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뉴스 4호
- 제작년도
- 1989
박성배(황정민)는 옛 미군 건물이 재개발을 앞둔 안남 시(市)의 시장이다. 부패한 정치인 성배의 수족 노릇을 하는 강력계 형사 한도경(정우성)은 범죄와 결탁한 자신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는 검사 김차인(곽도원)과 어쩔 수 없이 내통하는 관계가 된다. 도경이 이 조야한 권력자들에 굽신거려야 하는 이유는 병원비를 변통해야 하는 말기 암 환자 아내 윤희(오연아) 때문이다.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이 남자는 시장의 오른팔 은충호(김종수)의 장례식에서 한 가지 묘수를 짜낸다. 도경의 기지로 두 권력자가 장례식장에서 화해할 수 없는 상태로 맞닥뜨리는 시퀀스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이다. 도경과 선모, 성배, 차인은 예정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순회하면서 서로를 대면하게 된다. 누구든 자신의 앞길을 막는 상대를 향한 으르렁거림과 생존을 위해 울부짖는 위협, 땀에 젖은 얼굴을 묘사하는 날카로운 카메라 워크로 주요 인물들 간의 간의 대결이 차례로 기술된다. 성배는 무늬만 시장이지 지하세계와 연줄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범죄 조직의 수괴에 가까운 갱스터로 뼛속까지 타락하였다. 성배와 같은 인물이 선거에 통해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권력과 도시의 퇴행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법의 수호자인 차인은 성배를 체포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다가 그 자신이 범죄자처럼 행동하게 된다. 순진무구한 조무래기 형사였던 선모(주지훈)는 도경을 추종하여 피와 돈의 맛을 본 순간 비열한 갱스터로 빠르게 변질된다. < 아수라 >(2016)는 남성성을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작품으로, 네 명의 주인공은 모두 통제할 수 없는 도덕적 타락으로 붕괴한다. 충성심과 우정이 변질되면서 남자들이 차례로 자동차, 손도끼, 망치, 금속 스파이크 및 재래식 무기의 희생자가 될 때 세상은 피바다로 변한다. 김성수 감독은 ‘갱스터’라는 장르의 비유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작가이다. <아수라>에서 그의 연출은 영화에 풍자적인 분위기와 악독한 코미디의 느낌을 고조하면서 폭력의 악순환에 갇힌 캐릭터에 선의의 뉘앙스까지 부여한다. 세상이 나아질 가능성을 0%로 보는 비관적인 세계관이 새로울 건 없으나 촘촘하게 짜인 긴장을 고조해가는 스토리는 권위에 대한 불신을 보여주고 있으며, 정치를 경멸하며, 가망이 없는 공동체의 모습을 그려낸다. 어두운 골목길과 옥상, 불길해 보이는 회의실과 경찰서 등 <아수라>의 현대적인 누아르 스타일에선 위협과 위험의 분위기가 반영된 공간 세팅이 핵심을 이룬다. 영구적인 분노와 적대감, 고통에 매몰된 존재의 상태는 폐쇄적인 프레이밍(framing) 연출을 통해 시각화된다. 장엄한 엔딩을 보여주는 장례식장 시퀀스에 이르기 전까지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작은 옥상, 미로와 같은 빈민가의 건물들, 골목, 쇠창살의 교도소, 황폐한 건물의 내부 등은 살아남기 위해 모사와 굴욕,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을 위한 최적의 무대를 제공한다. 구타와 살인이 끊이지 않는 세계의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김성수는 도경이 마약에 찌든 부랑아 작대기(김원효)를 의도치 않게 살해하는 옥상 신, 조선족 갱단들과 도경이 벌이는 빗속의 자동차 추격 신, 검찰수사관 도창학(정만식)에게 도경이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는 사무실에서의 린치 신 등을 차근차근 쌓아나간다. 