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유년
- 감독
- 김현수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안승민, 김종만, 윤진서, 서문경, 이덕화, 권현민, 곽정일, 유일한, 박건률, 김원기, 김지현, 이진희, 이미진, 조영민, 조광민
< 사냥의 시간 >( 윤성현 , 2020)에 담겨있는 ‘영화’들에 관하여 영화가 시작하면 두 명의 양아치가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면서 네가 내 옷을 몰래 입었네 마네를 가지고 말씨름을 한다. 구제 옷을 훔쳐 외국으로 넘기는 브로커 형을 통하면 300벌 정도를 팔았을 때 100불은 벌 수 있을 거라 말하는 장호( 안재홍 )와 “가오 떨어지게 그지 새끼도 아니고 남이 입던 옷을 으트케 팔어?”라며 불평하는 기훈( 최우식 )의 대화를 보여주던 카메라는 이들이 편의점 문을 나설 때 따라 나가서는 거리 풍경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훑는다. 그리고 두 사람이 탄 자동차가 출발하면 퉁퉁탁탁거리는 음악과 함께 영화의 타이틀이 화면에 박힌다. 나는 이 첫 시퀀스에서 이미 <사냥의 시간>이란 영화를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된다고 본다. 장호와 기훈이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친구 준석( 이제훈 )의 출소 날에 마중을 나가는 이 첫 시퀀스는 비유하자면,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빠져드는 터널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신이다. 이 영화는 앞으로 망해버린 미래 도시의 을씨년스러운 거리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될 것이며, 그 거리의 주인공들은 ‘스투시’와 ‘슈프림’을 즐겨 입는 양아치들이 될 것이란 사실을 끝내 주는 사운드와 미술로 꾸며서 보여준다. 최근 몇 년 간 나는 이렇게 용감한 오프닝 신을 가진 한국영화를 보지 못했다. 편의점에서부터 장호와 기훈을 따라 나선 카메라의 움직임은 <칠드런 오브 맨>에서 주인공 테오(클라이브 오웬)가 커피를 사서 카페를 나서다가 폭탄이 터지는 장면과 유사하다. 두 사람이 준석을 만나러 교도소까지 가는 와중에 보여주는 길거리 풍경에는 <아키라>가 상상하며 담아낸 2019년의 망해버린 도쿄 거리의 이미지와 <공각기동대>의 홍콩과 상하이 뒷골목을 섞어 만들어낸 이미지, <증오>에 등장하는 파리 외곽 상트르 레비뉴의 낡은 아파트 이미지 등이 뒤섞여 있다. 윤성현 감독이 제시하는 미래 도시 서울의 이미지는 수많은 서브컬처 이미지에 기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화로 신속하게 빠져들도록 의도한 이 오프닝 신이 되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도 작용한다. 이 영화를 스마트폰이나 모니터, TV로 관람한 대부분의 관객은 영화가 제시하는 방식대로 이 판타지의 세계에 빠져들지 못한 것 같다. (이야기가 아닌) 내가 지금 뭘 본 것인지, 이미지를 믿지 못한, 혹은 속지 않은 관객은 아마도 다음 신에서는 귀를 의심하게 됐을 것이다. 원화 가치가 폭락해 수중에 지니고 있던 화폐가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리고, 도모할 미래 역시 불투명한 상황에서 준석의 무리들은 범죄를 모의했다 실패한 전력이 있다. 그 책임을 준석 혼자 떠안고 감옥에 다녀왔으며 이제 이들은 또 다른 범죄를 구상한다. 캐릭터의 상황을 묘사하는 이 클럽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직설적이고 낯간지러운 대사를 주고받는다. 이를테면 하와이를 닮은 대만의 어떤 섬에 가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말, 20만 불만 있으면 아는 형님이 소개해준 대로 관광객을 상대로 한 장사로 한 몫 잡을 수 있다는 말, “야 거기 가서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 지옥에서 벗어나서.”라는 준석의 대사를 들을 때 아마도 추정컨대,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그저 허황된 것들을 휘황찬란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한 지 7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눈과 귀를 모두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 펼쳐진다. 그런데 나는 <사냥의 시간>이 공개된 후 지난 몇 주간 이 오프닝 장면을 10번도 넘게 돌려봤다. (어떤 스피커를 보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는) 가슴을 울리는 프라이머리의 음악과 허공을 헤매는 듯한 카메라워크, 그리고 직설적인 대사가 만들어내는 조화는 나의 눈과 귀를 모두 만족시켜줬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다시 보는 중인데 <사냥의 시간>의 오프닝은 말그대로 키치적이다. 