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마로와 숲속 이야기
- 감독
- 김재인
- 제작년도
- 2000
- 출연
- 김석주
<여고괴담> 연작은 한국영화사의 독보적인 공포영화 프랜차이즈다(이하 <여고괴담> 프랜차이즈는 ‘여고괴담’으로 기입). 1998년 < 여고괴담 >(박기형)의 예기치 못한 흥행(서울관객 약 65만 추정)에 힘입어 시작된 이 프랜차이즈는 < 여고괴담 여섯 번째 이야기: 모교 >(이미영, 2021)까지 24년에 걸쳐 총 6편이 제작되었다. ‘여고괴담’은 여고라는 장소, 자살로 추정되는 학생의 죽음,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원혼, 여학생들 사이의 다채로운 감정을 반복한다. 제작사 씨네2000은 프렌차이즈를 유지시키며 여고 공포영화라는 서브장르를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큰 흥행을 하지 못할 때조차 프랜차이즈의 브랜드 파워로 주목 받으며 신인 여성 배우와 감독을 발굴하고 키워내는 플랫폼 역할을 했다. 해당 프랜차이즈를 론칭한 작품은 1편이지만, 그 정체성을 구축한 것은 2편인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이다. 특히 학교라는 제도적 공간을 억압적 기제로만 한정하지 않고 여학생들 간의 그리고 교사와 학생 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상업영화로서는 다소 실험적인 연출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시청각적인 연출뿐 아니라 서사구성에서도 흥미롭다. 영화는 효신(박혜진)이 학교 옥상에서 자살한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그린다. 그날 아침 민아(김민선)는 수돗가에서 우연히 효신과 시은(이영진)의 교환일기를 줍고 그들의 관계에 깊이 빠져든다. 교환일기에는 효신과 시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갈등을 빚게 된 과정에 대한 각자의 내밀한 목소리가 적혀 있다. 민아가 읽어 내려가는 페이지는 주로 효신이 쓴 일기로 민아는 효신에 동일시하며 중성적인 외모와 태도를 가진 시은에게 서서히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민아는 가상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게임의 아이템을 먹는 것처럼 효신이 시은을 위해 넣어 둔 별사탕을 먹는다. 효신에 따르면 그 사탕은 독약이다. 효신의 일기는 시은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죽게 될 것이라 말한다. 민아는 강렬한 호기심과 불길함을 동시에 느낀다. 영화는 효신과 시은의 사랑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민아의 눈, 동일시 과정, 상상력을 통해 액자형 구조로 구성한다. 민아의 다양한 강도의 몰입은 영화보기, 등장인물을 깊게 이해하기, 2차 창작이라는 관객 행위로 연결해 볼 수 있다. 민아의 친구이자 효신을 향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는 연안(김재인)과 지원(공효진)을 비롯한 학생들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반응과 담론을 은유한다. 효신이 자살한 뒤 학생들은 효신의 죽음으로 휴교령이 내려지면 좋겠다는 식의 극단적인 냉소를 보이거나 효신을 위한 추모 공연을 준비하는 식의 갑작스러운 동정을 보이며 양분된다. 그 어느 쪽도 효신이 왜 자살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거리를 두고 외면하고 혐오하거나 알 수 없는 죄책감에 그를 동정할 뿐이다. 민아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영화에 감응하는 능력을 가진 관객이다. 몰입을 통해 효신과 시은을 이해하게 된 관객으로서 민아는 교육적 역할을 수행한다. 적극적으로 둘의 관계를 탐사하고 자신이 효신의 처지에 있다면 어떠했을 지를 상상하며 심지어는 그 감정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 효신은 스스로를 교육할 뿐 아니라 친구들의 태도도 바꿔보려 노력한다. 효신과 시은의 과거가 플래시백으로 효신이 자살한 당일에 지속적으로 침투하지만 그것이 교환일기를 읽는 민아의 상상인지, 효신이나 시은의 주관적인 회상인지, 아니면 전지적인 카메라의 과거 시간의 묘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영화에의 몰입과 동일시는 자아와 타자, 등장인물과 관객, 텍스트와 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몰입과 동일시의 감각은 효신, 시은, 민아가 서로 텔레파시를 통해 소통하는 것처럼 ‘다르게’ 보고 듣는 방법을 일깨운다. 효신이 신체검사 하는 날 자살을 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수치와 규격 속에 고유한 신체와 욕망을 맞추며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방식을 효신은 견디지 못한다. 영화는 시청각적 이미지를 통해서도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한다. 