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
- 감독
- 김지훈
- 제작년도
- 2003
<축제> 중 (사진: 영화방) 박광수 감독의 < 칠수와 만수 >(1988)의 후반부에는 안성기 배우와 박중훈 배우가 연기한 두 주인공이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우뚝 솟은 거대한 광고판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는 광고판 도색 작업을 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작은 저항의 의미로 그곳에 올라 소주를 마시며 도시를 내려다본다. 도색 작업을 하며 우연히 만난 이 두 남자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가장 고통스러운 좌절감과 굴욕감만은 서로에게 숨겨왔다.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로부터 외면받았으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할 공정한 기회조차 거부당한 처지였다. 그러나 광고판 꼭대기에 올라서서야 칠수(박중훈)는 처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이며,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자랑이 거짓이었음을 만수(안성기)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칠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안성기의 얼굴에는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턱은 굳게 다물어지고 눈빛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강렬해지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더라도 그 표면 아래에서 감정의 폭풍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동료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불평등을 견디며 오랫동안 참아온 분노를 동시에 포착해내는 연기를 이토록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잠시 후, 그는 일어서서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외친다.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이 장면은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다. 만수와 칠수는 대중적인 주류 영화에서 대개 주목받지 못하는, 억압받고 소외된 인물들을 대변한다. 그들은 발 아래 도시를 향해 자신들의 좌절과 분노를 외침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자신들의 관점을 드러내며 말할 권리를 주장한다. 유사하게, 1980~90년 세대의 영화인들은 주류 사회가 망각 또는 묵살해버리는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이끌려 창작에 돌입하곤 했다. 안성기는 만수 역을 맡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는 인물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씁쓸한 결연함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한편, 그 내면에 자리한 부드럽고 연민 어린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실 안성기는 그 시기 한국영화에 등장한 여러 명의 주인공을 맡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고, 전형적인 “무비스타(movie-star)”로서의 외모나 뚜렷하게 고정된 스크린 이미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연기한 배역 속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 어떤 배우들보다 탁월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두려움, 야망, 나약함, 그리고 미덕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구현해냈다.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의 능수능란한 사기꾼, < 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의 수줍은 대학생, < 투캅스 >(강우석, 1993)의 부패한 경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각 인물을 공감 가능한 생생한 존재로 그려냈다. 1950~60년대에는 배우 최은희 가 이러한 방식으로 관객들과 연결되었는데, 한 세대의 여성들은 그녀가 연기한 다양한 역할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며 성장했다. 1980~90년대에 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배우는 단연 안성기였다. 세월이 흐르며 영화계 안에서 그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중요성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야기에 즉각적으로 무게감을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배우에게서도 최상의 연기를 끌어내도록 했기에, 감독들은 그와의 작업을 고대했다. 조연부터 주연까지 폭넓은 역할을 소화했으며, 대형 블록버스터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업에 참여했다. 신인 감독이나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프로젝트와의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 생활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감독과 생산적인 협업 관계를 맺었다. 그중 단 25명의 이름만 꼽아보더라도 김기영 , 임권택 , 배창호 , 이장호 , 이두용 , 유현목 , 이원세 , 정지영 , 강우석 , 이명세 , 박광수 , 박종원 , 장선우 , 이현승 , 류승완 , 김성수 , 오승욱 , 이정향 , 이준익 , 김지훈 , 신연식 , 장률 , 김주환 , 박흥식 , 그리고 김한민 의 영화에 출연했다(여기에 언급하지 못한 수많은 분께 양해를 구한다).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중 (사진: 영화진흥위원회, 양기주) 그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스크린쿼터 제도 수호에 앞장섰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및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도 했다. 영화계 내에서의 이러한 위상과 배우로서 이룬 독보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접 대면한 이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의 겸손함과 너그러움이었다. 그는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결코 유명 스타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히 행동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찾아나서지 않았음에도, 그는 영화계의 기둥이자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리더였다. 