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일장
- 감독
- 김수남
- 제작년도
- 1975
- 출연
- 김주영, 김학희
“인간의 본능과 욕망의 쟁투를 일관되게 추구하는 개성이 뚜렷한 영화작가,”1) “화면이 수술대와 다름없는, 외과의사가 집도하는 것과 같은 연출,”2) “한국영화의 반역정신,”3)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함,”4) 이는 모두 김기영 감독과 그의 영화에 대한 논평들이다. 한국영화사상 가장 특이하고 독창적인 작가로 평가되는 김기영 감독은 대부분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1970년대 영화 불황기에 들어서며 그는 < 파계 > < 이어도 > < 흙 > 등 소설 원작의 문예영화를 몇 편 만든다. 그는 문학을 원작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자기 스타일로 완전히 각색했다. 따라서 그의 문예영화에서 원작에의 충실성 문제를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의 영화는 문학을 저본으로 삼았을 뿐 당시 문예영화의 관습으로 포획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점이야말로 관습을 깨뜨리는 새로운 시도로서 근본적인 예술성 개념에 부합하며 예술영화로서의 문예영화의 외연을 확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파격과 확장이 불가(佛家)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파계>는 < 마음의 고향 >( 윤용규 , 1949) 이후 불교 문예영화의 맥을 잇는 영화이자 본격적인 불교 예술영화로 평가받는 < 만다라 >( 임권택 , 1981) 앞에 놓이는 작품이기도 하다.5) < 파계 >는 1973년 「사상계」에 연재된 고은의 동명 중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선승 법연당과 그의 제자 침해의 관계, 그리고 침해와 묘혼의 사랑을 플롯의 중심에 둔다. 여기에 서산암의 비구와 소원암의 비구니들을 통해 선승(禪僧)과 율사(律師)의 차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불제자들의 수련방식 등 불가를 둘러싼 다양한 사건들이 직조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원작의 내용을 철저하게 김기영 식 주제와 화법으로 끌어들여, 법통을 둘러싼 승(僧)들 간의 정치적 쟁투와 인간의 원초적 본능 문제를 부각시킨다. 이 영화는 선승을 가장하고 선사에 들어간 대학생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이는 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객관적 시각으로 서술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 영화의 중심 서사는 열반을 눈앞에 둔 고승 조실스님( 최불암 )이 법통을 물려줄 후계자를 정하는 과정이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조실스님의 시자로 자란 침해 수좌( 김병학 )이고, 그의 경쟁자로는 “절이란 권위와 인격과 위대한 것이 있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경원 수좌( 조재성 )가 있다. 이 두 인물의 대립에는 어릴 때 절에 들어와 동승으로 자란 ‘올깨끼’와 나중에 철이 나서 스스로 불도를 선택한 ‘늦깨끼’, 그리고 선승과 법승 간의 갈등이 들어있다. 조실스님은 인자하고 푸근한 인상과는 달리 냉혹하고 교활하게 후보자들을 시험하고 경쟁시킨다. 그는 화두를 던지는 것은 물론 돌연한 선문답과 죽비 세례로 후보자들을 곤경에 빠뜨린다. 또한 식욕, 색욕의 시험에 들게 하여 목숨을 건 싸움을 부추긴다. 침해가 묘혼( 임예진 )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조실스님이 기획한 시험 중의 하나다. “내 법통이야. 그냥은 못 줘. 괴롭히고 또 괴롭히고 나중에는 시험으로 피투성이가 되는 걸 봐야 준다. 싸워서 피투성이가 되는 걸 봐야 줘.”라는 그의 외침은 김기영 표 고승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조실스님이 주도하는 시험들은 한국전쟁의 기억이 플래시백 되며 현실과 접목된다. 스님( 신구 )은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전쟁고아들을 구해 목숨을 걸고 피난시켰고, 절에 온 고아들은 배가 고파 가마솥에서 밥을 훔쳐 먹곤 했다. 이와 같이 속세의 극단적 참화인 전쟁과 그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인간의 밑바닥이 정신적이고 고차원적인 불가의 정진 과정과 연계된다. 이 과정에서 진정으로 배고파 보지 않거나 치열하게 색욕의 번뇌에 부딪혀 보지 않은 자가 어떻게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겠느냐는 주제가 표출된다. 