청각적인 측면에서 보면, 난청인 시은에게 효신은 ‘들을 수 있다/들을 수 없다’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깨며 시은이 다르게 들을 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시은만이 효신이 줄을 끊어낸 피아노 건반의 음을 제대로 들을 수 있다. 주파수의 채널이 다를 뿐이다. 한편, 민아는 신체검사에서 청력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시은을 기지개를 펴는 제스처로 도우며 함께 듣기라는 또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 시각적 연출은 보기와 기록하기의 다채로운 방식을 제안한다. 효신은 시은과 교환일기를 쓰자고 제안한 첫 만남에서 눈부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효신은 주체의 눈동자에 비친 타자의 이미지를 눈부처라고 한다고 말한다. 타자(의 이미지를) 눈에 담는다.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는 문자 그대로 타자의 이미지를 자신의 신체에 각인하고 포괄하는 실천이다. 비록 그것이 찰나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영화는 카메라의 시점과 영사되는 스크린을 하나의 신체에서 다른 신체로 끊임없이 옮긴다. 연안이 학교에 가져온 비디오카메라는 연안에게서 지원으로, 지원에게서 자신의 수업을 감시한다고 생각해 카메라를 빼앗은 교사에게로, 교무실에서 카메라를 훔친 효신에게 그리고 마지막에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제 3자에게로 이동한다. 연안과 지원의 카메라가 비난하고 고발하는 카메라라면, 효신이 옥상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함께 했던 카메라는 소수자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기록하는 카메라이다. 관객을 대표해 서사적 시점의 상당부분을 점유하는 민아는 텍스트를 통해 효신과 시은을 이해할 수 있는 적극적인 매개자의 역할을 하지만 한계도 명확하다. 스크린이 곧 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둘은 상호영향력을 갖지만 간극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효신의 자살 후 교사와 아이들은 이상한 현상을 겪고 학교에 갇힌다. 이것이 그저 공포와 죄책감이 전염된 단체 패닉에 의한 주관적 현상인지, 아니면 정말로 효신의 유령이 그들을 학교에 가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관객들은 강당에서 효신과 시은을 환영하고 그들의 관계를 축하해주는 학생들의 모습을 본다. 효신에 대한 혐오를 가장 크게 드러냈던 연안이 케이크를 든 모습을 보며 민아는 안도한다. 그러나 곧 이어 연안은 케이크를 효신의 얼굴에 던지고 이것이 모두 민아의 환상이었음이 드러난다. 텍스트의 주인공에게 동일시하며 스스로 변화를 경험한 관객은 자신과 함께 현실도 변화했을 거라 기대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선 텍스트로 안전하게 소비되는 동성애, 여학교라는 한정된 장소에 갇혀 나가지 못하는 폐쇄된 동성애라는 영화 스스로의 한계를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아의 바람 혹은 환상이 깨지고 난 뒤 스크린은 다시 눈부처가 각인된 눈동자, 유리천장, 천창 밖으로 보이는 효신-유령의 거대 얼굴로 이동한다. 학교에 갇힌 아이들은 패닉에 빠지고 혼란 속에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친다. 민아는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에 밀려 넘어지고 학교의 유리 천창에 각인된 거대한 효신의 얼굴을 본다. 유리 천창은 눈동자가 되고, 효신의 거대 얼굴은 눈부처가 된다. 효신은 상대방의 신체가 포용하는 눈부처가 되길 원했지만, 아이들로부터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시은으로부터 끝내 거부당한다. 마지막 안식처였던 시은마저 자신을 창피해하면서 등을 돌리자 효신은 자신을 담을 스크린을 잃는다. 클로즈업은 카메라와 대상의 거리가 가까운 쇼트이다. 그 거리는 또한 눈부처를 볼 수 있는 친밀한 관계의 거리이다. 시은을 포함해 다른 아이들이 다가서지 않으며 혐오의 거리를 만들자, 효신은 스스로 거대해지며 그들에게 다가가 눈부처가 된다. 효신은 이해를 원하지만, 그의 클로즈업은 비율이 맞지 않아 낯설고 기이하기만 하다. 그래서 스스로 감응하는 거대 얼굴이 된다. 효신은 자살을 통해 학교를 탈출하고, 학교도 외부도 아닌 옥상에서 시은과의 즐거웠던 한 때로 돌아간다. 둘을 기록하는 제 3자의 시점은 물리적 거리를 두고 있긴 하지만 약간의 흔들림과 비디오카메라의 질감을 유지하며 친밀성을 표현한다. 민아, 연안, 효신 그 누구의 시점도 아니다. 그들을 방해하지 않고 그저 기록하려는 태도는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도 둘의 감정과 세계를 지지하고자 하는 영화 그 자체의 시점이다.
