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새싹
- 감독
- 김훈
- 제작년도
- 1973
사진: “ 졸업 ”, tvN 올 한 해 TV와 OTT를 통해 공개된 시리즈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관심을 끌어모은 화제작부터, 스쳐 지나갔지만 돌이켜 볼 만한 문제작들까지 정리합니다. 이 글을 구상할 즈음 ‘비상계엄’이 도둑처럼 선포됐다. 용감하게 국회로 달려간 많은 시민들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투를 벌인 공직자들 덕분에 비상계엄은 해제됐지만, 한국사회의 시간은 ‘12.3 내란 사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이 모든 상황이 차라리 ‘드라마’였으면 하고 생각하다가 지난 여름에 본 < 돌풍 >(김용완, 2024)이 떠올랐다. 한국 정치사를 압축한 것 같은 <돌풍>이 재현한 한국사회는 ‘대의 민주주의’ 대신 음모와 폭로가 난무하는 세계였다. 당시 나는 이 드라마의 위험한 상상을 비판했었다. 그러나 그 위험한 상상은 몇 달 뒤 현실이 됐다. 참으로 유해한 것들이 도처에 깔려있다. 비상계엄이 아니더라도 이 세계는 이미 비상시국이다. 먼 곳에서 전쟁 소식이 끊이지 않았고, 기후위기가 코앞까지 도달했음을 절감했고, 경기침체로 인해 온갖 사회 지수는 지속적으로 나빠졌다. 사회적 갈등뿐 아니라 여성, 장애인, 이민자, 퀴어 등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도 지긋지긋하게 반복됐다. 마치 지구 종말 200일을 앞둔 < 종말의 바보 >(김진민, 2024) 풍경처럼. 이런 유해한 세상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자극적인 맛, 즉 도파민을 상승시킬 무언가를 찾고 또 찾았다. 드라마 세계도 마찬가지다. 사적 복수극, 고자극 장르물, 이번 생은 망했으니 과거로 돌아가서라도 욕망을 실현하는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서사가 줄을 이었다. 남편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역사를 바로 세우며 남편에게 복수하는 <내 남편과 결혼해줘>(박원국, 한진선, 2024)가 주목을 받았고, < 살인자ㅇ난감 >(이창희, 2024), < 더 에이트 쇼 >(한재림, 2023), <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모완일, 2024) 등 사적 복수물이나 고자극 장르물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런 드라마들이 예전처럼 큰 화제를 모으지는 못했다. 넷플릭스를 중심으로 생산되던 고자극 드라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다 보니 피로감을 느끼게 된 탓이다. <돌풍>, <종말의 바보> (사진: 유튜브 넷플릭스 코리아) 뜻밖에도(!) 올해 가장 인기가 높았던 드라마는 <눈물의 여왕>(장영우, 김희원, 2024)이다. 이 드라마는 ‘너무 늦게 도착한 과거’와 같은 드라마이다. ‘퀸즈’로 대표되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재벌가(가부장제)를 선하고 무해한 집단으로 재현하며 무너진 퀸즈 일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여기에 불치병과 기억상실증 등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가 빠지지 않았다. 위기를 통해 부부 관계와 가족애를 회복한다는 방향성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혈연·혼인 중심 가족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주목받은 이유는 간단하다. “생각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일상의 피로감이 높아질수록 단순한 맛을 찾기 마련이다. 맵거나 달거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자극 드라마에 피로감을 느낀 우리는 순하고 달달한 드라마를 도피처 삼아 그 세계에 몰입하여 울고 웃었다. <눈물의 여왕>은 그런 우리의 필요를 잘 반영했기에 진부한 설정에도 선택을 받은 것이다. 시청률은 낮았지만 마니아층이 생길 정도로 인기를 모았던 <선재 업고 튀어>(윤종호, 김태엽, 2024)나 시원하고 무해한 제주도의 풍경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웰컴 투 삼달리>(차영훈, 김형준, 2023~2024) 등도 비슷한 이유로 관심을 모았다. 사진: “ 눈물의 여왕 ”, “ 선재 업고 튀어 ”, tvN “생각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 곁에는 서로를 구원함으로써(쌍방구원) 위로를 전하며 치유적 기능을 한 드라마들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 ‘먼치킨’ 주인공이 위험으로부터 인간-사회를 구하거나 악을 제대로 응징하여 ‘사이다맛‘ 정의를 구현하는 히어로물이 인기를 모았으나 그 히어로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히어로’가 사라진 자리에 ‘힐러(healer)’가 찾아왔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조현탁, 2024)은 우울증, 불면증, 비만이라는 ‘현대인의 질병’에 걸려 초능력을 상실한 가족 이야기다. 이들이 초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화재 참사로 인한 상실감과 죄책감 때문이었다. 어디 드라마 속 인물들뿐일까? 사회적 참사가 반복되는 한국사회 속 우리들 또한 같은 이유로 현대인의 질병에 걸린 게 아닐까? 드라마는 상처로 인해 무기력에 빠졌던 인물들이 “히어로는 아니지만” 서로의 행복을 바라며 구원하고자 애쓰는 것에서 희망은 시작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 Mr. 