그러면서 ‘법통’은 생존의 문제가 되고 그것을 쟁취하는 과정 또한 정치임이 드러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맨 나중에 법통을 이을 유력한 후보자로 떠오르는 것은 ‘도심행자’(정한원)라는 의외의 인물이다. 이 부분은 원작과 완전히 다른 것이기도 하다. 도심은 침해의 친구로 침해와 함께 전쟁고아가 되어 절에 들어온 올깨끼이다. 그는 유난히 식욕이 강해서 진작 공부를 포기하고 침해가 법통을 잇게 하려고 뒷바라지를 한다. “먹지 않으면 승이 된다? 관두겠어? 먹지 않는 건 질색이야.”라는 대사는 본능에 충실한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는 “빈 그릇을 깨라”는 화두를 “내 배고픈 것을 지독히 알아라! 그러면 남의 배고픈 것도 몸 저리게 알리라!”라는 깨달음으로 풀어낸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처절한 배고픔을 경험해봤기 때문이며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사람이 겪을 때 진심으로 공감하고 돌아볼 줄 아는 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절의 양식을 훔쳐다가 병든 중생을 구한 사건은 그의 언행일치를 증명한다. 한편 법통에 매달렸던 침해는 조실스님의 공격적 시험에 맞대응하며 시험을 넘었음에도 법통을 받지 못한다. 조실스님은 침해가 사랑하는 묘혼을 데려다 침해 앞에서 옷을 벗긴다. 원작에서는 그러고 나서 큰스님은 곧바로 죽음에 이른다.6) 영화에서는 묘혼이 옷을 벗자 그녀가 황금 부처로 보이는 숏이 인서트 된다. 그리고 침해는 “여자를 이상하게, 여자를 타락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건 낡은 편견이다. 우리 젊은 사람은 여자를 그냥 건강하게 살려는 한 인간 그대로를 느낀다. 남자와 여잔 같은 거다. 옷을 벗으면 알 수 있을 겁니다”라고 주장한다. 이때 법통을 따기 위해서는 큰스님을 놀라게 하거나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묘혼의 만류를 물리치고 침해는 묘혼과 나란히 알몸이 된다. 이 과감한 행동 앞에서 조실스님은 “넌 젊다. 그리고 천재다.”라고 침해를 인정한다. “그러나 법통은 네 것이 아니야.”라고 결론짓고 쓰러진다. 죽어가는 조실스님을 붙들고 침해와 묘혼이 법통을 내놓으라고 울부짖는 것은 불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충격적 장면이다. 그러나 그러한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욕망의 표출로 인해 이 영화는 새로운 문예영화이자 파격적인 불교 영화로서의 힘을 얻는다. 동승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 마음의 고향 > 이후에 나온 불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중에서 예술영화로 대접받은 예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파계 > 이전의 대표적인 영화로는 이광수 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내세운 < 꿈 >( 신상옥 , 1955/1967)이 있다. 그러나 <꿈>은 개봉 당시에 문예영화로 수용되지 않았다. 우선 원작이 이광수 소설이라고는 하나 그 토대가 된 조신몽 설화가 워낙 잘 알려진 옛이야기였기 때문에 ‘문예’로 인식되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불교 관련 영화의 경우 기독교를 다룬 영화보다 예술영화로 인정받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성직자에게 요구되는 종교의 금기가 일반의 도덕률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또한 기독교는 ‘개화’와 ‘서구 문명’을 상기시키며 자연스레 ‘근대문예’와도 겹쳐진다. 게다가 한국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반공주의와 결합해왔기 때문에 1960~70년대 국가가 장려했던 ‘반공’과 ‘문예’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유용한 제재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불교는 전근대적인 이미지를 지니는 데다 승려에게 요구되는 계율이 엄격하고 금기가 보다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불가를 배경으로 하는 서사는―갈등을 만들어야 하는 이야기의 본질상― 금기의 위반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영화는 시각적 매혹을 생명으로 삼는 매체이다. 상상에서만 가능했던 금기의 파괴가 눈앞에서 재현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시각적 매혹일 것이다. 