1. …지돈 씨, 이 시대는 이상한 시기이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팽창하나 경련적인 변화의 물결의 시대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모순적 효과를 동시적으로 확대합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변화의 시대가 권력관계의 잔인함을 지워내지는 않고, 오히려 다양한 방식들로 권력관계들을 강화하면서 내파의 지점으로 이끕니다… 1) 연재를 시작한지 반년 가까이 지났지만 우리가 만들 에세이 필름의 제작비는 한푼도 모이지 않았다. 투자자나 제작자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연재 조회 수는 매회 마다 정확히 반토막이 났고 이렇게 계속 쪼개진다면 쿼크 입자 수준까지 내려갈 지경이었다, 라는 말로 JD가 지난 회를 시작한지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조회 수가 반토막을 넘어 1/3토막이 났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지난 반년 동안 우리의 연재를 읽고 뭐라도 반응을 보여준 사람은 셋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영화평론가들이다. 임재철: 아니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었다는데 무슨 길을 잃었냐고. 내가 보기엔 한국 영화에 들어간 적도 없는데, 안 그래? (직접 들음) 유운성: 제가 문근영 배우를 좋아하긴 하죠, 하하. 집에 싸인도 있고… (전해 들음) 오진우: 연재된 글들을 보고 웃어본 적은 없지만 응원합니다 (인스타그램에서 봄) 세 분 평론가에게 마음 속 깊은 감사와 우정을 전한다. 영화라는 우정. 하지만 지금 JD와 내게 필요한 건 일반적인 우정이 아니다. 영화라는 우정을 가능하게 하는 우정이라고 할까? 그건 만들어진 영화를 통해서야 비로소 가능한 우정이고, 영화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물적조건(=돈)과 뗄 수 없는 우정이다. 물론 모든 우정이 영화가 될 필요는 없다. 모든 영화가 우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냥 이렇게 말해야겠다. 영화라는 우정은 우정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온라인 상영관을 통해 <초국지소지천황>을 봤다. 1971년, 감독 하라 마사토와 일군의 배우들은 [고지키]로 알려진 역사와 신화에 관한 오래된 책을 바탕으로 이 16mm 영화를 촬영했다. 하라는 당시 촬영을 끝내지 못했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혼자 슈퍼8 카메라로 촬영을 재개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돌아보고, 신화는 외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물리적인 의미로는 촬영될 수 없지만, 영화 그 자체 혹은 영화 만들기 과정에 깃드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2) 몇 번의 재편집을 거쳐 현재의 형태로 만들어진 <초국지소지천황>은 완성되지 못한 16mm 푸티지와 촬영지에서 촬영지로 움직이는 1인칭 시점의 8mm 촬영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이미지들이 흘러가는 동안 하라는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떠들고, 때로는 직접 노래를 하기도 한다. 일종의 로드무비이자 영화일기, 에세이 필름, 바르트가 말한 글쓰기-의지(scripturire)에 빗대자면 순전한 응시-의지로 이루어진 영화라고 할까. 뷰파인더를 바라보는 동시에 렌즈를 바라보는 하라는 말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영화를 위해 희생한 과거도, 바칠 현재도 갖고 있지 않다.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모든 걸 갖고 있다.” 나도 20대 초반의 촉망 받는 영화 감독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텐데. 나는 마흔을 넘긴 서평가이지만 서평은 쓰지 않고,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섰지만 영화도 좋아하지 않는다(내가 쓴 [담배와 영화]라는 책의 부제는 ‘나는 어떻게 흡연을 멈추고 영화를 증오하게 되었나’다). 우정을 싫어하진 않지만 우정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건 싫다(진정한 우정은 우정이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식의 고색창연한 로맨티시즘의 발로일 수 있다). 영화를 위해 희생한 과거도 바칠 현재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건 우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라 마사토의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능의 카메라와 편집 프로그램에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느낀다(심지어 여기엔 ‘하지만’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2. “얼굴에서, 얼굴에서! 얼굴은 얼간이들을 위해 만들어졌군!” 3) 얼굴은 보편적이 아니라고 들뢰즈는 말했어요, 라고 JD는 말했다. 그건 백인 그 자체이고, 그리스도이며, 유럽인이고, 에즈라 파운드가 뭔가 관능적인 인간이라 부른 것, 요컨대 평범한 색정광(érotomanie)이며,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보편적인 것의 얼굴, 한 마디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거죠. 4) JD는 계속해서 말한다. -얼굴은 우리를 비인간성으로 이끄는 일종의 정치와도 같은 것, 따라서 인간이 운명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은 얼굴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기표화와 주관화로 작동하는 기계이자, 인종차별주의 및 민족중심주의를 산출하고 강화시키며 얼굴의 선별에 이용되는 기계인 얼굴성이라는 추상적 기계로부터 도망치는 거라나 뭐라나… 5) 밤이었고, 우리는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KTX 066호 열차를 타고 있었다. 긴 하루였다. 