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하는 아들 병화야!
- 감독
- 김세환
- 제작년도
- 2008
강근식 구술을 통해 보는 1970년대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주목받고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분야는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과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등으로 대표되는 영상시대의 영화들일 것이다. 이들의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영화들로 197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스타일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인력의 구성을 통해 기존의 한국영화와는 구별되는 다양한 형식을 시도하며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림1)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포스터 (그림2)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포스터 특히 이 영화들은 1970년대 각광받기 시작한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1960년대와는 달라진 새로운 청년세대의 등장을 강조하였다. 한국영화에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매 시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50년대에는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서 이민이 연기한 춘호가 전쟁 직후 미국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아프레게르’ 세대를 보여주었고, 1960년대에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에서 신성일과 엄앵란이 연기한 두수와 요안나가 4.19 이후 새롭게 등장한 방황하는 ‘청춘’ 세대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들은 흥행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한국영화산업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별들의 고향>에서 안인숙이 분한 경아와 <바보들의 행진>에서 신인 신분으로 파격적으로 기용된 윤문섭, 하재영과 아역배우 출신의 이영옥이 연기한 병태, 영철, 영자는 이들 세대와는 또 다르게 구별되는 새로운 세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세계적인 청년문화의 중심에 놓여있던 히피 세대의 등장이었다.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의 음악을 담당했던 강근식이 “히피 감성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고, 서양의 그것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고 생각했다”고 해도 세계적인 유행은 다양한 대중문화의 흐름을 타고 한국의 콘텐츠에 녹아들었다. (그림3)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의 문오와 경아 (그림4)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의 병태와 영자 다양한 분야에서 새롭게 유입된 인력들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이 영화들의 이야기, 연출의 스타일 그리고 음악에서 대중문화를 향한 젊은이들의 열망에 부응하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강근식은 이와 같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에 합류한 대표적인 음악인이었다. 그는 일본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미국영화와 미국음악에 오롯이 영향을 받은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대중문화예술인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재즈와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영향을 받은 음악적 취향은 이들 영화를 동시대 세계적으로 유행한 영화와 음악 등의 대중문화 콘텐츠와 연관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을 만들어놓았다. 이렇듯 강근식을 비롯하여 당대 청년 세대에게 호응을 받은 소설가 최인호, 음악인 이장희, 송창식 등의 대중문화예술인들이 이장호, 하길종 감독 등과 협업으로 만들어낸 이 영화들은 특정 개인에 의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1970년대 대중의 열망을 가장 적확한 방식으로 보여준 대중문화의 결과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강근식의 프로필은 시대를 읽어내는 데 매우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지점을 제시한다. 청소년 시절, 역사의 큰 분기점인 4.19와 5.16을 겪고, 1960년대 중후반에는 미국음악에 심취해 학내 밴드로 음악활동을 시작하고, 1970년대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음악살롱에서 프로 음악인으로 성장하며 상업영화와 상업광고음악계까지 진출한 그의 음악 프로필은 1960~1970년대 변화하는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의 흐름까지 살펴보는 데 일조한다. 특히 1970년대 TV산업의 확장과 성장으로 동반 성장한 광고산업과 이에 따른 하위문화의 번성이 기존의 한국영화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가늠해보는 데 유용한 구술이기도 하다. 강근식의 구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1970년대 대중문화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매체의 넘나듦’이다. 