영화계의 여러 행사에서 그가 지녔던 존재감은 동료 영화인들에게 깊은 그리움을 자아내겠지만, 다행히 한국영화 속 그의 연기는 여전히 누구나 접하고 즐길 수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상징적인 역할 중 몇 가지만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중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정한 일부 목록을 아래에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의 경력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보여준 아역 연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보다 전에 김기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 10대의 반항 >(1959)은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안성기는 이 작품으로 소년 특별연기상을 받았지만, 작품의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다. 그는 1960년대에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주로 작은 역할들을 맡아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 배우로서의 도약은 1980년대 초에 이뤄졌는데, 이장호의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 이원세의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81), 임권택의 < 만다라 >(1981), 배창호의 < 꼬방동네 사람들 >(1982)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각 감독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요 작품들이다. 특히 배창호 감독과 함께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노숙인을 연기한 < 고래사냥 >(1984),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깊고 푸른 밤>(1985), 그리고 청춘의 성장과 관계를 다룬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 대표적이다. 이후 20여 년간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된 임권택 감독 역시 < 안개마을 >(1982)부터 < 태백산맥 >(1994), < 축제 >(1996), < 취화선 >(2002), 그리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 화장 >(2014)에 이르기까지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했다. (상)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 (하) <안개마을>, <화장> (사진: 한국일보, 백영호)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사회의식 있는 감독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로 불리는 창작자들 역시 안성기와 작업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앞서 언급한 <칠수와 만수>와 박광수 감독의 또 다른 주요작인 < 그 섬에 가고싶다 >(1993) 외에도, 자본주의를 풍자한 장선우의 < 성공시대 >(1988), 이명세의 파격적인 데뷔작 < 개그맨 >(1988), 그리고 날카로운 정치적 통찰을 보여준 정지영의 < 남부군 >(1990)과 < 하얀전쟁 >(1992)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강우석의 메가 히트작 < 투캅스 >(1993)를 통해 자신의 코믹 연기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감독들은 그를 신뢰했기에, 때로 이례적이거나 의외의 역할에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정향의 로맨틱 코미디 < 미술관 옆 동물원 >(1998)에서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습이나, 이명세의 < 인정사정 볼것 없다 >(1999) 속 잔인한 살인마로의 등장, 전만배 감독의 <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에서의 대통령 연기가 그 예다. 또한 오랜 동료인 박중훈과 호흡을 맞춘 가슴 따뜻한 음악 드라마 < 라디오스타 >(2006), 정지영의 법정 드라마 장르인 < 부러진 화살 >(2011)에서의 강렬한 변신, 그리고 한국영화사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인 강우석의 < 실미도 >(2003)에서 보여준 군 지휘관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규모 흥행작인 < 타워 >(2012), < 한산: 용의 출현 >(2022)부터 저예산 독립영화인 < 필름시대사랑 >(2015), < 아들의 이름으로 >(2020), < 카시오페아 >(2022) 등 영화계 전반에 걸쳐 친숙하게 자리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안성기는 영화라는 예술을 사랑했다. 그가 여러 번 직접 언급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행보가 한국영화를 향한 깊은 헌신을 분명히 보여줬기에 알 수 있다. 그가 별세하면서 한국영화계는 길을 밝혀주던 등불 하나를 잃었으며, 그가 없는 이곳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성공시대> 중 (사진: 정기성) 달시 파켓(Darcy Paquet / 영화평론가·번역가) l 영화평론가이자 강연자, 번역가, 그리고 영화제 컨설턴트로서 25년 넘게 한국영화를 지켜봐 왔다. 저서로는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가 있다. * 위 원고는 필자가 영문으로 작성한 아래 원고의 국문 번역본입니다. Remembering Ahn Sung-ki There is a moment towards the end of Park Kwang-su’s 1988 film Chilsu and Mansu when the two lead characters – played by Ahn Sung-ki and Park Joong-hoon – are sitting on the top of a giant billboard at the Express Bus Terminal in Gangnam. They are supposed to be painting the billboard, but in a small act of defiance, they have instead gone up to drink soju and look out over the city. These two men, who met by chance on painting jobs, have become work partners, but nonetheless they have hidden their most painful frustrations and humiliations from each other. Each of them for various reasons have been shunned by society, and denied a fair shot at building a stable life for themselves. But atop the billboard, Chilsu (played by Park Joong-hoon) starts to speak honestly