공간의 함의와 조형에 기초한 김성수의 장면 연출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폭력과 유혈이 도처에 널렸으며 그 소용돌이에 휩싸인 사람은 누구도 탈출할 수 없으리라는 강력한 신호를 전달한다. 공간의 프레이밍 전략은 헤어날 길 없이 갇힌 존재들의 비의(悲意)를 보여주는 폐쇄성에 기초하고 있다. 고문과 구타, 칼질을 포함하여 잔인한 유혈의 장면들 중 대학살로 점철된 클라이맥스 시퀀스는 공간의 시각화라는 관점에서 역사에 남을만하다. 거의 140분에 육박하는 영화에서 이 시퀀스는 서사의 흐름이 지루한 수준으로 끌려갈 즈음 다시 스릴이 넘치는 광경으로 되돌리는 기능을 한다. 장면 연출의 초점은 수직의 복도에서 벌어지는 자비가 없는 폭력이다. 모든 인물이 벌이는 권력 투쟁과 충성심, 힘의 우열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물들의 위치에서 절정에 이르며 장례식장의 좁고 수직으로 난 복도에서 극적인 방식으로 파열된다. 김성수의 연출은 도경과 그의 충직한 동생 선모의 쟁투가 벌어지는 복도와 박성배와 김차인의 수하들이 벌이는 장례식장 복도의 살육극을 나란히 배치한다. 두 개의 복도(도경-선모, 성배-차인)는 기하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형제애를 기반으로 했던 도경과 선모의 투쟁, 이권과 권력욕에 눈이 먼 성배와 차인의 대결은 남성적 유대가 파탄 난 세계의 지옥도를 그려 보인다. 각각 경로를 통과한 도경과 성배가 피의 복도에서 마주하게 되는데 누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없이 냉혹한 최후를 맞이한다. 아무려나 우정과 형제애가 사라졌을 때 온 세계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이 시퀀스의 촬영과 편집은 도경과 선모가 드잡이 싸움을 벌이는 복도, 성배가 고용한 조선족 갱스터와 차인을 호위하는 검찰 병력의 충돌이 빚어지는 장례식장 복도의 수직적 형상을 강조하는 기교들을 활용하여 구도와 앵글, 사이즈, 조명, 액팅의 세트피스를 보여준다. 시퀀스의 초입에 천장에서 떨어져 대롱대롱 매달린 형광등은 초기 설정의 용의주도함을 입증한다. 흔들리는 빛의 특성과 텍스쳐는 현실과 은유적인 차원 모두에서 죽음이 도열하는 이 수직의 공간을 편집증적인 불안으로 세팅하면서, 성배와 도경이 최후를 맞는 대단원에서 시각적으로 절정에 달하는 그 기능(앞뒤로 흔들리며 죽음의 풍경을 비추는 빛)을 예비하고 있다. 공간 연출의 성취는 벽들이 프레임의 1/3을 점유한 복도 공간에서 총 하나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육박전을 벌이는 도경과 선모, 좌우대칭의 비좁은 벽 사이에서 조선족 갱단에 도륙당하는 창학, 길게 수직으로 난 장례식장 홀에 쌓이는 시체들의 조형 방식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시퀀스의 목표는 어느 누구도 품위가 있거나 호감이 가는 인물이 없는 이 세계에서 아둔한 남자들이 끊임없이 음모를 꾸미고, 서로의 목을 조르며, 경쟁 상대를 쓰러트리려 발버둥 치는 형상을 묘사한다. 안남 시라는 가상의 무대 구축은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 또는 이해할 수 있는 것 너머로 이동을 허용함으로써 언캐니한 공간감을 조성하고 도시의 음영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은 불가능한 정도의 밀도와 깊이를 전달한다. 갱스터 장르에 대한 김성수의 폭넓은 이해와 공간 연출은 낮은 조도의 조명과 더치 앵글, 대담한 색상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활기를 통해 안남이 대한민국의 어느 도시라기보다는 ‘씬 시티’에 가까워 보이도록 만든다. 