이 시기 영화와 TV 그리고 공연이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기존의 무대와 영화의 영향관계 내에서 활동한 기성세대와는 또 다른, 새로운 유형의 멀티 엔터테이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소설가 최인호의 영화작업이 그러하며 (최인호는 자신의 원작이나 각색 영화에 항상 카메오 출연을 하기도 했으며 <걷지말고 뛰어라>(1976)를 직접 감독하기도 했다), 강근식을 비롯한 이장희, 송창식 등의 음악인들 또한 본업인 음악작업 외에도 영화음악과 광고음악을 넘나들면서 음악적 영향력을 확장했다. 이것은 영화사적으로는 TV 산업의 성장으로 기존의 한국영화산업이 급격히 쇠퇴한 단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매체의 경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세대들이 등장함으로써 매체 간의 영향이 다각화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따라서 밴드음악과 영화음악 그리고 광고음악이 모두 포괄되어 있는 강근식의 구술은 1970년대의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그림5)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최인호 출연 장면(아래 왼쪽) ‘평생 음악인’ 강근식의 음악이야기 이 부분은 『영화천국』Vol. 60에 실린 「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청춘의 음악 만들어낸 영원한 청년 음악인」을 수정·보완했다. 강근식은 1946년 평양 출생으로 한국전쟁 때 월남해 탄광촌인 강원도 상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오락거리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환경에서 기타를 치던 형님들과 나무에 그린 피아노 건반으로 연습하는 누이를 보며 음악을 배웠다. 가수 활동을 하던 삼촌 손인호는 때때로 악극단 활동에 얽힌 무대 이야기를 해주었다. 변변한 악기 하나, 제대로 된 음반 한 장 없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둘러싸여 생활한 덕에 그는 평생 음악을 업으로 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그림6) 홍대강당에서 이루어진 5인조 밴드 홍익캄보의 첫 공연. 왼쪽에서 두번째 기타연주자가 강근식. (그림7) 밴드 홍익깜보 시절 신입생 환영회. 가운데 기타연주자가 강근식 홍익대학교 도예과 재학 시절 학내 밴드인 홍익 캄보의 기타리스트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강근식은 ‘TBC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페스티벌’에서 수상하며 본격적인 음악인의 길로 들어섰다. 수상 후에는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음악프로그램 <TBC 쇼쇼쇼>에도 출연할 만큼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후 1970년대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다양한 음악의 산실이라 부를 수 있는 오리엔트프로덕션 소속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이장희와 동방의 빛>, <조동진>, <현경과 영애>를 비롯한 다수의 음반 작업에 참여했다. <이장희와 동방의 빛>의 기타리스트로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공연을 할 때는 디자이너 앙드레김이 직접 무대의상을 제작해줄 정도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림8) TBC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페스티벌 공연 사진. 2회 연속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당시에는 무대 모니터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밴드 공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림9) <쇼쇼쇼> 출연 사진. 왼쪽부터 이장희, 진행자 곽규석, 강근식 (그림10) <동방의 빛> 공연 사진. 앙드레 김 선생이 맞춰준 옷을 맞춰입고 공연하였다. 이후 강근식은 1970년대 변화하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 새롭게 등장한 음악인으로서, 새롭게 등장한 영화인들 그리고 광고인들과 협업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특히 음악과 영화에서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오리엔트프로덕션과 화천공사의 만남으로 탄생한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은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면에서도 신선한 충격과 파장을 끼쳤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은 이 영화들이 현재까지 회자되는 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림11)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OST (그림12) <바보들의 행진> OST 영화음악과 더불어 그가 작업한 광고음악은 음악인 강근식을 소개하는 데 중요한 프로필이 되었다. 김세환이 부른 “부드러운 껌”(<해태껌>)과 정훈희, 윤석화 등이 부른 “열두 시에 만나요”(<부라보콘>), 지금까지도 패러디되는 “멋진 남자 멋진 여자”(<트라이>) 등은 CM송을 넘어 시대를 소환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여 년 동안 광고음악을 창작하며 경험한 대중문화와 사회변화의 관계는 그의 구술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1970년대 충무로가 영화의 거리에서 광고의 거리로 변화하는 모습, 영화가 아닌 광고를 통해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모습, 광고의 종류가 식료품 위주에서 전자기기로 변화하는 모습 등은 광고를 통한 한국사회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그림13) <부라보콘> 광고 (그림14) <부라보콘> 광고 (정윤희와 신일룡이 출연한 부라보콘 광고는 시리즈로 만들어졌다) 1970년대 화천공사와 오리엔트프로덕션의 시도로 탄생한 새로운 청년영화 강근식이 작업한 영화음악은 총 13편으로 데뷔작 <별들의 고향>을 필두로 1970년대 작업한 영화가 6편(<바보들의 행진>, <너 또한 별이 되어>(이장호, 1975), <미스 영의 행방>(박남수, 1975) <걷지말고 뛰어라>(최인호, 1976)(편곡), <내마음의 풍차>(김수용, 1976)), 영화음악으로는 마지막 작품인 1986년 작 <가슴을 펴라>(최원영)를 포함해 1980년대 작업한 영화가 8편(<하얀미소>(김수용, 1980), <강변부인>(최동준, 1980),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 <별들의 고향 3>(이경태, 1981), <이별없는 아침>(이경태, 1985))이다. 