플랑크톤 >(홍종찬, 2024)은 뿌리를 모른 채 딛고 설 땅을 상실한 채 부유하는 “모든 물고기들의 밥”이자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 바닷속 가장 미천한 존재”인 플랑크톤과 같은 인물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구원했다. 세상은 유해한 것들로 가득하지만, 인간은 끝까지 ‘선함’의 본능을 잃지 않고 서로를 구원하고야 만다는 단단한 신뢰를 이런 드라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Mr. 플랑크톤> (사진: “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 JTBC / 유튜브 넷플릭스 코리아) 드라마가 단지 도피처, 위로와 치유적 경험만 제공한 것은 아니다. 장르를 망라하여 저마다의 방식으로 ‘오늘’을 구현함과 동시에 ‘내일’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올해 드라마가 담은 오늘과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다양한 가족의 형태와 가능성을 보여준 드라마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눈물의 여왕>이 절절하게 보여주었듯 기성사회와 미디어는 여전히 가부장적이며 혈연·혼인 중심 가족을 대표적 가족 모델로 반복재생 하지만, 한국사회의 전통 가족 모델은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재구성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전통 가족의 모순성을 보여주거나 가족의 경계를 허물어 확장하는 지향성을 가진 드라마들을 통해 구현됐다. <정숙한 세일즈>(조웅, 김미진, 2024)나 <가족X멜로>(김다예, 2024) 등에서는 가부장 중심 가족의 해체를 보여주었고, <우리, 집>(이동현, 위득규, 2024)이나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송연화, 2024)를 통해서는 가족이라는 관계가 신뢰와 애정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의심과 오해로 조각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가족이라서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우리는 이 드라마들을 통해 씁쓸하고 서늘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 당연하지도 않고 심지어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드라마들도 있었다. < 트렁크 >(김규태, 2024)는 ‘계약결혼’이라는 파격적 설정을 통해 가족과 부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결혼이나 혈연을 넘어선 가족들도 등장했다. <조립식 가족>(김승호, 2024)과 <손해 보기 싫어서>(김정식, 2024)와 <Mr. 플랑크톤>은 ‘정상’ 세계에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인간들이 혈연·혼인이라는 관습과 제도를 넘어 서로의 ‘가족’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가족이 아니라면 무엇이 가족일 수 있을까? 가족의 재구성의 문제는 관계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생활고 때문에 관계마저 소원해진 젊은 부부가 돈을 벌기 위해 불륜 커플을 협박한다는 신박한 설정의 < LTNS >(전고운, 임대형, 2023)는 ‘불륜’이라는 키워드로 (부부) 관계의 복잡성을 상기시켰다. 부부, 가족, 인간관계가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이토록 친밀’한데 ‘배신자’ 일수도 있는 법이다. 드라마는 이런 인간의 복잡성을 흔들리거나, 해체되거나, 재해석되고, 재구성되는 가족을 통해 다채롭게 보여주었다. (상) <우리, 집>,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사진: “ 우리, 집 ”, “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 MBC) (하) <트렁크>, <LTNS> (사진: 유튜브 넷플릭스 코리아 / 유튜브 CJ ENM 글로벌)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하게 늘어난 여성서사가 올해도 다양한 얼굴로 우리와 만났다. 여성서사는 주인공 혹은 중심인물 다수가 ‘여성’인 경우를 의미하지만, 그 여성‘서사’에 무엇을 담았는가도 중요한 문제다. 올해도 드라마들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얼굴을 응시했고, 용감하고, 슬기롭고, 끈질기게 사회적 관습에 저항하는 여성들을 통해 새로운 인간-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낮과 밤이 다른 그녀>(이형민, 최선민, 2024)는 뜻밖의 사건으로 낮에는 ‘아줌마’로 호명되는 50대 여성으로, 밤에는 ‘취준생’ 20대 여성인 본래 몸으로 살게 된 이미진/임순을 통해 사회적 존재감을 잃어버린 여성들이 존재감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졸업>(안판석, 2024)에서는 대치동 학원가 1타 강사, 서혜진( 정려원 )이 퍽퍽하고 고단한 30대 여성 직장인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밤에 피는 꽃>(장태유, 최정인, 이창우, 2024)은 사별한 여성에게 자결하여 열녀가 될 것을 강요하는 사회적 관습을 거부하고 의적으로 활동한 조여화( 이하늬 )의 액션 활극을 시원하게 보여주었다. <정숙한 세일즈>는 1992년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생계를 위해 성인용품 방문 판매를 하게 된 여성들을 통해 여성들이 ‘정숙’하기를 강요하는 사회에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또한 무능하고 유해한 가부장들과 능동적이고 협력적인 여성들의 연대를 대비시켰다. 