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감독
- 이장호
- 제작년도
- 1987
- 출연
- 이보희, 김명곤, 고설봉, 추석양, 유순, 권순철, 김대환, 이은영, 김선애, 임귀련, 권용운, 임용규, 조선묵, 노인령, 최경아, 원미선, 박용수, 김세창, 오승환, 우옥주
이장호 는 70년대 '영상시대' 활동과 더불어 ‘청년영화의 기수’였으며 ‘최초의 스타감독’이라고 불린 시대적 문화 아이콘이었다. 특히 80년대는 이장호의 전성시대였다. ‘80년의 봄’, 4년여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 바람 불어 좋은 날 >은 당시 청년 영화인들의 교과서였다. 당대 발표된 ‘80년대 한국영화 베스트 10’에는 그의 영화가 4편이나 선정되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보선언 >,< 과부춤 >과 더불어 그 목록에 포함된 영화가 바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다. 85년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이제하의 단편 소설을 영화로 옮겼다. 85년 영화제작 자율화 시행 이후 그가 설립한 판영화에서 제작하였는데, 87년 어렵게 허리우드 극장에서 개봉을 했으나 관람 숫자는 미미했다. 당대의 지배적인 한국영화 관람 체험 속에서 이 영화는 낯설었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영화는 편안한 관람 행위를 허하지 않는다. 수려하지만 그 수려함을 세피아톤으로 톤 다운시켜 놓은 강원도 산길을 익스트림 롱 쇼트의 롱테이크로 찍은 화표면은 마치 정지된 스틸의 그것 같다. 화면 왼쪽으로 원경에서부터 쭉 뻗은 길로 남자와 여자가, 그리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천천히 다가온다. 그러나 화면 앞 가장 가까운 거리에 도달할 때 까지도 그들은 식별되지 않는다. 아울러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다른 내재적 사운드가 소거된 상태에서 마치 보이스오버처럼 원근감 없이 들려오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 소리는, 현재 그들이 나누는 대화인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이미지와 비동조화된 사운드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인과법칙에 기초하지 않은 서사의 진행, 행위에 대한 동기와 설명의 희박함,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지우는 쇼트의 배열, 극적 흐름과 맥락을 단절시키는 몽타주 시퀀스들은 시공간적 통일성과 연속성의 감각을 흩뜨리면서, 샤머니즘적인 운명론적 세계관의 묘사와 맞물려, 종국에는 불가해한 재현의 지점에 다다른다. 영화는 크게 황토 빛 모노크롬과 푸른 빛 모노크롬으로 처리된 두 개의 의미 계열체로 구성되어 있다. 몇 개의 시간적 재배치가 있으며 간헐적으로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허무는 주관적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황토 빛 모노크롬의 세계는 대체로 3박 4일의 여정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적 현재를 재현한다. 반면 그 황토 빛 시공간을 절단하고 틈입하는 푸른 빛 모노크롬의 의미 계열체는 인물들의 회상, 주관적 플래시백, 의식의 흐름, 운명적 암시 같은 현재 시제를 벗어나, 충돌하며 운동하는 이미지들의 배열이다. 이장호는 <바보선언>에서 실험했던 즉흥적이고 연상적인 연출법을 재도입하는데, <나그네>에서 그러한 연출 방식은 명확한 좌표 없이 강원도를 떠돌며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직면하는 인물들을 그리는 데에는 더없이 잘 맞아 보인다. 개성이 고향인 사내와 전쟁 통에 고향이 어딘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아내, 휴전선 부근 월산이 고향인 노(老) 회장 모두 전쟁으로 인하여 이산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속초, 원통, 강릉, 경포, 인제에 이르는 영화적 공간에서도 원통, 속초 등은 분단과 그 결과인 휴전선 아래 마을들이다. 영화는 이러한 공간의 지정학적 의미를 예민하게 포착한다. 