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정사
- 감독
- 김정용
- 제작년도
- 1989
- 출연
- 한윤경, 이영욱, 국정환, 정선우, 홍성영, 최강호, 차화선, 장철, 김광식, 홍기영, 홍영상, 서명석, 윤상덕
“어떻게 보면 가짜 인생이지요. 스크린 의상은 모조품이니까요. 진짜 옛날 장군복을 배우가 입으면 무거워서 움직이지도 못해요.” (의상 이해윤) 1) ‘진짜’가 아닌 ‘가짜’를 관객이 진짜‘처럼’ 느끼게 하는 매체인 영화. 영화에서 의상은 의복으로서의 기능을 넘어서 등장인물의 나이, 직업, 성별을 드러내주는 이미지 기호이다. 더 나아가 영화 의상은 등장인물의 심리와 내면을 시각화하고 장면마다의 분위기, 즉 사랑, 환희, 갈등, 절망을 담아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영화 의상은 이렇게 미학적 기능을 하는 동시에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경제적인 효과의 확산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1920년대 할리우드 영화가 산업화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영화 의상도 전문적인 부서로 독립했다. 인기 있는 배우를 만들어 내고, 스타가 된 배우를 관객이 지속적으로 보러 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멋진 이미지를 만들어 줄 아름다운 의상을 입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영화에서 배우 스스로가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 입던 영화 의상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인력이 생겨난 것은 1950년대 중반이다. ‘가짜 인생’을 위한 ‘모조품’이라고 자조하지만 삼오장 저고리와 금관조복으로 스크린에 조선 시대를 그럴싸하게 펼쳐놓은 이는, 충무로에서 ‘짱구’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이해윤(1925~ )이었다. 그녀가 일을 시작한 195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사극 영화나 시대물에서 이해윤의 의상을 가져다 쓰지 않은 영화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녀는 400여 편의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에 맞게 대본을 쪼개어 의상을 구상하는 것은 물론, 대규모 몹신(mob scene)을 위해 삼백 명, 사백 명 의상을 준비하는 일도 도맡았다. 50여 년 동안 배우에게 옷을 해 입힌 이해윤은 남성들이 주로 활동하는 충무로에서 몇 안 되는 여성영화인이었다. (사진1) <춘향전>(이규환, 1955)의 포스터. 이해윤은 동대문 성터에서 촬영하는 변 사또 부임행차에 기생 역할로 영화배우(?) 데뷔를 했다. (사진2) <자유전선>(김홍, 1955) 광고. 김홍의 조감독 백호빈과 알게 되어 <자유전선>에서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활약했다. 이때 배우 임운학을 알게 되어 이후 영화 의상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해윤은 어릴 때 어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웠는데 남달리 여기에 손재주가 있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군 병참군 사령부에 취직해서 군복 수리하는 일을 했고, 한국전쟁 중에는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빨랫감을 받아 세탁소를 차린 적도, 편물점을 운영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영화계에서 일하던 친구를 통해 이규환의 조감독이던 유현목, 김홍의 조감독이던 백호빈과 알게 되었다. 2) 동대문 성터에서 몹신을 촬영하던 <춘향전>(1955, 이규환) 구경을 갔다가 변 사또 행렬에 동원된 기생 역할로 카메라 앞에 서고, <자유전선>(김홍, 1955)에서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 배우로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역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보다는 바느질에 재주와 관심이 있던 터, 그녀는 <단종애사>(1956, 전창근)부터 영화 의상을 담당하게 되면서 평생을 재봉틀 앞에서 실, 바늘과 함께 했다. (사진3) <단종애사>(전창근, 1956)에서 어린 단종을 연기한 배우 황해남 (사진4) <단종애사>(전창근, 1956)에서 단종비를 맡은 엄앵란. 황해남과 엄앵란은 이 영화를 통해 데뷔했다. 당시 영화에서 의상이란 배우가 자신의 출연료의 일부를 할애하여 옷감을 끊어다가 역할에 맞도록 바느질집이나 의상실에서 직접 맞추어 입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해당되는 것이었고, <단종애사> 같은 사극에서는 힘든 일이었다. 이광수 원작의 작품을 유치진이 각본화하고, 전창근 연출, 한형모 촬영의 <단종애사>는 가히 초호화 캐스트를 동원했던 당시 사극영화 상 최대 규모로 이루어진 대작이었다. 바느질 솜씨만 좋았던 이해윤은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던 배우 임운학과 김일해의 지도와 도움으로 잿물에 머리카락을 삶아 직접 망건을 뜨고 수염을 만들었으며, 또 배우들을 머리 빗기고 분장하는 일까지 직접 도맡아 해냈다. 제작부장의 소개로 운현궁 나인 출신을 만나 실물 크기의 도복과 관복, 당의 등을 얻어 확실한 고중을 거쳐 궁중 의복을 재현해냈다. 이 작품을 위해 이해윤은 제작사였던 삼일영화사에서 꼬박 1년을 살았다. 1950년대 후반 한국전쟁 이후 안정을 찾은 영화계는 이규환의 <춘향전>이 흥행에 성공한 후현대극(물론 <자유부인>(한형모, 1956)이 있었지만)보다 사극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56년부터는 명승고적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야외 촬영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정교하고 거대한 세트에서 화려한 의상으로 스크린을 수놓아 관객을 사로잡는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기획들이 나타났다. 