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는 없겠지
- 감독
- 김진태
- 제작년도
- 1974
- 출연
- 최불암, 오경아, 신일룡, 황정순, 이대엽, 박암, 김왕국, 이예성, 최준, 이석구
1976년 쇼브라더스의 합작영화 <여신탐>(최훈·파오시에리, 1976)의 주연으로 데뷔한 신인 배우가 있다. 바로 태권도와 무협 액션이 가능했던 연기자 김정란이다. (그림1) <여신탐>(최훈·파오시에리, 1976) 국내 포스터 그녀는 다양한 액션과 대규모 폭파장면이 등장하는 블록버스터 영화 <여신탐>에 결코 운으로 캐스팅되지 않았다. 연기력과 액션 실력에 더해 해외 거주 경험과 여권까지, 이 영화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배우였다. 그녀가 22세에 <여신탐>의 주연으로 캐스팅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자.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 원로 방송작가 김희창 선생으로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 <열두냥짜리 인생>(이만희, 1963), <또순이>(박상호, 1963) 등의 영화 각본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어린시절부터 연출자와 배우들을 접해왔고 이런 점은 그녀가 영화나 방송계에 편입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부친인 김희창 작가는 워낙 엄격하고 작품당 휴지기를 길게 두는 편이라 실질적인 생활은 어머니가 이끌었다. (그림2) 부친 김희창 작가와 연출가 허규 1960년대 중반 한국해외개발공사가 동남아 등 해외 각국으로 기술 이민을 권장하던 때, 그녀의 어머니는 부르나이 여학교에 교사로 파견된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청소년기를 부르나이에서 보냈고 19세에 귀국한 뒤에는 외국으로 미술 유학을 결심하고 준비한다. 그런데 마침 다니던 화실 아래층에 연출가 허규의 극단 새문화스튜디오 연습실이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에 극단에 발을 디뎠고 문하생이 되었으며 수련과정을 거쳐 연극에 출연하게 된다. 1973년 새문화스튜디오와 극단 민예 소속 배우로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에 도시코 역으로, <고려인 떡쇠>에는 찌몽 역으로 출연하며 연기를 시작한다. <고려인 떡쇠>는 아버지인 김희창 작가의 작품이다. (그림3) 1973년 새문화스튜디오의 연극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의 한 장면 1974년에는 스승인 연출가 허규의 제안으로 KBS 오디션 프로그램 <신인탄생>에 출연해 입상하며 KBS 탤런트로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엄격한 부친인 김희창 작가는 그녀의 활동을 반대했고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으며 방송국 내에서도 거리를 두었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인 시절을 보내던 중 그녀는 태권도 도장을 다니게 된다. 태권도 도장에서 요가를 알려주는데 요가를 하면 살이 빠진다는 당시의 속설 때문이었다. 하다 보니 송판 두어 장과 기와 일곱 장 정도는 깰 실력이 되었고 국기원에서 초단 단증도 받게 된다. 꽃꽂이와 뜨개질이 아닌 태권도가 특기라 하니 기자들은 당장 과장을 섞어 그녀를 태권도 3, 4단의 실력자로 소개했다. 1974~5년은 태권도 액션 영화가 등장해 흥행했고 발차기가 아름다운 챠리 셀(한용철) 같은 신인 남자배우가 인기를 얻던 시절이다. 태권도가 특기인 그녀에게도 곧 기회가 찾아온다. 그녀는 1976년 태권도 도장 관장님의 다급한 부탁으로 해외에 태권도를 소개하기 위해 제작한 문화영화에 출연한다. 원래 예정되었던 여자선수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대신 나갔던 것인데 ‘KBS 탤런트 김정란, 태권도 문화영화 <동과정>에 출연’이라는 소식이 작게 신문에도 실리게 된다. 얼마 후 영화사인 우성사로부터 연락이 왔고 긴급하게 우성사 사무실에서 오디션을 보게 된다. 홍콩 쇼브라더스로 가 영화를 찍을, 액션이 되는 여배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우성사 사무실에는 김용덕 대표와 홍콩영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던 배우이자 <여신탐>에 함께 출연한 남석훈이 그녀 앞에 있었다. (그림4)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남석훈과 김정란. 뒤편으로 불타는 홍콩 쇼브라더스의 오픈세트가 보인다. 우성사에서는 오디션이랄 것도 없이 함께 인삼차를 마시며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다. 그녀가 외국 유학을 준비 중이라 이미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김용덕과 남석훈은 더욱더 그녀를 반겼다. 당시는 여권을 발급받으려면 외국에 거주 중인 신원보증인의 초청장과 재무보증 등이 필요해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너 외국 갈 수 있니?” “네”. “당장 갈 수 있니?” “네” “그러면 준비해라” 너무 쉽게 끝난 것 같지만 사실 그녀는 우성사가 찾던 배우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오디션 프로 <신인탄생>에서 검증한 연기력과 태권도 실력은 물론 여권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홀로 홍콩 쇼브라더스로 출발한다. 