나는 진지한 몰입을 스스로 거부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이 판타지의 세계로 손쉽게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었다. <사냥의 시간>은 동화에 가깝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신이 용감하다고 느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를 지옥에 갇혔다고 여기는 순진한 악동들이 끔찍한 범죄를 모의하는 오프닝. 별 의미 없는 20만 불이란 숫자. 인생 역전을 모의하면서 펼쳐 놓는 너무나도 소박한 하와이 같은 대만의 섬 이미지. 윤성현 감독이 꾸며 놓은 서브컬처 기반의 환상 동화 첫 페이지를 2020년의 관객들은 상당히 낯설어 하는 듯하다. 2019년, 윤성현 감독을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그가 후반작업과 편집 중인 <사냥의 시간>을 소개하며 해준 말도 기억한다. 그날의 대화 주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헬조선’에 대한 문제의식, 데뷔작 < 파수꾼 >(2010) 이후의 두 번째 윤성현 영화라는 어떤 기대를 배반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향한 애정에 대해 그는 꼼꼼하게 설명했다. <사냥의 시간>에서 윤성현 감독은 헬조선에 관한 문제의식을 이미지로 표현한다. 영화 내내 준석이 감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과거 범죄가 뭐였는지, 이들을 추격하는 한의 사정이 무엇인지, 준석과 상수( 박정민 )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파수꾼>의 한 장면을 재현하듯 하는지 등등 저간의 사정을 알 길이 없다.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 순진무구한 청년들이 탈주극을 벌이는 과정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거대한 조직의 보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순간의 핏빛 안개가 곧 헬조선이다. 또 윤성현 감독은 <파수꾼>과 <사냥의 시간>의 차이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파수꾼>을 감독 윤성현이 가져가야 하는 방향이나 테두리로 생각했던 것 같다. <파수꾼>은 어찌 보면 내 안에 없는 재료를 가지고 나를 바꿔가며 만든 작품이다. 남자아이들이 주인공이지만 <파수꾼>의 연장선상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정서적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파수꾼>이 현미경같이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화라면 <사냥의 시간>은 현상 체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이 영화의 현상 체험은 윤성현 감독이 좋아하는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기인한다.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으로 일본 만화 <베르세르크>와 <아키라>를 꼽는 그는, <파수꾼> 이후 한동안 사이버펑크 영화를 준비하다가 <사냥의 시간>으로 선회했다. 추격자 한과 준석 무리의 대치를 통해서 그는 <매드맥스>와 <터미네이터>를 오마주한다. 준석이 친구들에게 도박장을 털자고 꼬시면서 “다 잘될 거야.”라고 말하는 부감숏에서는 저 멀리 화려하고 거대한 빌딩들이 만들어내는 마천루의 이미지가 펼쳐진다. 그 위에는 네온사인을 내건 애드벌룬이 하나 둥둥 떠다닌다. <블레이드 러너>가 상상하며 꾸몄던 영화 속 2019년의 도시 풍경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사냥의 시간>에서 가장 마음을 뒤흔든 이미지는 예고편에도 잠깐 등장하는 장면인데 이 무모한 범죄를 모의하고 나서 준석 무리가 창고에서 총을 테스트해보는 장면의 이미지다. 허름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청년들은 서로 총구를 겨누며 웃고 떠들지만 며칠 뒤면 그들의 인생은 세상에서 처음 겪는 끔찍한 악몽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새로운 삶을 꿈꾸면서 마지막으로 콩알만한 행복에 겨워하는 순간. <시티 오브 갓>과 <고모라>의 이미지가 <사냥의 시간>에도 담겨있다. <사냥의 시간>을 둘러싼 이미지의 재료가 무엇이 됐건 관객은 어색한 가짜라며 충분한 거리두기를 지켰다. “내 시간을 사냥당했다”며 댓글을 토해내던 관객들이 돌비 애트모스를 지원하는 극장 시스템에서 이 영화를 봤다면 어땠을까. 