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의 혈투
- 감독
- 이강천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박노식, 문희, 허장강, 이경희, 김칠성, 최성호, 장혁, 김희준, 방수일, 최일, 박상익, 지방열, 이동민, 박봉수, 임해림, 나일, 성소민, 김세라, 박병기, 김승남, 손전, 김경아, 윤란성, 김정미, 윤일주, 김월성, 김영길, 박장섭, 김호향, 박명호, 안길원, 김기범, 금사랑, 주상호, ㅇ일
김수용 감독은 자신이 영화 연출에 임하는 태도와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본을 받으면 주어진 제작 일정과 예산 범위 내에서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운용하고, 영화의 도입부터 결말까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설계한다. 그리고 밤에 잘 때마다 머릿 속에 구축해놓은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다’. 촬영을 한 부분은 찍은 장면대로, 아직 안 찍은 부분은 콘티대로 연결하면서 작품 전체를 몇 번이고 ‘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실제로 제작이 끝나는 시점에는 머릿 속에서 이미 여러 차례 ‘다 본’ 영화대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어떻게 시청각 이미지로 구현하는가를 화두로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화는 연극이 아니고 라디오극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영화적으로 접근하는 화면들을 구축하여 정서와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를 꼼꼼하게 계산했다. 덕분에 촬영 현장을 신속하게 지휘했고, “사람을 지루하게 하는 건 참 싫다”는 본인의 말대로 그는 영화 속에서 불필요한 반복이나 서사 전개가 지연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김수용은 1958년 데뷔작 <공처가>부터 2000년에 개봉한 <침향>에 이르기까지 무려 109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히는 이유는, 기념비적인 다작을 이룬 영화 장인일뿐만 아니라 영상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신념을 일관되게 견지한 영화 작가이기 때문이다. 1950년 서울사범학교 졸업 후, 김수용이 교단에 서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9.28 수복 후에 징집되어 군에 입대한다. 전시에는 통역장교로 근무하고 휴전 후, 1954년에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 배속된다. 근무지는 서울 중구 필동 남산에 위치한 적산가옥이었는데 편집실, 녹음실, 영사실 및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국방부 영화과 시설에서 군 영화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영화의 거의 모든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전후 1950년대 중후반에는 민간 현상소나 편집실 등의 후반작업 시설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김수용은 이곳에서 영화인들의 작품 제작 현장을 눈여겨보면서 전반적인 영화 제작 과정을 터득한다. 그 무렵 정훈국 영화과는 종전의 군 뉴스 제작에서 한발 나아가 홍보 및 교육용 문화영화를 시도하였고, 김수용은 군 교육 문화영화 <잊지말자 6.25>(1955)를 감독하며 처음으로 영화 연출을 하게 된다. 이어서 <10분간 휴식>, <윤 중사의 수기>, <해뜨는 마을> 등의 군 영화들을 연출하였는데, <10분간 휴식>은 군인들이 행군 도중 휴식 시간에 나누는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장면화되었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로 만들었다. (사진 1)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 근무 당시, 가운데가 김수용 김수용은 <배뱅이굿>(양주남, 1957)의 조감독을 맡아 장편극영화 제작 현장에 참여하고, 군 영화들을 연출하면서 영화감독으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배뱅이굿>의 제작자였던 김보철이 이듬해 그에게 영화 <공처가>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정훈국 영화과 간부들의 배려 하에 근무시간 외의 시간에 촬영을 진행하여 장편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사진 2)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이 작품은 김수용이 현역 군인 시절에 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이다. <공처가>는 장소팔, 김희갑, 구봉서, 백금녀 등의 당대 희극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코미디 드라마였고 관객의 반응을 얻는 데 성공한다. 때문에 “촬영소에 있는 김 대위”에게 연출 의뢰가 계속 들어왔고, 김수용은 <3인의 신부>(1959), <청춘배달>(1959)을 연출하여 그가 군 복무 시절에 감독한 작품들은 총 3편이다. (사진 3) <청춘배달>(김수용, 1959)을 관람하기 위해 명보극장에 모여든 관객 이후 군복을 벗고 본격적인 직업 영화감독의 세계에 들어선 김수용은 <애상>(1959)을 시작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촬영을 담당했던 전조명과 장석준이 그의 작품들을 다수 촬영한다. 