from his heart for the first time. He confesses to Mansu that he’s a failure, that the bragging he has been doing up to now has been lies. “I’m a hopeless guy(나 희망 없는 놈이에요),” he says. As Chilsu is speaking, a slow transformation takes place on Ahn Sung-ki’s face. His jaw locks, his eyes take on a focused intensity, and although he doesn’t say a word, we can see a storm brewing just beneath the surface. Not many actors could have done this so well, capturing both the compassion he feels for his colleague and his long-suffering outrage at society’s inequities. A moment later, he stands up and shouts to the city below: “All you upper-class, educated, well-off bastards of Seoul, listen to me now! I'm going to speak out too, from this high place here!” "야! 서울에 있는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This is an iconic and deeply symbolic scene for 1980s-era Korean cinema. Mansu and Chilsu represent the kind of downtrodden, disenfranchised characters that are usually overlooked by popular mainstream cinema. By shouting their frustrations and complaints to the city below, they are quite literally “finding their voices,” expressing their point of view and insisting on their right to speak. In a similar way, a whole generation of filmmakers in the 1980s and 1990s were motivated by the desire to give a voice to the sort of characters that mainstream society forgets or simply ignores.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su. He convincingly portrays the hard, bitter determination of his character while giving hints of a softer, compassionate side underneath. But actually, Ahn Sung-ki was the perfect choice to play many of the protagonists of that decade’s cinema. He wasn’t known for playing one particular character type. He didn’t have movie-star looks, or a clearly-defined screen image. But what he did better than anyone else was to make audiences see themselves in the roles he played. He took the dreams, fears, ambitions, weaknesses and virtues of ordinary people, and represented them faithfully on the screen. Whether it was the smooth-talking grifter moving to California and pursuing the American Dream in Deep Blue Night , the shy university student in Our Sweet Days of Youth , or the corrupt policeman in Two Cops , he portrayed each character in a manner that made them vivid and relatable. In the 1950s and 1960s, it was the actress Choi Eun-hee who connected with audiences in this way: a generation of women grew up seeing themselves and their experiences in the many different roles that she played. But in the 1980s and 1990s, the actor who did this best of all was Ahn Sung-ki. As he grew older, his position within the film industry changed, but not his importance. Directors loved to work with him, since his presence in a film immediately gave the story more weight, and he could bring out the best in his co-stars as well. He took on a wide variety of roles, from supporting to leading characters, and worked on everything from major blockbusters to low-budget independent films. He didn’t shy away from working with new directors or less prestigious projects.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he formed productive working relationships with a huge number of directors. To choose just 25 names, he appeared in films by Kim Ki-young, Im Kwon-taek, Bae Chang-ho, Lee Jang-ho, Lee Doo-yong, Yu Hyun-mok, Lee Won-se, Chung Ji-young, Kang Woo-suk, Lee Myung-Se, Park Kwang-su, Park Jong-won, Jang Sun-woo, Lee Hyun-seung, Ryoo Seung-wan, Kim Sung-soo, Oh Seung-wook, Lee Jeong-hyang, Lee Joon-ik, Kim Ji-hoon, Shin Young-sik, Zhang Lu, Kim Ju-hwan, Park Heung-sik, and Kim Han-min(with apologies to the many other names I’ve excluded). He also played important roles in the film community, serving as chairman of the Korean Film Actors Association, advocating for the Screen Quota system, serving as Deputy Director of the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as Festival Director of the 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 And yet despite his stature in the industry and his unmatched accomplishments as an actor, the quality that most impressed people who met him in person was his modesty