1992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낡은 서사로 여겨질 뻔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지향은 오늘날의 여성들과 공명하기에 충분했다. <굿파트너>(김가람, 2024)는 ‘이혼 전문 변호사’ 차은경( 장나라 )을 중심으로 가족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하며 여성들의 연대와 성장 서사를 보여주었다. 그런가 하면 <손해 보기 싫어서>는 ‘위탁모’로 봉사한 어머니를 둔 손해영( 신민아 )과 ‘위탁아동’으로 연결된 또 다른 ‘딸들’의 자매애를 보여주었다. <피라미드 게임>(박소연, 2024)은 한 달에 한 번씩 비밀 투표로 왕따를 정하는 ‘백연여고’ 2학년 5반을 통해 계급화된 사회의 문제를 환기하고 여성 청소년들이 연대하여 힘의 세계관에 저항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담았다. < 정년이 >(정지인, 2024)는 19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중후반까지 유행한 ‘여성국극’을 재현하여 남성중심 사회 속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여성들과 여성들의 관계를 보여주었다. ‘여성국극’은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의 사회’라는 대안적 상상을 해보게 하는 담대한 시도였다. 여성서사를 표방하지 않더라도 드라마 속 여성들은 꾸준하게 진화하고 있다. 드라마 속 여성서사는 장르도, 시대도, 인물들이 처한 상황도 다르지만 지금-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처한 현실과 그에 대항하는 페미니즘적 지향성과 상상력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흐름이다. 사진: “ 밤에 피는 꽃 ”, MBC / “ 굿파트너 ”, SBS 드라마에서 여성서사의 공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단지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아졌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퀴어서사의 공간도 함께 늘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피라미드 게임>, <웨딩 임파서블>(권영일, 2024), <엄마친구아들>(유제원, 2024)과 같이 퀴어 캐릭터가 주요하게 등장하는 ‘퀴어프렌들리’ 드라마들이 있었고, <정년이>, < 대도시의 사랑법 >(허진호, 홍지영, 손태겸, 김세인, 2024), <옥씨부인전>(진혁, 2024) 등 퀴어가 중심이 된 드라마도 제작됐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소설가 박상영의 소설을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하여 호응을 얻었는데 게이 남성 고영( 남윤수 )을 통해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동성애’도 당연하고 보편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옥씨부인전>은 노비에서 양반으로 신분이 바뀐 여성, 구덕( 임지연 )을 중심으로 여성, 노비, 성소수자 등 ‘소수자’ 문제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정년이>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퀴어서사에 관해 고민하게 했다. 동명의 웹툰 원작에서 정년이와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는 인물인 ‘부용’이 드라마에는 삭제됐다는 면에서 그렇다. 부용은 페미니즘과 퀴어서사를 담당한 중요한 캐릭터였기에 타협적이고도 퇴행적 각색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대도시의 사랑법>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 단체의 거센 항의에 예고편을 삭제하기도 했다. 이 두 드라마를 둘러싼 논란은 드라마가 처한 모순적 상황을 절감하게 했다. 이화여대 퇴임교수 김훈순의 진단처럼 드라마는 “우리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에 적극 개입하는 문화적 생산물”임과 동시에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다양한 가치를 담아내는 문화적 공론장”이자 “시대 흐름 속에서 충돌하는 가치들을 담아내는 역동적인 텍스트”이다. 그렇기에 순응하거나 퇴행하는 면도 있지만, 관습의 저항을 피하기는 어려운 순간도 있다. <정년이>나 <대도시의 사랑법>은 충돌하는 가치들을 ‘뚫고’ 나아가는 서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사진: “ 정년이 ”, tvN / “ 옥씨부인전 ”, JTBC 한 해 동안 우리가 주목했던 드라마들의 흐름을 톺아봤다.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유해한 현실의 도피처로서 무해한 드라마를 보며 울고 웃다가 위로를 받았다. <옥씨부인전>에서 구덕의 말처럼 드라마가 “하루하루 수고한 사람들한테 행복을” 주고 “시름을 잊게” 한 것이다. 또한 드라마가 구현한 작은 세계를 통해 우리의 ‘오늘’을 돌아볼 수 있었다. 드라마라는 거울은 우리의 ‘오늘’뿐 아니라 ‘내일’로 나아갈 길을 발견케 했다. 드라마가 비춘 현실은 자주 절망적이었지만, 관습을 깨고,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꾸준하게 성장하는 여성서사와 꿋꿋하게 등장하는 퀴어서사를 통해 우리 사회가 다양하게 넓어지고 있다는 희망적 생각을 해보게 됐다. <정숙한 세일즈>에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무대처럼 어떤 시도는 “시대를 앞서간 느낌” 때문에 저항에 부딪히지만 곧 그 시차를 극복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은 질문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인간다움’과 ‘가족’으로 상상된 사회공동체다(그렇기에 가족의 범위가 확장되는 걸 보여준 드라마들이 반갑다). 