전조명은 <3인의 신부>(1959)의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혈맥>(1963), <굴비>(1963), <갯마을>(1965), <일요일의 손님들>(1973), <도시로 간 처녀>(1981)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고, 장석준은 <구혼결사대>(1959)를 시작으로 <버림받은 천사>(1960), <만선>(1967), <안개>(1967), <일본인>(1968), <봄봄>(1969), <토지>(1974)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다. (사진 4) 모파상의 소설 「 귀향 」 을 번안한 영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스틸사진. 주인공 박남우(배우 김진규)는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얼굴에 심한 화상 흉터가 있다. 영화 속에서 실감나는 화상 특수 분장으로 등장한다. 1962년에는 한양영화공사가 홍콩과 합작한 <손오공(원제 화염산(火焰山)>의 한국 측 감독을 맡아 홍콩에서 연출한다. 한국 배우 김희갑, 김지미, 조미령, 양훈, 최무룡, 양미희 등이 출연했다. 손오공 일행의 여정이 중화권에서는 익숙한 이야기로 해마다 영화화되었지만, 김수용은 한국 관객을 감안했을 때 캐릭터 및 설정 소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직접 영화 도입부를 작성하여 추가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5) <손오공(원제 화염산 火焰山)>(김수용, 1962) 촬영현장. 김수용 감독(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손오공 역을 맡은 배우 김희갑(왼쪽에서 두 번째)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춘기여 안녕>(1962), <청춘교실>(1963)과 같은 청춘물 등을 선보이고, 1963년에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굴비>, <혈맥>을 연출한다. 두 작품은 각각 라디오극과 연극 원작으로 김수용은 이를 영화적으로 소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혈맥>은 원작 희곡이 방공호 토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을 영화적으로 장면화 하기 위해 판잣집으로 바꾸고, 서울역 근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판자촌 오픈 세트를 짓고 촬영했다. 도시 빈민의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인물 각자의 개성을 활력있게 그려내어 극이 암울하거나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도록 연출했다. 이 작품은 1963년 청룡영화상, 1964년 대종상 주연상 ·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 6) <혈맥>(김수용, 1963)에서 열연한 배우 김승호(왼쪽)와 조미령(오른쪽) 1965년 작 <갯마을>은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김수용은 바다에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는 어촌 마을의 이야기에서 한국적인 드라마를 발견하고, 여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를 발현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시집 오자마자 남편이 바다에서 실종된 주인공 해순을 비롯하여, 마을 아낙네 대다수가 과부로 동병상련을 나누며 삶의 애환을 함께 한다. 이들이 해질녘 해변가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장면에는 영화음악가 정윤주가 제안한 국악인 김소희의 창이 깔린다. 이 소리와 여인들의 건강한 육체가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어우러져, 인물들이 고난을 견뎌가는 명랑함이 서정적으로 전해진다. (사진 7) <갯마을>(김수용, 1965) 중 해변가 망중한 시퀀스. 김수용이 연출한 연기 앙상블, 전조명 촬영 감독이 담아낸 유려한 미장센 그리고 김소희의 창이 어우러져 탄생한 명장면이다. <갯마을>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문예영화의 흥행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문예영화들이 기획·제작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사진 8) <갯마을> 출연진을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누워있는 이가 배우 이낙훈이고 오른쪽부터 배우 신영균, 고은아, 황정순 (사진 9) <갯마을>의 촬영감독인 전조명(왼쪽)과 김수용 “바다 냄새까지도 스크린에 담고자 했다”는 <갯마을> 이후 김수용은 바다를 테마로 한 작품 <만선>(1967), <물보라>(1980)를 연출했고, 이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다. <만선>은 천승세의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바다에 생계와 목숨을 걸고 분투하는 어촌민들을 그려냈다. 당대 최정예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船主)로부터 제 몫을 받을 수 없는 어부들의 갈등과 바다에 자식을 잃은 가족의 비애와 사랑을 열연한다. (사진 10) <만선>(김수용, 1967)에서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어부들. 