그러니 불가를 배경으로 영화는 자연히 ‘파계’를 향하게 된다. < 마음의 고향 >부터 < 꿈 >과 < 파계 >는 물론, < 만다라 > < 우담바라 >( 김양득 , 1989) < 아제아제 바라아제 >( 임권택 , 1989)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정지영 , 1991)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계율의 위반을 보여주는 것은 이를 말해준다. 그러한 특질 때문에 불가 배경 영화에 대해서는 1970년대까지 외설적인 영화라는 기대 내지 선입견이 작용하고 있었다. <파계>의 경우에도 지방 흥행업자들이 제목만 보고 “중들이 나오는 외설적인 영화”라 생각하여 제작비를 투자했다는 증언이 있기도 하다.7) 또한 그러한 측면에 대해서는 행정적 검열 이외에도 사회적 검열이 작동하게 된다. 실제로 1967년 <꿈>이 개봉될 때 조계종 총무원장까지 나서서 상영을 반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검열은 비구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서는 한층 더하여 외설 논란이 불거지고 불교계의 반발도 거세지곤 했다. 이미 <만다라>가 나온 지 3년 후인 1984년에 임권택 감독이 연출하고 김지미 가 주연을 맡았던 < 비구니 >가 불교계의 반발에 부딪혀 제작이 포기된 것은 대표적 사례이다. 불교 영화를 둘러싼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 파계 >에 대한 불교계의 인정 및 정부의 보상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우선 ‘마성(魔性)’의 작가주의로 성 문제를 다루어 흥행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작품성을 성취해온 김기영 감독에 대한 영화계의 기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김기영 감독이 동아수출공사로부터 국내 최고의 개런티를 받고 <파계>를 연출했다는 것8)은 그것을 입증한다. 한편 불교계에서는 이 영화의 제작을 마뜩해하지 않았으나 ‘파계’라는 제목과 달리 ‘성불(成佛)’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여기에는 당시 한국영화를 둘러싼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한국영화의 불황 속에서 1974년 4월에 개봉한 < 별들의 고향 >이 크게 성공하자 “참신한 방화 만들면 관객들은 몰려든다”9)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한편 1960년대 말 이후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아젠다 아래 정책적으로 전근대 전통문화가 소환되었다. 이때 무속이나 민속 등 근대 이후 비판받고 폄훼되어왔던 전근대 문화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는데 이 와중에 불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대해서도 이전과는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파계>가 외설 논란을 잠재우며 문공부 우수영화로 선정되고 여러 해외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한 것은 이와 같이 복합적인 상황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불가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성장담 내지 회고담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작을 김기영 식의 독창적인 해석을 통해 ‘본능과 정치’라는 현실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질문으로 비화시킨 영화 자체에 있었다.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불가와 승려의 생활에 대한 사실적 재현과 과감한 장면 구성, 그리고 전두엽을 자극하는 기발한 대사와 지금 봐도 충격적인 서사 전개는 이 영화의 파격을 구성하며 ‘외설’이니 ‘종교 모독’이니 하던 당시의 법적·사회적 논란을 넘어서는 에너지가 된다. 이로써 < 파계 >는 금기의 위반을 과감하게 재현하는 것은 물론 현실 문제와 종교적 질문을 접목시키면서도 예술영화로 인정받은 최초의 불교 영화가 된다. 이는 < 만다라 >에 앞서는 것으로, 1970년대에 이루어진 전위적인 영화사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1)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도서출판 소도, 2004, 402~403쪽. 2) 김종원, 정중헌, 「우리 영화 100년」, 현암사, 2000, 290~291쪽. 3) 김수남, 「한국영화감독론 2」, 지식산업사, 2003, 182쪽. 4) 이효인 편, 「한국의 영화감독 13인」, 열린책들, 1994, 360쪽 5) 나중에 <만다라>의 촬영을 담당하는 정일성 감독이 이 영화의 촬영을 맡았으며, 그는 이 영화로 영평상 기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6) 소설에서는 큰스님이 죽기 전에 묘혼을 벗겨 보신 것을 두고 노승의 평생소원을 푼 것( “……하긴, 여섯 살부터 입산해서 주욱 중노릇만 했으니, 평생 소원이셨던가 보지요.”)