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피아니스트
- 감독
- 김초희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정유미, 김의성, 김경희, 김태연
<찬실이는 복도 많지>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영화의 위기라는 수사가 익숙해진 지금, 영화 비평 그리고 영화 비평지의 지속 가능성 역시 요원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햇수로 5년간 총 17권의 책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연말연시가 두렵다. 새해가 밝아 오면 그해에 다룰 영화들을 독자들 앞에 선보여야 하는데, 영화관에 가는 일조차 드물어진 시대에 영화 비평을 읽는 일이 쉬울 리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자들을 만족시키고 안정적인 판매량을 담보하며 업계의 사정 또한 해치지 않는 작품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내가 꼭 다루고 싶은, 혹은 꼭 다루어야 한다고 여겨 온 작품이 누락되는 경우는 그야말로 허다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일을 하는 걸까, 이 일은 영화 산업의 어디쯤에 놓여 있는 걸까? 영화를 업으로 삼는 삶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김초희 감독의 <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19)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예술영화 PD로 일하던 찬실( 강말금 )은 영화 인생 내내 따르던 지 감독( 서상원 )이 사망한 후 망연자실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속세(?)를 떠나온 찬실은 영화 없이 여생을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 과정에서 소피( 윤승아 )와 김영( 배유람 ), 하숙집 할머니( 윤여정 )와 장국영( 김영민 )을 만나는 찬실은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치열한 삶의 양식 또한 마주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의 삶과 관계가 우선하는 가운데, 영화도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그게 뭐 허는 사람이냐고.” 지 감독의 죽음 이후 찬실은 달동네에 위치한 하숙집에 숨어든다. 어느 날 그곳의 주인 할머니는 찬실에게 어떤 일을 했었냐고 묻는다. 찬실은 허둥대며 영화 PD가 하는 일을 설명하려 하지만, “그러니까 그게 뭐 허는 사람이냐고”라는 퉁명스러운 답변만이 되돌아올 뿐이다. 조금 우습게도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찬실과의 동질감을 느꼈다. 나의 가족과 친구들은 여전히 내가 하는 일을 잘 모른다. 나를 만날 때면 ‘너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냐,’ ‘언제 옳게 된 직장을 잡을 거냐’고 묻는다(‘옳게 된 직장’이 어떤 직장인지는 잘 모르겠다). 질문을 받은 나는 영화와 비평을 둘러싼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같은 영화를 수십 번 보고, 그 영화에 대해 해야 할 이야기들을 구조화하고, 그것을 멋지게 써낼 수 있는 필자들과 소통하고, 그들이 쓴 글을 보기 좋게 다듬어 독자들 앞에 내어놓는 일이라고. 종국에는 찬실처럼 멋쩍게 웃으며 “저도 이제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게 되지만 말이다. 프리즘오브 33호 《작은 아씨들》을 제작하며 “프리즘오브 작업은 어떤 영화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개인적 취향으로 인해 다루고 싶지 않았던, 혹은 비평적 측면에서 논할 지점이 적다고 생각했던 작품을 선정하게 되어 곤란할 때도 있다. 하지만 한 영화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돌려 보고, 그에 대한 수많은 말들을 뒤적이다, 그것을 사랑하는 이들과 소통하고 있자면 그 영화의 사랑스러운 부분들이 자연스레 떠오르기 마련이다. 또한 그 작품이 내가 살아가는 이곳, 누군가가 살아온/살아가는/살아갈 저곳과 얼마나 깊이 맞닿아 있는지도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영화 비평을 엮어 책으로 만드는 일을 통해 영화에 대한 숱한 이들의 사랑을, 그리고 영화가 일종의 유기체라는 사실을 확인하곤 하는 것이다. “영화는 숫자가 아니야, 별 하나 별 두 개도 아니야.” 김영과 찬실 새 영화의 크랭크인을 앞두고 고사를 지낸 지 감독은 술에 흠뻑 취해 말한다. “영화는 숫자가 아니야, 별 하나 별 두 개도 아니야.” 이런 지 감독과 오랜 시간 작업해 온 찬실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 없는 생활 속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며 김영과의 로맨스를 꿈꾼다. 하지만 김영은 오즈 야스지로가 아닌 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한다 말하고, 찬실은 경악한다. 나도 한때 지 감독, 그리고 찬실과 같은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다. 영화에는 숫자 따위로 가치를 매길 수 없으며, 돈 같은 것에 얽매여 비평을 써서는 안 되고, 예술영화가 대중영화보다 더 ‘옳은’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애당초 예술영화란, 대중영화란 무엇인가?) 