조선시대는 물론 상고시대까지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가히 사극 전성시대였다. <단종애사>를 시작으로 이 해에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마의태자>(전창근), <논개>(윤봉춘), <사도세자>(안종화)에 이르기까지 노장과 중진들이 총동원되면서, 사극 영화는 오락성과 대중성을 장착해 관객의 눈과 귀를 충족시켰다. 비록 16미리이긴 했지만, 1958년 안종화가 국내의 기술과 시설로 <춘향전>을 컬러영화로 제작하면서부터 사극 영화는 점점 더 의상과 소품에도 세심한 배려를 기울였다. (사진5) <춘향전>(안종화, 1958) 포스터. 사극이 컬러영화를 시도하면서 점점 더 의상에 세심한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이해윤이 의상을 처음 담당한 <춘향전>이다.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다루는 사극은 기본적으로 해당 시대의 민속, 언어, 음악은 물론 의상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고증이 필요한 것이었고, 여기에 의지한 작품이라야 예술성도 살릴 수 있는 법이었다. 이해윤이 그 시작부터 사극 의상을 전문으로 하다 보니 의상을 제작하는 데 있어서 영화의 예술성과 ‘역사적 고증’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익숙한 서사와 화려한 볼거리로 관객들이 구름같이 모이는 “사극이 과연 한국영화예술의 어떠한 위치에서 우리들의 현실에 무엇을 제시해 주고 무슨 예술적인 감명을 줄 수 있느냐”는 비평적 문제 제기 속에서, 종종 고증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영화 의상은 해당 작품의 예술적 결점으로 치부되었다. 3) 오늘날까지도 사극 영화 제작에 있어서의 완벽한 ‘역사적 고증’은 고질적인 딜레마로 남아 있다. 박물관과 도서관의 고서적을 파헤치고 궁중 나인의 도움을 어렵게 받더라도, 이해윤에게 그나마 조선시대는 고증을 통해 제작하기 수월(?)했다. 별 자료 없이 벽화를 들여다보고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야하는 상고시대의 의상들은 특히 그녀를 힘들게 했고, 종종 각각 감독들의 까다로운 미학적/경제적 요구와 좀 더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자하는 배우들의 욕망 어딘가에서 ‘역사적 고증’과 절충해야만 하는 이해윤의 난제는 단 한 번도 속 시원히 해결된 적이 없었다. (사진6)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 장면. 이해윤이 이 영화의 의상을 담당했지만, 주인공 춘향의 의상은 최은희가 직접 지어 입었다. (사진7,8) <춘향전>(홍성기, 1961) 이 영화에서는 춘향 역의 김지미 의상을 비롯, 모든 등장인물의 의상을 이해윤이 담당했다. 홍성기 감독은 이후 이 영화에서 제작한 의상을 모두 이해윤에게 주었다. 1961년은 홍성기와 신상옥의 ‘춘향전 경작’이 단연 화제였다.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되는 이 두 영화의 춘향,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최은희와 떠오르는 스타 김지미를 두고 ‘어떤 춘향이 연기를 더 잘할 것인가, 어떤 옷을 입고 나올 것이냐’에 관심이 쏠렸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작품의 의상을 모두 이해윤이 담당했다는 것이다! 최은희는 직접 옷을 지어 입어 신상옥의 <성춘향>에서 이해윤은 엑스트라의 옷만을 담당했지만 홍성기의 <춘향전>에서 김지미의 의상을 비롯해 모든 출연자의 의상을 담당했다. 이 경작에서 신상옥이 성공적인 흥행결과를 얻었지만, 이해윤은 의상만큼은 김지미의 것이 아름답고 정교했다고 자부한다. 이렇듯 혼신의 힘을 들여 의상을 제작했지만, 홍성기의 <춘향전>이 실패하는 통에 그녀가 손에 쥔 것은 무더기의 한복뿐이었다. (사진9,10,11) <연산군(장한사모편)>(신상옥, 1961) 이해윤이 신필름에 입사해 금관조복을 제작해 촬영한 장면들. (사진12,13,14) <폭군 연산(복수, 쾌거편)>(신상옥, 1962) 이 영화에서도 역시 수려한 의상 덕분에 꽉 짜인 화면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평을 받았다. ‘춘향전 경작’ 이후 다시 활기를 띤 사극영화의 황금시대에 그녀는 역사적 고증이 확실히 된 의상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가 홍성기 감독이 건네 준 의상을 손에 쥐고, 본격적으로 영화 의상에 매진하리라 다짐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춘향>이 끝난 후, 신상옥은 이해윤에게 신필름 의상부 소속으로 함께 일하기를 제안했다. 그렇게 신필름에 들어가 처음 촬영한 작품이 <연산군>(1961)과 <폭군 연산>(1962)이었다. 두 영화는 실물에 가까운 세트에서 당시의 풍속, 기예, 생활을 고증을 통해 잘 살렸고, 특히 소도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역사적 사실을 과감하게 재현하고 수려한 의상으로 인해 꽉 짜인 화면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사진15) <왕자호동>(한형모, 1962)에서 사열해 있는 고구려 병사들의 장면 (사진16) <인목대비>(안현철, 1962)의 한 장면. <왕자호동> 병사들의 옷에 단을 대어, 다음날 <인목대비>의 조선 병사들이 입고 찍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해윤이 의상을 담당했다고 하면 주요 등장인물들 것만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사극의 경우 조연을 비롯한 엑스트라까지 포함하여 기본 200벌(많으면 500벌) 정도의 다양한 의상을 손수 만들어야했다. 한해에 영화 의상을 열 편 이상 담당하는 그녀에게 ‘의상 바꿔치기’(그리고 세탁)는 시간과 공간을 고려해 머리를 써야하는 고난도 기술이었다. 1962년 한해를 예로 들면, 그녀는 <왕자호동>(한형모), <인목대비>(안현철), <폭군 연산(복수, 쾌거편)>(신상옥)의 의상을 동시에 맡았다. <왕자호동>은 삼국시대, 나머지는 두 영화는 조선이 배경이었다. 