홍콩 쇼브라더스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오픈세트에는 강과 산, 탑, 폭파시킬 별장과 여러 건물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촬영은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사용해 이뤄졌다. 가히 동양의 할리우드였다. 그리고 그녀는 쇼브라더스 영화의 주연배우 대우를 톡톡히 받았다. 숙소와 자동차, 의상과 분장 그녀에게 제공된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면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다가 그녀를 스튜디오 분장실로 데려갔다. 그녀가 분장과 의상을 마치면 때로 옆 방으로 안내되었고 그곳에서 기자들과 간단하게 촬영과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다시 차에 오르면 그녀를 촬영장으로 데려갔다. 촬영장에서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있어 그녀는 감독의 지시대로 연기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연기가 끝나고 그녀가 카메라 뒤로 빠져나오면 현장의 전담 매니저가 김정란 이름이 새겨진 의자를 펴주며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이 보장되었고 촬영은 늘 일정대로 진행되었다. (그림5)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한 장면. 한국 형사 고은미(김정란)가 벨트에서 화살을 꺼낸 뒤 석궁을 쏘는 장면이다. (그림6)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한 장면. 한국 형사 고은미(김정란)가 오토바이 액션을 보여주고 있다. <여신탐>은 일본과 홍콩, 한국의 여형사로 구성된 특별수사반이 스코틀랜드 출신 형사반장과 함께 보석밀매와 납치를 일삼는 범죄조직을 소탕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여형사들에게는 각자의 장기가 있는데 김정란이 연기한 한국형사 고은미는 석궁과 태권도가 특기이다.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국내장면에서 범죄조직에 위장 잠입한 그녀는 한국의 악당들을 태권도로 홀로 소탕하며 몸을 사라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후반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석궁을 쏘며 몸을 날리는 등의 화려한 액션이 등장한다. (그림7)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 홍콩 포스터 <여신탐>은 홍콩개봉 당시 영어 제목이 <Deadly Angels>였는데, 세 명의 미녀들이 악당을 퇴치한다는 설정이 1976년에 방영된 미국 abc 방송국의 드라마 <Charlie's Angels(미녀삼총사)>와 유사하다. 당시 쇼브라더스는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킹콩>(1976)의 흥행을 보고 <성성왕>(1977)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쇼브라더스는 국제적인 흥행의 흐름을 발 빠르게 파악하고 제작, 배급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한국의 영화사들도 이런 흐름에 공동제작 혹은 투자의 형태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림8)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 홍콩 촬영 중 이한상 감독에게 출연 섭외를 받은 김정란. 1) 그녀는 내심 홍콩에서 촬영을 마친 후 바로 유학을 가려 했지만 촬영 중에도 영화출연 섭외가 쇄도했다. <여신탐> 촬영 중 홍콩의 명감독 이한상으로부터 <백사전>(이한상·최동준, 1978)의 출연제의를 받았지만 노출장면 때문에 거절했는데 그 역할은 대만 배우 임청하에게 돌아갔다. 국내 영화사들의 계속된 출연요청으로 그녀는 <여신탐>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특명>(김선경, 1976),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 <정무문(속)>(남석훈·초석, 1977), <금호문>(김선경, 1977), <용왕 삼태자>(최동준, 1977) 등 쉴 새 없이 작품을 이어갔다. (그림9)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 포스터. 검은 옷을 입은 이가 상관영봉이고 흰옷을 입은 이가 김정란이다. 상관영봉의 화려한 손모양이 포스터에도 드러난다. 1977년 출연한 <소림사 흑표>는 당시 무협영화의 히로인이었던 대만 출신 배우 상관영봉과 공동 주연한 작품이다. 상관영봉은 이미 <소림사 18동인>(1976) 등의 영화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무협 배우였고 쿵푸 액션을 하다 보니 이 작품에서는 그녀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다. 