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커플
- 감독
- 김상호
- 제작년도
- 2006
- 출연
- 오지호, 한예슬, 김성민, 박한별, 김광규, 김정욱, 이미영, 정수영, 이상이
<폭싹 속았수다> 중 (사진: 한겨레 /© 넷플릭스) 올 한 해 TV와 OTT를 통해 공개된 시리즈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관심을 끌어모은 화제작부터, 스쳐 지나갔지만 돌이켜 볼 만한 문제작들까지 정리합니다. 며칠 전, 12.3 비상계엄 이후 1년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눈물이 났다. 그 시간을 통과할 때는 미처 감각하지 못했는데, 지나고 보니 우리가 모두 참으로 위험한 시간을 지나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내란 사태를 수습하느라 사회 전체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정치뿐 아니라 경제 상황 역시 불안정했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많은 이들이 ‘각자의 내란’을 견뎌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2025년의 시리즈에는 유난히 어려운 시절을 버티며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 그중에서도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버틴 사람들의 이야기 올해 가장 많은 이들이 언급한 드라마는 < 폭싹 속았수다 >(김원석/넷플릭스)가 아닐까? <폭싹 속았수다>는 거친 바다를 온몸으로 견뎌낸 해녀, 광례( 염혜란 )에게서 시작한다. 광례와 딸 애순( 아이유 · 문소리 ), 손녀 금명(아이유)으로 이어진 모녀 3대는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며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파도에 맞선다. 인생을 사계절에 빗댄 이 이야기에는 해녀 공동체의 연대, 애순과 관식( 박보검 )의 풋풋한 사랑, 그리고 모두의 생애를 지탱한 가족애가 가득 담겼다. <폭싹 속았수다> 속 인물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삶의 과제를 감당하며 버텼다면, <태풍상사>(이나정, 김동휘/tvN)의 태풍( 이준호 )은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경제적 폭풍을 견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불어닥친 회사의 위기 앞에서 태풍은 직원들을 신뢰하며 열정적으로 회사를 지키고 살려낸다. <태풍상사>는 마치 ‘국난’을 극복하듯 회사를 되살리는 이야기인 동시에 “가장 평범한 곳부터” 도려내졌던 IMF 시대를 살아낸 보통 사람들의 얼굴도 놓치지 않는다. 태풍이 청년 사업가로 성장하던 IMF 시기, 낙수( 류승룡 )는 치열한 취업 전쟁을 뚫고 대기업에 입사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어느새 명예퇴직 대상자가 된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조현탁/JTBC)는 사회의 중심축에서 밀려난 중년 세대의 현실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사회적 ‘쓸모’가 사라졌다는 자각과 거듭되는 실패 앞에서 낙수는 모멸감과 상실감, 불안 속에서 흔들리며 우울과 공황을 겪는다. 이 시리즈는 중년의 위기를 유머와 애잔함으로 감싸며, 낙수가 가족의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상) <폭싹 속았수다> 중 (사진: 한겨레 , PD저널 / © 넷플릭스) (하) <태풍상사>,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중 (사진: tvN , JTBC ) 여성들의 세계, 더 넓어지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시리즈 너머, 여성을 생애사적·사회적 이야기로 확장한 시리즈도 눈에 띄었다. < 은중과 상연 >(조영민/넷플릭스)은 은중( 김고은 )과 상연( 박지현 ), 두 여성의 30년에 걸친 관계를 따라가며, 서로를 사랑하지만 미워하기도 하고,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배신도 하는 등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들의 복잡한 관계를 밀도 있게 그린다. 