그중 1970년대 작업한 6편은 한국 대중문화의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들 수 있다. 특히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에서는 상기한 것처럼 1970년대 한국영화의 트렌드를 이끈 화천공사와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선도한 오리엔트프로덕션의 협업을 주목해보아야 한다. 한국영화의 제작 시스템이 국가의 제도로 제약을 받고 있던 1970년대, 화천공사는 젊은 층을 공략하는 영화들을 통해 새로운 메이저 제작사로 등극했다. 이 영화들이 원작의 인기에 크게 힘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각 분야에 새로운 인력을 영입해 활용한 것 또한 주효했다. (그림15)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신문광고 (그림16)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신문광고 특히 음악은 기존의 영화들에 비해 현격하게 비중을 높임으로써 스타일적인 측면에서 차별화를 꾀했다. 화천공사는 도시 중심의 청년 세대에게는 절대적인 호응을 받았지만 대중 전체에게 어필했다 볼 수 없는, 밴드와 통기타를 기반으로 ‘젊은 음악’을 선보이는 오리엔트프로덕션과 협업했다. 이와 같은 시도는 이장호, 하길종, 최인호 등을 중심으로 한 인맥 기반의 우연한 기획이 아니라 영화와 음악의 협업을 통해 특정한 관객층을 공략하기 위해 세밀하게 계획된 작업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획의 결과물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강근식이 구술에서 언급하는 <별들의 고향>의 음악살롱 장면이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연주되는 장면에서 관객석에 앉아있는 이들은 당시 강근식, 이장호, 최인호가 드나들었던 음악살롱 등의 아지트에 항상 자리하고 있던 대중문화예술인들이다. 이들 앞에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는 이는 원곡의 가수인 이장희도, OST를 부른 김세환도 아닌 가수 백호빈이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곡을 부르는 장면에서 여러 명의 가창자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실제 존재하는 대중문화 그룹에 가상의 가수와 극 중 인물들을 동시에 투입시킴으로써 허구와 현실을 함께 녹여내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관객은 허구의 인물들과 함께 그들의 아지트로 들어가 당대 새롭게 등장한 대중문화예술인 그룹을 직면하게 된다. (그림17)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음악쌀롱 장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는 백호빈) (그림18)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음악쌀롱 장면 <바보들의 행진> 또한 비슷한 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실제 대학생 신분인 배우들의 학교명을 광고에 활용하여 마치 이들의 실제 이야기인 것 같은 효과를 노린다. 경찰의 장발 단속을 피해 열심히 도망치는 병태와 영철의 모습이 송창식의 <왜 불러> 가사와 박자에 맞춰 편집된 장면은 이러한 효과를 배가시킨다. 이 장면은 인파 속에서 도망치는 병태와 영철과 시민들의 모습을 다양한 앵글과 교차 편집을 통해 현실감을 높인다. (그림19)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장발단속 중인 경찰에게 붙잡힌 장면) (그림20)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경찰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 (그림21)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 육교에 매달린 장면) 이처럼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들에서 음악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영화와 관객의 거리감을 조절하는 주요 소재로 활용된다. 화천공사와 오리엔트프로덕션의 협업의 관계처럼 이 영화들의 장면 장면들은 이야기와 음악이 공동작업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두 편의 영화는 명확한 관객층을 대상으로 새로운 대중문화 콘텐츠를 시도해 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음악인 강근식 구술의 의의 강근식의 구술은 1970년대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등 화천공사가 제작한 청년영화의 음악작업 배경을 확인할 수 있는 구술인 동시에 당시 청년문화를 직접 겪은 문화예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구술이다. 또한 1960년대 후반 대학생 밴드 활동과 이장희, 송창식, 조동진 등의 음악을 작업한 오리엔트프로덕션(사장 나현구)의 작업 방식과 회사의 분위기, 대중문화예술인과의 관계도 살펴볼 수 있는 구술이다. 말하자면 강근식 선생의 구술은 일본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미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등장한 1960~1970년대 젊은 대중문화예술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술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이력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광고음악의 역사를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는 구술이기도 하다. (그림22) 쎄시봉의 현장. 