쿵푸는 손동작이 화려하고 사전 동작이 많다 보니 카메라 앞에서 주목을 받기 쉬운 반면 태권도는 발차기 위주여서 액션을 열심히 할수록 오히려 화면에서 얼굴이 멀어진다는 점 때문이다. 일단 중국식 의복을 입으면 연기가 달라졌다. 액션을 하려면 목을 한 바퀴 돌려 긴 머리카락을 감아서 정돈한 뒤 옷을 접고 대사를 하고 손동작을 하는 식으로 사전 동작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얼굴이 화면에 더 오래 나갈 수 있었지만 태권도는 한번 자세를 잡으면 바로 발차기를 하고 주먹이 나가는 식이었다. 이런 동작의 차이 때문에 화면에서 돋보이기 힘들어 그녀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으로 기억한다. (그림10)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의 한 장면. 검은 옷을 입은 상관영봉과 흰 옷을 입은 김정란 쿵푸가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는 액션의 합을 그대로 외우는 방식으로 촬영했다. 국내촬영은 장비도 열악하고 준비도 오래 걸리다보니 무조건 몰아찍기를 해야 되었기에 한번 찍을 때 최대한 길게 촬영했다. 그러니 액션도 길어져 합은 열 동작 이상이었다. 사전에 액션 연습도 없이 촬영 직전 현장에서 처음으로 열 동작 이상을 알려주면 그대로 외워 촬영했고 한 동작이라도 틀리면 사고와 부상으로 이어졌다. 큰 사고는 <금호문>(김선경, 1977)에서 발생했다. 소품이 부족해 촬영용 칼이 아닌 육중한 무쇠칼을 사용했던 게 화근이었다. 상대 배우가 무쇠칼로 액션을 하다 타이밍을 놓쳐 그녀의 머리를 내려치게 된 것이다. 머리에 둘렀던 진주 장식이 터지고 머리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촬영지가 고창 정읍의 선운사다 보니 열악한 교통상황에서 급히 갈 수 있는 병원조차 없었다. 제작진은 담배를 으깨 피가 나는 머리를 지혈한 뒤 그녀를 리어카에 실어 가축병원으로 옮겼다. 마취도 없이 환부를 꿰매는 것으로 처치를 마친 후 현장으로 돌아온 뒤 그녀는 다음날부터 촬영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미 개봉일이 잡혀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현장 스태프들은 그나마 진주 머리 장식이 있어 큰 화를 면했다고 위로했지만 그녀는 부은 얼굴로 고통 속에서 촬영을 이어갔다. 촬영을 마쳐갈 즈음 꿈을 꾸고 찾아온 어머니와 함께 겨우 서울로 올라와 제대로 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안전장치 하나 없던 열악한 촬영 환경에서 사고의 위험은 도처에 있었고 사고 후의 수습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던 시절이다. 그녀뿐 아니라 무협액션장르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 모두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영화사나 작품의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협액션영화 촬영현장의 조건이나 대우는 국내가 홍콩이나 대만보다 훨씬 열악했다. 당시 무협액션영화에 대한 국내 영화계의 천대가 촬영현장의 열악함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림11) <금호문>(김선경, 1977)의 한 장면. 사고에서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진주머리 장식이 눈에 띈다. 대만에서는 로웨이가 제작한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과 <오룡대협>(진지화·김진태, 1978)을 촬영했다. 두 편 모두 성룡과 함께 출연했는데 <사학비권>에서는 성룡에게서 권보를 빼내기 위해 소년처럼 남장을 하고 접근하는 역할이었다. 홍콩이나 대만에서 진행되는 합작영화의 경우 사전에 시나리오를 보기가 힘들었다. 보통 합작영화 제작 시 한국 영화사가 전담했던 한국 로케이션 장면의 대본 정도만 미리 받아볼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대만의 영화사가 전담한 대만 촬영분량에서는 역할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현장에서 캐릭터를 파악하고 연기해야 했다. <사학비권> 또한 대만 촬영현장에서 당일 그날의 의상을 보고서야 남장소년 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장 통역조차 한국말이 서툰 화교라 대부분 눈치껏 해석하고 연기해야 했다. 가령 “여자인데 남자로 분장했어. 배고파. 빵 먹고 싶어.” 라는 통역된 감독의 말만 듣고 ‘남장을 하고 빵을 훔쳐먹어야 하는 장면’이라 판단하고 연기했다. 그러다 옆에서 한국말을 조금 아는 성룡이 “귀여워” 라고 첨언하면 그녀는 귀여운 표정이나 코를 치는 연기를 더하는 식이었다. 정보 없이 현장에서 눈치껏 연기하다 보니 촬영 중인 화면의 사이즈를 알리도 만무했다. 그 덕에 자신이 찍히지 않는 쇼트에서도 혼자 열심히 연기해 감독이 몇 장면 더 찍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12)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의 한 장면. 소년처럼 남장한 모습이 잘 어울린다. (그림13)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의 한 장면. 비호성주의 딸 황주로 돌아온 모습이다. <사학비권>과 <오룡대협>의 대만 촬영현장은 의사소통이 어려울 뿐 분위기나 대우는 좋았다. 