언급되긴 하나 그들만의 특별한 무언가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는 흘러가는 줄곧 맹목적 복수의 이유를 뒷받침할 형제의 우애나 연인의 사랑 더 나아가 조명될 법한 인남의 부성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죽어버린 과거의 인연만이 복수를 헐겁게 부여잡을 뿐 복수를 담아두는 줄거리의 개연성과 호흡은 다소 느슨하고 성겨 보인다. 이는 영화가 복수극이 아닌 살인극으로 전환되는 이유기도 하다. 더하여 이런 전개에 앞서 느슨한 개연성은 하나의 전략으로 영화적 전환을 뒷받침한다. 치밀한 복수의 이유와 계획이 제시되었다면 영화는 호쾌하게 질주할 수 없다.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족한 개연성은 극을 이끄는 하나의 주요한 호흡으로 거듭난다. 이는 급작스레 시작되는 복수의 긴장감을 내뱉는 날숨의 과정이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터 몰아쳐 올 액션의 시작을 전제하는 주요한 바탕으로서 영화의 장치가 된다. 영화는 이렇게 개연성의 필요를 물으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바로 속도감 있는 액션이다. 듬성하니 채워진 복수의 뒤를 짚어 가던 관객은 점차 희미해지는 복수 대신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받는다. 바로 인남과 레이의 쫓고 쫓기는 액션 활극이다. 사실 이런 영화적 변환은 복수의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영화의 장소가 방콕으로 옮겨온 뒤 인남은 복수의 단서를 얻기 위해 사람들을 고문하며 살해하지만 결국 영주의 복수라는 근원에 닿지 못한다. 레이 역시 인남을 향한 살의의 이유를 잃어버린다. 즉 이들의 파괴 행위는 곧 복수라는 행위의 파괴이다. 결국, 관객과 두 인물이 새로운 선택지를 택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렇게 둘의 파괴 행위를 호쾌한 액션으로 재생하며 이전의 헐거운 개연성은 오히려 복수를 벗어던질 장점이 된다. 아이만은 살려 줄 수 없느냐 말하던 인남이 어느 순간 태도를 바꾸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더 이상 쫓아오면 넌 내 손에 죽는다.” 인남이 레이에게 전하는 대사이다. 이는 곧 영화의 내적 전환을 확언한다. 관객은 레이에게 향하는 인남의 태도 변화를 통해 그의 목적성이 변화하였음을 깨닫는다. 영화의 초반 영주의 복수와 아이의 행방을 위해 피를 흘렸던 인남에게 새로운 목적이 부여된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결과이자 내러티브적 선택이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연인의 복수(그 이유 역시 확실치 않고 불친절한)를 성긴 호흡으로 채워 왔다. 남은 시간 앞으로 내달리기에는 그 이유도 호흡도 부족하다. 새로운 숨을 들이마셔야 한다. 그렇기에 인남은 복수가 아닌 살인을 선언한다. 자신과 작은 아이의 몸뚱이 하나 간수하기 힘든 곳에서 그는 인간의 살인을 목표로 새롭게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그렇게 인남과 레이의 싸움은 후반부로 향할수록 속도를 더해간다. 영화는 변화했고 헐거운 복수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피 끓는 투쟁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호흡의 매개는 무엇일까. 둘의 이야기가 액션을 위주로 변화되었다고 해도 영화는 분명 그 원동력을 가져야만 한다. 영화의 줄거리가 다소 힘을 잃었다고 해도 단지 그렇게 둘 수 없음만은 분명하다. 벌어져 가는 영화를 단단히 부여잡는 것은 바로 인남과 레이 두 주인공이 내뿜는 뜨거운 감정이다. 이것이 바로 점차 벌어져가는 복수를 접합시킬 아교이자 호흡이다. 이들이 가지는 맹목적 살의와 파괴성은 피를 연료로 삼아 영화를 불태운다. 하늘을 적시는 붉은 노을과 둘의 싸움으로 불타는 거리의 연기는 두 남자의 매연인 것이다. 영화는 두 인물의 대치와 그들이 표출하는 감정으로 달려가는 관객의 호흡을 다시 한번 정렬시킨다. 많은 대사는 필요치 않다. 둘의 눈빛과 부딪히는 육체만으로도 다소 심심했던 영화의 흐름은 활기를 띈다. 이런 영화적 흐름은 레이의 대사를 통해서도 구체화된다. 왜 그렇게 인남을 죽이고 싶어 하냐는 질문에 레이는 “더 이상 이유는 중요치 않아.”라고 답한다. 그렇다. 이는 곧 영화적 변화를 매듭짓는 결정타이며 극의 마무리를 내정하는 한 줄이 된다. 줄곧 언급했듯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복수와 그 과정에서 살인과 생존으로 옮겨갔다. 두 인물은 더 이상 복수의 원인과 결말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리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자 한다. 끈적한 살의를 품은 액션은 성기던 영화의 호흡을 급박하게 바꾼다. 치밀하지 못했던 복수로 비어있던 스크린의 빈틈은 이렇게 투쟁적인 들숨으로 가득 찬다. 마침내 숨은 영화의 말미 턱을 뚫고 뛰쳐나온다. 영화의 마지막, 인남과 레이는 부서진 자동차 속 피투성이가 된 채 나란히 죽어간다. 레이의 대사가 인상 깊다. “결국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인남은 레이를 그저 조용히 바라볼 뿐 어떤 말도 행동도 없다. 이는 곧 인남의 긍정이자 레이의 긍정이다. 둘은 죽어가는 와중 서로의 곁을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단순히 생명력을 잃어가는 몸은 문제가 아니다. 인남도 레이도 어느새 복수의 이유를 잃은 채 그저 서로를 죽이고자 달려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다. 조용히 앉아있더라도 더는 숨을 들이마셔 달릴 힘이 없다. 달릴 수 없다면 멈춰야 한다. 성긴 호흡으로 시작된 발걸음이 이리도 빠른 헐떡거림으로 바뀌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말이다. 느린 듯 성큼성큼 나아갔던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전력을 다하는 달음박질이 되었다. 호흡 역시 그에 따라 조금씩 거칠어져 흐트러진다. 영화가 빨라지는 만큼 거칠게 변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 어떤 달리기라도 결승선은 존재한다. 무엇을 보았든 무엇을 위해 달렸든 주자는 결국 결승선에서 멈춰 선다. 복수로 시작해 살인이란 생존으로 달려갔던 인남과 레이. 둘은 단지 죽음이란 선에 멈추었을 뿐이다.
... (세 번째 이야기) < 장군의 아들 >은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 반지의 제왕 >과 달리 이 세 편은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이면서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실 내가 할 이야기는 일편에서 모두 다 했어요. 원래는 그런 다음 연출부를 했던 김영빈 감독이 이편으로 데뷔할 예정이었지요. 그런데 이게 흥행을 해도 너무 많이 한 거예요. 나는 다른 영화를 할 생각이었는데 이태원 사장이 나를 설득한 거예요. 이건 이편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라는 게 있는데 그걸 배신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거참, 내가 그 설득에 말려들어간 거예요” 아마 임권택 자신도 당황했던 것 같다. 그는 그저 잠깐 쉬어가며 1960년대 자신을 한번 돌아보면서 자기 자신의 현재를 점검해보고 싶었다, 라고 이 영화를 설명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여기서 어떤 활력을 발견했다. 1987년 민주화 대항쟁(의 승리),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순위). 무언가 부글거리는 사회적인 에너지. 거기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는 기분. 무언가, 라는 기대. <장군의 아들>은 그 자리에 도착했다. 물론 그것이 올바른 도착인지를 물어보는 것은 또 다른 질문이다. 나는 여기서 단지 임권택의 자리에서만 대답할 것이다. 임권택은 이 장르의 영화, 좀 더 간단하게 <장군의 아들>을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건 <장군의 아들> 이전에 자리한 < 개벽 >이 설명하고 있다. 거기서 좀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확신하게 된다. 반대로 <장군의 아들> 이후로 밀고 나아가도 대답은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장군의 아들> 일편 ‘이후’에 그것을 동일한 제스처로 반복해야 할 때 생긴 것이다. 모순의 자리. 거기서 멈추어도 안 되지만 더 밀고 나아가도 안 된다.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만일 <장군의 아들> 이편이 일편과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하면서 갑자기 역사의 고증을 바탕으로 김두한의 실제 모습을 다루는데 집중했더라면 대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당신은 세 편의 이야기가 예외 없이 일제 강점하에서 멈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식민지의 경험. 김두한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해방을 맞이했고, 그런 다음 한국전쟁을 겪었으며, 1965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다. 세 편의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은 성장하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문학적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생겨났다. 그런 다음에도 이편을 만들어야 한다. 이야기가 모두 소진되자 <장군의 아들> 이편은 이상한 모습으로 성립되었다. 사뮤엘 베케트의 표현.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다시 한 번 시도하기. 다시 한 번 실패하기. 다시 한 번 더 잘 실패하기. 거기서 무엇이 더 가능할까. 거기서 무엇을 더 실현시킬 수 있을까. 막다른 골목에서 약간의 우회. 먼저 이 영화는 다시 시작하면서 동시에 일편에 대한 후일담의 형식을 가졌다. 아마도 일편의 대중적인 성공이 이 영화의 줄거리와 등장인물에 대한 하나의 약속이 되었을 것이다. 세 가지 좌표. 이것은 지켜져야만 한다. 동시에 너무 여기서 멀리 벗어나면 안 된다. 그렇지만 이 줄거리를 반복하면 안 된다. <장군의 아들> 이편은 이 삼각형의 긴장 어딘가에 놓여있다. 이때 무엇이 이편을 작동시키는 힘이 될 수 있었을까. 전차(電車). 아니, 차라리 더 단언적으로 < 장군의 아들 > 이편의 영화적 주인공은 전차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전차는 조선시대 말 고종때 한양에 1898년 12월 25일 지금의 서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구간이 개통하면서 처음 모습을 보였다. 이듬해 다시 종로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2호선이 열렸다. 이 구간을 1900년 1월 원효로 4가까지 연장하였고, 1901년 남대문에서 서소문을 거쳐 서대문에 이르는 구간을 완성하였다. (그런 다음 이 구간은 여러 종점을 늘려가면서 계속 확장되었다) 전차는 서울 시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지만 1969년에 이르러 다른 교통수단들과 도로 점유율의 실용성 문제로 전면 철거되었다. (그리고 당신이 잘 아는 것처럼 곧 뒤이어 지하철 공사에 착공하게 되었다) <장군의 아들> 이편에서 보여주는 전차는 (아마도) 2호선인 종로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노선일 것이다. 그러나 한성은 경성을 거친 다음 한국 전쟁 때의 폭격, 1960년대 이후 끊임없는 재개발을 거치면서 원래의 길목을 알아볼 수 없게 바뀌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이 노선이 어떻게 이어지는 지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1954년에 처음 서울에 올라온 (다음 여기 머물면서 충무로를 드나들며 제작부를 거쳐 연출부를 시작하고 1962년에 첫 영화를 찍은) 임권택 은 (김두한이 종로통을 풍미하던 일제 강점하는 아닐 지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이 전차가 통과하는 길목(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장군의 아들> 이편에서 무대가 된 경성의 지리를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사에 따르면 <장군의 아들> 일편과 이편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6개월이다. 김두한은 큰형님 김기환을 구하기 위해 혼마찌깡에 달려가 기꾸치에서 일대접전을 벌리고 김동회를 물리친 다음 마지막 장면에서 (일본 경찰에 붙어 앞잡이 노릇을 하는 창씨 개명한 한국인) 구니모또 형사가 호명하는 데서 끝난다. 그런 다음 이편은 김두한이 (아마도 그로 인해 구치소 생활을 한 다음) 경찰서를 나서는데서 시작한다. 종로패는 김두한에게 큰 인사를 드리면서 “형님이 들어가신 지” 육 개월이 되었다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수많은 종로에서의 싸움을 보면서 한 번도 전차를 본 적이 없다. (이미 연표를 제시한 것처럼) 전차는 역사적으로 그 사이에 들어선 교통수단이 아니다. 정확하게 무대가 된 시간적 배경을 거의 설명하지 않지만 이야기 안의 시간적 지표 중의 하나인 박계주 작가의 <순애보>를 미루어 짐작컨대 <장군의 아들> 이편의 시간은 1940년 그해 여름일 것이다. 박계주는 <순애보>를 매일신보(每日新報)에 1939년 1월 1일부터 6월 17일까지 연재하였고 그런 다음 같은 해 10월 매일신보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장군의 아들> 이편의 계절은 여름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김두한은 어린 남녀학생을 불러 박계주의 <순애보>를 읽게 한 다음 그걸 들으며 눈물을 훔친다. 약간 셈을 하고 싶다. 김두한은 실존 인물이며, 1918년 5월15일에 태어난 그가 23살 때의 이야기이다. <장군의 아들>은 이제 막 어른이 되려는 소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장군의 아들>에 넘쳐나는 청춘 예찬의 기쁨이라는 감정의 기호들. 어렴풋한 사랑. 서투른 첫 경험. 되찾은 우정. 혹은 은혜는 갚아야한다는 공명과도 같은 공감. 왜 김동회가 김두한에게 갚아야 할 마음의 빚에 대해서 하야시가 감흥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말하자면 잘 설명되지 않는 내밀한 공동체. 