왼쪽 아래에 안경낀 사람이 이백천. 이백천은 쎄시봉에서 '대학생의 밤'을 기획하였다. 더불어 음악활동에 영향을 준 대중문화의 경험과 초기 문선대의 공연 모습도 주목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1975년 첫 번째 대마초파동에 얽힌 뒷이야기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강근식은 이 사건에 엮여 고초를 받은 당사자로서 당시 대마초가 불법으로 지정되기 전후의 과정과 어느 날 갑자기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이 일로 인생의 목표 설정이 많이 변해버린 것을 담담하게 소회하기도 한다. 그리고 밴드음악부터 영화음악, 광고음악까지, 평생을 음악 ‘일’을 해온 백발의 노신사는 현업에서 은퇴한 후 다시 기타를 잡았다. 평생 음악과 함께한 음악인 강근식의 모습은 이제 무대 위 ‘기타리스트 강근식’으로 만나볼 수 있다. (그림23) 강근식
박희준 감독은 문화영화, 특히 민간의 문화영화제작현장에서 40여년을 활동한 감독이다. 드물게 극장 흥행을 한 문화영화를 감독, 제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생소한 용어인 ‘문화영화’ 1) 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영화가 제작, 유통되던 시기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은 영화법을 제정하여 영화를 산업화하고자 하였다. 당시 제정된 영화법을 살펴보면 문화영화를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2) 또한 영화법에서는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에 앞서 문화영화를 상영할 것을 고지하고 있다. 3) 1961년 발족한 국립영화제작소는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다양한 문화영화들을 제작하였으며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부터는 새마을 운동을 홍보하기 위한 영화들을 제작, 유통하였다. 박희준 감독이 문화영화제작 분야에 참여하게 된 것은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를 졸업하고 1961년 국립영화제작소에 입사하면서 부터이다. 박희준 감독은 1954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군에 입대하였다. 육군사관학교 군악대에 배치, 군악병 생활을 하였던 박희준은 5.16 쿠데타가 일어나는 달에 제대를 하였다.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에 성공, 육군사관생도들이 서울 시내 중심가를 행진할 당시 앞에 있던 군악대에 있었으며 이 행진을 마지막으로 구술자는 군을 제대하였다. 제대 후에는 연기자가 되기 위해 김기영 프로덕션에 연구생으로 잠시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당시 공보원에서 실시한 ‘공보요원 모집’ 공고를 보고 연기자의 꿈을 접고 국립영화제작소에 입사를 결심하였다. 당시 문공부에서는 대대적인 모집을 하였는데 이는 병역기피자들을 단속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퇴사, 공석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100여명이 응시한 가운데 5명이 선발되었는데 입사 당시 직급은 ‘연예사’였다. 입사 동기로는 다보문화사 대표인 황왕수 씨와 김학수 감독, 박정근 감독 등이 있었는데 박희준 감독을 포함하여 5명이 최종 합격하였고 이중에서 4명이 감독의 보직을 받았다. 국립영화제작소 입사 당시 시라큐스에서 파견한 교육인원들이 아직 남아있었는데 박희준 감독은 이들로부터 연출 등의 강의를 들었다. 국립영화제작소 근무 당시 양종해 감독, 배석인 감독 등 선배 감독들의 조감독 생활을 3년 정도 한 뒤에 1967년 <삼천만의 불침번>부터 직접 감독을 하게 되었다. 박희준이 국립영화제작소 시절 감독한 작품인 <가요잔치>는 당시 유명 가수인 이미자, 김부자 등이 출연한 영화로 농촌 계몽영화의 순회상영 당시 활용되었는데 새마을 영화 등 문화영화 가 너무 경직되었다는 의견이 있어 오락성 있는 영화도 보여주자는 의도에서 만들어 졌다고 한다. 그림 1) 국립영화제작소 출신들의 모임인 문영회 회원들과 2007년 기념 촬영한 사진. 오른쪽부터 임학송, 양종해, 이은덕, 신병운, 최봉암, 이성철, 박희준, 봉상균, 박익, 윤기범.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행과 함께 기업들이 성장하면서 기업들은 기업 홍보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기업홍보영화의 제작은 주로 문화영화 감독들에게 맡겨졌고 이러한 수요를 바탕으로 민간 문화영화 제작사들이 등장하였다. 대부분이 국립영화제작소 출신의 감독들이 설립하였다. 사진2) 탄광촌에서 촬영한 새마을운동 홍보 영화인 <정암골에 새봄이>(1984)의 촬영현장 사진. 영화는 공장 새마을의 성공사례를 담고 있다. 사진 오른편에 연출 지도를 하고 있는 박희준의 모습이 보인다. 박희준 감독 역시 1964년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하여 민간문화영화제작자,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박희준 감독은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방송사인 동양방송 CM제작부로 자리를 옮겼는데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면서 박희준 감독을 포함하여 많은 국립영화제작소의 인력들이 방송국으로 이직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박희준은 극장상영용 문화영화 제작을 위해 동양방송을 그만두게 되는데 여기에는 광고영화를 낮게 평가하는 당시의 풍토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하였다. 동양방송 퇴사 후 민간에서 문화영화 감독으로 활동한 박희준 감독은 극장상영용 장편문화영화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 <극동의 왕자 김일>(1966), <허리케인의 대혈투>(1967), <황금의 이마>(1967)을 제작, 감독하였다. 텔레비전의 보급이 시작되던 시기에 스포츠 중계는 텔레비전 콘텐츠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레슬링의 인기가 매우 높은 편이었다. 