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자
- 감독
- 신은섭, 김찬슬
- 제작년도
- 2012
- 출연
- 신은섭, 예주영, 양준희, 김이진
해방 후 스무 번째 배출된 배우 최남현(崔湳鉉)은 해방 후 스무 번째 영화계에 진출한 배우이다. 주증녀(<돌아온 어머니>(이규환)), 황정순(<여성일기>(홍성기)), 주선태(<청춘행로>(장황연)), 황해(<성벽을 뚫고>(한형모))와는 1949년 데뷔 동기인 셈이다. 그가 첫 선 보인 <돌아온 어머니>는 남편이 원양어선을 타고 나간 사이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던 아내(김연실 분)가 아편중독으로 죽고, 원양어선에서 돌아온 남편은 고아가 된 아들을 어렵게 찾게 된다는 얘기다.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내 역을 맡은 김연실(1911~1997)이 월북하고 최남현은 연극으로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가 영화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기영(金綺泳)의 감독 데뷔작 <죽엄의 상자>(1955)부터였다. 이후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1955)을 비롯,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 <유전의 애수>(유현목, 1956), <아리랑>(김소동), <잃어버린 청춘>(유현목), <봉이 김선달>(이상 1957, 한홍렬), <돈>(김소동), <자유결혼>(이병일), <인생차압>(이상 1958, 유현목), <오 내고향>(김소동), <젊은 아내>(이강천),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이상 1959, 전창근), <흙>(권영순, 1960), <어부들>(강대진, 1961), <인목대비>(안현철, 1962), <또순이>(박상호, 1963), <혈맥>(김수용, 1963), <추풍령>(전범성, 1965), <하숙생>(정진우, 1966), <싸리골의 신화>(이만희, 1967), <망각>(이만희, 1967), <내시>(신상옥, 1968) 등에 주연과 조연으로 기용된다. [사진] 영화 <돈>에서의 최남현, 왼쪽은 배우 김승호 최남현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최무룡 주연)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진섭은 그의 역할에 대해 “전 화면을 통해 압권이며 무대경험에서 쌓은 액팅이 오버함이 없이 적으나 자연스러운 연기” ( 「능한 연출, 능한 연기 / ‘유전의 애수’를 보고」, 『한국일보』, 1956.07.26) 였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런 호평에 힘입어 1년도 안 돼 타이틀 롤을 맡은 <봉이 김선달>로 ‘최남현이라는 배우의 하나의 지위를 주장’ (「비교적 정돈된 야담영화 / 최남현의 ‘봉이 김선달’」, 『한국일보』, 1957.10.25) 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서게 된다. 이후 탈세와 횡령을 일삼다 법망에서 벗어나려 거짓 자살극까지 꾸민 아우(김승호)에게 "생눈 파먹은 날도적"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형 이중건(<인생차압>),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정책에 맞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스승(<이름 없는 별들>), 드센 아내의 성화 속에 품팔이로 어렵게 살아가는 남산기슭 해방촌의 ‘3.8따라지’ 깡통영감(<혈맥>), 국군 낙오병을 숨겨줘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결단을 내려야하는 산골마을의 강노인(<싸리골의 신화>) 등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진] <혈맥>에서의 최남현과 김승호(왼쪽) 이를테면 <봉이 김선달>, <인생차압> 등에서 보인 해학적인 요소, 처녀를 유린하고, 남의 애인을 가로챈 <유전의 애수>의 건달(인수 역), 피폐한 농촌에서 고리대금으로 농민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돈>의 억조, 딸(윤정희)을 왕의 후궁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을 시켜 딸이 사랑하는 하급 관리의 아들(신성일)을 성불구자로 만드는 <내시>의 김찬판 등 악역과 <이름 없는 별들>의 역사 교사 송선생,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싸리골의 신화>의 주인공 강노인이 보인 카리스마적 