and generosity of spirit. He didn’t behave like a famous star, even though he possessed a star-quality charisma. Soft-spoken and never seeking the spotlight, he was nonetheless a pillar of the film community, looked up to as a leader. His presence at film events will be sorely missed by fellow filmmakers, but thankfully his performances in Korean films can still be accessed and enjoyed by anyone. Making a list of his most iconic roles is difficult, because there are so many of them to choose from. But I will attempt to make a partial, highly subjective list below. Of course, going back all the way to start of his career, we have his performance as a child actor in one of the most famous Korean films of all time, Kim Ki-young’s The Housemaid (1960). It’s truly regrettable that a copy no longer exists of his previous collaboration with Kim Ki-young, Defiance of a Teenager (1959), which screened at the San Francisco International Film Festival, and where Ahn Sung-ki won a special award for his acting. He would go on to act in more than 50 films in the 1960s, often in small roles, but his breakthrough as an adult came at the start of the 1980s in works such as Lee Jang-ho’s Fine Windy Day (1980), Lee Won-se’s A Dwarf Launches a Little Ball (1981), Im Kwon-taek’s Mandala (1981), and Bae Chang-ho’s People in a Slum (1982) – all major films that helped to establish the reputation of their directors. It was with Bae Chang-ho that he would enjoy some of his biggest commercial successes, especially in Whale Hunting (1984) where he played a kind-hearted beggar; the smash hit Deep Blue Night (1985) and the coming-of-age relationship story Our Sweet Days of Youth (1987). Director Im Kwon-taek, who became internationally recognized over the next two decades, often worked with Ahn Sung-ki as well, from films like Village of Haze (1982) to The Taebaek Mountains (1994), Festival (1996), Chihwaseon (2002) and the director’s final film Revivre (2014). The group of more socially-minded directors who debuted in the late 1980s and early 1990s – often referred to as the Korean New Wave – were just as eager to work with Ahn Sung-ki. Aside from the aforementioned Chilsu and Mansu and another important work by Park Kwang-su, To The Starry Island (1994), there was Jang Sun-woo’s capitalist satire Age of Success (1988), Lee Myung-Se’s groundbreaking debut film Gagman (1989), and Chung Ji-young’s politically incisive North Korean Partisans in South Korea (1990) and White Badge (1992). At the same time, Ahn showcased his comic abilities in Kang Woo-suk’s smash hit Two Cops (1993). Directors trusted Ahn Sung-ki enough to cast him in somewhat unusual or surprising roles, such as his whimsical appearance in Lee Jeong-hyang’s romantic comedy Art Museum by the Zoo (1998), his turn as a vicious killer in Lee Myung-Se’s Nowhere to Hide (1999), playing the nation’s president in director Jeon Man-bae’s Romantic President (2002), his role opposite longtime collaborator Park Joong-hoon in the heartwarming music drama Radio Star (2006), his powerful turn in Chung Ji-young’s court drama Unbowed (2011) and his unforgettable role as a military commander in Kang Woo-suk’s Silmido (2003), the first Korean film to sell 10 million tickets. Even to the later stages of his career, his distinctive voice was a familiar presence in big-budget hit films such as Tower (2012) or Hansan: Rising Dragon (2022), to low-budget indie features like Love and… (2015), In the Name of the Son (2020) and Cassiopeia (2022), and everything in between. He was daring and creative in choosing films up to the very end. Ahn Sung-ki loved the art of cinema. We know this not because he said it in so many words, but because over decades, his actions demonstrated his deep commitment to Korean cinema. With his passing, the film industry has lost one its guiding lights, and it will not be the same without him. Darcy Paquet(film critic/translator) l As a film critic, lecturer, translator and film festival consultant, I have been following Korean cinema for over 25 years. Author of New Korean Cinema: Breaking the Waves (2010).