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 감독
- 김종철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박지윤
1926년 12월 2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함완섭은 진학을 위해 상경해 외숙부인 김성춘 조명기사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자연스레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장차 자신과 함께 작업하게 되는 영화인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일제강점기 <전과자>(김소봉, 1934)의 최진과 더불어 1세대 조선인 조명기사로 활동했던 김성춘은 해방 후 한국영화 조명기사의 계보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한국영화 기술자들에게 ‘오야지(おやじ, 親父)’로 통했던 인물이다. 기술학교인 홍아학원을 거쳐 1944년 경성전기공업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함완섭은 김성춘의 추천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광희동 촬영소 조명부에 입사하면서 영화 조명 일을 시작했다. 1942년 9월 발족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는 조선영화령(조선총독부제령 제1호)에 의거해 기존 10개의 민간 영화사가 강제 통합되어 친일,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한 국책 영화사였지만, 200여 평의 촬영 스튜디오를 비롯해 녹음실, 현상소, 최신식 기자재 등을 구비하고 말단 기술진에게도 공무원 월급의 두 배를 지급했던, 당시로서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사진 1]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창립 기념 사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김성춘의 조명 조수로 최인규 감독의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1944), <사랑과 맹서(愛と誓ひ)>(1945), <신풍의 아들들(神風の子供達)>(1945)에 참여한 함완섭은 해방 후에도 김성춘을 따라 조선영화건설본부의 뉴스영화와 최인규가 설립한 고려영화협회의 <자유만세>(최인규, 1946), <독립전야>(최인규, 1948),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등에 조명 조수로 참여했다. 그리고 스물세 살 되던 해인 1948년 계몽영화인 <국민투표>(최인규)로 최연소 조명기사로 데뷔한다. [사진 2] 영화 <사랑과 맹서>(최인규, 1945) [사진 3] 영화 <자유만세>(최인규, 1946) [ 사진 4] 영화 <독립전야>(최인규, 1948) 같은 해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원작자였던 김성민의 감독 데뷔작 <사랑의 교실>(1948)로 극영화 조명기사로 정식 데뷔한 함완섭은 이후 조수 시절 인연을 맺은 최인규의 조감독 출신들인 홍성기, 신상옥, 정창화 등의 감독 데뷔작 조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 <여성일기> 1948년 함완섭은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인 홍성기 감독의 데뷔작 <여성일기>(1949)에 조명기사로 참여했다. 바로 1년 전 일본계 미국인이 촬영한 기록영화 <무궁화동산>(안철영, 1948)이 컬러로 제작된 바 있지만, 순수 국내 자본과 제작진으로 만들어진 극영화로는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사진 5] 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의 신문광고(출처: 경향신문 1949년 6월 6일자 2면) ‘최초’라는 수식어답게 함완섭은 이 영화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컬러 영화의 조명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더 큰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자신은 물론 감독도 촬영기사도, 심지어 스승인 김성춘도 컬러 촬영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함완섭은 늘 하던 대로 흑백 영화 촬영 때처럼 조명을 했는데, 결과물을 보고선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한다. 컬러 필터를 쓰는 법도 몰라 낮에도 텅스텐 조명을 그대로 쓴 데다 마침 낙엽이 지는 가을에 촬영해 화면에 붉은색이 많이 돌았던 것이다. 더욱이 <여성일기>는 네거티브 단계 없이 원본 자체가 포지티브 프린트로 변하는 리버설 필름(reversal film)으로 촬영했는데, 이 때문에 러쉬(rush)를 뜰 수가 없어 원본 필름으로 편집해야 했고 프린트도 만들 수 없어 극장에 영사기 두 대를 설치해 원본 필름과 녹음 필름을 따로 걸어 상영했다고 한다. 