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크라이스트
- 감독
- 라스 폰 트리에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윌렘 데포, 샬롯 갱스부르, 스톰 아체체 살스트롬
‘시네마테크 KOFA가 주목한 2018년 한국영화’의 리스트가 발표됐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이 리스트에 참여한 초기에는 열 편의 작품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다. 10편에 다 넣지 못한 작품의 수가 항상 대여섯 편 이상이 되었다. 그래서 매번 깊은 고심 끝에 그만큼의 작품을 제외시켜야 했다. 그런데 근래 몇 해에는 그런 작품의 수가 한두 편 정도밖에 안 된다. 글쎄다, 정확한 이유는 나 자신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계속 참여하다 보니 내 결정 기준이 단호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사이에 한국영화가 빈곤해진 탓인지 좀 더 생각해볼 문제다. 후자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말했듯이 올해도 10편을 선택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고, 내가 선택한 작품과 전체 결과는 언제나처럼 적당한 선에서 사무송(使無訟)한 모양새다.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해 아쉬운 작품의 리뷰를 의뢰받고 고민했다. 개인의 리스트를 별도로 발표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작품을 골라야 할지가 그 이유였다. 내 리스트와 상관없이 우선 몇몇 작품의 제목을 (ㄱㄴㄷ 순으로) 언급만 하자면 < 1급기밀 >( 홍기선 ), < 곤지암 >( 정범식 ), < 누에치던 방 >( 이완민 ), < 인랑 >( 김지운 ), < 춘천, 춘천 >( 장우진 ), < 파란입이 달린 얼굴 >(김수정)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독립영화, 상업영화의 구분과 별개로 각자의 영역에서 제 역할을 했고 또렷한 목소리를 낸 작품들이다. 위 작품들은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작년 한국영화를 풍성하게 만든 이름들임을 확신한다. 리뷰 대상으로 선택한 작품은 < 홈 >이다. 신인 감독 김종우 의 데뷔작인 <홈>은 작년 5월 30일에 개봉해 8천 명 정도의 관객을 모았다. 비평적인 수난은 더욱 심해서 이 영화를 제대로 조명한 글을 거의 보지 못했다. 연말에 발표된 리스트에서 이 영화가 언급조차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청소년 인물, 가족과 사회를 다루는 점잖은 태도나 영화가 이야기하는 소중한 주제를 감안하면 이 영화가 감내해야 했을 외면의 정도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나는 작년에 정부 정책을 다루는 매체에 이 영화에 관한 칼럼을 보낸 적이 있다. 리뷰는 아니었고, 영화가 다루는 이런저런 문제를 놓고 정책적인 해결책 등을 물어보는 글이었다. <홈>의 특성은 그러한 데 있다. 눈물을 흘리거나 감동을 받는 선에서 영화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런 경험이 실제 생활로 넘어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주인공 소년에게 닥친 환경의 안타까움이 질문으로 이어지고 해결 방안은 없을까, 라고 생각하는 데 이르는 것이다. 변화를 초래하는 경험을 보통 다큐멘터리로부터 얻곤 하던 나로선 각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줄거리를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홈>은 졸지에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년의 이야기다. 고아는 아닌데 고아보다 더한 상황이 준호( 이효제 분)에게 일어난다. 소년의 가족 관계는 조금 복잡하다. 준호의 어머니는 준호의 아빠와 이혼한 상황에서 다른 유부남 강원재( 허준석 분)와 관계를 맺었고 그들 사이에서 성호( 임태풍 분)가 태어났다. 원재는 부인과의 사이에 딸 지영( 김하나 분)을 두었다. 어느 날 아침, 원재의 부인이 준호의 엄마를 찾아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교통사고가 발생해, 두 여인은 의식불명의 상태로 나란히 병실에 누워 있게 된다. 원재가 아들 성호를 데려가면서 준호는 홀로 집에 남는다. 소년의 처지를 가엽게 여긴 원재는 준호에게 두 동생과 함께 살 기회를 만들어 주는데, 원재의 착한 결정은 상황을 알아차린 처가의 분을 사고 만다. 청소년이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이 종종 범하는 실수는 아이와 성인 사이를 이분법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 아이들은 지나치게 순수하고, 때가 묻은 폭력적인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파괴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더 이상 고전적이지도 않고 별다른 감동도 주지 못한다. 영화가 두 개의 세계 사이로 선명하게 그어놓은 선이 작위적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어른들의 시선 아래 만들어진 영화는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왜곡하기도 한다. 