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묻지 않은 죽음
- 감독
- 김종우
- 제작년도
- 2009
‘시네마테크 KOFA가 주목한 2018년 한국영화’의 리스트가 발표됐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이 리스트에 참여한 초기에는 열 편의 작품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다. 10편에 다 넣지 못한 작품의 수가 항상 대여섯 편 이상이 되었다. 그래서 매번 깊은 고심 끝에 그만큼의 작품을 제외시켜야 했다. 그런데 근래 몇 해에는 그런 작품의 수가 한두 편 정도밖에 안 된다. 글쎄다, 정확한 이유는 나 자신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계속 참여하다 보니 내 결정 기준이 단호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사이에 한국영화가 빈곤해진 탓인지 좀 더 생각해볼 문제다. 후자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말했듯이 올해도 10편을 선택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고, 내가 선택한 작품과 전체 결과는 언제나처럼 적당한 선에서 사무송(使無訟)한 모양새다.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해 아쉬운 작품의 리뷰를 의뢰받고 고민했다. 개인의 리스트를 별도로 발표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작품을 골라야 할지가 그 이유였다. 내 리스트와 상관없이 우선 몇몇 작품의 제목을 (ㄱㄴㄷ 순으로) 언급만 하자면 < 1급기밀 >( 홍기선 ), < 곤지암 >( 정범식 ), < 누에치던 방 >( 이완민 ), < 인랑 >( 김지운 ), < 춘천, 춘천 >( 장우진 ), < 파란입이 달린 얼굴 >(김수정)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독립영화, 상업영화의 구분과 별개로 각자의 영역에서 제 역할을 했고 또렷한 목소리를 낸 작품들이다. 위 작품들은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작년 한국영화를 풍성하게 만든 이름들임을 확신한다. 리뷰 대상으로 선택한 작품은 < 홈 >이다. 신인 감독 김종우 의 데뷔작인 <홈>은 작년 5월 30일에 개봉해 8천 명 정도의 관객을 모았다. 비평적인 수난은 더욱 심해서 이 영화를 제대로 조명한 글을 거의 보지 못했다. 연말에 발표된 리스트에서 이 영화가 언급조차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청소년 인물, 가족과 사회를 다루는 점잖은 태도나 영화가 이야기하는 소중한 주제를 감안하면 이 영화가 감내해야 했을 외면의 정도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나는 작년에 정부 정책을 다루는 매체에 이 영화에 관한 칼럼을 보낸 적이 있다. 리뷰는 아니었고, 영화가 다루는 이런저런 문제를 놓고 정책적인 해결책 등을 물어보는 글이었다. <홈>의 특성은 그러한 데 있다. 눈물을 흘리거나 감동을 받는 선에서 영화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런 경험이 실제 생활로 넘어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주인공 소년에게 닥친 환경의 안타까움이 질문으로 이어지고 해결 방안은 없을까, 라고 생각하는 데 이르는 것이다. 변화를 초래하는 경험을 보통 다큐멘터리로부터 얻곤 하던 나로선 각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줄거리를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홈>은 졸지에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년의 이야기다. 고아는 아닌데 고아보다 더한 상황이 준호( 이효제 분)에게 일어난다. 소년의 가족 관계는 조금 복잡하다. 준호의 어머니는 준호의 아빠와 이혼한 상황에서 다른 유부남 강원재( 허준석 분)와 관계를 맺었고 그들 사이에서 성호( 임태풍 분)가 태어났다. 원재는 부인과의 사이에 딸 지영( 김하나 분)을 두었다. 어느 날 아침, 원재의 부인이 준호의 엄마를 찾아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교통사고가 발생해, 두 여인은 의식불명의 상태로 나란히 병실에 누워 있게 된다. 원재가 아들 성호를 데려가면서 준호는 홀로 집에 남는다. 소년의 처지를 가엽게 여긴 원재는 준호에게 두 동생과 함께 살 기회를 만들어 주는데, 원재의 착한 결정은 상황을 알아차린 처가의 분을 사고 만다. 청소년이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이 종종 범하는 실수는 아이와 성인 사이를 이분법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 아이들은 지나치게 순수하고, 때가 묻은 폭력적인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파괴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더 이상 고전적이지도 않고 별다른 감동도 주지 못한다. 