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속으로
- 감독
- 김영우
- 제작년도
- 2021
< 오월의 눈 >(Snow in Midsummer)은 말레이시아 총 킷 옹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지난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섹션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던 단편이자 말레이시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5.13 사건을 다뤘던 <장중한 무덤>(Cemetery of Courtesy)을 장편 프로젝트로 확장하면서 완성한 작품이다. 올해는 해외 주요 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성취한 아시아 영화들이 많았던 해로 평가할 수 있는데, 특히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수상한 말레이시아 출신의 아만다 넬 유 감독의 < 호랑이 소녀 >(Tiger Stripes)와 더불어 말레이시아 신인감독의 활약이 도드라졌다. <오월의 눈>은 올해 베니스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처음 공개되었고, 중화권 지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대만금마장 영화제 두 편의 개막작 중 한 편으로 선정되었으며, 총 9개 부문 후보지명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오월의 눈>은 말레이시아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공동제작으로 협업해 완성한 영화다. 말레이시아 출신이 대만으로 이주해 창작을 이어가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다. 차이밍량 감독과 호 위 딩 감독이 대표적이지만, 그 이후로도 상당수의 말레이시아 젊은 창작자나 감독지망생들이 대만으로 이주해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에는 여러 배경이 있겠으나, 아무래도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이주. 정착하면서도 여전히 중국식 문화와 언어, 생활을 유지해온 화교 문화권이라는 공통기반이 있어서 가능한 지점일 것이다. 특히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대만으로 이주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가는 라우 켁 후앗 감독은 1950년대 말레이시아 공산당 운동의 역사를 다룬 <무단 외출>(Absent without Leave)과 <오월의 눈>의 주요 소재인 말레이시아 5.13 사건을 다룬 <도끼는 잊어도 나무는 기억한다>(The Tree Remembers), 그리고 대만인과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이 충돌하자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당 정부가 유혈진압을 자행해 3만명 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했던 대만 2. 28 사건을 다룬 <야생 토마토의 맛>(Taste of Wild Tomato) 등을 통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며 잊혀진 역사를 재구성하고 영화적으로 복기하는 과정을 수행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공동제작한 <오월의 눈>은 최근 몇년간 도드라진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동남아시아국가들의 공동협업이라는 뚜렷한 흐름을 보여주는 케이스이기도 하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베트남 출신의 팜 티엔 안 감독의 < 노란 누에고치 껍데기 속 >(Inside the Yellow Cocoon Shell)은 베트남, 싱가포르, 프랑스, 스페인 등이 공동제작에 이름을 올렸는데, 감독의 전작이자 단편인 < 정신차려 >(Stay Awake, Be Ready)가 2019년 칸영화제 감독주간 단편경쟁에서 주목 받으면서, 싱가포르 젊은 프로듀서와 의기투합해 장편 프로젝트로 개발했고, 이후 유럽에서 주요 펀딩을 받으며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밟았다. 