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
- 감독
- 김한결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이미소, 안재홍, 배유람, 김이정
사진: " Lost in Translation ", IMDb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 >(소피아 코폴라, 2003)는 소통을 통해 위안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도쿄라는 낯선 도시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삶의 고독 속에서 표류하는 외로운 두 미국인 남녀의 정서적 교감을 그린다. 중년 배우 밥(빌 머레이)은 위스키 광고 촬영차 일본을 방문했지만,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문화적 이질감 속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오랜 결혼생활을 이어온 아내의 시차를 고려하지 않은 연락은 그에게 공허함과 권태로움만을 안긴다. 갓 대학을 졸업한 샬롯(스칼렛 요한슨)은 사진작가 남편의 출장에 동행해 도쿄에 머물고 있지만, 홀로 보내는 나날 속에서 막연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혼란을 느낀다. 두 인물은 공통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단절을 겪으며 심리적 고립에 빠져 있다. 영화는 초반 엘리베이터 장면부터 밥을 외부인으로 설정하는 위트 있는 연출의 묘미를 보여준다. 좁은 공간 안에 왜소한 체구의 동양인 무리 사이 홀로 우뚝 솟은 밥의 대비되는 신체 비율을 정면으로 직시한다. 아무런 대사 없이 그가 완벽하게 ‘이방인’이라는 걸 보여준다. 구도와 비율만으로 메시지를 센스 있게 전달하는 장면이다. 밥이 홀로 머무는 호텔방은 고독과 침묵이 가득하다. 지극히 미니멀하고 한없이 적막함이 느껴지는 온기 없는 방이다. 무기력한 밥을 응시하는 카메라는 무심하게 정지한 상태로 여백을 많이 둔다. 배우의 체구가 큰 편임에도 불구하고 방 안에 덩그러니 홀로 있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밥의 시선으로 보이는 일본 TV 프로그램 속 기이하고 과장된 이미지들은 그의 문화적 소외감을 더욱 부각시킨다. 사진: " Lost in Translation ", IMDb (Photo by Yoshio Sato - © 2003 Focus Features) 샬롯이 호텔방에서 바라보는 창밖 도쿄 도심은 차갑고 건조하다. 넓게 펼쳐진 도심뷰 창문 앞에 홀로 배치된 샬롯의 뒷모습 샷들은 창문 너머 세상에 대한 동경이거나 혹은 철창 같은 호텔방을 벗어나 해방을 갈망하는 욕망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 성 꼭대기에 갇혀 있는 고립된 공주처럼 창밖 배경과 인물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고독감은 증폭된다. 방 안에 흐트러진 옷가지와 정리되지 않은 소품들은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혼란스러운 그녀의 내면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듯하다. 종이꽃으로나마 방 안을 꾸미려는 샬롯의 행위는 삶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샬롯이 우연히 꽃꽂이 수업 공간에 들어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교감하며 꽃 한 가지를 꽂는 장면은 소소하지만 묘한 울림이 있다. 이 장면은 비언어적 교감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 사진: "Lost in Translation( 1 , 2 , 3 )", IMDb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샬롯의 시선으로 보이는 혼잡한 도심 풍경을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불안하게 보여준다. 건물의 파사드 광고에 등장하는 공룡들의 이미지는 그녀가 있는 공간을 더더욱 낯설고 모호한 공간으로 느껴지게 한다. 홀로 지하철을 타고 찾아가는 신사 또한 서양인에게는 낯설기만 한 공간일 것이다. 영화는 뜻을 알 수 없는 일본어 네온간판들이 가득한 번화한 야경 거리, 파친코 상점, 가라오케 같은, 이들에게 더욱 낯설게 다가올 공간 속에 인물들을 배치한다. 캐릭터의 감정적 소외를 컬러풀한 조명의 시각적 요소와 시끄럽고 알 수 없는 언어의 청각적인 요소에 대비시킨다. 도시의 혼잡함과 인물의 고요함을 반복적으로 오가며 그들의 정적인 내면을 부각시킨다. 