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야, 이제 그만 잠들렴
- 감독
- 김한상
- 제작년도
- 2000
임권택 감독의 스릴러 영화 < 속눈섭이 긴 여자 >(1970)의 한 장면. 옛 애인으로부터 남편에 대한 의혹을 들은 숙진은 빈 집에서 정적 속에 나타난 검은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놀라고 곧이어 묘령의 여인의 방문을 받는다.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한 그녀, 자기 이름을 전하면 남편이 알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남편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의혹에 시달리는 숙진의 불안한 심리는 정적을 깨는 두 검은 존재에 의해 편집증적으로 증폭한다. 이 검은 방문자, 도발적인 눈빛에 연갈색 피부를 한 그녀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남미리 (南美里)다. 남미리가 맡은 미아는 ‘방탕’한 생활과 범죄를 저지르고도 끝까지 반성적인 면모라고는 찾을 수 없는, 뼛속 깊이 ‘나쁜’ 여자다. 매사에 무관심하고 권태로운 듯이 도도한 남미리의 표정은 그런 캐릭터에 힘을 실어 넣는다. 이처럼 나쁜 여자이거나 ‘타락’한 여자, 혹은 남자의 통제 아래 머무르지 않는 여자로 등장하는 남미리 의 얼굴은 1960~70년대 영화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주연급으로 출연한 영화가 많지는 않아도 그녀의 독특한 인상과 연기는 그 대부분의 영화에서 짙은 잔영을 남기고 있다. ‘스타일’이 망가지는 것이 싫어서 피임도구를 사고 남편이 꺼리는 가족계획을 하는 한순(< 신식할머니 >), 약속에 늦은 상대를 바람맞히고 그의 경쟁자와 데이트에 나서는 클럽 댄서 유미(< 폭풍의 사나이 >), “사내한텐 아예 반하면 안되는” 세상의 원리를 잘 알아 남자에 냉소적인 터키탕 여성 순희(< 육체의 문 >), 그리고 게이샤로 변장을 하고 상대남에게 독이 든 술을 먹이는 “홍콩의 요화” 유미(< 홍콩에서 온 철인 박 >)는 모두 남미리였기에 가능한 캐릭터들이다. 그녀가 이렇게 인상적인 역할들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방탕과 순정의 양극에서 번민하는 여인상”을 연기하고 싶다는 배우 본인의 개성 있는 연기관 덕분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외적으로 그녀가 지니고 있던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이화여대를 중퇴하고 외국 유학을 했다는 경력은 그녀에게 단지 ‘지적인 여배우’ 정도가 아니라 경계 바깥의 문물에 대해서도 이미 남성들보다 잘 알고 있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위험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한 것 같다. 더구나 그녀는 데뷔 초기부터 이미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의 전속 모델로 유명했으며, “아름다운 각선미” 등으로 (소위 ‘순수함’과는 반대편에 있는) 육체파 스타라는 평가도 받고 있었다. 후기작에서 암흑가의 마담이나 클럽 댄서 역할을 유독 많이 맡았던 것은 이렇게 쌓여온 ‘일탈’의 이미지가 그녀에게 각인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케도 만든다. 아마도 도전적인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 남미리 본인의 과감함과 그렇게 자신감 있는 그녀를 ‘경계 밖의 여자’로 한정지으려 했던 집단적인 무의식이 만난 결과할 것이다. 영화 데뷔 전 대만 동오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그녀는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것으로 유명했고 실제로 제16회 아시아영화제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다. 중국어 실력과 대만 유학 경력이 그녀에게 ‘중국통’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던 것인지 남미리 는 영화에서 중국인 역할을 종종 맡기도 했다. < 여마적 > < 홍콩에서 온 철인 박 > < 인간 사표를 써라 > 같은 영화에서 치파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한·홍 합작영화 < 사랑의 스잔나 >에서는 홍콩 가수 진추하의 어머니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녀의 중국어 실력은 <인간 사표를 써라>에서 짧게나마 볼 수 있다. 영화배우 활동을 하는 도중에도 모델로서 신문·잡지에 ‘가을의 모드’, ‘직장여성 옷차림’ 같은 패션사진을 선보였으며, 1963년에는 ‘영화배우의 브라운관 화면 진출 제1호’로 KBS 일요연속극 <아내의 얼굴>에 출연했다. 최근 일반 슈퍼 판매 문제로 화제가 되었던 모 드링크 음료 광고모델로도 유명세를 얻었다. 