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훈의 피.엔.오
- 감독
- 김재훈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김재훈
<춘몽> 촬영 현장, 감독 유현목과 배우 박수정.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만희를 옹호한 유현목,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다 1965년 초 <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이만희, 1965) 사건으로 이만희 감독이 옥고를 치르고 반공법 위반 혐의 조사가 진행되며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도중 또 하나의 검열 관련 사건이 발생했다. 1965년 3월 23일,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 본부가 신문회관에서 주최한 ‘은막의 자유’라는 세미나에서의 유현목의 발언이 문제 되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유현목 은 헌법 제14조 에 의해 학문과 예술의 자유가 규정되어 있음에도 “후진국이면서 ‘미묘한 사정’에 처해있는 나라의 국민은 아니 작가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라며 당대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의 일단을 내비쳤다. 이와 같은 발언이 정권 당국자를 불쾌하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다음의 인용 구절들이 문제가 되었다. 또 이를 즈음해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로서 반공사상을 보다 고차원적인 면에서 제공․주입할 시점에 놓여 있다. 일련의 반공법 위반혐의 사태는 이러한 때의 변화에 대해서 외면했거나 아니면 편협적인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 애국행위라 해둠이 옳을 것이다… 최고의 예술은 최고의 정치와 통한다는 말이 있다.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그래서 생명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반공이라면 언제까지나 영화예술의 차원을 높여갈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영화예술의 차원 높은 표현의 수단을 빌지 않고 국시를 최고로 주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1 - 유현목, “은막의 자유”, 《경향신문》, 1965. 3. 24.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운운이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의 감독 이만희가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 된 정황 을 겨냥하고 있음은 누가 보더라도 손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고, 특히 “반공을 국시로…” 운운의 발언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1965년 초 반공법 위반 혐의로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상영이 중지되고 감독이 투옥되었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감독이 투옥된 첫 번째 사례다. 발표 후 3개월 반이 지난 7월 13일 유현목은 서울 지검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문제 삼은 대목은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일 수 없다. 한국의 작가는 국가적 현실 때문에 주체로서의 권리가 타의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다”였다. 또한 그가 그간 감독한 < 오발탄 >(1961), < 잉여인간 >(1964), < 순교자 >(1965) 등 일련의 영화 역시 문제가 되었다. *주2 이러한 검찰의 입장 발표로 인해 유현목은 반공이 한국의 국시임을 부인한 감독으로 이후까지 유명해졌다. 당시 원문이 없는 상태에서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검사가 인용한 이 워딩이 정확한지 의문이 든다. 