그중에서도 상연을 단순한 ‘빌런’이 아니라 결핍과 외로움이 빚어낸 인물로 끝까지 이해하려는 시선이나, 성소수자인 상학( 김건우 )의 죽음과 안락사를 선택한 상연의 죽음을 “내가 있어도 되는 세상”을 갖지 못한 존재들의 죽음으로 연결하는 감각이 인상적이었다. <미지의 서울>(박신우, 남건/tvN)은 일란성 쌍둥이, 미지와 미래( 박보영 )의 ‘삶 교환’을 중심으로 청년 세대의 불안과 고립, 직장 내 괴롭힘, 비정규직 차별, 장애와 성소수자 문제를 복합적으로 짚는다. ‘마론제과’ 무기계약직 여성들의 이야기 <달까지 가자>(오다영, 정훈/MBC)와 아파트에서 발생한 사건을 추적하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살롱 드 홈즈>(민진기, 정현남/ENA)는 가족의 확장된 형태로서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를 보여준다. < 피라미드 게임 >(박소연/TVING)과 < 선의의 경쟁 >(김태희/U+TV)은 여고 내 계급과 폭력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미지의 서울>, <폭싹 속았수다>, <견우와 선녀>(김용완, 정우식/tvN), <첫, 사랑을 위하여>(유제원, 함승훈/tvN) 등 모녀 관계를 통해 여성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조명한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현대극뿐 아니라 시대극 역시 여성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옥씨부인전>(진혁/JTBC)은 조선시대 노비로 태어나 양반 마님이 되어 ‘변호사’로 활약한 구덕이( 임지연 )를 중심으로 계급, 여성 차별, 성소수자, 아동·약자 착취 문제 등을 녹여내 ‘조선판 인권 선언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 애마 >(이해영/넷플릭스)는 1980년대 충무로를 배경으로, 에로 영화 전성기의 포문을 연 영화 < 애마부인 >(정인엽, 1982) 촬영기를 극중극 형태로 재현하며 ‘남성적 응시’에 맞선 여성들의 연대를 메타 비평적으로 풀어낸다. 여성의 성적 욕망을 부정하던 1980년대 시골 마을에서 성인용품 판매를 하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인 <정숙한 세일즈>(조웅, 김미진/JTBC)와 1990년대 버스 안내양들의 우정을 담은 <백번의 추억>(김상호/JTBC)은 그간 주목받지 못한 여성의 역사를 복원해, 가부장 사회에서의 여성 억압의 문제, 노동과 우정의 연대기를 보여준다. (상) <은중과 상연>, <미지의 서울> 중 (사진: MBC /© 넷플릭스, tvN ) (하) <애마>, <백번의 추억> 중 (사진: 넷플릭스 , JTBC ) ‘보편성’이라는 이름의 한계 이렇게 여성들의 이야기가 다양하고 폭넓게 등장했음에도 ‘가족’ 바깥을 상상하게 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폭싹 속았수다>를 여성 서사로도 볼 수 있지만, 결국 부모 세대와 가족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또한 낙수의 아내 하진( 명세빈 )이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지만, 시리즈는 결국 “김부장 이야기”, 즉 가장을 이해하고 북돋우며 가족애로 회복에 이르는 데 집중했다. <태풍상사>도 마찬가지다. IMF로 일자리를 잃거나 불안정한 노동에 배치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여주지만, 이런 이야기는 로맨스 서사에 묻히고 만다. 이런 한계에도 이 시리즈들은 ‘보편성’을 가진 좋은 이야기로 회자됐다. K-드라마의 보편성이란 여전히 ‘아버지’ 중심의 가족 서사라는 게 재확인된 셈이다. 이런 특징은 결국 세대, 노동, 차별 등 사회 구조적 문제로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른바, ‘여성 서사’라 불리는 드라마에서도 극소수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가족 다양성, 가족 너머의 서사를 온전히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흐름을 어떻게 봐야 할까? 『페미니즘 리부트』(2017)에서 영화평론가 손희정이 IMF 이후 영화의 여성 재현에 관해 지적했듯, IMF 이후 또 다른 위기의 시대를 통과하는 지금, 이런 흐름은 가족이라는 안전하고 효율적인 이데올로기를 작동시켜 ‘위기의 시대’를 손쉽게 통과하려는 징후가 아닐까.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태풍상사> 중 (사진: JTBC , tvN ) 그런데 흥미롭게도, 가족과 연대로는 포착되지 않는 또 다른 층위의 이야기들도 있었다. 가족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폭력, 사회가 방치하고 묵인해온 구조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이다. 그 ‘사이코패스’들은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올해 시리즈의 또 다른 흐름은 < 하이퍼나이프 >(김정현/디즈니+)의 소시오패스 의사 세옥( 박은빈 )을 비롯해 사이코패스 성향의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단지 반사회적 인물로 등장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그 재현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 질문했는가에 있다.