그 압도적이면서 디테일이 뛰어난 총격 소리와 음악에 지금보다는 더 빠져들 수 있었을까. 안개 자욱한 도시의 뒷골목, 사방이 꽉 막혀 미로 같은 지하 주차장, 더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항구의 끝자락이 지닌 을씨년스러운 이미지를 대형 스크린에서 봤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마블과 블록버스터의 시대에, 그리고 하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OTT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냥의 시간>에 대해서는 언제든 더 길게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다. 그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영화적 향수로 가득한 레퍼런스 영화 리스트가 될 것이다. 우리는 <사냥의 시간>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이미지의 재료에 관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청년들이 모여서 영화를 만든다. 아니, 이들은 영화를 만들기 전에 실은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서 일단 카메라부터 꺼내 들어 제작과정부터 찍기 시작한다. 이들이 찍은 모든 푸티지가 모여서 한 편의 영화가 되었다. 2017년 제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최고상인 코리안 판타스틱 작품상을 수상한 심찬양 감독의 < 어둔 밤 >(2017)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어느 대학의 동아리 ‘리그 오브 쉐도우’의 멤버들이 모여서 <다크나이트 리턴즈>라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다룬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동아리 멤버 캐릭터는 모두 실은 심찬양 감독의 실제 지인들이다. 쉽게 말해 <어둔 밤>은 영화에 대한 꿈을 이어갈 수 있을지 앞날이 불투명했던 한 젊은 감독이 주변 지인들을 꼬드겨 만든 영화다.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현실과 감독이 거의 흡사한 문제를 공유하는, 그리고 그것이 영화에 그대로 반영된 일종의 다이어리 같은 영화라고나 할까. 감독이 처음 완성했던 단편영화 < 회상, 어둔 밤 >(2015)의 결말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나중에 추가로 촬영을 이어나가 이른바 확장판에 해당하는 장편 <어둔 밤>을 완성했다는 점 역시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제작과정은 차차 뒤에서 설명하도록 하자. 우리는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를 몇 편 알고 있다. 배우나 감독, 촬영장을 소재로 할리우드와 미국 사회와의 속성을 꼬집는 로버트 알트먼의 < 플레이어 >(1992)나 현실과 영화 안팎의 경계를 뒤흔들며 마법 같은 순간을 포착하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 클로즈업 >(1990), 팀 버튼의 영화세계를 관통하는 캐릭터의 힘을 보여주는 < 에드우드 >(1994) 같은 영화들. 물론 여기에 더해 감독들이 사랑해 마지 않던 또다른 영화들에 바치는 오마주의 영역까지 확장해 생각해보면 영화에 관한 사랑을 영화 자체를 도구삼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영화적인, 그러니까 낭만적인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이런 류의 영화를 볼 때의 재미란, 의도적으로 관객 스스로 제4의 벽을 깨고 영화 안팎을 오고 간다는 점이다. 어디까지가 진짜 영화인지, 진짜 감독의 의도인지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비로소 관객은 영화적인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다시 <어둔 밤> 이야기로 돌아가보자면, 이 영화는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완결된 영화는 4부에 해당하는 전체 제작과정으로도 이어진다. 영화를 보고 제작과정까지 접해야 비로소 완성된 영화를 전부 봤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우선 1부의 제목은 <회상, 어둔 밤>. 