그러나 누군가에게 영화는 숫자고, 누군가에게 영화는 별 하나, 별 두 개다. 누군가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누군가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좋아한다. 때에 따라 영화를 숫자로 평가할 수도 있는 거고, 삶이 필요로 하기에 돈을 위해 비평을 쓸 수도 있는 거다. 물론 그것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프리즘오브의 편집장직을 맡은 후 이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상당히 내향적인 사람이다. 요즘 말로 하면 ‘대문자 I’랄까. 처음 편집장 자리를 제안 받았을 때 막연히 나의 천직일 것이라 예상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방에 틀어박혀 내가 좋아하는 영화만을 파먹을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영화 비평지 편집장은 오히려 그와 정반대에 놓여 있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 호 다른 필자들과 소통하고, 인터뷰이를 만나고, 독자(의 반응)와 마주해야 하는 일이 산재해 있었다. 나에게는 유난히 어려운 미션이었지만 그들과 만나야만 했기에 영화와 숫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며, 세상에는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저런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저마다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 역시 깨달았다. “반지하도 아니고, 사각형도 아니고.” 그렇다면 다시, 나의 일은 복잡하게 맞물린 영화 산업의 톱니바퀴 속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 걸까.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일에 관해 “영화를 사랑하는 첫 단계는 두 번 영화를 보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영화에 관한 평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 이상은 없다”라고 말했다. 나의 영화 사랑은 ‘반지하도, 사각형도 아닌’ 찬실이의 방처럼 애매모호한 위치에 놓여 있다. 영화에 관한 평을 쓰는 일도 아니고, 영화를 만드는 일도 아니다(물론 영화를 보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영화에 관한 평을 쓰는 이들과도, 영화를 만드는 이들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트뤼포 귀신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의 영화 사랑은 두 번째 단계와 세 번째 단계 사이 그 어디 즈음에 놓여 있다고 말해 주지 않을까? 누군가는 ‘애매모호한’ 나의 일을 폄하할지도 모른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속 제작사 대표( 최화정 )가 “찬실이 같은 PD가 없어도 영화는 만들어진다”라며 찬실의 노고를 몰라봤던 것처럼. 하지만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글을 읽고, 고치고, 묶는다. 내 이름을 내세우지 않지만 그 글이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양지바른 자리를 다진다. 제작자와 비평가, 비평가와 관객, 관객과 제작자를 연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애매모호한’ 나의 일이다. 찬실이 선행하는 삶 속에 놓인 영화를 발견하였듯, 나 역시 이제는 안다. 영화와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나의 일 역시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프리즘오브 33호 <작은 아씨들>, 34호 <너와 나>, 특별호 <헤어질 결심>, <파묘> 안정윤(프리즘오브 편집장) l 페미니즘과 영화, 영화제 등에 관심을 갖고 그에 관한 글을 쓴다. 계간 영화잡지 《프리즘오브》 편집장. 서울여성독립영화제 집행위원.
“영화란 말야…..” < 찬실이는 복도 많지 >( 김초희 , 2019)의 첫 대사는 마치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이 던진 일생의 프로젝트, “영화란 무엇인가?”(What Is Cinema?)에 대한 거대한 답변으로 시작을 하려는 듯 하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다소 허망한(?) 에피소드들은 영화의 존재론적 사유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찬실이의 일상은 유쾌한 잡담에 가깝다. ‘잡담’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우리 모두가 늘상 나누고 공유하는 보편적인 일상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흔살, 찬실이( 강말금 )는 영화 프로듀서다. 맞다, 아무리 자세히 설명을 해줘도 극중의 주인집 할머니( 윤여정 )가 그렇듯, “그래서 그게 뭐하는 일인데?”라며 무한반복 같은 질문이 되돌아오는, 그 정체성 제로의 직업말이다. 특히 감독이 갑자기 죽고 나선 더 그러하다. 더 이상 할 일도, 불러주는 사람도 없이 수입이 끊긴 찬실이를 친한 배우 동생, ‘소피’( 윤승아 )는 가사도우미로 고용한다. 아침마다 소피의 술병을 치우는 일에도 보람이 느껴질 무렵, 찬실이는 단편영화 감독이자 소피의 불어 선생, ‘영’( 배유람 )에게 빠져들게 된다. 영을 짝사랑 하면서부터 그녀의 삶은 새로운 활기가 넘친다. 