면모가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최남현. (사진제공 : 김종원) 그러나 최남현은 배우로서 절정기에 이른 1968년 어느 날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져 카메라 앞에 다시 나서지 못하게 된다. 10여 년에 걸친 투병생활 끝에 1977년 유현목 감독의 <문>을 계기로 재기, <한네의 승천>(하길종, 1977), <고가(古家)>(조문진, 1977), <족보>(1978, 임권택), <심봤다>(정진우, 1979), <짝코>(임권택, 1980), <물보라>(김수용, 1980) 등에 출연했으나 예전과 같은 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화의 물결 속에 전통을 고수하려는 <고가>의 주인공 김노인, 아집에 사로잡힌 <물보라>의 지초시, 뜬 구름 같이 살아온 <심봤다>의 조연, 인생을 달관한 <짝코>의 배역에서 열연하였다. [사진] <물보라>에서의 최남현. 아래는 하용수 광물성의 카리스마와 최다 출연 기록 노경에 접어들면서 기세가 많이 꺾이긴 했으나 누가 뭐라 하든 최남현은 개성이 강한 성격파 배우였다. 그의 연기에서는 쇳소리가 난다. 갱도의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광물성의 낮은 울림- 최남현 연기의 장점은 누구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내려 한 데에 있다. (김종원, 「인물영화사 / 중후한 조연 최남현」, 『일간스포츠』, 1987.07.08) 하지만 그에게는 1미터 75센티의 훤칠한 키와 상대를 꿰뚫어 보는듯한 눈매, 중후한 외모가 풍기는 무게감이 있는 반면 유연성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그 대신 뛰어난 연기감각과 형상력,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이런 결과는 결국 제1회 부일영화상 조연남우상(1958, <인생차압>), 제4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화부문 대상(1967, <싸리골의 신화>), 대종상 남우조연상(1966, <추풍령>) 등의 수상으로 나타났다. [사진] <싸리골의 신화>에서의 최남현. 왼쪽 박기태 최남현은 1918년 1월 7일 김소월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최찬수와 박이윤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나온 후, 법관이나 은행가를 지망하는 급우들과는 달리 무대를 동경했다. 해방 이듬해에 월남하여 극예술협회(신협의 전신)에 들어갔으나 한동안 잔심부름을 하며 따분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런 그에게 출연의 기회가 온 것은 1944년 스물여섯 살 때였다. <은하수>라는 연극이었다. <범선 천우호(帆船 天佑號)>(1949)의 무대에 오를 무렵 영화 <돌아온 어머니>에 발탁됐으나 6.25전쟁으로 후속작이 이어지지 못했다. 그 대신 <명우 추해당(秋海棠)>(상록극회, 1951), <통곡>(극협, 1952) 등 연극 활동을 하며 어려운 전란기를 보냈다. 영화 촬영이 계속된 뒤에도 <한강은 흐른다>(신협, 1958) 등에 출연하여 연극과의 인연을 끊지 않았다. 공연이 없는 날엔 주선태, 박암 등 극협 단원들과 술로 회포를 풀었다. [사진]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에서의 최남현 최남현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외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80년대 이후에는 술과 마작, 화투놀이로 소일하다시피 했고, 장기간의 투병으로 고급주택 등 모든 재산을 날렸다. 말년에는 양로원 생활을 하며 병상에 있는 아내까지 뒷바라지하다가 1990년 1월 7일 일흔 한 살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마지막 출연작은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 사건을 다룬 신상옥 감독의 <마유미>(1990, 단역)였다. 30대 초반부터 노역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스크린을 누볐던 최남현은 40여 년 동안 720여 편에 출연하는 최다 기록을 세웠다. *