올해 본 드라마 중 가장 좋아한 드라마가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졸업>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졸업>은 한국사회의 욕망이 집약된 ‘대치동 학원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정답’이 아닌 ‘지문 바깥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역량과 ‘인간다움’에 관해 이야기한다. 드라마는 자신의 삶과 연인을 지극히 사랑하는 성실하고 윤리적인 직업인 혜진을 통해 ‘인간답게 사는’ 길을 보여주었다. 혜진은 수업 시간에 에리히 프롬의 글을 학생들에게 들려준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이것은 나와 우리, 그리고 ‘유해한’ 세상을 향한 조언이기도 하지만, 드라마의 소명과도 같다. 사진: “ 졸업 ”, tvN 오수경(드라마평론가) l 인간과 사회에 관심이 많아 문학을 전공했고, 신앙인으로 살고 있으며, 드라마를 들여다본다. 여러 매체에 칼럼 기고. 『을들의 당나귀 귀 』(2019) 공동 집필, 『드라마의 말들 』(2022) 집필.
전 남자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전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전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전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저라면 이 행성에 빵점을 주겠어요. - renata litvinova 나와 금정연, 임재철 평론가는 2021년 어느 겨울 낮, 은평구 갈현동의 만포면옥에서 물냉면과 설렁탕, 눈꽃 만두를 먹고 있었다. 우리가 왜 만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평소처럼 금정연이 연락을 해 그분이 보자고 합니다, 라고 말했을 뿐이다. 나는 그분이 금정연을 만나고 싶은데 둘이 보기 뻘쭘하니까 나도 같이 보자고 한 건지, 아니면 금정연이 둘이 만나기 싫어서 그분 몰래 나를 끼워넣은 건지 의심스러웠고 갈현동까지 가는 길을 생각하면 눈물이 차올랐지만, 영자원 연재를 생각하며 꾹 참았다. 원고를 위한 작은 소스라도 얻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모든 연재가 그렇듯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도 매 원고가 위기였다. 시나리오 작법서로 베스트셀러가 된 시드 필드에 따르면 시나리오는 시작, 대립, 해소의 3막으로 구성된다. 반면 우리 에세이(필름)의 원고(대본)는 시작, 시작,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1년을 연재했는데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 않네요. 금정연이 말했다. 지난 원고도 2주나 넘겨 마감한 정연씨는 안본 사이에 더 늙은 모습이었다. 더희미해지고 하얘졌달까. 그러나 동안인 건 여전했다. 금정연을 본 사람이라면 별다른 설명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박솔뫼는 정연씨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늙은 아기. 상업 영화나 드라마 시나리오도 보통 2~3년은 걸린데요. 너무 걱정마세요. 나는 정연씨를 위로했지만 사실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나름 호기롭게 시작한 연재였고 쓰는 동안 괜찮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한 인터넷 게시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제목: 한국영화 커뮤니티가 격변하는 시점 두 가지. 하나는 엠파이어가 moma로부터 가져온 16mm 필름으로 상영되는 날이고 다른 하나는 정지돈 금정연이 오디오비주얼필름크리틱을 완성하는 날 금정연이 게시물을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이 올까요? 반면 임재철 평론가(이하 LJ)는 우리의 걱정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야, 지난 번 원고도 쓰기 싫은 티가 너무 나더만. 으하하하. 금정연과 나의 인상이 동시에 구겨졌지만 우리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LJ에겐 어떤 대응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LJ는 무적의 비평가였다. 저널리스트의 객관성과 독학자의 주관성을 두루 갖춘 비평계의 전무후무한 존재. 놀라운 건 이 사실을 LJ에게 직접 들었다는 사실이다. “나, LJ, 무적의 비평가.” 그러나 이와 같은 발언을 오만함이나 과대망상, 자기 현시 등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LJ는 특정한 시공의 열림 속에서 어느 순간 가장 정확한 비평가가 되기도 했다. 그러니 중요한 건 언제 어느 때 그러한 시공이 열리는지, 그 조건을 포착하는데 있다. 마찬가지로 금정연 역시 때때로 무적이 된다. LJ와 그가 다른 점이 있다면 금정연은 스스로를 무적의 비평가로 칭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비평가/평론가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럼 정연씨는 뭐예요? 언젠가 나는 정연씨에 물었고 정연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서평가죠. 서평을 쓰지 않는… 그게 뭐야. 글쎄요. 전 뭘까요, 지돈씨? 자꾸 쓸데없는 말만 하지말고 영화나 만들어. LJ가 말했다. 두 세대 어린 영알못들의 감상주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투였다. 그의 앞에 놓인 설렁탕은 이미 싹 비워져 있었다. 만포면옥은 백년식당으로 선정된 냉면 맛집이었고(소설가 김훈은 “인생관을 바꾸는 맛”이라고 극찬했다) 나와 금정연은 물냉을 주문했지만 LJ는 설렁탕을 시켰다. 동시대에 기자로 활동했던 김훈에 대한 질투였을까? 