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선
- 감독
- 김진원
- 제작년도
- 2009
<변신> 올 여름에는 < 변신 >( 김홍선 , 2019)과 < 암전 >( 김진원 , 2018), 한국 공포영화 2편이 개봉했다. 8월 21일 개봉한 <변신>은 29일까지 1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들며 좋은 성적을 냈고, 8월 15일 개봉한 <암전>은 10만명의 관객이 아쉽기는 하지만 정통 공포영화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매년 여름마다 공포영화 2, 3편이 개봉하고 적어도 한 편 정도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호시절이 돌아오는 것일까? 아직 판단은 힘들지만 공포영화가 이전보다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암전> 최근 몇 년간 한국은 물론 해외의 공포영화들이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시작은 2013년 제임스 완의 < 컨저링 >이었다. 이후 애너벨 시리즈와 <더 넌> 등으로 확장된 컨저링 유니버스의 출발인 <컨저링>은 한국에서 226만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보통 5백만은 넘어야 히트작이라고 보겠지만 공포영화의 경우는 다르다. 한국에서 공포영화는 한국이나 해외 작품 가리지 않고 마이너 장르다. 한때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 장화, 홍련 >( 김지운 , 2003) 등의 히트작이 나오기는 했지만 지속된 흐름으로 정착되지는 못했다. 4, 5편의 공포영화가 경쟁하던 여름도 있었지만 시류에 맞춰 조잡하게 만들어낸 작품은 관객의 실망으로 이어졌다. 공포영화에 관심이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 프로듀서와 감독이 저예산으로 관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급조된 작품이 많았다. 공포영화의 ‘스릴’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정교한 테크닉이 필요할 뿐 아니라 ‘공포’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 무서운 분장과 깜짝 효과만으로는 공포영화를 만들 수 없다. <컨저링>이 성공한 후 2014년 < 애나벨 >(존 R. 레오네티)은 92만명, 2016년 < 컨저링 2 >(제임스 완, 2016)는 192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호러영화의 전통적인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리메이크한 ‘컨저링 유니버스’는 젊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장재현 감독의 < 검은 사제들 >이 544만명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사제복을 입은 미남이라는 컨셉을 앞세운 트렌디한 영화였고, 공포의 문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였다. 장르적 완성도가 높았다. 2017년에는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조던 필 감독의 < 겟 아웃 >이 213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해외에서 화제를 끌기는 했지만, 무명 감독 연출에 흑인들이 주연을 맡은 <겟 아웃>의 성공은 놀라운 일이었다. < 애나벨:인형의 주인 >(데이비드 F. 샌드버그>도 193만명의 관객이 들었다. 전작의 2배가 넘는 흥행이었다.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둔, 스티븐 킹 원작의 < 그것 >(앤드레스 무시에티)이 88만명이라는 아쉬운 성적이기는 했지만, 한국에서도 화제성을 가진 공포영화라면 대중성이 있음을 증명했다. 2018년에는 다양한 공포영화가 선보였다. 실화 괴담을 소재로 한 < 곤지암 >( 정범식 )을 267만명의 관객이 봤고, 컨저링 유니버스에 속하는 <더 넌>이 101만명이었다. 공포만이 아니라 예술영화의 범주로도 가능한 < 유전 >(아리 에스터)은 17만명이 들었다. 페이크 다큐 형식으로, 실재했던 곤지암의 폐건물을 찾아가는 내용인 <곤지암>은 한국 공포영화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특별한 스타나 화제 없이도 관객들은 흥미로운 공포영화를 선택한다. 또한 공포 장르는 중독성이 높아 한 번 좋아하게 되면 지속적으로 장르를 소비한다. <사바하> 올해는 <검은 사제들>의 장재현 감독의 신작 < 사바하 >가 239만명, < 겟 아웃 >의 조던 필 감독의 신작 < 어스 >가 147만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애나벨 시리즈 3번째 영화인 < 애나벨 집으로 >(게리 도버먼)도 48만명이 들었다. 모두 관객은 전작보다 줄었지만, 전작보다 약한 화제와 임팩트에도 이 정도의 거둔 것은 평가할 수 있다. 다음 작품의 완성도가 이 감독들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다. 공포영화는 메이저에서 성공을 거두기가 쉽지 않은 장르다.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등이 등장한 유니버설 호러의 성공 후에도 호러는 서브컬처의 영역에 속했고, B급영화로 주로 만들어졌다. 호러가 메이저로 복귀한 것은 윌리엄 프리드킨의 < 엑소시스트 >(1973)가 대성공을 거둔 덕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 <할로윈>, < 13일의 금요일 >, < 나이트메어 > 등 10대 관객이 좋아하는 슬래셔 호러가 인기를 끌었다. 90년대 들어 주춤하던 할리우드 호러는 슬래셔 호러를 변주한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1996), < 링 >(나카다 히데오, 1998)과 < 주온 >(시미즈 다카시, 2002)이 주도한 J호러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면서 잠깐 주목을 받았다. 최근 공포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공포영화가 선전하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의 영향이기도 하다. 할리우드는 물론 동남아에서도 요즘 공포영화는 약진하고 있다. 제임스 완 감독의 컨저링 유니버스가 대성공을 거두었고, <겟 아웃>과 <유전> 등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호러영화가 선전했다. 케이블 채널과 넷플릭스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는 9시즌까지 나온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를 비롯하여 넷플릭스의 <힐하우스의 유령>, 스티븐 킹 원작의 <제럴드의 게임> 등 저예산의 공포영화와 드라마가 탄탄한 인기를 과시한다. 또한 동남아인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대만 등에서 공포영화가 그 해 흥행 1위나 높은 순위에 오르는 등 인기를 끌고 있다. 전통적 호러 강국인 태국에 이어 <사탄의 숭배자>와 <드레드 아웃>의 인도네시아, <마신자> 시리즈와 <카르마>의 대만 그리고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에서도 활발하게 호러영화가 만들어지고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저예산이 가능하면서 확실한 마니아를 거느리는 호러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함께 21세기 들어 제작편수가 가장 많이 늘어난 장르이며 인기 장르가 되었다.