종종 그들의 배움은 불완전하고 서로에게 베푸는 예절은 때로 불가능한 규칙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지키기 위해서 그들 사이에 때로 적대감은 어떤 우애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안에서 장르의 규칙은 그들이 어른이 되어가면서 청하는 배움 때문에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 위반 자체가 <장군의 아들>에서 우리들에게 다소 기괴하게 여겨지는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장군의 아들>이 단지 1991년에 갑자기 부활한 1960년대 ‘다찌마와리’ 영화의 변주라는 지적에서 멈추면 안 된다. 이 영화가 우리들을 건드리는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가 장르를 지나친 다음 불가능한 가능세계에 가 닿으려고 애를 쓸 때 문득 마주치는 파토스의 헌신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이 세 편의 연작을 공격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그저 이 세 편이 일제 강점하라는 무대를 빌려 폭력을 심미적인 차원으로 이동시키고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장군의 아들>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시간을 헛되이 쓰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제 강점하의 경성 종로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상인들에게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뜯어내는’ 중이다. 착각의 왕국. 그들은 자신들이 협객이라는 착각에 빠진 깡패들이다. 도착적인 위로에 심취한 폭력. 하지만 그걸 누가 모를까. <장군의 아들>에 냉소적으로 다가갈 때 우리는 차라리 이 영화를 보지 않는 편이 낫다. 핵심은 반대로 현실에서 불가능한 삶의 긍정적인 태도(중의 일부)가 왜 일제 강점하를 무대로 한 가상세계에서는 성립되느냐는 것이다. <장군의 아들>을 채우는 것은 어떤 현대적인 해석도 배제한 채 거기 머물고 있는 향수이다. 이때 여기에는 나른한 낭만주의와 갑자기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불화의 도전이 있다. 이 불화는 전적으로 과거의 가치 기준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왜 적용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나온 것이다. <장군의 아들>은 단지 그 시대적 배경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그 가치의 체계 안에 순응하는 자리에로 반복적으로 호명하는 영화이다. 여기에는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한 충만했다고 할 만큼의 탄식에 가득 차서 거기에 머물고 싶어 한다는 인상이 도처에 남아있다. 다소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장군의 아들>에는 도올 김용옥이 그려낸 동양학 안에서의 철인(哲人)의 철인화(鐵人化)라고 부를만한 육화가 있다. (김용옥은 일편의 시나리오에 관여했다) 물론 김용옥은 이 영화가 장르영화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장군의 아들>은 흥미롭게도 가장 세속적인 밑바닥의 삶을 장르화 시킨 다음 그들에게 규칙의 윤리에 대해서 존중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편은 김용옥 대신 (희곡작가이자 연극 연출자인) 이윤택이 이어서 시나리오를 썼지만 여전히 일편에서 세워진 불화의 바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무엇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거기서 더 밀고 나아갈 때 영화는 더할 나위 없이 기호적이 되어간다. 나는 여기서 따분하게 기호학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성립시키는 시청각 기호들. 그것들만으로 만들어내는 형식들의 강도. 부서져나가는 것을 견디는 강도의 내밀성. 어떤 점에서 <장군의 아들> 이편은 세 편의 영화중에서 오로지 형식만 남은 영화, (만일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형식만으로 견디는 영화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 내밀성의 중심에 전차가 있다. 우선 배치의 문제. 전차는 종로 한복판을 계속해서 가로 지르고 있다. 이 전차는 화면을 기준으로 가로로만 움직이고 있다. < 장군의 아들 > 이편에서 단 한 번도 이 기차가 세로로 오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실용적인 설명. 이 세트장은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각도를 벗어나면 곧장 세트의 헐벗은 이면이 드러날 것이다. 이때 이 영화는 두 개의 카메라 위치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종로 한복판(이라고 가정된) 사거리의 교차점을 중심에 놓고 세로축을 기준으로 화면을 가로 지르는 전차 철도의 이쪽과 맞은편이라는 두 개의 공간만을 사용할 수 있다. 같은 설명의 다른 판본. 그렇게 되면 오른쪽과 왼쪽에는 카메라가 들어서지 못한다. 단지 이것은 좌우 화면만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세로 축 중앙에서 45도 안에서만 카메라가 이동할 수 있으며 그 바깥을 사용하여 중앙 교차점을 기준으로 마름모꼴을 형성하여 움직이는 배치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좀 더 간단한 설명. 종로 한복판은 네 개의 꼭지점 중 세로축의 양쪽 끝을 포기하고 가로축의 위와 아래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전차는 <장군의 아들> 이편에서 스펙터클하지만 동선을 진행하는 과정의 블랙홀이 될 수밖에 없다. 드러난 시각적 스펙터클. 과정 안에서만 보이는 시각적 블랙홀. 첫 등장. 시작하면 (혼마치깡의 하야시 구미(組)들과 김동회를 먼저 소개한 다음) 구치소에서 나온 김두한은 전차를 타고 종로에 돌아온다. 이 장면은 김두한의 전차에 대한 영화적 전유를 과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그 곁에 구니모토 형사가 타고 함께 도착한 다음 이 전차로 이동할 수 있는 김두한의 (경성 내에서의) 반경거리를 줄거리 안에서 제한한다. 김두한의 신분에 대한 설명. 그리고 이야기의 경제성. 두 번째 등장. 김두한이 구치소에서 나오자 이튿날 아침 일찍 하야시 구미(組)가 종로에 쳐들어올 때에 전차가 지나간다. 이때의 전차는 명백히 와이프(wipe) 효과를 내면서 화면을 지워나간다. 이들은 운당여관에서 잠든 김두한과 종로패를 기습하여 승리를 거둔 다음 김두한을 종로 한복판에 무릎 꿇린다. 그때 하야시는 지나가는 전차를 멈춰 세우고 김두한의 굴욕적인 패배를 전시한다. 같은 장면의 다른 설명. 하야시는 종로통 조선상인들 앞에서의 이 부끄러운 순간을 지우려는 와이프 효과를 멈춰 세우고 그 시간을 할 수 있는 한 연장한다. 이야기 바깥에서 주인공을 돕기 위해 나타난 영화적 효과. 그것을 중단시키는 또 다른 등장인물의 요구. 세 번째 등장. 하야시와 (뒤이어 구치소에서 나온 종로패의 큰 형님) 김기환은 혼마치깡 사쿠라(櫻) 카페에서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맺는다. 그때 김두한은 술에 취해 모자를 두고 온다. 그 모자를 돌려주러 사쿠라 카페의 주인 세츠코가 종로를 찾아올 때 전차를 타고 온다. 네 번째 등장은 반복이다. (롱테이크로 연출된) 김기환이 종로패 부하들에게 수모를 당한 다음 떠나자(마자 기다린 것처럼) 김두한과 세츠코를 태운 전차가 도착한다. 전차는 마치 김두한만을 위해 운행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다섯 번째 전차의 등장이 내가 설명하려는 장면이다. 김두한을 찾아온 김동회는 종로 한복판에서 대결을 신청한다. 전형적인 서부극의 컨벤션. 두 가지 지적. 첫째, 일편에서 김두한과 김동회의 대결은 이야기의 절정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편에서는 영화가 시작하고 37분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영화의 사분의 일이 지나자마자, 둘을 마주치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편에서는 김동회가 중심에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대결 이후 곧 이 인물이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대결 이후 김동회가 즉시 바깥으로 빠져나가지는 않았지만 중심의 외곽을 맴돌다가는 마지막 종로에서의 집단 대결 장면이 오기 전에 경성을 떠나 만주로 간다. (그런 다음 삼편에서 만주로 도망친 김두한과 다시 만난다) 둘째, 이 대결은 예를 갖춘 대결의 절정에 해당한다. 장르에서 언제나 절정은 맨 마지막까지 숨겨두는 법이다. 이걸 서둘러 보여줄 때 이제 < 장군의 아들 >에서 예(禮)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김동회와의 대결이 끝나자 이편에서는 마치 한 시대가 끝난 것처럼 일편과 같은 협객들의 예를 갖춘 대결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돌아온 김두한은 평화를 깨고 종로 주변의 선배들을 찾아다니면서 세금을 요구한다. 선배들은 대결에서 패배했을 때 자신의 ‘동생’들을 맡기고 ‘나와바리’를 떠나는 대신 (일편과 달리)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거기서 연명한다. 이제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이편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 대결 이후에 김두한은 더 이상 김동회와 대결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이 힘겨운 대결에서 얻을 게 없다. 과잉적인 제스처 속에서 선택된 태도. 더 이상 그것을 하지 않을 때 언제나 거기에는 그것을 하지 않는 이상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S#_1 S#_2 S#_3 S#_4 S#_5 S#_6 S#_7 S#_8 S#_9 S#_10 S#_11 S#_12 S#_13 S#_14 S#_15 신기한 첫 장면( S#_1). 김동회가 김두한과 대결할 때 그들이 종로 한복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신 다짜고짜 둘이 마주선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이 쇼트는 마치 다음 쇼트와 순서가 뒤바뀌었거나 앞질러 나온 것처럼 등장한다. 그런 다음 장면에서( S#_2) 여기가 종로 한복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master_shot) 서로를 마주보면서 자신들의 동선을 원형으로 그려 나갈 때 이 모든 상황에 무심하다는 듯 느리게 두 대의 전차가 양쪽으로 마주보고 온 다음 서로 교차해서 지나간다. 물론 그 화면 효과는 우리들이 보고 싶어 하는 김두한과 김동회의 대결 장면을 정확하게 가로 막은 다음 다시 무대의 막이 열리듯이 그 둘을 다시 보여주면서 각자 제 갈 길을 따라 이동한다. 설명의 반복. 화면 안에서 다시 화면을 만들고(re_cadrage) 두 대의 전차는 화면을 지운 다음 다시 연다. (wipe_in_out) 그때 카메라는 이 모든 움직임을 허용하기 위해서라는 듯 둘이 마주보는 자리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전차가 교차하는 길목을 넘어서, 그런 다음에도 구경꾼들로부터도 더 멀리 떨어져서, 아마도 이 장면에서 가장 먼 구경꾼의 자리에 머문다. 김두한과 김동회, 이 둘은 이때 아무리 격렬한 대결을 벌인다 할지라도 (전차가 교차하는) 사거리 너머로 넘어오지 못한다. ( S#_3) 왜냐하면 이 둘이 그걸 넘어오기 위해서는 사거리의 저편으로부터 이편으로 넘어온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을(bridge_shot) 피할 수 없는데 그때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이어진 세로의 방향과 마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걸 보여주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거기에도 세트를 지어야 한다. 임권택 은 먼저 세트의 조건을 받아들인다. 남은 방법은 그들의 대결을 저 교차점으로부터 넘어오지 않게 진행하는 것이다. 이 씬에서 김두한과 김동회의 액션 연출 자체는 간단하다. 그러나 전차가 교차하고 있는 종로 한복판에서 세트를 인정하고 그것을 성립시키는 것은 단지 이야기의 안에 들어온다는 문제가 아니다. 이 공간이 장소로서 구멍이 뚫린 결함을 지닌 사각형이며 두 명의 벡터는 서로의 힘을 자유로이 사용하면서 이 공간의 영화적 한계와 완전히 무관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때 이 공간은 어떤 수단을 써서 이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만들면 즉각적으로 한계가 드러나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임권택은 먼저 여기에 하나의 가상원을 그린 다음(imaginary circle) 김두한과 김동회가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전차가 교차하는 선을 넘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종로 한복판을 가로로 가상선을 그은 다음(imaginary axis) 전차가 교차하는 세로선을 180도로만 오고 간다. 이 공간을 임권택의 장소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나는 몇 번이고 임권택이 세트를 세운 다음 그 공간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의 제한을 재빨리 받아들인 다음 동선과 시선을 분리하여 이야기의 줄거리가 진행되는 작은 공간과 그것을 바라보는 큰 공간으로 만든 다음 두 개의 공간을 조립하는 방식을 현장에서 혹은 영화에서 보았다. 이때 둘 사이를 보충하는 것은 물론 영화를 보는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시선의 결함을 메우는 상상적인 지도 그리기의 능력이다. 이때 약점은 시선을 구부려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원과 직선만이 활동할 뿐이다. 임권택은 하나의 시선을 더한다. 그건 누구의 시선도 아닌 영화의 시선인데 물론 그 쇼트는 대결하는 둘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이 대결 장면의 첫 쇼트를 설명하게 수 있게 되었다. 명성바에서 종로 한복판으로 갑자기 옮겨왔을 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첫 장면( S#_1)은 이 시퀀스의 전체 운동을 위한 마스터 쇼트이다.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그때 기준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퀀스를 성립시키는 역량의 존재론과 연관 지어진다. 언제나 유기적인 쇼트들의 활동. 임권택은 쇼트가 문득 차원을 이동하여 견인되거나 혹은 반대로 갑자기 뒤로 물러나서 측량되기를 원치 않는다. 