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g
- 감독
- 김수림, 김아미, 손주애, 이규환, 김민지, 차민이
- 제작년도
- 2002
[사진] <추억은 영원히>(전택이, 1960)에서 이민과 노경희 이민(李敏)은 1947년 서정규 감독의 <불멸의 밀사>(1947)의 이준 열사 역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딘 후 한중영화사 제1회작인 강춘(江椿) 감독의 16밀리 시대극 <연화(蓮花)>(홍서량, 박양실 주연, 1948)와 반공영화 <화랑도>(염매리 공연, 1951) 두 편에 출연했다. <불멸의 밀사>는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전후 시기의 독립운동의 이면을, <연화>는 조선조 제25대 왕 철종 12년에 일어난 대교육자의 분기(奮起)와 기생 도화(道花)의 비련을 그린 것이다. (『민주일보』, 1948년 6월 27일, 광고) 배역 모두 2천여 명의 응모자 중에서 선발하였다. (『대동신문』, 1948년 7월 8일) [사진] 이준 열사 역을 맡은 이민의 첫 출연작 <불멸의 열사> (사진제공: 김종원) <화랑도>는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이 헤어진 애인을 만나 반공전선에 나서는 얘기로, 촬영 중에 6.25를 만나 중단됐다가 피난지인 대구에서 완성한 것이다. 이런 내용의 특성상 <화랑도>는 개봉 후 상이군인들이 조직한 영화계몽반에 의해 남한 일대의 각 지역에서 상영되기도 (「상이군인들이 영화로 계몽운동」, 『조선일보』, 1952년 11월 13일) 했다. 그는 이렇게 일찍이 영화계에 발을 들여 놓았으나 한동안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춘향전>과 <자유부인>의 히트 전후 1953년 휴전과 함께 정부가 서울로 환도한 후에도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부산, 대구 등지에 남아 있었다. 그해 초겨울이었다. 대구의 자유극장 옆 단골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이민의 눈에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들어왔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와 <갈매기>(1948)로 유명한 이규환 감독이었다. 이민은 여종업원에게 차 한 잔을 시켜 보낸 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이 일은 결국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에 기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원의 기생 딸 성춘향(조미령 분)을 사랑하게 된 사또의 아들 이몽룡 역이었다. 이민은 연기뿐만 아니라 제작 진행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예정했던 남원 대신 촬영지로 선택한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이란 마을은 로케 장소로는 적합했으나 기계를 움직일 동력이 없었다.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가까이 있는 달성광산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행히 일이 쉽게 풀리느라 마침 그곳 광산소장이 이민의 경성제대 공과 시절 동기생이어서 전기를 끌어올 수 있었다. [사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 여배우는 조미령 이렇게 필름 길이 1만 2천자, 상영시간 2시간 15분으로 완성한 <춘향전>이 1955년 1월 16일 서울 국도극장에 개봉되자 첫 날부터 초만원을 이루었다. 관객들이 서울 변두리는 물론 인천, 수원 등지에서까지 트럭을 동원하여 단체로 몰려들 정도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50) ‘영화60년’」, 『중앙일보』, 1980년 2월 21일) 였다. 그 결과 <춘향전>은 20일 동안 10만 여명이 관람하여 당시까지 한국영화사상 최다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에 따라 이민은 여주연인 조미령과 함께 일약 국민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여세를 몰아 <막난이 비사>(김성민,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와 <애인>(홍성기, 1956), <자유부인>(한형모, 1956) 등에 기용되었다. <막난이 비사>에는 조선조의 홍문관 정오품 벼슬인 교리(郊理)로 등장했다. 진사의 외동딸(이경희)을 소실로 삼으려다 반대에 부딪치자 그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아 목을 치게 하는 악역이었다. <단종애사>에는 세종대왕에 이어 등극한 후 재위 2년 만에 어린 단종을 신하에게 부탁하고 죽은 비운의 문종대왕 역을, 김내성 원작 <애인>에는 요정마담의 딸인 여대생(노경희)을 좋아하는 청년으로 나와 아프레게르적인 끼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민에게 결정적인 돌파구를 열어준 것은 크레인 촬영을 시도한 정비석 원작 <자유부인>이었다. 