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변영주/SBS)의 연쇄살인범 이신( 고현정 ), < 친애하는 X >(이응복, 박소현/tvN)의 사이코패스 아진( 김유정 ), < 당신이 죽였다 >(이정림/넷플릭스)에서 남편을 살해하는 희수( 이유미 )와 그의 친구 은수( 전소니 ), < 자백의 대가 >(이정효/넷플릭스)의 모은(김고은) 등 폭력을 행하거나 살인을 저지른 반사회적 여성들을 통해 아동 학대, 가정폭력, 성폭력을 묵인하는 가부장제와 권력의 문제를 드러낸다. 이 시리즈들은 반사회적 선택이 개인의 선택이나 비정상적 일탈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산물임을 보여줬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은 초반의 기세와는 달리, 후반부에는 장르적 쾌감이나 개인에 대한 처벌로 귀결되며 구조 비판의 힘을 잃었다. 그 결과 폭력은 사회의 문제로 제시되지만, 변화의 책임은 다시 개인의 파멸이나 응징으로 환원된다. 2010년대 이후 빈번하게 등장한 ‘사적 복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이다.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 <자백의 대가> 중 (사진: SBS , 넷플릭스 ) 결국,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2025년 시리즈를 회고하다가 ‘돌봄’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폭싹 속았수다>의 해녀 공동체가 서로를 살피고, <태풍상사>의 태풍이 직원들을 신뢰하며 회사를 지켜내고,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에서 가족이 함께 위기의 시간을 견디고, < 다 이루어질지니 >(안길호/넷플릭스)에서 마을 사람들이 사이코패스인 가영( 배수지 )을 사랑으로 키워내는 것. <미지의 서울>에서 미래가 딸기 농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신을 추스르고, <첫, 사랑을 위하여>에서 골수암에 걸린 효리(최윤지)가 꽃 농사를 짓는 보현(김민규)을 만나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고, <폭군의 셰프>(장태유/tvN)에서 지영( 윤아 )이 음식으로 사람을 살리고, < 내가 죽기 일주일 전 >(김혜영, 최하나/TVING)에서 이미 죽어 저승사자가 된 람우( 공명 )가 생기를 잃고 사는 첫사랑 희완( 김민하 )를 살리고, <견우와 선녀>에서 곧 죽을 운명에 처한 견우( 추영우 )를 무당인 성아( 조이현 )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살리는 것. 이 모든 장면의 공통점은 어떤 대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이야기라는 점 아닐까? 그래서인지 올해 시리즈에는 유난히 식물을 키우는 설정이 자주 등장했다. 식물을 정성껏 가꿀 뿐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서로의 곁을 지켰다. 올해 시리즈는 ‘죽이는 것’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살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연대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가족주의라는 안전한 이데올로기에 기대고, 그것을 넘어서려 애쓰면서 2025년 시리즈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선택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문제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돌봄과 버티기만으로는 구조를 바꿀 수 없다. 가족 간의 사랑을 앞세우고, 개인의 파멸로 끝나는 응징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흐릿하게 만들고,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상상력의 시계를 좁게 한다. <애마>에서 희란( 이하늬 )과 주애( 방효린 )가 “각자의 링” 위에서 싸우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세계로 나아갔듯, 지금 우리에게는 낡은 세계로 회귀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앞당기는”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미지의 서울> 중 (사진: tvN ) 오수경(드라마평론가) l 인간과 사회에 관심이 많아 문학을 전공했고, 신앙인으로 살고 있으며, 드라마를 들여다본다. 여러 매체에 칼럼 기고. 『을들의 당나귀 귀 』(2019) 공동 집필, 『드라마의 말들 』(2022) 집필.