일본에서 성공한 역도산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대중들에게 김일 선수의 활약상을 극장상영용으로 만들어 보여주면 인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4)5) 박희준 감독은 보다 박진감 넘치는 화면을 위해 실제 경기를 여러 대의 카메라로 촬영하고 인기 아나운서의 해설을 덧붙였다. 김일은 프로레슬러 1세대 선수로 1960년대 일명 ‘박치기 왕’으로 널리 알려진 스타였다. 박희준 감독은 김일 선수의 경기를 시리즈로 제작하여 극장에서 상영하였는데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이다. 박희준은 직접 실제 경기를 촬영하고 여기에 보태어 김일 후원회에서 촬영한 영상과 스포츠 전문 사진작가인 장점동 씨의 자료를 첨가하여 작품을 완성하였다. 박희준은 판권을 미리 팔지 못해 사비를 들여 영화를 제작하였고, 완성된 영화를 지방 흥행업자들에게 보여주고 판권을 팔아 대구의 국제극장에서 영화를 개봉하였다. 영화의 호응이 좋아 서울의 아세아 극장에서도 상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1편의 흥행으로 이후의 시리즈는 지방흥행업자들에게 판권을 팔아 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3)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의 극장상영용 포스터 그림 4)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의 대본 표지. 하단에 대명제작사인 신영문화영화사의 이름이 보인다. 김일 시리즈의 2편에 해당하는 <극동의 왕자 김일>은 1편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이 개봉한 해에 제작, 상영되었다. <극동의 왕자 김일>의 포스터를 보면 ‘일본현지촬영’, ‘시네마스코프’ 등의 문구가 보인다. 영화는 일본에서 치러진 김일 선수의 경기 모습을 담고 있지만 열악한 제작 여건 상 박희준이 직접 현지에서 촬영을 하지는 못한 채 김일 선수 측에서 촬영한 분량을 사용하였다. 좀 더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영화는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하였고 마치 실제 경기를 중계하는 듯한 실감나는 내레이션을 입혀 상영을 하였다고 한다. 그림 5) 김일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극동의 왕자>(1966)의 포스터 ‘시네마스코프’, ‘해설 이광재’, ‘일본현지촬영감행’, ‘2탄’ 등의 문구가 보인다. 김일 시리지의 마지막 편인 <황금의 이마>(1967)는 김일 선수의 세계헤비급 챔피언 쟁탈전을 담고 있다.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던 경기의 현장감을 최대한 담기 위해 4대의 카메라를 동원하여 촬영을 하였고 현장음도 마치 동시녹음을 하듯 녹음을 해 후반 작업에 사용하였다. 영화는 만원사례를 낳으며 흥행을 하였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박희준 감독은 <황금의 이마>를 끝으로 김일 선수 영화 제작에 관련된 권리를 다른 문화영화제작업자에게 양도하고 이후 다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복직하였다. 국립영화제작소에 복직한 그는 <가요잔치>를 감독하였다. 조금 딱딱한 계몽 영화를 틀어주기에 앞서 관객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위해 오락적인 요소가 가미 된 영화의 제작이 요구되어 만들어진 영화인 <가요잔치>에는 이미자 등 당대의 유명가수 등이 출연하였다.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당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구비하고 있던 동시녹음 카메라인 미첼 카메라를 사용하였다. 계몽적인 성격이 강한 문화영화만 보아오던 관객들의 호응이 매우 높았다. 이러한 경험을 되살려 박희준은 관광과 콩트를 접목한 형식의 영화를 구상하였다.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문화재 관련 영화 촬영차 전국을 누볐던 그는 관광과 노래, 그리고 콩트가 결합된 문화영화를 만들면 흥미로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박희준은 국세청에서 의뢰한 국세청 홍보영화 <신영균 씨의 하루>를 마지막으로 본격적으로 극장상영용 문화영화 제작을 위해 1971년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하였다. 퇴사 후 박희준 감독은 1972년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를 시작으로 1973년에는 <노래 실은 금수강산>과 <노래 실은 관광여행>을 1975년에는 <가요대행진>을 제작, 감독하였다. 1972년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는 국립영화제작소 입사 동기인 김학수 감독이 운영하던 문화영화제작사 삼진영화제작소에서 대명제작을 한 작품이다.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는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다. 1970년대 텔레비전의 보급과 함께 가요프로그램도 인기가 높았다. 당대 최고의 가수는 남진, 나훈아, 이미자 등이었다. 박희준 감독은 이들 인기가수들을 조그만 텔레비전 화면이 아닌 커다란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에 관객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기에 보태어 좀 더 다양한 오락거리를 보여주기 위해 콩트를 삽입하였다. 백남봉과 남보원 콤비를 등장시켜 이들이 유명 관광지에서 콩트를 하고 가수가 등장해 노래를 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소양강 처녀>, <금산 아가씨> 등 노래에 등장하는 공간들이 영화에 배경으로 등장하였고 장소와 장소를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두 명의 코미디언이 등장하여 콩트를 하였다. 그림 6) 김일 시리즈의 3편인 <황금의 이마>(1967)의 검열대본 대본의 크레디트에는 ‘신영영화사 작품’, ‘시네마스코프’, ‘기획 김윤모’, ‘녹음 이재웅’, ‘음악 정윤주’, ‘구성․ 편집 손익동’ 등이 적혀 있다. 그림 7) 국제극장에서 상영한 <황금의 이마>(1967)의 만원사례 봉투이다. 그림 8) 잠실체육관에서 열렸던 김일 선수의 챔피언 쟁탈전을 촬영한 <황금의 이마>(1967)의 극장상영용 포스터 을지극장에 개봉한 영화는 만원사례를 낳았다. 