변화하는 전체 안에서 던져진 시간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 마치 교차선 너머로 온 것에 스스로 깜짝 놀라기라도 하듯이, 혹은 그 자리에 대한 반작용이 있기라도 한 듯, 김두한과 김동회가 서로 주먹을 교환하고 동시에 나가떨어질 때 카메라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위에서 아래로 두 개의 힘을 내려다본다. ( S#_4) 그러자 다시 마치 앞의 쇼트가 우리들의 시선을 방해하기라도 한 듯이, 그게 마치 일시적으로 디테일을 보기 위해 삽인 된 쇼트이기라도 한 양(insert_shot), 거의 동일한 위치로 다시 한 번 반발하듯이 앞의 자리로 돌아온다. (S#_5) 이때 김두한과 김동회, 이 두 개의 힘이 시선의 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구경하러 온 종로통 상인들이 구경꾼들 사이에 끼어든다. ( S#_6) 겹겹이 둘러싼 시선. 하지만 이때 이들의 자리가 어딘지는 분명치 않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추론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 시선을 선행한 장면이 위에서 아래로 찍었기 때문에 이 장면의 시선이 45도로 세워졌다 하더라도 그건 거의 의미 없는 규칙이다. 물론 우리는 김두한의 후견인들이라 할 종로 상인들이 서 있는 자리 뒤편의 상점들을 미루어 짐작해서 길 건너편 왼쪽 자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영화의 규칙 안에서 얼마든지 배신이 허용된 설명이다. 이 짧은 시선의 쇼트로부터 재빨리 영화는 다시 김두한과 김동회가 대결하는 그 장소에로 돌아온다. 하지만 좀 더 가깝게, 좀 더 안으로 다가간다. ( S#_7) 임권택은 여기서 두 개의 리듬을 번갈아 교차시킨다. 하나는 김두한과 김동회를 멀리 보여준 다음 다른 쇼트와 번갈아 되돌아올 때마다 계속해서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둘을 바라보는 시선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김두한과 김동회의 대결이 만들어내는 원을 포함하면서 고립시키는 것이다. 이때 두 개의 리듬이 모두 영화로만 성립하는 운동의 교차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 두 개의 리듬은 어느 것도 이야기에 매달리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이야기 바깥에서 영화를 진행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요구에 응답한다. 이 운동은 한편으로 기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순서대로 오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꾸만 새로운 힘을 더해간다. 더 들어가자마자 다시 바깥으로 빠져나올 때 이번에는 구니모또 형사가 새로이 이 시선의 덧셈에 끼어든다. ( S#_8) 나는 이 편집의 순서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논리 정연한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이 있다. 이를테면 임권택은 이미 < 길소뜸 >에서 단 하나의 장면도 예외가 없는 논리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게 지나치게 엄정해서 거의 숨 막힐 정도로 진행된 순서. 김두한과 김동회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의 쇼트가 있다. 하나는 종로 상인들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구니모또 형사의 시선이다. 이때 왜 앞의 것이 뒤에 오면 안 되는가, 라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대답은 다음 쇼트이다. 갑자기 김두한과 김동회를 이제까지 보았던 자리에서 뒤집어서 반대의 방향에서 그 둘을 바라보고 있다. ( S#_9) 단순하게 기술적으로 말하겠다. 이건 넘어갈 수 없는 선을 그냥 넘어간 것이다. 당신은 그게 지나치게 도식적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영화에서의 선이라는 도식은 문법에 속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오히려 당신의 걱정은 이걸 지속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면 도식적인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해야 옳다. 그리고 물론 임권택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문제는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두 개의 힘을 향해 다가가던 리듬을 갑자기 중단하고 좌표 안에서 반대의 자리에로 건너올 때 거기에는 그 쇼트를 잡아당길 수 있는(attractive) 돌발적인 변화의 새로운 차원을 더해야만 한다. 이때 하나는 김두한에게 긍정적인 관계의 쇼트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관계의 쇼트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구니모또 형사의 쇼트는 단지 서로 다른 시선의 요구에서 생겨난 것이(일 뿐만) 아니라 바로 다음 쇼트의 반대의 자리, 종로 한복판의 세로 선을 따라서 앞으로만 진행되던 카메라를 반대 방향으로 뒤집기 위해서 필요해진 반대의 자리에 놓인 인물(antagonist)의 쇼트이다. 두 개의 시선. 두 개의 반대의 힘. 그때 형식은 이야기를 경유해서 영화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킨 다음 그 반작용의 힘으로 순식간에 반대의 자리에로 넘어온다. 이때 이 쇼트는 이 시퀀스 전체에서 가장 이상한 구도로 보여 진다. 약간 위로 올라가 있지만(high_angle) 이와 비슷한 구도로 보았던 장면( S#_2)의 맞은편에서 찍은 것 같은 효과(reverse_shot)를 구태여 피하고 있다. 임권택은 이 쇼트를 음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이 둘 안으로 더 가까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퀀스가 끝나면 이제 이 둘 사이에서는 새로운 우정(과 예기치 않은 한 여자의 등장으로 인한 본의 아닌 패배)의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파고 들어가야 하기라도 하듯이 서로 순식간에 주먹을 교환하는 김두한과 김동회를 따라 더 가까이, 그저 주먹을 휘두르면 맞을 것만 같은 거리까지(medium_shot) 다가간다. ( S#_10) 대결과 시선 사이의 기계적인 교환. 다음 장면은 다시 구니모또 형사가 바라보는 쇼트로 돌아온다. ( S#_11) 임권택은 이 교환의 도식을 지키면서 한편으로 기계적인 반복이 가져올 수 있는 구태의연함을 하여튼 피하고 있다. 이 반복은 재빨리 돌아가는 대신 반대로 더 멀리 뒤로 물러난다. 물론 아무리 멀리 물러나도 전차가 교차하는 길 건너편 이 길목을 빠져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대결을 보았다. ( S#_2) 임권택은 두 사람을 좀 더 잘 보고 싶어 하기라도 하듯이 한껏 위로 올라간 다음 그걸 전봇대에 올라가서 구경하는 아이의 뒤에 서서(over_the_shoulder_shot) 바라본다. ( S#_12) 그 시대의 구경의 방식. 구경의 자리. 그 시대의 풍속. 낯선 위치를 시대 안에 자리 하기. 가장 멀리 빠져나간 다음 쇼트는 이 대결에서 가장 가까이까지 다가간다. 두 개의 클로즈업. 김동회( S#_13)의 얼굴과 김두한의 얼굴( S#_14). 마치 가 닿을 것만 같은 거리. 하지만 동시에 이 두 개의 쇼트가 유일하게 이 두 사람을 하나의 쇼트로부터 둘로 찢어낸 분리의 절단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다음 맨 처음, 이 대결이 시작했을 때의 첫 번째 자리, 다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재빨리 둘 사이의 마지막 주먹을 교환하고 김동회가 쓰러진다. (S#_15) 가장 단순하게 보는 방법. 김두한과 김동회의 정정당당한 대결은 김두한의 승리로 끝났다. 시나리오의 순환에 따라 설명하는 방법. 여기서 김두한이 지면 이야기는 더 이상 진행이 안 된다. 게다가 그것은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대결에서 지면 김두한은 규칙에 따라 종로를 떠나야 하고 종로패는 하야시 구미(組)의 아래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미처 대결도 하기 전에 여기서 김두한의 승리를 누가 의심할까. 이때 단 한 사람, 임권택은 의심스럽게 쳐다본다. 하나의 쇼트라는 경기장 안에서 반복적으로 함께 활동하는 두 힘을 두 개의 쇼트로 찢어낼 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김두한을 보여준 다음 김동회를 보여주는 대신 그 반대의 순서를 선택한다. 나는 이 영화가 장르영화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장르의 규칙. 컨벤션이라는 약속. 이때 대결의 장면에서 리듬은 두 개의 방향을 갖는다. 순방향과 역방향. 김두한에서 김동회에로 흐르는 대신 김동회에서 김두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순서. 주인공을 압도하는 맞은 편 대결하는 상대방. 우리는 일편에서 김동회가 마지막 순간 김두한과의 대결에서 갑자기 그 둘 사이의 긴장을 찢고 들어오듯이 외치는 목소리, “두한아, 넌 조선의 자존심이야, 지면 안 돼, 저 놈은 쪽바리다, 비록 조선의 피가 흐른다지만 왜놈들 개 노릇을 하고 있잖아, 죽여라, 죽여”라는 외침에 갑자기 대결을 포기해버린 것처럼, 좀 전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맥없이 김두한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쓰러진 것을 보았다. 여기서는 갑자기 쇼트의 순서에서 불협화음을 만들어낸 다음 이 두 사람의 대결을 오로지 바라볼 수 있을 뿐인 자리, 그 둘 사이의 대결에서 어떤 감정적인 교환도 바라볼 수 없는 애매한 자리에로 옮겨간 다음 이 대결을 마무리 한다. 가장 시시하게 대답하는 방법. 그건 두 사람의 (무술) 대역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위치에요. 단지 그것뿐일까. 나는 그렇게 연출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없이 두 사람 사이의 액션을 진행한 연출의 예로 세 편의 < 장군의 아들 >로부터 열 개 이상의 시퀀스를 제시할 수 있다. 임권택은 우리를 모호한 자리로 데려간 다음 단지 결과만을 보여주면서 일편의 여운을 고스란히 남겨 놓는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김동회는 이 대결이 끝난 다음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물론 끝내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도 대결 직후에 김두한이 위로하기 위해 데려간 명성 바에서 우연히 마주친 송채환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져들었고, 그럼으로써 다른 세계에로 도약할 준비를 하는 순간이라고 설명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김동회의 패배는 송채환을 만나기 전의 일이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지만 그런 다음 김동회는 자기의 손가락을 자르고 하야시 구미(組)를 떠나 만주로 간다. 무언가 여기에는 잘 설명되지 않는 상위의 관점 같은 것이 있다.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고 거기서 다른 세계가 자기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생겨나는 것만 같은 순간. 이미 주어진 세상을 다시 재구성하는 것만 같은 단절.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 주어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이야기의 법칙이 생겨난다. 나는 미처 감흥이 사라지기 전에 < 일대종사 >에로 돌아오고 싶다. 내가 전차를 이야기하는 순간 이미 당신은 눈치 챘을 것이다. 여기서 다루려는 장면은 엽문이 (홍콩에 잠시 머물렀던) 궁이를 찾아와 궁보산의 영정에 인사를 한 다음 “궁가 64수를 보여주시오”라고 청한 다음 시퀀스이다. 엽문이 궁이에게 1937년 동북에 있는 높은 산을 찾아가려 했지만 전쟁이 나는 통에 찾아가지 못하고 외투는 저당 잡힌 채 단추만 남았다면서 책상에 단추를 올려놓고 그녀에게 밀어 넣자 궁이가 그걸 만지작거리면서 “엽선생, 십년 전 섣달그믐 밤, 내가 어디 있었는지 아세요?”라고 마치 자문하듯이, 탄식하는 것처럼 말한, 그 다음 시퀀스이다. 그러면 이야기는 십년 전으로 갑자기 옮겨간다. 기차역이 보이고 “1940년 섣달그믐 밤 동북” 이라는 자막이 뜬다. 궁이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제자 마삼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금 진천 북역에서 기다리는 중이다. 아마도 오늘은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타야할 것이며 그렇다면 여기에 오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시계는 11시 28분을 가리키고 있다. 전구 불빛이 깜빡거리고, 사람들은 고향 가는 길에 발길을 재촉한다. 난로는 장작을 때우면서 활활 타고 있지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왕가위는 한껏 기차의 도착을 늦추면서 시간을 음미한다. 기다리는 시간. 서로 다른 성질의 쇼트가 번갈아 오가기 시작한다. 세상사에 관심도 없는 눈발. 궁이의 복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고향길. 제 시간이 되자 기차는 천천히 도착한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지만 주인 곁에서 한껏 긴장한 원숭이. 일본군 점령하의 전구는 마치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빡 거린다. 역사의 기호들. 모든 것이 한 자리에 모여들 때 그 모든 쇼트들은 궁이와 마삼의 대결이 아니라 기차의 도착과 출발에 따라 서로 연결되고 분리된다. 슬로우 모션과 스텝 프린팅의 교차. 서로 다른 속도. 종종 이미지들은 뭉개지고 그때 인물들은 그저 형상만 어른거리듯 지나친다. 카오스처럼 보이면서도 기계 톱날처럼 서로 연결된 편집의 리듬. 그 안에서 세 개의 힘이 서로 각자의 법칙에 따라 활동하기 시작한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눈이다. 이 눈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바닥에 쌓여만 간다. 종종 많은 액션 활극들은 그렇게 눈이 내릴 때 바닥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걸 이용하기도 한다. 때로 미끄러지는 헛발질. 왕가위는 그런 따분한 클리쉐를 여기서 활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무술의 고수들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눈은 쇼트들 곳곳에 스며들어서 섣달그믐 추운 겨울날 한기를 ‘보여’준다. 두 번째 힘은 마삼이 타고 가야 할 기차의 도착과 출발이다. 