① 표관(飄館) 1915년에 설립된 영화관으로 인천부 신정(新町) 18번지에 있었다. 영화관을 세운 이는 인천여관을 운영하던 시미즈 슈조(淸水周藏)이다. 개관 당시 황금관을 경영하던 하야가와연예부에서 영화관 운영을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정관을 소유하던 닛다연예부가 운영권을 인수했으며 뒷날 대정관 소유주 닛다 고이치(新田耕市)가 소유권마저 인수하여 동생인 닛다 마타헤이(新田又平)에게 경영을 맡겼다. 표관은 인천을 대표하는 영화관으로 1937년 한해 관람객이 18만 2640명, 입장료 수입이 48,132원에 달했다. 1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닛다 마타헤이, 지배인은 오오타(太田時雄)였으며 672석의 영화관이었다. 2 해방 후에는 문화관으로 개칭되어 시영으로 운영되다가 한국전쟁 시 소실되었다. ② 애관(愛館) 인천의 대표적인 조선인 극장이다. 1921년 초, 인천부 경정 238번지에 김성근(金成根)이 세웠다. 3 축항사(築港社)의 흥행권을 인수하여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용하가 운영하던 1923년 1월부터는 알렌상회와 계약을 맺고 활동사진관으로 운영했다. 4 조선인 경영의 영화관으로 조선의 연극과 악극 등도 공연했다. 1926년 애관을 인수한 김윤복(金允福)은 1927년 신축을 결정하고 약 천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르네상스식 외관의 영화관으로 개축했다. 5 1928년 10월 1일부터 외화 수입사인 기신양행(紀新洋行)이 경영권을 인수하여 직접 운영하였다. 1936년 1년간 약 12만명의 관람자와 28,284원의 입장수익을 얻었으며, 6 1937년에는 1년간 관람자 총 14만 5천명, 43,480원의 입장료 수입을 얻었다. 7 기신양행이 운영하던 애관은 그 흥행권이 일본인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인천키네마를 세운 미쯔이 토라오(三井寅男)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③ 락우관(樂友館), 인천동보영화극장(仁川東寶映畫劇場), 인천키네마(仁川キネマ) 1937년 인천부 신정 19번지에 지어진 2층 콘크리트로 형태의 영화관으로 처음 이름은 락우관(樂友館)이었다. 극장을 세운 사람은 당시 애관을 경영하고 있던 미쯔이 토라오(三井寅男)였다. 「한국극장사」를 쓴 박노홍에 의하면 표관과 마주한 자리에 애관을 경영하는 미쯔이가 극장을 짓자 표관의 주인 닛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전한다. 8 1938년 11월 31일부터 도호(東寶)영화를 상영하게 되면서 이름을 인천동보영화극장(仁川東寶映畫劇場)으로 바꾸었다. 이후 인천동보영화극장은 인천키네마(仁川キネマ)로 개칭되었는데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미쯔이 토라오(三井寅男), 지배인은 와카야마(若山幸吉)였다. 정원은 370석으로 그리 크지 않은 영화관이었다. 해방 후 적산 처리되었으며 이름을 동방극장으로 바꾸었다. ④ 인천영화극장(仁川映畫劇場) 1942년 7월 5일 개관한 인천의 문화영화 전용관으로 2층 벽돌 건물이었다. 위치는 인천부 용강정 22번지, 지금의 동인천역 앞에 위치했다. 설립자는 인천지역에서 활약하던 일본인 실업가 아오시마(靑島鋪作)였다. 1943년 당시 흥행주 역시 아오시마, 지배인은 후루카와(古川文道)였다. 해방 후 적산 처리되었으며 보통 인영(仁映)극장이라 불렀다. ⑤ 개성좌(開城座) 개성좌는 1912년 10월 개성부 소로동(小路洞)에 이기세(李基世)와 일본인 토미타((富田重治)가 함께 세운 극장이다. 초기에는 청년파일단(靑年派一團)이나 이화단(以和團)과 같은 신파극단의 무대로 활용되었으며 이기세가 세운 유일단(惟一團)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1930년 10월 개축된 개성좌에서는, 9 1932년 이동식소형극장의 공연이 계획되기도 했다. 10 1932년부터 최익모, 박철희, 김찬우 등이 맡아 경영하던 개성좌는 1935년 5월 박봉진, 공진태, 김재삼, 백순성, 이우균 등 5인이 3천원씩 내서 총 1만 5천원으로 극장을 인수한 후 발성영화장치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영화 상영에 나섰다. 11 하지만 낡은 시설과 설비는 개성 관객들의 원성을 샀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시라이(白石誠一)이며 지배인은 고바야시(小林榮)였다. 이들은 창씨를 한 조선인이었다. 해방 당시 개성좌는 560석의 객석을 보유한 개성 유일의 영화관이었다. [자료] 개성좌 개축 피로연예회(《조선신문》, 1930.10.29) ⑥ 풍창관(豊昌館), 수원극장(水原劇場) 수원의 최초의 극장은 1913년 11월 개관한 풍창관(豊昌館)이다. 수원 성내 유지들이 세웠다. 1918년 2월 수원군 기생조합의 연주회를 개최한다는 기사가 남아 있다. 풍창관이 사라진 후 수원지역에 들어선 극장이 수원극장이다. 