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 감독
- 김승옥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박예숙, 이동수, 권일정, 박봉수, 신경희, 추봉, 정미경, 라정옥, 김지영, 김옥주, 윤신옥, 김세라, 윤정희, 허장강, 박노식, 도금봉, 주증녀, 전계현, 남미리, 안인숙, 나애심, 양훈, 김순철, 김정옥, 장인한, 최일, 박옥초, 석귀녀
얼마 전 작고한 김수용 감독의 < 야행 >은 1974년 제작됐으나 사전검열과 영화법 4차 개정에 따른 제작사의 등록취소 문제로 1977년이 돼서야 개봉했다. <야행>은 김수용 감독의 전작 < 안개 >(1967)와 공통점이 많다. 두 영화 모두 김승옥 원작에 윤정희와 신성일이 주연을 맡았다. 두 영화는 급변하는 20세기 모던한 서울에서 삶의 방향을 잃은 주인공이 고향을 방문했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구조를 갖고 있다.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서울에서 중산층 이상의 계급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예정된 권태로운 삶에 무의미함을 느낀다. 두 주인공의 방황은 자의식적인 내레이션, 플래시백, 꿈과 환상의 장면으로 표현된다. 권태로움을 깨고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은 규범적인 중산층의 삶에서는 꺼내놓을 수 없었던 성적 환상의 실현이 된다. <안개>는 윤기준(신성일)이라는 부잣집 딸과 결혼해 제약회사 전무 자리를 꿰찬 남자의 시점으로, <야행>은 은행에서 일하며 이제 막 신축한 강남 반포 아파트에 살고 있는 현주(윤정희)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두 영화 모두에서 도시와 농어촌인 고향의 대비, 도시에서의 경쟁적인 삶과 신분상승의 욕망, 중산층 정상성에의 압박,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같은 국가적 트라우마의 영향이 희미한 배경으로 처리된다.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와 도시화라고 요약할 수 있는 이 쟁점들은 그 원인과 효과가 날카롭게 파헤쳐지기 보다는 개인의 방황을 정당화하는 동기 정도로 차용된다. <안개>와 <야행>은 공통점이 많지만 동시에 주인공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점도 두드러진다. <안개>에서 윤기준이 무진에서 잠깐 만나는 젊은 음악교사 하인숙(윤정희)을 포함해 아내, 옛 애인, 술집작부 등 여성 인물들은 그의 남성적 수치심, 혼란, 열패감, 권태로움을 반영하거나 보상하는 정형화된 약호들로 기능한다. 무진에서 서울로 가고 싶어했으나 금방 마음이 바뀐 하인숙을 이해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반면 <야행>의 현주(윤정희)의 방황하는 행동은 단순한 변덕이나 모순보다는 도시 신흥 중산층 여성의 내적 풍경으로 이해된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예술 영화를 표방했던 영화와 마찬가지로 <야행>의 현주(윤정희)는 도시 생활의 최첨단에 있다. 그리고 그 최신의 세련됨은 자본주의의 숙성과 관련이 있다. 그는 은행원으로 일하고 강남 개발의 신호탄이 된 반포주공아파트에 산다. 영화는 도시화와 더불어 지루함과 혼란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고속도로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 고속버스 터미널, 서울의 빌딩을 오프닝의 설정 쇼트로 보여준다. 지방에 있는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와 은행에 취직하고 이제는 숙련된 직장인으로 일하는 현주처럼, 서울 역시 어느 정도의 도시화와 근대화가 숙성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설정 쇼트에 이어 영화는 은행의 일상 업무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이제 인프라를 쌓고 직접적인 노동을 통해 성장하는 것에서 돈이 돈을 버는 금융자본이 중요해지고 지대수입을 통해 부를 증식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부의 증식은 계층 격차를 벌어지게 만든다. 영화는 그러한 현상을 강조라도 하듯 현금과 금고를 클로즈업 몽타주로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정치의 개입이든 경쟁에서의 도태든 탈락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동방상사의 사장이 오래된 부잣집에서 부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과 남자 주인공인 박대리(신성일)가 동방상사를 부도처리하는 장면이 바쁘고 역동적으로 교차편집 되는 와중에 안경을 쓴 현주는 돈다발을 응시한다.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남자들이 몰입해 일을 하는 동안 거리를 두고 약간은 지루하게 응시하는 현주의 모습은 흥미롭다. 영화는 여성인 현주의 관점에서 근대화, 도시화, 자본주의의 숙성을 다루게 될 것이라는 것을 조금은 뒤늦게 밝힌다. 