당시 기사의 축약본에서 유현목은 반공이 국시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있고, 이후 판결문 역시 검찰의 논고 내용을 인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검찰 측이 문제를 과장하기 위해 인용문을 왜곡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당시 검찰이 근거로 삼은 법규는 반공법 제4조 (“찬양 고무 등”)였는데 이는 이만희 감독에게 적용되었던 조항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검찰이 입건을 발표한 시기가 상당히 절묘하다. 반공법 위반과 함께 음란죄로 동시에 기소될 유현목의 연출작 < 춘몽 >(1965)이 개봉 중이었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춘몽>의 검열과정 유현목의 연출작 <춘몽>은 일본영화 <백일몽>(테츠지 다케치, 1964)의 리메이크작으로 원작 자체가 상당한 수위의 노출을 포함하는 문제작이었다. 애초 유현목은 이 영화의 파격적 노출 수위가 부담되어 거절하였으나 표현상의 전권을 부여하겠다는 제작사 측의 설득으로 결국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주3 치과에 들렀다 잠이 든 남성이 꿈속에서 병실에 있었던 여성이 치과의사에게 육체적, 정신적,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그녀를 구해내고자 하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과 노출, 독일 표현주의를 연상케 하는 실험성으로 주목받았다. 그 검열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우선 이 영화가 일본영화 <백일몽>의 번안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남아있는 <춘몽>의 서류철 에 포함된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라는 내무 보고 문서를 통해 보건대 남아있는 제작신고 서류 이전(1964년 12월)에 이미 “일본인 원작 ‘백일몽’ 제작신고”가 접수되었으나 이듬해 1965년 1월 분과위원회 심의를 거쳐 반려되었다. 아마도 일본 원작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65년 2월 16일에 원작을 개작한 후 <춘몽>으로 제목을 바꾸고 제작신고가 되었으나 4월 22일 공보부는 다시 <백일몽>의 표절이라는 점과 내용이 비속하다는 점을 들어 반려하였다. 이에 제작사는 “전위적인 영화 표현”이라는 작품의 취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열네 군데의 수정 사항을 기재한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이후 공보부는 제작신고를 수리하였다. 영화 완성 후 본편의 검열신청은 1965년 5월 1일(접수는 5월 24일)에 이루어졌다. 본편 검열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5월 26일에 있었던 초심에서 중앙정보부는 이 영화에 대한 재심을 판정했고, 5월 31일 재심에서 역시 허가를 보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공보부 자문위원회는 3개처 제한 후 상영허가를 하면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6월 5일 “당부에서 영화 춘몽에 대한 재심 결과 그 내용이 자학적 변태성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한 것이며 형법 제243조 및 244조 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함이 가”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공보부는 “본 작품이 외설이라 판단되는 부분을 대폭 삭제하고 상영허가 조치”할 것을 중앙정보부에 통보한 후, 상영을 허가했다. (좌)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반려" (<백일몽>의 표절, 내용의 비속으로 제작신고를 반려한 문서) (우) "방화 '춘몽' 상영허가 경위" (<춘몽>의 본편 검열경위를 기록한 공보부 내부 문서) 음란죄로 기소되다 지난한 검열과정을 거친 <춘몽>은 마침내 1965년 7월 3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가 개봉 중인 7월 14일 유현목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런데 1966년 1월 4일 검찰은 유현목을 반공법 위반뿐 아니라 음화반포(혹은 제조) 혐의까지 더하여 기소하기에 이른다. *주4 한 감독이 반공법과 음란조항 위반으로 동시에 기소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영화 사상 감독이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경우는 이만희에 이어 두 번째, 음란죄로 기소된 것은 첫 번째 사례였다. <춘몽> 개봉 당시 신문광고(《조선일보》, 1965. 7. 2.) 