내가 묻자 LJ는 김훈 정도는 기자로 쳐주지도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걔는 기사도 소설처럼 썼어(물론 칭찬이 아니다). LJ의 말은 늘 과격했지만 가끔 우리를 뜨끔하게 했다. 이를테면 “원고 쓰기 싫은 티” 같은 말 말이다. 익명의 블로거는 금정연의 <아무튼 택시>를 읽고 이렇게 글 쓰기 싫어하는 저자는 처음 봤다며 책값이 아깝다고 화를 냈다. 반면 또다른 블로거는 책 전반에서 느껴지는 쓰기 싫음, 일하기 싫음 때문에 저자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만약 글 쓰는 걸 진심으로 싫어했다면 이렇게 상반된 감상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애초에 책을 내지 않거나 에밀 시오랑 마냥 아포리즘을 끄적대며 거만을 떨거나). 우리의 태도는 냉소나 시니컬함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너스레나 솔직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쪽일까? 양쪽 다인 걸까 둘 모두 아닌 걸까. 정연씨의 글 대부분은 진심으로 무언가를 믿고 실천하는 것의 어려움, 어딘가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부유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원고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구태여 매끈하게 만들려고 애쓰지도 않고 좋아하는 단편들로만 채우기.” 어쩌면 이것은 우리 세대의 “시대적 정신질환” 아닐까. 진심으로 문학을 믿고, 영화를 믿고 작업을 체계적으로 완성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할수록 무기력해지고 거부감이 솟구쳐 한글자도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이건 새로운 세기의 집필자장애writer’s block 일지도 모른다. 미국정신의학협회의 <진단과 통계요람(DSM)> 6판에 해리성장애의 하위 병 중 하나로 포함될 것이다. 이른바 K-wirter’s disorder. 과학철학자인 이언 해킹은 19세기 말 유행한 특이한 정신질환에 대한 책 <미치광이 여행자>에서 시대적 정신질환을 특정한 시대, 특정한 장소, 특정 사회계급이나 젠더에서 선택적으로 나타나는 정신질환이라고 말한다. 시대적 정실질환은 그것이 실재하는 것인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인지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만 이언 해킹은 그런 식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실재성 역시 “인간의 삶과 언어의 변화에 따라 그 개념을 재조정하는 끝없는 과정에서 찾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정신질환을 번성하게 하는 환경인 생태학적 틈새다. 이 틈새를 만들어낸 벡터의 방향이 달라지면 틈새는 흩어진다. 다시 말해 이 틈새 속에서 정신질환은 잠시동안 실재가 된다. 잠깐 옆길로 샜는데,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시작만 하고 아이디어만 낼 뿐 믿음, 역량, 진심 또는 그 무언가의 부재로 실천하지 못하고 매듭짓지 못한다면, 그렇게 만드는 어떤 벡터들이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한 벡터가 우리를 한국영화에서 길 잃게 만든 걸지도 모른다. 우리의 에세이필름이 벡터들의 교차로 만들어진 생태학적 틈새를 가시화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이런 실천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완성이나 구성과 다르며 개봉이나 배급, 출판의 과정도 조금 다를 것이다. 어떻게 다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금정연과 나의 핸드폰이 동시에 우웅- 하고 울린 것은. 확인해보니 영자원의 연재 담당자가 우리에게 보낸 메일이었다. 다음 원고 마감일을 고지하는 내용 아래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혹시 작가님들이 여력이 되신다면 연재를 내년 12월까지 연장하면 어떨까요? 연재 연장? 1년 더? …… 금정연과 나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투숏? 숏, 리버스 숏? 영화학자 미하일 얌폴스키에 따르면, 현대 영화언어 구조의 가장 본질적 형상은 리버스 앵글이다. “현대 영화는 볼거리의 두 가지 (재현적) 체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로서 기능한다. 관객은 끊임없이 어떤 때는 목격자가, 어떤 떄는 주인공이 된다. 여기서 세계는 언제나 다중시점으로 보인다.” 다시 한번 정신의학적 은유를 빌리면 영화는 처음부터 해리성장애를 수행하는 매체였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내 눈물인지 금정연의 눈물인지 알 수 없었던 건 그래서일까. 이것은 기쁨의 눈물일까 고통의 눈물일까. 우리에게 1년의 시간이 더 주어진 것일까, 1년의 시간을 더 빼앗긴 것일까. 우리를 보던 LJ가 담담히 말했다. 고다르와 나도 통하는 게 있었지. 뭔데요? 우리 둘 다… 군대를 가기 싫어했어. 그래서 고다르는 브라질로 갔고 나는 아르헨티나로 가려고 했지….. 2022년 연재 예고 We Are Truly Fucked: Everyone Is Making AI-Generated Fake Porn Now 김희천의 VR <사랑과 영혼>에 대한 비평과 앙드레 바쟁의 완전영화의 신화, 미하일 얌폴스키의카이로스의 시간과 딥페이크와 리얼리즘의 시대의 MBTI로 보는 한국영화 유형학과 완전 자동 (한국)영화, 마동석, 마블유니스버스, 마크 피셔로 연결되는 자본주의 익스텐디드 리얼리즘에 관한 비평적 연대기…(어쩌면) Coming soon….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 수상한 그녀 >(2014)는 < 마이 파더 >(2007), < 도가니 >(2011)에 이은 황동혁 감독의 세 번째 연출작이다. 