화려하고 매혹적이면서 동시에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도시라는 점에서 도쿄라는 배경은 영리하면서 감각적인 선택이다. 그들에게 익숙한 공간을 설정했더라도 이야기는 성립되었겠지만, 의사소통도 감정소통도 할 수 없는 철저한 고립 상태의 이방인으로 만들 수 있는 배경을 택한 거다. 일상으로부터 격리된 낯선 문화 속에서의 혼란과 외로움의 정서가 배경과 어우러져 한층 더 밀도 있게 시너지를 낸다. 사진: "Lost in Translation( 1 , 2 )", IMDb 언어와 문화가 다른 새로운 시공간 속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단절된 상태였던 이들은 서로에게 동질감을 긴밀하게 느낀다.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공감대로 맺어지며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 이제 프레임 속에서 그들은 각자 홀로가 아닌 둘이 함께 존재한다. 이들이 소통해 나가면서 서구적 시선으로 바라보던 어색하고 불편한 낯선 나라의 문화는 다른 시선으로 바뀐다. 여전히 말은 통하지 않지만, 일본인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들의 문화를 향유하고 유쾌하게 도시를 경험하며 즐긴다. 홀로 경험하는 도쿄는 낯설고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둘이 함께 하는 도쿄는 새롭고 신기하고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지치고 무기력한 눈으로 바라보던 낯선 풍경은 술에 취해 혼미한 시선으로 몽환적이고 매혹적인 풍경으로 바뀌었다. 드디어 맞이하는 해방감과 설레임이 도쿄거리의 흐릿한 불빛들과 함께 자유로이 부유하는 듯 보인다. 사진: " Lost in Translation ", IMDb (Photo by Yoshio Sato - © 2003 Focus Features)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의 외피를 썼지만, 이들의 관계는 이성 간의 감정이라기보다는 모호한 플라토닉 우정에 가깝다. 한 침대에 누워 함께 밤을 보내는 장면에서 샬롯의 발에 살며시 올려놓은 밥의 손은 묘하게 에로틱하면서도 숭고함마저 깃든다. 무언의 위로와 정서적 교감이 정점으로 느껴지는 최애 장면이다. 마침내 이들은 이렇게 숭고하게 그토록 원하던 깊은 잠에 들며 평온한 밤을 맞이한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 서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이들은 계속 함께 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서로가 외롭지도 권태롭지도 않기를 바랄 것이다. 진솔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우수에 찬 마지막 시선은 서로를 보듬어주고 관객들을 위로한다. 이들이 작별하는 엔딩의 도쿄 도심 풍경은 이전에 보여줬던 도심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이전의 도심이 화려한 간판 불빛에 눈부시고 정신 없이 번쩍였다면, 엔딩의 도심은 차분하고 서정적인 감성이다. 동시에 두 인물의 정서적 변화도 느껴진다. 영화는 시종일관 말을 아낀다. 하지만 우리는 설정된 무드의 공간 안에 배치된 인물들을 보면서 그들의 감정에 충분히 공감한다.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도 탁월하지만 침묵 속에서 공감할 수 있도록 언어 대신 이미지로 말하는 느낌이다. 시각적인 요소를 통해 인물의 공허한 심리묘사를 섬세하게 연출한 영화라는 생각으로 공유하고 싶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스파이크 존즈의 < 그녀(HER) >(2013) 역시 인물의 감정선을 반영한 영상미가 인상적이었는데,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음에도 그 파동이 강하게 전달된다고 느꼈던 소피아 코폴라의 초기 작품을 최종 선택하게 되었다. 공간이 단지 보기 좋은 배경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내러티브와 연계되어 인물의 감정이나 이야기를 표현하는 서사의 일부로 작용할 때 미장센의 진정한 힘이 발휘된다고 생각하고, 또한 그런 미술을 지향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마친다. 사진: " Lost in Translation ", IMDb 서성경(미술감독) l 이야기에 숨결을 더하는 미장센을 지향합니다. < 사바하 >(장재현, 2018), < 가장 보통의 연애 >(김한결, 2019), < #살아있다 >(조일형, 2020), < 원더랜드 >(김태용, 2024), < 파묘 >(장재현, 2024) 미술감독.