현주 역시 도시 자본주의를 충분히 누리고 있지만 선명하게 정리되지 않는 혼란을 느낀다. 영화는 현주가 결혼을 통해 규범적인 중산층 가족을 이루지 못한 것에 불만을 느끼는 것처럼 묘사한다. 동료와 상사는 ‘노처녀’ 현주가 자기보다 어린 여직원이 결혼을 하는 것에 질투하고 있는 것처럼 몰아간다. 실제로 젊은 여직원들은 뒤에서 현주를 욕하고, 남직원들과 남자 상사들은 대놓고 그녀를 동정하며 비웃는다. 아무리 ‘안경만 벗으면 미인인’ 현주라도 나이가 들면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그녀를 대한다. 현주도 여기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불만은 훨씬 더 모호하고 복잡하다. 신식 강남 아파트에서 동거를 하고 있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는 박대리에 대한 불만이 있기는 하지만 현주 역시 그와 정말로 결혼을 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결혼은 그저 그의 욕망을 찾기 위한 여정을 추진하는 기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현주는 과거로 돌아간다. 휴가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현주의 회상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선생님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녀의 첫사랑은 베트남전에서 죽고 만다. 그녀의 아파트가 자신의 첫사랑이 묻혀 있는 현충원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최신식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그 자본주의적 현대성은 전쟁이라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대가로 사들인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국가가 오염되어 있는 것처럼, 결혼은 이제 중산층이라는 계층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현주의 욕망은 급작스럽게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알레고리가 된다. 그러나 현대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을 과시하는 김수용 감독답게 영화는 그 알레고리를 끊임없이 개인의 성적인 방황과 모던한 아파트의 스펙터클로 재치환 한다. 1974년 제작된 영화는 1973년 처음 공급된 당시 반포주공아파트의 실내 구조와 창밖 전망을 스펙터클화 한다. 영화 속 아파트는 은밀하게 섹스를 하는 에로틱하고 모던한 공간이자, 창밖으로 대단지 내 다른 아파트만 보이고 허허벌판인 황폐하고 삭막한 신도시 공간으로 묘사된다. 아파트 근처에는 베트남 전쟁 중 죽은 옛 연인이 묻혀있는 국립현충원이 있다. 현주는 현충원의 헌병 앞에서 스타킹을 올리며 유혹하는 제스처를 취하곤 한다. 이 장면은 강남개발과 베트남 참전이 모두 국가 주도의 근대화 프로젝트 영향 하에 있음을 은유하는 동시에, 신흥 중산층에 진입했지만 결혼 같은 규범은 원치 않는 여성의 욕망을 드러낸다. 지난 50년간 강남 중상층 욕망의 상징이 되어온 반포주공아파트는 2023년 재건축 진행으로 사라졌지만, <야행>은 그 욕망의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기록하고 기억한다. 박대리는 뒤늦게 현주에게 결혼을 하자고 하지만, 자신을 성적 도구로만 여기는 그에게 현주는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현주는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성적 방황의 여정을 시작한다. 근대화, 도시화, 자본주의의 숙성을 통과하는 여성의 혼란스러움은 성적 불만족으로 환원된다. 서울로 돌아온 현주는 은행이 내려다보이는 다방에 앉아 박대리와 나눈 대화를 복기한다. 그리고 박대리가 했던 대사를 돌려준다. 박대리는 “우린 안 해?”라고 묻고 현주는 “시시해, 결혼식 같은 건”라고 답한다. 낯선 남자와 총질하는 환상이 삽입되면서 이제 현주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은유화 한다. 남은 휴가를 보내던 현주는 도심의 육교 위에서 느닷없이 수갑이 채워져 여관방으로 끌려가 강제로 관계를 맺고, 이때 첫사랑과의 첫날밤 장면까지 교차되며 그녀의 환상은 극에 달한다. 이 장면은 여성 시점의 강간 판타지를 위험하게 보여준다. 아파트에 갇혀 사는 중산층 여성의 권태로움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근대화에 대한 불만족을 성적환상으로 대치한 현주는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환상은 환상일 뿐 그녀의 일상은 다시 반복된다. 하지만 박대리와 결혼하는 안일함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주의 눈치를 보는 박대리에게 단호하게 ‘휴가는 끝났다’는 쪽지를 보내고, 자신을 성희롱하는 남자고객을 뒤에서 욕하며 퇴근하는 현주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성적 대상화하는 남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표명으로 보인다. 특히 나이에 따라 여성들의 가치를 매기는 가부장적 결혼제도로는 걸어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현충원을 지나 양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아파트 사이의 소실점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현주의 뒷모습을 점프컷으로 보여준다. <야행>은 중산층이라는 경제적 기반 위에서 결혼이라는 규범을 거부하는 자본주의 근대 도시 여성의 얼굴을 보여준다.