도시 정체성에 대한 묘사는 의미심장한데 안남은 도시 구조에 자율적인 존재감을 부여하는 수많은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별되는 구역들의 경험은 독특하며, 각각의 구역은 고유한 물리적 특징은 물론 현실 세계의 구조를 압축하고 있다. 도시 갱스터 장르에 대한 감각과 비트를 내장한 하드코어 액션 장면들에서 뛰어난 공간 연출은 장례식 시퀀스 외에도 몇몇 장면들로 선행적으로 축적된 바 있다. 대표적으로 도경의 SUV 차량과 갱단이 탄 승합차가 격렬한 파열음을 내며 경합하는 체이스 시퀀스에서 도경의 차 안에서 번쩍이는 붉은 등과 푸른 화염, 가드레일을 충격하는 동안의 불꽃 등이 사이키델릭 조명을 대신한다. 먹이사슬 구조의 억압과 고통을 광적으로 분출하는 도경의 폭주는 비에 젖은 도로의 번들거림, 수직, 수평으로 교차하는 빗줄기의 미장센과 조응하여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기만 할 뿐 도무지 벗어날 길이 없는 암흑의 터널 안에 갇힌 인간의 조건을 시각적으로 기술한다. 이모개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차의 안과 바깥을 오가며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괴성을 지르는 한 남자가 구제의 가능성을 상실한 채 지옥에 억류되어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선함과 온기를 거둔 정우성의 악에 받친 연기는 흑적색으로 물든 멍자국들, 퉁퉁 부은 눈두덩, 독기를 품은 욕지기로 폭발한다. 허무주의적인 배음과 그림자의 극단적인 사용, 양식적인 구도는 압도적인 불길함을 조성하면서 대비의 인상을 강화한다. 무고한 피해자들과 달리 모든 인물들이 완전히 무참하고 버림받은 채 잔인하게 살해되는 영화의 결말은 도덕적 신념 체계를 완전히 거부하며 진실과 도덕, 선의에 대해 질문한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6.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최근 OTT 드라마 <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2021)와 JTBC의 <전체관람가+: 숏버스터>의 한 에피소드인 <미지의 세계 시즌투에피원>(2022)와 제작자이자 연출자로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 말이야 바른 말이지 >(2022) 등으로 부쩍 바빠 보이지만, 윤성호 감독의 다산성은 동시대 그 어떤 크리에이터에 뒤지지 않는다. 그 종류도 다양하여, 단편영화로 시작한 그는 다큐멘터리와 실험성 가득 한 작품을 거쳐 장편영화를 경유한 후 웹드라마라는 형식을 개척하더니 지상파와 케이블과 OTT에 이르렀다. 20여 년 동안 20편의 단편과 3편의 장편과 15편의 드라마를 만든 숨가쁜 시간! 여기서 쉼터 같은 작품이 하나 있다면, 바로 < 도약선생 >(2011)이다. 이 자유분방한 영화는 놀랍게도(!) 문화체육관광부와 아리랑TV가 제공하는 공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의 도시를 알리기 위한 시리즈 중 한 편이었다. 윤성호 감독은 대구를 배경으로 <도약선생>을 만들었고, 윤태용 감독은 서울을 배경으로 < 서울 >을, 배창호 감독은 제주에서 < 여행 >을, 김성호 감독은 부산에서 < 그녀에게 >를, 전계수 감독은 춘천에서 < 뭘 또 그렇게까지 >를, 진광교 감독은 여수에서 < 려수 >를, 문승욱 감독은 인천에서 < 시티 오브 크레인 >을 연출했다. 65분이라는 애매한 러닝타임을 지닌, 스포츠 예능을 풍자하고 있는 건지 스포츠 영화를 조금 독특하게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이 영화는 20세기까진 한국영화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취향의 B 무비였다. 