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영화를 좋아해 자주 극장을 찾는 편이었지만, 유난히 집중적으로 영화를 보았던 시기가 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파리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시절이다. 그때 나는 북역(北驛) 근처의 작은 스튜디오에 살았다. 아랍인, 인도인, 중국인, 아프리카인 등 여러 지역에서 흘러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거리는 낡고 허름했지만, 이상한 활력과 혼돈으로 가득했다. 향신료 냄새가 뒤섞여 풍기는 공기에는 흥분과 불안이 실려 있었고, 길을 지날 때 들려오던 언어들은 바벨탑에서나 흘러나왔을 법한 다성(多聲)의 소음이었다. 그 자체로 ‘영화적’이던 이 온갖 감각들이, 마치 모래시계의 바닥에 쌓여가는 부스러진 시간처럼, 서서히 나의 내부에 침전되어 갔다. 여가라 부를 만한 것이 없던 일상에 유일한 출구가 있었는데 그것이 극장이었다. 파리는 시네마의 도시였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영화관이 서너 개 있었고, 생미셸의 낡은 옛날 극장들에서는 고전영화가 끊임없이 돌아갔다. 일 년 내내 열리던 회고전들, 퐁피두센터의 특별 상영들,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작품들, 한국 감독들의 전작(全作), 영화 교과서에서 이름만 보았던 옛날 작품들을 관람하는 기회를 누렸다. 논문을 쓰던 스튜디오와 극장은 삶의 두 극점(極點)이었다. 외로움, 침잠, 우울의 극을 이루는 스튜디오. 그리고 놀라운 이미지들이 주는 충격, 활력, 기쁨의 극을 이루는 극장. 나는 이 두 지점 사이를 오가던 진자와도 같았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은 특별한 외출이 아니라 습관화된 생활 방식의 하나였다. 영화를 연구하거나 전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내가 몰두한 공부는 이미지의 문제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나는 벤야민의 저술들을 탐구하고 있었고,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그의 이미지 철학과 (수업에서 다뤄지던) 아비 바부르크의 문화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미지의 물질성, 역사성, 능동성, 생명력에 대한 감수성을 이론적 사유의 동력으로 전환한 사람들이다. 특히 바부르크와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의 길을 연다. 바부르크가 바라본 이미지는 태어나고 변이하며,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생명 현상이었다. 이미지에 스며 있는 이 시간적 리듬을 그는 ‘잔존(Nachleben)’이라 불렀다. 이미지도 생명체처럼 고통을 겪고, 변형되며, 살아 나간다. 파토스(pathos), 곧 겪음, 시련, 고통이라는 문제의식이 바부르크의 사유를 관통한다.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지진파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지진계처럼, 그것이 행사하는 힘을 겪어내는 일이다. 바부르크가 “파토스적 패러다임” [1] 을 실험한 이론가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바부르크가 던진 주제들을 한층 더 밀고 나가, 로고스를 중심으로 조직된 예술사 전통을 해체하고, 이를 징후학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각 경험 고유의 현상학적 특성, 다시 말해 ‘본다(voir)’는 행위가 언제나 ‘응시당한다(regarder)’는 역관계와 함께 작동한다는 사실이었다. [2] 그는, 주체가 자신이 보는 것에 의해 찔리고 상처 입는 촉각적 경험, 그리고 이미지가 주체 내부로 스며들어 탈주체적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이미지란 유령이자 파토스이며, 동시에 징후다. 이는 이미지를 의미나 사실, 표상으로 고정하고 물화하여 상징계에 예속시키려는 지적 경향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당시에는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파리에서 천착하던 이미지 철학은 (지금 나에게 익숙한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다음의 세 가지 항목으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째, 이미지는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 동등한 위상을 갖는 생명이며 힘이며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존재론). 둘째, 인간이 이미지를 선험적 인식의 틀에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가 인간에게 침투하여 그를 흔들고 변화시키는 행위자라는 점(정동론). 셋째, 이미지를 보는 인간은 이러한 실효적 이미지에 의해 감응되어 변형되는 감수자라는 점이다(페이션시의 이론). [3] 『세계에 대한 믿음』 중 소개된 작품들 (상) < 부운 >(나루세 미키오, 1955), < 황혼의 빛 >(아키 카우리스마키, 2006) 중 (사진: “ Ukigumo ”, “ Laitakaupungin valot ”, IMDb) (하)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나의 해방일지 >(김석윤, 2022) 중 (사진: “ 헤어질 결심 ”, 네이버영화 / “ 나의 해방일지 ”, JTBC) 서설이 길어진 이유는, 작년 겨울에 출판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지를 (청탁을 받은 후에) 곰곰이 떠올리다 보니 그 기원이 20여 년 전 파리 시절의 이미지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집필의 실제 시간대만 놓고 말하자면, 저 책은 2021년에서 2024년 사이에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서울리뷰오브북스》, 『안과밖』, 《뉴래디컬리뷰》 같은 지면에 발표한 영화평들을 책으로 묶었고, 거기서 다룬 작가들은 나루세 미키오, 타르코프스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지아장커, 코엔 형제, 아키 카우리스마키, 켈리 레이카트, 박찬욱 , 박해영 등이다. 한눈에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듯, 저들을 묶는 단일한 주제나 특정 경향, 시대나 지역적 동질성 같은 것은 없다. 아마도 가장 느슨한 공통점은 내가 저들의 작품에 깊게 감응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책을 쓰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시네필’이나 ‘비평가’가 아니라 영화를 겪는다는 의미의 ‘시네-페이션트(cine-patient)’라고 불렀다. 시네-페이션트는 이미지를 겪는 자다. 영화에 의해서 변형되는 자. 영화를 바이러스처럼 삼켜 그것과 함께 하나의 어셈블리지로 생성되는 숙주다. 최근에 내가 제안한 한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봄의 겪음(suffering seeing)”의 주체라고 부를 수도 있다. [4] 이런 존재는 도대체 영화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쓸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이 책의 저변에 흐른다. 나는 영화를 정신분석이나 기호학, 또는 사회학이나 매체이론으로 ‘분석’하는 대신, 영화가 가져온 감각적, 감정적, 지적 변용을 ‘보고’하는 방식을 선택한 셈이다. 