*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2022 영화 글쓰기 키트: 영화 기자가 알려주는 리뷰 작성>의 과제 선정작입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동시에 왕가위 감독의 영화 제목이고, 개인적으로 참 애정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 래를 보면서 <화양연화>의 주모운(양조위)과 소려진(장만옥)이 오버랩될 때가 종종 있었다. <헤어질 결심>이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영화인 것처럼, <화양연화> 역시 ‘불륜’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우아하면서도 진중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남녀 주인공의 미묘한 엇갈림과 모호한 상황들로 안타까움과 애틋함을 전해주며, 동시에 연기나 대사 외에도 색채와 영상미 등 진중한 스토리에 녹아든 화면의 미장센이 빛을 발한다. <헤어질 결심>의 주제가인 정훈희의 노래 <안개>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김수용 감독의 영화 <안개>의 주제가이기도 한 것처럼, 왕가위의 <화양연화> 역시 1930-40년대 중국 가수 주선의 히트곡 '화양적연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쯤에서 ‘안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안개(Fog)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지표 가까이에 작은 물방울이 떠 있는 현상을 말한다. 구름과 안개는 떠 있는 위치가 다른 것으로, 하늘 높이 떠 있으면 구름이고, 지표 가까이 떠 있으면 안개이다. 구름일 때는 시야 속 경관을 아름답게 하지만, 안개일 때는 시야를 가리게 되는 것도 특이점일 것이다. 안개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흘러나오는 정훈희의 노래도 그렇거니와, 사건도 감정도 인물 간의 관계도 무엇 하나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애매하고 모호한 이 영화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아쉬운 흥행 스코어 속에서도 N차 관람하는 관객이 많은 이유도 서사구조는 심플한 데 비해 그것을 전달하는 장치들은 다양한 층위와 모호함을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기에, 각자 인상 깊거나 여운이 남는 (흔히 말하는 ‘꽂힌’) 부분에 대해 나름의 해석들을 자유롭게 내어놓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예전 인터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평범하고 착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극단적인 행동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는 질문에, 감독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변태라서 그렇습니다.” 좌중의 웃음을 끌어냈던 이 한 문장은 살짝 유머 코드를 갖고 있지만 영화감독으로서의 박찬욱을 단적으로 표현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좀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배운 변태’라는 말이 좀더 어울릴 것이다. 영화계에서 자타공인하는 영화광다운 해박한 지식과, 미장센에 대한 집착에 가까울 정도의 열정은 박찬욱이 대한민국의 잘 나가는 영화감독에서 칸이 사랑하는 영화계의 거장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박찬욱 감독이 그리는 영화는 리얼리티의 세계가 아니다. 영화는 사실성에 기반을 두고 현실을 재현하지만, 현실의 모습을 온전히 옮기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 안에 작가로서의 해석과 재창조가 들어가야 한다. 박찬욱 감독 스스로 본인이 그리는 영화 속 세상이 아주 사실적인 세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리얼리티의 세계가 아니라, 비유의 세계이다. 