비슷한 예시로,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수상하며 주목 받았지만 자국인 말레이시아에서 개봉 당시 일부 장면이 삭제되며 검열논란을 일으켰던 아만다 넬 유 감독의 <호랑이 소녀>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독일 등 무려 8개 국가가 공동제작에 이름을 올렸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여러 프로젝트 마켓을 통해 주목을 모았던 장편 프로젝트들이 대체로 동남아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프로듀서를 중심으로 공동제작의 형태로 개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몇 년간 이러한 경향이 더욱 도드라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특히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여러 공동제작 프로젝트에 대만 영화기관과 펀딩이 주요 파트너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파트너십과 돌파구가 필요한 한국독립예술영화계에도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오월의 눈>은 1969년 5월 13일 말레이계와 중국계 이주민(주로 중국남부에서 이동해온 호키엔족)이 충돌해 유혈폭동으로 이어진 5. 13.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그리고 중국계 이주민들로 연결되는 복잡다단한 말레이 반도의 역사를 단박에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화교의 숫자가 많았던 싱가포르를 억지로 독립시켰고, 그럼에도 말레이시아에 남아 있던 중국인과 인도계에 대한 차별과 분리가 이어지던 1960년대의 말레이시아는 민족주의의 발흥과 인종 차별,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로 인해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폭발 직전의 인종 갈등을 촉발시킨 계기는 1969년 말레이시아 세번째 총선거 이후 3일째가 되던 5월 13일,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중국인들이 승리를 자축하며 거리에 나서면서 이에 자극 받은 말레이계와 충돌하면서부터다. <오월의 눈>의 제목은 오랫동안 중국인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인 고전 희곡인 관한경의 『두아원(竇娥寃)』에서 왔다. 『두아원』은 하늘에 사무치는 두아의 원한, 이라는 뜻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이 베어지는 참형을 당한 두아(영어로는 Dou E)가 처형 직전, 내가 죄가 없다면 초여름에 눈이 내리고 가뭄이 들 거라고 외치고 처형을 당했는데, 실제 그녀의 예언대로 서리가 내리고 가뭄이 들자, 조정에서 재조사에 나서 그녀를 음해한 사람들을 처형한다는 스토리를 지닌 일종의 잡극. 중국에서는 초등학교 과정에서도 소개되며 모든 연령대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이자, 13세기 중국을 배경으로, 당시 지배계층의 착취와 혼란스런 정치로 인해 고통 받던 민중들의 현실과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정치극이었으며,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한 경우를 당하는 민중에 대한 메타포로 종종 언급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어제목으로는 『The Injustice to You E』 또는 『Snow in June』로 번역되었는데, <유월의 눈>을 차용해 <오월의 눈>으로 제목을 지은 것은 감독의 명확한 의도가 읽혀지는 지점이다. <오월의 눈>은 크게 두 챕터로 나눠진다. 첫 번째 챕터는 1969년 5월 13일, 당시 중국인 집단 거주지역에서 중국오페라 거리극 <유월의 눈> 공연을 준비하는 극단 사람들과 두 아이를 가진 중국인 부부의 하루를 따라가며 그날, 중국인 거주지역의 현장으로 관객을 데리고 간다. 두 번째 챕터는 2018년 5월 13일, 말레이시아 14번째 총선거 이후 4일째가 되는 날 시작하는데, 이 총선거를 통해 말레이시아에서는 61년 만에 최초로 여야 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 1969년 5월 13일 당시, 살아남은 아 엥은 신문기사를 통해 5.13 사건 희생자들의 집단매장지로 추정되는 공동묘지터가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50년만에 아빠와 동생이 묻혀있을 수도 있는 매장지를 찾는다. 영화는 크게 두 챕터로 나눠지지만, 두 개의 챕터를 연결하는 역할은 거리극 <유월의 눈>의 주인공인 “두이 Dou E”가 맡는다. 중국인 거주지역에서 거리극을 무대에 올리는 극단의 주연배우인 두이는 첫 번째 챕터에서는 마제스틱 극장 지붕에서 유혈현장을 바라보며 위무의 노래를 부르고, 두 번째 챕터에서는 집단매장지에서 죽은 자들과 무명묘를 위해 위무의 노래를 부른다. 첫번째 챕터는 역사서에 기록된 문장에서 시작한다. “말레이 연대기 The Malay Annals”에는 “왕의 한센병은 감히 말라카 술탄에게 탄원서를 보낸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치료를 위해선 술탄의 발을 씻은 물을 마셔야한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 기록은 말레이인과 중국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주요한 텍스트로, 그리고 텍스트를 시각화하는 주요한 영화적 상상으로 재연된다.