하지만 근래 만들어진 어린이 혹은 청소년의 성장영화는 영화의 시선을 인물의 눈높이에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홈>의 제작사인 ‘아토’는 이 영화 외에도 < 우리들 >(2016, 윤가은), < 용순 >(2016, 신준), < 살아남은 아이 >(2017, 신동석) 등의 작품을 연이어 제작해왔다. 내면적으로 충실한 작품을 통해 한국영화의 경계를 확장하는 방식은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중학생인 준호의 나이로 치면 <홈>은 <우리들>과 <용순> 사이에 놓인다. 두 동생 앞에서는 어른스러워 보이는 준호는 아직 성인의 세계가 낯설고 두려운 소년이다. 무엇보다 성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다. 그런 준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곧 <홈>의 태도다. 엄마가 병실에 누운 후, 준호가 처한 상황은 급변한다. 영화는 덜컹거리는 상황을 곱게 포장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영화의 태도가 불편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소년의 시선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극중 복잡한 어른들의 관계, 어른들의 처지가 상세하게 그려지지 않은 건, 그것을 대하는 소년에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친부는 딱한 상황에 처한 아들을 거두지 않으며, 원재는 처가와의 갈등을 소년에게 설명할 길이 없다. 준호가 주변 상황에 대처하는 수준은 더욱 어수룩할 수밖에 없다. 어찌하지 못할 때마다 소년의 어깨는 자꾸 움츠러든다. 원재의 호의에 보답한답시고 편의점 물건을 훔쳐간 아이들과 싸움을 벌이고 끝내 물건을 되찾아온 장면에서는 눈물을 감추기 힘들다. 소년은 상처투성이의 입으로 온 힘을 다해 “같이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아니라 소년의 마음을 따라가다 얻게 되는 그런 출렁거림이 <홈>의 미덕이다. 소년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행복하게 사는 일은 <홈>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후반부에서 소년은 아주 어두운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소년에게 어마어마한 시련이 닥치는 것으로 끝맺지도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로 전개되는 과정은 얼핏, 준호라는 어린 존재가 세상에서 홀로 서는 성장담을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도입부로 돌아가 보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준호는 패스를 하지 않고 홀로 골을 시도하려다 실책을 범해 친구들로부터 책망을 받는다. 엔딩에 앞서 영화는 소년이 거쳐온 공간들을 한 번씩 마주한다. 그 공간을 거치며 보낸 시간 속에서 소년은 성장했을까. 영화의 엔딩, 다시 운동장에서 선 준호는 별 무리 없이 친구들과 함께 호흡을 나눈다. 표정도 밝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만 하면 되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일순간의 응원에 스스로 만족하고 떠나려던 나를 돌려세우고 만다. 카메라는 줄곧 소년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으나, 문득 나를 향한 시선을 느끼게 된다. <홈>은 ‘함께 사는 것’을 박탈당한 소년의 외로움에 관한 영화다, 소년에게 그런 세계를 던져주고도 담담하게 지내는 나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하는 영화다. 끝으로 소년 준호를 아름답게 연기한 배우 이효제가 연기상의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은, 이 영화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묻힌 것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글을 다 쓴 뒤 김종우 감독이 「씨네21」과 나눈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8살 때 형과 헤어졌다. 형은 영천 시골에 있었고 나는 부산으로 이사왔다. 형이 고등학생 때였는데, 그때부터 형은 혼자 살았다. 왜 형이랑 떨어져 사는지 몰랐는데, 중학생 때 어머니가 우리 가족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돌이켜보면 그때 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족관계를 떠나 당시 형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너무 힘들고 아팠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밝혔다. 영화에서 유달리 진실함이 느껴졌는데, 감독 자신에게서 출발한 이야기라 더 그랬던 모양이다.