지난여름 4편의 영화가 개봉했다. < 군도: 민란의 시대 >( 윤종빈 ), < 명량 >( 김한민 ), < 해무 >( 심성보 ), < 해적: 바다로 간 산적 >( 이석훈 )가 그것이다. <명량>이 17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최종 승자가 되었지만, 나머지 세 작품 역시 관객은 물론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2014년 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궜다. <영화천국>이 이번 호에서 주목한 영화는 심성보 감독의 <해무>다. 2014년 산세바스찬 영화제에서 본의 아니게 4박 5일간 동거(?)한 뒤 끈끈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심성보 감독과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이 말하는 <해무>를 만나보자. 연극 <해무>와 영화 < 해무 > 달시 파켓(이하 ‘달시’) 영화 < 해무 >는 동명의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먼저 연극을 영화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와 원작과 어떤 차별성을 갖고 시작했는지 묻고 싶다. 심성보 (이하 ‘심’) 처음 연극 <해무>의 영화화를 제안받았을 때 이미 연극은 끝난 상태였다. 그래서 연극을 직접 보진 못했고, 캠코더로 찍은 기록용 영상을 볼 수 있었다. 보고 나니 이야기가 무척 매력적이더라. 평범한 사람들이 우연한 계기로 범죄에 휘말리게 되고, 그 이야기가 형사나 피해자의 시선이 아닌 그들 자신의 시점으로 진행된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더불어 메인 플롯을 사랑으로 끌고 나가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 해무 >를 만들기로 결심했는데, 연극을 영화화할 경우 등장인물 간에 갈등 관계가 조금 모호하게 보일 수 있다고 느껴졌다. 그대로 옮길 경우 관객들이 원하는 내러티브의 2/3 지점에서 끝날 것 같다랄까. 나머지 1/3을 채우기 위해선 선원들의 갈등이 좀 더 분명해야했다. 그래서 원작에서 무척 강했던 선원들의 공동체 의식을 조금 저하시키고, 개개인의 성격을 부각했다. (‘달시’ 반대로 원작 연극에서 꼭 살리고 싶었던 부분은 어떤 곳이었나?) 연극의 특성상 막이 전환될 때 암전되고 사운드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 막과 막 사이의 여백이 무척 영화적으로 다가왔다. 영화에서 그 사이를 이미지로 보여주고 싶었고 그 장면을 상상으로 만들어냈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들은 우연치 않게 연극의 막과 막 사이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예컨대 밀항자가 넘어오는 장면도 연극에선 암전된 채 발소리와 비명 소리로 처리되었고, 마지막에 배가 침몰하는 장면도 연극에서는 “가자, 가자”라는 대사만 반복되고 실제로 침몰 자체를 보여주진 않았다. 그런 연극에서의 암전을 영화에 차용했다. 달시 이 영화가 데뷔작이지만, 이전에도 사랑에 대한 시나리오를 꽤 많이 써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감독의 취향으로 봤을 때 < 해무 >는 결이 다른 영화가 아닐까 한다. 물론 동식( 박유천 )과 홍매( 한예리 )의 러브 라인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범죄, 그로 인한 갈등 등 여러 가지 포인트가 있는 영화다. 심 동의한다. 물론 그 동안 작업했던 시나리오들은 분명 < 해무 >와 다르다. 사실 이 영화는 처음에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한)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아마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각본에 참여한 이력 때문에 영화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범죄에 관해 잘 다룰 것이라 판단한 것 같다. 그리고 남녀에 관한 시나리오를 계속 써왔다는 것도 봉준호 감독이 잘 알고 있어서 동식과 홍매의 러브 라인도 잘 표현할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남녀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마 많은 여자를 만나보질 못해서 그런 것 같다.(일동 웃음)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우디 앨런 감독의 전성기 작품을 보고부터다. 전성기 그의 작품 대부분이 남녀 이야기지 않나. 거기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달시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제작하면서 어떤 주문을 했나. 심 봉준호 감독은 당시 < 설국열차 >(2013) 제작 때문에 체코에 있어서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단, 기획 단계에서 봉준호 감독은 < 해무 >의 큰 원칙을 조언해줬는데, ‘동식과 홍매의 사랑을 끝까지 순수한 감정으로 가져갔으면 좋겠다’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그리고 거의 유일한 원칙이었다. 실제로 캐릭터를 구축할 때 그 원칙을 새기고 시나리오를 썼다. 