정지돈과 박솔뫼, 그리고 나는 삼요소라는 이름의 서점에서 오후 1시부터 밤 9시까지 독자들과 함께 하는 세 개의 세션을 진행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박솔뫼가 예매한 기차는 15분 먼저 출발했고, 둘만 남아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었다. 창작과 비평에 대해서, 문학과 사회에 대해서, 문학이라는 좁은 동네에 대해서, 자음과 모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고, 우리가 처한 상황과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해야 하지만 하지 못한 것들, 그리고 절대 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우리는 최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온라인 상영관을 통해 본 두 편의 영화, 하라 마사토의 <초국지소지천황>과 크리스 페티와 이안 싱클레어의 <런던 순환도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런던 순환도로>는 크리스 페티와 이안 싱클레어가 세계에서 가장 큰 바이패스인 M25 외곽순환도로에 관해 만든 작품으로 일종의 로드무비이자, 사회학적인 비평, 한 세기 전의 미래파 문학 속으로의 영화적인 여행이고,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두 인물 사이의 영화적 대화이다. 6) 두 영화는 여러모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일단 듀얼 스크린이라고 하나? 독립된 두 개의 화면이 동시에 흐르며 내레이션을 통해 진행된다는 것, 일종의 로드무비이자 영화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는 부분 등이 그렇다. 물론 다른 점은 더 많다. 하나는 사회(학)적-비평적-대화-외부를 향하는 영화(<런던 순환도로>)고 다른 하나는 신화적-시적-독백-내부를 향하는 영화(<초국지소지천황>)라는 것. 그중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하라는 카메라를 바라보지만 페티와 싱클레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열이면 열 <초국지소지천황>을 더 예술적이라고 말할 거예요. -왜죠? -일종의 진정성일까요. <런던 순환도로>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학적인 일화들을 다양한 레퍼런스들을 통해 배열하고 보여주는데 그걸 하나로 묶어주는 건 런던 순환도로죠. 따라서 이건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 일종의 교양다큐 같은 걸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예요. 반면 <초국지소지천황>의 모든 이미지와 이야기를 묶어주는 건 결국 하라 마사토라는 개인이에요. 실제로 감독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시네마와 내 얼굴을 마주하겠다, 대적하겠다, 내 얼굴을 보여주겠다, 뭐 이런 다짐을 몇 차례 반복하잖아요. 그런 감독의 행위가, 정확히 말하면 그런 감독의 얼굴이 영화에 진정성을 주입하는 거죠. -저는 사실 그 부분이 싫더라고요. -진정성을 주입하는 부분이요? -카메라로 자기 얼굴을 찍는 부분이요. 코로나19가 유행한 이후 나는 내가 얼굴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화에 나오는 얼굴만 그런 게 아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 상점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얼굴이 발산하는 정보가 너무 많아 종종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말 그대로 TMI. 언젠가부터 길을 걷고 마트에 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상적인 행위들이 훨씬 수월해졌는데, 그건 물론 마스크 때문이다. 얼굴, 얼마나 소름끼치는가. 들뢰즈는 말한다. 자연스럽게도 얼굴은 모공들, 평평한 부분들, 뿌연 부분들, 빛나는 부분들, 하얀 부분들, 구멍들을 가진 달의 풍경이다. 얼굴을 비인간화하기 위해 그것을 클로즈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커다란 판(gros plan)이며, 자연스럽게 비인간적이며, 괴물적인 복면이다. 7) 영화의 일반적 얼굴은 바로 제국주의의 얼굴이며, 자본주의에 의해 집요하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구축된 세계적 질서의 얼굴이지 않은가? 8) -그래서 우리 연재가 자본주의가 구축한 세계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완벽하게 정교한 얼굴 가면을 계속해서 바꾸어 쓰는 요원들이 등장하는 < 미션 임파서블 >에서 시작했던 거군요. 소름… 그러므로 비약하면, JD가 말했다. 우리의 에세이 필름은 영원히 지금 여기서 씌어져야 합니다. 기록, 확인, 재현, 묘사의 조작이 아니라 언어학자들이 수행동사라고 부르는 것, 정확히 말해 발화하는 행위 외에 어떤 언표도 가지지 아니하는 그런 진귀한 언술적인 형태. 삶은 영화를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영화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입니다. 이른바 포스트-얼굴Post-Ulgul!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천천히 눈이 감겼다. 강연 준비를 하느라 밤을 꼴딱 샌 탓이다. 우리 열차는 곧 광명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내리실 때는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시고…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안내 방송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부디 우리의 영화에도 광명(光明)이 있기를, 가능하면 우리의 삶에도, 지저스 크라이스트… 3. …지돈 씨, 저는 오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근본적인 계획입니다. 돈을 벌겠습니다. 아주 많이. 예술, 세계, 미래 다 좋지만 일단 돈부터 벌겠습니다. 돈을 벌면 세트부터 짓겠습니다. 촬영 들어가는 날에는 저는 감독 의자에 앉아 있을게요. 햇살이 워낙 좋으니까요. 