감독으로서 박찬욱이 중시하는 것은 어디를 선택해야 좋을지 모르 겠는 딜레마 상황이고,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기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 어떤 도덕적인 성격이 개입되어 있다면 더욱 좋다고 이야기한다. 관객들이 보았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으냐’라는, 윤리적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윤리적 질문이 난처할수록 영화는 재미있어진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은 영화감독 박찬욱을 표현하는 여러 수식어들 앞에 ‘배운 변태’라는 또다른 수식어를 자연스럽게 연결짓게 만든다. <헤어질 결심> 역시 ‘배운 변태’ 영화감독으로서의 박찬욱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요소들을 빠짐없이 담고 있다. 산과 바다로 대표되는 서래와 해준의 이야기이면서, 용의자인 서래에게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형사 해준의 딜레마가 그려지고 있다. 거기에 해준과 서래 둘다 기혼자라는 점에서 (서래의 남편은 극이 시작되자마자 변사체로 등장하긴 하지만) 불륜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 리얼리티가 아닌 비유의 세계, 범인을 잡아야 하는 형사로서의 자아와, 아름답고 묘한 여자에게 이끌리는 남자로서의 욕망. 그 둘 사이에서 안개에 싸인 듯 흐릿하고 모호한 상황에 처한 해준의 딜레마.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질곡동 살인사건의 결정적 단서가 되어준 서래의 말은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 ‘불륜’이라는 익숙하고 상투적인 윤리적 질문까지 얹어 놓는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해준이 밤새 서래의 집 앞에서 망원경으로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스마트 워치에 녹음하는 장면은 용의자 감시이면서 동시에 관심이 가는 이성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보다 많은 것을 알기를 원하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해준은 저녁을 아이스크림으로 때우고, 길냥이들에게 밥을 주는 서래를 지켜본다. 해준에게 서래 집 앞의 잠복근무는 감시이면서 관심이고, 의심이면서 매혹이다. 해준의 수사과정은 점점 더 서래에게 이끌리게 되는 마음의 동요이고, 연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용의자 선상에서 완전히 제외된 후, 서래와 해준은 비 오는 날 산사에 간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감정의 동요가 느껴지는 시간들. 굳은 살이 박힌 서래의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해준을 보며 서래는 마음을 전한다.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날 책임질 형사가 품위 있어서”라는 서래의 말에, 해준은 ‘경찰치고는? 한국인치고는? 남자치고는?’이라며 서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장난인 듯 아닌 듯 집요하게 물어본다. 서래 역시 장난스레 ‘현대인치고는’이라고 말하며 해준의 우산을 뺏어 들고 먼저 걸어간다. 혼자 남은 해준은 남은 핸드크림을 자신의 손에 마저 바른 후 서래를 쫓아간다. 그토록 달달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기도수의 살해 당일, 서래의 행적을 알게 된 해준이 서래를 찾아와 추궁하면서 파탄이 난다.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서래의 말에 해준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우리 일? 우리 일, 무슨 일이요?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해준이 인정한 것처럼 서래의 집 앞에서 해준이 했던 행동들은 비록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결국 사랑에 들뜬 보통 남자들이 하는 행동이었다. “나에게 선물이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길냥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하던 서래의 중국어가 번역기의 무미건조한 남성의 목소리로 번역될 때 해준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살인 용의자인 여자가 자신의 심장을 갖겠다는 말은 생명의 위협에 다름 아니다. 후에 서래가 ‘심장’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분명하게 수정하긴 했지만, ‘심장’이든 ‘마음’이든 서래가 해준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싶어 했음은 분명하다. 해준의 자아가 흔들릴 정도로 위험하고 소중한 무엇, ‘심장’ 또는 ‘마음’.