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들
- 감독
- 김종관
- 제작년도
- 2008
- 출연
- 정유미, 이정민, 정보훈, 정대훈, 양익준, 이승연, 문수인, 김흥민, 최태연, 김용완, 황슬기, 하라다 카나, 김영재, 홍승일, 홍윤정, 신경진, 김가은, 권다현, 홍종현, 설창희, 이소윤, 김아림, 이석호
‘긴긴 하루였어요. 하느님이 내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어요? 물론 전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사실, 전 다 솔직했는걸요.’ 영화 < 최악의 하루 >( 김종관 , 2016) 속 은희( 한예리 )는 무명 배우이다. 늦여름의 오후, 연기 수업을 듣고 나온 은희는 일본에서 와 길을 헤매는 작가 료헤이(이와세 료)를 만나 도와준다. 연인 현오( 권율 )의 재촉에 은희는 배우인 그의 촬영지 남산으로 향해 그를 만나지만 고운 말이 오가는 평범한 데이트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한참 연애사를 헤집으며 서로를 탓하다가 달콤한 연인 행세를 좀 하려는가 싶은 찰나, 현오는 은희를 다른 여성의 이름으로 부르고 만다. 화가 난 은희는 현오를 뒤로하고 남산에서 내려가고, 거기에는 은희의 트윗을 보고 멋대로 찾아온 운철(이희준)이 은희를 기다리고 있다. 은희가 현오와 헤어졌을 때 만났던 운철은 은희에 대한 미련을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도, 뻔뻔하게 전 부인과의 재결합을 알린다. 운철은 오랜만에 겨우 만난 은희를 보내주지 않으려 하지만 은희는 적당히 둘러대며 다시 현오를 만나러 남산에 오른다. 그러나 또다시 은희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운철을 마주치고, 현오와 셋이서 마주치는 최악의 상황을 면하기 위해 은희는 가지 않으려는 운철을 사정하다시피 해서 돌려보낸다. 물론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고, 현오와 함께 있는 은희를 운철은 다시 한번 찾아온다. 결국 맞닥뜨리게 된 세 명, 서로가 은희의 연인이라 주장하는 현오와 운철 사이에서 은희는 그저 힘없이 길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그들이 떠난 뒤, 은희는 앞서 연기 수업에서 배운 대사를 체화해서 조용히 읊어본다. ‘긴긴 하루였어요. 하느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최악의 하루>라는 제목은 꽤 직관적이다. 한 앵글에 잡히는 은희, 현오, 운철을 보고 있노라면 관객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쉴 테다. 영화는 료헤이의 내레이션으로 막을 연다. ‘여행지에서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다. 곤경에 처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은희의 하루가 료헤이가 문득 생각해낸 허구의 이야기라면, 이는 그가 곤경에 빠진 여성의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생각해낸 것처럼 보인다. 보통의 액자식 구성(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액자처럼 끼어들어 있는 구성)은 내부 이야기와 외부 이야기의 경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최악의 하루>는 외부 이야기의 화자처럼 보이는 료헤이의 내레이션과 그의 모습이 잠깐 등장한 후, 바로 은희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료헤이는 자연스럽게 은희의 하루에 녹아들어 오늘 하루 동안 은희가 만나게 된 세 명의 남자 중 그저 한 명으로 느껴지게 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분명 처음의 내레이션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은희의 하루에 같이 발을 동동 구르게 될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는 은희의 시간을 하루로 제한하는데, 그뿐만 아니라 공간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은희가 처음 수업을 듣고, 료헤이를 만나는 배경은 서촌이다. 길을 잃어 한없이 걷는 둘의 뒤로 펼쳐지는 고즈넉한 풍경은, 늦여름의 서울을 관객이 하여금 대신 만끽하도록 한다. 