가부장 중심의 유교적 인습사회에 외래문화가 들어오면서 변해 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한 대학교수 부인(오선영: 김정림 분)을 통해 보여준 이 영화에 춤으로 그 부인을 유혹하는 건달 대학생 신춘호역으로 등장했다. 그는 ‘마담 익스큐즈 미' ‘알러브유’ 따위의 영어단어를 읊조리며 능란하게 대학교수 부인의 탈선을 부추겼다. 이 영화는 1956년 6월 9일 서울 수도극장(현재의 스카라)에서 개봉되었고, <춘향전>의 흥행을 무색하게 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사진] <자유부인>의 이민과 안나영(오른쪽) 그는 잇따라 <실낙원의 별>(홍성기), <애원의 고백>(홍성기), <여성전선>(김기영), <찔레꽃>(신경균), <청실홍실>(이상 1957, 정일택) 등 5편에 이어 58년 <그 밤이 다시 오면>(노필), <꽃도 생명이 있다면>(홍일명), <낙엽>(박구),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모정>(양주남), <청춘비가>(이규환), <별만이 아는 비밀>(이선경),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촌색씨>(박영환), <흐르는 별>(김묵) 등 12편에 출연했다. 주로 신문연재소설과 연속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사진] <청춘비가>의 이민과 김아미(오른쪽) (사진제공: 김종원) <청실홍실>에는 사장 딸(엄앵란)의 구애에도 전쟁미망인(이민자)을 사랑하는 운전기사로, <그 밤이 다시 오면>에는 잡지사 여사원(이빈화)을 임신시키고 회사 돈을 훔쳐 이용하려다가 실패하자 자취를 감추는 회사원으로, <청춘비가>에는 일찍이 고아가 돼 헤어졌던 여동생(김아미)을 혈육인 줄 모르고 사랑하게 되는 기구한 화전민 출신의 오빠로, <별아 내 가슴에>에는 대학생(김동원)과 기생(주증녀)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사귀는 여대생(김지미)의 양부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모르는 출판사 사원으로, <흐르는 별>에는 아내를 두고 월남한 후 혼자 딸을 기르며 온갖 시련을 겪는 장님으로 각기 등장한다. [사진] <그 밤이 다시 오면>의 이민과 이빈화(사진제공: 김종원) 1959년에는 <가는 봄 오는 봄>(권영순), <꽃피는 시절>(최훈), <꿈이여 다시 한 번>(백호빈),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신상옥), <내 사랑 그대에게>(하한수),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동백꽃>(정일택), <동심초>(신상옥), <밤마다 꿈마다>(이사라), <별은 창 넘어로>(홍성기),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박종호), <사모님>(최훈), <아내>(김묵) <애모>(신경균),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등 27편으로 출연작이 증가된다. 태평양전쟁에 끌려갔다가 딸(전계현)을 남기고 죽는 <가는 봄 오는 봄>의 학도병, 6.25전쟁 때 작전을 수행하던 중 눈에 부상을 입고 국군병원으로 후송된 <꿈이여 다시 한번>의 육군 중위, 수절하는 전쟁미망인(이민자)을 사랑하는 <별은 창 넘어로>(홍성기)의 관상대 기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주목을 끈 것은 고아로 자란 한 여성(김지미)을 사랑하여 결혼 단계에 이르렀으나 전사했다던 그녀의 약혼자(최무룡)가 나타나면서 파국을 맞게 되는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의 미8군 소속 교포 2세 헨리 장 역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군복과 양복을 번갈아 입으며 때로는 양미간을 찌푸리는 특유의 표정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의 이민과 김지미 최훈(9편)과 홍성기 감독(8편)의 단골배우처럼 나왔던 그가 신상옥 감독의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동심초> 등 세편에 기용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미혼 여성(최은희)의 원치 않는 임신과 기혼 여성(주증녀)의 불행한 불임의 모순을 다룬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의 너그러운 약혼자, 구한말 20세의 청년 이승만에게 개화학문을 배우라고 권하는 신긍우, 전쟁미망인(최은희)을 도우려는 친구에게 차용증부터 챙기는 <동심초>의 냉정한 증권회사 사장 신동일 역할이 그것이다. [사진]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에서의 이민과 최은희 이민은 이처럼 영화계에 진출한 뒤에 가장 바쁘고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할까, 이 기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꿈이여 다시 한번>, <나는 고발한다>, <비오는 날의 오후 3시> 등 세편의 제작에 손댔다가 손실을 보기도 했다. 