가운데가 곰치 역을 맡은 배우 김승호 (사진 11) <만선>에서 임금 문제로 선주와 갈등하는 어부들. 맨 앞이 배우 김승호, 그 뒤로 허장강(왼쪽 세 번째)과 김칠성(왼쪽 다섯 번째) (사진 12) <만선>에서 폭풍우를 겪고 만신창이로 돌아온 배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 앞줄 오른쪽부터 배우 남정임, 주증녀, 김칠성 한편 <갯마을>과 같은 해에 개봉한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1965년 최고 흥행작으로, 초등학생 이윤복이 쓴 일기인 『저 하늘에도 슬픔이: 11세 소년이 외치는 인간의 소리』(서울: 신태양사, 1964)를 영화화했다. 가난이라는 굴레에 쓰러지지 않고자 애쓰는 윤복이의 여정이 동요 따오기 선율과 함께 마음 아리면서도 담대하게 펼쳐진다. (사진 13) <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에서 윤복이네 식구가 사과로 끼니를 때우는 장면. 윤복의 아버지로 출연한 배우 장민호(가운데)는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배우 정해정(순나 역), 김천만(윤복 역), 이지연(태순 역), 김용연(윤식 역) (사진 14)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 윤복(왼쪽)에게 일기가 책으로 출간된 사실을 알려주는 약사(오른쪽)로 출연한 최현민은 이 영화의 기획자이자 희곡 <만선>을 연출한 연극인이기도 하다. 한편 이 영화는 대만에서 <추상촌초심 秋霜寸草心>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출충하고, 특히 배우 김천만(이윤복 역)은 이후 김수용이 연출한 <맨발의 영광>(1968)에서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축구팀원으로 열연한다. (사진 15) <맨발의 영광>(김수용, 1968)에서 헝겊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맨발로 축구 연습을 하는 진호(왼쪽, 배우 김천만) 이외에도 김수용은 <사격장의 아이들>(1967), <가위 바위 보>(1976), <달려라 만석아>(1979) 등의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다수 연출했다. 교단에 서자마자 전쟁이 발발하여 뜻하지 않게 학생들과 헤어졌던 기억을 갖고 있는 그는 항상 아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품어왔고, 아역들이 촬영장에서 위축되지 않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사진 16)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 아역 배우에게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은 휴전선 근처 군 사격장 인근 마을에서 포탄 파편을 주워 생계를 돕는 아이들을 통해 전후에도 지속되는 전쟁의 상처를 그려낸다. 이 영화는 기적 같은 행운이나 해결책 없이, 아이들이 겪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냉정하게 제시하는 채로 끝나는데 바로 이 점이 작품을 울림 있게 한다. (사진 17)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아이들이 행여 불발탈이면 폭발할지도 모르는 탄피를 안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뒹구는 장면들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사진 18)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에서 영규(배우 송현규)는 불발탄이 터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치고 고막이 터진다. 연기 경험이 없던 아역 송현규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호평을 받았고, 김수용은 이 작품으로 제5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1966년 한국영화 흥행 1위 역시 김수용이 연출한 작품 <유정>이다. 서울 개봉 관객만 32만명을 돌파하여 전년도 자신이 세운 흥행 기록(<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서울 개봉 관객 28만 돌파)을 갱신했다. 이광수 소설을 영화화한 <유정>은 일본 로케 촬영으로 북해도 설경을 담아낸 컬러 작품이고, 배우 남정임의 데뷔작이다. 김수용은 소수의 스타들에게만 작품이 집중되는 한국영화 제작 관행을 타파하고 연기자층을 넓히기 위해, 기성 배우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신인 배우들을 육성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영화배우로 발굴한 남정임은 여배우 트로이카(남정임, 문희, 윤정희) 중 한 명으로 성장했고 한성, 이훈, 최난경, 주연, 김정철, 임지운 등이 당시 김수용이 주목한 신인 배우들이었다. 이후 강석우(<여수>(김수용, 1978) 주연), 금보라(<물보라>(김수용, 1980) 주연) 등이 그의 작품을 통해 배우로 데뷔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사진 19)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배우 한성(왼쪽)과 배우 전계현(오른쪽). 한성은 이 작품에서 겹치기 출연을 하느라 바쁜 톱스타로 등장한다. (사진 20) <웃음소리>(김수용, 1978)에서 주인공 학자를 연기한 배우 남정임. 