은희와 료헤이가 작별을 고한 후, 배경은 남산으로 고정된다. 현오를 만나러, 운철을 피하려 은희는 푸릇푸릇한 남산을 걷고 또 걷는다. 최악으로 치닫는 하루와는 대비되는 아름답고 안정감마저 주는 배경은 은희의 하루를 더 비참하게 만들기도, 덜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최악의 하루>는 거짓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영화이다. 현오는 실수로 부른 이름의 여성과 은희 몰래 교제를 하는 것처럼 보이고, 운철은 전 부인과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채 은희를 만난 이력이 있다. 그러나 은희는 이들 사이에서 그저 수동적으로 순진한 얼굴을 하고 난처해하지만은 않는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에는 거짓으로 응수하기를 선택한다. 비록 그 치열한 고군분투의 결과로 그의 하루는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았지만 말이다. 은희와 료헤이가 처음 만나 서로의 직업을 물었을 때, 료헤이는 소설가인 그의 직업을 ‘거짓말을 하는 직업’이라고 소개한다. 은희는 배우인 자신도 같다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지만, 이 둘은 서로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서툰 언어인 영어로 대화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을 고르고, 줄여서, 쉽게 말한다. 유창한 거짓이 덧붙을 여유는 없다. 소박한 대화 속에서 그들은 미소 짓는다. 료헤이의 팬이라는 한 잡지 기자는 인터뷰에서 ‘이야기가 자극적이고 주인공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잔인하다. 왜 인물들을 위기에 넣고 꺼내주지 않느냐’고 묻는다. ‘글은 글일 뿐’이라고 답하는 료헤이에게 ‘저는 부끄러웠어요. 저 자신과 그 안의 인물이 점점 닮아가더니 벼랑으로 떨어지고 땅에 묻히더군요. 정말 그 사람들을 알고 있나요?’라고 말한 뒤 기자는 사라진다. 아니, 있었던 흔적이 아예 온데간데없다. 료헤이가 본인에게 묻는 말인 것이다. 그대로 은희에게 가 닿는 질문. 그는 혼자 앉아 골똘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본다. 이미 늦은 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은희의 앞에 료헤이가 다시 나타난다. 현오에게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냥 일본인이라고 했지만, 은희는 료헤이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최악의 하루를 보냈음에도, 은희는 다시 만난 료헤이에게 묻는다. ‘오늘 하루 어땠어요?’ 상대의 안위는 안중에 없이, 각자의 욕망만을 이야기하던 현오와 운철과는 극명히 대비된다. 이제는 별다른 목적 없이, 한 번도 끝까지 가 본 적 없는 남산의 산책길을 료헤이와 은희는 함께 걸어본다. 기자의 입을 빌려 자신에게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료헤이는 드디어 내놓는다. 한 번도 소설의 주인공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적 없는 그가, 언제나 위기에 빠뜨리고 방관자의 눈으로만 지켜봤던 그가, 처음으로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를 쓰기로 한다. 최악의 하루를 보낸 은희에게, 료헤이는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한 이야기에 대해 말해준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 료헤이가 은희에게 직접 해주는 이 말은, 누구나 항상 되뇔법한 ‘다 잘 될 거야.’와 꽤나 다른 의미를 갖는다. 액자식 구성을 명확히 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과 남이 해주는 말의 무게는 으레 다른 법이지만, 나와 다른 층위에 있는 존재의 이 말은 강력해서 최악의 하루 끝에서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준다. 당신의 하루를 감히 이해하거나 잘잘못을 따지려 하지 않고, 그저 내일의 안녕을 빌어주는 말. 이는 료헤이가 은희에게 하는 말이면서도, 감독이 힘든 하루를 보냈을지도 모르는 관객에게 전하는 심심한 위로의 말이 아닐까.