이 영화가 음화반포(제조)죄 혐의를 받은 구체적인 정황은 영화를 제작할 당시 신인 여배우를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만들어 그녀의 뒷면을 촬영, 음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혐의는 논쟁의 여지가 다분했다. 촬영 당시 신체의 앞부분은 가린 상태였고, 뒷모습의 누드를 담은 6초 정도에 해당하는 이 분량은 검열 신청 전 이미 감독에 의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주5 즉 이 장면은 대중은커녕 검열관에게까지 공개되지 않은 장면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검찰은 징역 1년 6개월 및 자격정지 1년 6개월의 유죄 취지로 구형한다. 판결은 1년이 지난 1967년 3월 15일 내려졌는데,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유죄 취지로 벌금 3만원을 선고하였다. 반공법 위반 부분에 대해 법원은 “①유피고인의 연설내용이 적성국가를 이롭게 할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추상적인 것이었고 ②영화 「7인의 여포로」에 대해서도 어느 특정 장면을 지적한 것이 아니며 단지 예술가의 일반자세를 논한 것이기 때문에 반공법 위반죄를 물을 수 없다”라고 판시했던 반면, *주6 음화반포(제조)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유죄의 취지를 밝혔다. 이 영화는 상대방 여자에게 폭행, 린치, 전기고문 등 가혹한 행위를 하여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현상을 보고 또 이와 같은 행위를 당하고 남녀가 서로 성적인 자극과 만족을 얻는 것을 그린 후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변태성욕자에게 기어 완전 나체로 달아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므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양식에 비추어 정상인에게 이상한 성적 자극을 주고 수치, 혐오의 감정을 일으키게 함에 족하다고 인정된다. 헌법에서 보장된 학문•예술 및 표현의 자유도 헌법 제32조가 정한 공공복리에 의하여 제한되고 이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므로 이 범위를 벗어난 권리행위는 권리 남용에 해당하여 헌법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주7 - 서울형사지법 판결, 1967년 3월 10일 선고. 이 판결에 대해 당시 언론을 비롯한 법조계와 예술계 인사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제가 된 장면을 검열 전에 삭제했다면 그것은 음화 반포로 볼 수 없고, 촬영 당시 불과 10여 명의 스탭 앞에서 나체로 여배우가 등장했다고 했던 점 역시 음란물의 전시에 해당할 수 없으며(제243조 관련), 해당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해도 검열 전 삭제된 이상 그것은 완성품인 영화라 볼 수 없으므로 음화 제조라 볼 수 없다(제244조)는 것이다. *주8 이에 검찰과 유현목 감독은 공히 항소하였고, 항소의 결과는 다시 2년이 훌쩍 지난 1969년 10월에 나왔다. 당시 항소심을 맡은 서울형사지법 합의 2부는 반공법에 대해서는 역시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영화예술에서도 예술성과 음란성이 양립될 수 없으며 아무리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라도 음란성이 있을 때는 외설이라고 볼 수 있다”라는 취지로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주9 비록 선고유예이긴 하지만 유죄가 판결된 것이다. <춘몽> 중 한 장면 반공과 음란의 결합 “은막의 자유” 세미나 발표와 <춘몽>을 엮은 이 사례는 한 재판 대상에 반공과 음란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그것은 단순히 우연한 별개 사건에 대한 병합 재판의 사례일까? 아니면 일정한 연관관계에 의해 검찰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일까? 굳이 음모론의 입장에 서지 않더라도 두 사건의 연관성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세미나 발표의 불온성을 문제 삼고 싶었던 검찰의 입장에서 해당 사건만으로 사법적 처벌이 내려지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비슷한 시기의 <춘몽>에 대한 음란죄를 함께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당시 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검찰은 이러한 『춘몽』에 대한 판결에는 대체로 만족했다. 