영화가 두 개의 세계 사이로 선명하게 그어놓은 선이 작위적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어른들의 시선 아래 만들어진 영화는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왜곡하기도 한다. 하지만 근래 만들어진 어린이 혹은 청소년의 성장영화는 영화의 시선을 인물의 눈높이에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홈>의 제작사인 ‘아토’는 이 영화 외에도 < 우리들 >(2016, 윤가은), < 용순 >(2016, 신준), < 살아남은 아이 >(2017, 신동석) 등의 작품을 연이어 제작해왔다. 내면적으로 충실한 작품을 통해 한국영화의 경계를 확장하는 방식은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중학생인 준호의 나이로 치면 <홈>은 <우리들>과 <용순> 사이에 놓인다. 두 동생 앞에서는 어른스러워 보이는 준호는 아직 성인의 세계가 낯설고 두려운 소년이다. 무엇보다 성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다. 그런 준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곧 <홈>의 태도다. 엄마가 병실에 누운 후, 준호가 처한 상황은 급변한다. 영화는 덜컹거리는 상황을 곱게 포장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영화의 태도가 불편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소년의 시선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극중 복잡한 어른들의 관계, 어른들의 처지가 상세하게 그려지지 않은 건, 그것을 대하는 소년에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친부는 딱한 상황에 처한 아들을 거두지 않으며, 원재는 처가와의 갈등을 소년에게 설명할 길이 없다. 준호가 주변 상황에 대처하는 수준은 더욱 어수룩할 수밖에 없다. 어찌하지 못할 때마다 소년의 어깨는 자꾸 움츠러든다. 원재의 호의에 보답한답시고 편의점 물건을 훔쳐간 아이들과 싸움을 벌이고 끝내 물건을 되찾아온 장면에서는 눈물을 감추기 힘들다. 소년은 상처투성이의 입으로 온 힘을 다해 “같이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아니라 소년의 마음을 따라가다 얻게 되는 그런 출렁거림이 <홈>의 미덕이다. 소년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행복하게 사는 일은 <홈>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후반부에서 소년은 아주 어두운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소년에게 어마어마한 시련이 닥치는 것으로 끝맺지도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로 전개되는 과정은 얼핏, 준호라는 어린 존재가 세상에서 홀로 서는 성장담을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도입부로 돌아가 보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준호는 패스를 하지 않고 홀로 골을 시도하려다 실책을 범해 친구들로부터 책망을 받는다. 엔딩에 앞서 영화는 소년이 거쳐온 공간들을 한 번씩 마주한다. 그 공간을 거치며 보낸 시간 속에서 소년은 성장했을까. 영화의 엔딩, 다시 운동장에서 선 준호는 별 무리 없이 친구들과 함께 호흡을 나눈다. 표정도 밝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만 하면 되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일순간의 응원에 스스로 만족하고 떠나려던 나를 돌려세우고 만다. 카메라는 줄곧 소년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으나, 문득 나를 향한 시선을 느끼게 된다. <홈>은 ‘함께 사는 것’을 박탈당한 소년의 외로움에 관한 영화다, 소년에게 그런 세계를 던져주고도 담담하게 지내는 나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하는 영화다. 끝으로 소년 준호를 아름답게 연기한 배우 이효제가 연기상의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은, 이 영화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묻힌 것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글을 다 쓴 뒤 김종우 감독이 「씨네21」과 나눈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8살 때 형과 헤어졌다. 형은 영천 시골에 있었고 나는 부산으로 이사왔다. 형이 고등학생 때였는데, 그때부터 형은 혼자 살았다. 왜 형이랑 떨어져 사는지 몰랐는데, 중학생 때 어머니가 우리 가족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돌이켜보면 그때 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족관계를 떠나 당시 형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너무 힘들고 아팠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밝혔다. 영화에서 유달리 진실함이 느껴졌는데, 감독 자신에게서 출발한 이야기라 더 그랬던 모양이다.