영화가 시작하면 가상의 영화 동아리 ‘리그 오브 쉐도우’의 멤버들인 안감독(송의성), 심피디(심정용) 등이 자취방에 모여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처럼 “진정성 있는 영화를 만들어보자”며 의기투합한다. “할리우드에 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확신한 그들은 아직 시나리오도 쓰지 않은 자신들의 영화 <어둔 밤>을 훗날 리미티드 에디션 DVD로 발매하겠다며 거기에 수록할 메이킹 필름부터 찍기 시작한다. 이들의 영화는 본편까지 촬영을 마쳤지만 영화 속 캐릭터에 해당하는 헤드 스태프들의 잇단 군 입대로 결국은 빛을 보지 못한다. 선배들의 미완성 작업을 이어받은 동아리 후배 상미넴(김상훈)이 선배들의 기치를 이어받아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원칙주의적으로” 오디션을 봐서 배우를 선발해 촬영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어둔 밤>의 2부에 해당한다. 3부는 상미넴과 친구들이 완성한 영화 속 영화 <어둔 밤 리턴즈> 그 자체가 해당된다. 앞서 <어둔 밤>의 전체 제작과정이 4부에 속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심찬양 감독은 실제로 1부에 해당하는 단편 영화 <회상, 어둔 밤>을 만든 후에 극중 인물들이 결국 영화를 찍지 못하고 결말을 맞이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다가 이들이 만드는 영화를 완성시켜주자는 의미를 담아 2부와 3부를 추가로 기획하게 됐다. 또한 그는 연기 경험이 없고 본인 스스로를 드러내듯 연기하는 친구들의 날 것 같은 모습을 포착하고 싶었다. 거기에는 비전문 배우들이기에 롱테이크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현실적인 판단도 뒤섞여 있었던 셈이다. 또한, 1부를 촬영했던 심찬양 감독의 절친인 조병훈 촬영감독이 돌연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영화연구소(AFI)에 입학했는데 그가 2부 촬영 도중 갑자기 한국을 방문하는 바람에 <어둔 밤>의 3부 촬영을 맡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어둔 밤>이란 영화 전체를 휘감고 도는 ‘덕질’이란 정념이다. <어둔 밤>이 완성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좋아하는 감독 이하 친구들이 모여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다는 점, 그리고 그 마음이 그대로 영화의 시놉시스에 반영되었다는 점, 영화 속 인물들이 모여 최종적으로 완성한 3부 <어둔 밤 리턴즈>라는 영화 역시 < 다크나이트 >(2008)에 오마주를 바쳤다는 점 모두 ‘덕질’이란 정념의 산물이다. 심찬양 감독과 <어둔 밤>의 등장을 ‘할리우드 키드’ 다음 세대의 출현, 이를테면 ‘놀란 키드’ 혹은 ‘슈퍼히어로 키드’의 출현이라 부르고 싶은 이유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말버릇처럼 되뇌던 “진정성 있는 영화” 만들기라는 것은 우리 영화를 누구 누구의 영화처럼 만들고 싶다는 간절한 애정 즉 ‘덕질’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어둔 밤>이 잘 보여줬다. <어둔 밤>은 시작부터 끝까지 낯선 풍경과 낯선 표정과 낯선 앵글로 가득하다. 그것을 어설프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완성된 영화와 제작과정에서 보여준 진정성은 이들의 다음 작품을 절로 응원하게 만든다. 그것이 <어둔 밤>이 가진 에너지다. 이 영화가 개봉한지 딱 일년이 지났다. 그 사이 심찬양 감독은 두 번째 장편 영화 촬영을 마쳤고 영화에 등장했던 친구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커리어를 쌓아 나가고 있다. <어둔 밤>을 소개하면서 단 한 번도 ‘루저’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이유다.
다이캐스트 모형 자동차 브랜드 중에 ‘쟈니 라이트닝’이라는 미국 회사의 브랜드가 있다. 미국 마텔사의 ‘핫휠’, 일본 토미사의 ‘토미카’ 등이 경쟁상대로서 대표적인 모형 자동차 장난감 브랜드인데 쟈니 라이트닝은 토퍼 토이사에서 소유하고 있다가 여러 번 문을 닫고 다른 회사로 팔려가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오뚝이처럼 되살아나 모형 자동차를 생산해내고 있다. 국내 대형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는 흔한 제품이지만 수집가용으로 출시되는 한정판은 정식 수입이 안 되고 구하기도 어렵다. 쟈니 라이트닝에서 최근 ‘2017 미국 머슬카’ 시리즈를 출시했는데 그중에서 세 편의 영화에 등장했던 머슬카가 포함되어 있어 호기심에 주문했다. 영화 <배니싱 포인트>(1971)에 등장하는 1970년형 흰색 ‘닷지 챌린저 R/T’, <매리와 래리>(1974)의 1969년형 ‘닷지 차저 R/T’, 그리고 <잭 리처>(2012)의 1970년형 ‘쉐보레 셰빌 SS’ 모델이 그것이었다. 