영상원 전문사 과정을 졸업하면서 만든 단편 < 졸업영화 >(2006)로 부산국제영화제 선재상을 수상하고 첫 장편 < 은하해방전선 >(2007)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던 윤성호 감독은 이후 단편으론 ‘두근두근’ 시리즈를, 웹드라마로는 <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2010)를 내놓으며 왕성한 30대를 보내고 있었다. 이때 제안 하나를 받는다. 아리랑 TV와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동으로 제공하는 ‘영화, 한국을 만나다’라는 시리즈는 각 도시를 배경으로 그 지역의 특색을 살리는 프로젝트였다. 그의 도시는 순천. 윤성호 감독은 순천 송광사에 미국의 흑인 래퍼가 힐링 하러 온 이야기인 <소울>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이때 갑자기 제작사에서 도시를 바꾸었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는 대구에서 영화를 찍으면 제작 지원과 현물 협찬이 들어온다는 제안이었고, 윤성호 감독은 받아들인다. 처음 기획한 제목은 ‘육상소녀’였다. 의도는 진지했다. 육상을 빙자해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원래 들어오기로 한 제작비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 그래서 장면들을 빼기 시작했고, 몇몇 장면들은 즉흥적인 예능처럼 찍었다. 엔딩에서 영화를 황급하게 닫는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고, 러닝타임은 한 시간을 조금 넘기는 65분이 되었다. 제목은 <도약선생>. 주인공은 윤성호의 페르소나인 박혁권, 당시 웹드라마로 인연을 맺은 걸그룹 밀크 출신의 박재영(본명 박희본), 그리고 처음 함께 작업하는 나수윤이었다. 우정 역의 이우정과 원식 역의 나수윤. 이우정은 윤성호 감독의 연출부 출신으로 <은하해방전선>부터 시작해 총 10편의 윤성호 감독 작품에 배우로 출연했다. 2008년부터 단편을 만들기 시작했고 2020년엔 첫 장편 < 최선의 삶 >을 내놓았다. 나수윤은 <도약선생>에서 윤성호 감독과 처음 만나, 이후 여러 편의 웹드라마에서 함께 했다. 내용은 간단하다. 동성 친구인 우정(이우정)과 원식(나수윤). 남친이 생긴 우정은 대구에서 서울로 떠나게 되고, 원식은 매달린다. 우정은 원식에게 “뭔가를 보여 줘. 크고 높고 늠름한 걸”이라고 말하고, 원식은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영록 코치(박혁권)에게 장대높이뛰기를 배운다. 여기에 재영(박재영)이 합류하고, 그들은 다양한 트레이닝을 통해 조금씩 도약한다. <도약선생>은 윤성호 감독의 단편과 웹드라마를 꾸준히 ‘복용’해온 관객에겐 익숙하지만, 그의 영화 문법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꽤 난해한 도전이 될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낯선 가장 큰 이유는 ‘생뚱맞음’이다. 이것은 윤성호 감독의 클리셰이자 유머 감각인데, 그 핵심은 ‘서사의 실험’이다. 파괴까지는 아니지만, 윤성호의 영화는 ‘일반적인’ 극영화의 구성과 사뭇 다르다. 느슨한 챕터 구성인 <도약선생>은 한 국면이 넘어갈 때마다, “원식, 불심검문에 걸리다” “코치님은 채식주의다”라는 식으로 쨍한 내레이션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흥미로운 건, 내레이션의 화자가 한 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다중 시점 서사는 신선하면서도 한편으론 관객이 서사에 몰입하는 걸 교란시킨다. 여러 명의 화자들은 때론 장면을 멈추고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영화라는 장치’를 드러내는 건 그의 필모그래피 중 전반부를 대표하는 방식이었다. (왼쪽 사진) 윤성호 감독의 작품엔 종종 동료 감독들이 카메오로 출연한다. 