수백 벌의 의상을 영화마다 각각 제작할 비용도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에, 한 영화에 쓰인 의상을 조금 다듬어 다른 영화에서 촬영하고, 다시 가져와서는 고쳐서 또 다른 영화에 빌려주는 식이었다. 조선시대 의상은 바지나 저고리, 두루마기에 단을 대는 게 특징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단이 없었다. <폭군 연산>을 위해서는 손바느질로 단을 대고, 같은 의상으로 <왕자 호동>을 찍을 때는 부지런히 그 단을 떼야했다. 그리고 다시 촬영 일정에 따라 <인목대비>를 찍는 수원성에서는 단을 붙인 채로 찍고, 밤새워 단을 없애 다음날에는 남한산성의 <왕자 호동> 현장으로 의상을 날라야 했다. (사진17, 18) <칠공주>(정창화, 1962)의 포스터와 스틸 사진. 통일신라의 일곱 공주가 등장하는 이 영화의 의상을 각각 다르게 개성을 살려 만드는 일이란, 의상 담당자 이해윤에게 녹녹치 않은 일이었다.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표준이 되자 관객의 시각적 쾌락을 위해 사극 배우의 의상은 특히나 중요해졌다. 신라 왕위 계승을 둘러싼 음모의 희비극인 정창화의 <칠공주>(1962)는 무려 일곱 공주(문정숙, 이빈화, 전계현, 방성자, 차유미, 김명희, 엄앵란)가 주인공이라 의상이 까다로울 수밖에는 없었다. 조선이 시대적 배경이었다면 치마저고리 일곱 벌의 색깔만 달리해 공주 각각에게 입혔겠지만, 신라가 배경인 컬러 시네마스코프였기 때문에 색감은 물론 옷깃이나 장식 모양을 조금씩 달리해 각 공주들의 성격을 반영하면서 복식을 재현해야 내야했다. (사진19, 20) <돌아온 여군(7인의 여포로)>(이만희, 1965)>의 군인 복장. 이만희 감독과의 논의 끝에 인민군 의상을 근사하게 만들었던 이해윤 역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군사영화에서도 오랫동안 군복을 수선하던 이력의 소유자 이해윤의 바느질 솜씨가 필요했다. 반공법 위반으로 신문지상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만희의 <돌아온 여군(7인의 여포로)>(1965)>은 감독 뿐 아니라 의상 담당이던 이해윤까지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남한 출신 여자 포로들을 호송하는 인민군 장교의 인간적인 면을 묘사한 이 영화에서 이해윤이 인민군 의상을 근사하게 지었기 때문이었다. 기세등등한 공산당과 인민군을 표현하기 위해 하얀 망이 아닌 새 망으로 탱크 위장망을 치고, 장교 군복을 멋지게 지어 세무(suede) 반장화까지 신겼던 것이 문제였다. 중앙정보부는 이해윤의 의상 창고도 샅샅이 조사하고, 인민군과 중공군 의상에 대한 교육을 한 달이나 받게 해 향후 의상 제작에 있어 반영하도록 했다. (사진21) <하얀전쟁>(정지영, 1992)의 베트남 현지 로케이션 장면. 급히 필요한 미군 작업복을 현지 인력을 직접 고용해 만들어 촬영을 했다. 그 후에도 <8240 K.L.O>(정진우, 1966), <증언>(임권택, 1973),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아벤고 공수군단>(임권택, 1982)을 비롯한 수십 편의 군사영화에서 이해윤은 국군과 인민군, 미군과 중공군의 옷을 지었다. 베트남에서 촬영했던 정지영의 <하얀 전쟁>(1992)에서는 예순이 훌쩍 넘은 이해윤은 홀로 로케이션 현장에서 의상을 챙겼다. 필요한 장면에 따라 연기자들의 의상을 모두 제작해 갔지만 막상 현지에서 미군 작업복이 필요했고, 무작정 사이공 시장으로 내달린 그녀는 말도 통하지 않는 현지 여성들을 고용하여 의상을 만들어 촬영을 진행하기도 했다. (사진22,23) <난중일기>(장일호, 1977) 이해윤이 쇠미늘을 오리고 두드려 하나하나 구멍을 뚫어 무명실로 꿰매 만든 갑옷을 볼 수 있다. 장일호의 <난중일기>(1977)는 그녀로 하여금 영화 의상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사극과 군사영화를 전문으로 20여 년간 의상을 담당했다지만 이 영화에서 이순신의 갑옷을 제작하는 일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갑옷을 입고 호령하는 모습을 통해 당당한 영웅의 면모를 표현하고 올곧은 성품을 드러내기 위해 연구의 연구를 거듭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우선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뜯어보며 흉내는 내봤지만 어쩐지 입체감이 영 살지 않았다. 생각 끝에 프레스 공장을 찾아가 갑옷에 달 쇠미늘(鐵札)을 오리고 두드린 다음 하나하나 구멍을 뚫어 무명실로 엮어 철갑 두 벌을 만들었다. 한 커트를 찍고 나면 날카로운 쇠미늘에 무명실이 끊어져, 이순신 역의 김진규가 한 벌을 입고 찍고 있는 동안 이해윤은 촬영장 한편에 앉아 나머지 한 벌의 쇠미늘을 다시 꿰매야 했다. 이때의 연구와 노력이 스크린에 고스란히 새겨져 관객 앞에 펼쳐진 그 순간, 그녀는 영화 의상 담당으로서 새삼 긍지를 갖게 되었다. (사진24)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정창화, 1968) 포스터 (사진25) <소림사의 결투>(채양명, 최현민, 1975) 포스터 (사진26) <무림악인전>(김정용, 1980) 포스터 합작이 시작되고 중국, 홍콩영화가 들어오면서 ‘참바라(ちゃんばら)’ 또는 ‘으악새’로 불리던 검술영화가 많아지면서, 이해윤은 영화 의상에서 ‘고증’은 유명무실해졌다고 토로했다. 4) 공보부에서는 사극이나 시대극영화에서 사학을 전공한 인력을 고증 담당 스태프로 참여시켜 근거 없는 언어, 의상, 풍습을 시정하라고 지시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상영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아보기도 했지만 지켜질 리 만무했다. 5) 궁중을 배경으로 했던 이전의 정사극과 달리 시대적인 배경만을 빌린 야사나 서민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이들 영화에서는 화려한 액션과 오락성이 더 강조되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이시기 보편화되기 시작한 새로운 옷감 나일론(nylon)은 빨아도 구겨지지도 않고 색깔도 선명했다. 면이나 비단처럼 툭하면 찢어지고 구김이 심해 관리가 힘들었던 기존의 의상과 달리 나일론으로 제작한 의상은 공중을 날아 차고 칼을 휘둘러야하는 액션 연기자들이 활동하기에는 적격인 소재였다. 