수원좌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이 극장은 1920년대 초반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공연과 영화를 상영하던 수원극장은 1933년 10월, 양규룡(梁奎龍)을 대표로 하는 주식회사로 조직을 변경하고 극장을 신축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다(苧田甫), 지배인은 미야모토(宮本日出夫)이며 객석 수는 494석이었다. 해방 이후 까지 존속했다. ⑦ 애원극장(愛園劇場) 경기도 안성읍 석성리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6년 안성 유지 박형병(朴衡秉)이 작고한 동생 박항병(朴恒秉)의 별호인 애원(愛園)이라는 이름으로 극장을 지었다. 건축비는 2만원이며 2층 벽돌 건물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형병(창씨명 朴原衡東), 지배인은 나카이(中井一成)였으며 객석 수는 556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다음은 황해도의 극장이다. ⑧ 해주좌(海州座), 해주극장(海州劇場) 해주에 가장 먼저 만들어진 극장은 해주좌(海州座)로 1913년 무렵 설립되어 10년 정도 운영되었다. 낡고 오래된 해주좌를 대신하여 1925년 10월 31일 해주극장이 만들어졌다. 해주 지역의 유일한 흥행장이었다. 1934년 10월 24일 신축에 버금갈 정도의 개축을 단행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히구치(樋口泰貫), 지배인은 아오야마(靑山)이며 객석 수는 6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겸이포좌(兼二浦座), 겸이포극장(兼二浦座) 겸이포읍 본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20년대 초반부터 신문지상에 이름이 발견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후시야(伏屋三治), 지배인은 기타지마(北島七郞)이며 객석 수는 62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⑩ 욱좌(旭座), 공락관(共樂館) 사리원 지역에는 1920년대 초반 무렵 욱좌(旭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욱좌가 사라지고 난 이후 사리원에 들어선 극장이 공락관(共樂館)이다. 1932년 5월 개관한 공락관은 야스다(安田靜雄)가 설립했는데, 부지 300평에 건평 140평, 2층 양관 모양으로 영화관 겸 극장으로 건설되었다. 공사비 2만 5천원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다, 관리인은 이시가와(石川晩得)이었다. 객석 수는 560석이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⑪ 연안극장(延安劇場)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횡정리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7년 무렵 연안극장 조합에서 설립했다. 1943년 운영자와 조합간의 갈등으로 조합직영으로 바뀌었다. 조합에서 선정한 대표는 쿠니모토(國本丸農)였다. 객석 수는 560석이었으며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수좌(壽座) 황해도 신천읍 교화리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4년 11월 신천 유지 박성률(朴聖律)이 1만여원의 비용을 들여세웠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다카시마(高島勇), 지배인은 시라가와(白川不二雄)이다. 객석 수는 550석이었다. ⑬ 태평극장(太平劇場) 황해도 안악읍 훈련리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3년 안악 유지 박봉서(朴奉瑞)가 7천원의 예산으로 건축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박봉서(창씨명 山本奉瑞)이며 객석 수는 456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1. "이제야 채산(採算)맛는 인천의 흥행업계", 《동아일보》, 1938.02.02. 2.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3. " 인천독자위안", 《조선일보》, 1921.04.01. 4. "인천에 상설 애관", 《조선일보》, 1923.03.21. 5. "인천 애관극장 십일에 낙성(落成)", 《매일신보》, 1927.10.14. 6. "영화관출입인원 삽(卅)여만명 돌파", 《동아일보》, 1936.01.11. 7. "이제야 채산맛는 인천의 흥행업계", 《동아일보》, 1938.02.02. 8. 김의경·유인경 편, 『박노홍의 대중연예사 1』, 연극과인간, 2008, 271쪽. 9. "開城座改築披露演藝會", 《朝鮮新聞》, 1930.10.29. 