흥행은 어느 정도 되었다지만, 기술적으로는 함완섭의 표현대로 “반쪼가리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함완섭은 <애국자의 아들>(윤봉춘, 1949), <여인애사>(신경균, 1950)를 거쳐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1952)를 촬영하던 중 전쟁을 맞았고, 피난 시절에도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최후의 유혹>(정창화, 1953), <출격명령>(홍성기, 1954) 등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홍성기 감독과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 한국전쟁 후 김성춘의 조명 조수 출신인 고해진, 이한찬 등과 함께 2세대 조명기사로 자리매김한 함완섭은 신경균, 윤봉춘, 이병일 등 원로 감독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홍성기, 정창화, 유현목 등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끈 젊은 감독들의 작품에 다수 참여했다. 특히 홍성기와의 작업이 많았는데, <열애>(1955), <애원의 고백>(1957), <실락원의 별>(1957), <별아 내 가슴에>(1958), <실락원의 별(후편)>(1958) 등 그의 전성기 시절을 함께했다. [사진 6] 영화 <애원의 고백>(홍성기, 1957)의 한 장면 [사진 7] 영화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1958)의 한 장면 사실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은 열악하고 부족했던 기재와 여건 등으로 인해 조명기사 고유의 미학적 조명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단지 화면을 밝히는 수준의 인물 삼점 조명(three point lighting) 같은 기본적인 조명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성기는 조감독 시절부터 함께 고락을 같이한 함완섭을 유독 신뢰했고 조명에 있어서만큼은 그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고 한다. 이 시기 홍성기 감독의 작품들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열애>는 당시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을 잘 보여준다. 세트 촬영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영화의 모든 공간을 오픈에서 촬영했는데, 실내 낮 장면에서 창문에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치고 촬영했던 것은 바깥의 광량을 커버할 만한 실내 조명이 부족해서였으며, 벽에 인물 그림자가 많이 지는 것은 세트 촬영일 경우엔 부감대 같은 높은 위치에서 조명을 할 수가 있지만 오픈에선 아무리 조명기의 키를 높여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8~11] 영화 <열애>(홍성기, 1955) 속 장면들. 부족한 실내 조명으로 인해 커튼과 블라인드로 광량을 조절해야 했으며, 그림자가 벽면에 가득 드리워졌다. 또한 당시 영화들에서 카메라에 감마(gamma) 필터를 끼워 낮에 밤 장면을 찍는 데이 포 나이트(day-for-night) 촬영이 많았던 이유는 산이나 해변에서 촬영할 경우 전기를 끌어올 재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지만, <열애>에서 영옥(염매리 분)의 집 앞 장면처럼 전기를 끌어오기 용이한 장소에서의 촬영은 당시에도 웬만하면 밤에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12, 13] 영화 <열애> 속 야외촬영 장면들. 촬영 장소의 전기 수급에 따라 촬영 방식과 시간을 바꿔야 했다. 화영공작소와 <자유결혼> 1950년대 중반 조명 기재는 김성춘이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시절 일본의 아라시간주로(嵐寛壽郎)프로덕션에서 수입해 보유하고 있던 조명기 150kw와 전쟁 당시 북한의 국립영화촬영소에서 노획해온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보유하고 있던 소련제 조명기 100kw, 미공보원(USIS)에서 썼던 미제 조명기 70kw 등이 있었는데, 파손이 심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대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 영화 한 편에 50~100kw 정도의 조명기가 필요했는데, 네 명의 기사가 동시에 사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보니 함완섭은 자신의 촬영을 마치고 급하게 김성춘의 작업 현장으로 조명 기재를 실어날라 가며 번갈아 사용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57년 함완섭은 자신이 대여해 쓰던 미제 조명기를 샘플로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총 120kw의 조명기를 자체 제작했다. 화영공작소는 김성춘의 문하에서 조명 조수로 일했던 김종철이 설립한 조명 기재 제작소로, 비록 수공업적 방식이긴 했으나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영화 조명기를 국내에서 제작할 수 있게 되어 한국영화 조명인들의 숨통을 틔워주었던 곳이다. [사진 14] 영화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세트 촬영 현장 <자유결혼>(이병일, 1958)은 함완섭이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제작한 조명기를 사용한 첫 번째 작품으로, 당시로선 나름 풍족했던 조명기 덕에 <열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된 조명이 보여진다. 