데면데면하던 주인집 할머니와 우정도 나누고, 수호천사인 장국영( 김영민 )이 필요할 때 마다 나타나 고민도 들어준다. 이 가운데 찬실이는 정말 복도 많아 보인다. 그러나 영에게 거절을 당하면서 그녀는 좀 전의 지지리도 ‘없는 삶,’ 즉 갈데도,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복 많은 찬실이는 서서히 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것은 이 ‘없는 것들’ 사이를 뺴곡히 채우고 있는, 수 많은 ‘있는 것들’이다. 삶에 찌들어 미처 들여다 보지 못했던 일상엔 딸이 “꽃 처럼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이웃의 아픔이 있고, 발연기로 욕만 얻어먹는 후배의 웃픈 푸념도 있으며, 찬실이의 재기만을 기다리는 동료들의 응원이 있다. 마침내 이 풍성한 찬실이의 일상은 스크린 속 누군가의 그것으로 영화적 환생을 맞는다. 이쯤 되면 정말로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난제에 대해 바쟁조차도 만족스러워할 답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란 우리에게 없는 것들, 즉 결핍들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비추고 의미를 메기는 일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찬실이의 시나리오 노트가 그녀의 ‘없는 삶’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의 재발견은 영화적 발견임과 동시에 영화의 소임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는 꽤 영리한 방법으로 삶과 영화를 도치시킨다. 이를테면 삶을 영화의 언어로, 영화을 삶의 언어로 말이다. 쥐뿔도 없지만 잘난 척 좀 하고 싶을때는 ‘오즈 야스지로’가, 초라한 서가를 메울 만한 서적으로는 ‘키노’가, 푸념상대가 필요할 땐 난닝구 바람의 ‘장국영’ 만한 것이 세상에 어디있겠는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세상 밖이 바이러스와의 싸움으로 불안과 혼란의 최절정을 지나는 한가운데에 개봉했다. 그럼에도 3월 중순 기준 관객수 만 칠천명을 넘어서며 썰렁한 극장들로 관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치유의 힘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주체할수 없을 만큼 웃어보고, 혼잣말을 해 봤으며,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오즈 야스지로도, 키노도, 장국영도 분명 그것을 가능케한, 반가운 아이콘이었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영화적인 아이콘은 역시 찬실이를 연기한 강말금 배우다. 그녀의 얼굴에는 우리 모두의 결핍과 바램 그리고 환희가 있다. ‘말금’이라는 이름처럼 그녀의 얼굴은 마치 일상에 담궜다 빼낸 리트머스 종이같이 분명하고, 즉각적이다. 동시에 간간히 드러나는 그녀의 ‘시네마틱한’ 표정은 이야기의 에너지를 환기하는 유일무이한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든 것, 즉 영화적이고 세속적인것을 발견하고 조합해낸 김초희 감독의 공이 크다. 2020년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봄 가운데, 그녀의 영화가, 그리고 찬실이가 이 난세를 구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집> ‘여성이라는 이유로’ 서울메트로의 공개채용 과정에서 최고 점수를 받고도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수험생 최고은(가명)의 기사에 혈압이 올랐다. 취업 성차별 이야기의 불평등은 과연 언제쯤 정상화 될까. 이 이야기에 몇 해 전 만난, 스웨덴 영화계 양성평등 실천을 위해 헌신해 온 스웨덴영화기관(SFI)의 CEO 안나 세르네르의 말이 떠올랐다. 스웨덴 영화계의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을 만들어 가는 안나가 들려 준 이야기 중 하나는 남성 비율이 월등이 높은 오케스트라 단원을 뽑을 때 심사위원의 눈을 가리고 심사하자, 여성 남성의 비율이 50대 50이었다고 한다. 그간 많은 분야에서 당락이 ‘실력이 아닌 성별’로 좌지우지 되었다는 걸 점검해 봐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한국영화계도 이 문제에 잔뜩 민감해져야 할 시기다. 비슷한 이야기를 한국 영화계에서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최근 영화 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체감 상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학교를 대표하는 작품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남성을 의도적으로 밀어주고 있다는 의구심이 제기되었다는 낯뜨거운 이야기도 들려왔다. 물론 의미있는 변화도 많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이장호, 장미희)에서는 100주년 기념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의 성비를, 남녀 50:50의 조건으로 못 박고 갔다. 아니나 다를까, 모집 과정에서 연출 경력이 있는 여성감독의 수가 남성에 비해 부족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발의 기회가 적은 수의 여성에게 부당하게 돌아간 것일까. 