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다한 이야기
- 감독
- 김보미
- 제작년도
- 2013
- 출연
- 김보미, 김경선
제목의 ‘장미’는 꽃 이름이기도 하겠지만, 실제 유지인 의 극 중 배역 이름이기도 하다. 전화벨이 울리자, 장미(유지인)는 졸린 눈으로 “어보세요?”라고 전화를 받는다. 금요일을 토요일로 착각하고 꿈나라에 빠져있던 장미는 부랴부랴 학교로 향한다. 모범생이라 그런 줄 알았더니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캠퍼스에서 여대생들이 대놓고 담배 피우기 애매하던 시절(지금도 그런가?), 화장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모여 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한다. 그런 그녀들을 꼬나보는 학교 관계자가 바로 < 여곡성 >(1986)에서 귀신이 몸을 빌린 시어머니로 출연하여 혀를 길게 뽑으셨던 석인수 선생이다. 이름은 남성적이지만 당대 한국영화의 못된 시어머니, 무당, 여죄수 등을 도맡으며 황정순의 반대편에서 장르와 분량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영화에 이바지하셨던 훌륭한 분이시다. 그처럼 공부는 뒷전인 장미와 그 일행들을 기다리는 남자는 바로 규식( 송승환 )이다. 장미만을 사랑해온 규식은 카페에서 사랑의 징표라며 무언가를(알지만 도저히 쓸 수 없다)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역시 알지만 도저히 쓸 수 없는) 동정과 처녀성에 대한 규식의 일장연설과 플래시백이 이어진다. 단순한 세대차이로 치부하기에는 납득하기 힘든 그런 논리로 규식이 급기야 “우린 결혼해야 돼, 부모들 사이에서도 얘기가 끝났어”라고 말하자, 장미는 허탈한 듯 소리친다. “아이구 이 피곤한 친구.” 그래 궤변은 늘 피곤한 법이다. 장미 가시로 만든 핏방울 징표 “세 방울은 장미 거, 세 방울은 내 거” 규식을 따돌린 장미와 그 일행은 야심한 시각이 되자, 정체불명의 술집에서 만난 하키부 남자들과 옷 벗기 내기 술 마시기 게임을 시작한다. 이계인 이 대학생으로 나오는 것은 이해한다 해도, 같은 해 만들어진 하길종 의 < 병태와 영자 >(1979)에서 병태( 손정환 )에게 “군대에서 여자 친구 사진을 갖고 있는 것은 정신무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충고하는 소대장으로 나온 이해룡 이 전혀 정신무장이 안 된 하키부 예비역 대학생으로 나오는 것은 무척 황당하다. 심지어 유지인 보다 실제 20살이 많고, 영화 속 중년남으로 나오는 신성일 보다도 한 살 많은 한국영화계의 대표적 원로배우다.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1989)에서는 은주( 이미연 )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아무튼 여자가 한 명 모자라지만 대담하게도 두 사람을 상대하겠다는 장미로 인해 게임이 시작된다. 그런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철민(이계인)이 술자리를 뒤엎으며 장미에게 “자신을 내동댕이치는데 익숙한 여자”라고 소리친다. 그처럼 < 가시를 삼킨 장미 >의 초반부는 뭔가 ‘한국판 < 님포매니악 >’스러운 분위기로 후끈 달아오른다(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너무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마시길). 문제의 대학생들(가장 앞이 이해룡 , 세 번째가 이계인 )과 후끈한 게임 정진우 감독의 < 가시를 삼킨 장미 >는 이장호 감독의 < 별들의 고향 >(1974)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른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자장 안에 있다(<별들의 고향>을 각색한 이희우 작가가 <가시를 삼킨 장미>를 썼다). 그를 B무비 장르에 명쾌하게 포함시킬 수는 없겠으나, <가시를 삼킨 장미>는 A무비를 지향하는 대사들의 연속이 오히려 현재에 이르러 B무비처럼 느껴지는 경우다. 당시로써는 ‘여성 주체’에 대한 심오하고 페미닌한 텍스트로 해석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그나마 그를 현실적으로 살려내는 것은 유지인 의 탁월한 연기력이다. 