10. "이동식 소형극장 개성서 첫 공연, 오는 이십칠일에", 《중앙일보》, 1932.02.25. 11. "유일한 오락기관 개성좌를 매수", 《중앙일보》, 1935.05.08. [자료] 《매일신보》, 1942.07.02. 인천영극개관(仁川映劇) 개관 인천부 상인천역전(前)에 건축 중이든 인천영화극장(정원 600)은 이번에 준공되어 7월 9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었다. 뉴-스, 문화영화 등 전문관으로 전선에서 제 7번째의 신관이다. [자료] 《매일신보》, 1927.10.14. 인천 애관(愛舘)극장 십일에 낙성(落成) 【인천】 지난 십일에 낙성된 인천극장 『애관(愛館)』은 넉넉히 800명을 수용할만한 우미(優美)한 『루네상스』 식으로 인천 조선인 시가에 일(一) 이채(異彩)를 방(放)하게 되엇스며 내용의 설비도 완비무결(完備無缺)하야 조선 전도(全道) 어느 곳의 그것에 비하여 손색이 무(無)한바 관주 김윤복(金允福) 씨는 공익에 관한 『모됨』에는 무료로 제공할 터이라고 언명하얏다하며 사용료가 태고(太高)한 가무기좌(歌舞伎座)를 사용하다가 실패만 당하든 인천 극계(劇界)로는 동관의 신축으로 새로운 서광을 엇게 되엇더라. [자료] 《매일신보》, 1937.05.05. 인천에 신극장, 금추(今秋)까지 낙성(落成) 【인천】 십여만 인구가 살어잇는 대(大) 인천에 오락기관으로는 조선인으로는 애관(愛館), 내지인으로는 표관(瓢館)의 이개소 ᄲᅮᆫ인데 금번 인천부 신정(新町) 19번지에다가 송전좌시(松田佐市) 씨 경영으로 거(去) 28일 극장 건축 착공식을 성대히 거행하얏는데 늦어도 금추에는 준공을 보게 되리라고 한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4.11.30. 신천(信川) 수좌(壽座) 낙성(落成) 【신천】 신천(信川) 상설극장 수좌(壽座) 공사 준공은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그간 전반 시설이 완성되엿슴으로 지난 이십육일 락성식을 거행하엿다. [자료] 《매일신보》, 1932.05.29. 사리원 안전(安田)씨가 공락원(共樂館)을 신축, 입일일(卄一日)부터 개업 【사리원】 사리원 대중적 오락기관으로 당지(當地) 안전정웅(安田靜雄)씨는 희생적 봉공(奉公)사업으로 구(舊) 식산은행지점 적(跡)에 영화관 겸 극장 상설 공락관을 신축하야 지난 이십일일 오후 삼시부터 관민 백여명을 초대하여 신축피로연을 거행한 후 동일 오후 육시부터는 가무기(歌舞伎) 중촌리엽(中村鯉葉) 일행 30여명을 초청하여 시즙흥행(柿葺興行)이 잇섯으며 동이십삼일, 이십사일에는 경성에 있는 조선연극사(社) 일류 배우를 청하여 일반에게 개연하얏다. 본 공락관은 안전씨(安田氏)가 전연 영리사업으로 건축한 것이 안이고 지우(知友)의 간망(懇望)으로써 봉사적 신념하에 거대한 공비(工費)를 투자하야 신축하얏다. 차(此) 건물 급(及) 설비의 개요는 여좌(如左) 一, 위치 사리원 본정통(本町通) 二, 공사 소화 육년 십일월 기공, 칠년 오월 준공 三, 구조 ᄲᅡ라벗-도 식 관 이 계(階), 건(建) 일백사십평 四, 공비 이만오천원 五, 설비 영화상설 겸 극장으로 최신식 고급영사기 이대, 시사기 일대, 전기무대 회무대 도구 일식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5.05.08. 유일한 오락기관 개성좌를 매수, 유지(有志) 오씨(五氏)가 합자(合資)회사를 조직, 활동사진상설관으로 【개성】 부제 실시 후 상수도(上水道), 하수도(下水道) 부설과 시구개정(市區改正) 등의 급속도적 개성부의 토목사업으로 개성의 도시미관(都市美觀)을 향상하고 잇는 신흥도시 개성의 인구(人口)는 5만 이상을 포용하고 전서에서 멧재 안가는 대도시이나 그날그날 각자의 근로한 피로의 위안을 바들만한 곳 즉 오락기관(娛樂機關)이라고는 옥돌장(玉突場) 일개소, 마작(麻雀)구락부 2개소와 개성좌(開城座)라는 극장(劇場) 일개소 밧게는 없어서 항상 부민 일반이 개성좌를 더욱 내용을 충실히 하야가지고 활동사진상설관을 맨든다면 그들의 피로된 정신을 하로 몃시간에 자연의 위안을 밧고 질길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늣겨오든 중 이에 대하여 크게 동감을 일으킨 박봉진(朴鳳鎭), 공진태(孔鎭泰), 김재삼(金在三), 백순성(白順成), 리우균(李雨均) 오(五)씨는 3천원씩 출자하여 1만 5천원의 합자회사(合資會社)로 조직하야가지고 지난 사월 십일 동 극장을 매수하야 전부 수리를 거듭하고 일즉이 개성좌에 설치하지 못하던 (로라) 발성영화활동사진긔(發聲映畵活動寫眞機)를 사천 오백원에 매수하야 오월 일일에 장치하고 시사(試寫)를 행한바 성적이 대단 량호하야 삼일부터 일반 펜에게 공개하고 잇는데 이 긔계는 전선에서도 별로 보지 못하든 최신(로라)긔라 하며 앞으로는 명편의 영화만 특약하야서 공개한다고 하는 바 이로부터 신흥 개성도시도 한 개소의 오락기관일 망정 모든 시설이 완비되여서 5만 부민의 유일한 위안 할 곳이 될 것이라 한다.