2002년 | 강제규 필름 감독: 정초신 | 시나리오: 박채운 | 제작: 최진화 | 촬영: 서정민 | 프로덕션 디자인: 서명혜 | 음악: 이영호 이소윤 CAST 병철: 이범수 | 유리: 김선아 | 동현: 노형욱 | 석구: 전재형 | 상민: 정재훈 | 영재: 안재홍 아마 이 영화가 전국 3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할 거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한참 성적 호기심에 불타는 남자 중학생들과 여자 교생 선생님의 이야기였던 < 몽정기 >는,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인 ‘슬리퍼 히트’, 즉 ‘예상치 못했던 흥행작’입니다. <몽정기>의 촬영이 있던 2002년 8월 부산의 한 여중 교실은 영화 현장이라기보다는 생기 넘치는 교실 같았습니다. 창 밖엔 부슬부슬 비가 내렸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을 사그러들 줄을 몰랐습니다. 교생 선생님과의 점심 식사 장면. 도시락 세대의 추억이기도 하죠. “선생님, 첫 키스는 언제 하셨어요?” “애는 어떻게 생겨요?” 녀석들은 ‘성’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을 묻지만 꿈 많은 소녀 표정의 선생님은 풋고추를 좋아한다느니 하며 아이들의 짓궂은 질문을 가볍게 넘어버립니다. 겉모습은 조금 궁상맞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선생님 역은 이범수. 교생이자 과거 제자였던 김선아는 그를 사랑하는데요, 이범수의 필모그래피에서 로맨스 라인은 이 영화가 처음 아니었나 싶습니다. 노총각 병철을 짝사랑하는 유리. 그녀에게 그는 ‘영원한 테리우스’지만, 병철은 그녀에게 엄격하기만 합니다. 아이들과 너무 허물 없이 지내는 모습에 “아무리 그래도 교생도 선생이야”라며 엄하게 충고합니다. 유리의 친구이자 동료 교생인 소정 역을 맡은 배우는 김기연 . < 노랑머리 >(김유민, 1999)의 상희 역으로 알려진 배우죠. 소정은 유리에게 말합니다. “세상에 저렇게 더러운 테리우스가 어딨니?” 짬을 내 네 명의 ‘중딩’들을 모아,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 보라고 했습니다. 왼쪽부터 조숙한 아이 상민(정대훈), 그나마 똑똑한 영재(안재홍), 어리숙한 석구(전재형) 그리고 교생을 사랑하는 평범한 소년 동현(노형욱)입니다. 영화에선 중학교 2학년 설정이지만, 영재 역의 안재홍(14살)을 제외하곤 나이를 꽤 먹었습니다. 정대훈과 노형욱은 18살, 전재형은 성인인 스무 살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들이 모두 30대가 되었네요. 모두 오디션을 통해 선발되었습니다. 석구 역의 전재형은 이 영화의 ‘신 스틸러’였죠. 첫 영화였는데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 몽정기 2 >(정초신, 2005)에도 출연합니다. 노형욱은 <몽정기> 개봉 즈음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가 시작되면서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졌죠. <몽정기> 전엔 < 깊은 슬픔 >( 곽지균 , 1997)에서 김승우 의 아역이었고요. 이후 < 효자동 이발사 >( 임찬상 , 2004)에선 송강호 의 아들로 출연하기도 합니다. 상민 역의 정대훈은 ‘여관집 아들 상민’ 역을 맡았습니다. 성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엔 천혜의 환경인 셈인데요, 그래서 <몽정기>의 인상적인 여관 에피소드가 가능했죠. 안재홍은 < 악어 >( 김기덕 , 1996)의 ‘앵벌이 꼬마’ 역으로 인상적이었던 배우죠. 묘한 표정의 김선아. 이때만 해도 그녀는 영화계에선 신인급이었죠. < 예스터데이 >( 정윤수 , 2002)의 여전사 메이가 첫 영화였는데요, ‘포텐’이 터진 건 <몽정기>였습니다. 취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한 이범수. 이 시기 그는 < 일단 뛰어 >( 조의석 , 2002) < 정글 쥬스 >( 조민호 , 2002) 등으로 서서히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흥행작 <몽정기>를 통해 좀 더 확고한 자리를 잡습니다. 메이크업 중인 이범수와 김선아의 모습입니다. 이범수는 촌스럽게, 김선아는 귀엽고 청순하게 보이는 것이 컨셉트였습니다. 1988년이 배경인 만큼, 교실 뒤편에 가지런히 놓인 도시락들은 빼놓을 수 없는 정겨운 소품들이었죠. 그 옆에 당시 남자 아이들이 즐겼던 종이 축구 게임판이 있습니다. 프로듀서 출신으로 첫 연출작 < 자카르타 >(2000)에서 흥행을 맛 본 정초신 감독은 두 번째 영화로 <몽정기>를 선택했고, 흥행세를 이어갑니다. <몽정기>에 대해 “오프라인 세대의 청소년기를 위한 영화”라고 표현했습니다. 일종의 ‘노스텔지어 무비’라는 거죠. 이 영화의 카메라는 서정민 촬영감독이 잡았습니다. 1934년생이시니 촬영 당시 68세의 노익장이셨죠.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 마의 계단 >(1964) < 만추 >(1966) 등 이만희 감독과 콤비를 이루며 스타일리시한 촬영을 보여주었던 그는 대규모 스펙터클부터 섬세한 감성까지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촬영감독이었습니다. 1980년대엔 이장호 감독의 실험적인 작품들이 그의 카메라를 통해 탄생했습니다. 1990년대엔 < 개 같은 날의 오후 >( 이민용 , 1995) 같은 코미디부터 < 아래층 여자와 윗층 남자 >( 신승수 , 1992) 같은 로맨스, 그리고 < 손톱 >( 김성홍 , 1994) 같은 스릴러와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같은 호러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셨고요. 