분야별로 준비가 잘 되어있어 진행이 순조로웠고 식사를 굶거나 밤을 새는 경우도 없어 좋은 컨디션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촬영장에서 그녀 뒤에는 언제나 발받침과 차를 담은 보온병이 졸졸졸 쫓아왔는데 키가 작은 그녀를 위해 전담 스태프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발받침을 가지고 따라다녔다. 뿐만아니라 대만 제작팀은 당시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스폰지 속굽이 있는 키높이 부츠를 특별히 제작해줄 정도로 세심하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해줬다. (그림14) <오룡대협>(진지화·김진태, 1978) 대만 촬영현장. 방수일, 성룡, 진지화 감독, 김정란. 김정란의 오른쪽에는 촬영장에서 항상 그녀를 따라다니던 발받침과 보온병이 있다. 하지만 액션에 대한 부담은 여전했다. 덤블링을 하고 2층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정도의 액션은 직접 연기해야 되었고 그 수준을 넘는 경우는 대역이 대신했다. 중국에는 무술 인구가 많아 대역을 찾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한국에는 무술이 가능한 키 작은 사람이 없어 난감할 때가 많았다. <혈육마방>(김영효·포학례, 1979)의 후반부에서 그녀는 보물이 든 궤를 차지하기 위해 남자배우들과 결투를 벌이다 죽임을 당하는데 결투 내내 맞고 쓰러지는 액션을 해야 했다. 대역이 있다 해도 어지간한 액션은 모두 해야 되었기에 비가 오면 아파서 울 정도로 늘 근육통에 시달렸다. (그림15) <혈육마방>(김영효·포학례, 1979) 촬영현장에서 김정란과 대만의 무술감독.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상황에 난감해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녀는 몇 편의 멜로드라마 장르의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김수용 감독의 <화려한 외출>(김수용, 1977)이 그중 한 편이다. 술집 작부와 정신이상자라는 1인 2역을 맡았는데 조연이긴 했지만 개성 있는 역할이라 선뜻 응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파에 시달린 인물을 천연덕스럽게 표현해냈다. 무엇보다 연기만 하면 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고 ‘어우, 나도 막 이런 연기가 되네.’ 라며 신나서 한 역할이었다. (그림16) <화려한 외출>(김수용, 1977)의 한 장면 <신궁>(임권택, 1979)에서는 술집 주인으로, <짝코>(임권택, 1980)에서는 짝코의 애인 역으로 출연해 인상적인 연기를 남겼다. <짝코>는 출연 분량이 많지는 않았으나 능청맞은 연기로 어둡고 진지한 극의 분위기를 재치있게 살렸는데 그녀는 이 작품으로 대종상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림17) <짝코>(임권택, 1980)의 한 장면 연기에 재미를 느낀 그녀는 작은 역이라도 열심히 참여했다. <물보라>(김수용, 1980)에서는 동네 아낙으로 출연했는데 바닷가에서 여자들이 뛰어와 서는 장면에서 그녀는 제일 끝에 서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녀에게까지 오지 않았다. 촬영 전, 다른 배우들에게만 땀처럼 보이도록 얼굴에 물을 뿌려준 상태였다. ‘나도 땀을 흘렸어야 되는데…’ 걱정이 된 그녀는 얼른 바위틈 웅덩이로 뛰어가 고여있는 물을 찍어 얼굴에 뿌렸다. 그걸 본 김수용 감독이 웃으며 “정란이까지 찍어줘”라고 해서 출연장면을 사수할 수 있었다. (그림18) TBC 어린이 드라마 <달려라 차돌이>(1977)의 한 장면 (그림19) TBC 드라마 <대춘향전>(1980)의 한 장면. 왼쪽 끝이 향단 역의 김정란, 오른쪽 끝이 춘향 역의 이경표이다. 그녀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텔레비전 방송 활동도 겸했다. TBC 어린이 드라마 <달려라 차돌이>(1977)에는 정순누나 역으로, TBC 특집 드라마 <대춘향전>(1980)에는 향단역으로 출연했으며 꾸준히 방송 섭외를 받았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자 집안에서 그녀의 결혼을 서둘렀고 1981년 결혼 후 남편의 반대와 육아로 자연스럽게 은퇴하게 된다. 그녀는 영화계에서 약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굵직한 무협 액션 영화에 출연하며 1970년대 액션 여배우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녀의 작품활동은 국내 무협액션영화의 특징과 여성 연기자의 조건, 합작영화의 제작 관행 등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그녀의 지난 활동이 앞으로도 꾸준히 조명받기를 바란다. 1) 경향신문 1976년 9월 20일 8면.