착한 인물들이 전시되고, 그들 각자의 인정투쟁으로 채워진 영화들이 있다. 이런 도착적 영화들은 대체로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은 착한 인물들이 이러저러하여, 다시 한 번 자신의 인생을 견디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TV 프로그램인 <인간극장>과 유사한 형식으로, 이들 착한 영화들은 착한 인생을 재생산한다. 인생의 협잡에 꿋꿋하고 순순한 용기로 버티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발적 노동에 순수와 착함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덧씌운다. 그들을 담아내는 수많은 프로그램들의 탐욕은 바로 ‘자발적 예속’에 닿아있다. 슬픔과 애틋함으로 위장한 자발적 예속의 재생산은 이상한 담론 효과로 시민들의 입과 마음에 오르내린다. 예를 들면, ‘우리는 저들보다 힘들지 않다.’ 라거나, 그들의 힘겨운 삶이 그저 역경으로 받아들여지거나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으로 대체되고, 더 나아가 그것을 견디거나 극복하는 과정이 하나의 윤리로서 기능하게 된다. 인생의 균형이 깨지고 그 책임이 자신의 내부에 있으므로 자발적 내부의 변형으로 인생의 균형을 다시 가져오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그 깨진 균형이 외부의 책임으로 인정될 때 복수가 시작되고 다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애쓰는 영화가 있다. 문제는 이 두 가지 해결 방법 모두 ‘균형의 복귀’에만 집착하고 있고, 자신이 속한 세계는 원래 문제가 없었으며, ‘내부의 변형’과 ‘외부에 대한 복수’ 모두가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이 아니라 다시 예전의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환원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할리우드 액션영화들의 서사가 거의 후자의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서사 원칙에 입각해 만들어진 많은 한국 독립영화의 흐름도, 이러한 태도(균형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복수와 저항은 여전히 과거의 것이지 미래의 것이 되지 못한다. 애초에 우리 삶에는 ‘균형’이란 없었다. 나는 이러한 도착적 환상으로 이곳이 유지되고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영화가 보고 싶다. 그것이 피 튀기는 복수보다 가장 강력한 저항이 아닐까. ‘동네분식’의 김종우( 김태완 ) 또한 영화 내내 소심한 복수를 거듭한다. 김한울 감독의 < 김밥 >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머니를 돕기 위해 김밥 200줄을 들고 나섰다가, 단 한 푼도 벌지 못하고 급기야 빚만 만들고 만다. 급기야 떨어져 사는 아버지까지 외면한다. 종우의 소심한 복수와 응대는 결국 파국의 깊이만 가중시키고, 무력한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돌아온다. 김한울 감독의 <김밥>이 세상에 대한 복수, 즉 세상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어떤 피곤한 현실을 드러내고 그저 그러한 이야기의 메커니즘으로 덮어버리는 정도로 보인다. 마지막 신이 인상적이긴 하나, 그 안에는 무책임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어머니에 대한 애착만으로 구성된, 여전히 ‘균형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종우의 김밥 씹는 소리가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 확장되어 전해질 때, 그것은 여전히 ‘침묵의 목소리’의 또 다른 현상학적 버전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그 소리는 어떤 괴물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작년 5월에 본 이 영화가 가끔씩 떠올랐다. 무던하면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종우의 모습이 자주 생각이 났다. 이것이 그저 연민의 감정이고 지금 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무의식적 집착에 불과했다면,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자주 떠오를까 고민하던 순간, 이 영화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 김밥 >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진행 속도가 굉장히 느리다는 것이다. 두 줄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줄거리가 영화 속에서 상당히 긴 시간을 점유하고 있다. 거칠게 꼬여 있는 상황만 제시할 뿐, 그곳에 위트를 담을 생각이 없다. 순간적 재미를 통해 관객의 흥미를 자극하지 않는다. 영화 속 종우는 끝까지 진지하고 위태롭다. 요즘 영화들에서 난무하는 빠르고 재치있는 응답 대신, <김밥>의 형식은 그저 단순하고 거칠며 느리다. 하지만 이 형식을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생각보다 더한 무력감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곳이 우리 각자가 사는 곳이라면, 우리는 그곳을 이 영화를 통해 잠시나마 목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느리게. 우리는 느림의 저항이, 우리를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임을 안다. 그곳은 어쩌면 지난 시간 감춰둔 슬픈 지옥도인지도 모른다. 영화 <김밥>은 이 지점의 날 선 어딘가와 기존 영화들이 재생산하고 있는 ‘균형에 대한 집착’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좀 더 기운을 내라고 응원하고 싶다. 지금 가는 이 길이 새로운 영화와 삶의 지평으로 인도해주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