영화계에서 은퇴 후 한동안 문화방송 근처에서 살롱을 경영했고 지금은 호주로 이민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 < 하녀 >를 말할 때 주로 강조되는 것은 주인공 동식( 김진규 ) 부부의 2층 양옥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지만, 이 영화의 분위기를 주조하는 것은 비단 이 밀폐된 공간만이 아니다. 초반부 동식과 여공 곽선영(옥경희) 사이의 에피소드는 뒤에 이어질 동식의 운명을 예견케 하는 복선인 동시에, 상경한 여성들의 불안정한 지위와 이를 방치하는 비정한 사회를 보여주는 독립된 사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곽선영에게 정직 처분을 내리는 사감 선생으로 나오는 이가 바로 고선애 (高善愛)다. 동식의 신고에 처벌을 잠시 주저하지만 사감실로 불려온 선영에게 정직 처분을 통보하는 그녀의 표정은 단호하다. 이 장면에서 무엇인가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선애의 얼굴이다. 양미간의 찌푸린 주름과 직삼각형 모양으로 힘을 준 눈매, 깎아지른 양볼 위로 윤곽이 드러나는 광대뼈, 그리고 단호하게 다문 작지 않은 입은 뒤돌아 서 있는 곽선영의 처연한 어깨와 확연히 대비를 이룬다. 그 입술 사이로 굵고 건조한 그녀의 음성이 ‘에누리’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고선애 는 특유의 인상과 목소리로 프레임을 장악하는 힘을 지닌 배우였다. 이를 알아본 것은 역시 김기영 감독이었던 것 같다. 고선애가 본격적으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한 첫 작품은 김기영의 두 번째 장편 < 양산도 >였고 이 작품에서 그녀는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아들을 둔 어머니로 나온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필름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반 실성한 상태로 아들 수동(조용수)의 무덤 앞에서 곡을 하다가 혼례 가마를 타고 그 앞을 지나는 아들의 연인에게 비수를 꽂는 여인을 연기한다. 탈춤을 추며 언덕을 올라오는 혼례 행렬과 그 사이로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가는 수동 어머니, 칼을 맞고 수동의 무덤으로 기어가는 옥랑( 김삼화 )의 모습이 연극적으로 이어지는 이 장면에서 고선애는 원시적인 모성을 발산하며 내러티브를 주술적인 단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이 직후에 옥랑과 수동의 영혼이 줄을 타고 승천 하는 장면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가 없다). 1911년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태어난 고선애 는 대구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한동안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인텔리 여성이었다. 스물넷이 되던 해에 순회공연 중심으로 신파극과 희극을 주로 상연하던 극단 신무대(新舞臺)에 입단하면서 무대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녀를 배우로 살아가도록 바꿔놓았다. 해방 전까지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한때 극단 금성좌(金星座)를 경영했을 정도로 무대생활에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 박제행 (朴齊行), 고설봉 (高雪峰) 등과 함께 해군본부 정훈감실 보도과 소속으로 극단 예술극회(藝術劇會)를 창립해 활동했으며, 국방부 정훈국 후원으로 제작되어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21일에 개봉한 영화 < 나라를 위하여 >를 통해 영화 데뷔했다. 전쟁 중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신극무대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전쟁이 끝난 후 1955년에 < 구원의 애정 >과 < 양산도 >를 통해 영화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비범함을 알아본 김기영 감독의 작품과는 달리 다른 대부분의 작품에서 고선애 는 비중이 적은 단역을 맡아야 했다. 작은 역할일지라도 연기의 폭은 상대적으로 넓은 편이었는데, 평범한 아낙네에서부터 교사처럼 지적인 여성이거나 상층계급의 부인까지 소화해냈다. 