다양성과 평등을 제재 없이도 확보하기까지는 이런 ‘의도적인’ 조건의 개입, 쿼터의 도입이 당분간 필요하다고 본다. <메기> 올해 한국영화계는 여성감독의 진입이라는 측면에서는 유의미한 해다. 2003년을 < 살인의 추억 >( 봉준호 )과 < 올드보이 >( 박찬욱 ), < 장화, 홍련 >( 김지운 ) 등 색깔도 장르도 다른 감독들이 각축전을 벌이던 그때를 한국영화의 뉴웨이브, 르네상스기라고 부른다면, 2019년은 ‘여성감독의 뉴웨이브’라는 말로 설명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윤가은 감독이 < 우리들 >에 이어 차기작 < 우리집 >을 발표해 ‘윤가은 동네유니버스’의 세계관을 확장해 보여주어 관객의 호응을 얻었으며, 김보라 감독의 < 벌새 >가 수상행진을 이어오고 있고, 독립 장편 극영화에서 지난 2008년 < 똥파리 >( 양익준 )가 세운 흥행 기록 12만을 넘은 13만 관객을 얼마 전 돌파했다는 것. 이옥섭 이라는 펑키하고 재기발랄하면서도 세련된 연출력을 가진 작가의 등장을 확인하는 기회이자,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을 폭력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묘사하는 장편 < 메기 >가 극장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 한가람 감독이 < 아워 바디 >를 통해 여성의 욕망을 기괴해 보이고, 손가락질 당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욕망을 과감히 스크린을 통해 전개해 나갔다는 것, 그리고 무수한 범죄액션 장르물에서 피해자로 ‘스쳐지나가고 말았던’ 여성들의 상처를 유은정 감독이 < 밤의 문이 열린다 >는 판타지 형식으로 어루만져 주었다는 점 또한 이 사회의 절반인 여성에게 감각하게 살아온 우리를 자극하는 강한 촉매제가 되어 주었다. 이처럼 여성감독의 약진을 발견할 수 있는 올해의 시작은 개봉시기로 볼 때 안주영 감독의 < 보희와 녹양 >이었는데, 엄마의 연애를 두고 혼란에 빠져들고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성장해 나가는 소년의 성장사의 기술 과정이 얼마나 무해했는지를 돌아본다면, 그래서 극장에서 과도한 폭력이나, 여성을 향한 비뚤어진 묘사로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도 할 말을 하는 영화가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즐거운 기회였다. 확실히 올해는 여성감독의 작품을 꼽자고 해서 꼽았다기보다, 좋은 작품을 손꼽고 보니 그 작품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나 역시 여성 감독의 좋은 작품을 극장에서 저널리스트이자, 관객의 위치에서 꾸준히 ‘수확’하는 풍요를 맛보고 있는데, 아마도 이 성과는 이들이 만들어 곧 도래할 ‘여성 창작자 빅뱅’의 시기의 서막에 불과해 보인다는 점에서 내년이 올해보다 흥미진진하고, 또 그 다음해 역시 더 흥미진진해 보인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최다 수상작 2편은 윤단비 감독의 < 남매의 여름밤 >, 김초희 감독의 < 찬실이는 복도 많지 >로 둘 모두 여성 연출자로, 이런 기대를 이미 현실화 하고 있다. <아워 바디> 물론 ‘남성감독의 영화’라는 말이 따로 언급되어 오지 않은 사회, 남성감독 연출의 영화는 ‘영화’라 명명되는 에서 이들 모두의 각기 다른 색깔의 영화를 모두 ‘여성영화’의 카테고리로 명칭 하는 건, 나 역시 분류법에 우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워 바디>를 여성영화의 카테고리로 분류하는데 대해 한가람 감독이 “얼마나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가 없었으면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이렇게 집중을 하나 싶더라.”는 말을 한 건 그런 ‘부당한’ 시선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의도적으로 명시화 해주어야 하고 호명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금껏 여성이 스크린 안에서 피해와 억압 받고, 과소평가 받았던 건 결국 여성을 정당하게 바라보고 기술해 줄 평등한 ‘눈’이 턱없이 부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영화계에 여성 캐릭터가 개발되지 않고 도외시 된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 더 많은 창작자를 기다리고 있으며, 나 역시 ‘숨은’ 그들을 조명할 것을 다짐한다. 다행히 이 문제에 관해서 신경을 곤두세울 ‘꺼리’가 많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없이 전투적이 되는 시기다. 대표적으로 여성이 겪어 온 이 사회의 부당함에 대해 말하는 김도영 감독의 < 82년생 김지영 >(2019)이 ‘편향된 시선’이라는 이유로, 일부 네티즌들에게 개봉도 전부터 공격을 당해 왔다. 영화 보기 전 낮은 평점과 시사 후 높은 평점을 비교하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고, SNS에서는 이 작품의 부제를 ‘전쟁의 서막’이라고 명명하며, 우리를 갈라놓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더 공고해 질 위기에 처해있다. 개봉 첫날 1위로 관객의 호응이 시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 호응이 유의미한 수치로 집계된다면, 여성에 의한, 여성의 시선을 담은, 소외된 여성을 위한 영화가 만들어지는 흐름을 더는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한쪽의 성이 아닌, 다양한 성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사회이자, 영화 역시 그 다양한 사회의 형태와 결을 담는데 게으르지도, 주저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