얼마 전 배우 이영진 과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영화 한 편이 있었다. <데우스 마키나>라는 영화다. 배우 이영진이 2000년대 중반엔 몸이 얼마나 지금보다 더 유연했던가, 액션 배우를 했다면 우마 서먼이 < 킬 빌 >에서 보여줬던 것 같은 뭔가를 보여줄 수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 도중에 나온 제목이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은 <데우스 마키나>가 대체 무슨 영화인가 싶을 거다. 물론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단어를 전 국민의 지적 유행어로 만든 진중권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아, 사실 진중권이 연출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영화가 나온다면 꼭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서울이 일베와 깨시의 전쟁으로 불타오르는 가운데 홀연히 연기를 뚫고 청와대 앞뜰에 착륙한 경비행기 한대. 거기서 진중권이 한 손에 고양이를 안고 라파엘로 그림 속 천사처럼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리고, 갑자기 신서울시에 출몰한 사도와 대결을 펼치는데…. < 천사몽 >(2001)과 < 성냥팔이 소녀 >(2002) 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만, 여하튼. <데우스 마키나>는 지난 2002년 기획에 들어가서 영화의 절반을 촬영해 놓고 갑자기 중단된 미완의 영화다. 이 영화를 ‘삐용삐용B무비’의 마지막에 꺼내놓는 이유? 완성됐더라면 < 천사몽 >이나 < 성냥팔이 소녀 >를 뛰어넘는 한국 B급 SF영화의 계보를 훌륭하게 완성했을 거라는 아쉬움 때문이다. 나는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이어지는 그 무시무시한 SF 블록버스터의 시대가 종종 그립다. 그 시기는 그러니까, 충무로로 쏟아져 들어오던 대기업의 엄청난 눈먼 돈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장렬하게 산화하겠노라는 이글이글한 야심이 베수비오 화산처럼 폭발하던 시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였고,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만듦새였으며, 하나같이 장르의 기본이 하나도 안 된 영화들이었다. 그런데도 그 시대가 그리운 이유는 정말이지 모두가 영화를 막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대기업이 시나리오 한줄 한줄 빨간 펜으로 검사하던 시절에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괴작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어디로 향하는지 누구도 모르는 영화적 에너지의 시대였다. 맞다. 바로 그 시기 때문에 지금 한국 영화계가 이렇게 된 거다. 그런데도 그 시기가 그립다니 이거 참 사람이 경망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리운 건 그리운 거다. 하여간 다시 <데우스 마키나>로 돌아가자면 이야기는 이렇다. 무대는 2003년이다. 서울의 한 고층빌딩을 과격한 테러 단체가 점거하는데, 한국 최대의 정보 통신 기업은 이걸 진화하기 위해 비밀 인간병기 조직을 투입한다. 작전을 완료하고 돌아가던 인간병기 조직의 미녀( 김정화 )는 헬기 추락으로 부상당하고, 이를 오토바이 광인 미남( 권상우 )이 집으로 데려가고, 미남과 미녀는 사랑에 빠지고, 그러나 인간병기인 미녀를 되찾기 위해 정보 통신 기업이 찾아오고, 그들을 질기게 쫓는 인간 최종병기는 배우 이영진 이었을 것이다. 만약 이 영화가 끝까지 만들어졌다면 그랬을 거라는 소리다. <데우스 마키나>를 만들다가 무릎을 꿇고 결국 사라진 감독은 이현하 다. 당시 영화잡지의 인터뷰들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 유학파고, 구로사와 아키라에 관한 석사논문을 쓴 적이 있고, 프랑스영화자유학교(CLCF)에서 영화 실무를 공부했다. 나로서는 그의 경력으로는 도무지 이 영화를 가늠할 수 없다. 다만 몇몇 인터뷰들을 통해 대충 <데우스 마키나>가 어떤 영화가 됐을지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 총몽 >, < 공각기동대 >, < 아키라 > 등을 적극 차용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건 사실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나온 SF영화 중에서 이 세 작품을 적극 차용하지 않은 영화는 거의 없으니까. 