유감독을 반공법 위반으로 다루다가 우연히 인지하여 부산물(?)로 기소했던 것이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산물인 반공법 위반 부분이 무죄가 되었으니 시무룩… - “춘몽의 일장춘몽, 음화라고 유죄판결 나오게 된 사연”, 《신아일보》, 1967. 3. 16. ‘주산물’과 ‘부산물’을 나누고 있는 위 인용문은 당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권당국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말하자면 반공법을 비롯한 사상 혹은 사회적 문제는 정권당국이 ‘주’되게 관심을 가진 영역, 풍속은 ‘부’수적인 관심을 가진 영역이라는 의미일 터다. 이는 당대에 사상통제가 엄격히 이루어졌던 반면 풍속에 대한 검열은 상대적으로 완화되어 있었다는 검열 연구자들의 인식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외적으로 분리되어 보이는 두 주제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풍속에 대한 통제는 사상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거나 구실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효과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은막의 자유”와 <춘몽>의 병합 사례라 할 것이다. 검열은 최종적으로 인적 통제를 통해 완성된다. 검열의 최후의 수단이자 목표는 창작자를 향해 있다. 그것은 단일 작품에 대한 검열과 달리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사건의 유죄 판결 이후 동료인 김수용 은 “감독의 입장에서는 이 판결이 있은 이후 표현에 많은 심리적인 제한을 받게 되어 부득이 예술적으로 필요한 러브신이나 나체 면의 제작이 위축될 것 같다”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주10 그러나 이러한 위축은 유죄를 선고받은 음란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 주1. 이 기사에 실린 내용은 발표문의 원본이 아니라 축약본이다. 주2.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은막의 자유 발표”, 《동아일보》, 1965. 7. 14,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말썽”, 《조선일보》, 1965. 7. 14, “만물상”, 《조선일보》, 1965. 7. 15 등. 주3. “인터뷰, 40년만의 감개무량한 복원, <춘몽>의 유현목 감독”, 맥스무비, 2004. 7. 29. 주4.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음란죄의 근거로 삼았던 조항은 형법 제243조(음화등의 반포)였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감안컨대 음화 등의 제조를 규정한 244조 역시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법 제 243조는 “음란한 문서, 도화 기타 물건을 반포, 판매 또는 임대하거나 공연히 전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44조는 “전조의 행위에 공할 목적으로 음란한 물건을 제조, 소지, 수입 또는 수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주5.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열 전 삭제했다는 기사와 나일론 네글리제를 입힌 같은 신의 다른 대체 장면을 썼다는 기사가 병존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정황 서술의 구체성을 감안할 때 아마도 후자가 진실에 가깝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주6. “영화 춘몽 음화로 판결, 유현목 감독에 벌금 3만원 선고”, 《한국일보》, 1967. 3. 16. 주7. 김재훈, 「음란성 개념 변화에 관한 연구: 대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전남대학교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 100쪽. 주8. “영화 춘몽의 법 적용 시비, '공개 전 삭제... 유죄론 보기 힘들어'”, 《조선일보》, 1967. 3. 21. 주9. “춘몽은 '외설영화', 유현목 감독 선고유예”, 《서울신문》, 1969. 9. 25. 주10. “법 이전의 검열기구 활용을, 표현에 심리적인 제한”, 《동아일보》, 1967. 3. 18.