열사 유관순의 이화학당 스승(< 유관순 >)이나 YWCA 총무(< 상록수 >)처럼 식민지 시기의 엘리트 여성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교편을 잡았던 배경 덕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 양산도 >의 비극적인 어머니라든가 < 서울의 지붕밑 >에서처럼 미신을 믿는 교육수준이 낮고 가난한 아낙 역할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만의 장기가 발휘된 작품은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었는데 신필름의 영화들은 그런 그녀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본처들의 모임 ‘꿀벌회’의 회장으로 단호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 로맨스그레이 >나 YWCA 총무로서 농촌계몽을 위해 젊은 학생들을 불러모아 가르치는 백현경 역할을 맡은 < 상록수 >는 고선애 의 지적인 인상을 정형화해서 사용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이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신상옥 감독의 눈에 들었던 것인지 큰 역할은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신필름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고 그런 그녀를 ‘신상옥 사단’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일찍부터 < 천지유정 >이나 <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로 한·홍합작 영화에 출연했던 그녀는 신필름의 합작영화 제작에도 함께 했다. < 대폭군 >, < 반혼녀 >, < 흑발 > 등 필모그래피 후반의 영화들 상당수가 합작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며, 특히 <반혼녀>에서는 주인공 연화(리칭)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이승과 저승을 잇는 주선자 역할을 하는 늙은 유모로 극을 끌어가고 있다. / 글: 김한상
1968년 < 미워도 다시 한번 >을 필두로 1960년대 말, 70년대 초의 극장가를 장악했던 이른바 ‘신파’ 멜로영화의 위력은 막강했다. 4년간 4편까지 이어지며 흥행을 이어갔던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는 숱한 아류작을 낳았고, 극장가는 비련의 여인에 공감하며 저고리 옷고름에 눈물을 훔치는 아낙들로 넘쳐났다. 그에 비해 1974년 < 별들의 고향 >에서 시작된 ‘호스티스’ 멜로영화 장르는 확실히 좀 더 젊은 관객, 그리고 좀 더 많은 남성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전자가 상업영화 내부에서 복고적인 감성과 내러티브를 끌어들여 도달한 성취물이라면, 후자는 새롭게 상업영화로 진입한 청년 감독들의 젊은 감수성이 대중적 코드를 흡수하면서 만들어낸 발명품이었다. 여기까지가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로 이어지는 멜로영화 장르를 설명하는 데 있어 일반적으로 취해지는 구분이고, 또 그 시기 멜로영화를 설명해내는 ‘전부’다. 그 전부 속에서 흔히 호스티스 멜로로 분류되는 영화 < 내가 버린 여자 >는 인적(人的)으로 보았을 때 그 두 장르의 접점에 있는 작품이다. < 미워도 다시 한번 >으로 일약 흥행사로 떠오른 정소영 감독뿐 아니라 각본을 쓴 김수현 작가도 같은 시리즈에서 두 편의 시나리오를 담당한 바 있다. 쉽게 말해 1960년대 말 70년대 초의 ‘신파’ 멜로의 중심에 서 있던 이들이 10년 가까이 흐른 1977년에 이르러 당시 유행한 ‘호스티스’ 멜로의 문법으로 새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 속의 몇몇 장면에서는 당대 청년문화를 연모하면서 만들었을법한 설정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인적 관련성이나 관습적 표현에도 이 영화는 두 장르에 편입해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지점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어쩌면 1970년대 후반의 멜로를 설명하는 데 부족했던 공백의 지점을 메워주는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 판타지를 깨고나와 외치는 여자, 외면하는 남자 앞의 두 장르와 이 영화가 가장 크게 다른 지점은 멜로영화의 중심 소재인 ‘사랑’에 대한 입장에 있다. 신파 영화나 호스티스 영화가 공유하는 정서는 ‘그래도 사랑 그 자체는 순수하다’는 데 있다. < 미워도 다시 한번 >은 유부남의 무책임한 행동이 빚어낸 비극을 그리고 있지만 남자주인공이 보인 사랑의 감정만큼은 진실한 것이었다는 내용을 전체 시리즈에 걸쳐서 담아내고 있으며, < 별들의 고향 >이나 < 영자의 전성시대 >의 경우에는 호스티스 여성을 학대하고 외면하는 사회에서도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는 남성이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 내가 버린 여자 >와 같은 해에 나온 < 겨울 여자 >일 텐데, 여기서 여주인공은 모두의 사랑에 감사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이 작품의 기조는 그러한 사랑이 한 꺼풀 두 꺼풀 벗겨내 들어가보면 결국 계급과 성적인 차이를 가려주는 판타지일 뿐이며, 그것을 모두 벗겨내고 남는 것은 비정한 현실이라는 데 있다. 