놀라운 건 <몽정기> 이후 칠순의 연세에 < 어린 신부 >( 김호준 , 2004) 같은 ‘뽀사시’한 영상을 만드셨다는 점인데요, 서정민 촬영감독에게 불가능한 장르와 톤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15년, 위대한 카메라맨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2001년 < 친구 > 이후 한국의 영화 현장에 ‘현장 편집’이라는 게 생겨 급속하게 보급됩니다. <몽정기> 현장에선 그 장비가 매우 간소해졌더군요. <몽정기>의 콘티 북입니다. 이 시기 한국영화의 콘티 북이, 어떨 땐 그래픽 노블을 연상시킬 정도로 매우 정교했는데요, <몽정기>의 콘티 북은 거의 ‘졸라맨’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슬픈(?) 사연이 있었으니… <몽정기>는 제작 초기 감독이 교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고, 갑자기 투입된 정초신 감독은 시간이 없어 꼼꼼하게 콘티를 그릴 시간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대충 그린 콘티 북이 탄생했는데요, 그럼에도 영화는 ‘대박’을 기록했죠.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이 글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검열서류를 중심으로, 1960년대 후반 서영춘의 코미디와 검열의 관계를 살펴보는 두 편의 글 중 첫 번째 글이다. 서영춘의 코미디에 집중해서 검열 서류를 살펴보는 이유는 그가 악극이나 쇼 무대의 활동을 넘어 라디오와 영화 등 대중매체로 활동반경을 넓히고 난 뒤부터 끊임없이 ‘저속성’ 논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서영춘은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저속 코메디언”으로 “방송윤리위원회에서 최고의 체크 기록”을 세운 인물이기도 했다. 1) 말하자면 서영춘의 코미디는 ‘저속함’을 매개로 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1960년대 후반 코미디의 통속성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검열은 코미디에서의 ‘저속’과 ‘건전’을 판가름하는 기준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글에서는 서영춘의 영화 출세작이었던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와 코미디영화로는 드물게 재검열 논란을 불러 왔으며 공보부의 검열 강화 기조에 일조했던 <오대복덕방>(이형표, 1968)을 중심으로 검열의 추이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글에 이어지는 두 번째 글에서는 성적인 표현과 동성애 코드를 둘러싸고 검열에 재검열을 거쳐 상영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쳤던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를 중심으로 1960년대 후반 영화검열의 기조와 서영춘 코미디의 ‘저속’과 ‘통속’ 코드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한국영화사에서 본격적인 코미디영화는 195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악극단의 인기 배우들이 영화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끌던 시점이기도 했다. 식민지기를 거쳐 해방과 전쟁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제작되지 않았던 코미디영화들도 이 시기에 다양한 하위 장르를 이루며 쏟아져 나왔다. 악극단과 라디오에서 주가를 올리던 코미디 배우들은 영화에서 자신들의 장기와 퍼포먼스를 발휘하면서 코미디영화의 활황을 이끌었는데, 가장 먼저 스크린을 점령했던 것은 양석천과 양훈, 홀쭉이와 뚱뚱이 듀오였다. 뒤를 이어 등장했던 구봉서와 김희갑은 검증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코미디영화뿐 아니라 수많은 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했다. 서영춘은 다소 뒤늦게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악극단과 라디오, 쇼 무대를 거쳐 1960년대 스크린 코미디의 총아가 되었다. 서영춘(1928~1986)은 악극단의 유명 작곡가였던 서영은의 동생으로 국도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는 일을 하다가 1952년 악극단 배우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백금녀를 만나 뚱뚱이-홀쭉이 콤비를 이루면서 유명세를 탔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중앙무대에 진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반 라디오 코미디의 전성기에 동양라디오방송국의 한 프로그램을 맡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라디오 프로그램과 TV쇼의 사회자이자 백금녀와 함께 하는 만담의 출연자로 등장하면서 서영춘은 “여보 마누라 가갈갈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뿜빠라뿜빠 뿜빠빠”, “살살이, 요건 몰랐지?” 