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딸을 데리러 온 엄마는 버스를 타고 아빠 아쿠와 아들이 있는 신사로 향한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아들을 위해 Datuk Gong (말레이와 중국의 신이 혼재된 형태의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행하는 부부. 아빠는 인근 마제스틱 극장 티켓 2장을 구했다며 아들과 극장으로 향하고, 엄마는 딸과 함께 거리극 <유월의 눈>을 관람한다. 당시 마제스틱 극장에는 대만영화 <부심적인 負心的人>(The Jilted)이 상영중이었는데, 상영 전 광고로 보여지는 차기 개봉작은 말레이시아 영화 <송곳니를 가진 왕>(Raja Bersiong, The King with Fangs)인데,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민담을 영화화한 것으로, 우연하게 음식에 들어간 피맛을 본 왕이 그 맛에 취해 더 많은 피를 원하게 되면서 민중들을 학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방화와 살인이 시작되고, 엄마와 딸은 극단원을 따라 무대 뒤 공간으로 숨어들지만, 외부에 소리가 들리지 않아 대피하지 못한 극장 안 사람들은 모두 살육당하고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간다. 영화의 두번째 챕터. 2018년 5월 13일. 당시 엄마와 함께 살아남은 아엥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남편의 구박에도 무기력하고 지쳐보인다. 오랫동안 아빠와 동생의 시신을 찾아 다녔지만, 그동안 엄마는 죽었고, 아무 기록도 흔적도 찾지 못한 채 아 엥은 무력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당시 5. 13 사건의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집단 매장지가 재개발된다는 기사를 보고, 음식을 준비하고 쿠알라룸푸르로 향한다. 당시 중국인 집단거주지역이었던 푸두 Pudu는 이제 고층빌딩이 들어선 도심으로 변했지만 마제스틱 극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서 있다. 어려서 다녔던 초등학교 옆 가게에서 차를 마시는 아엥은 옆 자리에 있던 일군의 사람들이 공연에 늦었다며 재촉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들 뒤로 남아 있는 낡은 신사에는 버려진 두리안 껍질들과 쓰러진 작은 불상들이 있다. 택시를 타고 숭가이 불로에 있는 지역 집단 매장지로 향하는 아엥에게 택시기사는 이곳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 있던 곳이라고 설명하고, 도착한 아엥은 그곳에서 아까 가게에서 만났던 무리들이 무덤 주변에 공연을 위한 무대를 설치하려 하지만, 공무원으로 보이는 관리인이 말리자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어느새 나타난 두이가 죽은 자들을 위한 위무의 노래를 부른다. 시대를 구분하여 두 개로 나눠진 영화의 구조는 완전히 다른 양식과 형식미를 보여준다. 학살의 순간, 극장 공간 안과밖에서 운명의 순간을 맞이해야 했던 한 가족의 비극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우아한 움직임과 다다미 쇼트를 연상시키는 낮은 앵글, 그리고 형식미를 강조한 미장센은 일본과 대만의 고전영화로부터 받은 영화적 유산을 여지 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여러 지점에서 허샤오시엔 감독의 < 비정성시 >를 떠오르게 한다. 특히 거리극의 공연장면을 삽입하고 거리극과 현실 사건의 스토리를 교차하면서 엮어내는 방식과, 코끼리를 탄 말라카 술탄이 등장하는 장면은 기이하고 신비로운 마술적인 영화적 경험을 선사하는데, 이를 다루는 신인 답지 않은 영화적 야심과 완숙미가 돋보이는 장면들이다. 2018년에서 시작하는 두 번째 챕터는 동남아시아 예술영화의 전통과 특징들이 묻어나는데,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아엥의 무료한 일상과 지근거리에 있는 신사의 존재, 그리고 산 사람인지 영혼들인지 불문명한 사람들이 등장해 도시를 지나 집단매장지에 이르는 동안, 카메라는 유령을 쫓듯 계속 흔들리고 유동하듯 움직인다.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드러나지 않는 사건의 실체. 남은 기록이라곤 증언과 기억밖에 없는 그날의 진실을 매년 5월 13일이 되면 집단매장지를 찾아와 제사를 지내는 유가족과의 인터뷰를 통해 인물과 사건을 창조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빼어난 사운드로 그날의 현장을 영화적으로 복원해낸 감독의 뚝심과 용기에 찬사를.