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예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 붕괴됐어요.” 해준의 윤리적 질문은 기혼자로서 갖게 되는 불륜이라는 죄책감이 아니었다. 해준의 윤리적 딜레마는 형사로서의 자부심과 연인으로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그 사이에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헤어질 결심>의 장르는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형사물이 아닌 로맨스 영화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서래의 범행을 알게 된 후, 해준은 월요일 할머니의 폰을 바꿔주고 중요한 증거인 핸드폰을 서래에게 돌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품위 있는, 자부심 있는 형사였던 해준이 서래를 위해 자신의 품위를, 자부심을 포기하고 범죄행위를 은닉하게 도와주었다는 것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종말이다. 해준의 사랑은 서래의 범행 은닉을 도와주는 순간 끝나버렸고, 해준이 자신을 위해 품위 있는 형사이기를 포기한 것을 안 순간 서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그 순간 나를 좋아할 확률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사람의 감정은 ‘단일한’ 속도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감정의 크기가 같을 수도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긋나고 빗나가기 일쑤인 게 사랑이란 놈의 속성. 그렇기 때문에 해준과 서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서래는 해준의 자부심에 한 점 얼룩이 되었고, ‘붕괴되어버린’ 해준은 더 이상 서래에게 줄 ‘심장’이 없다. 서로에게 ‘꼿꼿하고’ ‘품위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된 두 사람. “당신 목소리요. 나한테 사랑한다고 하는. 너무 좋아서 자꾸 들었어요.” 얘기하는 서래에게 해준은 말한다. “내가요? 내가 언제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어쩌면 해준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몰랐을까? 아니면 끝까지 부정하고 싶었을까? 서래는 자신의 존재를 소멸함으로 해준의 ‘미결사건’이 되고자 한다. 보통 사람에게 짙은 안개는 이포를 떠나게 만드는 이유지만, 서래에게는 이포로 오게 만든, 단 하나의 이유였다. 죽은 까마귀를 묻기 위해 흙을 파내던 청록색 양동이로 바닷가 모래를 퍼내는 서래.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킨다.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나직하면서도 다정하게 속삭이는 서래의 목소리는 더 이상 사랑의 고백이 아니다. 서래의 실종 이후 해준이 겪을 상실감을 상상하면 오히려 저주에 가깝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이포의 바다는 무심하게도 해변의 모래알들로 서래가 누워있는 구덩이를 메운다. 강한 파도에 쌓여있던 모래 더미들이 쓸려나가고, 해준이 달려올 무렵에는 그곳에 서래가 있었다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해준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너무 좋아서 자꾸 들었다는 그 언젠가의 서래처럼.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타오르는 강렬한 석양. 하얀 포말로 부서지며 거칠게 넘실거리는 만조의 파도. 그 안에서 ‘마침내’ 해준도 자신이 이미 서래에게 사랑을 고백했음을 깨닫는다. 더불어 서래가 예전 해준의 말대로 핸드폰을 바다에 버렸을 것임을 감지한다. 충격과 슬픔에 일그러지는 해준의 얼굴. 이제 해준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시간도 없다.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풀렸던 신발끈을 다시 고쳐매고, 손전등을 켠 채 서래의 이름을 부르며 바다로 들어간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거칠게 밀려드는 파도에 몇 번씩이나 쓰러지면서도 해준은 바다로 들어간다. 서래가 있을 그 바다로. 빛을 잃어가는 하늘빛도, 보는 관객의 마음도 먹먹하다. 사랑이란,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을 헤매이는 것, ‘붕괴’될 것을 알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거센 파도를 맞으며 바다로 나아가는 그런 것. 안개는 미혹(迷惑)과 비슷하다. 무엇에 홀린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고, 정확하게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기도 어렵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안개는 인간의 욕망, 사랑과도 비슷하다. 