연극 경험 없는 명문대 출신 정상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는 법. 그의 독주는 얼마 못가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한다. 이미 <젊은 그들>(신상옥, 1955)로 주목받기 시작한 최무룡과 <피아골>(이강천, 1955)에서 두각을 나타낸 김진규의 도전으로 확고한 듯싶었던 인기의 성곽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한 조짐은 1960년대에 이르면서 뚜렷이 나타난다. 60년 한 해 동안 출연 편수가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추억은 영원히>(전택이), <투명인의 최후>(이창근),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등 10여 편으로 줄어들고 이마저도 예시한 네 편을 제외하고는 조연급에 밑도는 것이었다. <애수에 젖은 토요일>(1960)은 그동안 우리 영화가 즐겨 다뤄온 민족분단, 이산의 비극을 소재로 한 것이다. 6.25 때 헤어진 사람을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윤락가로 전락한 여자(김지미)가 죽은 줄 알았던 애인이 부상당한 군인의 모습으로 살아 돌아오면서 빚어지는 비극으로, 이민이 그 주인공 박경일 중위 역을 맡았다. <추억은 영원히>에는 6.25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정신이상자가 돼 거리에서 방황하는 여자(김지미)를 간호하는 착한 운전기사로, <투명인의 최후>에는 부족한 능력 때문에 애인을 빼앗기고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죽는 대신 투명인간으로 변해 복수를 하는 끈질긴 캐릭터로 나타난다. 이후 이민은 62년 안현철 감독의 <그리움은 가슴마다>를 비롯한 <양귀비>(최훈), <여자의 일생>(신경균), <운명의 골짜기>(전창근) 등 5편과 63년 <돈바람 님바람>(김수용), <상처받은 두 여인>(이규환) <백마고지>(김수길) 등 3편, 64년부터 66년까지 <처녀성>(홍성기, 1964), <대석굴암>(홍성기, 1965), <눈물 젖은 왕관>(하한수, 1966)을 만들고 칩거에 들어간다. [사진] <여자의 일생>의 이민과 이민자(사진제공: 김종원) 그랬던 그가 10년 만에 장미희의 데뷔작 <성춘향전>(1976, 박태원)에 이몽룡의 아버지 이진사역으로 등장하여 관심을 끌었다. 19년 전 서른다섯 살 이몽룡이 이번에는 쉰여섯 그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제작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이민은 1951년 <화랑도> 이후 4년여 동안의 공백기를 제외한 15년의 배우생활을 마쳤다. 그때까지 출연한 70여 편 가운데 <춘향전>(1955)을 비롯한 <막난이 비사>(1956), <단종애사>(1957),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 <양귀비>(1962), <대석굴암>(1965) 등 6편의 시대·역사극과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백마고지>(1963) 등 전쟁물을 제외하고는 60여 편이 넘는 작품이 멜로드라마였다. 그 후 영화계를 떠나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이민이 17년 만에 홀연히 서울에 나타났다.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이었다. 일흔 세 살 때였다. 한 도예공의 삶을 통해 장인정신을 기리는 <서편제> 유의 영화라고 했다.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는다는 이 영화의 예산은 일화 5억 엔으로 학창시절 친구였던 일본아시아문예협회 키누가와 고오이치(衣川耕日) 회장이 부담한다고 했다.(⸀‘자유부인’ 플레이보이 이민 73세에 영화 찍는 인생」, 『부산일보』, 1998년 2월 6일) 그러나 일본과 중국의 합작을 꾀한 이 계획은 얼마 못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민은 1921년 2월27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시중(李時中)이다. 삼형제중 막내로 선비들과 어울려 시조창을 즐기고 사군자 치기를 좋아했던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러나 춘천초등학교(1934년)와 춘천중학교를 졸업(1939년)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회고 (한국영상자료원 기획, 「이민」,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1』, 도서출판 이채, 2005, 272~273쪽) 에 따르면, 벽이나 전주에 걸린 일본 시세이도(資生堂) 화장품의 선전을 위해 도자기로 만든 선전용 레이또 크림이나 눈에 넣는 와카모도라는 영양제 광고를 봐뒀다가 밤에 몰래 뜯어내 고철로 팔았다고 한다. 