이 작품은 2014년 1월 22일 개봉됐으며, 익숙한 소재를 빌려온 코미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구성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개봉 전부터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전국 누적 관객 865만 6417명(영진위 통합전산망 집계)을 동원했다. 이번 대담은 오래전 <도가니> 개봉 당시 황동혁 감독과 ‘지방 무대인사 파트너’로 인연을 맺은 <씨네21> 주성철 기자가 함께했다. 영화만큼 유쾌하고 진지했던 대담 현장으로 들어가보자. 무거운 사회드라마 < 도가니 > 이후 의외의 선택 주성철(이하 주) 두 번째 연출작 < 도가니 >(2011)는 실화인 동시에 사회성 강한 드라마였다. 묵직한 주제를 가진 <도가니> 이후 대중성이 강한 < 수상한 그녀 >를 연출한 것은 의외의 행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영화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황동혁 (이하 황) < 도가니 > 개봉 당시 여러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차기작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때마다 다음 작품은 장르 영화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솔직히 무거운 주제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부터 코미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가지고 있었는데, <도가니> 이후 SF 시나리오를 쓰다가 < 수상한 그녀 > 연출 제의가 들어왔다. 시나리오를 봤는데, 나와 잘 맞더라. 가볍고 밝은 코미디지만 그 속에 어머니와 할머니를 다루는 지점들이 마음에 들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살던 내 어린 시절 환경 때문에 영화의 정서가 잘 이해됐다. 하지만 이 영화를 차기작으로 선택하니 역시 주변에서 많이 놀라더라. 과연 이 감독이 코미디 영화를 잘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나타냈고,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재미없다는 스태프가 많았다. 특히 김지용 촬영감독이 걱정을 많이 했는데 “감독님이 <도가니> <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 > 같은 어두운 영화만 촬영해서 그렇지 이게 재미있는 시나리오다”라며 설득했다.(웃음) 주 사실 황동혁 감독은 사석에서 만났을 때 무척 유쾌하고 재밌는 분이다. 개인적으로 < 마이 파더 >나 < 도가니 >를 통해 느껴왔던 감독의 이미지가 깨지는 순간이 많았다.(웃음)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코미디 영화를 하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많이했다. 주변 사람들도 감독의 그런 성향을 알고 있었을 것 같다. 황 맞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무척 심각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주변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내 모습을 많이 봐서 그렇지 않을 것이다.(일동 웃음) 심은경과 장광, 그리고 김수현의 캐스팅까지 주 < 수상한 그녀 >는 이야기의 성격상 오말순( 나문희 , 심은경 분)의 젊은 시절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의 폭이 무척 좁았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심은경을 기용한 것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지만 어떤 배우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캐릭터는 물론 영화의 성격까지 달라졌을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수지 가 사진으로 세 번이나 등장하는데, 사실 시간차를 두고 등장하는 세 번째 컷은 굳이 삽입할 필요가 없었다. 혹시 애초에 수지를 캐스팅하려고 했는데 안 되어서 소심한 복수를 한 것이 아닌가?(일동 웃음) 황 남자 대부분이 그렇듯 나도 수지 를 무척 좋아한다.(웃음) 감독으로서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배우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그 배우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 때문에 반복적으로 사진을 노출시켰다.(웃음) 사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심은경 의 역할은 여성스러운 면이 강조된 캐릭터였다. 그 시나리오로 볼 때 심은경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심은경은 워낙 연기력이 뛰어나고, 개인적으로 그 배우를 아역 시절부터 좋아했기 때문에 무조건 잘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심은경이 확정된 후 시나리오에서 그녀의 캐릭터를 더 밝고 왈가닥스럽게 바꿨다. 주 개봉 당시 극장에서 봤는데, 심은경 이 나오는 몇몇 장면에서 관객들이 자지러지게 웃더라. 아마도 영화가 심은경이 가진 특유의 매력과 만나면서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뿜어낸 것 같다. 황 아마 시나리오부터 심은경 을 염두에 두고 쓴 장면이 많아서 그랬을 것이다. 연기도 무척 잘했고, 그 배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충분히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주 캐스팅과 관련해 또 한 명이 눈에 들었다. < 도가니 >에서 교장으로 나온 장광 이다. < 수상한 그녀 >에서는 이분이 천사 같은 역할을 맡았는데, 아마 영화를 본 많은 관객이 <도가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황 촬영 초반 나문희 선생도 이분을 보면 자꾸 < 도가니 >에서의 교장이 떠올라 섬뜩하다는 말씀을 하셨다.