이해윤 역시 ‘중국 건지, 한국 건지, 현대 건지’도 모르게 의상을 만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나일론 같은 소재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연기자들이 연기하기 편한 의상을 만들고자 했다. (사진27,28) <토지>(김수용, 1974) 이 영화에서 이해윤은 주인공 서희의 나이에 따른, 또 시대 변화에 따른 의상을 준비하고, 역사적 격변기를 보여주는 일본군, 농민, 양반 옷 할 것 없이 다양한 의상을 지었다. 특정한 장르 영화 제작에서 의상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영화계 내에서 그런 수고를 인정받기는 어려웠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여러 영화제에서 공로상과 의상 부문의 수상 트로피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중 그녀가 자랑스럽게 꼽는 의상상은 <토지>(김수용, 1974)로 받은 파나마국제영화제 의상상이다.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경남 하동의 만석지기 가문을 지켜가는 서희의 일생을 그린 이 영화에서 주인공 김지미는 어린 서희에서 나이든 서희까지 연기해야 했다. 주인공 서희의 나이에 따른, 또 시대 변화에 따른 의상을 준비해야 했고, 역사적 격변기를 보여주는 일본군, 농민, 양반 옷 할 것 없이 다양한 의상을 공들여 지어야만 했다. (사진29,30) <어우동>(이장호, 1985) 이해윤은 이 영화에서의 의상에 화려하면서도 작은 변주를 주어 개성을 가미하려 시도했다. (사진31) <서편제>(임권택, 1994)에서 한 서린 송화의 내면을 드러내 주는 팥색 저고리 그녀에게 <어우동>(이장호, 1985)의 의상은 화려하면서도 작은 변주들을 주어 신선한 개성을 가미하려고 애썼던 것이라, <서편제>(임권택, 1994)에서 한 서린 송화의 붉은 팥색 저고리는 두루마기를 뜯어 방망이로 종일 다듬어 반질반질한 비단의 느낌을 살려서 만든 것이라 소중하다. 한 겨울 장면이라 엑스트라들 안에 입는 옷들까지 모두 누벼 주어야 해 너무나 고생스러웠던 작품 <개벽>(임권택, 1991), 그리고 연일 40도를 웃도는 멕시코에서 재봉틀을 돌려 의상을 수선했던 작품 <애니깽>(김호선, 1996) 역시 이해윤에게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사진32,33,34) <개벽>(임권택, 1991) 이해윤이 빛을 보지 못한 안타까운 영화라고 소회하는 <개벽>은 겨울 장면이 많고 엑스트라가 다수 등장해 특히 공들여 의상을 지었다. (사진35,36) <애니깽>(김호선, 1996)은 1900년대 초 멕시코로 이주 노동을 해온 조선인들의 생활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해윤은 현지에서 재봉틀을 돌려 의상을 수선해 가며 촬영에 임했다. 이해윤처럼 많은 영화에서 꼭 필요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의 뒤에 또 영화사의 뒤안길에만 존재했던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현장에서 이들은 ‘뒷 스태프’(편집, 미술, 특수효과, 소품, 녹음, 의상 등)라고 불렸는데 오랫동안 이들은 전문적인 기술과 경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연출, 촬영, 연기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만큼 대우받지 못했고, 정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과 작가 위주의 연구 경향으로 인해 영화사적으로도 거의 주목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뒷 스태프’에 대한 문헌자료도 충분치 않은 것은 물론 그에 대한 연구는 미미하다. 2004년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은 ‘원로영화인 구술사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가려져있던 많은 ‘뒷 스태프’의 역사가 발굴, 기록되고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이해윤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영상 뒤에 숨은 여성마술사들, 의상전문가 이해윤 씨’, 《경향신문》 1986년 1월 29일 7면. 2) 「이해윤 : 바늘 하나로 영화를 아름답게, 40여 년간 충무로를 지켜온 영화의상 디자이너」, 『이야기 여성사: 한국여성의 삶과 역사2』, 여성신문사, 2000, 263~264쪽. 3) ‘신영화 : 사적 고증이 결여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한국일보》 1956년 6월 14일 4면. 4) <이해윤 은막의 스타, 그 날개를 달다>(나윤희, 부동산 TV, 2001). 한국영상자료원이 기획한 이해윤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www.koreafilm.co.kr에서 볼 수 있다. 5) ‘[연예계스냅] 사극 고증 철저히’, 《경향신문》 1967년 12월 23일 4면.
충무로는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장르적 지형도의 변화를 겪는다. 크진 않았다. 하지만 몇 가지는 기록할 만하다. 먼저 여전한 장르는 멜로드라마와 액션이었다. < 미워도 다시 한번 >( 정소영 , 1968) 류의 신파 멜로는 꾸준히 만들어졌다. 합작(혹은 위장 합작)을 통한 무협 액션 영화도 왕성했다. 합작과는 무관하면서도 ‘중국식 제목’을 단 한국영화들, 그러니까 < 무림오걸 >( 김시현 , 1979) < 애권 >( 이형표 , 1980) < 소림사 주방장 >( 김정용 , 1981) 같은 영화들의 러시가 이뤄졌고, < 협객 시라소니 >( 이혁수 , 1980) 같은 전통적인 ‘따찌마리’ 액션도 이어졌다. 사라진 장르도 있었다. 호러가 대표적이다. 메이저 장르는 아니었지만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던 한국 공포 영화는 1980년대 중반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 부활을 목격하기 위해선 1998년 < 여고괴담 >( 박기형 )까지 10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새로 생긴 장르도 있었다. 아동용 SF 액션이다. 지금 보면 조잡하기 그지없는 특수효과로 점철된, ‘우뢰매’ 시리즈(1986~93)나 ‘별똥왕자’ 시리즈(1987~88)는 1980년대의 발명품이었다. 