극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영화 평론가였던 오영진(1916-1974)은 대단한 영화광으로 알려져 있다.태평양전쟁 전에는 일주일에 4, 5회나 극장에 갈 정도였고, 경성제국대학 재학 중에는 제국대학생들의 문예지였던 『성대문학(城大文學)』 동인들과 함께 영화동호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1936년 출범한 이 영화동호회는 경성제대 학생식당에서 창립 모임을 가졌는데, 오영진은 이 자리에 법문학부의 경제학 교수 스즈키 다케오(鈴木武雄)를 초대해 ‘영화담’을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경성 부민관에서 ‘총후 학생 문화 운동’을 명분으로 영화 관련 행사를 여는 등 영화동호회 활동에 꽤 열성적이었다. 솔직히 말하여, 20년 전에 나로 하여금 대학 안에 ‘영화동호회’를 조직케 한 큰 원동력은 불란서영화이었다. 그때, 우리들 젊은 대학생들은 불란서영화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러시아문학보다도 더 광범히 사랑하였다. 일본을 거쳐 우리에게 소개된 불란서영화의 수효는 지극히 소수의 것이었다. 그러나 1년에 5, 6 작품밖에 안 되는, 이 정선된 작품, 하나하나가 마치 주옥같은 걸작들이었다. 쥬리앙‧뒤비비에, 자크‧페에데, 르네‧클레에르 등등의 예술품이 20년이 지난 오늘도 생생하게 눈앞에 떠오른다. 1 영화동호회를 결성하고 20여 년이 지난 후, 오영진은 자신과 친구들을 영화광으로 만든 것이 ‘불란서영화’였다고 회고했다. 원래 문학청년이던 그는 쥘리앙 뒤비비에(Julien Duvivier) 감독이 연출한 일련의 ‘문예영화’들, 즉 <상선 테나시티(Le paquebot Tenacity, 1934)>나 <우리들의 동료(La belle équipe, 1936)> 같은 영화를 좋아했다. 프랑스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당시 오영진만의 유별난 취향은 아니었다. 일본과 조선의 문화 엘리트 사이에서 이른바 ‘프랑스 4대 명장’―르네 클레르(Rene Clair), 쥘리앙 뒤비비에, 자크 페데(Jacques Feyder), 장 르느와르(Jean Renoir)―의 영화는 각별한 애호와 지지를 받았고, 그중 장 가뱅(Jean Gabin)이 주연한 뒤비비에 감독의 영화 <망향(Pépé Le Moko, 1937)>은 영화 좀 본다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언급할 정도로 화제작이었다. 프랑스영화 외에도 이태리,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등에서 제작된 영화들이 일본을 거쳐 조선에 도착했고, 젊은 학생과 지식인 관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식민지 시기 조선에 수입되는 외국영화 중 유럽영화는 수적으로 줄곧 열세였고 스크린 점유율도 낮았다. 수입 외화의 90% 이상을 할리우드 영화가 차지했다. 그러나 문화 엘리트들에게는 유럽영화가 근대인의 교양이자 이상적인 예술이라 인식되었고, ‘우수한 좋은 영화’라는 의미로 ‘명화(名畫)’와 동일시되곤 했다. 오영진이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1930년대 중반, 경성의 극장가에서 유럽에서 온 ‘명화’는 실패가 없는 흥행 상품이기도 했다. 유럽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이 높아서 각종 단체나 언론사는 부민관과 같은 비영리 공간을 빌려 ‘명화감상회’를 주최하고 경성의 영화광들이 ‘명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시기 경성의 유럽영화 관객층은 이전 어느 때보다 폭넓어졌으며, 유럽영화에 대한 담론 공간 역시 크게 확대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7월, 오영진은 《조선일보》에 「영화예술론 - 그 예술성과 오락성」(1937년 7월 6일~9일)을 발표하며 처음으로 전문적인 영화 글을 쓰게 된다. 경성제대 영화동호회의 짧은 역사는 전쟁 발발 직후 막을 내렸지만, 영화동호회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 영화인 오영진의 시대는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 일본 유학길에 오른 그는 동경발성영화제작소에 입사해 조연출로 일하며 일본의 제작 현장을 경험했고, 1942년 조선에 돌아와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촉탁을 지내며 『배뱅이굿』, 『맹진사댁 경사』 등의 시나리오를 발표했다. 해방 후에는 예술원 회원으로서 남한 문화 권력의 중심에서 영화계 원로로 활동했다. 