(웃음) 내가 <도가니>로 이분께 너무 무거운 이미지를 씌워드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비록 비중은 작지만 < 수상한 그녀 >에서 재밌고 따뜻한 역할을 맡겨 조금이나마 이미지를 바꿔드리고 싶었다. 장광 선생만 그런 게 아니다. <수상한 그녀>에서 오말순이 일하는 ‘실버 카페’에서 삼각관계로 나온 옥자 역을 맡은 박혜진 선생도 사실 <도가니>에서 공유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던, 교장 처 역할이었다.(일동 웃음) 주 엔딩 장면에서는 김수현 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지난 10년 동안의 한국영화를 통틀어 최고의 카메오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황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그 엔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누가 적당한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처음에는 30대 배우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주인공이 심은경 으로 확정된 후 나이가 좀 더 어린배우가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다. 1순위가 김수현 이었는데, 흔쾌히 수락했다. 개봉 시기에 맞춰 김수현의 작품이 모두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었던 것 같다. 주 단순하게 스타를 카메오로 출연시키는 일종의 마케팅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장면과, 젊다는 것의 희열이 그대로 투영된 김수현 의 이미지 모두 영화의 주제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엔딩이었다고 생각한다. 황 개봉 전까지 김수현 이 카메오로 출연하는 것은 철저하게 비밀이었다. 마케팅이었다면 사전에 대대적으로 홍보했을 것이다.(웃음) 개인적으로 관객이 기분 좋게 영화관을 나갈 수 있게 하는 엔딩이 좋은 엔딩이라고 생각한다. 오말순의 과거, 우리들의 보편적 감정 주 < 수상한 그녀 >에서 플래시백으로 나오는 과거 장면들은 관객에게 친절하게 과다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사연일까’ 궁금함을 안고 가게 했던 것 같다. 오히려 감독의 그런 의도가 관객의 감정을 한결 잘 건드려준 게 아닐까? 황 동의한다.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모든 사연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기본적으로 코믹한 설정을 중심으로 회상 장면을 통해 단서를 던져주는 방식을 택했다. 그런 선택이 관객에게 사뭇 슬픈 감정을 느끼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과거 회상 장면이 노래와 어우러지면서 감정이 증폭된 것이 아닐까한다. 이 부분에 대해 덧붙이자면, 관객의 공감을 얻은 것은 실제 나의 기억이 투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어릴 때 할머니가 실제로 시장에서 콩비지를 파셨다. 이것은 나의 기억이지만 어려웠던 시절 많은 사람의 기억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영화는 판타지보다 실화적인 요소가 많다고 생각한다. 주 2014년 CJ엔터테인먼트 투자배급 영화의 시작과 끝을 < 수상한 그녀 >와 < 국제시장 >이 책임졌는데, 의미심장하게 두 영화 모두 1960~70년대 파독 광부가 등장한다. 그런 회상 장면에서 엄격한 비평적 잣대를 들이대자면 신파,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하면 ‘추억팔이’라는 시각도 있을 것이다. 황 관객에게 몇 컷으로 살짝 던져줬기 때문에 한결 편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굳이 이 장면을 긴 시퀀스로 만들어서 구구절절하게 표현했다면 억지스러웠을 것이다. 사실 시나리오 초고에는 조금 억지스러운 장면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오말순이 과거 시장에서 일수를 하던 사람으로 되어 있었다. 자식을 위해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오말순의 캐릭터와 크게 다르진 않지만 모든 관객이 (아무리 자식을 위해서라도) 그 직업을 이해하진 않았을 것이다. 파독 장면의 경우도 원래 과장된 신파로 설정됐지만, 그저 공항을 떠나는 뒷모습 정도로 마무리했다. 개인적으로도 눈물을 짜내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과장하지 않고 관객의 마음을 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할 말만 하자’고 생각했다. 배우의 표정만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 수상한 그녀 >, 편안하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영화 주 < 마이 파더 >와 < 도가니 >가 그렇듯, 많은 관객이 황동혁 감독에게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기대한다고 생각한다. 코미디 영화이지만 < 수상한 그녀 > 곳곳에도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손자의 밴드가 부르는 ‘반지하 인생’ 노래 가사가 그렇고, 극의 구성상 없어도 되는 재개발 반대 플래카드도 눈에 띈다. 이전 작품들과의 연계점이라고 볼 수 있나? 황 맞다. 감독의 비판적 관점이 영화에 표현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반지하 인생’ 가사는 시나리오에 없었는데 내가직접 써서 넣었다. 