혼돈과 모호함 속에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상실의 아픔도 내포한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 아니듯,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오히려 사랑의 감정을 소멸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트였을 때 그 때 보이는 풍경이 늘 아름답지는 않는 것처럼, 흐릿하게 눈을 가리던 것이 사라졌을 때 드러나는 진실의 모습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화양연화>에서 주모운이 결국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앙코르와트에 가만히 속삭이며 봉인해 버리는 것처럼, <헤어질 결심>에서는 서래가 해준의 ‘미결사건’으로 남고자 스스로를 바닷가 모래 구멍 안에 감추어 버린다. 안개 속을 헤매이듯 모호하고 흐릿한 감정의 편린 속에서도 누 군가는 사랑을 보고 이야기하고 냄새 맡는다. 비록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봉인될 수 밖에 없는 감정일지라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임은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말했어요?’라고 반문할 정도로 기억조차 못한다고 해도. 흐릿해도, ‘마침내’ 선명하게. 그리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1970년대 대중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깊이 기억된 세 여성의 이름은 < 별들의 고향 >( 이장호 , 1974)의 경아, < 영자의 전성시대 >( 김호선 , 1975)의 영자, 그리고 < 겨울여자 >(김호선, 1977)의 이화다. 세 작품은 공히 소설로 먼저 성공을 거두고 영화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별들의 고향>과 <겨울여자>는 소설로 발간되기 전 신문에 연재된 바 있다). 1) 그리고 당대의 영화는 물론 1980년대까지 여성영화의 어떤 기준을 만들어냈다. 혹자는 호스티스 장르에 무슨 여성영화냐고 물을 테지만, 그건 1980년대의 변질된 장르에 들이댈 질문이다. 특히 <겨울여자>는 호스티스 장르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한 인식은 안타깝게도 당대의 대중영화를 경험하지 않은 채 당연히 그러리라고 짐작하는, 그리고 쉽사리 범주화하는 데서 기인한다. 세 영화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1970년대 여성의 어둡고 외면당한 부분을 대중적으로 각색한 경우이며, 비록 한계는 분명할지언정 당시 여성의 삶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유의미하다. 잘못된 선입견을 또 하나 말하자면 현재 관객들이 1970, 80년대 한국영화의 수준이 낮을 거라고 여긴다는 거다. 조금 유치한 영화에 “요즘이 1980년대도 아니고” 라는 반응하는 걸 볼 때마다 과연 그 시대의 영화를 제대로 경험했는지 의심스럽다. 표현 기법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 걸 감안하지 않고 냉소와 비웃음으로 예전 영화를 보는 관객이 적지 않다. <겨울여자>도 그런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임이 예상된다. 성우가 맡은 이화의 목소리, 순진한 건지 판단지 서지 않는 인물의 태도 등에 헛웃음을 터뜨릴 관객이 빤히 그려진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성공을 재연하려던 김호선과 당시의 제작진이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 억울한 일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전성기에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원작을 바탕으로 윌리엄 포크너가 각본을 썼듯이, 한국에도 그런 자세로 영화를 대하던 때가 있었다. <겨울여자>의 원작은 조해일이며,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김호선과 호흡을 맞췄던 김승옥이 각본을 썼다. 본격적인 사운드트랙의 출발점인 <별들의 고향>의 음반이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 터라 <겨울여자>도 이에 부응했다. 김승옥처럼 김호선과 다시 작업한 음악가 정성조는 영화의 흐름에 맞춰 음악을 구상했고, 조해일, 김승옥이 직접 작사에 참여한 노래들도 대중의 사랑을 얻었다. 전체적인 톤은 프란시스 레이 풍의 유러피안 경음악이었으나, 익숙한 고전음악과 오리지널 사운드를 영화 전체에 펼쳐놓은 것은 인정할 만한 시도였다. 김호선은 여자 주인공을 ‘갇힌 존재’로 파악했다. 철조망을 근경으로, 서울의 고급 주택가를 바라보는 시점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주택 중 하나의 계단을 오르면, 굳게 닫힌 철문 너머에 이화가 산다. 