이때 왕가위는 궁이가 기다리는 대합실을 왼쪽에 설정하고 마삼이 오는 역의 입구를 오른쪽에 배치한 다음 기차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들어오게 만든다. 마삼은 이 기차를 타야 고향에 가서 만두를 먹을 것이다. 기차가 도착하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것은 원숭이이다. 역 벤치에 앉아 눈을 맞으며 기다리는 궁이의 집사가 쓴 모자의 털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돌아보는 집사. 대합실 창문에 비치는 기차의 불빛. 초조하게 궁이의 주변을 이동하는 카메라. 하지만 궁이는 미동도 앉고 앉아있다. 신호등을 들고 눈발을 맞으며 역무원이 막 들어오는 열차를 맞이하러 간다. 들어오는 열차. 이때 왕가위는 기차가 들어오는 것을 단지 소리만으로도 간단히 알려줄 수 있는데 (물론 더 간단한 방법은 그냥 역에 들어오는 기차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걸 누가 모를까?) 그 위에 음악을 덮은 다음 기차의 도착을 간접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 세 번째 힘. 기차의 도착에 맞춰 마삼이 도착한다. 궁이와 마삼의 대결. 마삼이 도착하자 멈춰있던 궁이가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때 조각난 세계가 갑자기 일사불란하게 하나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사방으로 흩어진 시선이 하나로 모여들고 그 중심에 궁이와 마삼이 있다. “빚 독촉보다 더하군. 섣달 그믐날 집에도 못가게 하고” 궁이는 마삼에게 그 기차를 탈 수 있는 기회를 가져갈 것이다. 그것만이 궁가의 무술을 되찾는 방법이다. “만두는 솥에 있지만 넌 못 먹을 걸, 제를 지낼 놈은 제를 지내고 밥을 먹을 놈은 밥을 먹듯이 해야 할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해야지, 궁가의 것을 돌려받겠다” 이 두 개의 시퀀스는 전차 혹은 기차를 사이에 놓고 진행하는 대결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규칙도 동일하다. 한쪽이 쓰러지면 끝난다. 이 두 개의 대결은 공개적이며 구경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다. 심지어 이 두 개의 대결은 (물론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아마도 같은 해, 1940년 단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벌어졌을 뿐이다. 차이라면 < 장군의 아들 > 이편은 종로 한복판 한여름이었고, < 일대종사 >는 중국 동북부의 기차역 정도이다. 하지만 그 둘은 단지 서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관계에 의지하고 진행된다. 그러므로 두 개의 시퀀스는 같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장군의 아들> 이편을 중심에 놓고 <일대종사>를 곁에 놓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중이다. 비스듬하게 바라보기. 무대의 연출이라는 면의 좌표에서 궁이와 마삼의 대결은 김두한과 김동회의 대결보다 훨씬 조건이 나쁘다. 지금 막 도착한 기차가 궁이와 마삼이 서있는 공간에서 한쪽 180도를 모두 사용할 수 없게 차단해 놓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절반의 공간. 마삼은 그 기차를 타야하고 궁이는 마삼을 무릎 꿇게 만들어 궁가 무술의 필살기 노원괘인을 받아갈 것이다. 아마도 기차는 잠시 동안만 역에 정차할 것이다.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섣달 그믐날 밤은 금방 밝아오지 않을 것이다. 왕가위는 마삼을 기차가 가는 방향에서 오게 만들었고 궁이를 마치 기차를 멈춰 세우듯이 반대편에서 마주 걸어오게 동선을 그어서 두 개의 선, 그러니까 기차의 철도와 두 사람의 대결의 선을 평행으로 놓았다. 순방향과 역방향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선. 그 선에 무관심한 철도의 선. 두 개의 평행선. 두 개의 트랙. 물론 왕가위가 구태여 이 장소에서 대결을 선택한 이유는 궁이와 마삼의 대결과, 기차의 도착과 출발이 만들어내는 정지와 활동이라는 기계적인 동작, 두 개의 운동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작동시키려는 것이다. 마치 스쳐 지나가듯, 늦은 시간을 보여주기 위해, 그 자리에 매달려 있던 시계는 이 순간 그 어느 것도 멈출 수 없다는 힘의 기호가 된다. 여기서 모든 것은 오로지 앞으로 갈수만 있을 뿐이다. 기차의 출발시간. 궁이와 마삼의 대결. 내리고 또 내리는 눈. 이때 이상할 정도로 이 대결의 장면이 (이런 비유적인 표현을 허락한다면) 두텁게 칠해졌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어딘가 둔하게 여겨지는 공간의 구석들. 나는 필요 이상으로 섬세하게 이루어진 금루를 환기시키고 싶다. 왕가위는 의도적으로 일부를 지워나가고 있다.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지워진 장소. 어떤 흐릿함. 지워져가는 흔적. 바라보는 시선들을 가로 막는 성에 낀 창문. 거기 내려앉은 어둠. 섣달 그믐밤은 그림자가 깊기도 하다. 우리는 이 시퀀스 전체가 궁이가 돌아보는 시간(flash_back)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두 개의 시간. 십년이라는 시간의 간격.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선들의 다발. 각자의 선들의 방향과 힘. 그 사이에서 시간의 간격은 무엇을 남겨놓고 무엇을 지운 것일까. 기억 속의 대결. 그런데 궁이는 갑자기 왜 엽문에게 십년도 더 지난 이 이야기를 꺼내든 것일까. 엽문은 마삼에게 아무런 감정적인 원한이 없으며 또한 그가 궁이를 대신해서 그녀의 아버지인 궁보산의 복수를 행해야할 의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엽문과 마삼, 그 둘은 그저 스쳐 지나가듯이 금루에서 한번 보았을 따름이다. 엽문은 지금 오로지 궁이가 궁금해서 만난 것이다. 궁이는 단추를 돌려주기 위해서 만난 것이다. 그런데도 궁이는 마치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만났다는 듯이 힘겹게 마지막 순간에 이야기를 꺼내든다.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궁이가 이 대결에서 마삼에게 졌다면 궁이와 엽문에게는 기회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엽문의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났고 궁이는 이제 궁가 무술의 유일한 전수자가 아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패배는 궁가 무술의 권위를 마삼에게 넘겨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궁이에게 사랑의 패배에 다름 아니다. 삶의 쓰디 쓴 아이러니. 하지만 여기엔 다른 해석이 하나 더 있다. 다시 한 번 환기하지만 궁가 64수 무술의 최고의 경지인 노원괘인의 마지막 필살기는 돌아보는 것이다. 돌아보는 제스처. 돌아보는 시간. 후회.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막을 수 없는 칼날 같은 아픔. 지금 이 장면을 바로 그 돌아보는 마지막 한 수, 노원괘인의 필살기로 엽문에게 대결을 청하는 것이라고 읽을 수는 없는 것일까. 궁이는 금루에서 엽문과 아버지 궁보산의 대결을 보았다. 그때 궁보산은 엽문에게 제안한다. “엽선생, 오늘은 내 마지막 대결이니 우리 생각을 겨루세” 생각을 겨룬다는 것. 두 개의 생각. 사유의 대결. 감정의 대결. 여기서는 사유와 감정 사이에서 우위를 논하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두 사람은 이미 금루에서 그들의 대결을 ‘즐겼다’. 마치 포옹이라도 할 것만 같았던 순간들. 마치 입술이 거의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간 클로즈업의 슬로우 모션. 서로 가장 가까이 다가가본 시간. 개념들은 이번에는 정감의 기호들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하지만 아마도 이 돌아보는 시간의 대결은 궁이와 엽문의 마지막 대결이 될 것이다. 누가 돌아보는 시간을 견딜 것인가. 그런데 그 대결에서 승자가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이 장면의 한 장면, 한 쇼트, 한 순간, 하나의 제스처, 하나의 액션, 하나의 동작, 한마디의 말, 하나, 하나가 마삼을 경유하여 고스란히 엽문에게로 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퀀스 안의 모든 시청각 기호들을 읽어나갈 때 그것이 모두 이미지로 옮겨진 궁이의 말이며 엽문을 향한 치명적인 노원괘인의 필살기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돌아본다는 것. 이때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기차이다. 여기에는 두 대의 기차가 없다. 단지 한 대의 기차가 거기 잠시 멈추어 선 다음 제 시간이 되면 망설이지 않고 떠나갈 것이다.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진 것일까. 나는 다소 자유자재로 시간을 뒤섞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이건 왕가위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만일 계보를 세워야한다면 왕가위는 명백히 오손 웰즈에서 알랭 레네를 지나 사방으로 시간의 거미줄을 쳐나간 네트워크를 따라가고 있다. 약간의 디테일. 기차는 마삼이 오기 전에 도착했고, 마삼은 이 기차를 타기 위해 막 역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기차를 언제 떠나보낼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십년 전 이날, 궁이의 기억 속에는 오로지 기차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모든 운동은 이 기차의 도착과 출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니, 차라리 기차 시간표라는 운동 안에 이끌려 들어와서 화면 안의 모든 기호들이 그 안에서 활동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오로지 여기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만이 자유로울 따름이다. 아니, 그것조차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궁이와 마삼의 대결이 시작되자 마치 그들의 대결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듯이 그 순간 그만 멈추고 만다. 우리는 이미 금루에서 궁이의 64수를 보았다. 혹은 그녀는 엽문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 대결이 끝난 다음 나눈 궁이와 엽문의 대화를 환기시키고 싶다. 지금은 생각을 대결하는 중이다. 필살기 노원괘인의 필살기는 돌아보는 것이다. 궁이는 엽문에게 말한다. “엽선생, 64수를 보여드린 건 이걸 말하기 위함이에요. 사람밖에 사람 있고 산 너머 산 있듯 주먹이 앞만 보고 뒤를 못 보면 안 되죠, 여기서 많은 걸 깨우치시길” 그러자 엽문이 대답한다. “바둑에 같은 바둑판은 없는 법이죠, 잎사귀 밑에 꽃을 숨길 수 있는지 나중에 봅시다” 궁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한다. “그래요, 기다리죠” 이미 궁이는 노원괘인의 필살기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왜 엽문은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보자고 한 것일까. 말하자면 이건 약속인 것일까. 나는 자막에 ‘한 마디 약속은 산보다 무겁다’라고 써 있었을 때 그 약속이 무엇이었는지를 한참 생각했다. 궁이는 엽문의 그 말에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무엇을 기다린 것일까. 궁이가 엽문에게 들려주는 십년 전의 섣달 그믐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엽문은 홍콩에서 약국하면서 머물고 있는 궁이를 찾아왔을 때 첫 인사가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소, 라는 말 대신 궁가 64수를 보여주시오, 라고 청했다. 물론 문학적으로 이 말을 살짝 비틀어서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아마 모두들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어 할 것이다. 나는 반대로 묻고 싶어진다. 정말 그 말이 엽문이 하고 싶었던 말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궁이는 그 말에 대답한다. 만일 문지방을 넘자마자 그 말을 했다면 한바탕 대결을 하고 만두를 대접했을 텐데요. 나는 지금 만두를 생각하는 중이다.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 고향에 돌아가서 만두를 먹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마삼은 기차를 타러 온다. 궁이는 마삼에게 말한다. “만두는 솥에 있지만 넌 못 먹을 걸, 제를 지낼 놈은 제를 지내고 밥을 먹을 놈은 밥을 먹듯이 해야 할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해야지” 오늘 궁이와 엽문은 아무도 만두를 먹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홍콩은 고향이 아니다. 그들은 돌아갈 기회를 놓쳤다, 그 말을 한 다음 탄식하듯이 궁이는 십년 전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방점은 탄식(歎息), 에 있다. 이 말을 조심스럽게 음미해주었으면 좋겠다. 궁이는 마삼과의 대결에서 이겼다. 마삼은 피를 토한 다음 눈 바닥에 누운 채 말한다. “궁가의 것을 돌려줬다” 궁이는 할 수 있는 한 거만하게 내려다보면서 대답한다. “말은 바로 해야지. 네가 돌려준 것이 아니고 내가 되찾은 거다” 멈춘 줄 알았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이미 기차는 떠나간 다음이다. 궁이는 이 대결에서 힘겹긴 하지만 마삼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걸 다시 떠올리면서 여기에는 승리에 대한 어떤 도취감도 없다. 왜 그녀는 탄식하는 것일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다. 시간은 약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952년 일천선의 백장미 이발소로 옮겨간다. 그런 다음 엽문과 궁이는 마지막으로 경극을 보고 헤어진다. 영화는 그 이년 동안 엽문과 궁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이 오갔는지, 어떤 시간을 가졌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약간의 실험을 했다. 이상하게도 내 동료들은 섣달 그믐날 이야기를 나눈 다음 경극을 보고 궁이와 엽문이 헤어지는 장면을 연이어 붙여놓고 기억했다. 