누군가는 첫 영화를 만들 것이다. 두 시간이 넘는 영화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첫 영화는 3분 남짓의 영화가 될 수도 있다. 많은 수는 첫 번째 영화가 마지막 영화가 될 것이며 그중 운 좋은 일부는 두 번째 영화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아주 소수는 이후 창작 활동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심사숙고와 인내의 시간을 지나 제대로 된 기반 아래서 스스로가 생각한 인생작을 첫 번째 영화로 만들 수도 있지만, 또 어느 누구는 예상치 못한 기회에 아이폰으로 만든 영화가 관객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여기서 한 번쯤 고민이 든다. 내가 첫 번째 만든 영화가 나의 첫 영화인가? 첫 번째 관객을 만난 영화가 나의 첫 영화인가? 어쨌든 첫 번째 영화를 만들게 된 창작자들, 그것도 준비가 안 된 예상치 않은 순간에, 영상 창작이라는 운명을 만난 이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또한 얼결에 첫 번째 실패를 겪고 두 번째 혹은 세 번째의 시도를 위해 좀 더 먼저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픈 이들을 위해서도 이 글을 쓴다. 당신이 영화를 위해 시나리오를 썼고 가상의 이야기와 공간 아래 설 가상의 인물이 필요하다면, 그 가상의 인물을 연기할 누군가를 찾기 위해 고민할 것이다. 내가 처음 쓴, 내 생애 첫 영화의 주인공을 해 줄 사람은 누구인가? 경험 없는 연출자가 배우를 찾고 만나는 방법은 사실 많지 않다. 연출자는 자신이 그리는 인물을 표현해줄 좋은 배우를 선택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겠지만, 동시에 좋은 배우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프로젝트를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나리오와 좋은 비전, 연출자의 좋은 역량을 보여줘야 좋은 스태프를 만나고 또 좋은 배우를 만날 수 있다. 다행히 내 인생의 시나리오를 썼고 그 시나리오로 첫 번째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전세금을 빼서 영화를 만들 각오를 할 수는 있지만 배우 전도연에게 캐스팅을 제안하고 동의를 얻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스타 캐스팅을 할 수는 없다. 일단 내 첫 번째 영화를 위한 탄탄한 시나리오와 동료들, 그리고 예산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치열한 사전준비단계의 어느 지점, 내 영화를 현실화 할 수 있을 가능성이 보일 때 우리는 캐스팅을 하게 된다. 러닝타임 10분짜리 내 인생 첫 영화의 히로인을 찾아보자. 하늘 저 멀리 떠 있는 스타를 캐스팅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방법으로 욕심을 조금 내 볼 수는 있다. 단편영화 혹은 독립영화 안에서 존재감을 보여주는 배우들, 시스템의 바깥에서 새로운 영화에 의욕적인 도전을 해줄 수 있는 좋은 배우들에게 약간의 무모한 욕심을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가 첫 번째 출발선에 섰다면 일단 같은 출발선에 선 사람을 찾는 방법도 있다. 자신처럼 맨몸으로 뛰어들어 뭔가를 해보려는 동료들, 경험은 없지만 미래의 재능을 믿는 자신과 같은 선상에 있는 동료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어느 독립영화의 단역 혹은 대학교 1학년 실습작품에 나온 배우였지만 내 영화의 보석이 되어줄 것임을 직감한 배우, 어느 연극무대 위에서 보았던 조역 등 발품을 팔아 어렵게 말을 건네고 대화하고 내 영화의 비전을 설명해 내 첫 번째 영화의 주인공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내가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한동안 단편 작업을 했을 때 가장 많은 캐스팅이 그런 발품을 통해서였다. 여느 상업 영화 현장처럼 배우모집공고를 내고 오디션을 보는 방법도 있다. 필름메이커스, 액터 잡 등의 웹사이트(조금 옛날이야기인데 지금은 조금 더 좋은 커뮤니티가 있을 것이다)에 캐스팅 공고를 낼 수 있다. 내가 아무리 경험이 없더라도 내 비전에 허풍을 섞지 말고 되도록 솔직하게 배우 모집 공고를 낸다. 배우를 모집하는 영화의 성격과 시놉시스, 연출자의 경력사항, 배역의 성격, 예상되는 촬영 회차, 출연료 유무 등을 솔직하고 자세하며 간결한 방식으로 기술하고 공지한다. 그리고 연출자 혹은 조연출의 연락처를 남긴다. 당신의 경험이 미천하더라도 당신의 작업에 의미를 부여할 좋은 동료들 몇몇이 메일로 프로필을 보내줄 수 있다. 운이 좋게도 받은 메일 중 준비하는 캐릭터의 이미지와 가깝고 궁금한 배우들이 생기면 시나리오를 보내주고 미팅 혹은 오디션을 요구해본다. 아직 얼굴도 안 봤고 캐스팅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보내도 될까, 하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내 시나리오가 이렇게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다가 어떤 이가 내 아이템을 훔쳐 영화를 만들고 칸영화제에 가는 꼴을 어떻게 보지?” 등의 무한상상을 할 필요도 없거니와 아무 영화도 만든 적이 없는 나를 믿고 오디션에 와 줄 배우는 세상에 없다. 