이는 책에서 자주 인용된 들뢰즈의 방식이기도 하다. 영화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동맹자로 만드는 것. 감독을 철학자로, 사상가로, (또는 나의 경우에는 사회학자로) 대우하는 것. 영화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영화에 ‘의해’ 감응되어 쓰인 글. 이것이 내가 책에서 시도했던 비평의 한 방식이라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앞에서 언급한 디디-위베르만과 바부르크의 ‘파토스적 패러다임’에 닿아있다. 시네-페이션트는 영화가 눈동자에 던지는 세계의 이미지들을 겪고, 견디고, 앓는다. 나는 책에서 여러 차례 영화의 힘의 바탕에 이런 수동성이 자리 잡고 있다고 썼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봄을 겪는다.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겪는다. 극장에서, 우리의 눈동자는 그 안으로 세계가 침투하는 열린 상처, 또는 벌어진 구멍이 된다. 상처가 상처를 통해 상처를 바라본다. 기쁨이 기쁨을 통해 기쁨을 바라본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볼 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런 체험의 파편들이 책 곳곳에 흩어져 있다. < 스토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79) 중 (사진: “ Stalker “, IMDb) 아쉽게도, 이제 영화를 이런 방식으로 살아내는 이들을 만나는 일은 매우 드물어졌다. 우리는 이미 포스트-시네마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영화의 황혼이며, 극장의 황혼이며, 영화를 보러 가던 마음의 황혼이고, 영화를 보고 난 뒤 스며오던 그 막막하고 어둡고 따스한 기분의 황혼이며, 그 기분을 나누는 대화와 관계의 황혼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슬프지는 않다. 쇠퇴해가는 매체만이 마지막 순간에 방출하는 구원의 힘(벤야민)을 믿기 때문일까? [5] 『세계에 대한 믿음』은 영화를 통해 인간과 세계와 맺는 관계를 고민해 온 한 시네-페이션트의 기록이다. 이미지가 우리를 통과하는 겪음의 시간이 어떻게 사유와 행위로 전환될 수 있을지를 묻는 소박한 실험. 이 책이 독자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지를 겪고 말할 수 있는 영감을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시네-페이션트가 또 다른 시네-페이션트에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당신은 무엇을 보는 것을 겪었는가? *** [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잔존하는 이미지』, 김병선 옮김, 새물결, 2022, 270쪽. [2] Georges Didi-Huberman, 1992. Ce que nous voyons, ce qui nous regarde , Paris. Minuit, 1992. [3] 페이션시는 행위능력(agency)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감수자의 위치, 경험, 힘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하는 힘이 아니라 겪는 힘이며, 겪음을 통해서 형성되는 잠재력이기도 하다. [4] 김홍중, “시대횡단의 징후학1.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사회와이론』 52, 2025. [5] 로절린드 크라우스, 『북해에서의 항해』, 김지훈 옮김, 현실문화A, 2017, 87쪽. 김홍중(사회학자) l 사회이론과 문학, 예술, 문화사회학을 전공한다. 그간 인간의 심적 활동이 어떻게 사회를 형성,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심리사회 연구를 수행해 왔다. 최근에는 21세기 생태파국에 대한 대안적 사회이론과 새로운 문화적 실천들을 탐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마음의 사회학』(2009), 『사회학적 파상력』(2016), 『은둔기계』(2020),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2024), 『가까스로-있음: 브뤼노 라투르와 파국의 존재론』(2025)이 있다.
영화의 여명기, 당시 ‘움직이는 사진’(motion picture)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던 에디슨 사(社)는 자신들이 제작한 단편 필름 작품의 저작권 등록을 위해 프레임 전체를 종이에 프린트해 미의회도서관에 납본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초기 무성영화의 이런 저작권 등록 방식은 실물 프린트를 통해 저작권을 등록하고 돌려받는 식으로 정책이 바뀐 1912년까지 지속되었다. 즉 1912년 이전까지 미국에서 영화는 사진의 형태를 취함으로써만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보면 번잡하기 짝이 없는 이런 저작권 등록 방식 덕분에 당대의 영화 상당수가 보존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화재에 취약한 질산염 필름(nitrate film)으로 제작되었던 초기 영화의 상영본과 오리지널 네거티브 대부분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동안, 미의회도서관에 보존되었던 이 ‘종이 프린트’(paper print)들은 자신이 소중하게 품고 있는 형상들의 그림자를 스크린에 다시 투사할 그날을 망각 속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디슨 사에서 제작한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용 단편 <재채기>(1894)의 종이 프린트. 총 45프레임. 저작권 등록(1894년 1월 9일)된 최초의 영화. 1942년, 당시 미의회도서관 저작권관리국 직원이었던 하워드 월스(Howard Walls)는 저작권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던 중 그때까지 방치되어 있던, 1894년부터 1912년 사이에 제작된 3,000여 편의 영화의 종이 프린트 더미들을 발견한다. 월스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의 지원을 얻어 종이 프린트들을 다시 셀룰로이드 필름에 옮기는 프로젝트에 착수했지만, 종이에서 필름으로의 매체 전환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이 프로젝트가 결실을 보게 된 것은 켐프 니버(Kemp Niver)를 통해서였다. 1950년대 초부터 니버를 통해 프로젝트가 다시 활성화된 이후 1965년 즈음에는 종이 프린트 대부분이 16mm 필름 프린트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월스와 니버, 그리고 종이 프린트에 얽힌 이 흥미로운 역사는 사실과 허구를 뒤섞은 빌 모리슨의 아름다운 단편 <그녀의 영화 The Film of Her>(1996)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종이 두루마리에서 되찾은 미국 역사>(1953, 19분) 종이 프린트를 16mm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전환하는 공정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당시 복원된 초기 영화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켐프 니버가 대본을 쓰고 연출했다. 