이렇게 3년 반 동안 모은 돈이 여비가 되었다. 1940년경이었다. 동경에서 가까운 사이타마현(琦玉県)의 우라와(浦和)고등학교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1년 정도 다니다가 귀국했다. 이후 경성제국대학교(서울대 전신) 예과에 들어갔다. 그는 이 대학을 나올 무렵 길에서 발탁돼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다. 스물여덟 살 때였다. [사진] <여성전선>(김기영, 1957)에서 이민과 조미령 1950년대 중반 이후 한때 최무룡, 김진규와 함께 삼각경쟁 구도를 이룬 이민에게는 당시의 일반적인 배우와는 다른 삼유삼무(三有三無)라는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그만이 가진 세 가지 있음(三有), 즉 서울대학교(경성제대 후신)를 나온 명문대 출신이라는 점과 <춘향전>이나 <자유부인>과 같은 최다 흥행작을 일구어낸 광복 후 최초의 미국풍 댄디보이였다는 사실이다. 세 가지 없음(三無)은 연극 경험이 없는데다 본격적인 액션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고 연기 외에는 대외 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시기에 첨단적인 정장과 점퍼, 스웨터의 옷맵시로 여성들의 허영심을 자극한 대표적인 '니마이메(二枚目: 미남배우의 통칭)였다. *
임원식 (林元植)은 1960년대 김기영 , 유현목 과 함께 한국영화 전성기를 주도한 트로이카 디렉터 가운데 가장 막강한 세력을 형성한 신상옥 사단이 배출한 감독이다. 신상옥은 일제시대에 등장하여 광복기까지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끌다가 납북된 < 자유만세 >이 감독 최인규 (崔寅奎)의 조감독 출신으로 그 밑에서 연출 수업을 받고 데뷔한 인재만도 강대진 (1959년 데뷔), 이형표 (1961), 장일호 (1961), 최인현 (1962), 임원식(1965), 나봉한 (1965), 변장호 (1967), 이경래(1971), 이장호 (1974) 등 10여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는 강대진, 최인현의 경우처럼 고인이 된 사람도 있지만 오늘날 한국영화의 대들보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다. 임원식 감독은 그 중 한 사람이다, 한국영화감독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어서만이 아니다. 그는 단체장은 처음이지만 영화사의 임원과 사장으로서 현장을 지키며 역할을 수행해 왔다. 남들이 스스로 좌절하여 영화계를 떠나가너 세를 형성하여 조직에 뛰어들 때 그는 이에 관계없이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해방 이후 어느 때보다 신구의 갈등이 심한 영화계의 현상을 감안할 때 그가 뒤늦게 6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로 영화감독협회 회장의 자리를 맡게 된 이유는 자명하다. 급격한 세대 교체의 격랑 속에서 몰락해 가는 원로층을 감싸고 젊은 감독을 포용하는 일은 작품 활동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30명의 회원을 이끄는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의지는 일부의 우려를 씻고 안정적으로 협회를 운영해 나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임원식 은 1935년 1월 22일 황해도 평산에서 유고적 가풍이 강한 천도교 집안의 3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임수동(林壽東)은 한말 의병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고 귀가한 후엔 집안을 일구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래서 소작농을 부릴 만큼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얼마못가 찾아온 조국의 해방은 그들에게 오히려 시련을 안겨 주었다. 북한 공산주의 정부는 부친을 지주로 몰아 더 이상 농토를 지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나마 고향에서 누천(漏川)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해방이 되던 1945년 12월 성탄절에 월남하여 4년제 휘문중학을 나온지 몇달 만에 이번에는 예기치 못한 6.25전쟁이 일어났다. 정부가 대전으로 옮기면서 그는 학도병으로, 가족들은 대전에서 제주도로 피란했다. 얼마 후 그는 제주에서 부모들과 합류했다. 