오픈 실내 장면에서 벽에 드리워졌던 인물 그림자는 말끔히 사라졌고, 낮임에도 항상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쳐놓아 답답했던 화면도 커튼을 걷어냄은 물론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촬영해 시원한 느낌마저 준다. [사진 15~18] 영화 <자유결혼> 속 장면들 함완섭은 이러한 것이 풍부해진 조명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실내 장면을 세트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세트 촬영을 하면 조명기의 위치를 높일 수 있고 실외 광원 설정도 조명기로 조절할 수 있어 여러모로 오픈 촬영 때보다 작업하는 데 유리했다는 것이다. 최훈 감독과 광보영화사 함완섭은 홍성기의 조감독 출신인 최훈 감독의 데뷔작 <모녀>(1958)에서 조명을 맡은 후부터 <느티나무 있는 언덕>(1958), <사모님>(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 등 최훈과 호흡을 맞추어 나간다. 그렇다고 홍성기와의 작업을 곧바로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사진 19] 영화 <모녀>(최훈, 1958)의 한 장면 [사진 20] 영화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1958)의 한 장면 당시 제작 편수에 비해 조명기사가 부족해 기사 한 명이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함완섭은 3팀을 운용했으며 각 작품마다 제1조수가 책임을 맡고 자신은 세트 촬영이나 로케이션 밤 촬영 같은 어려운 촬영에만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같은 시기 작업한 홍성기의 <별아 내 가슴에>, <실락원의 별(후편)>도 당시 최고참 조수였던 방영원(방기찬)이 전담하고 있었는데, 함완섭은 <청춘극장>(홍성기, 1959)부터 아예 그를 독립시켰으며 이후에도 자주 홍성기의 촬영장을 찾아 일을 도왔다. <사모님>,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작업하며 기획⋅제작에도 관여했던 함완섭은 1959년 최훈과 함께 광보영화사를 설립한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해를 거듭할수록 풍작을 거두고 있었고, “영화가 흥행을 하면 몇 배가 남는 장사가 되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후죽순 영화사를 만들던 시기였다. 1958년에 제작된 작품 편수가 74편인데 반해 당시 영화사가 72개사일 정도였다. 1959년엔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100편대를 넘어 111편이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자로 변신한 함완섭에게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광보영화사로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 <아버지>(최훈, 1961) 등을 제작했는데, 하필 <어느 여교사의 수기>가 개봉할 때 4.19가 터졌고 <아버지>가 개봉할 땐 5.16 쿠데타가 일어나 흥행은커녕 손해만 크게 입었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2년 영화법이 제정되며 영화사 통폐합 조치가 내려졌고, 광보영화사는 동아영화흥업주식회사와 통합되고 만다. [사진 21] 영화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의 포스터 [사진 22] 영화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의 포스터 이후 함완섭은 동아영화흥업에서 제작 담당으로 일하며 <사랑의 승부>(최훈 ․ 이용호, 1962), <비밀통로를 찾아라>(이용호, 1962), <천동(天動)>(정승문, 1963)을 기획, 제작했지만, 동아영화흥업마저도 1963년 6월 영화사 등록요건이 더 강화된 제1차 개정 영화법의 시행으로 등록이 취소되었다. 신상옥 감독과의 재회 <에밀레종>(홍성기, 1961) 이후 조명을 중단했던 함완섭은 1964년 최훈 감독의 <눈물의 자장가>(1964)를 시작으로 다시 조명기사로 복귀했다. 그리고 홍성기 감독의 <대석굴암>(1964), <처녀성>(1964), 최훈 감독의 <울지마라 물새야>(1964), <파도>(1967), <밀어(密語)>(1967), <지금 그 사람은>(1968), <난풍(暖風)>(1968), 김묵 감독의 <폭력지대>(1965), <최후의 대결>(1967) 등을 작업하며 조명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1968년 함완섭은 신상옥의 부름을 받는다. <악야> 이후 16년 만이었다. <지옥화>(1958) 때부터 신상옥의 대부분 작품에서 조명을 담당했던 이계창이 1967년 3월 베트남에서 <여자 베트콩 18호>(강범구, 1967)를 촬영하던 중 불의의 폭파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공백을 함완섭에게 대신 맡기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신상옥과 해후한 함완섭은 <여자의 일생>(1968)을 시작으로 <내시>(1968), <천년호>(1969) 등의 조명기사로 신상옥과 함께했다. [사진 23, 24] 영화 <여자의 일생>(신상옥, 1968) 속 장면들 당시 신필름은 안양촬영소를 인수하고 자회사를 설립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던 국내 최대의 영화사였고, 일본의 류덴샤(柳電社)에서 수입한 조명기 등 최신 기재를 보유하고 있던 꿈의 영화공장이었다. 