항구, 그리고 어선이라는 공간적 배경 달시 영화는 IMF외환위기 직후를 다루고, 여수를 배경으로 촬영했다. 시간과 공간 설정에서 특별히 염두에 둔 점이 있나. 심 원작은 시간을 2000년대 초반으로 설정했다. 영화는 그보다 조금 빠른 1990년대 후반 IMF 시절로 바꿨는데, 조사 과정에서 IMF외환위기 당시 어선의 수가 급격하게 줄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은행 이자가 높았기 때문에 선주들은 어선을 처분하고 보상금을 받은 뒤 그 돈을 은행에 넣어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어선 운영으로 버는 수입보다 은행 이자수익이 더 좋았다더라. 그래서 당시 많은 선주가 배를 처분했다. 하지만 선주가 배를 폐선시키면 선장과 선원들은 순식간에 실직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 해무 >와 연결했다. 선장이 왜 밀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선장이 왜 그토록 배를 소중히 생각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배경이 된 공간은 여수의 조그만 항구인데 항구의 규모가 너무 크면 관객의 시선이 분산될 것 같아서 크지 않은 항구를 조사하던 중 여수 항구가 적절하다고 판단해 선택했다. 달시 < 해무 >의 이야기는 대부분 어선에서 전개된다. 더불어서 영화의 중반 이후부터는 등장인물도 많지 않다. 한정된 공간과 그 안에 있는 제한적 인물. 이 두 가지는 분명 이야기를 진행하고 표현하는 데 쉽지 않은 장치다. 심 큰 어려움은 없었다. 우선 전진호라는 배 안에서 이야기의 대부분을 소화해야 하지만 사실 이 배는 세상의 축소판이라 볼 수 있다. 그 안의 제한적 인물들 역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군상의 축소판이다. 따라서 배우들에게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해 이해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선장은 ‘배’, 동식은 ‘사랑’, 창욱은 ‘여자’ 이런 식으로 키워드를 정리했는데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을 매우 잘 소화해줬다. < 해무 >를 이끄는 또 하나의 힘, 주조연 배우들 달시 배우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 해무 >는 소재가 독특하고, 구성이 탄탄해서 개봉 당시 비평가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은 바있다. 여기에 더불어 영화를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 바로 배우들이었다. 김윤석 을 비롯해 문성근 , 이희준 , 김상호 등 이른바 연기파 배우들이 포진해 있고, 영화 출연은 처음이지만 드라마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박유천 과 독립영화로 연기력을 탄탄히 다져온 한예리 가 나온다. 누구 하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웃음) 먼저 선장, 김윤석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염두에 둔 배우인가. 심 그렇다. 선장 철주 역은 김윤석 이 아니면 맡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영화를 안 봤다면 < 해무 >의 김윤석이 이전에 맡았던 캐릭터와 유사할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개봉 당시 관객들로부터 김윤석이 이전 작품에서 보여준 인물들과 다르다는 반응을 많이 받았다. 물론 특정 장면에서 이 배우의 이전 작품들이 떠오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힘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시나리오 단계에서 김윤석을 결정한 결정적인 이유는 ‘기관실에서 기관장 완호( 문성근 )와 대립하는 신’을 쓸 때였다. 여기서 완호를 죽이고 선장이 눈물을 글썽이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그 장면을 쓰는 순간 김윤석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달시 그 기관실 장면이 극 중에서 가장 에너지가 폭발하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오랜 기간 서로 의지하며 살던 선장과 기관장의 갈등이 최고조가 되는 신인데,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그 장면에 서 관객의 몰입도가 가장 높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김윤석 과 문성근 이 가진 힘이 아닐까 한다. 심 김윤석 과 문성근 의 연기 대결이기도 하다.(웃음) 두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가 있었다. 사실 문성근이 맡은 완호가 애초 생각했던 캐릭터와 가장 달라진 인물이다. 완호라는 인물을 구축할 때 문성근 선배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애초의 시나리오에서 완호는 늙고 불쌍한, 그냥 짐만 되는 인물이었다. 문성근 선배에게 가장 고마운 것은 극 중 성격이 급격히 변하는 캐릭터의 중심을 잘 잡아준 점이다. < 해무 >에서는 사건이 일어나고 인물의 성격이 모두 변한다. 