황해도 태생인 그가 졸지에 제주도에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운명적인 일이었다. 여기에서 일생의 반려가 된 고경희 여사를 만나 뒷날 영화감독이 된 종호 (우뢰매), 종재 ( 우리들만의 세상 ) 두 아들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부친의 죽음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제주에서 오현고등학교를 다녔다. 동기생 가운데는 뒤에 국회의원과 농림부장관을 지낸 강보성과 서강대 명예교수인 문학평론가 박철희가 있었고 2년 후배로 시인이며 영화평론가인 김종원 이 있었다. 그때 임감독은 이 학교의 총학생회 회장이었다. 후배들이 떨만큼 확실하게 ''군기''를 잡아 나갔다. 도내의 어떤 ''어깨''도 그에게는 시비를 걸지 못했다. 그야말로 배포와 카리스마가 있는 학생회장이었다. 이 무렵 그는 제주여고 학생과 연애중이었다. 꽤 알려진 미인이었다. ' 임원식 이 삼성여관 딸과 연애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교정을 넘어 타교 학생들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였다. 학생의 연애가 금기시되던 당시의 사회 통념으로 더욱이 공공연한 소문이 나돌 만큼 둘의 관계가 발전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자 대학생인 신분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종로의 중앙예식장(지금의 종로예식장)에서였다. 가마타고 올리는 색다른 것이었다. 그다운 결행이었다. 대학은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서라벌예술학교였다. 이에 앞서 동국대학 국문과에 들어갔으나 연극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선 보다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어 선택한 결과였다. 서라벌예술학교 연극영화과로 옮기면서 그는 1년을 월반했다. 동기생 가운데는 졸업 후 영화계로 진출한 전조명 (田朝明), 장석준 (張錫俊)이 있었다. 유명 촬영감독이 된 실력파들이었다. 그리고 연기 쪽에는 성우로 이름을 떨친 남성우 등이 있었고, 1년 후배로 강대진 (姜大振), 김기덕 (金基悳) 등이 있었다.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를 장식한 연출 인재들이었다. 스승으로는 극작가 이광래 (李光來), 연출가 김규대(金圭大) 선생을 모셨는데 예술정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었다. 이때 서라벌예술학교에는 초대 학장으로 윤백남 (尹白南)이 있었다. 초창기 한국영화를 개척한 최초의 영화감독으로서 그는 이따금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였다.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특유의 억양으로 들려주는 영화, 연극의 역사는 재미가 있었다. 임 감독은 이무렵 학교 연극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를테면 <나상(裸像)>(이광래 작), <꿈>(유치진 작), <유령>(헨릭입센 작), <순동>(유치진 작)과 같은 연출상을 받아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만큼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 신협에 맞선다는 의욕과 패기로 창립하여 명동 시공관 무대에 올린 청협(靑協)의 <통곡>(1954. 김규대 연출)의 공연 때는 주연을 맡기도 했다. 1954년부터 55년 사이의 일이다. 임원식 은 학업을 마치자 기독교 방송의 공개 모집을 통해 입사하였다. 연출 겸 성우 일이 맡겨진 임무였다. 그때 성우로는 정상급인 정은숙, 천선녀, 남성우, 주상현 등이 있었다. 1957년께였다. 그가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선민(宣珉)영화사의 사원 모집이 계기가 되었다. 재일교포 영화감독 유진식 (劉振植)의 < 불멸의 성좌 >(1959. 최현 , 이빈화 주연) 촬영 때 제3 조감독으로 채용된 것이다. 어안렌즈까지 갖추고 촬영한 시네마스코프 규격이었다. 잇달아 그의 감독 작품 < 대원군과 민비 >(1959. 김승호 , 김지미 주연) 제작 때는 제1 조감독을 맡게 되었다. 김수용 감독과 인연이 닿게 된 것은 그의 여섯번째 작품 < 연애전선 >(1960. 김진규 , 김아미 주연)의 제1 조감독으로 기용되면서부터였다. 김 감독 밑에서 또 한편의 영화 < 돌아온 사나이 >(1960. 김진규, 최은희 주연)의 제작을 돕고 자연스럽게 신필름에 자리를 잡았다. 이 영화가 신필름 제작이었기 때문이다. 임원식은 이곳 연출부에 소속되면서 제작 시스템이 변화를 건의했다. 