마지막으로, 변형된 장르가 있다. 일종의 진화라고 해도 좋을 거다. 1970년대 ‘얄개 영화’는 1980년대에 연령대를 조금 높여서 < 대학얄개 >( 김응천 , 1982)로 다시 태어났고, < 오성군 한음군 >( 박호태 , 1988) 같은 영화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1989년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강우석 ) 이후엔 사회적 이슈와 결합되어 1990년대 초를 장식했다. 1. 토속 영화의 조짐이 보였던 < 심봤다 > 2. 1985년에 나온 < 뽕 >은 토속 영화의 분기점이 되는 작품으로, 이후 컬트로서 추앙받는다. 3-4. 정윤희 가 주연을 맡았던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왼쪽)와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오른쪽). 자연 속에서 파라다이스를 즐기던 순수한 남녀는 외부자에 의해 그곳을 침범 당하고, 결국 여자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한다. 1980년대에 또 하나의 ‘변종’이 있다면 흔히 ‘토속물’ 혹은 ‘향토물’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제목으로 지칭되던 그 영화들이다. 이 글에선 ‘토속 영화’라는 명칭으로 통일할 이 영화들은, 거칠게 정의 내리면 이른바 ‘문예영화’가 에로티시즘을 만난 결과다. 1970년대까지 검열의 수위 안에서 원작 소설을 표현했다면, 1980년대엔 과감해졌다. 과거 이미 만들어졌던 정비석 의 『성황당』, 이효석 의 『분녀』, 나도향의 『물레방아』 등은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정진우 , 1981) < 산딸기 >( 김수형 , 1982) < 물레방아 >( 조명화 , 1986) 등으로 좀 더 에로틱하게 재등장했고, 김유정 의 『땡볕』 『떡』 등도 소환되었다. 그러면서 문예영화의 범주를 벗어난, 다소 유명하지 않은 작가의 소설을 각색하거나 창작 시나리오를 토대로 한 토속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들은 (주로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에로티시즘 사극과 구분되어야 한다. 토속 영화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토속 에로티시즘 멜로드라마는 사극이 지니는 유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며, 시대 배경은 식민지 시기 농촌이나 어촌이다. 공통점도 있다. 1980년대 토속 영화와 사극은 한국영화에서 여성에게 가장 가혹했던 장르였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며 죽음에 이르는 여성들의 영화. 그들은 마치 세상의 모든 모순을 떠안아야 하는 것처럼 보였고, 당시 외국에서 한국영화 특별전이 열리면 서구 관객들은 “한국영화는 왜 그렇게 여자를 때리느냐”고 항의성 질문을 던질 정도였다. 1. < 산딸기 >의 한 장면. 물레방앗간은 토속 영화에서 반복되는 핵심적 공간이다. 주로 비밀스러운 정사가 이뤄지는 그곳에선 종종 여성의 운명이 결정된다. 2. < 산딸기 >의 엔딩. 명준과 분녀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명준은 말한다. “그래 저 학들처럼 천년만년 살자.” 토속 영화는 ‘새’의 상징을 자주 사용한다. 정진우 감독은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를 만들었고(<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3)까지 묶어 ‘새 3부작’), < 여자의 성 >에서 별녀는 어릴 적 숲에서 죽어가는 새를 데리고 와 살리는데, 그 가련한 새는 이후 별녀의 삶을 상징한다. 그리고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산딸기 2 > <여자의 성>은 모두 새 소리를 섹스의 신호로 사용한다. 3. < 숲속의 바보 >는 토속 장르에 ‘백치 여인’ 캐릭터를 끌어왔다. 4. 문예 영화는 1980년대에 토속 영화의 방식으로 변형되어 지속된다. 사진은 김동인 원작의 < 감자 > 그 시작을 살펴보면 1970년대 말에 조짐이 있었다. 선두 주자는 정진우 감독이었다. 이은성 작가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한 < 심봤다 >(1979)는, 문예 영화의 톤이 짙긴 했지만 이후 등장할 토속 영화 트렌드를 예견케 했고,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가 이어졌다. 결정타는 김수형 감독의 1982년 작 < 산딸기 >였다. 안소영 - 선우일란 - 강혜지 - 소비아 로 주연 여배우의 변화를 겪으며 1994년 6편까지 이어진 이 토종 프랜차이즈는 토속 영화의 얼개를 만들었다. < 산딸기 > 1편을 보자. 화전민 마을에 분녀( 안소영 )가 산다. 한가위 마을 잔치 때 취바리 탈을 쓴 누군가에게 겁탈당한 분녀는, 그 주인공이 마을 청년 명준( 임동진 )이라는 걸 알게 된다. 노다지를 찾아 만주로 떠난 명준을 분녀는 기다린다(안소영과 임동진은 같은 해 < 애마부인 >( 정인엽 , 1982)에서도 공연했고, 여기서도 안소영은 (감옥에 간 남편) 임동진을 기다렸다). 마을 남자들은 호시탐탐 분녀를 노리고, 급기야 자기들끼리 싸우다 두 명이 죽는다. 이에 ‘남자 잡아먹는 X’라며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 분녀는 가마 주인(남궁원)을 따라 읍내로 가 술집 작부가 된다. < 산딸기 >는 토속 영화의 핵심 구조를 제시한다. 바로 이분법이다. ‘시골 vs. 도시’라는 구도 속에서 토속 영화는 여러 대립항들을 만들어낸다. 아직 물물교환이 익숙한 ‘촌’이 있다면, 그 반대편엔 ‘장터’라는 공간으로 상징되는 ‘돈’의 세계가 있다. 마치 서부극의 ‘자연 vs. 문명’ 구도처럼 토속 영화는 두 세계의 충돌 속에서 전자의 붕괴를 보여준다. 산속이나 섬에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거나 약초를 캐며 살아간다면, 양복을 입은 외부인들(여기엔 종종 일본 순사가 가세한다)은 그 공동체를 위협하는 것이다. 