조선극장은 1922년 11월 6일 개관하여 1936년 6월 11일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인사동 입구에 위치했던 영화관이다. 조선극장의 설립자는 명월관 지배인 황원균(黃源均)이다. 그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11월, 독립운동 진영에 합류하기 위해 상해로 떠나려던 의친왕(義親王)의 행적을 일제경찰에 밀고하여 의친왕의 상해 망명을 좌절시킨 장본인이었다. 이 사건으로 경찰부장으로 승진한 치바 료(千葉了)는 의친왕의 행적을 제보하여 대동단(大同團) 단원들을 체포하는데 도움을 준 황원균에게 평소 바라던 극장 신설 허가를 내주었다. 뿐만 아니라 요코하마에 근거지를 둔 동양생명보험의 경성지사장 야자와 긴지로(矢澤近次郞)를 통해 극장 설립 자금까지 융통할 수 있게 도왔다. 황원균의 조선극장 설립 허가는 강점 이후 조선인에게 주어진 첫 번째 경우로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얻어낸 그 자체로 대단한 특혜였다. 황원균은 과거 연흥사가 있던 자리에 공사비 5만여원, 총비용 14만원으로 지상 3층 건물을 짓고 이름을 조선극장이라 정했다. 이렇게 완공된 조선극장은 총 8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으며 객석 내부에는 박스석을 설치하고 엘리베이터를 설비했으며 옥상에는 레스토랑까지 갖추었다. 1922년 11월 6일 개관된 조선극장에서는 개관공연으로 윤백남이 연출한 만파회의 <장발장>과 경성 다섯 권번 기생들의 공연, 명창 이동백의 독창, 그리고 몇 편의 서양영화가 상영되었다. 개관식이 있은 후 황원균은 쇼치쿠영화사, 다이카츠(大活, 大正活映)영화사와 특약을 맺어 프로그램을 충실히 하는데 애썼으며 서양영화 수입사를 운영하던 알렌상회에게 잠시 극장운영을 위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채권자인 요코하마 동양생명보험의 야자와는 개관 3개월 후부터 원금 상환을 독촉했고 원금을 상환할 수 없었던 황원균은 야자와에게 조선극장을 빼앗기게 된다. 야자와는 조선극장을 부동산회사인 도쿄건물회사에 매각한다. [자료] 조선극장 개관피로 광고(《동아일보》, 1922.11.7.) 도쿄건물회사가 소유하게 된 조선극장을 운영한 주체는 한때 황금관과 유락관을 경영한 바 있고 1923년 <춘향전>을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둔 하야가와 마쓰타로(早川增太郞)의 동아문화협회(東亞文化協會)였다. 동아문화협회에서는 1924년 7월 13일 내부공사를 마치고 조선극장을 활동사진관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하야가와는 그 사이 <비련의 곡>, <흥부놀부> 등을 제작하여 조선극장에서 상영하였다.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인수한 하야가와는 1925년 9월 예전 자신이 운영했던 황금관의 운영권까지 획득하여 조선 내 두 군데의 영화관을 운영하는 수완을 보였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불어 닥친 극심한 불황과 1926년 실시된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에 의거하여 부과된 검열수수료로 인한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 건강까지 악화되자 하야가와는 결국 조선에서의 생활을 접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8년 7월 30일 교토에서 사망했다. 1926년 9월부터 하야가와를 대신해 조선극장을 운영한 이는 변사 김조성(金肇盛)이었다. 그는 하야가와가 세운 동아문화협회에서 활동하면서 동아문화협회에서 제작한 영화 <춘향전>의 이도령으로 출연했던 인물로 조선극장 경영에서 물러난 하야가와를 대신해 조선극장을 맡았다. 그는 공격적인 영업으로 업계에 파장을 일으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금 유용을 이유로 운영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1926년 12월에는 차영호(車泳鎬)가 조선극장의 새로운 운영자가 되었다. 상설관 운영 경험이 없던 그는 1927년 2월 나운규의 <풍운아>를 상영하면서 김조성을 주임변사로 다시 불러왔으며 1927년 6월에는 현철(玄哲)과 김영식(金榮植)을 공동경영자로 끌어들였다. 현철을 중심으로 잡지발간, 배우양성, 영화제작을 도모했지만 공동운영자들의 경영 미숙과 운영자와 관원들 사이의 갈등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 없이 문을 닫게 된다. 1927년 9월부터 조선극장은 주임변사 김조성이 이태진을 공동 경영자로 끌어들여 운영되었다. 