이라는 추측과 아랫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교육의 일환(“이 놈아! 너는 몰라! 침해란 놈 가르치기 위해서야! 일체 중생 가르친 게야!”)이라는 주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느 결에 묘혼이 달아났는지 침해는 몰랐다. 침해는 여자보다 노승의 열반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 탄운 곡간의 가느다란 연기 끝이 더 멀리 있는 것 같았다. 침해는 어디 갔는지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결말이다(고은 전집 제31권 「밤주막」(1977) 중 「파계」, 527~528쪽 참조). 7) <김기영 전작전: <파계> 이화시 GV VOD>, 2008.06.23. http://flash.koreafilm.or.kr/kofa2/play_trailer.html?file=trailer/MK004966_P03.mp4 8) 「<破戒>, 촬영 끝내 곧 開封」, 『매일경제』, 1974.6.28., 8면. 9) 「참신한 邦? 만들면 觀客들은 몰려든다」, 『동아일보』, 1974.6.7., 8면.
한국영화계에서 영화작가를 논할 때, 편애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작가영화를 거론하되 리얼리즘 색채가 강한 작가를 우위에 두는 것으로 멜로드라마 작품보다 사회성드라마를 연출하는 감독을 영화작가로 대접하겠다는 한국영화비평계의 편향성이다. 정진우 는 ''사랑의 부재''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랑의 작가''로 < 초우 >(1966년) 이후 멜로애정물에 애착을 갖고 있는 영화작가이다. 정진우가 말하는 사랑의 부재는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에서부터 일제와 민족분단 그리고 군부독재 권력에 의해 무너진 인간적 존재에 대한 물음까지 광범위하다. 어쨋든 사랑타령하는 영화를 주로 만들어 왔던 그의 영화에 대한 영화작가로서의 홀대는 영화비평계의 편견에 있다. 그러나 정진우 의 영화작가정신은 작품세계는 물론 한국영화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고취하는 그의 노력에서 더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수준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한국 영화작가로서 정진우의 작품평가가 인색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정진우의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부르짖는 실천력은 치열하였고 그 성과도 무시할 수 없었다. < 섬개구리 만세 >가 1972년 제 23회 베를린영화제에 참가할 때, 인도 레이의 <천둥소리>가 수상하고 <섬개구리>는 후시녹음때문에 대사와 입이 안 맞는 영화라고 현지의 매스콤에서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 정진우는 인도영화보다 기술적으로 뒤진 한국영화의 현실을 개탄하고 동시녹음만이 한국영화 세계화의 첫걸음임을 확신하였다. 결국 그는 < 율곡과 신사임당 >(1978년)에서 동시녹음을 시도하여 후시녹음을 전적으로 하였던 한국영화 제작풍토를 쇄신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이후 기술의 세계화에서 내용의 세계화를 모색하던 그는 < 심봤다 >(1979년) 등 일련의 향토물로 한국영화 세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정진우 의 한국영화의 세계화는 작품에만 승부를 걸지않았다. UIP파동 이후 미국메이저회사에 대항하여 한국영화 공급과 배급체계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시네마 콤플렉스 <시네하우스>를 건립하였고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멀티콤플렉스 극장은 한국영화 세계화의 경쟁력을 고취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정진우는 한국 사실주의 영화의 맥을 이어 온 최인규 의 문하생 정창화 감독 밑에서 연출수업을 하여 1963년 < 외아들 >로 감독 데뷔하였다. 이후 1969년 우진필름을 창립하기 전까지 무려 27편의 작품을 연출하였고 1970년부터 그가 운영하는 우진필름에서 직접 제작하거나 연출한 작품까지 계산하면 99편에 이르렀다. 