김수용 감독 작품으로 데뷔하고 은퇴한 배우 남정임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다. 1967년에는 김수용이 데뷔 9년차 감독으로서 이제껏 그의 연출작들에서 함께 일해 왔던 스태프들과 이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는 일종의 ‘드림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만든 <만선>, <어느 여배우의 고백>,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까치소리> 등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는 수작으로 꼽힌다. (사진 21) <산불>(김수용, 1967) 촬영 현장을 지휘하는 김수용(가운데 흰 모자 쓴 사람). 그는 1977년에 이 작품을 컬러 영화로 스스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사진 22) <산불>(김수용, 1967)에서 열연하는 배우 신영균(왼쪽)과 도금봉(오른쪽). 차범석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했다. 한국전쟁으로 여인들만 남아있는 마을에 빨치산 규복이 숨어든다. 그를 둘러싼 여인들의 욕망과 파국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주연 배우들이 실명으로 출연하고 당시 영화 제작 현장과 기자재들, 스태프들 그리고 이른바 ‘충무로 영화인들’의 문화와 실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김수용 본인도 감독으로 출연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제작에 투자한 지방흥행사(<어느 여배우의 고백>에는 호남 흥행사가 제작자와 면담하는 장면도 있다)가 흥행 감독으로 유명한 김수용의 모습도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보길 원한다며, 감독이 직접 출연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 관객들의 관심이 관람하는 영화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이’와 한국영화계로까지 확장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진23)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영화감독으로 출연하는 전창근 감독 (사진24)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위의 컷 다음에 등장하는 영화 촬영 장면에서 김수용 본인(썬글라스를 쓴 사람)이 감독으로 출연한다. (사진25)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촬영 현장에서 배우 김진규(왼쪽)와 김수용(오른쪽). 이 작품에서 김진규는 신인 배우 남정임을 지원하는 원로 배우로 출연한다.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안개>(김수용, 1967)는 한국영화의 혁신을 목표로 기획되었다고 한다(제작 김동수· 황혜미, 원작·각본 김승옥).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는 입도선매 없는 자체 제작이었고, 제작자들의 간섭도 없었기 때문에 감독이 비교적 구애받는 바 없이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를 김수용은 이제껏 쌓아온 영화연출 역량을 제약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실재와 환상,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로운 감각의 작품으로 연출했다. (사진26) <안개>(김수용, 1967)에서 기준(오른쪽, 배우 신성일)의 고향인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 뒤쪽 엑스트라 중 모자 쓰고 담배 문 사람이 원작자인 소설가 김승옥이다. <안개>는 1967년 제14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모더니즘 영화로 주목 받고, 관객의 호응도 얻었다. 일찍이 김수용은 <굴비>(1963)를 감독할 무렵부터 기존의 인습적인 한국영화 표현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이를 탈피하는 연출을 강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한 시도는 앞서 <갯마을>(1965)의 ‘시네포엠’적인 몽타주나 <까치소리>(1967)에서 의식의 흐름을 영상화한 장면들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후 김수용 특유의 영화적 개성으로 발전한다. <야행>(김수용, 1973년 제작·1977년 개봉)은 그가 “시간과 공간이 항상 유동적이고 주인공이 잘 흔들리고 있다.” 1) 는 점에서 <안개>와 비슷한 시나리오라고 회고한 작품이다. 프리즈 프레임을 통한 비약과 플래쉬백, 점프컷 등을 활용하여 주인공의 심상을 예상치 못한 방향과 템포로, 때로는 권태롭게 때로는 위트 있게 표현한다.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에서도 선형적인 시공간 구성을 탈피하고, 인물의 내면을 대사 없이 영상과 사운드만으로 직조하는 과감한 시도를 전개하기도 했다. (사진27) <야행>(김수용, 1977)에서 길 가던 행인이 던지는 추파를 거절하는 주인공 현주(배우 윤정희) <수전지대>(김수용, 1968)는 김수용의 조감독이었던 이원세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부문 입선작)를 영화화했다. 어릴 적 염전마을에서 자라난 이원세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문예영화를 다수 연출했던 김수용은 그의 조감독들에게 장차 감독이 되려면 문학적 감수성과 글쓰기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반드시 시나리오를 쓸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김수용의 조감독을 거쳐 데뷔한 감독들로는 조문진, 이원세, 김수형, 정지영, 장길수 등이 있다. (사진28) <수전지대>(김수용, 1968)에서 아낙네들이 소금을 훔치는 장면. 