단성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안정적인 운영을 이어오던 조선극장은 1928년 12월 주임변사이자 공동경영자인 김조성이 필름 임대업자인 임수호에게 210원에 필름을 임대해 놓고 이태진에게 370원의 돈을 이중으로 받아 160원을 착복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다시 복잡한 상황으로 빠지게 된다. 결국 조선극장은 문을 닫았고 이태진은 조선극장의 운영권을 안봉호에게 인계하였다. 안봉호는 1929년 8월 신용희를 지배인으로 두고 극장운영을 시작했는데 신용희는 기존의 영화 상영만 이루어지던 영화관에 재즈밴드단과 여성무용단을 조직하고 영화상영 사이에 레뷰 공연을 넣어 다른 영화관이 갖지 못한 경쟁력을 갖추려 노력했다. 하지만 조선극장에서 제작하던 영화 <젊은이의 노래>에 대해 악단장 윤창순이 저작권을 위배했다며 항의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조선극장 측에서는 악단을 해산하고 레코드로 반주를 하게 된다. [자료] 화재를 당한 조선극장(《동아일보》, 1936.06.12.) 신용희가 지배인으로 영업을 책임진 이후 조선극장은 점차 안정을 찾아 갔다. 이에 따라 1931년 7월 조선극장을 중심으로 자본금 8만원의 조선흥행주식회사가 설립된다. 사장은 정완규, 전무취체역 전현국, 상무취체역 신용희, 정은규, 취체역 정현성, 김찬영, 감사역으로는 정현용이 선임되었다.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최신의 토키설비를 구비하고 고급의 토키영화를 상영하여, 조선극장은 일명 토키영화의 전당이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조선흥행주식회사 간부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급기야 1932년 10월 조선흥행주식회사가 극장 지배인 신용희를 해고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자 건물주인 도쿄건물회사에서는 신용희와 계약한 흥행권만을 인정한다며 극장사용을 중지해 버렸고 조선흥행주식회사는 조선극장에 설치한 토키 설비를 뜯어 단성사로 옮겨 영화상영을 계속하였다. 1932년 12월부터 기신양행의 김찬영과 손잡은 신용희가 조선극장을 운영하게 된다. 운영자 김찬영, 지배인 신용희 체제에서 조선극장은 김찬영이 소유한 영화배급회사 기신양행을 통해 안정적으로 필름을 공급받았다. 하지만 비싼 토키필름 가격에 비해 줄어든 관객으로 인해 극장 경영은 어려움이 많았다. 이때 신용희는 서울무대라는 극단을 조직하여 프로그램의 일부를 연극으로 채울 생각을 하였다. 1933년 조선극장의 추석 프로그램에서 공연된 서울무대의 <등대>에서 배우가 대본에 없는 대사를 했다는 이유로 공연이 정지되었고 관객들이 항의하는 일명 조선극장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의 배경은 임석경관의 횡포에 변사 성동호가 상부에 투서함으로써 발생한 것이었다. 결국 변사 성동호가 구속되면서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김찬영과 신용희 체제의 조선극장은 결국 1934년 12월 김찬영이 영화업에 손을 떼면서 끝나고 만다. 1934년 12월, 종로 5가에 위치한 제일극장 소유자 미나토 큐기치(港谷久吉)가 조선극장의 소유권과 흥행권 일체를 약 10만원의 자금을 들여 인수하게 된다. 새로운 경영자의 등장으로 기존 조선극장 관원들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것을 염려하자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이들의 고용을 유지하라고 권고하여 대부분의 관원들이 그대로 극장운영을 이어갔다. 하지만 미나토 큐기치가 운영하던 조선극장은 1936년 6월 11일 방화로 전소되어 이후 복구되지 못했다. 조선극장은 잦은 운영자 교체로 인해 경영이 불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운영하던 이들 대부분이 서양영화의 배급사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서양영화의 전당”이라 불릴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조선인극장과 일본인극장을 통틀어 조선극장은 단성사와 더불어 서울에서 서양영화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로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극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토월회의 공연이 개최되면서 한국연극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장소로 기록되고 있다. 