그 두 개의 씬 사이에 이년이라는 간극이 있으며, 게다가 분명히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일선천의 이발소 장면이 그 사이에 있었는지조차 어리둥절하게 생각 했다. < 일대종사 >는 엄격하게 엽문의 전기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며 궁이와의 인연은 지어낸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나는 반대로 물어보고 싶어진다. 왜 마삼과의 대결 이야기가 끝난 다음 궁이와 엽문과의 이별 장면을 진행하면 안 되는 것일까. 이년 동안 별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며 게다가 마삼과의 대결을 보여준 다음 이어서 일선천의 이발소를 보여주고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다시 경극으로 돌아와서 궁이와 엽문의 이별 장면을 진행한다. 무언가 여기에는 궁이와 엽문 사이의 인연에 대한 (영화 바깥에 있는) 우리들의 기억 위에 기억을 겹쳐놓고 싶어한다는 인상이 있다. 인상의 연상과 기억의 순서 사이에서 벌이는 내기. 기술적으로만 설명하면 이 탄식은 궁이와 엽문의 이별에 대한 감정을 이어 붙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그 사이에 이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필요해진 것일까. 그런 다음 다시 그 간격을 지워버리고 있다. 궁이와 엽문의 섣달 그믐밤의 만남, 이 만남에서 궁이가 하는 십년전 섣달 그믐밤의 대결, 그리고 난 다음 이년 후의 일선천의 백장미 이발소, 그리고 다시 경극을 본 다음 이별하는 궁이와 엽문이 걸어가는 한밤 중의 길, 이 길에서 우리는 두 사람 이외에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마치 유령들이 거니는 것만 같은 그림자들. 텅빈 건물. 어떤 집에도 들어오지 않은 등불. 여기서 누가 구경꾼인가? 이 모든 장면의 광경들을 보는 사람은 우리들 뿐이다. 거의 서로 통하지 않는 조각들. 그것들을 영화라는 고유한 능력의 관점으로 묶어낸 다음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자리. 하지만 여기서 기억에 대한 진정한 내기가 시작된다. 왕가위는 그 자리를 잘 정리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때로 희미한 공통점을 놓아두고 종종 중단시킨 다음 그 안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시간 감각을 증발시키려 든다. 희박해져가는 기억. 궁이는 이야기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등불처럼 보인다. 그때 그건 엽문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각이다. 영화 속의 여러 개의 생명의 리듬. 그때 하나가 여기서 지워져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보는 내내 마치 영화의 어떤 기능이 마비되어 작동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일대종사>는 잠시 동안 상승한 다음 내내 하강한다. 나는 두 장면 모두에서 불투명성을 설명했다. 그런 다음 구태여 여기서는 장면이라는 말 대신 광경이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한다. 이때 (< 장군의 아들 > 이편의) 전차와 (< 일대종사 >의) 기차는 장면의 디테일(detail_particolare)이 아니라 광경의 디테일(detail_dettaglio)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둘이 여기서 정확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경계는 모호하고 어딘가에서 그 둘은 서로를 오간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따분하게 그 둘을 도식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혹은 앙드레 고드롤과 톰 거닝이 제시한 매혹의 인력(spectator_in_attraction)이라는 개념 안으로 끌어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흔적 자체의 존재론이 어떻게 재현의 배치를 무너트려가면서까지 어떤 기쁨을 호소하느냐는 것이다. 과잉의 투여라는 문제. 거기에 얼룩처럼 남아서 자기의 존재를 사건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오로지 기능적으로만 말한다면 양쪽 모두 전차 혹은 기차가 있거나 없거나 차이가 없다. 만일 있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는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그 존재의 차이는 오로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시선의 경로에 대한 동요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전차와 기차를 단순하게 대결을 무대화시키는 장치라거나 혹은 알레고리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이 두 개의 힘이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은 태도를 말하고 싶다.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전차와 기차는 우연히 거기서 마주친 대상이 아니다. 임권택 은 이 장면에서 구태여 김두한과 김동회를 종로 한복판 두 대의 전차가 교차하는 그 장소에로 대결 장소를 옮긴다. 왕가위는 십년 전 섣달 그믐밤 궁이와 마삼의 대결을 기차역으로 이끈다. 하지만 거기서 두 대의 전차, 혹은 막 도착한 기차는 그저 무심하게 궤도를 따라 떠나간다. 그때 그 힘은 단지 영화적 사건으로서만 존재한다. 이 존재 자체가 어쩌면 장면을 망쳐버릴 지도 모른다. 혹은 장면에 대해서 어떤 얼룩처럼 여겨지기조차 한다. 그런데도 거기 있어야만 한다. 아니, 차라리 그것이 있는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마치 그것이 있는 자리에서만 이 사건이 성립되기라도 하듯이 여기에 온다. 영화에서 우리를 까다롭게 만드는 부분은 서사 안으로 통합되지 않으면서 거기에 불가사의하게 사건으로 존재하는 비인칭의 이것임, 과 마주칠 때이다. 영화에서 그 무언가를 건드릴 때 거기서 통일성을 요구하면 안된다. 기이하게도 여기에서 내가 마주친 순간은 그 존재의 사건들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라는 영화적 시간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교차하는 두 대의 전차, 혹은 막 도착한 기차가 불러일으킨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말하고 싶다. 물론 이 기쁨을 가장 먼저 알고 있었던 사람은 루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 형제일 것이다. 시오타역으로 들어오는 기차. 상영시간 56초. 나는 잠시 멈추고 이 장면을 다시 보고 있다. 당신께서 부디 이 칸막이처럼 여겨지는 두 영화 사이를 횡단하면서 내가 찾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채주었으면 고맙겠다. 가로 지르기.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성립되면서 동시에 그 영화로부터 시작되는 다른 영화들과의 사이를 떠도는 것이다. 말 그대로 표류. 임권택을 말하면서 거기에 가 닿지 않으려는 노력. 그래서 왕가위에게 다가가기. 하지만 왕가위에게 머물지 않기 위해서 임권택에게로 돌아오기. 그 사이에서 나는 영화 안에 머무는 불가사의한 사건을 발견하고 기쁨에 넘쳐 어쩔 줄 모르는 중이다. 마치 열차처럼 양쪽을 오가면서, 놓쳐버린 열차를 그리워하면서, 다시 찾아올 열차를 기다리면서, 그 둘이 교차하는 그 시간이 바로 내가 영화와 대결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말하자면 내가 임권택에 관한 글을 시작하면서 맞이하는 첫 일 년, 작년의 그날로부터 오늘. 나는 지금 다시 시작하는 중이다. (세 번째 이야기 끝, 네 번째 이야기 계속) 장군의 아들 2 1991년 103분 컬러 1.85 감독 임권택 제작 태흥영화㈜ 각색 이윤택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박순덕 음악 신병하 박상민 김두한 송채환 송채환 신현준 하야시 이일재 김동희
(두 번째 이야기) 두 번째 상황. < 일대종사 >는 < 장군의 아들 >과 정확하게 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쪽이 상승하는 동안 다른 한쪽은 내내 하강한다. <일대종사>는 모두가 추락하는 이야기이다. 그들 모두가 처음 시작했을 때 절정에 올라있었다.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엽문은 간단하게 말한다.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 사부가 얼마나 대단한지, 문파가 잘 났는지, 그런 건 떠들 거 없지, 쿵후, 그건 둘 중 하나지, 수평과 수직, 지면 눕고, 세로로 남는 자, 말할 자격이 있는 법이지, 내 말이 맞지 않나?” 모두가 수직으로 서 있었다. 그런 다음 한 명씩 가로눕는다. 물론 왕가위는 단순하게 엽문의 대결로 이어가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다른 데 있다. <일대종사>는 어떤 의미에서 < 멀홀랜드 드라이브 >, 혹은 < 열대병 >처럼 둘로 잘린 영화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중간에 중단되고 (1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뛴 다음) 그 자리에 머물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플래시백의 형식으로) 돌아본다. 물론 이 시간은 지나가 버렸고 이미 펼쳐져 버린 시간은 다시 그걸 되감싸 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수직으로 진행된 시간. 수평으로 멈춰 선 시간. 이 시간을 감히 누가 이길 수 있을까. 두 개의 힘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걸 익혔을 때 이미 때는 늦었다. 자기가 속해있던 고유한 세계의 법칙이 바뀌었고, 그 안에서 그래도 살아가는 자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간다. 다시 한 번 하는 말. 궁가 64수 노원괘인의 필살기,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영화에서 돌아본다는 말. 플래시백. <일대종사>의 필살기. 회상. 그걸 배운 자는 궁이 뿐이다. 그래서 엽문과 궁이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대결은 궁이의 플래시백으로 펼쳐진다. 엽문과 궁이의 아버지 궁보산이 생각으로 대결했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이걸 엽문은 이번에는 그저 지리멸렬하게 받아칠 수 있을 뿐이다. 엽문은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다. 하지만 이 필살기의 뼈아픈 결점을 깨닫는다. 그는 회한에 차서 말한다. “궁이는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만 졌다” 이 필살기의 결정적 약점은 누구에게도 이길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의 패배라는 점이다. 나는 두 개의 장면, 궁이와 엽문의 금루에서의 대결과, 궁이와 엽문의 플래시백의 대결 안에서의 궁이와 마삼의 대결을 뒤에 다시 다룰 것이다. 사망유희 死亡遊戱 나는 재빨리 금루(金樓)로 되돌아오고 싶다. 왕가위는 여기서 (아마도) 이소룡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 사망유희 >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우리는 금루가 얼마나 높은 건물인지, 이 건물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단 한 쇼트도 금루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금루라는 건물 자체가 정말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말하자면 이 장면 전체가 일종의 실내극이다. 이소룡은 <사망유희>에서 오직 단 하나의 시퀀스를 찍기 위해서 이 영화에 매달렸다. 그건 물론 사망의 탑에 오르는 이소룡과 그와 겨루기 위해서 매 층마다 기다리고 있는 무술의 달인들과의 대결이다. 이소룡의 때 이른 죽음은 <사망유희>를 미처 완성시키지 못했다. 왕가위는 이소룡의 스승 엽문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아마도 조건반사처럼 이 에피소드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내게 금루의 시퀀스 전체가 거꾸로 세운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인다. 스승이 제자에게 보내는 위로. 이소룡의 영화를 본 세대가 보내는 답례. 엽문은 남방 무술계를 대표하여 인사를 드리기 위해 금루에 있는 북방 무술계의 대가인 궁보산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래층부터 차례로 올라와야 한다. 그리고 층마다 엽문을 맞이할 고수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 시퀀스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라는 아쉬움을 안고 있다. 여기서는 왕가위와 보여준 대로 나도 순서대로 쫓아 올라갈 생각이다. 시녀들 여기서 장면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준 사람은 벨라스케스를 읽은 푸코이다. 그는 <말과 사물>의 첫 장의 시작 첫 문장에서 화가는 자기의 캔버스로부터 조금 물러 서 있다, 라고 쓴 다음 바로 가까이 다가선다. 물론 푸코가 목표로 한 것은 단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읽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상호가시성이라는 방법을 배웠다. 내게 약간의 인용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푸코는...) 상호가시성이라는 이 가느다란 선은 불확실한 것과 교환과 전위 같은 것들로 구성된 복잡한 조직을 전체적으로 포괄한다. 화가는 우리가 우연히 그의 주제와 동일한 장소를 차지할 때에만 그저 그의 눈을 우리에게 돌릴 수 있다. 감상자인 우리는 하나의 부가적인 요소이다. (잠시 동안 이 그림을 보아주기 바란다.) 설령 우리가 화가의 시선과 마주쳤다 해도 그 시선은 우리를 그냥 지나쳐 가버릴 수도 있으며 우리에 앞서 거기에 항상 존재했던 것, 즉 모델 그 자체가 우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 그림 밖에서 그에게 직면해 있는 허공으로 향한 화가의 시선은 감상자들이 존재하는 만큼 많은 수의 모델을 용인하고 있다. 바로 이 중립적인 장소에서 응시자와 피 응시자는 끊임없는 교환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 여기서 푸코는 지나쳐가듯이 맞은편의 광경이라는 말을 꺼내 든다. 장 삐에르 우다르는 여기서 봉합(Suture)이라는 개념을 (라캉의 수사를 빌려) 발전시켰다. 나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싶다. 