내 의도와 취향이 들어가 있는 노래다. 반지하 밴드가 연습하는 폐건물 건너편의 재개발 반대 플래카드도 미술팀과 상의해서 일부러 넣은 것이다. 주 극 중 지하철에서 한PD( 이진욱 )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읽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주 잠깐이나마 그 장면 또한 어떤 의도가 반영된 것인가? 황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노인에 대한 내용은 아니지 않나.(일동 웃음) 큰 의도는 없었다. 제목이 주는 의미가 중의 적이기도 하고, 그냥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책을 선택했다. 당연히 잠깐 등장하는 것이지만 일부러 공식적인 허락을 받고 촬영한 것이다. 주 < 수상한 그녀 >를 보면서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어른이 되는 < 빅 >(페니 마샬, 1988)의 기본 골격이 떠올랐다. 손자와 할머니 사이에 묘한 이성적 기류가 흐른다는 점에서, 과거로 돌아간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서 그런 분위기를 풍겼던 < 백 투 더 퓨쳐 >(로버트 저메키스, 1985)의 멜로 코드 또한 떠올랐다. 옷가게에서는 < 귀여운 여인 >(게리 마샬, 1990)의 주제곡이 흐르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할리우드 키드 세대로서 친근한 할리우드 영화를 콜라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황 < 수상한 그녀 >는 무엇보다 편안한 영화가 되길 원했다. 관객이 영화를 친근하게 느끼게 하고 싶었고, 그렇기에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굳이 피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 빅 >의 톰 행크스가 졸탄 기계 앞에서 소원을 빌어 훌쩍 크는 장면은 당연히 인상적이었고, 손자와의 관계에서 심은경 이 연기했기에 그런 근친상간의 느낌이 다행히 덜했다. < 백 투 더 퓨쳐 >에서는 심지어 키스까지 하지 않나. 다만 그로 인해 한PD와의 멜로 코드가 약해진 것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웃음) 주 한편으로 이 영화는 음악영화다. 사실 많은 감독이 음악영화를 만드는 데 부담감을 느낀다. 창작곡이 히트하지 못했을 때 영화에 주는 영향이라든지, 많은 제작비가 드는 라이브 공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나. 황 장르적으로 다르게 표현될 수 있겠지만 큰 틀에서 음악영화가 맞다. 부담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재밌는 작업이 될 것 같았다. 시나리오를 자세히 뜯어보면 주인공은 큰 목표나 욕망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지루해지거나 산만해질 수 있었는데 이러한 부분을 음악이 잘 잡아줬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할머니가 젊은 여자로 돌아가 젊음을 즐기는 데 관객에게 그 감정을 가장 표현해주는 장치가 음악이었다. 그래서 음악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음악 작업은 무척 힘들었고, 사연이 많다.(웃음) 중국에서 리메이크, 그리고 새로운 시작 주 < 수상한 그녀 >는 결과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코미디 영화다. 감독 개인적인 평가는 어떤가? 황 지나고 보니 단점도 많이 보인다.(웃음) < 수상한 그녀 >는 애초 의도했던 것과 빗나간 부분도 있지만 대체로 잘된 부분이 더 많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비교적 잘 전달되었다고 본다. 제일 만족스러운 부분은 역시 캐스팅이다. <수상한 그녀>는 내 의도대로 완벽하게 캐스팅한 작품이었다. 심은경 의 캐스팅도 만족스럽지만 다른 배우들도 누구 하나 빼놓을 것 없이 전부 다 인정받을 만한 배우들이다. 주 < 20세여 다시 한 번 >이라 제목으로 중국에서 리메이크된다. 진행 상황은? 황 지난 7월 중국 촬영장에 다녀왔다. 2015년 1월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영화 본편을 보지는 못했다. 유튜브에 올라온 뮤직비디오와 예고편을 봤는데, 이것만 봐도 명민하게 현지화를 잘 시킨 것 같다. 내용도 흡사하고 비슷한 장면도 많더라. 우리와 중국이 정서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사실 크게 바꿀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엔딩의 카메오 역할은 누가 했는지 나도 모른다. 개봉하면 가서 보려고 한다.(웃음) 주 데뷔작 이후 이른바 ‘삼세판’이랄까, 드디어 세 번째 작품을 끝냈다. 연출자로서 이후의 다짐은? 황 잘될수록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무엇을 해야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고민이 많이 된다. 감독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도 사실 큰 의지가 있었다기보다 이야기를 만들고 무엇인가를 카메라로 찍는 것이 행복해서 선택한 것이다. 다만 나를 움직이는 이야기가 있으면 자연스레 뛰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은 중국에서 영화를 기획 중이다. 중국 시장은 도전해볼 만한 곳이다. 가까운 미래에 중국은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영화 시장이 될 것이기 때문에 중국 시장에서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한국에서는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을 영화화해보려고 생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