등등의 유행어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로 시작되는 일종의 만요와 “시골영감 기차놀이”의 리메이크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스타 코미디언으로 발돋움했다. 서영춘의 영화 데뷔작은 1961년 <인생갑을병>(박성복)으로 여기서 그는 엑스트라 급 조연을 맡았으나, 1964년 <총각김치>(장일호), <이거 됩니까 이거 안 됩니다>(박종호)에서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서영춘은 이 영화의 흥행을 시작으로 라디오와 TV, 스크린,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면서 1986년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여자가 더 좋아>는 서영춘을 스타 배우로 만든 영화일 뿐 아니라 1960년대 후반 유행했던 여장남자코미디의 시초이자 이 시기 코미디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코미디, 즉 코미디언코미디의 활황을 선도한 영화였다. 여장남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고, 성전환 수술을 암시하는 결말을 보여주는 등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코미디이지만 검열에서는 거의 지적된 바가 없으며 오히려 흥행을 통해 재평가된 지점이 존재했다. 한편, <오대복덕방>은 서영춘이 여러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출연하는 영화여서 전체적인 비중으로 볼 때 ‘서영춘 코미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코미디영화로는 드물게 재검열 논란을 불러 온 영화였고 공보부의 검열강화 기조에 일조한 영화였다는 점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여자가 더 좋아>를 살펴보자. 코미디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영화였던 <여자가 더 좋아>는 오랫동안 유실된 필름이었다. 다행히 2015년 한국영상자료원에 ‘한우섭-한규호 父子 컬렉션’이 기증되어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2016년 5월 31일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최초로 일반 상영되었는데, 후반부 20여 분의 싱크가 맞지 않고 마지막 씬이 유실된 불완전판으로 공개되었다. 유실된 부분에 대하여 시나리오, 검열 서류 및 각종 기사들과 스틸 사진 등의 자료를 보충하여 내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영화는 흡사 김기영의 <하녀>(1960)에서 남녀가 뒤바뀐 설정의 코미디 버전처럼 보인다. 여자직업학교에서 음악 선생으로 일하던 규철(서영춘)은 동거하고 있던 애인 영숙(최지희)이 자신을 배신하고 결혼하자 여장을 하고 그 집의 식모로 들어가 복수하고자 한다. 영숙이 규철을 배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여성에 가까운 중성’이라는 의학적 소견 때문이다. 이를 인정할 수 없는 규철은 변심한 애인을 벌하고자 규화라는 이름으로 여장을 하고 영숙의 집에 식모로 들어간다. 시아버지(김희갑)의 못된 버르장머리 때문에 “식모란 식모는 모조리”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던 이 집에서 애교스럽고 일 잘하는 규화는 시아버지의 총애(를 가장한 성추행)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규철은 뛰어난 피아노 실력으로 영숙의 남편 박문기(남궁원)에게도 호감을 사며 문기의 동료이자 악극단의 지휘자인 선우광(양훈)으로부터는 적극적인 구애를 받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인하게 된 규철은 정체가 탄로 나자 속옷 바람으로 거리를 질주한다. 현재는 유실되었으나 시나리오 및 신문기사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엔딩 씬은 질주하던 규철이 성전환 수술을 하는 병원으로 뛰어 들어가고 잠시 후 여성이 되어 병원을 나선 규철이 “교태를 부리며” 걸어가는 장면으로 제시된다. 이 같은 파격적인 내용을 갖고 있었던 <여자가 더 좋아>는 그럼에도, 검열에서 큰 지적 사항 없이 영화화되었다. 시나리오 심사의견서는 이 영화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여자 같은 남자’ 콘셉트를 베꼈다고 지적하면서 코미디에 필요한 “건전한 웃음” 없이 “난잡”하고 “황당무계”한 것으로 “오로지 웃기기만 하면 된다”는 비예술적 태도를 지양할 것을 주문했다. (그림 1) 공보자문위원회 영화분과위원회, 「“여자가 더 좋아” 씨나리오審査意見書」, 1965.4.22. <여자가 더 좋아>의 시나리오 검토는 제작자에게 “건전한 웃음”과 ‘코미디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주문하는, 다소 추상적이고 훈계적인 내용의 ‘의견서’로 제출되었다. 그런데 건전한 코미디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공보부에서 ‘눈깔’ 등의 대사를 시정하라는 것, 선우광과 규철의 밀회 장면을 ‘주의 깊게 취급’해달라는 것 등 5개의 가벼운 지적 사항과 함께 제작신고 수리 통보를 받았다. (그림 2) 공보국 영화과, 「극영화 “여자가 더 좋아” 제작신고 수리통보」, 1965.5.31. 