한국영화사에서 사극의 전성기는 1980년대였다. 하지만 ‘전성기’라는 표현은 이중적이다. 1980년대는 1970년대부터 하락하기 시작한 한국영화 산업이 장기 침체로 접어든 시기. 사극은 1960년대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이 주도한 이후 충무로를 대표하는 ‘대작’ 장르였다. 그런데 1980년대에 오면, 사극은 과거의 위용에서 멀어지며 양적 팽창에 전념한다. 그리고 그 중심은 ‘에로티시즘 사극’이었다. 모두 ‘에로’를 지향한 건 아니었다. 전통의 올곧은 계승은 있었다. 사극의 서브 장르 중 하나인 ‘여인 잔혹사’는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 이두용 , 1984) < 자녀목 >( 정진우 , 1985) < 씨받이 >( 임권택 , 1987) 등의 수작들을 보유했다. ‘궁중 사극’의 흐름도 건재했다. 이두용 감독은 신상옥의 < 내시 >(1968)를 나름의 스타일로 뛰어나게 리메이크 했다. 신상옥 의 영향력은 여전했는데 그의 < 연산군 >(1961)과 < 폭군 연산 >(1962)을 잇는 < 연산군 >( 이혁수 , 1987)과 < 연산일기 >( 임권택 , 1988)가 등장했다. 계유정란을 다룬 < 사약 >( 김효천 , 1984), 당시 사대부와 왕실을 농락했던 여인의 이야기 < 어우동 >( 이장호 , 1985) 등도 만들어졌다. 임권택의 <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1985)도 빼놓을 수 없는 ‘사대부 사극’이다. 배창호 는 < 황진이 >(1986)에서 미학적 실험을 했고, < 박철수의 헬로 임꺽정 >( 박철수 , 1987)도 당대 사극의 독특한 지점이었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 <물레야 물레야> <자녀목> <어우동> <연산일기>. 1980년대 ‘A급 사극’의 계보. 여기까지는 1980년대 나름의 ‘A급 사극’ 리스트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사극’, 즉 ‘B급 사극’, 좀 더 구체적으로 ‘에로 사극’ 이야기를 하려 한다. 1980년대 에로 지형도에서 사극이 처음부터 야한 기운을 얻은 건 아니었다. 1980년대 초엔 홍콩과의 합작이나 위장합작을 통해 만들어진 무협 사극이 쏟아졌고, < 팔불출 >( 고응호 , 1980)처럼 코미디나, 호러 장르 혹은 종교 영화 등과 결합되었다. 변화의 조짐은 1980년대 중반에 보였다. <어우동>과 < 변강쇠 >( 엄종선 , 1986)는 에로의 원투 펀치와도 같은 결정타였다. 특히 <변강쇠>는 모든 것을 규정했다. 이 영화의 변강쇠( 이대근 ) 이후 절륜한 정력을 지닌 거구들이 스크린에 횡행했으며, 옹녀( 원미경 ) 이후 독거미처럼 남성을 옭아매는 치명적 성욕의 소유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역사와 민속의 장이었던 사극은 바야흐로 적나라한 욕망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변강쇠>의 시작은 의외로 근엄하다. 18세기 영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변강쇠>는 이 영화의 의의를 설명하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성 윤리의 해학적 의미의 참뜻을 에로티시즘으로만 간과하려는 상업성을 탈피하면서, 그 시대의 유랑 서민들의 웃음과 눈물을 서사적 영상미로 승화시켜 무분별한 성은 곧 자기 파멸이라는 교훈을 던짐으로써, 우리 고전의 진정한 의미를 오늘에 재조명하고자 한다.” <변강쇠>는 1980년대 에로 사극의 모든 것이었다. 이 영화는 변강쇠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옹녀의 유랑으로 끝을 맺는다. 다소 중언부언하는 서론이지만, 판소리 <가루지기전>을 원작으로 하는 <변강쇠>는 에로티시즘을 해학과 교훈의 방식으로 다루겠다고 선언한다. 해학이라 한다면 정사로 산이 뒤흔들리며 옹녀 때문에 줄초상이 나 한 마을 남자의 씨가 마르는 식의 과잉된 성적 표현일 것이다. 한편 교훈이라면 술에 취해 장승을 뽑은 변강쇠가 신령에 시달리다 죽게 되는, 정력의 과시가 불러온 비극일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에로 사극은 교훈보다는 해학에 방점을 찍으며 < 고금소총 > 시리즈( 지영호 , 1988~95) < 호걸 춘풍 >(이혁수, 1987) < 이조 춘화도 >( 박호태 , 1988) < 껄떡쇠 >( 김진국 , 1989) < 후리꾼 >(최거영, 1991) 등 ‘호색한’이 이곳저곳을 누비며 방사를 벌이는 영화들이 이어진다. 여기서 에로 사극의 위대한(!) 점은 단지 남자의 욕망만 만족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변강쇠>에서 더욱 흥미로운 캐릭터는 옹녀다. 변강쇠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의 딜레마는 언제나 욕정의 결핍 상태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그녀와 관계를 가진 남자는 모두 죽는다. 남성의 죽음을 담보한 섹스의 히로인 옹녀. 그녀는 언제나 겁탈이나 보쌈의 위협에 시달려야 하는 수절 과부의 반대편에 있는 공격적 섹슈얼리티의 여성이다. <변강쇠>의 첫 장면, 옹녀는 첫날 밤에 스스로 옷고름을 풀고 남성의 옷을 벗기고 불을 끈다. 첫날 밤 장면은 과거의 사극에서 숱하게 반복되었지만, <변강쇠>의 옹녀는 그 관습을 과격하게 파괴하는 적극성을 보여주며, 이어지는 정사 신에서도 그녀가 섹스를 리드한다. 그리고 결국엔 자신과 궁합이 맞는 남자를 직접 찾아 나선다. 이대근은 1980년대 에로 사극의 간판 스타였다. (왼쪽부터) <호걸 춘풍> <고금소총> <가루지기>의 이대근. 변강쇠뿐만 아니라 옹녀 캐릭터도 이후 후손들을 거느리며 이른바 ‘궁합 장르’, 즉 강한 양기와 음기를 지닌 남녀가 드디어 만나 완벽한 궁합을 이룬다는 내용의 영화들이 등장한다. < 속 변강쇠 >(엄종선, 1987) < 변강쇠 3 >(엄종선, 1988)를 비롯 < 가루지기 >( 고우영 , 1988) < 합궁 >( 남기남 , 1988) < 고금소총 2 >(지영호, 1990) < 색녀도 >(박호태, 1990) 등이다. 