육상 체험장의 사회자는 최근 < 잔고 : 분노의 적자 >를 내놓은 한국 B 무비의 스페셜리스트 백승기 감독이다. (오른쪽 사진) <도약선생>은 배우 김종수의 초기작 중 한 편이다. 그는 대구스타디움 관리인으로 출연한다. 원래 썼던 시나리오가 어떤 완결성을 지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축약’된 <도약선생>에서 또 하나의 포인트는, 툭툭 끊기고 난데없으며 즉흥적인 톤이 주는 묘한 아우라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실제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의 기록과 연습 방식과는 상이함”을 경고했듯, <도약선생>에서 전영록 코치(내내 가수 전영록의 잠자리 안경을 쓰고 나오는)의 트레이닝 방법은 독특하다. 기본적인 러닝에서 시작해 요가를 경유해 평행봉과 점핑을 거쳐 감수성을 기르기 위한 시 쓰기 수업까지 이어진다. 어떠한 계획도 없이 순전히 우발적으로 이어지는 듯한 이 과정을 장대높이뛰기를 위한 트레이닝 커리큘럼으로 제시하는 셈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스포츠 영화의 서사 구조를 따르는 듯하면서 그 내용은 예능과 다름없는, 변칙적 서사 전개다. 재밌는 대목은 실제로 대구 육상 스타디움이 등장하는 부분이다. 잔디에 들어간 죄로 관리인(김종수)에게 야단을 맡는 전영록과 선수들 앞에 갑자기 전영록의 군대 후임이었던 김 병장이 등장하고, 여러 후임들이 합세한 갑작스런 술자리가 이어지며, 그들은 군대 시절을 회상하고, 갑자기 모두 일어나 소주병에 회오리를 일으키며 “수평의 운동 에너지를 수직의 위치 에너지로”를 이야기한다.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될지 알 수 없는 고삐 풀린 서사 전개는, 갑작스레 장대높이뛰기가 “수평의 운동 에너지를 수직의 위치 에너지로”바꾸는 스포츠라는 대사가 등장함으로써 의외의 방식으로 봉합된다. (왼쪽 사진) “수평의 운동 에너지를 수직의 위치 에너지로!” 장대높이뛰기를 요약하는 이 영화의 모토다. 소주병을 잡고 있는 사람은 < 장례식의 멤버 >(2009)를 연출한 백승빈 감독이다. (오른쪽 사진) 얼굴에 붕대를 감고 연을 날리고 있는 전영록. 그의 모습 위로 노래 ‘도약은 패턴’이 흐른다. 이처럼 <도약선생>은 마치 아나키스트처럼 ‘영화적 서사’라는 것을 뒤흔들고, 그러면서도 정말 신기하게도 소정의 기승전결을 갖추며 전진한다. 그리고 영화는 갑작스레 “우연히도 결전의 날”이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절정에 다다르고, 갑작스런 이사를 하는 우정 앞에, 원식 역시 갑작스레 대미를 장식한다. “애정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은 건지, 대미를 장식하고 싶어서 애정을 길어올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은, 어쩌면 영화 전체의 전반적인 주객 전도 상황을 요약하는 듯하며, 역시 갑작스레 전영록이 지니고 있던 치명적 문제가 폭로된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샹송 톤의 주제가 ‘도약은 패턴’이 흐르면서 영화를 닫는다. 여기서 윤성호 감독이 직접 쓴 가사는 음미할 만하다. “도약, 슬픈 믿음의 도약/약도, 약도를 들고 도착/도착, 제 시간에 도착/아아 그러나 나는 성도착/애착, 가쁜 착오들의 고착”으로 시작되는 가사는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이렇게 마무리된다. “패턴, 자기만의 패턴/아니 어쩌면 자기 기만의 패턴/유턴, 너를 목격하고 유턴/아니 어쩌면 너에게로 돌아가는 P턴/그렇게 나는 아직 인턴, 너에게 훌쩍/뛰었다 착지하는 나는 영원한 인턴/랜턴, 너는 나를 비추는 랜턴/윈스턴, 피아노는 역시 조지 윈스턴/볼턴, 이청용이 있는 볼턴/워싱턴, 오바마가 사는 워싱턴.” 한국영화의 삽입곡 중, 이토록 중독성 있는 라임을 만나 본 적이 있는가! 격조 있는 대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