그리고 실사 검열에서는 위의 밀회 장면을 단축하라는 단 한 가지 지적을 받고 상영이 허가되었다. (그림 3) 공보국 영화과, 「국산영화 “여자가 더 좋아” 상영허가」, 1965.6.19. 상대적으로 ‘반공법’ 위반에 주목하고 있었던 이 시기의 영화검열은 아직 서영춘 코미디의 ‘저속함’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만화조 넌센스의 소극” 2) 에 불과하다며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평단에서 의외로 영화가 장기 흥행 하며 관객 몰이에 성공하자 이 영화가 일종의 사회 “풍자”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저속’함에 대한 면죄부를 마련하고자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영화의 장기 흥행을 보도하면서 한 기사는, 남자였을 때 누릴 수 없었던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을 여장을 하고 난 뒤에 쉽게 얻을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성전환을 택한 “서영춘의 페이소스”와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는 비평을 실었다. 3) 같은 해 11월에 개봉한 영화 <주책바가지>(심우섭, 1965)를 혹평하면서, <주책바가지>에는 <여자가 더 좋아>의 “페이소스”가 결여되어 있다고 평가한 기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한편, <여자가 더 좋아>가 제작되었던 1965년 이후, 1966년 2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검열에 대한 기준이 강화되면서 코미디영화 검열 역시 강도가 높아졌다. 1967년 말에 제작하여 시나리오 사전검열과 제작 후 필름검열을 모두 통과하고 1968년 2월 개봉 중이었던 <오대복덕방>을 공보부가 재검열하겠다고 나서면서 이 영화는 검열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시나리오와 기사, 스틸 사진 등으로 영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다. <오대복덕방>은 김해 김씨 일가 5대의 이야기로, 영화는 90세의 1대 용태 할아범이 서울에 와서 복덕방을 차려 성공하자 자손들을 서울로 불러들이면서 시작된다. 이후 전라도 무주에서 상경한 일가족이 한 동네에서 각자 복덕방을 차리면서 각종 해프닝을 벌인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확정할 수는 없지만 추정하건대, 서영춘은 3대 김영근으로 등장하여 결혼 사기를 당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로 반목하며 경쟁하던 5대 일가족은 사기사건을 계기로 화해하고 개심하여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전라도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이 가족의 ‘저속한’ 행태와 말투로 인해 전라도 지역 영사기사들이 영사를 거부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전북극장협회에서도 영화 상영을 거절했다. 검열 서류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전라북도 내 영사기사들이 이 영화의 상영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는 기사와 전북극장협회의 상영 거절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5) 뿐만 아니라 김해김씨 종친회 및 전라북도 도지사의 상영정지요청도 이어졌다. (그림 4) 사단법인 가락중앙종친회, 「영화상연중지요청」, 1968.2.5. (그림 5) 전라북도지사, 「영화 “5대복덕방” 상영 정지처분 건의」, 1968.2.9.) 김해김씨 종친회의 민원은 <오대복덕방>이 “우리종친인 김해김씨의 명예를 형언할 수 없을 만치 훼손한 스토리로 되어 있어서”,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인 종친사회를 근본적으로 모욕한 것”이므로 즉각 상연을 중지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전라북도 도지사의 이름으로 발송된 건의서에는 이 영화가 “오락적 경지를 벗어나 전래의 미풍양속을 해하고 나아가서는 혈연의식과 지역적 파벌을 조장하는 결과를 자아내”어 “전북도민으로 하여금 격분의 도가니에 몰아넣게 하고 신문, 방송 등 이 고장 언론기관이 선두에서 이를 규탄하는 일대 쎈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동시에 본도 전도민이 항의에 기세에 있을 뿐만 아니라... (중략)... 국민적 단합과 정신무장 면에 구열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하면서 이 영화를 즉각 상영중지하도록 요청했다. 이 서류에는 전북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기사들도 첨부되어 있어 이 영화를 둘러싼 전북 지역의 여론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나리오 검열에서 이 영화는 “건전하며 코믹한 오락작품이면서도 과욕과 허실된 생활을 다분히 경고적으로 풍자한 작의가 좋”다며 “극히 명쾌하고 코믹하면서도 ... 