장소로서의 쓰촨/사천(四川) < 쓰촨의 신-신 극단 >의 원어제목은 초마당회 椒麻堂会, 영어제목은 A New Old Play.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영문타이틀과 원어제목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 해보면, 초마(椒麻)는 산파와 파 따위를 버무려 만든 양념으로, 특유의 매운 맛으로 명성이 자자한 쓰촨 지역요리에서 주로 쓰이는 양념이다. 즉, 원제는 초마파티 정도의 뜻인데, 쓰촨지역을 대표하는 맵고 강렬한 초마맛으로 가득한 축제라는 뜻일게다. 제목대로, 쓰촨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역적 특색과 상징들이 곳곳에 담겨있다. 나날이 새로워짐을 의미하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명한 신-신 극단은 쓰촨 지역의 전통극인 천극을 공연하는 극단이다. 중국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극 형태들이 존재하는데,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북경을 중심으로 해서 발전해온 경극, 장쑤성의 곤극, 그리고 쓰촨을 대표하는 천극 등이 있다. 각기 다른 매력과 레퍼토리, 그리고 특징들이 있지만, 천극은 한 갈래인 가면극 변검으로 잘 알려져 있다. 변검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영화로는 중국 5세대 감독의 대부로 불렸던 우티엔밍(오천명)감독이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연출한 <변검 The King of Masks>이 떠오르는데, 전통극에 등장하는 광대의 인생사를 통해 중국의 근현대사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관통하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쓰촨의 신-신 극단> 역시 중국의 근현대사를 살아낸 한 광대의 삶과 죽음 이후의 과정을 따라가는데, 시기적으로는 1920년대 국공합작부터, 항일전쟁,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과 대기근, 그리고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패왕별희>와 거의 동일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국신화에는 인간의 몸에 소머리(牛頭)와 말얼굴(馬面)을 한 저승사자가 망자를 지하세계로 안내하는데, 이들은 중국 전통극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들이라고 한다. 우두와 마면은 지하세계에서 염라대왕이 보낸 관료로 등장해 이 영화의 시작을 여는 역할을 한다. 막 죽은 주인공 치우푸를 지하세계로 안내하는 역할과 함께, 영화 중간중간 사람들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마다 주변에 나타나기도 한다. 우두와 마면이 찾아온 망자는 40년 넘게 신-신 극단에서 광대로 활동해온 치우푸. 공연을 통해 익숙하게 봐온 우두와 마면을 이내 알아본 치우푸는 두 저승사자와 함께 망자들이 모이는 고스트 시티를 향해 길을 떠난다. 그곳에는 모든 기억과 과거를 사라지게 만들 '망각의 수프'가 치우푸를 기다리고 있다. 수도호손산(樹倒猢猻散)-큰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들은 흩어진다 1920년대, 중국 쓰촨성. 북방 군벌과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국공합작의 시기. 천극의 광팬이자 이발사였던 리우/포키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우연히 장군의 목숨을 구하게 되고, 그 공으로 고위간부로 승진한다. 그리고 평생 꿈꾸던 극단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름을 신-신 극단이라 짓는다. 새롭게 문을 연 극단은 단원들을 모집하는 오디션을 열고, 거기엔 무리들 사이로 몰래 숨어든 일곱살 난 치우푸도 있다. 치우푸는 천극 아티스트이던 아빠가 죽고 엄마가 재혼을 하면서 버려져 갈 곳이 없고, 작은 덩치로 인해 성인들 사이에서 끼니도 챙기기 힘든 상황. 