그런 혼돈의 술자리를 끝내고 헛헛한 마음으로 귀가한 장미 앞에는 쓸쓸한 새장이 있다. 까마귀(< 하얀 까마귀 >), 뻐꾸기(<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앵무새(<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갈매기(<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 >) 등 유난히 새를 사랑해온 정진우 감독의 미장센이 빛나는 대목이다. 심지어 신일룡 , 이미숙 주연의 또 다른 연출작 <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1984) 또한 앞서 <두견새 왜 피를 토했나>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그보다 앞선 최초의 제목은 <짧았지만 만족했어요>라는 야릇한 제목이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이 영화를 촬영 중인 정진우 감독을 인터뷰한 취재기사에 “정진우 감독 조류학자 되려나”라는 제목까지 달았었다. 누가 봐도 현실의 장미를 비유하는 것이 빤한 새장 속의 새를 향해 그녀가 말한다. “넌 왜 그렇게 불쌍하게 있니. 날아, 노래를 해, 날아, 노래하라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 알아듣지도 못하는 애꿎은 새를 향해 더 심도 깊은 논의를 펼쳐 보인다. “우리는 왜 수컷을 통해서 존재가치가 인정되니? 잘못된 거야! 난 싫어. 그런 모든 걸 다 감수하고 살 수만은 없어. 싫어, 싫어, 싫어~~~” 새장 이후 부산 집으로 내려가던 장미는 우연히 옆에 앉은 중년남자( 신성일 )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가정으로 인해 번뇌에 빠진 그를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한정된 범위 안에서의 선택인가를 생각해봐요”라며 위로한다. 파산하고 부산에 내려온 남자는 아내도 자식도 답이 되지 못한 현실 속에서 장미를 만나고서야 삶을 돌아볼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앞으로 백 가지 슬픔이 있더라도 한 가지 행복을 위해 살겠어요”라는 장미의 비현실적이고 천사 같은 사랑도, 남편의 하숙집에서 여자 팬티를 발견하고 연락한 그의 아내( 선우용녀 )로 인해 ‘불륜’이 되어 산산조각 나고 만다. 그럼에도 “죽음을 모르고 뛰어드는 하루살이에게 박수라도 칠까”라며 두려움 없는 사랑을 꿈꾸는, 그렇게 자신을 (깡에 살고 깡에 죽는) ‘깡생깡사’로 표현하는 장미의 모습은 꽤나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런 불륜이 집에도 알려지고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중년남자를 향한 마음이 ‘항상 충족되지 못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찾으려 했던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관계는 끝나버린다. 예정된 사랑의 실패로 장미는 이전보다 더 방탕한 생활을 하고, 급기야 약물 과다복용으로 정신병원에도 간다. 당시 국내 유일의 정신병원이었던 ‘청량리뇌병원’에서는 장미를 두고 ‘마음의 병’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이후 겨우 진정이 됐을 즈음에는 혼자 동시 상영관을 찾아 영화만 보는데, 그런 그녀 앞에 세호( 한진희 )라는 미남자가 나타난다. 또한 비슷한 시기 옛 친구 진영( 김보미 )이 결혼 예찬론을 펼쳐서 장미의 마음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킨다. 그렇게 장미는 안정된 생활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품는 듯하다. 진영과 통화하며 “우리들의 방황도 어떤 식으로든 끝장이 나려나 봐”라는 장미의 얘기 뒤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버닝 러브’가 흐른다. 얼마 뒤 세호의 집요한 애정공세로 두 사람은 건너편으로 당인리 화력발전소가 보이는 한강변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세호의 몸개그는 장미의 얼굴에 잃어버린 미소를 되찾아준다. 영양가 없는 남자들 하지만 세호 또한 ‘똑같은 놈’이다. 