여기에 타영화사에서 의뢰받아서 연출한 30작품을 합하면 무려 129편의 한국영화를 혼자서 만들고 제작하였다. 척박한 한국영화계에 뛰어들어 나름대로 한국영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 온 정진우 는 1938년 1월 17일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양곡리 골말에서 부친 정원모 鄭元謨와 모친 황을순 黃乙順의 4남 5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김포와 강화에서 36년간을 교육에 종사해 온 그 일대에선 존경받는 교장선생님으로 통했다. 정진우는 고향에서 양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김포중학교와 농사에 대한 야심으로 김포농고에 진학하여 축산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참가하게 된 학생연극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낙농의 꿈과 먼 다른 길을 열망하게 된 것이다. 그가 중앙대학 법대를 진학한 것은 연극영화학과가 없었던 당시 연극부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중앙대에 입학한 것이다. 그는 연극부 써클에서 활동하며 연극부 회원인 최무룡 선배의 소개로 영화계에 단역배우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영화계 입문은 1958년 박상호 의 < 장미는 슬프다 >에서 강범구 촬영기사의 조수로서 였다. 그는 촬영경험을 거치지 않고는 열악한 한국영화계의 제작여건을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후 정진우 는 한국 액션영화의 거장인 정창화 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5세에 < 외아들 >을 연출해서 한국 최연소 감독이 되었다. ''신필름''의 신상옥 감독 이후 한국영화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겨냥해 다양한 장르를 연출하고 제작해 온 감독으로서도 기억되어야 한다. 정진우 의 한국영화에 대한 신념과 그 실천에 대한 한국영화인들의 공감은 1985년 그를 ''한국영화인협회'' 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자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실감한 정진우는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영화의 주체인 영화인의 복지향상을 증진하여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으며 지금도 ''한국영화인 복지재단''의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관주도로 거행되었던 ''대종상영화제''를 영화인협회 주관하에 영화인 손으로 영화제를 치를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정진우 의 작품활동을 시기별로 분류하면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963년 < 외아들 >로 데뷔한 이후 1969년 ''우진필름''을 설립하여 제작자로서 활동하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정진우 는 영화작가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이 시기에 자기 중심적인 인간드라마의 작품세계를 구축하였다. 영화 < 외아들 >은 정진우 의 자서전적인 영화임을 짐작케 한다. 정진우의 성장배경에서 들어나듯이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 정진우의 청소년 시절은 농촌에서 어머니와 농사지으면서 많은 고생을 겪었고 집을 떠나 온 이후 <외아들>로 감독 데뷰하기까지 숱한 사람을 만나면서 그가 경험한 인생공부는 인간의 이중적 심성인 선악의 갈등을 체험케 하였다, 그의 휴머니즘은 바로 인간의 양면성을 극복한 참 인간상의 표현으로 표출되었다. <외아들>의 주인공은 정진우의 이념으로 그려지고, 그의 이념으로 채워진 작품세계는 정진우의 현실적 삶에서 원동력을 얻어 그 중심에 자리잡은 정진우의 작가정신인 주제의식으로 강조되었다. 정진우 를 한국영화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첫 작품으로서 < 초우 >는 그의 초기영화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소재와 영화적 기법 그리고 주인공들의 연기가 눈에 띄게 신선하여 그 당시 비교적 잘 만들어진 작품으로 알려졌다. <초우>는 현실성이 부족한 인물묘사로 단점이 들어나기도 하였지만 영상기교의 놀라운 일면과 일상적인 규격 속에서 탈피해 보려는 두 주인공의 내면을 포착하였다. 