그중에 가장 확실히, 그리고 빨리 변하는 인물이 바로 완호다. 자칫하면 급작스레 이상 행동을 보이는 완호가 관객에게 이질감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완호가 어느 순간 정신줄을 놓아야 배의 상황이 보다 리얼하게 보일 것 같았다.(일동 웃음) 그리고 그 정상과 비정상을 넘나드는 선을 문성근 선배가 잘 잡아주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이신을 김윤석 과 문성근의 힘이라고 표현했는데, 동의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신은 큰 부담이 없었다. 오히려 이들을 지켜보는 동식과 홍매가 관객에게 어떻게 보여질 것인지에 대해 걱정했다. 달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웃음) < 해무 >에서 큰 축을 담당하는 것이 동식과 홍매의 사랑이다. 박유천 과 한예리 에 대해 말해달라. 심 동식의 경우, 연극보다는 어리고 뱃일도 갓 시작한 막내 선원 이미지를 생각했을 때 20대 중.후반 배우를 캐스팅해야 했다. 박유천 을 만났을 때 동식 역할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과 열의가 무척 많아 인상 깊었다. 그것이 그가 가진 팬이나 이전 작품을 고려하지 않고 캐스팅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리고 박유천은 가수 출신 연기자 중에서도 꽤 독특한 이미지다. 얼굴에서 묘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고. 다만 영화는 처음이고, 첫 주연작이라는 점, 그리고 경험 많은 배우들과 끊임없이 부딪쳐가며 연기해야 하는 것이 걱정되긴 했다. 하지만 그 바쁜 박유천이 영화를 위해 스케줄을 통째로 비워둘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그런 성실함 때문에 신인상도 많이 탄 게 아닐까 한다. 뿌듯하다. 한예리 의 경우 이미 유사한 역할을 몇 번 했기 때문에(웃음) 나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배우였다. 개인적으로 배우는 목소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한예리의 중저음 목소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한예리는 갑자기 스타가 된 게 아니고 독립영화부터 차근차근 밟아왔기에 여배우로서 다소 힘들 수 있는 수중촬영도 잘 견뎌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선과 악이 모호한 세상의 축소판, 전진호 달시 < 해무 >는 악인이 없는 영화다. 모든 이야기에는 갈등이 있는데, <해무>의 갈등은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는 점이 눈여겨 볼 만하다. 심지어 선주도 악인이라기보다 현실에 충분히 있을 법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심 실제로 영화 개봉 후 관객에게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다.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주 건실하고 평범한 가족이 열심히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세입자를 들인다. 그런데 방세가 올라 전세 보증금을 크게 올리거나 내보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현실적으로 공감은 되지만 세입자 입장에서 집주인은 잔인한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나. < 해무 >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어떤 관점에선 잔인하고 어떤 관점에선 연민을 느낄 수도 있다. 달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연극에는 없던 동식이 등장하는 엔딩이 있다는 것이다. 심 그렇다. 광기에 휩싸인 선원들만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질문했을 때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동식과 홍매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었는지 아닌지는 재단할 수 없고, 관객이 판단할 몫이지만 결과적으로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업영화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주인공이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집착한 동식이 살아남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엔딩이 판타지로만 치부될 것 같아 적당히 현실감을 섞었다. 달시 하와이 국제영화제 등 다수의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현지의 반응은 어땠나. 심 신인 감독이라 그런지 특별한 반응을 기대하거나 예상하진 못했다. 하지만 외국 관객 역시 이야기를 따라가고 한국 관객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놀라웠다. 재미있는 것은 스페인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는 것이다. 유럽 사회에서 밀항은 큰 사회적 이슈라고 한다. 