염전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소금밭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그 소금을 훔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사진29) 동료 감독들과 야유회. 1960년대 후반, 왼쪽부터 이만희 감독, 김수용 감독, 김기덕 감독 1970년대에도 김수용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지>(1974), <극락조>(1975), <황토>(1975), <내일은 진실>(1975), <내 마음의 풍차>(1976), <발가락이 닮았다>(1976), <야행>(1977),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 <망명의 늪>(1978), <사랑의 조건>(1979) 등을 연출하는 한편 70년대 초반에는 홍콩 영화제작사 쇼브라더스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 <와와후링 娃娃夫人>, <우중화 雨中花>를 연출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1970년대 초반 할리우드와 미국 영화들을 접하고 돌아온다. 그는 당시 홍콩, 미국 영화계를 방문하고 영화 자본 및 기술력 측면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와의 격차를 절감했다고 한다. 70년대 한국영화 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검열에 발목이 잡히는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김수용이 연출한 <가위 바위 보>(1976)는 베트남에서 서울로 피난 온 아이들이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베트남 패망을 이유로 주인공이 베트남 국기를 든 모습이 검열 제재를 받는다. <망명의 늪>(김수용, 1978)은 “70년대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그것도 영화라는 간섭 심한 장르를 통해서 위선적 지식인을 비판한 것은 감독이 아직 작가로서의 한 가닥 맥박이 뛰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2) 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군사문화에 익숙한 지식인을 통해 ‘인간의 양심을 묻는 영화’라는 이유로 상영 제재를 가한 당국의 권유로 인해 제작비만 보상 받고 창고 속에 묻혀있었다고 한다. 80년대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는 버스안내양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 등을 다루었는데, 상영 중지 및 작품 수정, 재상영 등의 고초를 겪었다. 당시 영화평론가협회는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중지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영화 창작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삐에로와 국화>(김수용, 1982)는 영화 속 북한의 모습이 “너무 잘 그려졌다”는 이유로 용공 시비에 휘말려 당국으로부터 재촬영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연이어 작품 연출에 제약을 받는 와중에, 그가 의도적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선택하여 검열 제재를 피하고자 한 영화가 <만추>(김수용, 1981)이다. 이 작품은 주연을 맡은 배우 김혜자의 호연과 더불어 늦가을이라는 짧은 시간을 배경으로 정일성 촬영 감독의 수려한 화면이 더해져, 원작인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와 함께 수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중광의 삶을 다룬 <허튼 소리>(김수용, 1986)가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10여개 장면이 잘려나갔고, 김수용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다. 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하던 그는 동료 교수이자 극작가 차범석의 권유로 1995년 일본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연출하여 10여년만에 감독으로 복귀하고, 1999년 김지헌 작가와 정일성 촬영 감독과 의기투합한 ‘K.J.K필름’이란 이름으로 제작한 <침향>을 연출했다. (사진30) <만추>(김수용,1981)의 해외용 포스터. 주연 배우 김혜자가 제2회 마닐라국제영화제(1983)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김수용 감독은 당대 관객에게 소구되거나 당대 영화정책에 따른 제작 환경이 요청하는 작품들 모두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데뷔작부터 두각을 보인 코미디영화를 시작으로 청춘영화, 사극영화, 멜로영화, 문예영화 등의 여러 장르를 연출했다. 그는 빈민촌의 고단한 인생살이부터 오픈카를 타고 등교하는 최상류층 대학생들의 청춘까지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를 소화하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영화연출력을 갖춘 감독이었다. 