지돈 씨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9) JD가 어느 글에서 쓴 것처럼 나는 불확신의 픽션을 가진 사람, 약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며, 뭔가를 이루겠다는 욕심이나 기분 같은 게 없어서 주도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다만 어쩌다보니 무언가를 하고 있는, 말하자면 세상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구원이든 종말이든 그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아니다.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스스로의 운명을 조종하고 얼굴로부터 도망갈 수 있도록.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박솔뫼와 정지돈과 내가 대전의 삼요소에서 진행한 세션 중 하나는 독자들과 함께 즉석에서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3명의 작가와 9명의 오프라인 참가자 그리고 10명 남짓한 온라인 참가자가 함께 ‘대전만세!’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 대전에 관한 소설을 써달라는 대전관광공사의 의뢰를 받고 대전에 도착한 금정연이 원고료가 든 서류가방을 들고 영화를 보러 대전아트시네마에 갔다가 엉뚱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홍콩과 마카오, 런던과 대천 해수욕장을 오가며 벌어지는 환상적인 이야기인데,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극장 앞자리에 앉아 있던 양조위가 금정연에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다. “도망가자.” 그러니까 가능하다면 그런 방식으로 도망가면 좋겠다는 말이다… 우리가 얻는 가장 단순한 아이디어 중 하나는 누군가 울고 있을 때 얻게 되는 아이디어다, 라고 존 케이지는 썼다. 뒤샹은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울고 있었다. 몇 년 후 같은 도시의 같은 지역에서, 거의 같은 이유로, 라우셴버그는 울고 있었다. 11) 그래서 얻게 된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존 케이지는 쓰지 않는다. 존 케이지가 늘 그렇듯이. 나도 울고 있었다. 집이었고 평범한 저녁이었다. 아이를 목욕시키고 옷을 입히려는데 커튼 뒤에 숨어서 나오질 않았다. 우리 아가가 없어졌네, 어디 갔지, 엉엉. 내가 우는 시늉을 하자 아이가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아빠 우는 거야? 응, 우는 거야.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아이가 말했다. 내가 여기에 숨을 테니까 아빠 울어. 알겠다고 하고 계속 우는 시늉을 하는데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커튼 튀에 숨어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지, 왜 우는 거지’… -우리 아이가 없어져서 울고 있었지. 약간 뻘쭘한 기분으로 내가 말했다. -나는 이빨이 튼튼한 아기 상어 포크레인인데. -이빨이 튼튼한 아기 상어 포크레인이구나. 이빨이 튼튼한 아기 상어 포크레인 어디 있어? -여기 숨어 있어. -거기 있었구나! 이빨이 튼튼한 아기 상어 포크레인, 이리 와서 옷 입자. 그러자 아이가 말했다. -나는 엄청 빠른 소방차 뽀로론데? -아, 엄청 빠른 소방차 뽀로로구나…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다 그런 것처럼 우리 아이 역시 변신의 귀재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쓰레기를 줍거나(청소차) 호스로 불을 끄는 시늉을 하거나(소방차) 폴짝 폴짝 뛰면서 개굴개굴 울거나(개구리) 인상을 쓴 채 거실을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돌며(돛새치 혹은 중장비차) 논다. 그렇담, 나는 생각했다. 나도 이것저것 따지고 재며 생각할 것 없이 그냥 감독이 되면 되는 거 아닌가? 로지 브라이도티는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에서 이렇게 말한다. 요점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즉 고전적 양태로 존재하기Being보다 오히려 결국에 우리가 돌연변이, 변화, 변형을 어떻게 재현하고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또는 로리 앤더슨이 현명하게 말했듯, 요즘에는 분위기moods가 존재의 방식modes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것은 변화를 창출하고 즐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이점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불안감의 원천입니다. 12) 4. …마지막으로 르네 도말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한 번 더 인용하겠습니다. 주려고 하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한다.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한다.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살게 된다. 13) 지돈 씨,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홍상수의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홍상수가 내가 되고 싶은 감독의 이상형에 가까웠기 때문은 아니고, 때마침 개봉을 앞둔 홍상수의 신작 제목이 < 당신 얼굴 앞에서 >였기 때문이다. -우연은 중요하죠. 저희 어머니는 정의당의 이정미 대선 경선후보를 지지하는데, 저희 어머니 성함도 이정미거든요. -고마워요 지돈 씨, 언제나 적절한 예를 들어주시네요… 우연은 또 있다. 로지 브라이도티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유일한 상수 는 변화지만, 그것은 단순한 과정도 아니고 단선적인 과정도 아니다… 14) -근데 정말 브라이도티 말이 맞더라고요. -뭐가요, 상수는 변한다고요? -네, 그리고 그건 단순한 과정도 아니고 단선적인 과정도 아니던데요. 내가 마지막으로 본 홍상수 영화는 < 자유의 언덕 >과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였는데, 그때 나는 홍상수 영화의 반복되는 어떤 정서, 느낌, 분위기에 조금은 질려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김민희와 정재영이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 같은 것. 