타인의 사랑을 비웃지 마라, < 가장 보통의 연애 >( 김한결 , 2019) 2010년대 한국 영화는 많은 자본이 투입된 시대극이나 범죄 영화 등의 상업 영화에 치중하면서 코미디나 멜로드라마 같은 소소한 재미를 주는 장르는 점점 힘을 잃었다. 특히 TV에서 흔히 즐기는 로맨틱 코미디를 스크린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돌이켜 보면 200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를 필두로 젊은 여성의 일과 사랑을 주제로 한 칙릿 영화 열풍이 불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인턴>(2015) 같은 여성 서사 영화들이 호응을 얻은 상황에서 국내에선 과거와 달리 보다 현실적인 연애에 기반한 로맨스 영화들이 기획되었다. 톡톡 튀는 대사와 입심이 재미를 주는 스크루볼 코미디처럼 수다가 늘어났지만, 세련되고 지적이라기 보다는 남녀의 반복되는 다툼, 질투, 이별 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 러브픽션 >(2011)은 사랑하는 그녀의 겨털(취향!)과 과거사를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충고했고, < 연애의 온도 >(2013)는 서로를 아프게 상처내는 연인이 이성을 잃고 치고받도록 내버려두었다. 이 영화들은 "다신 안 그럴게!", "나, 사랑하긴 해?" 같은 대사로 가득 차 있었다. 즉 누구나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여러 번 내뱉은 말이다. 물론 이런 일상적인 대사는 관객과 쉽게 교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헤어지자!"라는 대사와 생채기가 난무한 가운데 남성의 이기심과 욕망이 느닷없이 심판대에 올랐다는 데 있다. < 봄날은 간다 >(2001), < 클래식 >(2003) 같은 2000년대 영화들이 순둥이 남성의 순애보에 방점을 찍은 것을 떠올린다면 분명 급격한 변화였다. 이제 진흙탕 로맨틱 코미디는 남성 캐릭터의 감추고 싶은 민낯(무책임감과 찌질함)이 모조리 드러나는 무대가 된 것이다. 남성용 면죄부는 소멸하고 그들의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멜로드라마 < 건축학 개론 >(2012)이 첫사랑의 판타지를 극대화하고 남성의 욕망에 충실히 부합(심지어 과거의 첫사랑 여인을 현실에 소환해 사랑 고백을 들으며 판타지를 완성)했던 것과 다른 노선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남녀가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다시 만나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가장 보통의 연애>(2019) 역시 흔하디 흔한 로맨틱 코미디다. 새로운 회사의 출근 첫날, 직장까지 찾아온 남친과 헤어지려고 싸우는 선영( 공효진 )과 파혼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매일 술을 찾는 재훈( 김래원 )의 직장 연애담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쉽게 요약하면 "같이 한잔 할래?"로 시작해 취중진담, 두주불사, 설왕설래로 발전한다. 그들이 안내하는 술자리에서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술 권장 영화지만 다소 성급하게 저평가받는 것과 달리 의외로 급진적인 면모가 있다. 사랑과 성공에 대한 판타지나 위로를 내세우는 대신 상처뿐인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기 때문이다. 2010년대 한국 영화는 잊힌 과거를 다시 복기하는 문제작을 많이 내놓았지만, '지금, 여기'라고 칭할 수 있는 현재의 문제를 담으려는 기획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 82년생 김지영 >(2019)이라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업 영화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접근한다면 보통의 연애 속에서 ‘가장 보통의 현실’을 찾을 수 있다. 이 영화가 담아낸 직장 에피소드(뒷담화 문화)나 남녀 사랑법은 현실의 지표일 수밖에 없다. 세간의 부당한 평가와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선영을 통해 남성 중심적인 한국 사회의 단면이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은 피해 등을 부수적으로 고발한다. "남자랑 여자랑 같냐?"라는 말하는 재훈에게 "같지!"라고 외치는 선영의 말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 코미디로 가볍게 풀어냈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일상 속에 얼마나 스며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들이 스산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여전히 주목하게 만드는 것은 남성 캐릭터다. 재훈은 <러브픽션>의 주월( 하정우 )과 <연애의 온도>의 동희( 이민기 )가 보여준 찌질함과 무모함에 비해 한 단계 성숙한 인물이다. 선영과 재훈, 두 사람은 또래지만 사랑의 가치를 믿는 재훈이 사랑의 환상을 믿지 않는 선영에 비해 훨씬 보수적으로 비춰진다. 언뜻 마초(속칭 '꼰대')처럼 보이지만, 재훈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포장 없이 밝히는 솔직함을 지녔다. 강하면서도 나약한 모습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남자. 그의 이상과 욕망은 현실에서 무참히 배반당하지만 그렇게 무너지면서 스스로 자신의 환상에서 벗어난다. 엔딩에서 선영과의 재회는 로맨틱 코미디의 예정된 컨벤션이지만, 그는 섣불리 사랑이라는 단어를 동원하기 보다는 "보고 싶었어"라고 고백하는 그녀의 입술을 읽어낸다. 이 순간 술자리에서의 게임이 ‘사랑의 게임’으로 이어지고 연장된다. 모든 게임은 동등한 파트너가 필요한 법이고, 그 룰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연애의 시작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이제야 남성은 자신의 거울인 여성을 통해 욕망과 대면한 것일까?). 시시껄렁한 농담과 반복되는 투정, 술에 의존하는 밀당이 자유롭게 성행하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다. 무모하게 사랑을 갈망하고 실험하는 스크린의 연애 생태계는 우리의 현실과 일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놀랍게도 우리가 감추고, 잊고 싶어하는 기억과 추억들을 다시 살려내고 있다. 그 남자, 그 여자가 일으키는 사건사고가 그리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나, 자신의 사랑을 돌이켜보게 만드는 ‘로맨틱 정글’로의 초대는 아찔하지만 언제든지 환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