여기서 위협의 대상은, 그 마을에서 가장 아리따운 젊은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는 진실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수많은 남자들에게 음험한 욕정의 대상이 되고, 결국 도시로 끌려가 어울리지 않는 짙은 화장을 한 채 술과 몸을 팔게 된다. 이 구도는 < 여자의 성 >( 문여송 , 1985) < 산딸기 3 >( 김수형 , 1987) < 옹기골 뽕녀 >(김수형, 1987) 등에서도 정확히 반복되는, 토속 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이다. 여기서 같은 해에 나온 또 한 편의 영화를 주목해야 한다. 장미희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 숲속의 바보 >( 박용준 , 1982) 다. 이 영화는 토속 영화의 여성 캐릭터를 완성한다. 바로 ‘백치 여성’의 등장이다. 복희( 장미희 )는 다소 지능이 떨어지는, 영화 제목 그대로 ‘숲속의 바보’인데, 이후 수많은 토속 영화들은 핸디캡을 지닌 여성 캐릭터를 통해 이 장르가 지닌 ‘원시성’ ‘본능성’ ‘순수성’ 등을 드러낸다(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진 않지만, 그런 점에서 말 못 하는 수련( 정윤희 )이 등장하는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정진우 , 1981)도 토속 영화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캐릭터의 계보는 < 불새의 늪 >( 고응호 , 1984)의 봉은( 원미경 ), < 여자의 성 >의 별녀( 최선아 ), < 소금장수 >( 김대진 , 1988)의 냉이(천은경) 등으로 이어지며, 그들은 섹스에 대한 ‘원초적 본능’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불새의 늪 >에서 화가 종훈( 마흥식 )은 봉은에게 ‘수성’(獸性), 즉 ‘짐승 냄새’가 난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며, <여자의 성>의 뭍에서 온 침입자 억수( 독고영재 )는 “잠자리가 뛰어난 여자거든!”이라며 별녀에게 집착한다). 1-2. < 산딸기 2 >(왼쪽)와 < 물레방아 >(오른쪽)의 선우일란 과 마흥식 . 두 배우는 토속 영화의 간판스타였다. 3. 문여송 감독의 히로인이었던 < 여자의 성 >의 최선아 . 4. < 산딸기 >의 김애경. 무당 캐릭터는 토속 영화의 핵심적 조연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테마는 바로 ‘근친적 설정’이다. 문명 이전의 상태에 대한 메타포일까? 심의 때문에 진짜 혈연적 근친 관계를 내세우진 못하고 유사 근친 관계를 설정하긴 하지만, 많은 토속 영화들이 근친적 관계를 내세운다. < 숲속의 바보 >의 복희는 남매처럼 함께 사는 머슴 만복( 김동현 )과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는다.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에서 최 영감( 황해 )은 고아인 수련과 문영( 최윤석 )을 키우는데, 혈연은 아니지만 남매처럼 자란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 여자의 성 >의 별녀는 데릴사위로 온 거무( 이구순 )와 남매처럼 지내다가 결혼한다. < 소금장수 >의 덕만( 김추련 )도 엉겁결에 맡아 딸처럼 데리고 다니는 냉이와 부부적 관계를 맺게 된다. < 화녀촌 >( 김기 , 1985)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이다. 종섭( 이영하 )은 상처한 후 산에서 어머니( 김지영 ), 처제 정분( 최현미 ) 그리고 딸과 살아간다. 그는 형제나 마찬가지인 옆집 친구 덕만( 나기수 )의 아내( 이상숙 )와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는데, 덕만 내외가 갓난아이를 남긴 채 마을을 떠나자 처제를 아내처럼 받아들여 그 아이를 키우며 산다. 근친적 관계 이외에도 토속 영화는, 도시와 문명이 반대편에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본능적인 모습들을 클리셰로 드러낸다. 대표적인 것만 간추려 보겠다. 1. 수시로 목욕을 한다 모든 토속 영화엔 꼭 이 장면이 있다. 여성 캐릭터들은 숲속의 계곡이든 강가든 폭포 아래든 수시로 목욕을 한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을 엿보는 남성의 시선이 있다. 많은 사건들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2. 언제 어디서든 정사를 한다 낮이든 밤이든, 집이든 물레방앗간이든 들판이든 숲이든 개울가든 옥수수밭이든, 그들은 정사를 한다. 그리고 이 광경 역시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들킨다. 3. 껄떡대는 건 죄가 아니다 욕정의 도덕률이 무너진 상태에서, 마을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가운데 놓고 많은 남정네들이 치근대는 건 토속 영화에서 전혀 비윤리적인 일이 아니다. 그들은 겁탈을 해서라도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유부남/유부녀 여부는 중요하지 않으며, 이것은 < 뽕 >( 이두용 , 1986)과 <떡>( 김수형 , 1988)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4. 무당을 조심하라 무당이든 박수든, 토속 영화에서 ‘무속인’은 빠지지 않는다(< 불새의 늪 >에서 봉은은 아예 무당의 딸로 그녀와 관계를 맺으면 급살 맞아 죽는다). 그들은 마을에서 가장 성적으로 문란한 존재이며, 권위를 내세워 음모를 꾸민다. 5. 여성은 거래된다 사극이 여성을 대 잇기의 수단으로 여기거나 정절을 강조하며 억압했다면, 토속 영화는 상품처럼 거래한다. 그 배경엔 남성의 어리석은 물욕이 도사리고 있는데, 서너 명 만 모이면 반드시 투전판을 벌이는 그들은 노름빚을 갚기 위해 딸을 팔아 먹고(< 산딸기 3 >), 여자는 몰래 몸을 판다(< 물레방아 >). 여기서 자연 속에서 사는 여성 캐릭터들은 장터를 통해 문명을 접하고, 동동 구리무와 박하 분과 손거울의 유혹 앞에 종종 마음을 연다.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에서 김 주사( 최봉 )도 그렇게 순이( 정윤희 )에게 접근했다. 그렇게 유혹에 넘어간 여자들은 결국 유린당한다. 1 . < 화녀촌 >의 근친적 결말. 2. 토속 에로에선 그 어떤 곳에서도 정사가 벌어진다. 사진은 < 소금장수 >의 옥수수밭 3. 남자들이 셋 이상 모이면 투전판이 벌어진다. 