청춘영화 <초우>는 흑백 영상의 밀도를 높힌 작가의 의욕으로 정진우 스타일을 구축하여 그의 영화작가로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둘째, <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1970년)과 <동춘>(1970년)을 계기로 중견 감독으로 부상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정진우 는 역사의식으로 민족의식을 추구하는 한편 멜로드라마의 깊이를 모색하였다. 역사의식에 눈을 뜬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일제에 대한 반제국주의 의식을 피력하였고 < 국경의 밤 >(1970년)은 분단된 민족의 비극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렸다. < 동백꽃 피고지고 >(1970년)는 일제에서 6.25를 거친 근현대사를 통한 한민족의 한맺힌 마움을 평범한 가족 이야기를 통해 풀어 갔다. 정진우 는 척박한 한국 근현대사의 극복을 위해 일제침략과 동족상잔의 6.25동란으로 겪어야 했던 민족의 비극사를 그의 역사의식으로 조망하였다. 셋째, < 심봤다 > 등 향토물로 동시녹음과 영화기술의 세계화에 매진하여 < 무궁화꽃이 피었읍니다 >로 개화하던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모색하던 시기이다. 멜로애정물이나 민족의 비극사를 떠나 더 원류적인 우리의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한 정진우 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로 우리의 정체성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0년)는 정진우의 연출 기량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그 시작은 원시종교 무속을 내세운 < 석화촌 >(1972년)에서 시작하여 < 심봤다 >(1979년)부터 정진우의 향토물로 자리잡았다. 이 작품은 한국영화의 전통성과 정체성을 포착하기 위해 토속적인 경향을 띤 영화로 스케일보다는 깊이있는 내면을 탐색하려는 노력이 드러난 정진우의 다섯 번째 동시녹음 필름이다. 정진우의 향토물은 주인공들의 삶의 공간이 다를 뿐 부당한 힘의 횡포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가정신은 일맥상통하게 향토물의 모든 작품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이제 정진우 는 진화된 주제의식과 영화기술력으로 우리의 주체성을 주장하고 정체성을 정립하여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향한 주제의식을 탐구하고 있다. 김진명 원작 < 무궁화꽃이 피었읍니다 >(1994년)는 그 첫 시도로서 내용상으로는 ''침략자는 예고가 없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토아래 강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대내외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자는 의지를 과시한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기술상으로는 시각적인 특수효과와 동시녹음으로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매진하였으나 한국영화계의 현실은 정진우의 이상을 실천하기엔 그의 끈질긴 실천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정진우 의 영화작가 정신은 우리사회의 사랑의 부재를 극복한 사랑의 쟁취를 통해서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인간군상들을 묘사하였다. 하지만 영화적 현실로 표현된 정진우의 영상은 그의 영화작가적 의지를 충분히 담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라는 정진우의 집념을 그의 작품세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김수남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38년 1월 17일 경기도 김포 출생 1960년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1962년 외아들 로 감독 데뷔 1967년 감독협회 창립 (부회장) 1969년 (주)우진필름 설립(대표이사) 1973년 영화진흥공사 창립 초대 제작 상임이사 문교부 교육의 날-< 섬개구리 만세 > 국민 훈장 수여 1981년 한국영화제작협동조합 수석 부회장 한국영화 자율정화 위원장 1985년 복합극장 '씨네하우스' 설립 한국영화 복지재단 설립(원장) 1987년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 원장 / 한국예술총연합회 이사 1994년 프랑스 문화훈장 기사장 수상 1999~ 현 한국영화인 복지재단 원장 ㅇ 정진우 감독 작품 1962 외아들 1964 배신 , 국경 아닌 국경선 , 목마른 나무들 1965 밀회 , 난의 비가 , 가을에 온 여인 , 무정의 