그런데 지금은… -먼저 < 풀잎들 > 넷플릭스에 있어서 봤는데, 완전 트위터를 영화로 옮겨 놓은 것 같더라고요. 카페가 트위터고 각각의 테이블마다 멘션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구석에 앉은 김민희가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일방적으로 혼자 비계인용 달고, 그러다 갓생 사는 동생 커플 만나서 괜히 화내고, 다시 돌아와서 밤 늦게까지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랑 멘션을 섞고 결국 트친 되고… -그게 그런 내용이었어요? -그리고 < 도망친 여자 >도 봤는데 처음엔 경기도 외곽의 빌라에 사는 지인의 집을 방문하고 북촌에 있는 아는 언니 집을 방문하는데 두 집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구해줘! 홈즈’ 극장판 같은 건가? 아니면 각각의 집을 방문한 한국 남자들에 대한 일종의 생태학? 그런데 마지막에 들른 극장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는 장면을 보면서 깨달았죠. 아, 이건 씨네필들을 풍자하는 영화구나. 김민희=도망친 여자=씨네필이구나. -네??? -지돈 씨, 생각해보세요. 첫 번째로 방문한 경기도 빌라에서 김민희는 CCTV를 통해 이웃집 여자를 만나는 지인을 훔쳐봅니다. 두 번째로 방문한 북촌의 빌라에서는 도어락 모니터를 통해 스토킹하는 시인을 훔쳐보고요. 세 번째로 방문한 극장에서 일하는 대학 친구를 우연히 만나고, 한때 김민희의 연인이었으나 지금은 대학 친구의 남편이 된 작가를 마주치고 찝찝한 이야기를 나눈 후에 도망치듯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잖아요. 모르시겠어요? -(대체 무슨 소린지)??? -그렇지만 제일 좋았던 건 < 클레어의 카메라 >였는데요, 저는 그것이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영화에 어떤 힌트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 1)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로지 브라이도티, 김은주 옮김, 꿈꾼문고, 2020) 13쪽 2)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홈페이지의 영화 소개 참고 3) <누벨 바그>(장 뤽 고다르, 1990) 4) [천 개의 고원](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338쪽 참고 5) [영화 속의 얼굴](자크 오몽, 김호영 옮김, 마음산책, 2006) 307쪽 참고 6)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홈페이지의 영화 소개 참고 7)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앞의 책, 362쪽 8) 자크 오몽, 앞의 책, 308쪽 9) <기생충>(봉준호, 2019) 중에서 기우의 편지를 변형함 10)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정지돈, 문학동네, 2021) 43쪽 참고 11) [사일런스](존 케이지, 나현영 옮김, 오픈하우스, 2014) 131쪽 12)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로지 브라이도티, 김은주 옮김, 꿈꾼문고, 2020) 15쪽 13) [마운트 아날로그](르네 도말, 오종은, 이모션북스, 2014) 14) 변신 495쪽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학교에 관한 두 가지 장면이 있다. 운동장을 가득 채우는 수백명의 학생들. 이들은 모두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구령을 외고 있다. 유독 한 아이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을 제압하듯 뻗어나온다. 당신은 우연히 그 아이와 시선이 얽혔다. 그 살기등등한 눈빛. 한편으로, 밤중에 복도를 걷고 있는 당신의 곁을 슥 지나치는 누군가가 있다. 불현듯 이 시간쯤 학교에 출몰한다는 어느 여학생 귀신의 얘기가 떠오른다. 소름이 돋아 다시 뒤를 돌아본다. 등을 보인 채 멀어져가는 그 애는 낯익은 옆 반 학생이다. 아니 잠깐, 그런데 그 애의 머리가 단발이었던가? 두 단편적인 이미지는 학교라는 공동체-공간이 품고 있는 매혹과 공포의 서로 다른 뿌리다. 전자가 존재증명을 향한 분투와 같이 획일적으로 도열된 이미지의 표면을 뚫고 나오는 우상 신화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표상한다면, 후자는 또다른 원천을 나타낸다. 바로 모두의 외양이 서로의 복사판처럼 유사한 상황 속에 불쑥 유령적인 징후가 들이밀어지는 순간이다. 새로 출현한 우상을 구심점으로 한 집단이 다시 질서지어지는 과정과는 반대로, 이는 유사 판본들의 차원에서 경쟁과 유희의 장이 열리는 원심적인 작용을 의미한다. 진본으로 이름 붙여진 것은 유실되었거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상호 유사성 가운데 태어난 판본들은 계속적인 인력과 척력 작용으로 서로를 반영하면서 유기적 관계망을 형성해나간다. 올해로 개봉 20주년을 맞이하는 김태용, 민규동 감독의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 김태용 , 민규동 , 1999)는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관객과 평단을 사로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이 '여고를 배경으로 삼은 공포영화' 시리즈를 대중의 인상 속에 고유명사처럼 안착시킨 작품이다. 그런데 이렇게 '여고괴담' 시리즈를 떠올릴 때마다 흥미로운 것은 여고라는 장소와 괴담이라는 소재 사이에 어떤 친화성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연결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남고, 혹은 10대 남성들의 세계를 경유하곤 하는 학원-조폭물 계보의 영화들이 사회 구조나 권력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우화로서 독해되는 데 비해, 여성집단의 공간은 주로 괴담이나 불가해한 사건들의 발원지로 묘사되어온 것은 한국 영화가 만들어온 어떤 하나의 경향성 여기에서 그 계보를 다루는 것은 목적이 아니고, 또 모두 다룰 수도 없는 광대한 주제이지만, 한국영화에서 가장 시원적인 ‘여고’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중간중간 등장하는 여공들의 야학까지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하녀’라는 강렬한 캐릭터의 모태공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이 여공 집단은 언제나 입을 모아 합창하고, 중년의 중산층 남성 주인공 동식의 등 뒤에서 끊임없이 가십과 저들만의 은밀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주인공에게 무의식적인 공포를 심어주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드러난다. 