이때 핵심은 시선이 아니라 광경의 내밀성이다. 우리는 개념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종종 의도를 지나쳐서 우리 자신이 느끼는 기쁨의 내밀성 안으로 다가간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거리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그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선 다음 무엇이 나를 멈춰 세웠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나는 맞은편의 광경을 보여주는 것 안에 있는 본 것의 발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발견이라고 쓰는 대신 의도적으로 발명이라고 썼다. 물론 이것은 매우 불안정한 설명이다. 나는 여기서 거기 있는 것 이상으로 그 무언가를 덧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의 방점, 장면의 디테일에 이끌릴 것이다. 궁보산 궁이 면의 배경. 이 장면에는 두 개의 시선이 엽문을 바라보고 있다. 한 명은 궁보산이고, 다른 한 명은 궁이이다. 혹은 이 자리는 궁이에게 엽문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련된 자리처럼 보인다. 비 오는 날 궁보산은 엽문이 그에게 도전을 해온 자와 그의 무리들을 수평으로 눕히는 것을 보았다. 이미 궁보산은 엽문이 자기를 눕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자신이 물러날 때가 온 것이다. 금루에 궁이를 데려온 궁보산이 말한다. “세상사 가운덴 안 보면 사라지는 것들이 있지. 봐둬도 나쁘진 않아. 어떤 이는 등불이 어떤 이는 그림자가 되지. 다 시류에 따르는 법. 널 남방에 불러 처음과 끝을 보여주고 싶었다. 잘 봐둬라, 아비가 어떻게 물러나는지” 이제부터 시작될 금루에서의 엽문의 대결 장면 전체가 궁이의 조심스러운 클로즈업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 궁보산의 말을 듣고 궁이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다음 조심스럽게, 약간 망설이는 듯한 동작으로, 하지만 마치 이끌리듯이 살짝 고개를 돌리면서 실내 창문 바깥을 내다본다. S#_1 S#_2 S#_3 S#_4 S#_5 하지만 궁이가 시선을 돌린 것은 아버지의 말에 이끌려 돌린 것이지 엽문이 거기 있어서 그곳으로 시선이 향한 것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궁이가 시선을 돌리자 엽문이 도착한다. 마치 궁이의 시선이 엽문을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엽문이 거기에 온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 것일까. 영화 안에서 누가 누구 앞에 있는 것일까. 이 영화가 엽문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자꾸만 궁이가 다가오면 영화의 중심은 엽문에서 궁이에게로 옮겨가는 것만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 S#_1) 금루로 들어서는 엽문. 클로즈업. 이때 엽문을 본다기보다는 반사하는 엽문을 본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거울에 비쳐 보이거나, 혹은 유리에 굴곡을 일으키며 반사하는 엽문. 이때 이것이 궁이의 시선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말하자면 시선의 일방적인 통로. 엽문은 이 시선을 아직 알지 못한다. 금루에 들어설 때 엽문은 그를 반기지 않는 북방 무술계 인사들에 둘러싸인다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시선에 포위된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엽문은 반사를 지나쳐서 금루 안에 들어선다. 그런 다음 멈춰 서는 엽문의 클로즈업은 이상할 정도로 그 앞에서 본 궁보산과 대화하다가 문득 어딘가를 초점 잃은 듯이 보던 궁이의 마지막 쇼트에 대해서 마주 보는 것 같은(reverse_shot) 거리와 크기로 맞은 편의 광경을 채워 넣는다. < 일대종사 >는 여기서 빈 것을 저기서 채워 넣는 다소 이상한 방식의 보충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교환은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마치 쇼트 사이의 행동 프로그램이 작동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은밀하게 하지만 분명히 상호 가시성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걸 좀 더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것은 마치 호랑이 굴에 들어온 가여운 토끼를 반기기라도 하듯이 엽문을 반기면서 두 손을 모으며 “엽(葉)사부, 강호에는 인물이 많지, 오늘 두각을 나타내는 날이라 금루 사람들과 축하해주러 왔네”라고 인사하는 첫 번째 환대의 인사를 하는 쇼트에서 인물은 프레임 바깥에서, 같은 말이지만, 엽문의 시선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다. ( S#_2) 혹은 두 개의 쇼트는 비스듬히 마주한다. 환대가 없는 환대의 자리. 그때 누가 엽문을 환대하고 있는가. 엽문의 표정의 클로즈업. ( S#_3) “고맙습니다. 아저씨” 마치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은 맞은편의 인사. ( S#_4) “별말을, 어려워말고 들어가세” 그제 서야 엽문은 주변을 돌아본다. ( S#_5) 그때 이 시선은 올려다보지 않고 여전히 수평으로 돌아본다. 이 시퀀스는 차례로 엽문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상승의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퀀스에서 왕가위는 단 한 번도 엽문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쇼트를 찍지 않았다. 종합적인 장면과 가시적인 쇼트 사이의 비대칭적 교환. 그는 다음 층으로 이동할 뿐이지 올라가지 않는다. 엽문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S#_6 S#_7 S#_8 S#_9 S#_10 S#_11 하지만 엽문의 시선은 덧없는 것이 된다. 그는 수평으로 돌아보았지만 다음 쇼트는 누군가 위에서 사선으로 계단을 걸어서 내려온다. 우리가 금루에 들어서서 처음 듣는 미메시스의 음악. ( S#_6) 수평의 시선. 사선의 동선. 위에서 아래로, 명백히 지금 막 금루에 들어선 맨 아래층의 엽문을 만나기 위해 내려오는 발걸음.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하고 치파오 의상을 입은 것으로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계단 안쪽에서 찍었고 그녀는 카메라 앞을 순간적으로 지나간다. 이때 여자가 빠져나가자 아래층에 머물던 엽문은 등을 돌리고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돌아보면서 올려다본다. 거의 반사적인 신경. 자기에게 다가오는 공격적인 힘을 느끼는 제스처. 위에서 아래로, 그런 다음 아래서 위로, 동선과 시선의 교차. 이 선을 유심히 보아주기 바란다. 두 개의 선 사이를 마치 파고들듯이 다음 쇼트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온다. ( S#_7) 부채질을 하며 들어온 두 번째 환대의 인물. 치렁치렁 늘어진 구슬커튼 발. 나선형을 그리며 내려가고, 사선으로 아래서 위로 올려다본 다음, 수평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갈 때 금루라는 건물의 미로와도 같은 선이 거미줄처럼 이들을 칭칭 동여매기 시작한다. 얼굴을 드러낸 남자는 거만하게 부채질을 하면서 말한다. ( S#_8) “우리도 기루 아가씨들을 대표해서 축하해주러 왔어요” 이 말에 엽문은 사내를 바라보는 대신 돌아보면서 올려다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엽문의 돌아보고 올려다보는(double_action) 제스처를 연속된 두 개의 쇼트로 나누었다. ( S#_9, S#_10) 물론 이건 쇼트의 낭비이다. 그렇다면 오로지 리듬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여기서 시선의 분산을 느낀다. 왜 분산이 필요해진 것일까. 사방의 시선. 모두가 엽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모두를 찍는 대신 엽문의 시선을 보여주는 쪽이 반대로 경제적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쇼트의 부등가교환은 종종 간접적 장면의 구성이라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왕가위는 이 문제를 때로 우회적으로 해결한다. 이를테면 < 2046 >의 거의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시네마스코프 안의 장면들의 모델들 사이의 교환. 그렇다면 엽문은 무엇을 보기 위해서 올려다본 것일까. ( S#_11) 내려다보는 기루 아가씨들, 정확하게는 올려다보는 엽문. 아름다운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우아한 곡선. 하지만 이 시선은 엽문의 위치가 아니다. 여기서 카메라는 누구의 시선인지 다소 애매하다. 왜냐하면 카메라가 살짝 상승하기 때문이다. 엽문은 그 자리에 서 있고 카메라는 이동한다. 물론 그걸 시선을 올려다보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는 있다. 엽문은 사내의 말에 대답하듯이 말한다. “기세가 대단한 걸” 하지만 이 대답은 화면 바깥에서 들린다. (voice_out_of_frame) S#_12 S#_13 S#_14 S#_15 이때 쇼트는 다시 앞으로 돌아간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정체불명의 여자는 아직도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거의 무한정으로 이어진 계단. ( S#_12) 이 신발을 따라오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 겉으로 보기에는 비단결처럼 보이는 이 신발은 마치 쇠로 만든 것처럼 무겁고 둔탁한 울림을 낸다. 그 계단을 따라 이어져 내려올 것 같은 그 신발이 두 걸음을 걸은 다음 갑자기 ( S#_13) 계단 위에서 뛰어내린다. 첫 번째 대결의 상대. 팔괘장의 달인 삼저. 이때 그녀의 낙하는 나선형으로 내려온다. 이 나선형의 동선을 기억할 것. 팔괘의 동작. 삼저의 액션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선형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왕가위는 액션의 인물들에게 선을 부여한 다음 그 선을 따라 다른 선과 다시 이어간다. 그 선이 신체를 이끌고 몸에 붙어있는 손과 발이 법칙에 따라 점에서 시작하여 활동을 시작하는 곡선과 직선으로 이어간다. 쇼트는 그걸 어떻게 이어 붙이고 떼어 낼 것인가의 문제이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긴장. 이들은 서로 다른 법칙의 세계를 동일한 공간 안으로 끌고 들어온 다음 같은 규칙의 경기장에서 수평과 수직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때 계단 위에서 아래로 낙하하는 삼저를 계단 아래서 엽문의 시선으로 올려다 본 다음 ( S#_14)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며 하강하는 삼저를 바라본다. (double_action) 하강, 혹은 낙하. 엽문의 시선과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기루 아가씨들의 시선의 교차. 바닥에 착지하는 삼저의 발, 아니 신발. ( S#_15) 이 장면은 신발의 클로즈업이 아니라 신발이 내려앉는 소리의 클로즈업이다. 이미 우리는 계단에서 이 신발의 무거운 소리를 들었다. 엽문 앞에 뛰어내렸을 때 이 신발은 사뿐하게 내려앉는 대신 무언가 위협적인 소리를 낸다. 이 신발은 그녀의 무기일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녀의 경공술이 아니라 신발이 매우 무거운 것, 아니 차라리 쇠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가벼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소리가 아니다. 한 가지 더.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일종의 중력감이다. 중력을 본다는 문제. 비가시성의 가시성. 이 무거운 신발이 어떤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여덟팔(八)자 걸음으로 옮겨갈 때 그 보폭의 움직임이 그녀의 무술의 일부이며 이제 곧 활동하게 될 팔괘장의 기본 동작임을 알려준다. 신중하지만 자신 있는 걸음. 카메라는 그녀의 발길을 따라 미끄러지듯이 뒤로 물러난다. 마치 이 모든 움직임은 발과 손, 팔과 몸의 안무에 종속된 것처럼 이끌린다. 때로 자석처럼 따라가고 있으며, 때로 마치 너무 빨라서 놓쳤다는 듯이 순식간에 손과 발, 팔과 몸이 빠져나가버리기도 한다. 왕가위의 표현을 빌리면 이 모든 것이 타이밍이다. S#_16 S#_17 S#_18 첫 번째 대결의 시작. 동선이 누구에서 시작하는가, 라는 문제. 삼저가 자세를 먼저 취하는 것을 ( S#_16) 정면으로 바라볼 때 부채를 든 사내가 말한다. 화면 바깥의 목소리. “삼저는 공연단 잡인 중 최고야” (voice_out_of_frame). 차라리 이 목소리는 해설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엽문은 지금 최고 중의 한 명과 마주해야 한다. 공격이 시작될 때는 한쪽이 다른 한쪽의 프레임의 공간 안으로 침입해야만 한다. 액션은 상대를 바라보는 장면(single_shot)과 두 사람이 대결하는 장면(two_shot)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교환 사이의 선택이다. 이때 누가 그 프레임의 주인인가. 누가 그 영역을 침범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점유할 것인가. 거기서 어떻게 나올 것인가, 혹은 쫓겨나는가, 그런 다음 어떻게 다시 들어갈 것인가, 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프레임은 균질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 속에서 동선은 새로운 선을 긋고 그 안에서 새로운 운동들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프레임 그 자체의 힘이 지속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액션은 시간 그 자체이자 힘의 형태이며 선의 운동이다. 우리는 이 형상을 언제나 지속 안에서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삼저의 제스처를 반복해서 보면서(double_action) 재빨리 정반대의 뒷모습을 보여줄 때 비로소 삼저와 엽문은 한 쇼트 안에(two_shot) 교집합을 이루게 된다. ( S#_17) 두 개의 다이어그램을 하나로 합쳐놓을 때 거기서 생겨나는 긴장. 