40계단 1966 초연 , 8240KLO , 초우 , 하숙생 , 악인시대 1967 밀월 , 하얀까마귀 , 4월이 가면 , 춘희 , 폭로 , 정부마농 , 구름 , 별아 내가슴에 1968 파란 이별의 글씨 , 미로 , 여여여 1969 국경의 밤 , 황진이의 첫사랑 , 청춘 , 차라리 남이라면 , 항구무정 , 동백꽃 피고지고 , 돌아오지 않는 밤 1970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 동춘 1971 풋사랑 1973 황소타고 시집왔네 1975 애종 , 초연 1978 율곡과 신사임당 1979 심봤다 , 가시를 삼킨 장미 1980 바다로 간 목마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1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1982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4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 자녀목 1991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1 ,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 2부 1994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ㅇ 수상 경력 초우 -서울대학생 최악 영화상 동춘 -제7회 한국일보 연극영화상 작품상/부일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석화촌 -제9회 청룡상 최우수작품상/부일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섬개구리 만세 -제10회 청룡상 감독상/베를린 영화제 최초 본선 경쟁부문 진출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제10회 대종상 계몽 및 우수작품상/아시아영화제 최우수 청년감독상 율곡과 신사임당 -제17회 대종상 특별상(한국영화 최초 동시녹음 작품) 심봤다 -제18회 대종상 감독상/ 한국영화 기자상 작품상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제19회 대종상 우수작품상 자녀목 -제23회 대종상 작품상, 감독상/ 동경국제영화제 '세계영화 베스트30'선정 베니스영화제 본선 진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춘사영화예술상 심사위원 특별상
안현철 감독은 1929년 평양시 대찰리에서 수산업을 하시던 아버지 안영범(安永範) 선생과 어머니 이영팔(李永八)씨 사이에 삼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8년 평양고보(평2중)를 졸업하고 이듬해 1949년 북조선 영화촬영소에 입소하여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스타니 스라브스키의 배우수업론과 에이젠슈타인 및 푸토푸 킨의 몽타쥬 이론을 주축으로 한 영화수업을 했다. 특히 에이젠슈타인이 연출한 '징기스칸의 후예'라는 영화를 통해 많은 감동을 받고 그의 몽타쥬 이론과 연출론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후에 영화감독으로써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950년 그렇게 열심히 영화감독의 꿈을 키워가고 있을 때 뜻하지 않은 6·25 전쟁으로 인해 안현철 감독은 가족들과 함께 북한 땅 이곳 저곳으로 피난을 다니며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그해 10월 국군의 평양 입성과 더불어 조국통일의 기쁨으로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 안현철 감독은 몇 일 밤을 지새우고 평양 시내를 누비며 시민들에게 질서 유지를 호소하기도 했다한다. 그러나 통일의 기쁨은 잠시였다. 1951년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작전상 후퇴를 하게 되었으며 수많은 피난민들이 그러했듯이 안현철 감독 또한 3, 4일 후면 다시 고향땅을 밟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부모 형제와 아무런 약속도 없이 그렇게 헤어졌었는데 반세기가 지나간 지금껏 생사조차 모르고 이산의 한을 가슴깊이 묻은 채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기독교 안수집사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단신 월남한 안현철 감독은 당시의 전쟁 상황으로선 빠른 시간 안에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국군에 입대하여 3년간의 군복무를 1954년에 끝낸 후 상경하여 (고) 이창근 감독을 찾아간다. 안현철 감독의 매형인 (고) 이창근 감독(일제 시대부터 영화를 했으며 해방 후 1948년에 월남하여 우리 영화 기술발전에 공로가 큰 대선배 감독이며 기술자임)은 북조선 영화촬영소 출신 안현철을 이만흥 감독(극영화 '구원의 정화' 감독)에게 소개하여 그의 조감독으로서 한국 영화에 입문케 하였다. 