특히 대종상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우수영화’ 선정에 관여하기도 했는데, 당시 영화평론가 이영일이 진행한 좌담회 「꿈을 키워준 시절의 영상 / 나의 영화적 낭만의 시대」(『영화예술』, 1965년 4월 호)를 보면 그에게 ‘좋은 영화’란 청년 시절에 사랑했던 영화들을 모범으로 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오래전 그 영화들을 ‘명화’로 기억하는 것은, 영화광이었던 청년 시절의 자신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1941년에 개봉된 영화 <반도의 봄>(이병일)은, 묘하게도 이처럼 유럽의 ‘명화’에 열광하며 좋은 영화는 몇 번이나 다시 보았던 1930년대 경성의 영화광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춘향전>의 제작 과정을 담고 있는데, 눈 밝은 관객이라면 <춘향전>의 대척점에 있는 또 다른 ‘영화 속의 영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미장센의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는 유럽영화 포스터들 말이다. 전쟁 중,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이 표출되던 때이던 만큼 외국영화에 대한 열기가 유럽영화로 집중되었을 수도 있지만, 작품 속 영화인들의 사무실과 분장실, 극장 계단에 걸린 유럽영화 포스터들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반도의 봄>이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리라. 단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데에도 온갖 곤경을 겪어야 하는 조선의 영화인들에게 <마주르카(Mazurka, 1935)>, <청춘의 바다(Abel mit der Mundharmonika, 1933)>, <부르크 극장(Burgtheater, 1936)>, <제니의 집(Jenny, 1936)>, <어여쁜 청춘(Hélène, 1936)>, <열풍(Amok, 1934)>, <소곤거리는 나무 그늘(So endete eine Liebe, 1934)>, <고향(Heimat, 1938)> 등 저 유럽영화들이 가리키는 세계는 아득히 먼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영화인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분투했던 힘은, 동경하던 예술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 싶어하던 영화광들의 열정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1) 오영진, 「불란서영화의 금석(今昔) - 젊은 팬을 위하여(1956)」, 『오영진전집 5. 영화평론‧수필』, 범한서적, 1989, 16쪽 사진 2, 3, 4. <반도의 봄>에서 * 상단사진1. <반도의 봄>의 한 장면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음악명화(音樂名畫)의 던진 거탄(巨彈) “동․키호테”는 살었다」, 《조선일보》, 1938년 7월 8일자, 4면. 지난 5, 6 양일간 본사 주최로 부민관에서 개최된 음악명화 감상회는 절대의 인기로써 대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때마침 공습관제 하에 긴장되었던 민중이 5일 이 비상경계가 해제되자 그들은 비로소 새로운 광명의 세계에 해방된 듯 다시 보기 어려운 이 명화를 찾아 정각 전부터 모여들었다. 이제 여기 이모저모의 풍경과 각 방면 인사의 소감편편을 엮기로 하자. 이를 통하여 느낀 첫 인상을 한 말로 한다면 예술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이며 위대한 예술일수록 인류에게 더 강한 친화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이 영화감상회는 어찌 보면 영화라는 한정된 세계보다도 영화가 표현한 순수한 영화의 경지 이외의 더 큰 문학적, 음악적, 예술적인 거룩한 생명을 우리에게 느껴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 이유가 이 영화 감상미를 더 의의 깊게 한 것 같다. 그렇길래 좀체로 외출 안하시던 조선 문단의 선구이신 벽초 홍명희 선생도 시간을 놓치지 아니하고 정각 전에 시원한 푸른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오셨고, 이화전문에서는 요새 근로봉사로 모두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전 학교 선생, 학생 백여 명이 단체로 구경 왔던 것이다. 눈에 제일 많이 띄는 학생 중에는 연전(延專), 세전(世專), 불전(佛專), 법전(法專)의 전문학생과 흰 테를 두른 대예 [필자주: 大豫, 즉 경성제대 예과를 가리킨다.] 학생이 그중 많았다. 