문화영화로는 드물게 극장에서 흥행을 하였지만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남진이 등장하는 장면에 장발이 문제가 되어 검열에서 잘리는 바람에 아쉽게도 극장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반인들에게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던 워커힐 쇼 장면 역시 노출이 심하다는 이유를 들어 삭제되는 일도 겪어야 했다. 그림 9)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1972)의 검열대본 대본을 보면 ‘삼진영화제작소 작품’, ‘칼라 시네마스코프’, ‘후원 한국연예협회, 한국경제일보사’ 등의 문구가 실려 있다. 그림 10)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1972)의 초대권 을지극장에서 상영을 하였는데 ‘파라마운트 SHOW'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영화 상영 전 쇼를 하였던 당시의 관행을 알 수 있다. 1972년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의 흥행으로 박희준 감독에게 극영화 연출의 기회가 찾아왔다. 유림흥업주식회사에서 대명제작한 극영화 <그녀>에는 남진, 하춘화, 신성일 등 당대의 스타들이 캐스팅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아쉽게도 완성되지 못했다. 대명제작에 대해 엄격해지는 영화계 분위기와 문화영화와는 다른 극영화의 제작과정에서 오는 어려움 때문에 촬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편 극영화 <그녀>는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 시리즈 2편에 대한 제작과 함께 제작비를 투자 받은 것이었고 때문에 장편극영화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그 남은 제작비로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의 후속편인 2편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림 11) <노래실은 금수강산>(1973)의 촬영현장.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을 촬영 중인데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73년 제작, 감독한 <노래 실은 관광여행>과 <노래 실은 금수강산>은 아쉽게도 전편의 흥행에 미치지 못하였다. 1편 격인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에 출였던 백남봉, 남보원 콤비의 섭외에 실패하여 서영춘, 남성남 콤비를 등장시켰지만 전편의 인기를 넘어서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영춘, 남성남 콤비의 인기에 힘입어 지방에서 꽤 흥행을 할 수 있었다. 이들 영화에는 한려수도, 부산, 경주, 제주도 등 전국의 유명 관광지가 등장한다. 박희준 감독은 당시 관광 책자에서 장소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림 12) <가요대행진>(1975)의 촬영장면. 은방울 자매가 ‘삼천포 아가씨’를 노래하는 장면이다. 카메라 옆에서 연출을 지도하고 있는 박희준의 모습이 보인다. 1975년 박희준 감독은 당대의 청년문화의 스타들을 대거 등장시켜 <가요대행진>(1975)을 만들었다. 영화에는 조영남, 김세환, 송창식 등 통기타 가수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콩트가 빠진데다가 지방에서 통기타 가수들의 인기는 트로트 가수보다는 덜 대중적인 탓에 영화의 흥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림 13) <가요대행진>(1975)의 촬영 현장. ‘안동 놋다리 밝기’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박희준 감독은 스포츠와 쇼와 같은 오락, 흥행적 요소를 가진 문화영화를 제작한 문화영화의 흥행감독이다. 문화영화는 주로 계몽, 교육에 목적을 두고 있는데 박희준 감독은 스포츠와 가요, 콩트, 공연 등 당시의 관객들이 흔히 볼 수 없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문화영화를 제작하였다. 박희준 감독은 스스로 이들 영화들의 흥행이유에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 시리즈는 워커힐 쇼, 당대의 인기 가수, 전국 팔도의 경관 등의 볼거리가 재미의 요소였다고 설명을 하였다. 6) 극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줄 수 없는 시각적인 스펙터클, 가요와 스포츠라는 대중문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새로운 레져로 떠오른 관광 등 이러한 시대적 요소들이 박희준 감독의 작품들이 흥행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1975년 <가요대행진>을 끝으로 박희준 감독은 극장상영용 문화영화의 제작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스포츠와 가요를 극장에서 즐기기 보다는 가정에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희준 감독은 이후 기업 홍보 영화와 전통문화를 담은 문화 영화의 연출에 주력하였다. 영화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어 본인의 회사를 설립하기 전 까지 박희준은 12년 간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그림 14) 박희준 감독이 한일홍보에 근무하던 시절 사진. 감독 뒤로 마네킹들이 보이는데 한일홍보의 투자사가 마네킹 제조업체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만들었던 영화들로는 부산시청 민원 창구 계몽영화인 <민원서류는 이렇게 처리됩니다>(1975), 새마을운동 홍보 영화인 <어떤 휴일>(1976), 전라북도 산업 및 관광홍보영화 <밝아오는 내 고장>(1977), 농촌새마을 홍보영화 <꿈이 열리는 땅>(1981), 리비아 수출 홍보 영화 <동아콘크리트>(1982), 대구시 홍보 영화 <대구의 향기>(1982) 등이 있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소개하는 문화영화로는 <돌의 문화>(1984), <한국의 목조 건축>(1985)등이 있다. <한국의 목조 건축>은 제2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에서 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그림 15) 1983년 연출한 군정홍보영화 <풍요로운 남해>의 촬영현장 사진이다. 