그가 아무도 모르는 당신의 영화에 자신의 프로필을 보내 준 것처럼 당신 또한 당신의 시나리오를 보내주는 것으로 신의를 지키는 것이다. 영화제작에 있어 신의란 중요한 문제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점검이 지나고 호의가 남아 만나게 되는 단계까지 왔다면 그다음의 신중한 판단들이 남아있다. 우선 어떤 만남을 가질 것인가. 단순한 미팅을 할 수도 있고 오디션의 형태로 배우를 만날 수 있다. 배우와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고 배우에게 연기에 대한 주문을 할 것이라면 또 그에 맞는 공간(빈 강의실이나 방해받지 않을 미팅룸)이 필요하다. 배우와의 오디션에서 핵심은 대화와 리딩이다. 배역을 위해 만난 자리에서 연출자는 자신이 준비하는 영화와 자신이 생각하는 배역의 역할을 이야기한다. 영화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줄 수 있는 계기이고, 배우가 시나리오를 읽고 느낀 영화에 대한 견해와 배역에 대한 해석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이다. 배우와 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프로필에서 느끼지 못한 그 사람의 생생한 표정과 발성, 습관 등을 알 수 있다. 리딩을 부탁할 것이라면 사전에 배우에게 알려야 한다. 전체 대본에 대한 리딩보다는 원하는 포인트를 지정해서 부탁하는 것이 좋다. 물론 시나리오가 길지 않으면 전체 리딩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특정 부분만 지정해 준비하도록 하는 게 배우에게 있어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지 않게 하는 방법이거니와 애초에 잘못된 해석과 설정이 있어도 배우가 많은 교정을 할 필요가 없다. 리딩을 통해 우리는 그 배우가 연기를 할 때의 발성, 연기에 있어의 다른 습관들, 어떤 식의 연기를 하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리딩에서 연출자는 어느 정도의 가능성만 보면 된다. 경험상 오디션이나 리허설에서 배우와 너무 많은 것을 만들면 현장에서 그 배우의 하이라이트를 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마지막으로, 배우와의 미팅을 위해 연출자가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기 바라는 마음이 있다. 첫 연출이든 어느 정도 경력이 생긴 다음의 연출이든 연출자는 서로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디렉팅과 콘트롤의 위치에 선 감독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상하관계라는 계급의 위에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배우와의 만남이 그 작품으로 이루어진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만남 자체가 다양한 배우에 대한 연출자의 데이터로 만들어진다. 당장의 배역에는 맞지 않지만 차후에 같이 작업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고 나의 경우에도 수많은 배우들을 그렇게 만났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캐스팅이 있지만 좋은 배우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 연출자의 많은 준비와 자기증명이 필요한 일이다. 그 외에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캐스팅의 예도 있다. 만약 당신이 첫 번째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면 때로는 영리한 접근이 필요하다. 멋진 캐릭터들의 향연, 멋진 대사, 강한 드라마를 가진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러한 시나리오를 썼다 하더라도 그것이 처음 연출하는 사람, 몇 번의 경험이 없는 촬영자와 스태프들, 경험 없는 배우들, 50만 원의 예산으로 만든다면 연출자의 머릿속에 있던 아름다운 영화가 실현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많은 경험과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영화는 세부로 만들어가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좋은 대사, 뜨거운 감정을 표현할 대사를 쓰고 배우를 찾는 것보다, 비전문 배우인 내 친구들, 혹은 나 자신도 표현할 수 있는, 과하지 않은 연기로도 효과를 볼 수 있는 시나리오를 쓰고 그러한 내용에 맞는 촬영적인 접근을 하고, 비전문 배우를 써 본다. 그렇게 내 친구들만 데리고 아이폰으로 3분짜리 영화를 찍었다 하더라도 그 영화가 관객의 울림을 주고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그 영화와 당신이 준비한 좋은 대본으로 두 번째 영화를 함께 할 새로운 동료들을 만날 것이다. 당신이 노력하고 그 길에서 성과를 얻을 수 있다면 조금씩 당신의 상상력을 확장하더라도 그 상상을 실현해 줄 좋은 배우와 스태프들을 만나게 된다. 여기까지, 경험이 없거나 실패했던 영화감독들이 배우를 만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해 보았다. 몇 가지 방법 안에서 당신의 첫 번째 영화의 캐스팅을 마무리했다면 먼저 좋은 선택에 축하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시작이다. 그 다음은...