결혼까지 생각한 장미가 임신을 하게 되지만, 세호는 어머니가 장미의 과거를 알아서 결혼을 승낙하지 않고 있다는 핑계까지 대며 한사코 결혼을 거부한다. “아직도 엄마 젖을 빨고 싶겠죠? 조금씩 엄마한테서 벗어나요”라고 충고하지만 세호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이후 세호의 진짜 비밀이 드러나면서, 남자 잘못 만나 고생하는 장미의 비극은 종지부를 찍는다. 여느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와 별다를 바 없는 설정 안에서도 < 가시를 삼킨 장미 >의 유지인 은 <별들의 고향>의 경아( 안인숙 )와 비교해도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정진우 감독이 같은 해 만든 < 심봤다 >의 유지인이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지 비교해 보면 좋을 것이다. 이듬해 출연한 이장호 감독의 < 바람불어 좋은 날 >과는 또한 얼마나 비슷한 모습인지도). 더불어 < 별들의 고향 > 이후 유행처럼 만들어지던 아류작들 대부분은 그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관음증을 영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시를 삼킨 장미>는 ‘버림받은 여자의 방황’이라는 나름의 한계 안에서도, 고민의 흔적이 역력한 이희우 작가 특유의 대사들과 정진우 감독의 집요한 연출력이 결합해 유지인의 장미를 보다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영화 속에서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리고 드디어 다른 여자 친구가 생긴 규식과 장미가 나누는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난 아직도 너를 이해 못 하겠어”라는 규식의 회한 가득한 말에 장미는 이렇게 답한다. “나 자신도 나를 이해 못 해.” “나 자신도 나를 이해 못 해.” 이건 유지인 이 예뻐서 그냥... 유지인 신성일 한진희 송승환 감독: 정진우 각본: 이희우 개봉극장: 스카라 관람인원: 75,757명
힘겨운 일상을 보내는 중년 여성들의 지친 삶과 발랄하고 분방한 소녀들의 삶이 교차되는 < 써니 >를 보노라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문정희 시인의 질문에 <써니>는 웃음과 눈물겨운 전복적 답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이 작품이 품고 가는 80년대 대중음악과 춤을 타고 넘치는 에너지는 복고열풍과 더불어 관객의 적극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전작인 < 과속스캔들 >에서 가족을 둘러싼 코믹정신을 폭발시켜 낸 강형철 감독의 연출 에너지는 <써니>로 시대결합과 세대전복을 유쾌하게 달성해낸다. 제3의 인류처럼 ‘아줌마’로 불리는 여자들. 그러나 그녀들도 한때 꿈을 가졌던 소녀들이었다. 25년을 간격으로 두고 과거 소녀와 중년 여성을 오가는 서사는 우정의 힘으로 부활하는 자신의 얼굴을 가진 여성들의 새로운 인생 만들기와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나미( 유호정 )는 무덤덤한 가족관계 속에 시들어가던 전업주부이다. 그런 나미가 어머니 문병 차 들린 병원에서 고교 시절 친구 춘화( 진희경 )를 만나면서 인생이 다시 시작된다. 병실 벽에 기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를 부르며 이루어지는 이 둘의 재회가 친구 찾기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시한부 환자인 춘화가 ‘죽기 전 친구를 보고 싶다’는 유언이 미리 집행되는 셈이다. 그녀들은 그 때 그 시절, 학교를 주름잡던 불량서클 ‘7공주파 써니’였고, 춘화( 강소라 )는 카리스마 넘치는 멋들어진 대장이자, 벌교에서 전학 온 나미( 심은경 )가 왕따당하기 직전 챙겨준 왕언니이기도 했으니까. 수업 중에도 쌍꺼풀 만들기에 매진했던 장미( 김민영 , 고수희 )는 영업실적에 시달리는 보험설계사. 입에 욕을 물고 살던 진희( 박진주 , 홍진희 )는 성형과 내숭 기술로 사모님으로 변신했다. 문학소녀 금옥( 남보라 , 이연경 )은 시집살이에 지친 눈치보기 주부가 되었고 미스코리아를 꿈꾸던 복희( 김보미 , 김선경 )는 남루한 술집 여자로, 약자 중의 약자로 전락해버렸다. 