하지만 아버지가 취했을 때 늘 부르던 노래 소절들을 계기로 극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그렇게 일곱 살의 나이에 운명처럼 광대의 인생을 시작한다. 중일 전쟁을 거치며 승승장구하는 리우/포키와 함께 성장하던 치우푸와 신-신 극단은 국공 내전이라는 대혼란을 겪으며 다가올 불확실한 미래에 두려움을 느낀다. 내전의 혼란에서 극단은 문을 닫게 되고, 치우푸는 아편에 빠져 들고, 극단의 스승들은 제 갈길을 찾아떠나고, 단원들은 모두 거리에서 노래로 구걸하는 신세가 된다. 큰 나무가 쓰러지면 나무 아래 원숭이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법. 이후 공산당의 승리와 함께 극단은 다시 문을 열게 되지만, 인민극장이란 간판을 달게 된 극장에서는 인민을 위한 예술과 공연을 강요받게 된다. 하지만 신-신 극단은 대약진 운동이 초래한 극한의 빈곤과 기아, 문화대혁명이 강요한 자아비판과 광기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나가고, 치우푸와 그의 가족도 극단과 함께 모진 인생을 살아낸다. 펠리니적인 세계, 조루즈 멜리에스, 그리고 무성영화의 아름다움 영화를 연출한 치우지옹지옹 QIU Jiongjiong은 화가, 비주얼 아티스트,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주목을 받아온 아티스트. <쓰촨의 신-신 극단>은 감독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프로젝트이기도 한데, 치우푸의 삶은 천극 아티스트로 활동했던 할아버지로부터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저예산과 독립적인 방식으로 제작되었고, 6개월에 걸쳐 쓰촨에 2개의 스튜디오를 만들고 모든 소품과 무대를 혼자서 제작하고 직접 무대 배경을 그렸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4개월에 걸쳐 그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는데, 수공업적인 제작방식으로 구현해낸 독창적이고 몽환적인 무대배경과 어우러지는 배우들의 유려하고 우아한 움직임들은 무성영화의 아름다음을 떠올리게 하고, 멜리에스의 세계와 제작방식을 상기시킨다.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 환상과 기억, 그리고 이승과 저승이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는 세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실인지 상상인지 확실하지 않은 이미지들의 향연. 만화가이자 마술사이기도 했던 멜리에스가 촬영스튜디오를 만들어 스크린으로 보여지는 모든 미장센을 통제하며 상상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창조했듯이, 감독은 여러 겹으로 배치된 공연/연극적인 장치들을 통해 평면적인 공간을 입체적이고 깊이감 있는 영화적 공간으로 창조해낸다. 이미지와 상상력으로 재창조해낸 초월적이고 환영적인 세계. <쓰촨의 신-신 극단>은 20세기 천극을 대표하는 한 광대의 삶을 통해 시공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현실과 저승이 서로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는 세계를 구현해내고 있으며, 한 극단의 연대기를 통해 중국 역사의 한 챕터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역사의 소용돌이와 부침을 따라 부유하는 민중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중국 근현대사를 함께 횡단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역사의 암흑기를 살아낸 한 광대의 이야기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함과 유머를 잃지 않는다. 인생은 희노애락으로 구성되기 때문일거고, 재미와 유머를 강조하는 천극의 매력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 그래서 광대의 삶을 살았던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가장 영화적인 방식의 헌사이기도 하다.