그런데 엽문은 정반대로 그저 뒷짐을 지고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다시 한 번 남자의 목소리. “팔괘장을 좀 하지” 그때 목소리를 배경으로 하여 삼저의 신중하고 날렵하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엽문에게 다가가는 몸동작을 보는 우리는 “...좀 하지”라는 말이 엽문을 업신여기는 경고임을 알아차린다. 거기에 사내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형님이 한 수 알려줘” ( S#_18) 이때 사내는 왼쪽에 서서 오른쪽으로 엽문을 보고 있다. 이 장면은 앞선 장면( S#_8)의 연장이 아니라 그보다 하나 더 앞의 쇼트( S#_7)의 연장이다. 왜 이 장면은 정면으로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 되면 거기서 리듬은 멈출 것이다. 멈춘다는 문제와 빠져나간다는 문제. 마치 시선의 운동은 굴곡을 만들듯이 거기서 우리의 시선을 이끌고 정면으로 들어와서 오른쪽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빠져나간다. S#_19 S#_20 S#_21 S#_22 비로소 삼저를 맞이하는 엽문. ( S#_ 19) 아래서 위로 수직으로 카메라가 살짝 올라갈 때 엽문은 45도로 서 있다. 대화의 구도. 무술의 언어. 대결의 대화. 말하자면 엽문은 이 남자를 보는 게 아니라 삼저를 보고 있는 중이다. 그때 예를 갖추는 것은 삼저만이 아니라 카메라도 함께 예를 다한다. 엽문과 같은 방법으로 카메라가 아래서 위로 올라가면 삼저는 주먹을 손바닥에 가지런히 모아 인사를 하면서 자세를 잡는다. “그럼” ( S#_20) 그러자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만 같은 엽문의 손의 클로즈업. ( S#_21) 그 손은 방어나 공격의 자세를 취한다기보다는 삼저의 말에 대해서 허락의 제스처를 보여준다. 당신의 도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말하자면 대결의 예. 그런 다음 엽문의 얼굴, ( S#_22) 만면에 지은 미소. “그럼”. 사실 이건 중복 쇼트이다. < 일대종사 >에는 액션이 아니라 (그리고 물론 그럴 뿐만 아니라) 제스처의 중복 쇼트를 계속해서 볼 수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중복 쇼트가 하는 역할을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때 중복은 방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시선을 붙들어 매 둔 다음 거기서 우리들의 시선의 경로를 동요시키려는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다. 그때 장면은 쇼트의 중복에 의해서 종종 치명적인 간극이 생길 수도 있다. 왜 다시 이것인가. 갑자기 시선은 분해당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혹은 진부하게도 강요받은 인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중복이 이미지를 영화적인 순간에로 이끈다는 사실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진행을 잠시 뒤로 돌려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왕가위는 의도적으로 허락의 제스처를 말의 허락과 떼어내서 그 사이에 간극을 만들어냈다. 왜 그럴 필요가 생겨난 것일까. 쇼트의 진행은 과정의 디테일이다. 이때 중복은 재현이나 서사의 과정이 아니라 지각의 과정이다. 이것은 하나의 행동을 둘로 나눈 것이 아니라 보고 다시 본 것이다. 그때 하나가 객관적인 쇼트라면 이어지는 쇼트는 객관적인 앞의 쇼트에 대한 주관적인 쇼트의 역할이라는 착시의 지각을 불러일으킨다. 왜 여기서 주관적인 쇼트가 필요해진 것일까. 엽문의 미소를 다시 바라보기 바란다. 왕가위는 이 대결에서 액션이 아니라 엽문의 인격을 찍기 원한다. 비가시적인 대상. 그가 취하는 예. 그가 대하는 태도. 다가갈 때와 물러서야 하는 순간의 결정. 이 대결의 마지막 상대가 북방 무술의 최고의 자리에 있으며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대가 궁보산이며, 그와의 대결이 손과 발이 아니라 생각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소는 하나의 기호이자 동시에 신호이다. 그것이 어쩌면 배치 전체를 무너트릴 지도 모른다. 왕가위는 그걸 무릅쓰고 그걸 한다. 두 개의 예술적 결정, 그것. S#_23 S#_24 S#_25 S#_26 S#_27 삼저는 허락을 받자마자 바로 엽문의 프레임 안으로 쳐들어오면서 엽문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 S#_23) 자기의 영토를 침범당한 엽문. 삼저가 밀고 들어올 때 카메라는 삼저를 올려다보면서(low_angle)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다가 멈추고 앞으로 나서자 재빨리 뒤로 물러난다. 마치 자석처럼 따라붙는 카메라. 몹시 가까이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짧은 초점 거리의 렌즈를 사용한 이 촬영은 삼저의 동선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카메라와의 사이의 약속에서 나온 것이다. 마치 다가와도 상관없어요, 전 당신의 무술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럴 뿐만 아니라 당신의 동선 이외의 배경을 모두 지워버릴 거예요, 라는 듯한 거리. 삼저는 엽문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팔괘장의 지식을 일러준다. “팔괘장은 검술을 본땄지” 그러면서 자세를 취하고 한 손을 내밀면서 “단환장은 일검”, 다시 두 손을 모아서 “쌍환장은 쌍검”이라고 말한 다음 한 바퀴 도는 자세를 취하면서 ( S#_24) 그 발이 회전을 하면서(double_action) “여덟 팔(八)자 보법에” ( S#_25) 이어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삼저를 보여주면 그녀가 자세를 취하면서 자신감 넘치는 미소 짓는 얼굴로 덧붙인다. “64개의 변화가 있고”. 이때 엽문의 쇼트는 그녀의 대사 중간을 잘라 들어간 것이다. ( S#_26) 화면 가득한 클로즈업의 미소. 난 준비가 끝났어요, 라는 대답의 표정. 어쩌면 이미 삼저의 약점을 본 것일까. 무언가 이 신비로운 미소는 우리들로 하여금 소설을 쓰고 싶은 유혹을 한다. 물론 이것은 중복 쇼트가 가져온 주관적인 효과가 지금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 순간적인 미소를 본 것일까. 삼저는 한쪽 손을 올리고 다른 손을 내린 다음 웃는 얼굴이 갑자기 바뀌면서 “기습에 유리하지”라고 덧붙인 다음 엽문에게 재빨리 첫수를 내지른다. ( S#_27) 물론 기습에 유리하다고 말한 다음 하는 공격은 이미 기습이 아니다. 말하자면 기습의 예. S#_28 S#_29_A_1 S#_30 S#_31 S#_32 S#_33 S#_34_A_2 대결의 시작. 삼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프레임 인 하면서 대결이 시작된다. 엽문은 그 삼저를 맞는다. ( S#_28) 이때 삼저가 엽문의 공간, 엽문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영화의 규칙은 무협영화가 아니라 무술영화이다. 손과 발이 닿은 거리가 자기의 영토이다. 그 안으로 들어올 때 서로의 무술이 지닌 규칙들이 대결의 구도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이때 대결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엽문과 삼저의 대결이지만 다른 하나는 엽문의 무술과 삼저의 무술, 영춘권과 팔괘장의 술(術)이 각자의 규칙에 따라 활동하면서 만들어내는 선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때 두 개의 선이 부딪치고 때로 엉켜들고 하나가 다른 하나는 끊으려 할 때 다른 하나는 그것을 이을 것이며 다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묶으려 할 때 그것을 풀어헤쳐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동선. 영화는 그 선을 이어가면서 따라갈 것이다. 왕가위는 승패를 따라가지 않는다. 물론 그 결과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장르의 운명을 알고 있다. 만일 여기서 엽문이 패배한다면 이야기는 어떤 수를 써도 더 이상 진행하기 힘들 것이다. 바보들이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왕가위는 그들을 버려두고 쇼트를 진행한다. 여기서 무술의 동선들은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엽문과 삼저는 그 규칙이 활동하는 선의 양태이다. 그때 쇼트는 선의 집합이자 운동의 선이다. 거기서 무엇이 중심에 놓여있는가. 몸이 바로 거기에 있다. 살과 뼈, 신경조직과 피부로 이루어진 하나의 무게. 무술은 결국 몸을 다루는 기술이다. 몸과 몸의 만남. 영화는 몸을 바라보고, 몸에 다가갔다가 떨어져 나가고, 그런 다음 몸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그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다이어그램과 블록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때 마치 엽문과 삼저의 대결 자체가 두 개의 다이어그램의 교환처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다음 쇼트는 천장으로 올라간 다음 수직으로 내려다본다. 두 개의 점. 나는 이 장면을 먼저 A_1 이라고 부르겠다. ( S#_29_A_1) 우리는 이 구도를 이미 < 장군의 아들 >에서도 보았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이 쇼트를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다. 그건 대역을 촬영하기 위한 속임수에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다. 하지만 대역 촬영을 위해서라면 이것 말고도 수많은 방법이 있다. 그리고 < 일대종사 >에서 이 장면은 대역이 아니다. 우선 성립이라는 문제. 이 쇼트는 누가 보는 것인가. 설명을 하려면 난간에 서 있는 기루의 아가씨들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이 대결이 끝날 때까지 기루의 아가씨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reverse-shot) 시선의 교차점. 천장에서 내려다보는 이 쇼트는 앞의 쇼트를( S#_28) 그대로 위로 올린 다음 90도로 내려다본 것이다. 그래서 삼저가 왼쪽에 있고 엽문이 오른쪽에 있다. 그런 다음 다시 내려온 카메라는 재빨리 엽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 S#_30) 방어하는 엽문. 무엇을? 자기의 공간, 자기의 프레임. 그때 이 공간 안으로, 마치 프레임을 찢듯이, 삼저의 주먹이 왼쪽에서 들어오고 이것을 막는다. 천장에서 엽문의 곁 가까이 다가온 장면 바로 다음 순간 ( S#_31) 갑자기 상상선을 뒤집어서 엽문과 삼저를 배치했다. 그냥 간단하게 그 둘의 위치가 바뀌었다. 왼쪽에 놓인 엽문. 오른쪽에 있는 삼저. 이때 위로 올라간 다음 카메라가 반대 방향으로 내려간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바로 앞 장면( S#_30)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장면은 점프 컷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동선이 엉켰다는 느낌도 없다. 물론 너무 짧아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핵심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때 엽문은 반대로 마치 유리 사이에 비춰 보이면서 거울에 반사되어 보는 것 같다. 이게 거울인지 유리인지는 너무 순간적이어서 분명치 않다. 하지만 유리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사의 구도 바깥에 있는 삼저는 성립되지 않는다. 액션은 멈추지 않았고 동선은 상상선을 넘어서서 끊기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 더 이상한 것은 그런 다음 재빨리 다시 원래의 상상선 반대편으로 넘어와서 ( S#_32) 삼저의 발에서 거슬러 올라가서 오른쪽에 있는 엽문을 공격한다. 말하자면 다시 한 번 뒤집은 것이다. 나는 내 감각을 믿고 싶다. 31번째 쇼트는 인서트가 아니다. 세 개의 쇼트는 정확하게 액션의 동선이 일치한다. 만일 이 쇼트가 없다 할지라도 두 개의 쇼트는 연결하는데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럴 필요가 생긴 것일까. 나는 두 개의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하나는 장소의 환기이다. 왕가위는 우리들이 단지 동선을 쫓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을 얻는가. 이 장면 전체가 하나의 실내극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장소에서 영화를 진행하는 것이 불편하기라도 한 것처럼 상상선이 문제를 일으킬 때 우리들은 문득 장소를 보게 된다. 다른 하나. 기이하게도 이 쇼트는 동선을 쫓아가다가 마치 상황을 물끄러미 쳐다보듯이 빠져나갔다는 인상을 준다. (establishing_shot) 이때 이 쇼트가 굴곡진 유리를 걸었다는 점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이 쇼트는 궁이의 시점 쇼트라고 말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대결 바깥에 있는 그녀. 비밀의 복도에서 훔쳐보는 시선, 마치 쌓아 올라간 블록 중의 하나가 갑자기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만 같은 쇼트. 돌아온 위치의 쇼트는 재빨리 삼저와 엽문의 대결을 이어받는다. ( S#_33) 같은 크기. 같은 각도. 이어지는 액션. 재빠른 데쿠파주. 순간적인 투 쇼트. 이때 이 쇼트를 받는 것은 재빨리 다시 천장에 올라간 A_2이다. ( S#_34_A_2) 천장에 올라갈 때마다 마치 정확하게 다시 상상선을 복기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왼쪽에 삼저, 오른쪽에 엽문이 있다. S#_35 S#_36_A_3 S#_37 S#_38 S#_39 S#_40 S#_41 S#_42 S#_43 하지만 왕가위가 쇼트 진행을 패턴으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섬광 같은 순간. 삼저가 뒤에 있고 엽문이 앞에 있는데 삼저의 손이 재빨리 허공을 가르고 순간적으로 엽문이 피한다. ( S#_35) 이때 왕가위는 갑자기 슬로우 모션으로 속도를 바꾼다. 이상할 정도로 이 쇼트는 인상적인데 약간의 트릭이 있다. 물론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속도를 변속한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이 쇼트만 사운드가 없다. 그래서 마치 이 장면을 단지 느리게 본 것 이상으로 찰나의 순간을 확장시켜 놓은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순간적인 괄호 치기. 물론 이 장면은 위험하다. 