냉정한 얼음공주 수지( 민효린 )는 찾아내기도 힘들지만 그녀가 냉랭했던 이유도 서사가 진행되며 점차 드러난다. 영화보기의 재미는 불량서클 소녀들의 일상과 80년대 문화풍경이다. 음악다방, 기차여행과 민주화 거리투쟁 재현이 거기에 얹혀진다. 또 다른 불량써클 ‘소녀시대’와 ‘써니’가 맞장뜨는 장면은 ‘청년 대 전경’과 몽타주되어 80년대 거리 자체를 ‘터치 바이 터치 Touch by Touch’ 음악으로 풀어낸다. 일상과 사회상의 오버랩, 음악과 이미지의 공감각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80년대 장안을 풍미한 음악들, 나미의 ‘빙글빙글’, 영화제목이기도 한 보니 엠의 ‘써니’가 폭발력을 과시하며 우정의 힘을 25년 만에 회복시킨다. 결말 씨퀀스에서 상복을 벗어 던지며 시작되는 춘화가 원했던 ‘춤추고 노래하는 연대의 힘’은 아이러니의 묘미를 선사한다. “써니, 예전 내 인생엔 비가 내렸지. 써니, 네가 미소 짓자 고통이 지워졌지. 이제 어두운 날들은 가고, 밝은 날들이 왔어.” 노랫말처럼 옛 친구와의 우정 회복은 망가진 인생, 나 아닌 누군가의 부속물로 살아가는 것이 여자의 운명이라 감수하며 시들어가던 중년 여성들의 삶에 자기 뜻대로 살아보는 제2의 인생을 예고하는 죽음과 삶의 파티이다. 한국영화에서 매우 드물게 여성의 생동감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펼치게 된 덕인지, 진희경, 김장미 등등... 모든 배우가 멋지다. 그들의 십 대 시절 역을 맡은 소녀배우들도 멋지다! 인물의 이름들은 그 시절 가수들과 일치한다. 나미, (하)춘화, (윤)복희 등등. 마치 그녀들을 추억하며 기리는 것처럼.
'겨울 공화국'으로 불리던 유신정권 아래의 한국영화는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올 줄을 몰랐다. 그렇게 어둡고도 막막한 1967년 초반의 극장가에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거의 무명에 가까운 문여송 감독이 만든 하이틴 영화 < 진짜 진짜 잊지마 > 가 흥행의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광고도 별로 하지 않지 않았거니와 제작자 쪽에서도 '' 버린 자식 '' 쯤으로 취급한 작품이었는데도 개봉 첫날부터 중, 고등학생 관객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이때부터 춤무로 하이틴 영화는 봇물이 터진 듯 제작되기 시작했다. 1976년에 만들어진 한국영화는 모두 100편이었는데, < 진짜진짜 잊지마 > 는 흥행 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다. 문여송 감독은 같은 해에 발표한 또다른 하이틴 영화 < 정말 꿈이 있다고 > 까지 흥행 8위에 올려놓았다. 1932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동경대학 예술학부를 마친 문여송은 1966년 고은아 와 남궁원 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판박이 반공영화 < 간첩작전 > 으로 감독에 데뷔했다. 그는 3년 뒤 풍자적 시선으로 시대상을 응시한 < 부인행차 > 를 내놓았으나, 평단과 관객 어느 쪽에서도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 진짜 진짜 잊지마 > 는 오랫동안 실의에 젖었던 '' 중고 신인 '' 문여송 감독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자율성과는 거리가 먼 영화계 상황 때문인지 아니면 온통 가짜가 판을 치는 세태 탓인지 < 진짜 진짜 미안해 > ( 1976 ), < 진짜 진짜 좋아해 > ( 1977 ) 로 이어지는 문여송의 '' 진짜 시리즈 '' 는 전국의 수많은 청소년들을 사로잡았다. 문여송이 발굴한 여고생 임예진 은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고, 특유의 과장된 액션을 선보인 이덕화는 성격 배우로서 몸값을 높였다. 고등학교 교실 안팎을 무대로 잡은 문여송 의 영화는 판에 박힌 몇 가지 공식이 있다. 새침데기 여학생과 반항적인 남학생이 티격태격하면서 풋사랑을 키워가면 그들을 에워싼 부모와 교사들의 걱정거리가 끼여든다. 여학생은 백마 탄 기사 같은 남자를 기다리거나 불치병에 걸리고, 남학생은 경찰서를 들락날락할 정도로 말썽을 피우지만 밉지는 않다. 