중학교는 마침 학기 시험인 관계가 있기는 하면서도 참다운 문학과 영화를 사랑하는 4, 5학년 학생들의 씩씩한 얼굴들이 보이는 것은 매우 반가웠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정답게 예술과 사상으로 맺어진 안호상, 모윤숙 부부와 이태준, 이순옥 내외의 양자가 보이는 것도 이 감상회의 이채일 것이요, 동덕고녀(同德高女)에서는 비가 쏟아지는 둘째 날 시험 때의 바쁨도 무릅쓰고 음악선생 정순철, 이형우, 정갑 외 여러 선생이 오신 것도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평론가 백철 씨가 이 감상회 때문에 평양으로 급히 가야할 일을 하루 연기하는 정성도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이 명화감상회를 보신 이 중에서 감격된 인사 몇 분의 자발적 감상의 편편을 모아보자. 김상용 씨 : 시인이요, 겸하여 이전(梨專) 문과 과장으로 계신 씨는 이 영화회가 세상에 알려지기가 급하게 여러 해를 두고 기다렸던 듯 감격하여 “참 내가 솔선하다시피 해서 이번 학생애들을 단체로 구경 가도록 했습니다. 영화도 위대한 예술이라면 위대한 산 교훈과 감격을 줄 수 있는 데 있을 줄 압니다. <동․키호테[Don Quixote, 1933]>는 내 일생에 가장 감격된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좋은 회합을 가지는 게 퍽 좋겠지요.” 김재훈 씨 : 경성음악전문학원을 경영하시는 음악가인 씨는 매우 만족한 웃음을 띠며 “처음으로 <동․키호테>를 영화에서 봤습니다. 물론 샬라핀[Feodor Chaliapin Sr.]의 예술은 음악학도로서 높이 평가합니다. 아무쪼록 자주 이런 훌륭한 예술적 회합을 가지도록 노력해주십시오. 아주 감격했습니다.” 안석주 씨: 열정적인 씨는 상기된 얼굴에 그 음성까지도 다소 떨리는 듯 “참 좋아요. <동․키호테>를 5년 전 처음 볼 때보다도 이번이 더 감격되는데요, 다시 보니까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흥분과 가슴에 넘치는 감명이 있습니다. 참 최고의 예술적 표현과 생명을 가진 것이 <동․키호테>라고 하겠어요.” 안호상, 모윤숙 여사 : 두 분은 나란히 앉아서 이 영화에서 얻은 감명을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하신다. 안(安) : <동․키호테>는 물론 문예작품으로 위대하니까 감명이 큽니다마는 영화로 보기에는 현대 감정을 담은 <윈나의 황혼[Maskerade, 1934]>이 더 나아 뵙니다. 모(毛) : 나는 의상으로나 분위기로나 오히려 <동․키호테>의 그 비장한 장경이 더 좋아요. 두 분의 이야기는 다시 아돌프 월브류크 [필자주: 원문에는 '아돌프 월브류크'로 되어 있으나 안톤 월브류크(Anton Walbrook)의 오기로 추정된다.] 의 연기에 대해서 논하신다. 김성진 씨 : 조선에서도 최고로 가는 영화팬인 씨는 좀 창백하신 얼굴에 다소 긴장된 흥분을 감추어가지고 겸손하게 “자주 이런 회합을 가지도록 해주십시오. 적어도 한 달에 한번쯤 해주셨으면 구경하는 사람으로는 여간 좋은 기회가 아니겠어요. 아주 감격했습니다.” 이날 밤 관중의 그 어느 얼굴에나 긴장되고 흥분되고 감명된 빛이 없는 이가 없었다. 서로 쳐다보는 얼굴에는 비상한 산 교훈을 받은 감이 있었다. 산쵸가 마지막 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우는 장면에서 울음이 난다는 이, 동․키호테가 운명한 후에 들리는 비통한 노래에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감격을 했다는 이……. 악수로 퍼붓는 비에도 밀려나오는 군중에도 옆에 와 이야기하는 데도 전연 무감각한 채 지극한 감명 속에 외로운 듯 초연히 서있는 무서워 보이는 한 얼굴, 돌과 같이 굳어진 그 표정이 분이 솰라핀의 음악과 베토벤의 인간에 지극히 감격되고 숭모하는 정순철 씨인 것은 아마 알아본 이가 그리 많지는 못했으리라. 2. 「꿈을 키워준 시절의 영상 / 나의 영화적 낭만의 시대」, 『영화예술』 창간호(1965년 4월), 30~37쪽, 부분 발췌. [...] 이영일: 그래서 이제부터서 선생님들이 보신 영화 중에서 가장 감동을 많이 받은 영화 한두 편씩 말씀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오영진: 해방 전 것까지 해서—. 이영일: 네… 네, 어린 시절부터 학생 시절에 걸쳐서……. 선우휘: 네, 사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배우 위주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가 하면, 스토리가 좋아서 오래오래 남는 수도 있는데, 제가 지금도 기억 남는 것은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7]>인데 그때가 바로 유럽에서 전쟁이 한창일 땐데 스탭‧캐스트가 나오기 전 자막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영진: 원작자가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이었죠. 선우휘: 네… 네. 전문(前文)에 “이렇게 피로써 피를 씻는 동란이 계속되는 시대에 우린 이런 환상적인 꿈을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느냐?” 