김호선은 그런 인상으로 이화의 공간을 그렸다. 그녀는 보호받고 있음과 동시에 폐쇄된 공간에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인상은 이후 영화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전제 조건을 형성한다. 그녀가 어떻게 변하는가, 그것이 <겨울여자>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여고생 이화는 누군가가 보낸 편지를 엄마에게 ‘고발’한다. 그녀는 자신의 행실이 단정하지 못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여기며, 편지를 보낸 누군가를 불편한 감정으로 대한다. 임예진 의 ‘진짜진짜 시리즈’ - < 진짜 진짜 잊지 마 >(1976), < 진짜 진짜 미안해 >(1976), < 진짜 진짜 좋아해 >(1977) - 가 나올 때임을 감안하면 이화의 태도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혼자 뾰로퉁한 표정을 지으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영화는 그녀가 어떻게 자라 왔는지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서 폐쇄성을 사회적인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영화는 이화가 갇혀 있는 상황을 사회적인 조건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딸의 태도에 웃음을 지으며 ‘이런 편지는 혼자 간직하는 것이’라 일러두는 엄마의 태도에서 보듯, 이화가 지닌 도덕, 윤리관은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그녀 스스로 지키고 세운다는 느낌을 준다. 그 시기의 다른 여성 영화와 비교해, 이화라는 인물에게 바깥 상황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얕다. 이것은 이화라는 인물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가 제작된 시기 탓이기도 하다. 이화에게 영향을 끼치는 두 인물 – 요섭과 석기가 아버지와 맺는 관계는 사회적으로 읽을 여지가 다분하다. 요섭 부의 폭력성과 석기 부의 죽음은 1970년대의 사회정치적 특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만, 영화에 가해질 검열을 의식해 영화화 과정에서 삭제되었을 확률이 높다. 특히 이화의 의식에 깊은 영향을 주는 석기의 경우, 그가 하는 대사의 많은 부분은 ‘묵음’으로 처리돼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도록 처리되었다. 정학을 당했다는 부분에서는 소리가 거칠게 튀고, 강제로 징집을 당한 부분도 스스로 입대하는 것으로 알게끔 했다. 외출 중 교통사고로 죽은 것에도 의문사의 의혹이 끼어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원작에서 이화가 형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광준이란 인물을 영화에서 아예 제거함으로써 그녀의 사회적 변신을 읽지 못하게 만들었다. 영화에서는 이화가 군인인 석기에게 보내는 편지에 “석기씨 덕분에 훌륭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어요. 이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꼭 알아야 할 것을 모른 채 대학을 졸업하고 말았을 거에요”라고 쓰는 것이 다다. ‘꼭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시대를 반영한 이러한 각색으로 인해, 원작에서 드러나는 이화의 수동성이 오히려 상쇄되고 그녀의 내면과 자립적인 부분이 두드러지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화의 청춘 시대가 몇몇 남자를 거치면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겨울여자>는 얼핏, 남자들 사이를 전전하는 여성을 그린 당대 여성영화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고등학생이었던 이화는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반에 이를 동안 요섭, 석기, 민이란 남자를 만나게 된다. 별장으로 초대한 요섭이 육체적으로 접근하자 당황한 그녀는 “이게 뭐예요”라고 말하며 뛰쳐나간다. 그 일로 상처를 입은 요섭은 자살하고, 이듬해 이화는 석기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운동권 학생이었던 그는 입대 후 죽음을 맞는다. 다시 이 년 뒤 이화는 고등학교 은사였던 민과 조우하는데, 이혼 후 혼자 살던 그는 이화의 등장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남자를 거치는 과정은 다를 게 없으나, 여성을 착취하는 남성은 이 영화에 없으며 영화 또한 그들의 시선 아래 이화를 두지 않는다. 