그는 철저한 사전 콘티 작업과 함께 “제작기간을 지연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고, 밝고 빠른 템포의 즐거운 필름을 칼날같이 약속기한 내에 만들어내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 3) 이처럼 김수용은 제작자와 관객, 평단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감독으로서,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가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을 다룬 작품들은 아동물로만 소통되지 않고, 전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한국 대중영화의 폭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 또한 문학적 감수성을 스크린에 발현하여 문예영화의 부흥을 이끄는 한편 자신만의 직관과 개성을 담은 영상 표현을 시도하여 한국영화 화법에 새로운 결을 가져왔다. 김수용의 영화 세계가 선사하는 대담한 담대함, 그리고 특유의 리듬과 위트는 세월이 변해도 관객을 흔드는 영화적 감각, 영화적 체험이다. 1) 권용숙,「김수용」,『한국영화사 구술채록 연구 시리즈 <생애사>』, 2012, 한국영상자료원, 351쪽. 2) 영화평론가 정용탁,「79 문화회고 <6> 영화」,《동아일보》, 1979년 12월 27일. 3) 김수용,「연출기: <혈맥>과 나」, <혈맥>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블루키노, 2012, 6쪽.
한편의 영화를 완성하기까지는 시나리오, 촬영, 미술과 음악, 그리고 현상 편집 녹음 등 여러 분업의 긴밀한 협력으로 이루어지지만 감독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캐스팅 즉 배역이다. 배역은 배우들이 스크린에 직접 나타나서 관객과 대면하기 때문에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시나리오작가나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몸짓과 소리, 표정으로 관객에게 전달하게 된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자 곧 배우의 예술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감독은 캐스팅에서 우선 드라마의 중축을 끌고 가는 주역들을 알맞게 선정해야 한다. 그러나 대체로 주연들은 영화의 상업적 성공을 위해서 육체적 조건과 대중들의 인기를 고려하는 스타시스템의 경향에 따르기 마련이다. 작가주의 영화를 젖혀놓고 이러한 관행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대중들의 새로운 호기심과 유행성 인기를 등에 업고 대대적인 선전과 아울러 신인들을 물색하여 과감히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경우도 스타 시스템의 한 속성이다. 그들을 가리켜 스타라고 불렀다. 스타란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에 빚대어 말한 것으로 일설에는 영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실락원''의 저자 <존.밀톤>이 처음으로 썼다는 설이 있다. 요즘에는 스타란 말이 영화뿐만 아니라 광범하게 쓰여지고 있는 유행어이지만 원래는 영화계에서 즐겨 쓰던 말이다. 배우란 말은 영화의 모체인 연극에서 유래되어 영화 연기자들까지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고 영어로는 남자배우는 Actor, 여자배우는 Actress라고 불렀다. 스타란 말을 매스컴에서 자주 애용하는 다분히 상업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 1890년대 미국의 마크세네트는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은 미녀들이 물장구를 치는 것을 스크린에 등장시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것이 스타시스템의 시작이다. 꿈의 공장에서 만들어낸 스타들은 초창기에는 사실상 연기하고는 거리가 먼, 아름다운 육체와 성적 매력을 상품의 트레드마크로 써서 영화관객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하였다. 스타는 곧 대중의 우상으로 승화되고 영화 산업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드라마의 구축이 절대로 필요하고 관객을 사로잡기 위해서 연극적인 호소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꼭 필요했다. 물론 주역스타들에게도 연기력이 요구되지만 영화이야기를 잘 발효시켜 숙성된 명주(銘酒)와 같이 관객에게 진미를 전하는 데는 연기파 배우들의 몫이 컸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조연배우였다. 조연배우들은 드라마의 주변을 튼튼하게 다져가며 드라마의 행간을 빈틈없이 채워 주는데 큰 힘이 된다. 조연배우들이야말로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절대로 불가결한 존재이다. 그런 조연배우들이 없다면 영화는 한낱 쇼가 되기 쉽다. 조연 연기자들은 대체로 스타라고 부르기보다 배우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연기력과 육체적 조건을 겸비한 스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엄격히 말해서 영화에서 주연, 조연을 구별하는 것은 애매할 경우도 있다. 나오는 신이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분류하기도 하고, 영화의 메인 스토리를 매듭짓고 끌고 가는 것이 역시 주연들이지만 주,조연에 차별성을 둔다든지 우월을 가리는 것은 상업주의 속성이다. 