옹녀가 영감을 준, 에로 사극의 또 다른 흐름은 ‘유랑녀 서사’다. 이것은 <어우동>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마치 ‘호스티스 멜로’를 연상시킨다. 가난, 집안의 몰락,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공동체의 추방…. 여러 이유로 떠도는 여성은 결국 몸을 팔게 된다. 여성의 운명성을 에로티시즘과 결합한 컨셉트로, < 됴화 >( 유지형 , 1987)는 아예 저주를 타고난 여성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후 < 호호전 >(박호태, 1988) < 들병이 >( 유진선 , 1989) 등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에로티시즘’이라는 강렬한 이미지가 있긴 했지만, 에로 사극 역시 사극 장르의 한 갈래였고, 그런 의미에서 시대적 테두리를 벗어나진 못했다. 즉, ‘계급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이 장르의 많은 것을 규정했고, 여기서 만들어진 긴장 관계가 오히려 에로티시즘 강화하기도 했다. 이른바 ‘씨받이 장르’는 대표적이다. 반드시 남자를 통해 대를 이어야 했던 조선 시대, 양반들은 대를 잇기 위해 소실을 두거나 오로지 아들 생산을 위한 도구인 ‘씨받이’를 두곤 했다. 이 설정에서 수많은 변주가 이뤄졌다.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가 대표적. <변강쇠> 시리즈의 엄종선 감독이 만든 < 사노 >(1987)은 숨겨진 수작인데, 나이 든 양반이 하녀 오월(원미경)를 건드리자, 그녀와 결혼을 약조한 머슴 들판(이대근)은 오월을 데리고 도주한다. 이외에도 < 잦은 방아야 >( 김병기 , 1989) < 살꼬지 >( 김인수 , 1989) < 요화경 >(박호태, 1988) < 소녀경 >(박호태, 1992) 등이 있으며 < 빨간 앵두 > 시리즈는 3편(박호태)에서 갑자기 사극으로 선회해 씨받이 이야기에 <변강쇠> 콘셉트를 결합한다. <변강쇠>로 신드롬을 일으킨 엄종선 감독, 이대근, 원미경이 다시 만난 <사노>는 숨겨진 수작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서늘하면서도 통렬하다. 씨받이만 있었을까? 아니다. 대를 잇지 못하는 집안에서 그 문제가 남자 쪽에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마님과 은밀하게 통정할 ‘씨내리’가 등장하기도 했다. 주로 튼실한 머슴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두용 감독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이 분야 최고의 걸작. 하지만 이후 에로틱해지면서 약간은 <변강쇠> 톤으로 변했고, <소녀경>에선 씨받이와 씨내리가 관계를 맺는 단계에 이른다. 이외에도 < 홍두깨 >( 김준식 , 1990) < 씨내리 >(남기남, 1993) 등이 있다. <씨받이>처럼 여성의 육체(자궁)을 어떤 도구로 이용했던 과거를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도 있었지만. 씨받이와 씨내리가 등장하는 영화들은 그 자극적 캐릭터로 인해 대부분 선정주의와 소재주의로 치달았다. 그러면서 개척된 분야가 이른바 ‘회춘녀’ 장르다. < 어울렁 더울렁 >( 차성호 , 1986)은 그 시작. 이른바 ‘목밀녀’, 쉽게 말하면 ‘대추녀’ 순이( 김문희 )가 주인공이다. 대추녀는 양반들이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둔 스무 살 정도의 하녀로, 아침에 여성의 그곳에 대여섯 개의 대추를 넣었다가 저녁에 꺼내먹으면 젊은 여성의 기를 받아 정력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씨받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여성의 육체를 도구화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종종 몸을 묶는 SM 관계의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다소 변태적인 설정이지만, “올해 같은 흉년에 살아남기가 쉬운 줄 아느냐!“라는 양반의 호통 앞에선 순순히 응할 수밖에 없었다. ‘유랑녀’처럼 ‘대추녀’도 가난 때문에 몸을 팔아야 했던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 목밀녀 >(차성호, 1988) < 회춘녀 >( 방순덕 , 1989) < 춘화춘풍 >( 최기풍 , 1990) <소녀경> 등 적잖은 영화들이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건 <이조 춘화도>나 <고금소총> 같은 영화들인데, 이 영화에서 긴 세월 동안 병을 앓던 여성들은 섹스를 통해 그 병을 치유한다. ‘회춘녀’의 반대편엔, 여성의 묵은 성욕을 해소시켜 주던 ‘육봉남’들이 있었던 셈이다. (왼쪽) <홍두깨>는 씨내리 장르의 영화다. (오른쪽) ‘대추녀’ 장르의 시작인 <어울렁 더울렁>. 이 장르는 종종 SM 컨셉트로 흐르곤 했다. 가부장적 계급 사회가 만든 또 하나의 캐릭터는 수절하는 젊은 과부다. 언제나 은장도를 꺼내 들고(하지만 자결하진 못한다), 열녀문 기둥을 어루만지는(결국 그것은 무너지게 된다) 그녀들은 1980년대 에로 사극의 가장 모순적 인물들이었는데, 그들은 시대의 규율에 의해 한없이 욕망을 억눌러야 했지만 결국 본능을 선택한다. < 마님 >(김인수, 1987)는 이 분야의 전형적인 작품. 마님(김문희)은 몇 년 째 수절 중이며 열녀문을 하사 받은 정숙한 여자다.