미의회도서관 소장 종이 프린트의 복원 소식에 관심을 가진 이들 가운데는 미국 아방가드르 영화감독 켄 제이콥스도 끼어 있었다. 세인트존스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그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줄 요량으로 몇 편의 복원 프린트를 대여했다. 이 가운데 한 편의 영화가 특별히 그의 관심을 끌게 된다. 1905년에 빌리 비처(Billy Bitzer)가 촬영하고 연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릴짜리 작품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그것이다. 스콧 맥도널드(Scott Macdonald)와의 인터뷰에서 켄 제이콥스와 그의 부인 플로 제이콥스는 이 작품을 소재로 작업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플로 제이콥스 : 하지만 이 영화들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전에 필름들이 저희 집에 배송되어 왔고 그래서 그가 그것들을 살펴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보면서 이래저래 만지작거리곤 했는데 요즘에 신경시스템(Nervous System: 켄 제이콥스가 고안한, 잔상효과를 이용한 환각적 영사 방식)을 가지고 하는 식은 아니었고요, 그보다는 “와! 이거 봐, 내가 이 남자를 뒤로 움직여볼게!” 하는 식이었죠. 켄 제이콥스 : 점점 더, 저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하듯 이 필름들을 다루기 시작했어요. 그리고는 친구들을 불러 그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해 보였죠. 한 번은 퍼포먼스가 끝났는데, 제 친구인 화가 존 쿠스(John Koos)가 다가왔어요. 전 그때 완전히 기진맥진해져서는 벽에 등을 기대고 영사기 옆에 서서 어질어질한 가운데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물건들을 정리하려던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그가 말하길 “켄, 이거 끝내주는데! 이건 꼭 촬영해둬야 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려고 생각했어.”라고 대답했죠. 실제로 그럴 생각이었고요. 그가 제 어깨를 꽉 붙들면서 말했죠. “꼭 그렇게 해!”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방가르드 영화사(社)의 기념비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톰, 톰, 피리꾼의 아들(Tom, Tom, the Piper's Son)>(1969~1971)이다. 종종 이 작품은 1905년의 무성영화 필름을 소재로 작업한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작품으로 기술되곤 하는데 아주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한 기술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원본 영화의 필름 복제본이나 디지털 영상클립을 가지고 작업하는 통상적인 파운드 푸티지 작품들과는 달리, 제이콥스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반투명 스크린에 1905년 작 원본 영화를 구식 칼라르트-빅터(Kalart-Victor) 16mm 영사기로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뒤로 그리고 다시 앞으로, 때로는 깜빡이게, 때로는 멈추는 식으로 영사한 것을 16mm 카메라로 스크린 반대편에서 재촬영한 기록물을 토대로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작품은, 에이빈 뢰사크(Eivind Røssaak)가 지적한 대로, “아카이브적인 것과 퍼포먼스적인 것 사이의 인터페이스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윌리엄 호가스의 판화 <사우스워크 장터>(위)와 빌리 비처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의 첫 번째 장면(아래) 제이콥스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보는 이를 끌어당기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물성(materiality)에 집중하는 아방가르드 영화의 한 경향에 매혹을 느끼는 이라면, 때론 더 이상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필름의 세부를 확대해 입자(grain)를 감촉하게 하면서 미적 경험을 끌어내는 부분에 흥미를 가질 것이다. 혹은 매체를 가로질러 이루어지는 표현의 역사에 관심을 지닌 이라면,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rgath)의 판화 <사우스워크 장터 Southwark Fair>(1733)에 묘사된 광경이 빌리 비처를 통해 운동감을 얻고, (종이 프린트 형태로 미의회도서관에 보관되었다가) 제이콥스의 손을 통해 다시 떠들썩한 영화적 환영으로 되살아나는 과정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환각적 경험의 힘은 굉장하다. 원본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형상들을 멈추고, 확대하고, 깜빡이게 하는 영화적 안무의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관람자는 일시적으로나마 다른 우주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제이콥스의 영화가 도취의 경험에만 탐닉하면서 원본 영화를 무정형적인 시각적 덩어리로 재가공하고 있느냐 하면 또 그렇지 않다. 몇몇 평자들이 지적한 대로 제이콥스의 작품은 일종의 “세미나 같은”(뢰사크) 분석적 구조 — 원본 영화 전체를 보여주고, 이어 제이콥스 자신에 의해 꼼꼼히 탐사되고 변주된 영화를 보여주고, 다시 원본 영화를 보여준 후에 짧은 에필로그로 마치는 방식 — 를 취하고 있다.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의 전체적 구조에 실제로 자신이 학교에서 영화를 가르치는 방식이 반영되어 있음은 제이콥스 스스로도 인정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니콜 브레네즈(Nicole Brenez)와 같은 평론가는 언어에 기반을 둔 종래의 이론적 연구를 확장시키는 ‘시각적 연구’(visual study)의 탁월한 사례로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을 꼽기도 한다. 브레네즈에 따르면 제이콥스는 “기술적 선도라는 면에 있어서나 텍스트적이고 영화적인 표명에 있어서도 중요한 이론의 창조자”이다. 하지만 결국 <톰, 톰, 피리꾼의 아들>에 대해 가장 근사한 설명을 내놓은 것은 제이콥스 자신이다. “예술은 타격을 가해 당신을 수백만 조각으로 토막을 내고는 다음 타격을 위해 결합시킨다. 작품에는 질서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질서는 정신없는 경험을 자극하기 위한 방안(recipe)일 뿐이다.” 한편으론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는 것도 가능하겠다. 여기서 제이콥스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필름을 조작하면서 내뱉은 “와!”, 혹은 그의 16mm 퍼포먼스를 본 친구 존 쿠스가 내뱉은 “끝내주는데!” 