함완섭은 <내시>를 작업할 때 당시 보통 영화 한 편에 소요되던 광량의 두 배에 달하는 1,200kw를 썼을 정도로 풍족한 환경이었다고 기억한다. 촬영 스튜디오에는 300kw 이상의 기본 전력이 들어왔고, 한 장면에만 100kw 이상 쓴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었다. [사진 25, 26] 영화 <내시>(신상옥, 1968) 속 장면들 [사진 27, 28] 신상옥 감독의 영화 <천년호>(1969) 속 장면들 하지만 그 호사(好事)도 오래가지 않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산업은 장기 불황에 빠져들었고 신필름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그 조짐은 함완섭이 신상옥의 작품에 참여하기 시작할 때부터 보였었다. 큰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양산해야 했지만, 흥행 성과는 미미했고 빚만 불어나는 악순환이 이미 그때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더욱이 신필름은 1970년 시설 기준 미달로 등록이 취소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규모가 대폭 줄어든 안양영화제작주식회사로 재설립된다. 함완섭은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를 작업한 후 1972년부터 최은희가 교장으로 있던 안양영화예술학교에서 조명과 전기 등을 관리하는 시설감독으로 근무했다. 이후 1973년 <삼일천하>(신상옥)에 조명기사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1975년 7월 신상옥이 외화 쿼터를 획득하기 위해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되는 등 어수선해지자 퇴사했다. [사진 29] 영화 <삼일천하>(신상옥, 1973)의 한 장면 [사진 30] 영화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의 한 장면 <세종대왕>과 마지막 작품 함완섭은 한동안 일선에서 물러나 지내다 1978년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대작 사극 <세종대왕>(최인현)에서 조명 책임을 맡게 된다. 자신이 조명기사로 참여한 59편의 작품들 중 가장 애착하는 작품으로 꼽기도 한 이 영화에서 함완섭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작업했다. 낮 장면에 쓰는 데이라이트(daylight) 조명기 10대를 홍콩에서 전구를 수입해와 자체 제작했고 경복궁 오픈 촬영에서 유용하게 사용했다. 기존의 텅스텐 조명기도 당시 모을 수 있는 최대의 물량을 동원해 유려한 롱 쇼트 밤 장면을 구현해내기도 했다. 더욱이 1년여의 긴 촬영 기간에 로케이션과 오픈 촬영이 많아 고생을 많이 한 작품이었지만, 그해 대종상 후보에까지 오르고 수상은 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사진 31~33]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영화 <세종대왕>(최인현, 1978) 속 장면들 이후 함완섭은 1979년부터 현진영화사에서 조명실장으로 재직하며 직접 나서기보다 후배들을 돕는 일에 매진했다. 그리고 1980년 <느티나무 있는 언덕>에서 촬영기사와 조명기사로 만나 오랫동안 친구로 인연을 맺어온 심우섭 감독의 <난 모르겠네>를 마지막으로 극영화 조명을 그만두었고, 1986년 아시안게임 기록영화의 조명을 끝으로 은퇴했다. [사진 34~36] 함완섭이 참여한 마지막 극영화 작품 영화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속 장면들
전후 마땅한 일거리가 부족했던 시기 우연히 시작하게 된 조명 일은 그저 공연이 있을 때나 돈을 받는 불안정한 일자리였지만 영화가 번성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졌고 영화와 광고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동하는 천직이 되었다. 그는 1930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지주계급이던 부모님 슬하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해방 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설 무렵, 집안이 몰락하고 가족들마저 뿔뿔이 흩어졌다. 어렵게 어머니와 생활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진하는 연합군이 평북을 점령할 당시 그는 치안대에 가담하여 전쟁 속의 전쟁을 겪었다. 전세가 바뀌고 연합군이 남하하던 때에, 그는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었다. "내일 아침에 들어오면 되니 먼저 가라"는 말이 어머니와의 안타까운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월남하여 가족을 잃은 그가 처가 식구들을 각별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피난길에 우연히 형을 만나 함께 남하하던 중 연고가 없는 두 형제에게 미군 부대의 노무자로 차출되는 행운이 찾아온다. 미군부대에서의 안전한 생활과 넘쳐나는 물자는 그들에게 커다란 매혹이었고 계속 머무르고 싶은 곳이었다. 