쇼트의 편집이라는 순서의 리듬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 장면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동선이 엉켰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두 개의 쇼트는 잘못된 각도에서 이어받은 것이다. 그때 왕가위는 재빨리 다시 천장으로 올라가서( S#_36_A_3) 마치 상상선을 재설정이라도 하듯이(re-establishing_shot) 다시 고스란히 반복한다. 이 쇼트는 앞의 쇼트( S#_35)를 이어받는다기보다는 더 앞의 쇼트를( S#_34) 연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슬로우 모션으로 파고 들어간 쇼트는 마치 인서트처럼 작동한다. 엽문은 삼저의 팔을 뒤로 꺾고 이때 ( S#_37) 삼저의 얼굴로 다음 쇼트를 받는다. 팔과 손으로 연결된 프레임의 안과 바깥. 엽문은 그 팔의 연결이며 바로 곁에 있다. 카메라의 바로 앞. 이때 그건 삼저의 표정을 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표정의 쇼트.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여기서 승부는 결판이 난 것인가. 그 순간 갑자기 정면으로 찍으면서 삼저는 팔을 비틀어서 엽문의 손을 빠져나간다. ( S#_38) 약간의 현기증. 말 그대로 브레송 효과. 팔과 몸을 분리한 다음 팔의 운동에 대해서 몸이 마치 그 일부처럼, 마치 나사처럼, 회전하면서 빠져나간다. 재빠른 슬로우 모션. 마치 몸과 몸이 부딪쳐서 일으키는 듯한 사운드 효과. 그때 삼저의 팔은 엽문의 손아귀를 나사가 박혀 있다가 비틀어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삼저가 계단을 내려올 때, 그리고 계단에서 뛰어내릴 때, 그런 다음 엽문에게 다가오면서 팔자 보폭을 걸었을 때, 매번 그녀의 동선에서 나선형의 운동을 보았다. 엽문의 금나수(擒拏手), 삼저의 동일한 운동. 말하자면 두 개의 쇼트( S#_35, S#_38)는 서로가 서로를 보충하는 것이다. 만일 앞의 쇼트가 없었다면 뒤의 쇼트는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두 개의 쇼트는 놀라우리만큼 비슷하게 보인다. 물론 그것은 이 두 개의 쇼트가 모두 손의 운동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슬로우 모션의 이미지. 손의 활동. 여기서 방향을 잃으면 안 된다. 엽문과 삼저의 투 쇼트. ( S#_39) 왼쪽에 삼저. 오른쪽에 엽문, 왕가위는 갑자기 상상선을 넘지만 그러나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오는 법을 알고 있다. 왕가위가 때로 법칙 바깥에서 감각적으로 편집을 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대부분 부주의한 비평가들이 편집의 맹점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반대로 그가 지나치게 고전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맹점의 봉합. 경계 사이의 보충. 그는 일단 선을 정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제자리로 돌아온다. 반대로 종종 바깥으로 나간 다음 완전히 새로운 선을 따라가는 것은 차이밍량이다. 나는 그가 때로 원칙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혼란스러운 극장.(< 안녕, 용문객잔 >) 건물 사이의 미로.(< 표정 >) 물론 그렇게 하면서 차이밍량은 완전히 새로운 선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미학적 원칙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 왕가위는 동선을 끊은 다음 재빨리 다시 연결한다. 마치 일사불란한 동작처럼 삼저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손을 모은 다음 엽문에게 뻗는다. ( S#_40) 왕가위는 삼저와 엽문을 떼어내고 다시 엽문의 쇼트를 만든다. 이때 삼저가 이 쇼트 안으로 침입하듯이 들어온다. ( S#_41) 이걸 재빨리 쇼트를 나누었다. 물론 이건 하나의 장면이다. 그러나 왕가위는 하나의 장면 안에서 하나의 행동을 성립시키는 쇼트의 성격이 다르면 그건 n개의 쇼트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왕가위의 장면은 n개의 쇼트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도 정식화 할 수 있다. 왕가위의 쇼트 나누기의 원칙은 간단하다. 한 씬 안에서 단지 여러 개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액션을 미분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쇼트의 성격이 다르면 그건 서로 각자 공존해야 한다. 대신 그 둘은 하나로 섞이면 안 된다. 그게 같은 방향이건, 같은 사이즈이건 그건 관계하지 않는다. 왕가위는 이미지로 쇼트를 분류하지 않는다. 그걸 <화양연화>에서 우리는 보았뇩?씬 안에서의 분리. 쇼트들 사이의 칸막이. 그뇩옳碩오?여러 개의 쇼트로 나눈 것이 아니라 여러 개로 나눈 쇼트들을 하나로 구성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 일대종사 >는 동일한 원칙을 액션의 장면 안에서 시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 S#_42) 여기서 엽문은 정면을 바라보면서 다가오는 삼저를 어깨로 부딪쳐 바깥으로 내보낸다. 이때 이 구도는 엽문이 마치 프레임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쇼트 사이즈를 더 안쪽으로 밀고 들어간다. ( S#_43) 이때 삼자가 왼쪽에 있는데도 엽문은 정면을 향해 서서 마치 어떤 생각에 잠긴 듯, 그저 영춘권의 무술이 요구하는 동작의 규칙에 따라 지금의 자세를 취한다는 듯이, 쳐다보지도 않고, 심저를 몸으로 밀어 낸다. 그리고 이 몸에 밀려서 삼저가 다시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간다. 말하자면 프레임의 소유라는 문제. 프레임의 안과 바깥. 사방으로 열린 프레임. 통로들. 계속해서 다시 설정되는 공간. 그 중심에 선 몸. 수직과 수평. S#_44 S#_45 S#_46 S#_47 S#_48 S#_49 S#_50 S#_51 S#_52 S#_53 S#_54 S#_55 S#_56 S#_57 S#_58 S#_59 S#_60 S#_61 나는 여기서 제작의 흔적을 복기하고 싶은 유혹마저 느낀다. 동선과 카메라의 혼연일체. 이 믿기 힘들 정도의 호흡의 일치. ( S#_44) 삼저가 밀려나면서 기둥을 발로 차고 그 반동으로 다시 엽문 쪽으로 향한다. 이때 왕가위는 기둥을 발로 차면서 되돌아오는 삼저를 따라 밀려나갔다가 바로 되돌아온다. 이 짧은 순간에 펼쳐지는 후진과 전진의 운동.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지만 우리에게 이상할 정도로 그 장면을 정확하게 다시 복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사운드의 효과이다. 마치 동선을 설명하는 것만 같은 청각기호들. ( S#_45) 이어지는 쇼트는 44 쇼트의 반복이자 디테일이다. 삼저의 발걸음을 따라서, 팔괘의 팔(八 )자 보행을 따라서, 엽문으로 향하는 발길을 따라서 움직인다. 이것은 정확하게 삼저가 앞서 보여준 여덟 팔(八)자 보행의 재빠른 운동이다. 마치 바닥에 나선형을 그리는 것처럼, 그래서 여덟 팔(八)자를 신발로 쓰기라도 하듯이, 미끄러지듯, 향하는 발걸음. 말 그대로 팔괘장의 활동. 이때 엽문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삼저가 취하는 제스처는 단지 팔괘장의 기본 자세를 보여주는 이상으로 마치 하나의 안무를 보는 것만 같다. ( S#_46) 슬로우 모션. 이때 사운드 효과는 삼저가 엽문의 손아귀를 빠져나올 때의 반복이다. 온 몸을 비틀면서 하나의 나사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은 자세. 말하자면 나선형의 운동. 이 장면은 순간적으로 삼저의 몸 절반을 보여줄 수 있는 정도만큼 물러난 다음(medium_size) 얼굴에서 발 아래로 수직으로 내려간다. (tilt_down) 이 장면은 엽문을 공격하려 든다기보다는 이 자체로 완결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이 쇼트에서 이 제스처에 대한 삼저의 어떤 나르시시즘 같은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뭐랄까, 이건 너무 아름다워서 공격하려는 의도보다는 마치 그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왕가위는 승부에 관심이 없다. 그는 지금 차례로 중화 무술을 전시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걸 이어받을 수 있을까. ( S#_47) 이때 왕가위는 카메라를 엽문과 삼저 사이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다. 삼저는 손을 내밀어 엽문을 공격한다. 순식간에 파고 들어간 이 쇼트는 거의 유일한 선택이다. 마치 하나의 쇼트 안에 두 개의 장면을 접합시키기라도 하는 것만 같은 이음새. 이 쇼트를 재빨리 수평으로 잡아서 엽문이 삼저의 손을 막아내는 것으로 연결하였다. ( S#_48) 이때 엽문은 삼저의 손을 프레임 바깥까지 밀어낸다. ( S#_49) 말 그대로 손과 손. 재빠른 손의 율동들. 하나는 밀고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밀쳐낸다, 두 개의 힘. 우리는 이때 두 개의 손을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는 커녕 이 두 개의 손은 엽문과 삼저 그 자체이며 몸 전체이다. 이 두 개의 손의 속도와 리듬, 그 활동이 만들어내는 선이야말로 순간적으로 이 장면을 시각적인 운동에서 촉각적인 운동에로 옮겨놓는다. 마치 물리적 단위를 벗어난 듯한 활동. 여기서 순식간에 밀려나는 삼저. ( S#_ 50) 삼저의 당황스러운 표정. 이때 이 쇼트는 이상하게도 엽문의 등 뒤에서 삼저를 바라보고 있다. (over_the_shoulder_shot) 동시에 엽문의 등을 통해서 삼저의 표정을 볼 때 그것은 엽문의 표정이기도 하다.(reverse_shot) 말 그대로 투 쇼트. 그때 왜 엽문의 등이 필요해진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삼저의 새로운 공격은 갑자기 바닥에 누우면서 발로 엽문을 걷어차려는 것이다. ( S#_51) 계단을 무겁게 내려오던 그 신발. 위에서 아래로. (C_1) 그때 카메라가 삼저의 공격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구도는 물론 다시 한 번 카메라가 천장으로 올라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다. 천장에서 내려다 본 세 번째 쇼트. 마치 이 공격을 위해서 준비해두었던 것만 같은 구도. 그때 내지른 삼저의 발을 엽문이 붙잡는다. 발과 손의 클로즈업. ( S#_52) 이 대결에서 엽문은 줄기차게 삼저의 공격을 붙잡으려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공격과 방어. 나선형과 포획. 두 개의 힘. 그런 다음 한 쪽의 정지. 누워서 꼼짝 못 하게 된 삼저, ( S#_53) 사실상 여기서 대결은 끝난 것이다. 정확하게 대구라도 이루듯이 엽문이 내려다본다. ( S#_54) “삼저, 가볍게 겨루는 자리인데 건물을 부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 다음 삼저의 발을 놓아준다. 손에서 빠져나간 발. 여기서부터 쇼트는 단순하게 진행된다. 별다른 기교도 없고, 다만 대사를 따라갈 뿐이다. 마치 이 진행은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제 엽문은 겨우 첫 번째 관문을 지나갔을 뿐이다. 더 힘든 상대들이 엽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S#_55) 승부는 끝났고, 패배를 인정해야 할 시간이다. 누워서 웃는 삼저. ( S#_56) 일어나면서 대답한다. ( S#_57) “하도 부숴봐서” ( S#_58) “별일 아니야” (voice_out_of_frame) 그런데 이 대사를 할 때 장면은 삼저를 소개한 부채를 든 사내의 얼굴이다. 별일이 아닌 것이 아닌 표정. 새로운 긴장. ( S#_59) 삼저 웃으면서 덧붙인다. “엽선생, 팔괘는 악랄하니 조심하시오” 엽문은 먼저 삼저를 바라보면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 다음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본다. ( S#_60) 이때 엽문을 찍은 45도의 위치는 삼저를 맞이하던 쇼트( S#_19)의 반복이자 시작에 대한 마무리이다. 하나의 마무리. 두 번째 대결을 준비하는 입구. 더 많은 대결. 이때 엽문을 내려다보는 금루 난간의 아가씨들. ( S#_61) 저 무심한 표정들.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이곳에 와서 겨룬 것일까. 얼마나 많은 대가들이 걸어 들어와서 여기서 수평이 되어 누웠을까. 형의권의 고수 엽문은 다음 층에서 형의권의 고수를 만난다. 그런 다음 궁보산과 대결한다. 가장 높은 산. 이때 궁보산은 무술을 겨루는 대신 생각을 겨루자고 제안한다. 단지 대결만을 놓고 말한다면 이 장면이 끝났을 때 < 일대종사 >에서 엽문의 절정은 지나간 것이다. 궁이와의 대결이 있지만 그다음은 허접한 대결로 허송세월한다. 왕가위는 의도적으로 결정적인 장면을 피했다. 엽문과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악역을 맡은) 마삼의 대결. 대신 궁이와 마삼의 대결이 전부이다. 왕가위는 이 이야기를 인물들의 서사에 내맡기지 않는다. 그들은 시간 속에서, 역사 속에서, 세월 속에서, 스러져간다. 가여운 존재들. 그 존재들이 가여운 것은 < 장군의 아들 >도 다르지 않다. 김두한과 종로패들은 으스대기는 하지만 세월 속에, 역사 속에서, 일제 강점하에서, 제대로 기 한번 펴지 못하고 그렇게 사라져간다. 임권택도, 왕가위도, 그 안에서 디테일의 조화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 대신 각자의 대결의 각각의 장면들에 홀린 듯이 매혹된다. 영화 안의 벡터. 그것은 언제 활동을 시작하는가. 규칙들. 거기서 동선이 시작한다. 그 선이 만들어내는 힘과 개념. 나는 그 힘에서 영화의 이것임, 을 생각하게 된다. 장면 안의 형태들. 이때 이 장면들 속에서 나는 두 사람 사이의 친화성을 느낀다. 쇼트의 진행이라는 방법. 오로지 방법의 세계. 그건 단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액션 그 자체에 대한 두 사람 사이의 매혹의 공감을 발견한다. 나는 거기서 활동사진의 사유를 복구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내게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오로지 방법만을 물어보는 이유이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이들의 창조의 자리, 제작과정, 그 영화를 연출하는 순간을 복원시키고 싶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본 것의 느낌을 고스란히 가져오는 것이다. 장면을 눈앞에 다시 가져오기. 이번에는 다시 임권택의 장면을 가져올 차례이다. (두 번째 이야기 끝, 세 번째 이야기 계속) 장군의 아들 1990년 108분 컬러 1.85 감독 임권택 제작 태흥영화㈜ 각색 윤삼육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박순덕 음악 신병하 박상민 김두한 신현준 하야시 이일재 김동희 방은희 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