인간 본연의 자세와 선악을 도시 생활상의 일단면에서 풍자적으로 그려주고 있다”는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저속한 대사나 장면 묘사에 주의하여 제작”하라는 주의 속에서 무수정으로 검열에 통과했고, 필름 검열에서도 판잣집을 서울의 명물이라고 보여주는 장면, 화장실 씬 등 세 장면을 삭제하고 대사 한 줄 정도를 삭제하라는 수정사항을 지적한 뒤 합격증을 배부했던 것이다. (그림 6)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각본심의위원회, 「“오대복덕방” 각본심의의견서」, 1967.12.14. (그림 7) 공보부, 「국산영화 “오대복덕방” 검열합격」, 1968.1.26.) 검열의 호평 속에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영이 시작되고 나자 앞서 언급했던 각종 투서와 건의서가 공보부에 답지했다. 이러한 여론이 비등해지자 영화의 제작자였던 주식회사 대한연합영화사의 대표이사 홍의선은 재검열과 재편집이 불가능하다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탄원서에서 홍의선은 상영허가검열에 합격하여 이미 상영을 시작한 지 열흘이나 경과된 시점에서 프린트를 회수, 재편집하는 것은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가져올 것이므로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공보부의 “영화위원회의 심의에 회부”하여 검열해 달라고 요청한다. 또한 홍의선은 이 영화가 “정극과는 그 영역이 판이한 희극영화”로 사투리는 “코믹한 텃취로 극을 희화화해보려는 시도”일 뿐이고 전주김씨 17대손 운운은 “우리나라 성씨 중 가장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성씨의 하나로 표현한 데 불과”하며 “예의 17대손은 4,500년 전에 존재한 인물로 가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현재 후손들에게 불명예스럽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그림 8) 「희극영화 “오대복덕방”영화위원회심의요청의 건」, 1968.2.6.) 결국 공보부에서는 “영화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영화의 재검열을 실시한다. 그런데 이 ‘영화위원회’는 영화각본심의위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967년 4월 1일부터 공보부에서는 영화제작신고시 첨부되는 각본에 대하여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각본을 검토하도록 했는데, 각본심의위원회는 영화법 저촉사항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영화계 내부에서 스스로 조직한 단체였다. 각본심의위원회의 검토를 통과하고 나면 제작이 시작되고, 제작이 완료된 필름은 실사심의를 거치는 이중의 검열제도가 실시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심의 제도는 1967년 12월 1일 공보부에 6인으로 구성된 ‘영화각본심의위원회’가 설치되면서 3중의 제도로 변경된 바 있었다. 따라서 <오대복덕방> 상영 분쟁이 생긴 뒤 소집되었던 영화위원회는 ‘영화각본심의위원회’와 동일한 심의기구로 추정할 수 있다. 1968년 2월 7일 공보부가 “영화위원회”를 소집하여 재심을 한 결과 “사회적 물의와 진정의 대상이 되는 저속한 부분은 추가 제한 조처함이 가하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에 따라 “일단 상영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추가제한 조치로 30여 곳을 삭제, 단축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가락중앙종친회에는 “종친을 특정하는 대사, 화면 및 저속한 대사, 화면을 추가 삭제 조치”했음을 알리는 공문을, 전라북도지사 공보실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대사삭제 29개처, 화면삭제 15개처, 화면 단축 2개처”를 제한조치하여 상영하도록 했다는 회신을 보냈다. (그림 9) 「극영화 “오대복덕방”의 상영 정지」, 날짜 미상(2.7-2.9일 사이로 추정) (그림10) “극영화 <오대복덕방>에 대한 추가 제한 조치”, 1968.2.9. (그림11) 「진정에 대한 회신」, 1968.2.9.; 「극영화 “오대복덕방” 상영정지처분건의 회신」, 1968.2.20.) 그런데 이때 재검열의 내용은 신문기사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과 사뭇 다른 점이 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다소 저속”하지만 “넌센스 코메디임을 감안하면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다”는 결과를 회신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내용이 담긴 서류는 확인할 수 없다. 6) 영화각본심의위원회가 일종의 중재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추가제한 조치에 따라 이후 필름들이 회수, 수정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과 2월 말까지도 이 영화를 둘러싼 비난 여론이 계속되었던 것을 감안해본다면 처음부터 상영을 중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재검열을 요구했던 여론의 흐름과 투서를 보냈던 단체들에 보낸 회신으로 미루어볼 