단순히 배우로서 논할 때에는 연기의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가끔 영화상 같은 것을 심사할 때 이런 고민에 부닥친 경우가 많다. 연기상을 주연 또는 조연으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같이 되었지만 하나로 통합하여 최우수연기상을 선정하는 예도 드물지 않다. 스타시스템은 영화의 흥행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것이나 이로 인한 부작용도 있다. 한 신에 나오더라도 영화의 소구력에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최남현 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인 60년대를 전후하여 한국영화의 조연배우 대명사로 불리울만큼 비중이 큰 존재였다. 5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도 스타시스템으로 들어가면서 많은 스타들이 탄생하였다. 또한 굵지한 조연 배우들이 명성을 떨친 시대이기도 했다. 그 이름만 열거해도 한국영화의 관객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명배우들이 군웅할거하다시피 스크린을 장식하던 시대였다. 가장 한국적인 남성상을 지닌 김승호 를 필두로 그와 쌍벽을 이룬 최남현, 그리고 중후하고도 유머러스한 주선태 , 지적인 연기파 박암 , 희극배우의 톱 타자 김희갑 과 구봉서 , 서영춘 밉지 않은 악역으로 인기가 높았던 허장강 , 악역의 성격 배우 이예춘 , 서민적인 정감에 넘치는 김칠성과 남춘역 , 터프한 개성파로 갈채를 받은 박노식 , 황해 , 장동휘 등등 기라성 같은 남성배우에다 한국의 어머니상을 대표한 황정순 , 한은진 , 정애란 그리고 꼭 있어야 할 역을 맡아온 고선애 , 정득순 등 조연 배우들이 엮어내는 아기자기한 감흥과 눈물과 웃음들은 당시의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최남현 은 잘생긴 미남이나 호남형은 아니지만 175cm의 키에 70kg이 넘는 중량감 이는 외모에다 개성미가 넘치는 배우였다. 그의 본명도 최남현. 아버지 최찬수와 어머니 박이윤이 6남매 중 장남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해가 1919년 1월 7일이었다. 그의 유소년기나 청년기의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의 명문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해방직전 월남하였다. 그의 동문에는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명성을 떨친 故 선우휘 가 있다. 한때는 주먹깨나 쓰는 뒷골목의 소영웅 노릇도 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영화인들을 만나면 노상 동문인 최남현 을 걱정하는 우정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전 해,1944년 신극계의 명문 극예술협회에 입단했다는 짤막한 이력이 배우협회에 남아있다. 연극계의 원로 김동원 씨는 1947년 8월 극예술협회 제3회 공연 <은하수>무대에 최남현 이 단역으로 출연한 기억을 말한다. 당시 열성적인 연극지망생이던 현 감독협회 임원식 씨도 연극무대에서 열연한 최남현의 무대를 지금도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후 영화배우로 전신한다. 그 무렵 연극,악극 등 무대에서 활동하던 주선태, 김칠성 등 많은 배우들이 영화계로 이동하였다. 1949년, 이규환 감독의 < 돌아온 어머니 >에 출연함으로써 영화배우로 첫발을 디딘다. 당시의 명배우이자 다음해 월북한 김연실 과 함께 고난에 찬 한 가정이 슬픔과 역경을 그린 가정극이었다. 최남현은 연극에서 연마한 단단한 연기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배우 생활은 30년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1980년 김수용 감독의 < 물보라 >가 마지막 작품이었다. 30년 동안 157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더러는 주연 역할도 했지만 대부분 조연배우로 시종하여 한국영화 조연배우의 대명사처럼 그의 위치는 확고했다. 70년을 고비로 TV시대가 열리게 되어 많은 배우들이 TV 안방극장으로 이동하였으나 최남현 은 고집스럽게 스크린을 지켰다. 가끔 TV드라마에 모습을 나타낸 일은 있었지만 단연코 영화가 주무대였다. 최남현의 전성기는 60년대였다. 70년대 이후 영화 환경도 바뀌고 영화의 주제나 소재 역시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60년대의 한국영화의 이야기에 최남현이 맡을 만한 배역이 많았다고도 할 수 있다. 관객의 주력이 연령층이 젊어지고 감각적인 세대로 바뀌면서 최남현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진 것이다. 70~80년까지 출연한 작품은 157편 들 18편이다. 최남현의 역은 배우 다양했다. 정장하면 위풍당당한 노신사로 회사의 대 중역이나 회장감이요, 사극에서는 관록있는 당상관, 홈드라마에서는 다정하고 지엄한 가부장, 흙냄새가 물씬나고 촌로(村老), 악역으로 나타나면 암흑가의 냉혹, 매정한 보스로 못할 것이 없었다. 그는 곧잘 김승호 와 주선태 , 허장강 등과 같이 어울리는 역할을 했다. 특히 김승호와는 절친한 술친구였지만 스크린에서는 불꽃 튀는 라이벌이었다. 김소동 감독의 < 돈 1958 >에서 김승호와 논두렁 같은 데서 마치 투우사처럼 맞겨루는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임원식 감독은 김승호 와 공연하게 되면 최남현 은 무서운 기백으로 연기 대결에서 신바람이 나서 한치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긴장했다고 말한다. 최남현을 여섯 번이나 영화에 캐스팅한 김수용 감독은 '최남현 씨는 집념과 기백을 가진 연기자였다. 