부모 없이 고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란 정애( 이영옥 )가 좋은 가문과 안정된 직장을 배경으로 늦게까지 결혼을 미루고 있던 수형( 윤일봉 )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결혼이 연적의 방해와 주변의 반대로 위기를 맞아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는 이야기의 전반적인 구조는 평범해 보이긴 한다. 그러나 파국을 불러오는 여러 계기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이유는 결국 두 사람의 계급적 격차, 성적인 차이다. 유산한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말하라며 다그치는 수형에게 정애는 말한다. “네, 결국은 당신도 그 두터운 위선의 껍질을 벗었군요. 그걸 벗으니 당신도 별수 없어. 그렇게 가문이 좋고 혈통이 좋고 교양 있는 신사도 별수 없군요. 좋아요. 어차피 우린 맞지 않아요. 하늘과 땅 차이죠. 네, 난 거짓말을 밥 먹듯 해치우던 거리의 계집이에요.” 작가 특유의 대사 처리가 돋보이는 이 장면은 이 영화가 그때까지 끌어오던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한순간 폭발시키며 급격하게 비극적 결말을 예상케 하는 클라이맥스인 동시에, 그간 한국 멜로영화가 꼭꼭 숨겨왔던 비밀, ‘사랑’에 대한 그 순애보적인 판타지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명장면이다. 분노하며 집을 나가라고 외치는 수형에게 정애가 다시 응수한다. “나가죠. 나가고말고요. 더 붙잡는대도 난 갑니다. 발자국 소리도 크게 낼 수도 없어요, 이 집에선. 마음 놓고 웃지도 못해요. 춤을 춰선 안 된다, 반바지를 입어서도 안 된다, 이 집에선 안 되는 것 천지죠. 언제나 고상한 말씨, 고상한 옷차림, 고상한 걸음걸이. 아…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충실한 로케이션으로 비정한 격차를 표현하다 집을 나간 정애는 유산의 후유증으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다시 집앞에 선다. 자신의 사랑이 진실했음을 호소하며 문을 열어달라는 정애, 그러나 수형은 정애와의 관계를 포기하고 술에 취해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아니, 그것은 정문과 집의 거리가 먼 저택이라서 가능한 일, 그래서 더더욱 그녀와 수형의 격차를 상기시키는 공간적 거리 때문이다. 이처럼 이 작품의 큰 미덕은 장소의 선택으로 판타지 이면의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데 있다. 가파르게 솟아있는 계단을 올라야만 도착할 수 있는 달동네 꼭대기의 낡은 집들과 명동 거리 뒤편의 허름한 막걸리 집, 말끔한 독신자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아파트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교외 저택 등등 이 영화가 촬영된 실제 공간들은 그저 배경이 아니라 작품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정애의 집을 찾은 수형이 서서 내려다보는 서울 달동네의 빽빽이 들어찬 집들은 그녀가 그에게 보여주기를 꺼렸던 적나라한 현실이자 두 사람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보여주는 비정한 스펙터클이다. 명동은 그런 그녀에게 잠시 동안의 탈출구를 제공하는 춤과 음악의 공간이지만, 그 뒤편 술집의 비루한 공기를 비집고 들어선 수형의 멀끔한 양복이 주는 어색함은 다시금 그 격차를 상기시킨다. 그에 비해 두 사람이 어렵지 않게 결혼을 결심하고 마련한 보금자리는 자가용으로 운전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교외의 큰 저택이다. 결국 정애는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앞에서 죽음을 맞는다. “문 좀 열어주세요”라는 그녀의 비극적 대사는 두 남녀의 ‘사랑’과 결혼의 비정한 현실을 환기시키는 정치적인 대사나 다름없다. 특정한 성취를 거둔 작품 한 편으로 볼 수도 있지만 굳이 이 작품에 ‘제3의 멜로’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여기서 나타난 변화가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로 이어지는 멜로 장르를 설명하는 데 주효하다는 판단에서다. 영화와 방송 드라마 양쪽에서 자신의 영역을 개척한 김수현 작가의 작품들을 비롯해 이 시기의 멜로는 비로소 여성을 ‘어머니’나 ‘사랑의 포로’가 아닌 주체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장르를 향유하고 즐겼을 여성 관객 스스로의 변화와도 관련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