그림 16) 1983년 연출한 군정홍보영화 <풍요로운 남해>의 촬영현장 사진 그림 17) 1988년 <돌과 한민족>으로 제5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 우수작품상을 수상할 당시의 사진 그림 18) 1985년 <한국의 목조 건축>으로 제2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 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 한 뒤 영화진흥공사 직원과 환담을 나누는 모습 영화업이 등록제로 바뀌면서 박희준은 희보영상을 설립하여 2008년까지 운영하였다. 제6회 금관상영화제 홍보영화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독립기념관>(1989)을 비롯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와 함께 열린 세계청소년캠프의 기록영화도 제작하였다. 그림 19) 1988년 열린 서울올림픽 국제청소년 캠프의 기록영상을 촬영할 당시 박희준 그림 20) 1986년 아시안게임 주관 방송사인 KBS와 계약을 하고 아시안게임 기록영상을 제작할 당시 기념 촬영한 사진이다. 가운데가 박희준. 1970년대 활발하였던 문화영화제작사들은 1990년대 이후 서서히 사라졌다. 박희준 감독은 텔레비전이라는 거대한 미디어의 등장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필름이 사라지면서 필름을 기반으로 하였던 문화영화사들도 사라지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 영화가 국가 및 기업의 주요 흥보 미디어로서 기능하던 시기에 민간의 문화영화는 성장하였다. 자연히 문화영화는 국가와 기업의 요구에 맞춰 만들어졌고 극장상영용으로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박희준 감독은 이러한 환경에서 드물게 극장상영용 문화영화를 만들어 흥행을 하였다. 스포츠, 관광, 쇼 등의 요소를 활용한 볼거리들은 당시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후 텔레비전이라는 강력한 미디어의 등장이 이러한 볼거리에 대한 관객들의 욕망을 담아가기 전까지 이는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시도였다. 박희준 감독은 문화영화의 조금 경직된 경계를 허물고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참고문헌) 1) ‘문화영화’란 일반적으로 극장에서 흥행을 목적으로 공개하는 극영화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논픽션 필름(nonfiction film), 다큐멘터리 필름(documentary film), 기록영화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 이하나, 「정부수립기~1950년대 문화영화와국가정체성」, 역사와 현실제74호, 한국역사연구회, 2009. 12, 521쪽. 2) 1962년도에 제정 시행된 영화법 제2조에서는 문화영화와 극영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④본법에서 극영화라 함은 배우를 출연시켜 연극화한 영화로서 문화영화 및 뉴우스 영화이외의 영화를 말한다. ⑤본법에서 문화영화라 함은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이와 같은 법령상의 정의는 문화영화를 설명하는 또 다른 용어인 비극영화((非劇映畫, Non-theatrical film)의 정의와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극영화(非劇映畫, Non-theatrical film)를 국어사전에는 ‘극영화가 아닌 영화를 통틀어 이르는 말. 학술영화, 교육영화, 기록영화 따위가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영일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단편영화로 픽션을 곁들인 극영화와 대립되는 의미를 지닌다. 독일어 Kultur film을 직역한 말에서 왔으며 대체로 다큐멘터리영화의 총칭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극영화・뉴스영화를 제외한 모든 비극영화(非劇映畫)의 총칭으로 쓰여 왔다. 그러나 교육영화・계몽영화 등 그 제작 목적에 따라 명칭이 세분화되기 시작한 뒤부터는 점차 문화영화라는 말이 소멸된 감이 있고, 기록영화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역사적으로 문화영화의 효시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이 만든 위생영화(衛生映畫)이며, 독일은 그 뒤 UFA사가 Kultur Film이라는 이름으로 단편의 과학영화를 잇따라 제작하여 문화영화의 전통을 세웠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기록영화는 1919년 당시의 서울 시가지 풍경을 수록한 <경성 전시(全市)의 경(景)>이다. 문화영화와 기록영화라는 용어는 서로 혼동되어 사용되어 왔는데, 문화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공용어로 정착하게 된 것은 1973년 전면개정된 영화법에 보면 “문화영화라 함은 사회・경제・문화 등 제 분야에 있어서 교육적・문화적인 효과 또는 사회풍습을 묘사, 설명하기 위하여 제작한 영화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따라서 문화영화의 범주에 광고와 만화영화가 포함된 배경에는 이러한 극영화와 비극영화의 구분과 정의가 있다고 보여진다. 3) 1962년 제정 시행된 영화법 제11조 (문화영화동시상영)에는 “공연자가 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고 고지되어있다. 4) 1965년 3월 9일《경향신문》4면의「연예메모」에 단성사에서 개봉하는 일본 수입 영화인 <역도산>에 대한 안내 기사가 실려 있다. 5) 박희준 감독이 제작 ,감독한 김일에 관련된 영화는 다음과 같다.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박희준, 1966, 신영문화영화제작사), <극동의 왕자, 김일>(박희준, 1966, 민양프로덕션 제작), <허리케인의 대혈투>(박희준, 1967), <황금의 이마>(박희준, 1967, 신영문화영화제작사). 6) 이정아,「박희준·김청기·한호기」,『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한국영상자료원, 2012, 114~152쪽 참고.