그후 ' 인생화보 '(이창근 감독), ' 숙영낭자전 '( 신현로 감독) 등 여러 작품의 조감독을 거쳐 1957년 ' 어머니의 길 '이란 제명의 멜로 영화를 갖고 대한민국의 영화감독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당시 이 영화를 본 서울의 5대 신문이 과감한 연출기법을 사용한 템포 빠른 한국영화가 탄생했다고 격찬을 했다고 한다. 그때는 어려운 전쟁기여서 16m/m 필름으로 영화가 제작되다가 막 35m/m 필름으로 전환되는 시기였기에 모든 작업을 조심스럽게 하던때였다. 영화 창작기법 또한 귀납법적인 것 이외의 것은 감히 생각조차 못하던 시기였다. 즉 파격의 기법을 도입한다면 관객들에게 화면속의 인물 및 물체들에 대한 위치상의 착각 등으로 혼란을 일으켜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다. 그런데 안현철 감독은 첫작품인 ' 어머니의 길 '에서 원근촬영에 파격적인 기법을 과감히 사용, 템포감있는 몽타쥬를 구사하여 영화인들을 놀라게 했다. 아마 혈기왕성한 지금의 젊은이들처럼 당시의 안현철 감독도 젊음이 그러한 모험을 하게 했으리라 생각된다. 첫 작품을 성공시킨 안현철 감독은 계속해서 ' 과거를 묻지 마세요 ', ' 어머니의 힘 ', ' 푸른하늘 은하수 ', ' 윤심덕 ' 등 많은 멜로 영화를 감독하여 흥행적으로는 물론 작품성도 인정되어 멜로 영화의 대가라는 소리도 들었다. 안현철 감독이 멜로 영화를 많이 다루었던 건 1951년 1·4 후퇴 때 눈보라치던 대동강변에서 아무런 약속도 없이 따뜻한 인사말 한마디 못하고 3, 4일 후면 다시 만나리라 생각하고 헤어진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한을 영화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한 결과 멜로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한다. 그러나 사극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안현철 감독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1962년도작 ' 주유천하 '는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준 양녕대군과 이를 물려받은 동생 세종대왕간의 끈끈한 인정과 형제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표출하고자 최선을 다한 작품이라고 한다. 방탕한 생활로 왕족의 품위를 훼손시킨 양녕대군을 책하라는 신하들을 뒤로한 세종대왕은 정주(평안도)에서 양녕이 사귄 과부를 궁궐로 불러들여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줌은 물론 크게 잔치까지 베풀며 형인 양녕대군의 심사를 헤아리는 정감 넘치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하다는 안현철 감독의 말은 곧 안현철 감독의 작품성향을 짐작케 한다고 하겠다. 1957년의 처녀작 ' 어머니의 길 '에서 시작하여 안현철 감독이 연출한 모든 작품에 한 두장면씩 본인이 꼭 출연을 했다고 한다. 이는 1·4 후퇴 때 헤어진 가족이나 친지들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으나 지금껏 연락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우리 영화인들은 남과 북이 영화 교류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여 평화통일을 앞당기는데 밑거름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며 북쪽 하늘을 향해 연신 담배 연기를 뿜어낸다. 내 나이가... 내 나이가... 신음처럼 내뱉는 그 소리는 살아생전 고향땅을 밟아보려는 한의 소리이며 아픔의 소리이리라. 민족의 염원인 그날. 그리움과 사랑의 한이 절절히 서려있는 안현철 감독의 영화가 통일된 평양 시내 영화관에서 상영될 수 있는 그때가 하루 빨리 찾아와 주길 기원한다. 김수남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29. 7. 17일 평안남도 평양 출생 1958 < 어머니의 길 > 데뷔 작품명 1958 어머니의 길 / 낙화유수 1959 다시 찾는 양지 1960 과거를 묻지 마세요 / 어머니의 힘 / 아들의 심판 / 푸른하늘 은하수 1961 8.15전야 / 별 / 양산도 / 비단이장사 왕서방 1962 슬픔은 나에게만 / 주유천하 / 인목대비 1963 거지왕자 / 천관녀 / 사명당 1964 세종대왕 / 남이장군 1965 장보고 1966 생일없는 소년 1968 내목숨 다하도록 1969 용문의 여검 / 사랑이라는 것은 / 윤심덕 / 마곡의 결투 / 떠나도 마음만은 / 사랑은 가고 세월 만 남아 / 야적 1970 아빠 품에 / 야광주 1971 열두여인 / 아내여 미안하다 1979 용문호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