문여송은 '' 여고생 시리즈 '' 의 김응천 감독, '' 얄개 시리즈 '' 의 석래명 감독과 트리오를 형성하여 < 우리들의 고교시대 > ( 1978 ) 라는 옴니버스 영화도 만들었다. 하이틴 영화가 양산된 까닭은 제작비가 적게 드는 데다 당국의 서슬퍼런 검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평론가로서 필봉을 날리던 하길종 감독은 하이틴 영화들을 비판대에 세웠다. ' 문여송 의 < 정말 꿈이 있다구 > 와 김응천 의 < 푸른 교실 > 이 그럭저럭 볼 만했고, 나머지 작품들은 한결같이 얄팍한 감상주의로 포장된 상식 이하의 활동사진이다. 이들 하이틴 영화의 일시적인 붐은 불황에서 헤어나려는 우리 영화인들의 열띤 노력의 하나였지만, 질적 수준을 높이지 못한 채 장사꾼들의 목적물로 타락함으로써 그 본래의 참뜻도 평가받기가 어렵게 되었다. ' 6편의 하이틴 영화를 2년에 걸쳐 쏟아낸 문여송 감독이 변신을 꾀한다. 이정호의 중편 소설 < 길 > 을 각색한 < 아스팔트 위의 여자 > ( 1978 ) 로 성인층 겨냥에 나선 것이다. 이 영화의 캐릭터와 상황 설정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대표작 < 길 > 을 닮았다. 가수의 꿈을 가진 소녀 남순 ( 김영란 ) 은 젤소미나처럼 좀 모자라면서 순진하다. 카메라는 떠돌이 약장수 ( 백일섭 ) 를 무작정 따라 나서는 그녀가 도시 또는 문명을 상징하는 아스팔트에 오르기까지 향수를 자아낼 만큼 아련한 한국의 늦가을 풍광을 선사한다. 남순은 약장수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방황하다 닥터 신 ( 신성일 ) 의 가정으로 들어간다. 남순이 서서히 악녀로 변하는 과정에서 문여송 의 연출은 이전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미학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얼핏 김기영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여인의 이상 심리와 남자의 강박증이 맞물리는 시퀀스가 경쾌하고 더러는 섬뜩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약장수가 느닷없이 등장하는 후반부터 드라마는 작위성을 드러내면서 삐그덕거린다. 재미와 의미를 모두 확보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너무 자주 어수선해지는 게 흠이지만, 정신 장애를 일으킨 남순이 햇빛 쏟아지는 아스팔트 위를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감독의 세태에 대한 발언으로 읽힌다. 문여송 감독은 이른바 '' 문예영화 '' 쪽으로도 눈을 돌려 김유정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 산골 나그네 > ( 1978 ) 를 연출한다. 두메산골을 배경으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떠꺼머리 총각 ( 백일섭 )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낙네와 ( 김보미 ) 와의 결혼에는 성공하지만 결국 낭패를 당하다는 내용인데, 산골 풍경은 빼어나게 보여준 반면 나그네의 비밀스런 심상 풍경은 제대로 잡아내지는 못했다. 김유정 문학이 지닌 해학의 깊이와 토속어의 짜릿한 맛을 살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 영화다. 사실, 1년에 4편의 영화를 잇달아 연출한다는 것은 감독의 피로감과 졸속 제작의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 독신녀 > ( 1979 ) 는 전병순 의 동명 소설에서 한 대목만을 차용했다. 여자가 아이를 낳겠다는 남자에게서 완전한 씨를 찾아다니는 부분을 끌어들였는데, 독신녀 ( 김영란 ) 의 지독스런 추적이 관객에게 황당하면서도 엉뚱한 재미를 맛보게 했다. 문여송 의 원작 소설에 대한 집착은 아내인 김이연 의 단편 소설 < 환녀 > 를 각색한 < 세번 웃는 여자 > ( 1980 ) 로 이어진다. 말괄량이 처녀와 성불구자인 건축회사 사장과 젊은 화가를 주요 인물로 설정한 이 작품은 원작의 제목대로 꿈 속에서 본 것 같은 여인과 현실에서 만난 여인의 괴리감에 연출의 초점을 맞춰나간다. 기승전결이라는 드라마의 틀을 깨면서 새로운 스타일을 구사하려는 문여송의 노력은 평가할 만하지만, 작품 전체에서 치정극과 실험극이 뒤엉킨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신인 여배우를 찾아내는 문여송 감독의 능력은 탁월하다. 