거꾸로 영화는 이화의 시선으로 남성을 바라보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전개는 상당 부분 이화의 출신 계급과 상관이 있다. <별들의 고향>의 경아는 좋은 남자를 만나 아이를 키우고 싶었으나 육체적으로 착취당하고 벼려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는 기술을 배워 돈을 벌고 싶었는데, 버스 안내원을 하다 팔을 잃은 뒤 뒷골목에서 몸을 팔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비극적 삶이 되풀이 되거나 비극적 삶에서 벗어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과 달리, 이화는 과잉 보호를 받으며 자랐으나 자기 삶의 결정권을 지닌 인물이다. 두 명의 남자가 맞는 죽음도 그녀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을 오히려 삶과 사회를 깨닫고 성숙해지는 계기로 삼는다. 기실 세 남자 - 미성숙한 요섭, 삶의 열정이 넘치지만 아직 젊은 석기, 그리고 상처를 맛보고 중년을 앞둔 민 – 의 구성은 이화의 내면이 점자 성숙해지는 단계를 은유하는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자가 아닌 이화 자신이다. 이화는 과연 독립적인 여성인가. 최소한 이전의 여성영화에서 보던 편한 상대는 아니다. “난 남자가 곁에 없으면 잠시도 살 수가 없어요, 난 그래요. 난 그런 여자에요.“라던 경아는 요즘 여성 관객에게 ’속 터지는‘ 인물로 비칠 것이며, 남자들은 그런 경아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만 찾다 버린다. 이화는 그 시대의 영화가 꾀할 수 있는 나름의 방책이 아니었을까. <겨울여자>는 멜로드라마 장르의 특성 상 어쩔 수 없는 강요된 슬픔과 비극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화의 위대한 점은, 사랑의 상처로 인해 뒤로 후퇴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녀는 매번 더 큰 사랑의 힘을 얻어 앞으로 나아간다. 한국 멜로드라마로선 아주 드문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이다. 웹을 둘러보다 한 관객이 ’<겨울여자>의 장르가 대체 뭔가요‘라고 질문한 것을 읽었다. 그만큼 전통적인 멜로와는 다른 영화다. 사실 <겨울여자>가 1970년대 관객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았다는 게 신기한 일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건 좀 이상한 멜로다. 세 남자와의 관계는 기능적으로 연결된 느낌이 강하다. 그녀가 새로운 관계로 진입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일종의 의식처럼 누드 신을 삽입한 것도 그러하다. 인물 사이에 깃든 애정의 촉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자신은 가부장제를 거부해 결혼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민의 재결합을 도모한다는 설정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거기에서 역으로 이화의 정체를 더듬어야 할 것 같다. <겨울여자>는 세 남자와의 관계가 진행될 때마다 전혀 다른 톤으로 바뀌는 영화다. 흡사 세 편의 영화를 붙여놓은 듯하다. 그건 그 사이에 이화라는 인물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화는 성숙의 다른 이름이다. 그녀는 지속적인 성숙의 단계를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이화는 대담한 존재이며 자신이 믿는 바를 의심하지 않는다. 죽음과 상처에 주눅들지 않으며 남의 시선 같은 게 선택을 가로막지 못한다. 첫 외박을 한 다음 날, 이해심을 갖추었으나 목사로서 보수적인 인물인 아버지가 충고를 하려고 하자 이화는 “친구 집에서 자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사람이 자면 안 되는 곳에서 잔 건 아니에요.”라고 답한다. 성인이 돼 만난 옛 선생이 친구가 되자고 해도 서슴지 않는다. 당황해 거리를 두려는 건 도리어 선생 쪽이다. 그녀는 윤리나 도덕을 따르기보다 진실을 발견해 직시하기를 원한다. 여기서 윤리나 도덕은 관습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데, 인간다움을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는 그녀에게 그건 때론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그런즉, 가족 이기주의를 이유로 결혼 제도에 거부감을 표현한다. 21세기의 관객의 시선으로 보기에, 이화는 빈 구석이 많은 인물이다. 그러나 요즘 만들어지는 한국영화의 여성과 비교해 봐도 그녀의 독립적인 기질은 신선하다. <겨울여자>가 한때 사랑받았던 옛날 영화가 아니라 여전히 흥미로운 텍스트인 건 그래서다. 1) 기록에 따르면 서울에서 세 영화가 거둔 관객의 수는 <별들의 고향>이 46만명, <영자의 전성시대>가 40만명, <겨울여자>가 58만명이다. 전산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임을 감안하면 실제 관객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 겨울여자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