참고문헌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중앙일보》, 《중외일보》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 72호, 2010. * [사진](상단) 조선극장 낙성 광고(《매일신보》, 1922.11.03) [자료] 《 매일신보 》 , 1922.11.7. 조선극장의 개관식 , 작일 오후 ᄒᆞᆫ시부터 셩대하게 거ᄒᆡᆼᄒᆡᆺ다 이번에 셔로 건츅한 부내 인사동 됴션극장 ( 朝鮮劇場 ) 은 예뎡한 바와 갓치 작 륙일 오후 한시부터 동 극쟝에서 ᄀᆡ관식을 거ᄒᆡᆼ하엿ᄂᆞᆫ바 인사동 드러가ᄂᆞᆫ 어구로브터 극장ᄭᆞ지ᄂᆞᆫ 만국긔와 오ᄉᆡᆨ긔며 뎐등으로 챤란하게 장식하엿고 극장 안에는 칠ᄇᆡᆨ여명의 ᄅᆡ빈이 상하층에 가득하였더라 . 관쥬 황원균 ( 黃元均 ) 씨의 ᄀᆡ관식사와 여러 변사와 극가의 예슐과 극장에 대한 말이 잇셧고 그 후에ᄂᆞᆫ 경셩 오번권 기ᄉᆡᆼ의 가무와 밋 셔양츔이며 현대 일류 명창 리동ᄇᆡᆨ ( 李東伯 ) 의 독창과 현대극계의 권위인 만파회 ( 萬波會 ) 의 신극 츌연이 잇엇고 계속하야 활동사진을 영사하야 ᄅᆡ빈의 이목을 즐겁게 하고 동 오후 네시에 폐회하얏ᄂᆞᆫ대 ᄅᆡ빈에게는 기념품까지 쥬엇는바 극쟝에 장관스러운 설비와 챤란한 쟝치ᄂᆞᆫ 조션에 쳐음이라 하겟다더라 . [자료] 《 매일신보 》 , 1922.11.7. 신축낙성 ( 新築洛城 ) 當 本月 六日 개장 ( 開場 ) … 프로그람 … ◎ 경성 오권번 ( 五券番 ) 의 가무 음곡 ( 音曲 ) 급 ( 及 ) 서양댄스 ◎ 일류 명우 ( 名優 ) 이동백 ( 李東伯 ) 군의 독창 ◎ 현대극계의 권위 만파회 ( 萬波會 ) 의 출연 ◎ 태서 ( 泰西 ) 저명한 고급 활동사진 이상 반도 유수 ( 半島 有數 ) 의 대극장 조선극장의 개장 경성부 인사동 전화 本局 三六二 ○番 [자료] 《 중외일보 》 , 1926.12.19. 영화 · 연예 《 나는 영웅이다 》 ( 全七卷 ) 조선극장 (18 日 봉절 ) ◇ 원명 …… ᄲᅥᆼ커 - 대왕 ◇ 원작 …… 레온 윌손 씨 ◇ 감독 …… 하리 ᄲᅩ - 몬 씨 --- 캬스트 --- ◇ ᄲᅥᆼ커삔 …… 마트 무어 씨 ◇ ᄲᅳ리드 …… 죠지 니콜스 씨 ◇ 카사노바 부인 …… 노라 세실 양 ◇ ᄲᅡ사쟐 대선생 …… 푸랑크 레이 씨 --- 이하 략 ( 畧 ) --- 사람 좋은 《 ᄲᅥᆼ커삔 》 은 그의 동무들이 그를 가리켜 《 나폴레옹 》 의 재생이니 혹은 녯날 《 애급 》 나라의 임금의 후신이니 하야 가면서 놀리는 것도 모르고 그것이 정말인줄만 알고 가진 공상을 다하고 있었다 . × 그리하여 한번만 그 공상하는 병이 시작되기만 하면 그는 중대한 재긔 회사의 일도 돌아보지 않고 천금을 아끼지 않고서 《 미 - 라 》 를 사오고 ᄯᅩ 그 외에 무엇 무엇 쓸대업는 것을 구해다 노코서 공상을 하기에 가진 진기한 사건은 다음에서 다음으로 생긴다 . 그는 확실히 자긔가 영웅인 것이나 가티 생각하는 것이었다 . × 그러나 결국 그는 자긔 애인인 사장의 딸과 야구선수들의 도움에 의하여 간신이 본정신을 차리고 공상에서 ᄭᅢ어서 견실한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하는 것이 이 재미있고 우스운 사진의 이야기입니다 . ( 사진은 《 나는 영웅 》 의 한 장면 ) ◇ 조선극장 개관 일시 경영 곤란으로 폐관하였든 시내 인사동 조선극장은 다시 유지들의 활동으로 《 조선키네마회사 》 제공 《 풍운아 》 ( 風雲兒 )( 全 7 卷 ) 과 《 나는 영웅이다 》 ( 全 7 卷 ) 기타 희극 등 재미잇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십팔일 밤부터 개관하게 되엇는데 료금 등은 종전과 같다더라 . [자료] 《 매일신보 》 , 1927.7.26. 조극개관기 ( 朝劇開館期 ) 아즉도 멀어 부내 인사동 ( 仁寺洞 ) 죠션극장 ( 朝鮮劇場 ) 은 지난 륙월 삼십일에 돌연히 폐관한 후 수십여명 관원ᄭᅡ지 젼부 해산을 식히고 경영자의 한사람인 현텰 ( 玄哲 ) 씨는 내지로 건너갓는대 그동안 관원들은 경영자 측에 대하야 휴관하여 잇는 동안에는 극장을 관원에게 빌려쥬워 관원의 손으로 당분간 영업을 계속하야써 관원의 생활을 보샹케 하여 달라하야 양방의 타협이 진행즁이더니 그것도 결국 파열되야 관원 일동의 ᄇᆡᆨ여명 식구는 목하 생활 곤난을 당하고 잇는 즁인바 동 극쟝은 ᄅᆡ월 십삼일경에나 이르러 젼 경영자의 경영 하에 개관될 모양이라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