그러나 휴전이 이루어진 후 미군부대에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자 사회로 나와 일을 찾아야 했고, 그러던 중 주변의 추천으로 시공관의 조명을 담당하고 있던 서영훈을 만나게 되면서 조명 일을 시작하게 된다. <뇌우>와 같은 무대연극이나 무용공연 등의 조명을 담당했는데 1950년대 중반의 조명 사정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두 개의 탄소봉으로 플러스 마이너스 전극효과를 내 방전시키며 빛을 방사하는 카본아크라이트를 사용했는데 손으로 탄소봉의 거리를 적절하게 유지시키는 게 관건이었다. 심지어 시력에 좋지 않아 젤라틴을 씌우고 작업해야돼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감으로만 작업해야 했다. 박진수: 무대조명이라는 것이, 아크라이트라는 것이 뭐이냐면 스포트 쏘는 거 있잖아. 카봉을 태우는 거야. 카봉을 이제 손으로 태워요, 양쪽으로 불을 합선시켜서 태우는 거야. 손으로 조절해가지고. 옛날에는 영사기에도 전부 다 아크로 태웠다고. 이제 그것이 발전이 되면서 전구로 다 바뀌었지. 1 승압효과를 내는 디머는 소금을 탄 물독 속으로 철판을 담궈 사용했다. 삼각형으로 된 철판에 전극을 연결해 서서히 담궜다 뺐다 하며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조명효과를 냈던 것이다. 박진수: 데이꼬가 뭐냐면 승압기, 10볼트에서 100까지 올리는 거야. 이것이 그때 당시 기계가 없었다고. 이걸 뭘로 하느냐. 소금물을 이만한 큰 독에다가 소금물을 탄다고. 소금물을 막 타고 좀 조그맣게 철판을, 구리 철판을 요렇게 잘라요. 요렇게해서 삼각형으로 해개지고 이걸 전기에다가 마이나스 프라스를 두 개를 만들어 가지고 싹 넣게 되면 10볼트에서 100볼트로 올라가는 거야. 하나는 담궈놓고, 마이나스 플라스니까. 플라스도 담궈야되니까. 담그면서 천천히 넣게 되면 천천히 밝아지는 거지. 빨리 담그게 되면 확 올라가니까. 영화에서도 이걸 썼어요. 영화에서도 아침, 새벽에서 아침 넘어오는 과정이라든가 또 해가 진다는 과정을 이걸 많이 썼다고. 그런 식으로 지금은 하래도 못 할 거야. 2 1950년대 중반 영화가 흥하게 되자 어두운 실내에서 벗어나 야외로 나가자는 생각에 서영훈과 함께 영화조명, 기술계의 원로인 김성춘의 문하로 들어가게 된다. 김홍 감독의 1955년 작 <자유전선>(김홍, 1955)의 조명보로 처음 영화작업에 참여한 후 <포화속의 십자가>(이용민, 1956) 등 연이어 김성춘에게 들어오는 작품에 참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계에 눌러앉게 되었다. 물론 엄격한 김성춘의 조수로 버텨내는 게 힘들어 때로 짐을 싸기도 했지만 꾸준한 노력을 통해 김성춘의 제1조수로,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조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박진수: 그게(영화 <자유전선>) 얼마 걸렸냐면 한 6개월 걸렸어. 군사영환데 화천인가 가서 했는데. 거기서 그 작품이 한 작품 끝났어. 그 다음에 한 게 <포화속의 십자가>라는 군사영화를 지리산, 지리산에서 <포화속의 십자가>란 영화를 가지고 남원으로 내려갔다고. 이용민 감독, 촬영기사가 임병호 씨 조명은 김성춘 씨가 해서 우리가 다 내려갔는데 그때만 해도 멤버가 굉장했지. 내려가서 한 달, 두 달, 두 달 반 동안 해도 작품이 못 끝났어요. 하다보니까 돈들이 떨어져 개지고 작품이 중단이 됐어. 그래서 중간에 서울로 다 올라왔다고, 카메라 다 잽혀놓고서. 올라왔다가 한 7, 8개월 있었나? 그러다 또 내려간다 이거야. 남원서 내려가가지고 그 작품을 완성시켜 개지고 올라왔지. 남원에서 <피아골>(이강천, 1955)하고 우리가 <포화속의 십자가>를 했어. 지리산에서. 그 지리산에는 그때만 해도 빨치산들이 많았다고. 그러니까 우리 촬영을 나가게 되면은 경찰들이 호위를 했어요. 그 정도로 그때 당시 위험했어요, 빨치산이. 3 [사진 1] 영화 <포화속의 십자가>(이용민, 1956)의 한 장면 당시 견고한 도제체제로 인해 1950년대 후반 김성춘 조명감독의 작품을 도맡아 했지만 좀처럼 조명기사로 데뷔하기는 힘들었다. 한국연예주식회사에서 주로 작업한 임병호 촬영기사의 아이디어로 김성춘이 배상해야 할 전구값 100만 원 대신 그가 작품을 맡는 것으로 협상하여 1959년 김화랑 감독의 <태양의 거리>로 조명기사 데뷔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한국연예주식회사와 극동흥업에서 함께 작업하게 된 김기덕, 변인집과 연출, 촬영, 조명 팀을 이뤄 충무로에서 소문난 팀으로 활동하게 된다. [사진 2] 영화 <태양의 거리>(민경식, 1952)의 한 장면 기사로 데뷔한 뒤 한국연예주식회사가 제작하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조명을 맡으며 실력을 인정받아가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60년 4.19가 나기 직전 임화수가 삼성촬영소를 인수하고 외국의 스튜디오를 참고하여 영화사를 확장한 뒤 전속제도를 두려던 시기에 그 또한 당시 최고의 조건으로 임화수와 전속계약을 하게 된다. 박진수: 나한테 제일 좋은 찬스가 한번 찾아왔드랬다고. 그때 임화수가 화양동에 삼성촬영소라는 것을 샀어, 인수맡았어. 그래서 임화수 씨가 한번 오라그래서 갔더니 ‘앞으로 거기에 대한 조명을 너 다 책임지고 너 나하고 전속계약을 맺자.’ 이래개지고 전속계약을 거의 맺었어. 한 달에 월급 얼마, 조수 얼마, 삼성촬영소에 들어오는 작품은 니가 다 맡아서 하고 라이트 관리를 니가 다 해달라. 이런 식으로 해서 나하고 전속계약을 맺었다고. 마쳤는데 마치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4.19가 터진 거야. 계약금 내가 그때 돈 100만 원을 받아 가지고 두 작품에 작품 당 30만 원씩 하고 그 기자재 40만 원을 해서 100만 원을 딱 받았다고. 4월 18일 날에. 그때 내가 얼만큼 좋았냐면 내 한달 월급이 40만 원씩 책정을 했다고. 40만 원이면 지금 돈 한 4천만 원 가까이 될 거야. 