때, 필름 회수 후 수정본을 다시 상영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재검열 소동 이후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필름의 상영본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대복덕방>을 둘러싼 문제제기와 재검열 사건으로 인해 검열에 대한 여론의 문제제기가 한층 높은 강도로 진행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가혹하기로” 이름 높은 검열에서 “우리나라 영화사상 최저의 태작”이라고 평가받는 <오대복덕방>에 별 다른 문제없이 상영허가를 내 준 것에 대해 비난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 7) 이처럼 상황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자 홍종철 공보부 장관은 이 영화의 상영허가가 “사무적 미스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고 변명하면서, 이 영화의 재검열 뿐 아니라 앞으로 더 엄격한 검열을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2중, 3중으로 실시되는 영화검열의 엄격함과 그 자의성에 대한 비난이 거세짐에도 불구하고, 홍종철은 “반국가적 반사회적인 것과 윤리적 도덕적인 것에 위배되는 것은 계속 커트하겠다”고 밝혔던 것이다. 8) 그간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의 각본심의위원회에서 해 왔던 사전 시나리오 검열과 제작 이후 공보부의 실사 검열은 <오대복덕방> 검열 논란이 있었던 직후인 1968년 4월 1일부터 각본심의위원회와 영화각본심의위원회에서 합동으로 사전 시나리오 검열을 실시하고 검열의 강도도 강화하는 방침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1970년 2월 20일 극영화시나리오 검열 업무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으로 이관될 때까지 이러한 검열의 주체와 기조는 지속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재검열 소동이 벌어졌던 와중에서 <오대복덕방>은 <남자 식모>(심우섭, 1968)와 더불어 개봉관에서 10만 관객을 넘겼다. <남자 식모>가 18만, <오대복덕방>이 10만을 넘기며 그 해 흥행 순위 2위와 5위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들의 “크린 히트”와 함께 평단에서는 코미디영화 검열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검열에서 “대중적으로 건전”하다고 평가 되었던 <남자 식모>와 “저속”하지만 “코미디”이므로 “웃고 넘길” 수 있다는 정도로 평가 받았던 <오대복덕방>은 검열의 위계상 분명히 같을 수 없는 것이었으나, 평론에서는 함께 엮여 “관객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마구잡이로 찍은” “저질 코미디”의 대표작으로 거론되었다. 9) 이 시기, 검열과 평가의 기준을 달리 했던 평단은 서영춘 코미디와 구봉서 코미디를 한 데 묶어 “저질” 코미디로 분류하였으나 검열은 “저질 코미디” 안에서 또 다른 위계를 설정했던 것이다.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저속’에 대한 검열의 문제제기와 위계화에 대해서는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9)의 검열서류를 중심으로 <남자 식모>, <남자와 기생>, <남자 미용사> 등 이른바 ‘남자 시리즈’의 검열서류를 비교하면서 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 더 자세히 살펴본다. 1) “방송가에 또 하나의 불씨/ 막다른 골목에 이른 코메디 프로 방륜마저 가벼운 경고 정도의 조치 뿐”, 《서울신문》, 1966.9.15. 2) 만화조 넌센스 소극 여자가 더 좋아”, 《조선일보》, 1965.7.15. 3) “우울한 동정에 기대어 롱런 한달 째나 「여자가 더 좋아」”, 《신아일보》, 1965.7.20. 4) “희극배우들의 여성숭배열/ 주책바가지”, 《신아일보》, 1965.11.6. 5) “복덕방 상영거부”, 《대한일보》, 1968.2.10. 6) “말썽난 70여 곳 삭제 항의 속에/다시 검열대 앞에/ 「넌센스 코메디」 오대복덕방”, 《신아일보》, 1968.2.13. 7) “「오대복덕방」 시비를 계기로 본/ 영화검열의 문제점/ 무정견한 양식의 기준/ 제 나름의 주관/ 툭하면 가위질. 영화 드라마의 뼈대를 손상시키기도/ 윤리적 면서 타락, 검열은 계속 강화 공보부의 견해”, 《조선일보》, 1968.2.22. 8) 앞의 기사, 《조선일보》, 1968.2.22 참고. 9) “한계 흐린 가위질/ 영화검열 시비/ <처제>는 저속, <엄마기생>은 OK/ 귀걸이 코걸이 재단/ 업자 당국 반성하고 전문위 두도록”, 《중앙일보》, 1968.5.25.; “관객 동원수로 본 상반기 영화/ 이상기류/ 철저한 오락물 추구/ 난센스 코미디와 검객영화 판쳐/ 흥행서 실패한 올해 수확작”, 《대한일보》 1968.7.9.; “하반기의 영화제작 경향/ 소극, 합작물의 범람/ 거의 예술성을 외면 /아이디어 부족 소재도 저속/ 관람 성향에 편승/ 인니, 태국과 합작도 기획”, 《대한일보》, 1968.7.20.) * 참고문헌: 박선영, 「1960년대 후반 코미디영화의 ‘명랑’과 ‘저속’ - 서영춘코미디의 불온함과 검열의 문제」, 한국극예술학회, 한국극예술연구51집,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