시작은 올해 2월 열렸던 베를린국제영화제, 그러니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대부분의 영화제와 상영회가 온라인 상영과 개최라는 대안적 방식을 선택하기 전, 정상적인 형태로 개최된 마지막 국제영화제였던 베를린영화제에서 소다 카즈히로 감독을 만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공개된 < 멘탈 >과 이어지는 <정신: 제로>라는 신작으로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된 소다 감독과는 2018년 중국에서 잠시 만난 이후 재회한 셈이었는데, 정치 이야기, 미국생활 이야기, 작업이야기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신: 제로>가 소다 감독의 10번째 장편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딱 떨어지는 숫자나 년도를 기념하거나 그걸 계기로 행사를 도모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떨어지는 숫자에 맞춰 무엇인가를 하는 게, 명분이나 근거를 설명하기에 여러모로 용이하다는 현실적이라는 그간의 경험에 기반해, 자연스럽게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무엇이든 같이 해보자, 라는 제안을 즉석에서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전후로, 하라 가즈오 감독의 2019년 영화 < 레이와 시대의 반란 >을 보면서 소다 가즈히로의 전작 < 선거 >와 연결하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고, 이후 모리 타츠야 감독의 <나는 신문기자다>를 본 후로는 ‘선거’와 ‘언론’라는 키워드를 통해 일본사회를 조망하는 기획을 해볼 수 있겠구나, 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봄이 지나면서, 민환기 감독이 작업해오던 제주도지사 선거전에 뛰어든 녹색당 고은영 후보를 따라가는 < 청춘 선거 >가 마무리단계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선거’라는 소재를 두고, 한국과 일본의 쟁쟁한 감독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과 일본사회가 공히 처해 있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위기를 함께 논하고 비판하는 모습을 미리 그려보며 행복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올해 일어날 수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은 모두 강고한 체제로 굳어진 기존 정당 중심의 질서에 도전하는 소수정당이나 보통 사람들의 무모한(?) 도전과정을 기록한 영화들이다. 그 중에서도 하라 가즈오 감독의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2019년 7월에 열린 일본 참의원 선거에 10명의 후보를 낸 신생정당 ‘레이와 신센구미’와 그들의 선거 도전기를 따라가는 영화다. 레이와 신센구미는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으로 주목을 받으며 한국에도 꽤 알려진 ‘거리의 정치인’ 야마모토 타로가 주도하는 신생정당으로, 진보적인 경제정책과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반대와 원전 중단 등 일본사회에서는 금기에 가까운 급진적 정책들을 내세우는 정당이다. 하지만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주인공은 야마모토 토로가 아니다. 물론 그가 종종 등장하기는 하지만, 하라 가즈오 감독이 집중하는 주인공은 비례대표로 출마한 야스토미 아유미 후보다. 도쿄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는 경제학자이자 2014년 커밍아웃한 트렌스젠더이자 ‘여장남자교수’로 유명한 야스토미 아유미가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건 2018년 사이타마현에서 열린 시장선거에 출마하면서이다. 당시 말을 타고 유세를 벌이던 파격적인 모습과 이상적이면서 비현실적인 공약들로 화제를 모았던 그에게 야스모토 타로가 2019년 참의원 선거 비례대표 출마를 제안하면서 그를 다시 선거판으로 불러들인 것. 2018년 당시 야스모토 아유미에게 흥미를 가졌던 하라 가즈오 감독은 유튜브 채널에서 그녀와 인터뷰를 하며 다음에도 선거에 출마하면, 관련해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는 농담처럼 약속을 하는데, 그 약속을 기억한 야스모토 아유미 교수가 하라 감독에게 연락해온 것이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작업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라 가즈오 감독은 사건과 인물을 집요하게, 오랫동안 촬영하며 기록한다. 대상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형성하고 대상과 소통하면서, 최대한 가감 없이 그들의 말과 모습을 영화에 담아낸다. 그런 점에서,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하라 가즈오 감독의 작품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영화면서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특이한 지점들을 동시에 지닌 영화다. 