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가운데 '여고괴담'을 위치시키고자 한다면, 시리즈의 다른 편들과는 달리 당시의 10대 여성의 문화는 물론 여성 퀴어 주체들에게까지도 시선을 확장하면서 '여고'라는 실제적인 장소성을 세밀하게 포착했다는 평을 받아온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야말로 우리가 다시금 주목해야 할 작품이 될 것이다.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그 화학작용에 집중하며 통상적인 학원 공포물의 기획을 넘어서고 있다는 기본적인 인상들에 더해, 이 영화는 왜 '여고'는 '괴담'으로 대중에게 먼저 읽혀져야 했는가를 근원적인 지점에서 재질문하며 적극적으로 여고라는 공간의 공포를 성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의 진입, 몸의 배반] 늦은 등교길, 지각생 민아(김규리)는 수돗가에서 숨을 돌리다 우연히 빨간색 교환 일기장 한 권을 발견한다. 그 일기장의 주인은 어딘가 재수 없는 아이로 소문 나 있는 효신(박예진)과 민아의 동급생인 시은(이영진)이다. 호기심에 일기장을 들춰보기 시작했던 민아는 점차 빨간 일기장에 담긴 효신과 시은의 관계 속으로 깊이 몰입해 들어가고, 그에 따라 같은반 단짝인 지원(공효진), 연안(김재인)과 공유하는 학교에서의 평범한 일상들 위로 겹쳐지는 또다른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피처럼 빨간 일기장 속에는 효신과 시은 사이의 이끌림과 갈등, 그리고 효신의 외로움이 선명하게 맺혀있다. 효신의 투신을 기점으로 학교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기이한 사건들 틈에서 섬뜩하게도 계속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면서, 민아는 이 파국의 진실을 좇아 학교를 누비게 된다. 단순한 줄거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민아는 틈입자이자 매개자로서, 현재와 과거, 나와 타자, 효신과 시은, 학교에 공존하는 일상적 세계와 유령적 세계 등의 대립쌍을 자연스레 포개어 놓는 역할을 담당한다. 제 3자의 눈을 경유해 풀려나가는 이야기 구조는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 특히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민아와 비교할 만한 또다른 대칭쌍이 함께 제시된다는 것이다. 학교의 국어선생님인 고형석 역시 이야기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으며, 효신과 시은의 사이를 잠시나마 비집고 들어갔던 전적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형석이 이야기 안에서 하고 있는 역할은 크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는 효신과의 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야기 공간으로부터 끊임없이 거부당하고 있는 것처럼 무력해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마도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두 명의 틈입자, 민아와 형석 중 왜 한 명은 이야기의 매개자로서 승인되고 한명은 외부자로 밀려나는가? 다시 말하면, 왜 민아는 효신과 시은의 관계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며, 형석은 관계의 바깥에서 사멸하는가? 우선, 타이틀 시퀀스 이후로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의 도입부, 수돗가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민아와 형석은 여기서 교차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 행동 경로를 자세히 살피면 두 사람이 자연스레 어떤 공통분모를 형성하면서도 서로 빗겨나며 대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돗가에서 물의 세례를 받듯 얼굴을 흠뻑 적시다 우연히 효신과 시은의 교환일기장을 발견하는 민아와, 쓰레기를 주워 버리고 간단히 한 쪽 손만을 씻어낸 뒤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형석 사이의 평행선은 이후로도 영화에서 몇 차례 반복된다. 민아가 별다른 의식 없이 효신의 '약'을 삼켜버리는 데 비해, 형석은 효신과 어울리고 싶어 하지만 그와 마시는 술을 모두 게워내고 마는 체질이다. 효신의 소지품을 경유해 환영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같은 패턴을 볼 수 있다. 민아가 온몸으로 침투해오는 효신의 손길로 인해 기절할만큼 강렬한 빙의를 경험하는 반면에, 형석은 효신의 환영을 겨우 귓가로 불러들여 무언가 속삭이게 했을 뿐이다. 그리곤 목숨을 끊고 만다. 이러한 차이들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분명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복잡한 설명 역시 가능하겠지만, 의외로 가장 유력한 해답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단순한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외연이다. 고형석은 선생-남성이고, 민아는 학생-여성이라는 가시적인 차이 하나. 영화의 초반부에 생기를 불어넣는 지원과 캠코더 소동은 이 당연한 차이를 재확인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달려와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며 웃는 민아와 달리 형석은 지원의 짝사랑 대상이자 멀리 떨어진 타자로서 암시된다. 