형식적인 면에서 이 감독은 “< 와호장룡 >이나 < 매트릭스 >와는 달리 원심력과 중력이 느껴지며, 움직임과 기하성을 조화시키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건 더더욱 모르겠다. 흠. 아마도 원화평의 안무와는 다른 안무를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아니다. 나는 지금 <데우스 마키나>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꿈을 능욕하려는 게 아니다. 정말로 나는 중간에 엎어져서 영원히 스크린에 걸릴 기회를 박탈당한, 만약 만들어졌다면 정말이지 끝내주게 삐용삐용한 B무비가 됐을 이 영화의 운명을 슬퍼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거의 100억대의 제작비를 투여한 <데우스 마키나>의 시나리오에는 민병천 의 < 내츄럴 시티 >를 연상시킬 만큼 순결한 나이브함이 깃들어 있으며, 만약 만들어졌다면 적어도 <내츄럴 시티>와 함께 ‘한국 영화가 가장 도전적이었던 시절’을 기념하는 유물로 남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잊혀진 <데우스 마키나>의 이야기를 꺼낸 김에, 나는 몇 편의, 여러분에게 보여질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사라진 몇 편의 장편과 단편을 거론하며 이 글을 마치고 싶다. <도살자>( 김진원 , 2007) 먼저 김진원 감독의 2007년 작인 <도살자>다. 부천영화제에서 상영한 뒤 사라진 이 장편 고문 호러영화는 돼지머리를 가진 괴물을 주인공으로 스너프영화를 찍는 도살업자에 대한 이야기로, 한국 영화에서는 익히 볼 수 없었던 피와 배설물, 내장의 스펙터클이 카메라 바깥으로 진동을 한다. 돼지 발정제를 먹은 (가히 < 텍사스 전기톱 대살륙 >의 악마를 닮은) 괴물이 남자 희생자를 강간하는 장면에서 당신이 만약 B급 고어영화의 팬이라면 흐뭇해 했을 지도 모른다. 동시에 김진원 감독은 스산한 서울 교외의 배경을 통해 어떤 서정성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도 성공한다. 나는 김진원 감독이 꼭 다시 호러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 < 편대단편 >( 지민호 , 2005) 또 언급할 영화는 지민호 감독의 2005년 작 < 편대단편 >이다. 350만 원으로 10년에 걸쳐 완성된 이 영화는 당시 미장센단편영화제에서 꽤 화제를 모았다. 혼자 연출, 제작, 각본, 편집, CG를 다 해내는 지민호 감독의 이 보기 드문 SF 단편은 일종의 ‘안티 < 스타워즈 >’로, 강제로 군에 징집된 뒤 기억을 삭제당한 식민지 행성의 젊은이들 이야기다. 물론이다. <편대단편>은 꽤나 허술하고, 종종 (이 분야의 오덕들이 만드는 영화가 대게 그렇듯이) 지나치게 진지하다. 하지만 지민호 감독이 좀 더 많은 투자를 받아 장편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이 생각을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 불청객 >( 이응일 , 2010)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영화는 2010년에 나온 초저예산 SF영화 < 불청객 >이다. 만년 고시생과 백수들이 택배 상자에서 튀어나온 외계인을 만나는데, 알고 보니 이 외계인은 루저들의 생명을 적립해 늙은 거부들의 수명을 연장해주는 일종의 고리대금업자로, 주인공들이 계약을 거부하자 자취방이 통째로 우주로 날아가버린다. 이건 한마디로 말하자면 ‘88만원 세대의 SF 어드벤처’로, <이나중 탁구부> 시절 후루야 미노루를 연상시키는 정말 기가 막히게 엇나가는 풍자 코미디로 가득하다. 아니, 나는 <불청객>보다 더 웃기는 영화를 2010년 이후로 한국 영화계에서 본 적이 없다. <불청객>이 소규모 개봉관에서 약간의 화제를 모은 뒤 이응일 감독은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 지구를 지켜라 !> 이후 가장 발칙한 데뷔작이었던 <불청객>의 감독이 아직도 메가폰을 잡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슬플 따름이다. 자, ‘삐용삐용B무비’를 마치며 내가 바라는 소원은 두 가지다. <데우스 마키나>의 묻혀있는 필름만이라도 다시 발굴해서 단관에서라도 상영을 하는 것, 그리고 이응일 , 김진원 , 지민호 에게 어떤 독지가나 어떤 진취적인 제작자라도 나타나서 제작비를 좀 지원해주는 것. 내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한국 B무비의 역사가 바뀔….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기념할 만한 B무비들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