최남현 스타일이라고 부칠만한 독특한 개성과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NG를 내가면서 연기에 몰두하였다. '고 말한다. 최남현 스타일이란 그의 중후하고도 열정적인 몸짓, 텁텁한 목소리에 너털웃음 그리고 미묘한 감정을 잘 표현하는 개성적인 액션을 말하는 것이다. 김승호가 유들유들하면서 부드러운 면이 있었다면 최남현은 대조적으로 거칠고 힘주는 연기파였다. 그래서 김승호와 최남현은 당시대의 경쟁자이면서 사적으로는 강장 절친한 술친구였다. 최남현의 연기 중 가장 인상적인 영화로 이만희 감독의 < 싸리골의 신화 1967 >와 김수용 감독의 < 혈맥 1963 > 두 편의 기억이 가장 뚜렷하다. <싸리골의 산화>는 6.25 한국전쟁기를 배경으로 목숨을 걸고 마을과 낙오 국군을 감싸는 한 촌로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그의 동문인 선우휘 의 원작이었다. 마을의 원로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한 노인(강노인)은 한국적 전통사회에서 규범이 될 만한 촌로였다. 맨손으로 공산군에 장악된 마을에서 지혜로움과 용기로 국군낙오병을 구출한다. 다소 반공영화의 유형에 빠지기는 했어도 매우 훌륭한 영화였다. 그리고 김영수 원작, 김수용 감독의 <혈맥>에서는 실향민들이 모여 사는 해방촌을 무대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절망을 극복하여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 잡초와 같은 생명력과 서민들의 애환을 밀도있게 그린 작품이었다. 이 두 작품에서 주연(한국연극영화예술상)과 조연(청룡상)상을 수상했다. 혈맥에서는 깡통영감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버지 역에 최남현, 아들 김승호와 함께 명콤비를 이루어 절묘한 극적인 고양감을 이루어냈다. 이밖에도 최남현 이 조연배우상을 맡은 것은 여러 차례 있었다. 1966년에는 전범성 감독의 < 추풍령 >에서 대종상 조연상을 수상했고, 1959년에는 유현목 감독의 < 인생차압 >에서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 1960년에는 유현목 감독의 < 구름은 흘러도 >에서 남우조연상 그리고 1980년 제19회 대종상에서는 공로영화인에게 주어지는 특별연기상을 받는 등 조연배우상을 많이 차지한 한 사람이었다. 그는 실향민이라서 가족이 별로 없었다. 아내는 지명으로 오랫동안 병석을 떠나지 못했고, 그의 유일한 외아들과는 평화롭지 못했던 것 같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유일한 낙은 술과 마작 그리고 화투놀이였다고 한다. 술은 두주불사였고 화투놀이에는 거의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는 소문이 났다. 또한 정력강장제인 물개를 과도하게 먹어서인지 정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을 재촉한 원인이라고 주위에서 수근거렸다고 한다, 80년대 이후 최남현 의 이름도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고혈압 등 지병이 악화되고 의지할 곳 없이 경기도 한 마을에 몸을 의지했다. 그를 좋아하는 열렬한 팬인 한 교사의 돌보임을 받다가 끝내는 시골 양로원에서 쓸쓸히 인생을 거두었다. 1990년 2월 26일 그의 마지막 주소는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신장사리 385번지였다. 그때는 술친구였던 김승호 , 주선태 , 김칠성 도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나고 각박한 영화계의 인심도 그를 애도하는데 흡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 세상 그처럼 한국영화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팬들의 박수를 받아온 배우였으나 말로는 그지없이 쓸쓸하고 허전하였다. 영광 뒤에 오는 허무함, 인생무상의 업을 지닌 채 최남현은 살아진 것이다. 그러나 배우로서의 최남현 이 업적은 한국영화의 황금시절의 화려한 추억과 함께 영화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고 누가 말한 바와 같이 배우 최남현은 아직도 당시에 살던 동시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최근 한국영화 관객도 젊어지고 영화도 젊어졌다. 그러나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이야기도, 깊은 감동을 주는 드라마도 자주 보기가 힘들어졌다. 감각적으로나 기술적으로는 눈부시게 발전한 것 같으면서 인간을 그리는 진정한 드라마도 찾기 힘들다. 영화의 정서나 미적 감동도 예전과 같지는 않다. 살벌한 폭력이 난무하고 스크린에서 짓거리는 대사들도 거칠고 여유가 없다. 문득 최남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요즘 배우들은 몸짓만 있지 연기가 있는가 자문자답한다. 그렇다고 다양한 성격이나 개성미가 살아있는가는 생각케 되었다. 60년 한국영화를 주름잡던 대배우들 그들이 엮어낸 인간모양 같은 것이 그립다. 스타만 있고 배우가 부재한 한국영화의 앞날이 염려되는 것도 노파심일까? 보편적인 관객들은 과연 영화에서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더 좀 생각해 봐야겠다. 호현찬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출 생 : 1919년 1월 7일 평안북도 정주 1990년 2월 26일 사망 데 뷔 : 1949년 이규환 감독 < 돌아온 어머니 > 주요 작품 : < 싸리골의 신화 >, < 인생차압 >, < 세종대왕 >, < 공처가 3대 >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