일본의 경우처럼 감독의 권한을 위임받아 조감독이 역할을 수행하는 이른바 파견 감독제 안을 내놓은 것이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기구 개편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는 신상옥 사단에 합류하면서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를 비롯한 < 열녀문 >(1962), < 강화도령 >(1963) 등 제작에 참여, 제1 조감독으로서 현장의 일을 완전히 익혔다. 철저한 연출 수업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책임 아래 메가폰을 잡는 일이었다. 그러나 쉽게 오는 듯 싶던 연출의 기회는 몇차례의 실기끝에 어렵게 찾아왔다. 신필름의 조감독 생활 4년만에 이루어진 ''입봉''이었다. 사극 < 대원군과 민비 >(1965. 김승호 , 최은 희 주연)는 그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데뷔작으로서 화려한 만큼 곡절도 있었다. 당초 이 영화의 개봉은 1년 전 구정 대목 프로로 예고돼 있었다. 극장 간판까지 올라가 있었으나 상영 당일 개봉이 무산되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진행되던 한일회담에 자극을 주어 영향을 미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해 3월 대다수 국민과 야당은 물론 서울 시내 대학생 5천 여 명이 매일 굴욕 반대 데모에 참여하여 정국은 폭발 직전이었다. 이 일은 결국 서울 일원에 걸쳐 계엄령이 선포되는 6.3 사태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임원식 의 영화 인생은 출발부터 순탄치 못했다. 그후의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977. 신영균 , 고은아 주연)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 도시로 간 처녀 >(1981. 유지인 . 금보라 주연) 등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어온 20여년의 영화의 길은 수난의 역정이었다. 이런 일들은 외부에 알려진 경우도 있지만 설령 알려졌다해도 ''임원식의 수난''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그가 애써 고난으로 포장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활달한 인상과는 달리 그는 스스로를 부풀리는 데에 서툰 내성적인 일면이 있었다. 그 자신이 가장 아끼는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합동영화사 제작) 역시 개봉 첫날부터 상영이 중단되는 돌발적인 사고에 직면했다. 일제 지배 아래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가 겪는 수난을 그린 이 영화가 박정희 정권의 눈총을 받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강행되는 유신헌법 철폐운동을 벌이다가 투옥된 문익환, 박형규 목사의 일을 상기시켜 일반인들에게 종교 탄압의 인상을 심어줄까 우려해서였다. 기대에 부풀어 극장 앞에 왔다가 휴관 안내문을 보고 분노한 임 감독은 거의 이성을 잃은 채 서울극장 옆 조흥은행 지점 빌딩에 있던 중앙정보부 선무공작과를 찾아가 이유를 묻고 항의 했다. 그러나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욕설과 폭력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남산의 감찬관실로 끌려가 4일 동안 곤욕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임 감독은 이 영화에 앞서 16밀리로 < 순교보(殉敎譜) >(1974)라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었다. 이기풍 목사의 항일 의지를 소재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나리오 검열 단계에서 반려되었다. 앞과 비슷한 이유였다. 결국 공산치하에서 싸우다가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플릇을 바꿔 반공적 요소를 가미한 뒤에야 통과되었다.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를 만들게 된 것은 <순교보> 때 겪은 좌절을 만회하려는 일종의 보상 심리였다. 하지만 그에게 더욱 심각한 좌절감을 안겨 준 것은 전례없는 애착을 갖고 김수용 감독에게 연출을 의뢰하여 직접 제작한 < 도시로 간 처녀 >(태창흥업 제작)가 상영된 지 9일 만에 각서를 쓰고 도중하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삥땅''협의를 받은 버스 안내양이 알몸 수색을 당한데 분노하여 회사 측에 항의하다가 옥상에서 투신한다는 내용으로 현실고발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었다. 버스 노조가 ''삥땅''과 ''알몸수색''의 묘사를 들어 전체 버스 노동자이 명예를 훼손했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이 영화의 주제로 보아 정작 불만을 표시해야 할 쪽은 노조가 아니라 버스회사 측이어야 했다. 