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절을 찾아 불심에 호소하지만 욕망은 사그러들지 않는다. 하인( 백일섭 )은 마님을 사랑하지만 이때마다 마님은 “이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게냐!” “그래도 이놈이!”라며 물리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얼싸안게 된다. 김인수 감독의 <마님>. 마님과 머슴은 결국 맺어진다. 그러나 과도한 억압은 반드시 저항과 전복을 낳게 된다. 욕망은 절대 억압할 수 없기 때문인데, < 사방지 >( 송경식 , 1988)은 레즈비어니즘을 통해 이러한 테마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흉악범과 광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방지( 이혜영 )는 겉모습은 여성이지만 남성을 지닌 양성구유다. 절에서 성장하는데 예불 드리러 오는 청상 과부 이소사( 방희 )는 사방지를 거두어 몸종으로 데려가지만, 그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섹스 파트너로 삼는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죽음을 선택하는 비극으로 끝나는데 <사방지>는 수절하는 마님, 계급 사회의 모순, 여성의 운명성 같은 사극의 관습을 계승하면서도 파격을 추구하며 ‘여인 잔혹사’의 서사에 균열을 낸다. 이외에도 < 이조 여인숙명사 청상계 >( 윤석봉 , 1991)나 <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양병간 , 1993)처럼 과부의 욕망을 해방시킨 ‘안티 열녀문’ 콘셉트의 사극도 있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계급 사회 속에서도 욕망에 충실한 여성 캐릭터들이 만만치 않게 존재했다는 점이다. 양반집 마님이 허벅지에 바늘을 찌르며 긴긴 밤을 외롭게 보낼 때, 옹녀나 도화 같은 ‘타고난 성적 파워’를 지닌 여성이나 무당이나 주모 혹은 하녀들은 거침 없이 방으로 남성을 끌어들였다. 1980년대 가장 파격적인 사극 <사방지> 마지막으로 언급할 이 시기 에로 사극의 특징은 느닷없는 판타지다. < 변강쇠 2 >(엄종선, 1987)에서 변강쇠(김진태)가, <가루지기>에서 옹녀(김문희)가, 소변으로 폭포를 만든 후 수많은 영화들이 이 엄청난 과장법을 예사롭지 않게 모방했다. 시간 파괴의 경향도 흥미로운 지점인데, <호걸 춘풍>에서 춘풍(이대근)은 기생들과 디스코를 추며 “백 년 후에 유행할 춤”이라고 말하고, < 장미 속의 살모사 >(강구연, 1989)의 머슴 살모사( 조형기 )는 ‘라 밤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마이클 잭슨의 문 워크를 추기도 한다. 강구연 감독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1993)에서도 이런 파격을 시도하는데, 조선 시대 여인들이 캉캉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 고금소총 3 >(지영호, 1995)과 < 애마와 변강쇠 >( 김문옥 , 1995)는 타임머신 콘셉트를 이용해, 배지기나 변강쇠 같은 캐릭터가 현대의 필리핀과 서울에 나타나 자신의 파워를 과시한다. 1980년대 사극의 파격적인 상상력들. (상단) <빨간 앵두 3>과 <애마와 변강쇠>. 현대로 온 배지기와 변강쇠. (하단 왼쪽) <장미 속의 살모사>에서 기생은 현대식 속옷을 입고 있다. (하단 오른쪽)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의 캉캉 춤. 당대 에로 사극의 시그니처 숏인 ‘방뇨 신’. (상단 왼쪽) 그 시작은 <변강쇠 2>였다. (상단 오른쪽) <고금소총>에서 달비의 강력한 방뇨. (하단 왼쪽) <합궁>에서 남자의 힘찬 방뇨와 그것을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 (하단 오른쪽) <미지왕>(1996. 김용태)은 1980년대 에로 사극의 방뇨 신을 패러디한다. 어쩌면 1980년대 충무로 지형도에서 에로티시즘 사극은 가장 과격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가장 욕망에 충실했으며,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작품을 양산했던 장르였을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기획 영화가 등장하면서 사극은 10년 가까이 종적을 감추었고,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에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 이재용 , 2003)나 < 왕의 남자 >( 이준익 , 2004) 등을 통해 ‘웰메이드’ 방식으로 다시 등장한다. 하지만 과거 ‘B급 사극’의 저렴하면서도 진솔한 상상력이 되돌아오진 않았고, < 가루지기 >( 신한솔 , 2008) 정도의 시도가 있을 뿐이었다. + 이로써 작년 말부터 시작된 1980년대 장르 영화에 대한 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 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그리고 가끔씩 피드백을 주셨던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지면을 열어주신 한국영상자료원에게도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또 다른 콘셉트로 옛날 영화들을 정리할 날을 기약하며, 10회에 걸친 연재를 닫는다.