엄청 컸다고. 딱 받자마자 동대문 창신동의 한일은행인가 그랬을거야. 거길 가서 그걸 찾았어. 그때 당시에 임화수 당좌수표는 현찰 보증수표하고 똑같아요. 가서 100만 원 딱 찾아가지고 이제 집에 왔어. 그 다음날. 그러니까 4.19가 터지니까 당좌수표 정지가 돼놨어. 4 임화수가 몰락하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한국연예주식회사의 멤버들이 참여한 극동흥업으로 옮겨가 극동흥업의 전속 조명기사로 일하게 된다. 극동흥업의 첫 작품 <이복형제>(김화랑, 1961)에 참여했을 때는 제작비가 없어 흥행한 뒤 갚는 식으로 진행했는데 다행히 흥행에 성공했고 연이은 작품들의 성과도 좋았다. 박진수: 극동에서 세 작품 짼가 네 작품 짼가 김기덕 감독이 하는 <5인의 해병>(김기덕, 1961)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고. 김포에 마석이라는데 해병사령부가 있었는데 거기 가서 <5인의 해병>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찍었어요. 모심을 때 드갔다가 한 6개월 이상 걸렸나봐. 모 벼갈이 할 때 나왔어. <5인의 해병>을 종결 했는데 그것이 히트를 쳤잖아. <5인의 해병>이 히트를 처가지고 돈을 좀 번 거야. 그러니까 극동은 하기만 하면 돈 버는 거야. [사진 3] 영화 <5인의 해병>(김기덕, 1961)의 한 장면 그러다 한번은 <노란 샤쓰입은 사나이>(엄심호, 1962) 그거를 계획을 했는데 주연을 한명숙 씨를 가수를 주연을 쓰자. 며칠 찍고 나서 라슈를 딱 보니까 얼굴이 아니야. 이거 갈아야 된다. 그 논란이 많았어요. 차태진 씨는 "안된다 이건 갈아야 된다." 그러고 우리 스탭들은 "그냥 찍자." 그래서 찍었잖아요. 연기력은 아주 없어요. 타이틀이 노래로서는 히트 쳤기 때문에 그걸 만드는 건데. 그것도 하니까 흥행이 잘됐다고. 5 [사진 4] 영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엄심호, 1962)의 포스터 극동에서 김기덕 감독과 변인집 촬영감독과 함께 충무로에서 부러워하는 단짝이었던 그는 극동과 체인을 맺은 조선일보의 아카데미극장 사람들과 교류하며 친선을 맺기도 했다. 박진수: 조선일보사에서 아카데미극장을 지은게 있다고 광화문에다가. 극동에서 하는 작품은 전부 다 아카데미에다 붙이기로 체인을 맺었다고. 그 당시에 조선일보 사, 아카데미 사장이 방우영 씨라고 거기다 붙이면 잘되는 거예요. 나중에 극동하고 아카데미하고 자매결연 맺어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임 갖고 술 먹으러도 많이 대니고 낚시도 같이 다니고. 극동이 돈을 많이 벌었어. 6 연이어 작품들이 흥행에 성공하자 극동영화사의 차태진 대표는 무리한 도전을 감행해 영화사를 위험에 빠뜨렸다. 박진수: 극동영화사 차태진 씨가 대만을 갔다오더니 “야 지금 심상복 서커스단이 중국에서 보니까 뭐 곰이 트럼펫으로 노란 샤쓰를 부른다.” 뭐 하여튼 그런 희한한 걸 보고 와 가지고 그걸 수입한다 그거야, 한국에다. 우리는 말렸다고 전부 다. …(중략)… 들여왔는데 그게 이제 동물들이 코끼리, 곰 뭐 이런 동물들이 많으니까 이제 배로 싣고 와서 부산에서 하역을 하는 과정에서 코끼리 한 마리가 빠져죽었어. …(중략)… 창경원에다가 서커스단을 했다고. 했는데 그때 당시에 망하게 되려니깐 장충체육관에서 아이스쇼가 들어왔어. 그거하고 딱 맞붙은거야. 손님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거야. …(중략)… 동물 사육해야지 그 사람들 먹여야지. 돈이 부지기수로 들어가는데 못 당하는 거야. 그때 당시에, 그 낭중에 차태진 씨 사모님이 얘기하기를 “처음에 영화할 땐 돈을 주체를 못 하도록 벌었는데 심상복 서커스단 들어와서 다 망하기 시작했다.” 돈을 댈 수가 없는 거야 낭중에. 중간에 손들어버렸어. 심상복 서커스단이 제작자가 망하니까 중국에 갈 돈이 없는 거야. 그래서 동물을 다 팔고 겨우 차비 해서 자기네 나라로 갔어. 7 극동흥업을 떠나려던 김기덕 감독, 변인집 촬영감독과 그는 차태진 대표의 간곡한 부탁으로 영화사에 남아 극동흥업을 재기시킨다. 박진수: 청춘물 하기 시작했다고 청춘물. 뭐했냐면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이니 <떠날 때는 말없이>(김기덕, 1964)니. 작품들이 많이 있잖아요, 청춘물이. 청춘물 했다하면 히트치는거야. 아카데미 극장에 붙이고 그랬는데. 망했다가 다시 나와 가지고 또 이제 일을 또 많이 하니까 돈을 많이 벌었어. 8 [사진 5] 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의 한 장면 [사진 6]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김기덕, 1964)의 한 장면 재기에 성공한 극동흥업은 김기덕 감독 외에 유현목, 이형표, 정진우, 임권택, 강민호 등 많은 감독들에게 작품을 의뢰했고 이 작품들의 조명은 거의 다 그가 맡아 책임졌다. 박진수: 60년도 초에 극동 시작서부터 계속 일을 1년에 뭐 거의 한 10여 작품씩 했으니까. 9 극동흥업에서 많은 감독들의 다양한 장르영화들의 조명을 맡았지만 그 중 1967년 김기덕 감독의 특수촬영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는 특히 인상에 남는 작품이자 조명 장비가 열악했던 당시 환경에서 그에게 도전이 된 영화였다.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의 조명 기자재 상황은 김성춘이 1942년 일본 아라시간주로 프로덕션에서 수입해 온 조명기, 북한영화촬영소에서 노획해 국방부 영화과에서 보유하고 있던 커다란 소련제 조명기와 1956년 아세아재단에서 원조해준 50키로 조명기, 손수 만들어 사용하던 수제 조명기가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1963년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1962)로 대종상 조명상을 수상하고 일본에서 열린 아세아영화제에 참석한 뒤 일본 대영촬영소에서 조명연수를 받게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기자재였던 시네킹 조명기를 들여오게 된다. 