사진은 < 산딸기 2 > 4. 여성은 결국 술집 작부가 되며, 그곳에서 번 돈은 남자의 노름 밑천이 된다. 사진은 < 산딸기 2 > 토속 영화는 1980년대 중반을 넘어가며 서서히 변주되고 확장된다. 하명중 감독의 리얼리즘적 접근이 두드러지는 < 땡볕 >(1985)과 < 태 >(1986)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며, 변장호 감독의 < 감자 >(1988)나 임권택 감독의 < 아다다 >(1988)는 문예 영화에 좀 더 가까운 케이스일 것이다. 여기서 이두용 감독의 < 뽕 >(1986)은 토속 영화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다. 원작이 나도향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문예 영화의 전통을 잇고 있으면서, <뽕>은 기존 토속 영화가 지녔던 신파적이며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멜로드라마의 톤을 걷어낸다. 베테랑 이두용 감독은 능수능란하게 영화를 조절하며 끌고 가는데, 심각하거나 진지하지 않은 톤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에로티시즘을 표현할 때도, 절박하거나 경직되지 않은, 여유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유머로 포장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 < 뽕 >의 꽤 논쟁 지점이 있는 영화다. 안협네( 이미숙 )는 마을의 매춘부이며, 그녀에 대한 동네 남정네들의 음험한 시선을 영화는 자연스레 합리화한다. 여기서 안협네라는 캐릭터가 다른 건 육체관계에서 일종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 토속 영화들이 ‘겁탈당하는 여성’을 보여준다면, <뽕>의 안협네는 철저히 거래하는 여성이며 원치 않는 남자는 거절한다. 같은 해에 나온 < 변강쇠 >( 엄종선 , 1986)의 ‘옹녀’( 원미경 )가 강한 성적 능력으로 위협적 존재가 된다면, 안협네는 유혹적이면서도 주체적이며 현실적이다. < 뽕 > 이후 토속 영화는 약간 변화를 겪는다. < 옹기골 뽕녀 > 같은 유사 제목 영화가 나왔고, 나도향을 비롯해 김유정 , 계용묵, 김동인 등 토속 영화의 재료로 삼기 좋은 작가들의 소설이 대거 각색되었다. 흥미로운 건 김수형 감독의 < 떡 >이다. 김유정 의 원작을 옮긴 이 영화는 <뽕> 이후 토속 영화(와 사극)의 트렌드가 변했음을 보여준다. 간단히 말하면 <떡>은 ‘<뽕>+< 변강쇠 >’이다. 마을 남자들은 (그녀가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점례( 선우일란 )를 넘본다. <뽕>의 안협네 같은 존재인 셈. 그런데 점례와 관계를 맺는 남자들은 에너지를 완전히 빨려 버린다. ‘옹녀’인 셈이다. 흥미로운 건 결말인데, <뽕>에서 안협네의 남편 삼보(이무정)를 통해 암시만 되었던 독립운동가 콘셉트가 <떡>에선 명확하게 제시된다. < 산딸기 >나 < 뽕 >은 이후 프랜차이즈를 이루며 1990년대까지 이어졌지만(<뽕>은 최근 < 뽕 2014 >( 공자관 )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토속 에로는 대체적으로 1980년대 말에 수명을 다하고 만다. 이것은 에로 영화가 1988년 올림픽 이후 수그러들었던 것과 궤를 같이하며, 이 시기 한국의 에로틱한 영상 콘텐츠는 극장에서 비디오 시장으로 급속하게 중심 이동을 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토속 에로의 흐름.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와 기획영화가 등장했던 1990년대에 살아남기엔, 그 정서의 우울함과 여성관의 한계는 너무 치명적이었다. 그 한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뽕>이 최근까지도 명맥을 잇고 있는 건, 어쩌면 그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자, 가렛 에드워즈의 < 고질라 >를 보면서 ‘쇼와 고질라’와 ‘헤이세이 고질라’의 전통을 언급하며 유년기의 추억이 귀환한 듯 기뻐하는 평들이 딱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는 것부터 먼저 언급하며 이 글을 시작해야겠다. 그러니까 말이다. 어째서 고질라가 유년기와 청년기의 추억일 수가 있지? 쇼와든 헤이세이든 내가 극장용 고질라를 처음으로 본 건 2000년대 이후였다. 가만 생각해보니 나에게 진정한 첫 번째 고질라 영화는 롤랜드 에머리히의 < 고질라 >였던 것 같다. 이미 할리우드에서 다시 매만져진 일본인들의 전통을 목격한 뒤, 그걸 토대로 다시 일본인들의 전통을 거슬러 올라 머릿속에 입력시켰다는 이야기다. 문방구의 꽃,「괴수대백과」 만약 고질라가 내 안의 아주 미묘한 덕심을 살짝 건드리긴 했다면, 그건 오로지 80년대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괴수대백과」 덕분이다. 이걸 기억하는 세대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80년대 문방구에서는 한국에 전혀 소개된 바 없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특촬물에 대한 번역본 해설지를 팔았다. 그게 또 어쩐 일인지 모르겠지만 꽤나 인기가 있었다. 나 역시 「괴수대백과」의 열렬한 팬이었다. 고질라와 가메라와 모스라와 킹기도라와 메카 고질라의 사진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저것들을 진짜 스크린 속에서 보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 그 열망은 십여 년 뒤에나 겨우 DVD를 통해 이루어졌다. 마치「‘건담대백과」로 접한 <기동전사 Z건담>을 십수 년 뒤에나 카피본으로 겨우 (그것도 중간중간 더 이상 성인에게는 온전히 통하지 않는 과장된 감상주의를 감내해가며) 목도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나에게 ‘괴수물’을 처음으로 스크린에서 본 게 언제냐고 묻는다면, 고질라나 가메라 대신, 입에서 꺼내는 즉시 살짝 웃음이 터지는 제목을 굳이 꺼내야만 한다. 그렇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이라면 기억할 < 비천괴수 >라는 제목 말이다. < 비천괴수 >는 60년대 신상옥 , 나봉한 같은 감독의 연출부를 거쳐, 한국과 홍콩 합작영화가 쏟아지던 시절 성룡, 홍금보가 출연한 <용호문>(1975), < 사대철인 >(1977) 등 무협 영화를 만들었던 김정용 감독의 영화다. 