배우 이해룡 은 1936년 서울 성수동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만주로 간 아버지가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그는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자랐다. 그는 손이 귀했던 외가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개구쟁이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광복이 되었고, 성동중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6.25전쟁기에는 피난과 귀경의 반복이었고, 이러한 불안정한 삶은 호기심 많던 그를 공부보다는 다른 길로 이끌었다. 휴전 후인 1954년 대동상고를 중퇴하고, 마도로스가 되어 새로운 세상과 만나기를 꿈꾸며 부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선장이 되기 위해서는 대학교육을 마쳐야 했으니 다시 공부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무렵 김명제 촬영감독을 만나 윤봉춘 감독을 소개받게 된다. 호기심 많고 놀기 좋아하는 구술자에게 많은 문학예술인들이 모이는 명동은 매력적인 공간이었고, 늘 새로운 상황을 만나야 하는 영화 일은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했다. 1955년 < 처녀별 >( 윤봉춘 , 1956)과 < 피아골 >( 이강천 , 1955)의 단역 겸 제작부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고, 싹싹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김승호 , 양일민 , 조항 , 성소민 등의 선배들과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 논개 >(윤봉춘, 1956)에서 장군의 비서인 사동 역할을 맡게 되는데, 장군의 부인이 운명했다는 비보를 알리는 장면을 촬영했다. 이때 윤봉춘 감독은 이해룡 에게 눈물을 흘리며 들어오라는 연기를 주문했고, 배우로서 재능이 있었는지 눈물 연기를 무난하게 소화해냈다. 이후 < 유관순 >(윤봉춘, 1959)에서의 유관순 오빠 관옥 역할 등을 하면서 본격적인 연기자의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만희 감독과의 인연과 ‘17클럽’으로 만난 영화 동반자들 이해룡 을 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한 사람이 윤봉춘 감독이라면 배우와 스태프들과의 관계, 동료애를 통해 영화 현장의 참맛을 알게 한 사람은 이만희 감독이다. 5.16 직후인 1961년 말 구술자는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해병연예대에 소속되어 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물이 많이제작되었는데 연예대 소속이었던 구술자는 군 생활 내내 수많은 전쟁영화에 출연했다. 특히 < 살아있는 그날까지 >(이만희, 1962)에 출연한 구술자를 눈여겨본 이만희 감독은 이후 대부분의 영화에 그를 캐스팅했다. 이때 이만희 감독을 중심으로 장동휘 , 최무룡 , 허장강 , 박노식 , 문정숙 , 태현실 , 이대엽 , 독고성 , 장혁 , 김운하 , 최성 , 구봉서 등의 배우들과 서정민 촬영감독, 전정근 음악감독, 시나리오작가 백결 과 한우정 , 그리고 구술자 등으로 조직한 ‘17클럽’은 ‘이만희 사단’이라 불리며 이만희 감독이 연출한 대부분의 영화를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공유하며 영화에 대한 견해를 나누고, 영화에 대한 꿈을 함께 꾸었다. 이 시간을 통해 동료애를 돈독히 하고,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옆에서 지켜보게 되면서 배우라는 직업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만날 수 없는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해룡 의 구술은 이 작업을 통해 얻은 또 하나의 재산이 되었다. 영화계 안팎으로 보여준 끊임없는 영화 열정 1960년대 홍콩과의 합작영화 붐이 일던 시기 신필름의 전속배우가 되어 1969년 홍콩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 13인의 무사 >(장철, 1970), < 철낭자 >( 고버슈 , 1971) 등의 합작영화에 출연했고, 다시 대만으로 가 < 5천리 대도망 >( 강대선 , 유가창, 1974), < 금강혈인 >( 김진태 , 1981) 등의 합작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이 시기의 구술을 통해 홍콩 쇼브라더스의 촬영 환경과 합작영화, 위장 합작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당시 합작영화가 만들어지는 풍경을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다. 한국영화의 불황기라 하는 1970~80년대 이해룡 은 한국과 홍콩, 대만을 오가며 촬영을 했다. 점점 어려워지는 한국영화계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작품 활동을 했고, 임권택 , 이두용 , 김호선 감독 등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인정받는 감독들과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2001년 배창호 감독의 < 흑수선 >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화에 출연하지는 않고 있지만 대신 현재는 1957년부터 몸담았던 영화배우협회 내 복지회 활동을 통해 원로 배우들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에서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수천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스태프, 배우로 영화에 참여했다. 그중에서 몇몇 사람은 이름을 날리기도 하고, 후대에까지 기억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레딧에만 존재한 채 잊혀갔다. 한국영상자료원은 구술 사업을 통해 한국영화 전면에서 목소리를 낸 영화인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어갔던 스태프들, 조연들의 목소리를 통해 지금까지 주도적인 몇 명의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한국영화사의 빈틈을 메우고, 새로운 시각을 형성해 다양한 차원에서 한국영화를 바라보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 이해룡 은 낯설지만 친숙한 배우로서, 한국영화를 만들어간 한 명의 구성원으로서, 따뜻한 시선으로 배우의 삶 전체를 바라보고 스스로 살아가는 영화인으로서, 후대 연구자들에게 한국영화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영화의 중요한 지점들을 미시사적으로 포착해낼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