위 세 편의 영화는 탈주의 쾌감을 확실하게 선사하는 영화로 닷지사의 머슬카를 몰고 나오는 것 외에도 음악과 카체이스 스타일 등이 닮아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저격 사건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이 결백을 주장하며 지목한 단 한 사람 ‘잭 리처’가 사건 해결을 위해 홀로 나서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잭 리처> 역시 로드 무비 성격의 영화는 아니지만 차종에 있어서는 차저와 챌린저를 비롯해 다분히 미국 머슬카의 특징을 노린 선택이다. 자동차 모델명 뒤에 붙는 ‘R/T’는 1960년대 이후 닷지 차량에 사용된 성능 표시로서 ‘로드/트랙’의 약자를 뜻한다. R/T가 모델명에 붙은 차량은 서스펜션, 타이어, 브레이크, 엔진 등의 성능이 일반 모델보다 강력하다는 뜻이다. 제작진이 얼마나 큰 의미 부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자 신분의 주인공들이 머슬카를 몰고 질주하는 로드 무비 <배니싱 포인트>와 <매리와 래리>와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차종으로는 잘 어울리는 성능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물론 옳은 일을 하고는 있지만 도망자 신분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 잭 리처(톰 크루즈)가 모는 1970년형 쉐보레 셰빌 SS 모델의 ‘SS’ 역시 ‘슈퍼 스포츠 버전’의 약자로 사실상 R/T와 같은 뜻이나 다름없으니, 탈주 즉, ‘도망’이라는 로망을 추구하는 자동차 모델로는 합격점을 받고도 남을 차들이 아닐까? <배니싱 포인트>(1971) 닷지 챌린저 R/T 장난감 전문 회사들이 어른의 수집 취향을 정확히 꿰뚫고 이들 영화 속 차량을 취급한 것에서도 느낄 수 있듯, <배니싱 포인트>와 <매리와 래리>는 영화적으로도 ‘도망자의 차’에 입문하기 딱 좋은 영화다. 그중에서도 <배니싱 포인트>의 추격 장면은 카체이스 영화 역사를 통틀어 종종 베스트로 손꼽히는 시적인 여운을 선사한다. 이 칼럼을 쓰면서 너무 많은 영화들에 ‘역사상 베스트’ 운운하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한데 이 영화는 카체이스 촬영 기술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정서적 여운을 건드리기에 더욱 회자되는 것 같다. 아무튼 연출을 맡은 리차드 C. 사라피안 감독에 따르면 이 영화에 1970년형 흰색 ‘닷지 챌린저 R/T’를 등장시키려 한 것은 제작자인 대릴 F. 자눅의 뜻이었다고 한다. 제조사인 크라이슬러사에서 저렴한 값에 차를 렌트하는 대신 영화 곳곳에 크라이슬러사의 차를 등장시키는 일종의 협찬 광고를 따온 셈이다. 이 영화의 카체이스 스턴트 대역 운전을 맡았던 유명 스턴트맨 캐리 로프틴이 직접 닷지 챌린저의 토션 바를 쓰는 서스펜션 퀄리티가 촬영 및 쾌속 질주에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타이어가 터져 버릴 정도로 달리고 또 달리는 단순하면서도 과격한 탈주 장면은 언제든 다시 봐도 통쾌하고 묵직한 쾌감이 느껴지는데, 이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이자 카레이서 이력도 있는 주인공 코왈스키(배리 뉴먼)의 삶의 태도 혹은 성격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가 덴버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밤낮없이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그를 둘러싸고 억압하는 모든 사회적 굴레가 내던져지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래서인지 <배니싱 포인트>는 상당히 실존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로도 해석된다. 요새는 여러 가지 프로덕션 상의 이유로 이 영화처럼 질주하는 장면을 편집도 없이 길게 찍지는 않는다. 게다가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허허벌판을 가로지르는, 길고 긴 도로의 끝과 끝을 달리는 자동차의 모습만 보여줬다가는 평점테러 당하기 딱 좋을 것 같다. <리피피>(1955) ‘도망자의 차’라는 이상한 카테고리에 영화를 골라 넣고 있자니, 줄스 다신 감독의 <리피피>(1955)를 처음 만났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생애 마지막이자 최고의 작전이었던 퇴물 도둑 토니(장 세르베)의 보석털이가 실패로 돌아갈 운명에 처한다는 이야기인데, 누군가는 왜 이 영화를 누아르 영화가 아닌 ‘도망자의 차’ 카테고리에 들이미느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숨소리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긴박했던 그리고 또 작전 자체로 기발한 면모도 보였던 금고털이 장면도 사실 자동차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자동차는 의외의 순간에 결정적으로 등장한다. 