그 사회에선 밀항 사건이 1년마다 한번씩 크게 일어나고 사건의 내막을 파헤쳐보면 < 해무 >보다 훨씬 더 잔혹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선원들의 선택에 대해서 한국관객보다 더 깊이 공감하더라. 달시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 심 원래 계획이라는 것은 변하라고 있는 것이다. 두 달 전 인터뷰했을 때도 같은 질문을 받았는데 지금은 그때와 다르게 또 계획이 변했다.(일동 웃음) 현재는 일본 소설에 관심을 갖고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계획은 늘 변하지만 < 해무 >를 만들고 한 가지 확실한 계획이 생겼다. ‘평범한 사람’ ‘범죄’ ‘사랑’. 이것이 내 영화의 키워드가 된 것이다. 큰 틀에서 이러한 맥락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박영규 의 눈이 익스트림 클로즈 업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흐르는 내레이션. “본시 제비란 봄과 따뜻함을 의미하는바, 외로운 여성에게 춤으로 위안을 주고 그 대가를 받는 직업인데 요즘 본질을 잃은 제비가 있어 가정파괴마저 불사하니 참으로 큰일입니다.” 익스트림 클로즈 업과 오프닝 타이틀 < 신사동제비 >가 개봉된 1989년 11월은, 1990년에 있을 노태우의 ‘범죄와의 전쟁’을 목전에 두던 때였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집창촌 집중 검문을 통해 실종 처리되었던 많은 여성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인신매매에 대한 괴담이 절정에 달하던 때였다. 남자는 봉고차에 끌려가 팔다리가 잘려 앵벌이가 된다는, 여자는 온갖 수모를 당하고 집창촌에 팔려간다는 등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들렸었는데, 결국 수사를 통해 괴담이 완전한 허구가 아니었음이 밝혀진 셈이다. 이러한 인신매매의 주범으로는 조직폭력배들이 주로 지목된 까닭에 그들을 소재로 하는 에로영화와 다찌마리 영화가 상당수 제작되었지만, 어릴 적부터 영화감독이 꿈이었다는 당시의 톱스타이자 영화광(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안봐도 비데옵니다’의 박세민은, ‘제비’를 소재로 한 인신매매 영화를 제작한다. 그것도 무려, 제비들을 질타하기 위해. 서두에 언급한 내레이션은 제비 도사 박영규 가 한 말이다. 그는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져 금품갈취와 인신매매를 일삼는 사파 제비들에게 진절머리가 나, 모든 것을 접어두고 산속에서 원숭이를 키우며 소일하는 은퇴한 제비왕이다. 아내( 원미경 )가 인신매매를 당해 실종된 상태에서 ‘아내는 제비에게 납치되었으니 제비가 되어야만 찾을 수 있다.’는 점쟁이의 말만 믿고 찾아온 동준( 강남길 )을 받아들여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던 댄스 중의 댄스, ‘세게하면 고통을 주고 살살하면 쾌락을 주는 급소댄스’를 가르친다. 제비 도사는 제비의 정도를 세우는 사업을 동준에게 맡기며 이를 위해 모아둔 ‘적금 통장’을 전달한다. “제비가 되기 위해선 신사가 되어야 한다. 신사가 곧 제비다. 신사동(同)제비니라. 자. 신사동에 가서 너의 실력을 뽐내 보거라.” 급소 댄스 전수 과정 적금 통장 전달 '실력을 뽐내 보거라' 이 부분은 이 영화의 제목이 왜 ‘ 신사동제비 ’인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1주년 결혼기념일 날 나이트클럽에서 파티를 연 동준과 미영 부부. 우연찮게 같은 클럽에 있던 제비들에게 타깃이 되어 납치된 미영(원미경)과 그녀를 찾기 위해 제비 도사를 찾아 ‘급소 댄스’를 전수받고 아내를 찾아 헤매는 동준( 강남길 )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나가고 있으니, 잠깐 열거를 해보자면 1. 미영을 납치한 제비들은 여자들이 쌓이자 ‘전국인매대회’(‘전국인신매매대회’의 준말이며, 식전 행사로 ‘먼저 간 제비 선배들에 대한 묵념’을 행하고 있다.)를 열고 전국의 포주들을 불러 경매를 한다. 2. 바다에 빠져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미영은 우연하게 잠수부들에게 구조되고, 도사의 외모를 가졌으나 스스로를 ‘이 시대 마지막 내시’라 칭하는 노인에게 ‘약간의 공격술’과 ‘폭발물 제조’를 배우게 된다. 미영은 묻는다. “할아버지는 취미가 뭐예요?” “오로지 폭발물 제조지. 내시가 된 것도 테스트를 하다가 그만...” 가엾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미영 3. 노인과 헤어진 미영은 람보 비슷한 옷을 입고 원수들의 사진을 아지트에 붙여놓고 하나씩 X표를 쳐가며 살해해 나가는데, 밑에는 붉은 페인트로 ‘여보! 용서해줘요!’라고 쓰여 있다. 4. 동준은 제비 도사가 키우는 원숭이를 약 올리다가 그를 원숭이로 오해한 사냥꾼들의 총에 얼굴을 맞게 된다. 위독한 상황에서 수술을 받게 되는데, 제비 도사의 집에 남아있던 유일한 사진인 나쁜 제비 보스, 박세민의 얼굴이 동준의 얼굴이라 오해 한 의사는 동준을 박세민의 얼굴로 성형해 버린다. 믿기지 않겠지만 동준은 원숭이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저 고릴라(!) 인형을 들고 원숭이 흉내를 내고 있었을 뿐인데, 사냥꾼들은 그를 원숭이로 오인해 사격해 버린 것이다. 