광량을 10배나 증폭시킬 수 있는 시네킹 조명기의 도입은 획기적이었다. 영화계에 조명기자재의 부피를 줄이는 동시에 광량을 높이는 것은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인력과 발전기에 대한 부담도 줄고 특히 로케이션 밤 촬영에서의 어려움을 확실히 줄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조명감독들은 필요한 조명기를 직접 제작하는 방식으로라도 조명기를 충당했어야만 했다. 그런 연유로 화영공작소라는 수공업적 방식의 공작소가 조명인들에게 항상 회자되는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화영공작소의 대표였던 김종철도 김성춘의 문하에서 조명조수로 일하던 시절의 이력을 바탕으로 조명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조명제작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 또한 많은 양의 조명을 이곳에서 주문하여 제작하였다. <대괴수 용가리>에는 많은 양의 조명을 주문 제작했어야만 했다. <대괴수 용가리>는 특수촬영물로 미니어처세트를 이용하였고 고속촬영을 통해 느린 화면을 만들어야 했다. 고속촬영을 위해 카메라의 회전수가 증가하는 만큼 더 많은 광량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당시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전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양의 조명을 만들어야 했다. 결국 실내촬영에서도 발전차를 동원하여 근근이 여러 달에 걸쳐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특수촬영과 미술에 관계된 일본의 스탭들이 초청되어 제작을 도왔고 처음 시도하는 고속회전촬영 조명에 대해 그는 일본 스탭들의 자문을 빌어 작품에 참여하였다. <대괴수 용가리>는 그를 포함해 국내 영화인들이 특수촬영과 미술에 대한 기술을 전수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 7]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의 한 장면 [사진 8] 영화 <대괴수 용가리>의 미니어처 촬영 현장 그는 1972년 영화계를 잠시 떠나게 된다. 영화가 사양길에 접어든 시기였기에 그는 당시 새롭게 부상하는 매체였던 컬러텔레비전에 대한 학습과 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장인인 조택원 선생의 도움으로 1974년 일본의 후지 텔레비전에서 컬러 조명에 관한 연수를 받는다. 박진수는 연수를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와 방송국에 들어가려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았고, 결국 신상옥 감독의 권유로 다시 영화계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1979년은 이미 영화산업이 점점 쇠퇴해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후배의 권유로 MBC 광고제작사업부에서 광고 조명 담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이후 광고조명 독립사업체를 운영하다 은퇴할 때까지 광고계에 적을 두게 된다. 그는 같은 조명이지만 영화는 그림자를 아름답게 표현해야 하는 예술이고 광고는 그림자를 지워 보이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 상반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무대와 영화, 텔레비전, 광고 등 다양한 매체를 모두 경험한 그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조명을 담당할 수 있다며 자신의 실력을 자부한다. 1995년에 그는 한국영화조명감독협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1년 동안 회장으로 지내며 왕성한 활동과 성과를 만들어냈다. 어렵게 협회의 사무실을 얻고 후배들의 일본 기술연수를 진행했으며 1996년 조명아카데미를 설립해 후학들을 양성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 놓았다. 평생을 조명과 함께해 온 그는 영화와 조명의 관계를 그림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감독이 화폭을 만들어놓고 촬영기사가 그 화폭을 담는 역할을 한다면 조명기사는 빛으로 화폭에 붓질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런 조명의 중요성을 설파하고자 그는 후진 양성을 위해 기술연수를 추진하고 전문교육기관을 만드는 역할에 열정적으로 매진하였고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조명기사로서 다양한 매체를 섭렵하고 화려한 이력을 지닌 그는, 지금은 일선에서 은퇴하였 지만 '기술자는 정년이 없다'는 말로 영화조명에 대한 의지와 미련을 남겼다. 1) 배수경⋅박진수, 「박진수-조명」, 『한국영화사 구술총서04 한국영화의 르네상스3: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상자료원, 2007, 181쪽. 2) 위의 책, 181쪽. 3) 위의 책, 184~5쪽. 4) 위의 책, 189~190쪽. 5) 위의 책, 199쪽. 6) 위의 책, 200쪽. 7) 위의 책, 200~201쪽. 8) 위의 책, 202쪽. 9) 위의 책, 202쪽.