같은 감탄을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시공간의 특이성 자체를 영화화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즉 여기서 제이콥스는 퍼포먼스라고 하는, 일시성과 현장성(actuality)에 속박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사건 자체의 경험을 영화적 장치로 포착하고 재구성한다는 대담한 모험에 뛰어든 것이다. 3D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기술이 본격적으로 우리의 경험을 재구조화하기 이전에 시도된, 전통적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를 통한 ‘경험의 복제’라는 실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영화사(史)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희유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 제이콥스의 야심은 카메라 앞에 놓인 사물, 인물, 혹은 사건과 같은 현실을 복제하고 이를 재구성함으로써 영화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익숙한 영화관(觀)을 이미 훌쩍 넘어서 있다.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퍼포먼스는 그것을 단순히 카메라에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경험의 질감과 양감을 상실한 건조한 사건으로 남게 된다. (예컨대 무대극을 현장에서 기록한 영상물들은 어쩐지 생기 없는 인형놀이와 같은 느낌을 준다.)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제이콥스가 1905년 작 원본 영화로 16mm 퍼포먼스를 행하고 있는 광경이나 그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동안 반투명스크린에 비친 영상을 단순히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이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동안 스크린에 비친 영상은 삼각대를 장착한 핸드헬드 카메라를 통해 다양한 크기로 촬영되었고 이후 이 촬영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정교하게 편집되었다. (반면 오늘날 신경시스템을 이용한 제이콥스의 퍼포먼스는 스크린에 비친 시각적 형상들을 고정된 카메라로 장시간 촬영해 편집 없이 상영용 디지털 버전으로 제공되곤 한다.) 이따금 제이콥스는 어둠 속 한가운데 조그맣게 빛나는 스크린을 보여주거나, 필름이 되감기는 광경을 보여주거나, 영사 중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그림자놀이를 하는 광경을 삽입함으로써, <톰, 톰, 피리꾼의 아들>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원본 영화 자체가 아니라 스크린에 비추어 재촬영한 영화의 표면임을 꽤 직접적으로 환기시키기도 한다. (아래 그림 참조) 1905년 원본 영화의 프레임 일부가 확대되어 보이다가(좌) 갑자기 어둠 속에서 빛나는 스크린 전체가 보인다(우) 필름이 되감기는 광경 스크린 왼쪽에 영사 도중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는 누군가의 손가락이 보인다 제이콥스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경험의 복제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가 그에 걸맞은 상영 환경을 영화적 장치로서 요구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이 영화는 통상적인 영화관 환경보다는 (제이콥스가 1905년 원본 영화를 가지고 그의 16mm 퍼포먼스를 행한 환경과 유사하게) 영사기가 영사실이 아닌 객석 가운데 자리한 상태에서 주기적으로 모터 소리를 공간에 퍼뜨려가며 스크린에 이미지를 투사할 때 비로소 과거의 퍼포먼스라는 사건 자체를 현재적 경험으로 되살려 놓는 것처럼 보인다. 국내에서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필름으로 처음 상영된 것은 2016년 10월 16일 문래예술공장에서였는데 —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을 주관하는 무빙이미지 포럼이 마련한 『영화에 관한 3개의 강연과 노트』 행사의 일환으로 —이때 상영환경 또한 바로 그러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상영될 때,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어느 순간 그것의 영사를 감싸고 있는 공간을 기묘하게 유령적인 활력으로 물들인다. 과거의 퍼포먼스라는 사건 자체가 지극히 감각적으로 현전하게 되지만 어디까지나 곧 부서질 것 같은 환영적인 느낌으로만 그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강의를 들을 때 으레 그러하듯) 때론 졸음을 부르기도 하는 나른한 긴장 속에 임하면서, 유령화된 공간 저편에서 빛나는 스크린으로부터 문득 생생한 유령들이 튀어나와 춤추는 것을 목도할 때, 그 춤이 절대적으로 지금/이곳(now/here)에서 펼쳐지는 어디에도 없는(nowhere) 춤이라는 것을 감히 부인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본문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켄 제이콥스의 작업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옥스퍼드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선집 『Optic Antics: The Cinema of Ken Jacobs』(2011)를 참고하면 좋다. 본문에서 인용한 에이빈 뢰사크의 글 「Acts of Delay: The Play Between Stillness and Motion in Tom, Tom, The Piper's Son」과 니콜 브레네즈의 글 「Recycling, Visual Study, Expanded Theory: Ken Jacobs, Theorist, or the Long Song of the Sons」 또한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서 인용한 인터뷰는 캘리포니아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스콧 맥도널드의 『A Critical Cinema 3: Interviews with Independent Filmmakers』(1998)에 수록되어 있다. 제이콥스의 영화세계 전반과 신경시스템 혹은 신경환등기(Nervous Magic Lantern)의 원리에 대한 개괄적인 안내를 얻고 싶다면 『씨네 21』에 실린 중앙대학교 김지훈 교수의 글 「 무한과 역설의 영화 」를 참고하길 바란다. 신경시스템의 원리를 활용한 제이콥스의 장편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 가운데 하나는 <로렐과 하디가 등장하는 시각적 익살광대극: 안녕, 몰리 Optic Antics Starring Laurel and Hardy: Bye, Molly>(2005)인데 이 또한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켄 제이콥스의 아들인 에이저젤 제이콥스(Azazel Jacobs)는 촉망받는 독립영화 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그의 <마마스 맨 Momma's Man>(2008)에는 켄과 플로 제이콥스 부부가 주인공의 부모 역으로 출연해 거의 그들 자신을 연기하다시피 한다. 1965년 이후 이들이 거주해 왔던 뉴욕 맨해튼 아파트(꼭대기 층)가 영화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어 흥미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