임예진 과 김영란 을 스크린의 샛별로 키워낸 문여송은 이번엔 최선아 라는 신인을 발굴하여 1983년 < 사랑 만들기 > 와 < 짧은 포옹 긴 이별 > 에 계속 주연으로 기용하면서 가능성을 타진한다. 두 작품은 '' 진짜 시리즈 '' 의 업그레이드라고 불러도 좋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문여송의 이전 하이틴 영화처럼 단순한 사랑 놀이에 그치지 않고 일그러진 현실의 이면을 과제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은 작품들이다. 문여송 작품답게 시퀀스마다 풋풋함과 잔재미로 가득하지만, 작위성과 상투성이라는 고질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재간둥이 대학생 이규형 이 시나리오를 맡은 < 사랑 만들기 > 는 미술대 여학생과 작가를 지망하는 국문과 남학생의 발랄한 사랑 만들기를 보여준다. 전반부는 럭비 경기, 강의실, 술집 등 대학생활의 밝고 건강한 면을 스케치했고, 후반부는 동거생활에 들어간 두 주인공의 불안과 좌절을 파고든다. 수재로 알려진 어느 대학생의 투신 자살 사건을 전, 후반을 연결하는 고리로 사용하는 재치가 돋보인다. 일기장을 읽어주듯 내레이션으로 풀어가는 < 짧은 포옹 긴 이별 > 엔 불치병에 시달리면서도 삶의 의욕을 잃지 않는 소녀와 그를 사랑하는 친구, 가족의 이야기가 담긴다. 두 작품 모두 아서 힐러의 < 러브 스토리 > 를 곁눈질했다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겠으나, 확실한 것은 문여송 의 연출 감각은 젊은이들의 사랑을 다룰 때 더욱 싱싱해진다는 점이다. < 비황 > ( 1992 ) 은 자잘한 사랑의 이야기로 채워진 문여송 의 필모그래피에서 본다면 조금은 의외라는 느낌을 주는 영화다. 도자기 문화 속에 깃들어 있는 우리 선조들의 사랑과 한이라도 주제도 이채롭거니와 일본과의 합작이 불가능해지자 문여송 감독이 직접 제작에 나섰다는 점도 거론할 만하다. 누구보다 일본을 많이 이해하고 파악한다는 문여송은 일본 기업체와의 합작이 무산된 점에 대해 '' 모든 게 근시안적인 정책 때문 '' 이라며 당국에 직격탄을 날렸다. 서기원의 < 사금파리의 무덤 > 을 문상훈이 매만진 이 작품의 무대는 1920년 경기도 광주의 도자기 마을이다. 영화는 도공의 아들 창길 ( 이동준 ) 과 환장이의 딸 분례 ( 박현숙 ) 의 사랑으로 드라마의 큰 줄기를 만든 뒤 철사호문호라는 백자에 얽힌 조선인과 일본인의 갈등을 덧붙인다. 이런 주제일수록 고증이며 세팅이 철저해야할 터인데, 제작비가 모자란 탓인지 도자기를 비롯한 소도구의 허술함이 눈에 거슬린다.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여자 주인공이 겪은 파란만장한 사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문제까지 담아보려는 의욕은 대단하지만, 큰 것을 너무 많이 얘기하려다 작은 것조차 놓치고 만 영화라는 인상을 남긴다. 군데군데 짜깁기한 아픔으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는 어렵다. 휴식에 접어든지 10년이 지나 어느덧 고희에 들어선 문여송 감독이 인간의 깊고 그윽한 향기가 스며나오는 작품으로 영화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하기를 기대한다. 박평식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32년 6월 8일 제주도 한림 출생 1935 일본 이주 동경대학교 예술학부 졸업 1963 귀국 1966 < 간첩작전 > 데뷔 작품명 1966 간첩작전 1968 부인행차 1976 진짜진짜 잊지마 / 정말 꿈이 있다구 / 진짜진짜 미안해 1977 처녀의 성 1978 우리들의 고교시대 / 아스팔트위의 여자 / 당신만을 사랑해 / 산골나그네 1979 로맨스 그레이 / 독신녀 1980 그때 그사람 / 미워할 수 없는 너 / 세번 웃는 여자 1983 당신은 나쁜 사람 / 연인들 / 짧은 포옹 긴 이별 1984 여자의 성 / 입을 연 석류 1985 도오꼬 안녕 1986 그대 원하면 1988 잡초들의 봄 1991 비황 등 30여 편 수상 경력 1977 < 처녀의 성 >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특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