다작 감독은 아니지만, 꽤 오랫동안 침묵하던 하라 감독은 2017년 <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 >으로 귀환한 이후 거의 매년 작품을 공개하고 여러 편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활발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하라 감독만의 작업방식은 8년이 넘게 촬영한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에도 그리고 올해 공개된 또 다른 영화 <미나마타 만다라>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는데, 미나마타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가족들을 다룬 <미나마타 만다라>는 15년을 촬영했고 편집에만 5년이 걸려 6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으로 완성된 그의 역작 중의 하나다. 하지만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프로젝트의 시작에서 완성까지 기존 작품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2019년 6월, 메일을 통해 야스모토 아유미 교수에게 연락을 받았고, 6월 26일 처음 만나 제작을 결정했고, 그리고 기자회견부터 이후 16일간의 선거운동 기간까지, 대략 3주간의 촬영으로 완성된 이 영화는, 제작기간을 비교하자면 전작들과는 궤를 달리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초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감독의 언급이 있다. 그건 오락영화를 만들겠다는 것. 인터뷰나 마스터 클래스 같은 강연에서도 감독은 관객이 흥미를 느낄 장면이나 요소들을 넣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다, 라고 종종 언급하고 있는데,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감독의 작업 중에서 가장 재치 있고 오락적인 요소가 많은 작품이다. 그건 아무래도 선거라는 제도가 지닌 연극적이고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압권은 목장에서 키우던 말을 도심에 데려와 선거유세에 활용하는 장면들. ‘Protect our children, heal the world’를 공약으로 외치는 야스토미 아유미 후보는 이번에도 말을 이용한 선거유세를 통해 그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는데, 도심에 나타난 말의 이질적인 이미지만큼 그의 선거유세는 우리에게 기이하게 다가온다. 오락적인 부분을 가장 많이 담당하는 캐릭터는 아무래도 주인공인 야스토미 아유미 후보이지만, 영화는 레이와 신센구미 비례대표로 출마한 다른 후보들에게도 고른 관심을 보여준다. 비례대표 중에서도 우선 순위를 받은 두 명의 중증 장애인 후보, 환경운동가 출신의 후보, 싱글맘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하는 여성후보, 일본창가학회가 모태인 공명당이 자민당과 연립여당을 구성하면서 보수화되자, 그에 반발하는 창가학회 멤버이자 오키나와 출신의 후보, 편의점 세븐 일레븐 점주로 대기업 횡포에 맞서 자영업자를 대변하는 후보 등이 등장해 자신들의 공약과 주장들을 당당하게 밝힌다. 선거는 말의 성찬이다. 다양한 주장과 선언들이 분출하는 열린 공간.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이 같은 무게를 갖지 못하고, 대중에게 전달되지 못하며, 그래서 세간의 관심을 받을 수 없다. 일종의 기울어진 운동장. 그건 선거 때만 그런 건 아니다. 일상에서도 권력에서 배제된 집단들의 목소리는 늘 왜곡되고 감춰진다. 그건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의 주민들도 <미나마타 만다라>의 환자들과 가족들도 겪고 있는 일이다. 오랫동안 왜곡되고 소외되어 온 그들의 이야기. 그래서 하라 감독은 그들의 곁에서 오랫동안 기록하며 그들의 진심이, 속내가 드러나는 순간을 기다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들려주는 말과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레이와 시대의 반란>도 감독의 세계관과 닿아 있다. 주류 언론에서 배제된 소수정당 후보들의 주장과 진심들. 정치는 사람을 잇는 수단이지 소통을 가로막는 장치가 아니다, 라는 믿음. 그래서 감독은 10명의 후보들이 쏟아내는 말과 증폭되는 감정들을 가까이서 끈기 있게 담아낸다. 몇 개의 인상적인 장면. 시민들을 좀비처럼 만들어버린 사회에 대한 저항이 마이클 잭슨의 히트곡 ‘스릴러’에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는 발상. 그래서 좀비들이 등장하는 플래시몹을 기획해 유세현장에서 진행하지만, 막상 영화에는 저작권 문제로 그 음악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기괴한 사운드효과를 배경으로 깔고 자막과 함께 영상만 내보는 장면은, 하라 감독의 재치가 돋보이는 백미다. 그리고 대중 앞에서 진지한 연설을 하는 와중에, 술 취한 아저씨가 등장해 어슬렁거리자, 후보보다 취객에 더 흥미를 느끼고 카메라에 담으려 하는 장면도, 감독의 여유와 코미디적 감각이 건재함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자료화면과 유튜브 영상을 활용하고, 재치 있는 자막처리로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작지만 소중한 발걸음을 내딛는 소수정당의 의미 있는 시작을 함께 한다. 하지만 영화보다 더 돋보이는 건, 여전한 감각과 시대정신을 지닌 하라 가즈오 감독의 태도와 그의 영화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