범죄자로서의 프로 의식과 책임감, 내지는 비열하고 냉철한 감정이 뒤섞인 채로 주인공 토니가 결국 마지막 종착점에 다다랐을 때, 아주 처절하고 멋진 필사의 질주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토니가 올라탄 차종이 ‘포드 비뎃’이다. 유럽 최초의 8기통 자동차라고 알려져 있는데, 영화의 정서적 핵심에 해당하는 이 장면과 자동차의 성능이 잘 맞아 떨어졌을 거라는 추측을 해본다. 카체이스 장면을 감각적으로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슴 뭉클한(?) 도망자의 질주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자동차 영화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미덕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의외의 순간에 등장할 때 감동은 배가된다. <이탈리안 잡>(1969) 오스틴 미니 쿠퍼 S <리피피>가 프랑스 도둑들의 어떤 정신세계를 잘 보여줬다면 마이클 케인이 주연을 맡았던 피터 콜린슨 감독의 <이탈리안 잡>(1969)은 이탈리아 땅을 휘젓고 다니는 영국 도둑들의 영화다. 마크 월버그가 주연을 맡아 리메이크되기도 했는데 같은 브랜드의 자동차가 등장한다는 것 외에 마이클 케인의 오리지널 영화와는 여러모로 비교 불가다. 이탈리아는 람보르기니와 페라리를 만든 나라지만, 주요 도시의 길이 좁고 아스팔트 대신 자갈을 깔아 놓은 길도 많아 운전하기 썩 좋지 않은 나라라는 인식이 있다. 대신 조그만 크기의 자동차는 좁은 골목 사이 사이를 지나다니기에도 유용하고 또 영화적으로도 ‘탈주’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탈리안 잡>은 이러한 지역 특색을 매력으로 승화시켰다. 오죽했으면 무시무시한 스턴트 배우들의 운전 솜씨가 배우들의 연기를 압도하기까지 했을까. 런던 출신의 유명한 도둑 찰리(마이클 케인)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400만 달러의 현금을 탈취할 작전을 세우는데 이때 쓰이는 범죄 도구가 바로 1967년형 ‘오스틴 미니 쿠퍼 S’다. 지금은 ‘미니’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차는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BMC)에서 1959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현재는 인수 과정을 거쳐 BMW 산하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1960년대 당시 영국의 국민차로 각광받았는데 몬테 카를로 랠리에서 3차례나 우승도 했던 차다. 영국 도둑들이 영국 국민차인 미니 쿠퍼를 이끌고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크게 한탕 벌이는 영화의 줄거리 속에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재미있는 ‘자동차 부심’ 대결도 숨어있다. 극 중 찰리 일행은 거사 직전에 마피아들에게 붙잡혀 이탈리아를 빈손으로 떠나라고 협박을 당한다. 영국과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깡패 집단들끼리 기 싸움을 벌이는 상황인데, 영국의 미니 쿠퍼가 탄생하게 된 이유도 이탈리아의 피아트 때문이었다. 1956년 수에즈 위기로 심각한 연료난에 처했을 때 유럽 전역에서 소형차들이 각광받던 때가 있었다. 그때 이탈리아의 ‘피아트 500’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의 회장은 이 차를 극도로 혐오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대로 된 미니카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대안으로 미니 쿠퍼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렇다고 제작진과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계와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이 영화의 제작자인 매튜 필드와 마이클 딜리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이탈리아 대배우 로자노 브라지라와 람보르기니를 함께 등장시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누가 봐도 이탈리아의 상징 같은 배우와 자동차가 아닌가. 또 영화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스포츠카 디노 페라리에 얽힌 사연도 있는데 당시 피아트의 회장이었던 지아니 아넬리가 촬영을 위해 선뜻 빌려줬다고 한다. 