합작영화 시절이 막을 내리고 한국영화의 암흑기가 도래한 80년대 초반, 그는 < 소림사 주방장 >(1981)이나 < 무림 걸식도사 >(1982)같은 코믹 무협영화들을 만들었다. 낯설다고? 80년대 토요일 낮에 당신은 TV로 이 영화들을 본 적이 있을 거다. 하여간 그는 90년대 후반까지도 조형기가 임화수를 연기하는 < 충무로 돈키호테 >(1999)같은 싸구려 영화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30여 년 동안 영화를 만든 이 남자의 필모그라피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게 격정적인 B급 영화가 바로 이 한국형 괴수물 <비천괴수>다. 뭔가 대단한 영화일 것 같다고? 확실히 대단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공룡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는 김 박사(왜 그 시절에는 다 김 박사인가!)가 실종된다. 잡지사에 근무하는 강 기자는 박사를 찾아 어느 작은 해안 도시로 간다. 알고보니 김 박사는 딸과 함께 숨어서 공룡의 존재를 여전히 찾아 헤매고 있다. 강 기자는 이러저러해서 김 박사의 가정부로 취직을 한다(왜?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자정신이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끝에 괴수가 부활해 인간들을 침공하기 시작한다(공룡이라더니 왜 괴수냐고? 그걸 나에게 물어봐야......). < 비천괴수 > 스틸 홍보물 당대의 국민학생들에게, 아니 적어도 내가 살던 지방 항구도시의 유년들에게, < 비천괴수 >는 센세이셔널한 블록버스터였다. 소문이 퍼지자 거의 주변 모든 학교의 아이들이 이 영화를 보러 갔다. 거기에는 「괴수대백과」에 나올 법한 괴수들이 정유시설을 파괴하고, 도시를 파괴하고, 쓰나미를 일으키고(태풍이었던가? 어쨌든.....), 하여간 모든 걸 파괴했다. 그건 그야말로 당대 한국 영화의 어떤 괴수적 절정에 다름 없었다. “「괴수대백과」 괴수들이 다 나와!” 나는 친구들에게 소리를 빽빽 질러가며 <비천괴수>를 보라고 권했다. 그렇다. 「괴수대백과」의 괴수들이 이 영화에 다 나오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면 이건, 알라바마주의 할매가 옆 동네 천을 하나씩 훔쳐다가 기워낸 퀼트 같은 영화였으니까. < 비천괴수 >는 80년대 한국 영화계가 얼마나 카피라이트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는지에 대한 근사한 역사적 사료다. 사실상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괴수의 스펙터클은 < 울트라맨 > 시리즈의 괴수 장면들을 불법으로 가져온 것이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돌아온 울트라맨>의 시고라스, 벰스타 등이고, 초기 울트라맨의 페스타도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한번 상상해보시라. 한국형 괴수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제작자와 감독은 아무리 원화를 팍팍 투자해도 엔화로 만든 특촬물의 퀄러티를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니 유일한 방법은 어차피 한국에 전혀 들어오지 않은 일본 특촬물의 괴수 장면들을 조금씩 떼어다가 영화 속에 삽입하는 것이었을 게다. “자, 영화의 줄거리는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에서 따오는 거야. 공룡을 발견한 학자 이야기를 넣으면 근사하잖아? 응? 공룡이 아니고 괴수물 아니냐고? 한국 사람들은 괴수 이런 단어 잘 모르니까 일단 공룡으로 시작해. 그리고 그냥 해변 마을에 가서 배우들 데리고 도망치고 이런 거 찍은 다음에 편집하면 되는 거야. 괴수랑 사람이랑 직접적으로 컨택트하는 장면이 하나 쯤 있어 하지 않냐고? 그러면 발만 하나 만들어! 발만!” 발만! 당연히 괴수가 나오는 장면들과 실제로 찍은 인간들의 장면들은 도대체 붙을 리가 없다. 아마도 김정용 감독은 거의 제대로 된 대본도 없이 이 영화를 촬영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괴수가 도시를 파괴하는 장면 뒤에는 옅게 미소 짓거나 좋아서 박수를 쳐대는 인간의 리액션 씬이 등장한다. 아, 혹시 이것은 지구 종말의 날을 맞이한 인간들의 광증을 표현한 몽타주인가? < 비천괴수 > 최대의 명장면은 배우 김을동 이 마을에서 아기를 둘러업고 산으로 피신을 갔다가, 둘러업고 온 것이 아기가 아니라 베개라는 사실을 깨닫고 슬프게 오열하는 장면이다. 공포에 질려서 산으로 도망쳤던 김 박사의 딸은 그 모습을 보고는 너무나도 기쁘게 웃어젖힌다. 나중에 <비천괴수>를 다시 봤더니, 이 영화의 진정한 괴수는 괴수가 아니라 김 박사의 딸이었다. 그러고보니 왜 한국형 괴수영화 속 아이들은 이토록 인간미 없는 사이코패스인가에 대한 논문을 누가 하나 써볼 법도 하다. 전설적인 < 대괴수 용가리 >에서 용가리와 춤을 추는 소년의 캐릭터와 함께 묶어서 말이다. < 비천괴수 >는 < 대괴수 용가리 >(1967), < 우주괴인 왕마귀 >(1967)로부터 시작된, 가난한 한국 B급 괴수영화의 계보도에서도 결코 진골은 될 수 없는 영화다. 두려움 없는 저작권의 테러라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대괴수 용가리>를 극장에서 보기에는 너무 어렸고, 레이 해리하우젠의 몬스터들은 ‘괴수’라기보다는 뭔가 좀 다른 존재였다(그리고 심형래의 < 용가리 >를 온전히 즐기기에는 지나치게 나이가 들었다). 지금 삼사십대의 한국 몬스터 영화광들에게는 <비천괴수>가 주는 어떤 미묘한 향수를 도저히 거부할 길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건 마치, < 고질라 >를 보고 싶었으나 정작 알라바마주 동네 극장에서 상영하는 샘 커츠만의 거대 ‘칠면조 괴수물’ <자이언트 클로 The Giant Claw>(1957)가 생애 첫 괴수영화가 되어버린, 지금은 예순이 넘은 미국의 어떤 괴수광 노인이 느끼는 향수 같은 것과도 비슷한 것이리라. 뭐, 그런 느낌적 느낌일 거란 소리다. 김기주 남혜경 김다혜 문태선 감독: 김정용 각본: 이문웅 개봉극장: 오스카(서울) 관람인원: 2,741명(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