은희에겐 정말 최악의 하루다. “하느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가을 어느 날, 배우 지망생 은희( 한예리 )는 연기수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연기력 없다고 타박 들으며 시원찮게 수업을 마치고 나오다가, 길을 헤매고 있는 일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어쩌다 료헤이에게 길 안내를 해준 후, 아침드라마에 출연 중인 남자친구 현오( 권율 )을 만나러 남산으로 향하는 은희.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까 봐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중무장한 현오와 비밀 데이트를 하면서 은희의 최악의 하루가 펼쳐진다. 엉겁결에 자기 이름 대신 다른 여자 이름을 외친 현오. 화가 난 은희는 도망치듯 자리를 뜨게 되지만, 곧이어 다른 복병이 등장한다. 한때 썸을 탔던 운철( 이희준 )이 은희가 올린 트윗을 보고 우연히 남산에 나타난 것이다. 처음 본 일본 소설가, 현재 만나는 남자, 그리고 과거에 만났던 세 남자가 동시에 주마등처럼 하루 만에 은희 앞에 나타나고, 은희는 복잡한 감정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된다. 허세 가득한 현재의 남자와 솔직하지 못한 과거의 남자가 은희를 둘러싸고 만들어놓는 엉망진창의 삼각관계는, 흡사 홍상수 월드의 남자 캐릭터들이 빚어놓는 풍경처럼 적잖이 남우세스럽다. 마침내 조우한 연적의 두 남자가 담판을 짓기 위해 연희를 내버려둔 채 소주를 마시러 가는 장면은 가히 영혼의 빤스줄을 내린 지질한 한국 남자 전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홀로 남은 은희가 홀로 벤치에 앉아 하느님이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라고 넋두리를 할 만큼 최악의 하루다. 6년 만에 내놓은 김종관 감독의 신작, 전작들에 비해 훨씬 더 담백해졌다. 절제된 이미지들은 유려하게 이야기들 속에 스며들어 있고, 빛의 조탁 또한 탁월하다. 카페 벽면과 찻잔 테이블 위에까지 나뭇가지 그림자와 햇빛을 드리워 영화 전반에 생기를 불어넣는 디테일한 솜씨가 출중하다 못해 부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어리숙한 세 청춘의 삼각관계를 묘사하는 데 그쳤다면 이 영화는 그저 이쁘장한 엽서들이 나열된 듯한 평이한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 최악의 하루 >의 매력은 두 개의 후반 신부터 발산되기 시작한다.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와 한국 기자와의 인터뷰, 그리고 홀로 남겨진 은희의 독백. “왜 인물들을 위기에 넣고 꺼내주지 않나요?”라는 한국 기자의 질문에 료헤이는 자신이 쓰는 글은 그저 글을 뿐이고, 자신들이 아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답변하다. 그러나 정작 “정말... 그 사람들을 알고 있나요?” 라는 질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대신, 그다음에 이어지는 신에서 은희는 마치 대꾸하듯이 이렇게 대답한다.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현실 속 인물과 영화 속 등장인물의 두 개의 속내가 포개지면서 돌연, 영화 속으로 감독의 자의식이 서서히 틈입한다. < 최악의 하루 >는 연애담이기도 하지만, 사실 영화 만들기에 대한 감독의 내밀한 고백이라는 걸 토로하는 순간이다. 은희와 료헤이가 남산의 밤길을 걷는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마치 마법을 부려놓은 듯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영화 밖의 감독이 나란히 산책을 한다. 가을 밤빛이 나른히 부서지고, 료헤이의 이야기 속에서 뜨덤뜨덤 눈발이 내린다. 그 사이 손등을 스치듯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진다. 시적인 순간이다. 사랑을 하는 일이든, 영화를 만드는 일이든 사실 같은 여정인지도 모른다. 감독은 은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전 커피 좋아해요. 진하게....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 최악의 하루 >는 최악의 남자들을 만나 최악의 하루를 보낸 영화 속 은희의 각성의 이야기자, 료헤이로 은유 된 감독의 은밀한 각성의 고백이기도 하다. 왠지 이 고백이 설렌다. 김종관 감독은 다음에 더욱 반짝거리고 단단한 영화로 다가올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