왜냐하면 피아트는 영화의 배경이기도 한 토리노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기업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안 잡>의 제작을 반겼다고 한다. 당시 유럽 영화계에서 최고의 자동차 스턴트팀을 이끌었던 곡예 운전사 레미 줄리엔은 이 영화에서 스턴트 총괄을 맡은 이후 피아트에 스카우트되어 공식 드라이버가 되기도 했다. 이런 알아둬도 쓸데없는 사연을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이탈리안 잡>은 자그마한 소형 자동차들을 가지고 당시로써도 획기적이고 지금 봐도 스펙터클한 카체이스 장면을 탄생시켰다. 아마 21세기에는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도심 추격 장면은 절대로 구현할 수 없을지 모른다. 대리석으로 이뤄진 저택이나 도심 한복판에 세워진 백화점 실내, 혹은 건물 옥상을 타고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장면을 과연 누가 찍을 수 있을까. 이전 칼럼에서 소개한 <블리트>나 <프렌치 커넥션> 같은 영화의 도심 카체이스 장면도 21세기에는 구현이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 대단한 장면을 찍을 기술적 준비는 충분히 되어 있겠지만. 가장 최근에 무식한(?) 도심 카체이스 장면을 선사해준 영화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도로 주변을 다 때려 부수면서 질주하던 <킬러의 보디가드>(2017)였다. 촬영 현장 메이킹 영상이 참으로 궁금하다. 반면에 도심 추격 장면을 블록 구간별로 쪼개 찍어 편집으로 이어 붙일 수밖에 없었던 <베이비 드라이버>(2017) 같은 영화는 스타일을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드라이버>(1978) 다시 과거로 돌아가, 나만의 ‘도망자의 차’ 카테고리에 포함된, 그리고 카 체이스 영화의 묘미를 잘 드러낸 연출은 월터 힐 감독의 <드라이버>(1978)였다. 사실 이 영화는 자동차보다 드라이버라는 캐릭터 자체에 더욱 무게가 실린 영화이긴 하다. 어쩌면 소위 ‘도망자의 차’ 영화 중 가장 자동차가 중요하지 않은 영화이기도 하다. 배우 라이언 오닐이 연기하는 이름도 없는 캐릭터 ‘드라이버’는 범죄자들을 딜리버리 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어떤 면에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운전 실력이지 자동차가 아닌 듯 보인다. 어떤 자동차도 운전할 줄 알아야 진정한 장인이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영화는 수많은 ‘드라이버’ 영화들, 예를 들면 최근의 <드라이브>(2011)나 <베이비 드라이버> 등의 영화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월터 힐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찾아봐도 그는 항상 자동차를 하나의 캐릭터 이상으로 잘 다룬다. 3편의 연재 칼럼 내내 영화 속의 특정 자동차 브랜드나 성능에 주목해서 역으로 영화의 매력을 들여다보곤 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들은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동차를 어떻게 캐릭터처럼 생명력 넘치게 그려낼 것인가, 이지 않을까. 물론 ‘도망자의 차’ 영화들이 전해주는 ‘재미’의 핵심은 탈주의 기술에 있고, 또 그 기술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자동차다. 그런데 카메라에 담긴 자동차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뭘까. 무엇이 자동차를 주인공처럼 보이게 할까. <뺑반>(2018) 시나리오 표지 최근에 2018년 한국영화 기대작 취재를 하면서 <뺑반>의 한준희 감독을 만났는데 그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뺑소니 사고 조사를 전담하는 경찰 수사팀이 주인공인 <뺑반>은 어쩌면 한국영화 중 가장 본격적으로 카체이스 액션을 선보이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표현하면 카체이스 액션에 있어 거의 선구자격의 노력을 기울였던 <썸>의 장윤현 감독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돌려 말하면 어떨까. <뺑반>은 2018년 현재 카체이스 액션에 있어 가장 기대해도 좋을 국내 최고의 스태프들이 모였다. 김태경 촬영감독과 허명행 무술감독, 장근영 미술감독, 그리고 특수효과에 데몰리션 팀이 참여한다. 경찰 영화와 자동차 영화로서의 카체이스 액션이 결합할 <뺑반>의 개봉을 기대하면서 영화와 자동차 칼럼 연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