이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말하자면 유토피아적 세계를 그린 건데, 항공기가 추락되어서 비행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눈보라를 헤치고 가다보니까 석문(石門)이 있어서 열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때부터는 봄과 같은 날씨에 내(川)가 흐르고 새소리가 들리는 돌연변이의 세계가 화면에 나옵니다. 그런 영향에서 그런지 전 꿈이란 것을 생각하면 곧 영화를 생각하게 되더군요. 여석기: 저도 동감인데, 좀 다른 의미로 해석해서, 내가 대학 때니까 1929년입니다. 1차 대전 [필자주: 원문에는 '1929년입니다. 1차 대전’이라고 되어 있으나 오기로 추정된다. 연극평론가이자 영문학자인 여석기는(1922-2014)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있었던 1939년에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 벌어져 독일이 폴란드를 침입해서 주위는 회색으로 변하고 연령적으로 우린 청춘으로서의 꿈도 있어야겠고 윤택한 정서도 필요하고… (추억에 의존할 나이는 아니니까) 그걸 어디서 찾느냐? 결국 문학이나 예술에서 인생을 관조하고 지식을 얻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여기에서 영화가 당당한 역할을 하는데, 그 점에서 꿈의 대용품이라 하겠지요. 영화적 기교는 알 턱도 없고 다만 막연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인생을 다시 찾아보고 싶다는 거겠지요. 선우휘: 그 다음에 생각나는 것으로 ‘페페 르 모코’ <망향>이 있고, <황혼의 비엔나[Maskerade, 1934]>도 좋습니다. 오영진: 윌리 폴스트[Willi Forst]가 나오지요. 선우휘: 그리고 음악영화론 조예가 없지만 <미완성 교향곡[Unfinished Symphony, 1934]> 같은 거……. 오영진: 그것도 윌리 폴스트일 거에요. 이영일: 이제까지 선우 선생께서 명작을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내셨는데…… 최 선생님은……. 최정희: 두 분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참으로 영화는 인생의 꿈을 많이 길러주는 것 같아요. 여석기: 뜻은 좀 다르지만 ‘꿈의 공장’이란 말이 있지요. 일동 : 그렇지요. [...] 이영일: 이런 점에서 영화가 개인 개인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전체적으론 사회적 영향력이 방대하다는 의미도 되겠지요. 매스컴 시대라고 불리는 현대에 있어서 영화의 미디어적 영향이 실로 지대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것은 반대로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관객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영화사회학의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영화예술지는 건전한 관객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은 관객을 많이 가질 수 있느냐? 한국영화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훌륭한 관객사회가 형성되어야 하겠다는 의도에서 ‘시네 클럽’ 운동을 구상했습니다. 그런데 오 선생님, 어떻습니까. 요 먼저 말씀하시던 중에 옛날의 ‘시네 클럽’ 운동이 있었다고 기억되는데요……. 오영진: 우리 대학 땐 영화동호회란 것을 만든 일이 있어요. 학생끼리였지만 교수 한 분을 모시고 연구적인 모임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무의식적으로 영화를 보는 분에도 소설을 쓸 분도 있을게고 영화계에 종사할 분이 있겠지만…… 영화를 어떻게 감상하느냐란 문제를 서로 연구‧토론할 클럽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젊은이들의 교양 향상을 위해서 우리도 대학 때 그걸 만들었다가 일본 학생이 이상하게도 점점 많아져서 오래가진 못했습니다. 이영일: 여 선생님은 어떻습니까? 여석기: 나도 오 선생님 말씀에 절대 동감입니다. 우리들의 대학 때보다는 영화 서클이 적은 것 같아요. 요새야 사회‧정치 서클이 많은데 우리 문학, 연극, 영화 동호회가 보다 활발하여야 되겠습니다. 극장 측과 교섭해서 반액 정도로 감상한 다음에 자유스러운 디스커션을 통해서 인생의 폭을 넓히고 교양을 쌓아야 한다는 것은 유치하건 말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영화계에 들어가려면 직행합니다. 박모(朴某) 감독한테 가서 현실적으로 교섭하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