지원은 그의 사적인 공간을 엿보려 캠코더를 들지만, 창과 창이 마주보는 건물구조를 통해 지원과 형석 사이에 놓인 물리적 거리가 정사-역사의 관계로 간신히 봉합되었을 때조차, 그의 얼굴이 아웃포커스로 새겨진 역사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결코 섞일 수 없는 이질적 이미지로서의 형석의 외연이다. 반면에, 민아는 '동등한 몸'으로 효신-시은의 관계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 이것은 공동체-연결망을 유지하는 유일하고도 암묵적인 규칙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즉, '외적인 유사성' 속에서만 여기-이-공동체의 몸으로 귀속될 수 있음. 같은 원리로 효신의 죽음 이후 학교의 옥상, 복도, 화장실에서 출몰하는 유령들이 화면을 스칠 때, 우리의 시각이 판별할 수 있는 정보는 하나 뿐이다. 이들의 외양을 교복을 입은 그 주변의 친구들과 구분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공포인 동시에 매혹이다. 그러므로 왜 상관도 없는 타자의 일에 개입하냐는 친구 연안의 말에 "너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라고 응수하며, 효신의 죽음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는 민아의 뛰어난 공감적 상상력은 이 유기적 네트워크의 본질적인 측면으로 확대하여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효신이 자신의 창작시를 통해 우리에게 넌지시 던지는 힌트 그대로다. "나는 누구도 될 수 있다. 진실이 거짓이 되듯.“ [재수 없는 것들] 그러나 이러한 네트워크-몸에도 언제나 정상성의 기준이 요구된다. 주요 사건들이 벌어지는 7월 9일은 효신과 시은의 생일이자 신체검사일이기도 하다. 낭만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시선을 가진 효신은 키나 몸무게를 표지하는 숫자들이 진짜 성장에 대해 무엇을 알려줄 수 있겠냐고 반문하지만, 의외로 아이들의 몸은 쉽게 그러한 분별과 통제의 수단을 전유하고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사적인 신체적 특징과 정보를 교실이라는 공동의 공간에서 기록하는 이 신체검사 의례는 학교 시스템의 폭력적인 면을 상기시키지만, 또한 교실은 다시 그 수치들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폭로하는 놀이터로 전복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키를 잴 때 슬쩍 까치발을 드는 아이를 통해 신체검사의 경직된 절차들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일상적인 층위로 해체되어가는 순간, 비명소리로 먼저 암시되는 효신의 투신은 정상성의 폭력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공표하며 우리를 뒤흔들어놓는다. 영화에서 연안을 비롯한 아이들은 제 마음에 들지 않게 튀는 것들을 볼 때마다 여지 없이 "재수 없어"라고 반응한다. 효신과 시은이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길 때, 마치 반작용처럼 교실은 이들을 밀어낸다. 재밌는 것은 남학생 집단을 다루는 영화에서 주로 시선을 장악하는 것은 전적으로 힘이 있는 인물인 데 비해, 여기서는 '비정상'으로 낙인 찍히고 고립되는 인물들이 오히려 이목의 중심에 선다는 점이다. 이미 고형석을 '외부자'로 날인한 바 있는 이 유사한 이미지들은 이렇게 자신들만의 협화음을 쌓으면서 그 내부의 주파수를 넘어서는 '다른 음'들을 다시 예민하게 집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청력 문제로 음악시간에 노래를 함께 부르지 못하는 시은과, 어른들 아이들도 지겹다는 듯 아웃사이더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효신에게는 늘 눈총이 따라다닌다. 그런데 진정한 역설은 이 척력 작용이 강하면 강할수록, 거부된 이미지들은 거꾸로 집단 내부에 음각처럼 깊게 새겨진다는 것이다. 효신은 물론이고 효신의 죽음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는 민아에 대해서까지 과할 정도의 적개심을 표출하는 연안은 사실상 그 누구보다 '재수 없는 애' 효신의 존재감을 지워버리지 못하는 인물이다. 시은이 홧김에 찢어버린 교환 일기장의 페이지들이 결코 사라지지 않은 채 무언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만을 덧붙이며 되돌아와 더 날카롭게 마음을 할퀴어대는 것처럼, 효신의 존재와 부재는 어떤 의미로든 강력한 것이 된다. 이때 학교는 공간 속에 배어든 과거의 기억들을 뿜어내며 효신의 자취와 반향을 이룬다. 그렇게 효신을 향했던 배제의 원리는 학교와 아이들의 무의식 속으로 다시금 어떤 유령적 판본을 불러들인다. 특히나 여러 사람이 이미 너무 갑작스럽고 돌출적인 이미지라고 지적한 바 있는 ‘욕조씬’(욕조에 앉아 혼자 울고 있는 효신)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참조하면 이 지점은 더욱 흥미롭다. 원래는 시은과 효신이 욕조에서 나누는 대화가 여러 씬 있었는데, 이후 편집 과정에서 대중의 정서에 맞지 않는 거북한 장면들로 받아들여져 결국 모두 강제로 잘려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가위질이 놓친 장면 하나가 살아 남아 영화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고의 공포, 그것은 '여고'라 이름 붙은 무신경한 묶음 속에서 유사 이미지로 귀속되는 몸들이 다시 파악 가능한 지평을 넘어서는 돌출물을 내밀기 시작할 때 한 번, 그리고 집단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온몸으로 밀어내어 온 이미지들이 불현듯 기억들 속에서 재활성화 될 때 또 한 번 세워진다. 이 유기망을 이루는 개별적 몸이자 결절점이었던 우리는 그것을 아직도 몸으로 기억한다. 영화 초반 시은에게 관심을 드러내며 눈 속에 담기는 인영, '눈부처'를 언급한 효신은 어느날 불안감에 이렇게 다시 묻는다. "내가 안 보여? 내가 개미야?" 그리고 중간중간 삽입된 이질적인 질감의 화면들을 통해 암시되던 효신의 유령적 시점이 마침내 강당의 지붕 위로 드리운 거대한 효신의 눈동자로 현신하여 학교 공간 자체를 눈부처로서 담아낼 때, 우리는 효신의 얼굴을 눈과 마음에 새기며,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너의 죽음을 잊을 수가 없다고. 어떻게 잊겠냐고. 이제, 모든 것은 밝은 빛으로 산화된다. 우리는 유령적 시간인 과거로 돌아가 그들과 자리를 바꾼다. 기억들이 주체가 되고, 우리는 유령적 시선으로서 그곳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