문제의 확산이 당국이 방관한 데 있었다. 민간조직이 내용에 불만을 갖고 압력을 가한 이 사태는 영화 표현의 자유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도시로 간 처녀>는 상영 중단이라는 영업상의 손실뿐 아니라 대종상에 출품하는 기회조차 원천 봉쇄 당하였다. 주무당국이 접수를 미루다가 마감이 지났다고 기피함으로써 작품을 통해 평가받을 자리마저 얻지 못하였다. 영화평론가협회는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 중단 사태에 대해 성명서를 내 ''창작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유감스런 행위''라고 항의하였다. 이 영화는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제작자인 임원식 감독에게서는 집 한 채를 뺏어갔다. 임 감독은 대종상 여우주연상( 최은희 )과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박노식 )을 안겨준 데뷔작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이후 촬영에서 현상까지 10일 만에 완성한 통속시대극 < 숙부인 >(1966. 최은희 주연)을 비롯하여 홍콩과의 합작영화 < 대폭군 >(1966. 최은희 주연), 방랑검객의 신명난 복수극 < 석양에 떠나가다 >(1969. 오지명 주연), 원수인 양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묵비권을 행사하는 청년의 이야기 < 벌거벗은 태양 >(1970. 윤양하 주연), 나운규 의 원작을 뼈대로 한 < 아리랑 >(1974. 신성일 주연), 전처 소생의 오남매까지 도맡아 헌신과 사랑으로 가정을 일으키는 장한 모상을 부각시킨 대종상 작품상 수상작 < 어머니 >(1976. 윤연경 주연) 등 모두 36편을 내놓았다. 그의 작품은 현대물보다 사극, 통속 시대극이 많은 편이다. 정적인 작품보다는 < 영( 影)>(1968)이나 < 항구 8번가 >(1969)의 경우처럼 액션이 강한 역동적인 화면을 선호한다. < 벌거벗은 태양 > 등을 제외하고는 멜로드라마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번거로운 것보다는 명쾌한 것을 좋아하는 그의 기질이나 성격과도 무관하지는 않다. 임원식 의 영화미학은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 < 대폭군 >,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등ㅇ 나타나고 있듯이, 활력을 추구하면서도 모두 분출시켜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끌어들여 반추하는 여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일찍이 겪었던 시련의 자취로 볼때 마음속에서 익혀 왔으나 이루지 못한 어떤 한(恨) 같은 구상이 남아 의식 주변을 맴도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사색적이기보다 행동적인 그의 작품세계에 저항적인 일면이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필 1935. 1. 22 서울 출생 1956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졸업 1962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 데뷔 1976 합동영화(주) 전무이사겸 기획실장 역임 1980 태창영화(주) 대표이사 사장 역임 1990 (주)한국기독교영화제작소 대표이사 역임 1995 (주)기독교TV방송 전무이사겸 방송본부장 역임 1999 한국영화감독협회 제20대 회장 역임 2002년 월드컵기독시민운동 협의회 부회장 취임(현) 2000- (사)한국영화감독협회 초대 원장 피선, 춘사 나운규 영화예술제 집행위원장 대종상 집행위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조직위원 2001- 춘사 나운규 기념사업회 회장 작품명 1962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1963 대폭군 , 숙부인 1968 영 / 풍랑객 1969 석양에 떠나가다 / 의적 홍길동 1970 민비와 마검 / 벌거벗은 태양 1971 대감신랑 1974 박수무당 / 아리랑 1976 어머니 / 내마음 나도 몰라 1977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980 통천노호 1982 소림사 물장수 1992 불행한 아이의 행복 등 40여 편 감독 및 제작 수상 경력 1926 대학 연극 경연대회 연출상 수상 1962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 대통령 최우수 작품상 수상 1976 < 어머니 >로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 수상 2001 문화관광부 보관훈장 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