김지운 감독의 < 악마를 보았다 >는 한국 장르영화 범주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최상의 작품이다. 이 영화를 액션 스릴러를 벗어나 고어 장르로 분류했을 때, 이 정도의 감독과 배우, 스태프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사례는 해외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 <악마를 보았다>를 빛나게 만든 요소는 여러 가지다. 김지운 감독의 유려한 연출, 박훈정 의 매력적인 시나리오, 이병헌 과 최민식 의 불꽃 튀는 연기, 파괴적인 액션의 구성, 모그의 음악과 촬영 등 기술적인 완성도 또한 발군이다. 종합하자면 한 장르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변화를 추구했던 김지운 감독의 연출 역량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악마를 보았다 >는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당한 약혼녀의 복수를 행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폭력은 폭력으로 되돌려주는 복수의 서막은 후련하지만, 점점 안타까움이 더해지며, 막바지에 이르면 절망적으로 끝이 난다. 이병헌 이 연기한 김수현은 강하지만 부드러운 남자다. 그는 약혼녀를 잃고, 복수를 위해서 살인마를 쫓는다. 최민식 이 열연한 연쇄살인범 장경철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으로 똘똘 뭉친 사이코다. 둘의 만남은 영화 절반이 채 되기도 전에 이루어지고, 수현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경철을 제압한다. 관객은 당혹감과 함께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 궁금해한다. 무시무시한 광기를 발산하던 연쇄살인범이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실신을 해버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여기서부터 진짜 악마의 모습을 보게 된다. 수현은 경철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버리기엔 분노가 가라앉질 않는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경철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는 것이며, 이것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고 스스로를 헤어날 수 없는 심연의 늪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 악마를 보았다 >의 매력은 쫓고 쫓기는 자의 유혈 낭자한 대결과 복수와 더불어, 선에서 악으로 서서히 변화하는 인물의 내면적 갈등과 고뇌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는 두 인물의 대립관계를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수현은 경철을 잡았다 풀어주고, 잡았다 풀어주고를 반복한다. 그는 경철을 달아날 수 없는 사냥감으로 취급하며, 고통의 수위를 높여가면서 압박을 가한다. 하지만 경철은 폭력과 고통에 굴복하는 호락호락한 양아치가 아니다. 수현의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희생자가 늘어나면서 영화는 선과 악의 단순한 대결을 벗어난다. 지독한 복수를 행하는 자는 자신을 버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서야 한다. 수현이 상대하는 자는 순수할 정도로 철저하게 악에 물들었고, 그는 그것을 간파하지 못했다. 결국 복수의 끝자락에 이르면 수현은 악마에게 먹혀버린다. 영화의 결말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복수의 허망함과 안타까움으로 채워진 수현의 눈물은 긴 여운을 남긴다. 이병헌 의 섬세한 연기와 조용하게 흐르는 모그의 음악이 절묘하다. < 악마를 보았다 >의 폭력묘사는 장르영화가 추구하는 극단적 자극을 충족한다. 도입부 납치와 살인, 사체 처리 장면의 임팩트도 크지만, 영화 곳곳에서 광기 서린 경철의 살육의 끊이질 않는다. 특히 택시 강도들과의 싸움은 기술적으로 난이도 높은 씬으로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살육의 미학을 꽃피운다. 여기에 변함없는 김지운 감독의 유머가 적재적소에서 웃음을 자아낸다. 훌륭한 감독과 배우의 조합이 아니었다면, 분위기를 깨트릴만한 유머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내려 재미를 더한다. < 악마를 보았다 >는 성격상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불편하고 기분 나쁜 영화가 될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열광적으로 빠져들며 팬이 되기를 자처하게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영화계에서 장르 본연의 성격에 지독하게 충실한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는 특별한 영화의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