이 정도만 봐도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아찔함이 몰려오지만, 일일이 열거할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인 개드립이 영화에 촘촘히 박혀있다. 당시 어린이 영화, 에로 영화에 대거 등장했던 개그맨들의 영화 진출로 기획되었던 탓인지, 정재환 , 정재윤 , 김상호 등 당시의 인기 개그맨들이 총출동하여 틈 나는 대로 본인의 유행어 캐릭터를 뽐내는 통에 이게 <유머 1번지> 녹화 본인지 영화를 보는 것인지 헷갈리기까지 할 지경이다. 영화가 이 모양인 까닭에, 과거의 자료를 뒤져본 들 이 영화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억지로 찾아보자면, “퇴폐조장 영화제목 여과장치 필요하다”라는 동아일보 기사에 언급되거나, “개그맨 탈 안방극장 러시”라는 제목의 경향신문 기사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사라져 가버릴 운명이었던 영화가 몇몇의 변태 영화팬들에게 알려진 것은, 하필 개봉 10주년인 1999년에 발표된 가수 유희열 의 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에 실린 한 편의 글 때문이었다. 스스로 비디오 가게의 협객이라 밝히고 있는 유희열은 어느 날 비디오 가게 아저씨에게 “제일 후진 걸로 주세요.” 라는 주문을 했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주인의 손에 들려있던 비디오 테잎이 바로... < 신사동제비 >였다는 것이다. 그는 인생의 영화로 < 토마토 공격대 >와 바로 이 <신사동제비>를 꼽았다. 과연 감성 변태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다. 유희열 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 재미있는 점은 또 있다.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사람은 ‘ 민성욱 ’이다. 민성욱...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싶어 찾아보니, 현재 전주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이며 백제예술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신 바로 그분이시다. 긴가민가할 것도 없다. 본인이 JIFF 블로그에 밝혀 놨으니까. 당시 인기몰이 중이던 ZAZ사단 (< 에어플레인 >, < 총알 탄 사나이 >)류의 코미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민성욱 (당시) 작가는 충무로 최고의 고료를 받고 < 신사동제비 >를 썼다고 한다. 제작사에서 내건 조건은 단 두 개. 아내가 인신매매 당해야 하며, 아내를 찾기 위해 남편이 제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본인의 우상(이라고 본인이 밝힌) 박세민 을 찾아가 감독직을 부탁했고... <신사동제비>는 완성된 것이다. (원글을 읽고 싶으신 분은 14회 JIFF 홈페이지를 가보시기 바란다.) http://goo.gl/1NopXM 이렇게 전사를 알아보니, < 신사동제비 >는 당대의 사회상을 베이스로 유행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버무려 최고의 흥행을 했어야 하는 영화였다. 하지만 검열과 제작사의 횡포로 영화 만들기의 어려움이 최고조에 달했던 80년대 말에 제작된 <신사동제비>는 해도 해도 너무한 몰골로 나타나, 그런 억압과 제한 속에서 비굴하게 타협하는 당대의 영화들을 의도적으로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괴작이 되고 만 것이다. 박세민 감독은 제비들에게 정도를 걸으라 영화로 일갈하고, 민성욱 (당시) 작가는 오우삼보다 무려 10년이 앞서 ‘페이스오프’라는 소재를 영화에 가져온 것으로 만족하며,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막 나가는 영화에 관객은 즐거우니 결국 제작사만 눈물을 흘린 것인가. 감독 박세민은 < 신사동제비 > 이후 에로영화 팬들 사이에 나름 회자되고 있는 조루증 환자의 고군분투기 <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 새벽까지 >를 2탄까지 찍고, 2000년 < 타가킹 >을 어려움 끝에 제작, 연출하지만 제작사에 뒤통수 맞고, 홍보사에 등짝스매싱 당한 뒤, 홀연히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개그맨 박세민은 최근 ‘냉장고를 녹이는 남자’라는 미묘한 수식어를 달고 재기의 청신호를 밝히고 있는 중이라 한다. 통장을 건내주는 제비왕의 자상한 눈빛 P.S : 올해 1월 박영규 는 영화 < 남자사용설명서> 출연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며 뜬금없이 “돈에 눈이 멀어 < 신사동제비 >에 출연했다. 후회한다.” 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가 알았으면 좋겠다. 강남길 에게 급소 댄스를 전수하던 당신의 강렬하면서도 온화한 그 눈빛과 제비들이 정도를 걷게 하는 사업에 쓰기 위해 초가집에 살며 어렵게 모은 적금 통장을 강남길에게 던져주던 그 알뜰한 자상함을 기억하는 팬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 글: 허경(정발산 영화거구) 강남길 원미경 박세민 박영규 감독 박세민 각본 민성욱 촬영 신옥현 개봉극장 서울극장, 롯데(서울) 개봉일 1989-11-04 관람인원 17,748(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