<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 >를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영화여 멈춰라 비디오를 끄고 싶다 라는. 그렇다면 어째서 이 영화가 떡하니 이 칼럼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단 하나. 이재웅 감독의 1974년 작품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는 한국 최초의 뮤지컬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뮤지컬 이라면 이전에도 있지 않았습니까? 라는 의문을 표시할 수 있다. 그렇다. 먼저 한형모 감독의 1956년 작품 < 청춘쌍곡선 >을 떠올릴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작곡가 박시춘 의 멋진 기타연주에 김시스터즈가 흥겨운 노래를 부른다. 동네 이웃으로 출연한 김희갑 은 당시의 유행가 몇 곡을 부른다. 여주인공 정옥도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노래는 대사를 대신하거나 상황을 이끌어 가지는 않는다. 본격적인 뮤지컬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이후에도 한형모 감독은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 < 엘리지의 여왕 >에서 당시 인기가수들의 공연장면을 영화의 중간 중간에 삽입하는 방식으로 뮤지컬이 아닌 뮤직영화를 만든다. 이러한 뮤직영화는 노래가 내러티브에 유기적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종종 흐름을 끊으면서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60년대 오디오나 TV의 보급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대중가요를 쉽게 들을 수 없는 상황을 역이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어쩌면 시대가 요청했던 장르였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흐름은 70년대를 건너 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다 차츰 편수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렇듯 가수가 직접 나와 노래를 부르는 방식의 뮤직영화는 70년대에는 인기가수들이 직접 주인공으로 극중 인물을 연기하면서 좀 더 사실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변한다. 즉, 남진 , 나훈아 , 하춘화 , 패티김 등 일반 성인대중에게 친숙한 가수들이 < 가수왕 >, < 속 이별 >, < 숙녀 초년생 >등의 영화에서 직업이 가수인 극중 인물로 등장하여 공연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핍진성을 강화한다. 그리고 다른 청년문화가 움트면서 새롭게 등장한 포크송이나 록을 불렀던 가수들인 김세환 , 장미화 , 신중현 등은 < 청춘대학 >. < 맹물로 가는 자동차 >, < 미인 >등에 등장하여 대학생이나 돈 없는 청춘들로 등장하여 노래를 부르며, 좌충우돌 하는 영화가 다른 한 경향을 이룬다. 이후 80년대에도 조용필 , 전영록 , 송골매, 백영규 등 젊은이의 우상으로 불렸던 가수들은 영화에서 직업가수로 등장해 자신의 히트곡을 불렀다. 어쨌든 이 영화들은 모두 노래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노래들이 극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영화들은 뮤지컬이라기보다는 뮤직영화라고 부르는 게 맞는 것 같다. 사실 한국영화는 일제강점기에 처음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양한 장르가 존재했다. 심지어 가장 미국적인 장르라는 서부극마저 만주웨스턴이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유독 한국화에 실패했던 장르가 뮤지컬일 것이다. 노래와 춤이 대사를 대신해 인물의 감정을 드러낸다는 측면이 뮤지컬 장르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유독 이 장르만이 한국화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혹시 한국인이 유난히 뮤지컬에만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런 논리는 < 사운드 오브 뮤직 >이나 <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의 흥행성공이 말해주듯 그다지 신빙성은 없는 것 같다. 여기에는 제작상의 어떤 한계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뮤지컬에 도전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 >를 완성도를 떠나 그 자체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영화의 감독이 녹음기사 출신인 이재웅 감독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는 이미 임권택 감독의 68년 작품 < 몽녀 >에서 4본 입체녹음을 시도했다. 이후 이성구 감독의 < 춘향전 >에서는 6본 입체녹음을 시도하며 한국영화 기술 발전에 공헌한 인물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영화 자체의 퀄리티 보다는 이재웅 녹음기사의 사운드 실험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라고 짐작해 본다. 그래서일까? 영화에 스토리를 녹여내는 작업에는 너무 무관심하다. 당시 인기폭발이었던 올리비아 핫세의 < 로미오와 쥬리엣 >풍의 비극적 스토리를 살짝 가져오고, <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의 안무 스타일을 대충 흉내 내서 중구난방의 댄스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도 중반 이후에는 모두 사라지고 스토리는 < 썸머타임 킬러 >를 연상시키는 오토바이 액션을 잠시 보여주는 듯 싶더니, 갑자기 이 모든 소동이 알고 봤더니 꿈이었습니다, 로 마무리해버린다. 그렇다. 녹음기사의 사운드에 대한 욕망은 한국 최초의 뮤지컬 영화를 탄생시켰지만 지나치게 낮은 완성도는 한국에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뿌리내리게 하지 못한 아쉬움을 동반하고 말았다. 이재웅 감독은 70년대 최고 인기가수였던 남진 과 리리 시스터즈의 김성아 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한국최초의 뮤지컬을 만들어 보겠다는 야망과 그동안 축적해왔던 기술의 진면목을 보여주겠다는 도전정신은 있었다. 그러나 기성세대에 도전하는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스토리를 진행하면서도 젊은 감성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했다. 일단 주인공인 남진과 김성아의 창법이 당시 젊은이들의 노래였던 포크 감성이 없어 마치 트로트를 듣는 것 같아 당황스럽다. 게다가 사랑의 감정을 분출하는 장면에서의 군무는 또 어떤가?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와 춤추는 엑스트라들의 동작이 지나치게 어설퍼 몰입을 방해한다. 결국 <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 >는 영화의 기본이라 할 스토리를 지나치게 소홀히 다루면서 실패작이 되었고 잊혀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 >는 제작진의 의욕만은 충분히 느껴지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단지 그 의욕이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대한 연구 없이 녹음기사의 욕심으로 끝난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한국에서 장르는 멜로가 신파가 되고, 웨스턴이 만주웨스턴이 되듯 나름대로 토착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뮤지컬만은 트로트 뮤지컬로도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후에도 뮤지컬 장르에 대한 시도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뮤지컬은 한국영화계의 변방에 있다. 하지만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가 제대로 된 뮤지컬이었다면 이후의 양상은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리리 남진 박상규 감독 이재웅 각본 김경일 촬영 팽정문 1974년 86분 칼라 판매원 삼화비디오프로덕숀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1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