예컨대 여행 첫날 사내가 아내의 유골을 바닷가에 뿌리려다 군인에게 제지를 당하고 결국 철수하는 것이라든가, 강릉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회를 파는 전주식당의 사장이 "전쟁 통에 나같이 된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냐"고 반문하는 것 등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몇몇 장면은 자유연상과 자동기법으로 이러한 역사적인 지정학적 트라우마 의미를 기입한다. 백사장에 놓은 가방 속 아내의 유골을 바라보던 시선이 “고향이 원산은 아니라예”라는 아내의 목소리 사운드와 연결되면, 강릉 앞바다 위로 포화와 피난 행렬을 담은 한국전쟁 당시의 뉴스릴이 오버랩 된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 시선의 주체를 알 수 없는 일련의 국도 이미지의 몽타주 시퀀스 끝에, 우리는 국방 한계선과 상판이 없이 끊어진 다리와 마주하게 된다. 그러한 시도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담대하다. 영화 전체에 걸쳐 산포되어 있는 분단의 트라우마가 영화적 주요 배음을 이루고 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샤머니즘적 운명이라는 또 다른 배음이 날 선듯한 감각으로 강화된다. 사내의 주체의 중심 없음 혹은 부유(浮遊)함은 실향(失鄕)과 상처(喪妻)의 중층 결정의 결과물이다. 실향의 감각은 아내의 죽음과 이중 노출되어 있으며, 그와 연합된 상실감과 죄책감은 노정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성매매 여성과 ‘색시’, 그리고 ‘미세스 최’에게 투사된다. (아내, ‘색시’, ‘미세스 최’는 모두 이보희 가 연기한다) 서사가 진행될수록 영화는 최가 몇 해 전 받았던 점괘, 즉 “나이 서른에 물가에서 관을 세 개 짊어진 남자를 반드시 만날 것, 그가 전생의 남편”이라는 운명론적 예언을 향해 가는데, 기실 색시와 최는 모두 아내의 더블들이다. 그와 간밤에 관계를 가졌던 ‘색시’의 죽음은 아내의 죽음에 대한 환시(幻視)로 대체된다. 최가 고향을 언급하며 “아우라지강을 아세요”라고 언젠가 죽은 아내가 했던 말을 똑같이 사내에게 건넬 때, 최는 정확히 아내의 도플갱어로 확증된다. ‘미세스 최’란 인물은 철저히 대리보충적인데, 그녀는 지난 2년간 중풍환자 회장의 ‘인간 핫 팩’으로서 그가 결여한 혹은 상실한 온기, 활력, 고향의 따스함을 대리보충 해왔다. 그 역할은 사장 아들이 특파한 상무에게 끌려가면서 회장이 손에서 놓아 버린 낡은 사진과 기능적으로 같다. 또한 그녀는 남자에게는 죽은 아내의 대리보충이며, 마지막에는 오구굿 중 신내림을 받음으로써 영혼에게 몸을 주는, 사령(死靈)들의 대리보충 역할이 된다. 결국 남자의 주체성의 위기는 복구되지 않으며 파국을 맞는데, 그것은 죽은 아내의 대리보충으로써는 온전한 애도작업을 완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완수되지 못하는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인 애도작업은 신내림의 형태로 최에게로 전이되며, 민족적 해원의 무게는 그녀의 무속 연행에 맡겨진다. 이장호의 80년대 작품 연보에는 사회적 참여의식이 강한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들과 대중추수적인 흥행 영화들, 그리고 작가의식이 녹아든 영화들이 교차했다. ‘황토빛 모노크롬 영화 한편 찍고 싶다’는 로망을 실현하고자 이장호가 직접 제작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처음부터 지방흥행업자들의 투자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 결과 그의 작품연보에서 그리고 한국영화사에서 아주 낯설고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 내었다.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고화질 VOD 보러가기 <<
침체의 시작 | 1970~1974년 197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계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며 국가 주도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지만, 그해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어두운 일면을 극명하게 부각했다. 1972년 10월 유신 정권이 탄생했고, 한국 사회는 더욱 경직되어갔다. 물론 사회를 반영하는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는 1970년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기업형 제작사를 육성하겠다는 정부 주도의 정책은 인위적이었던 만큼 효과가 오래가지 않았고, 폐해는 더 커져갔다. 이제 더 이상 영화를 대중오락의 왕자라고 부르기도 힘들었다. 1970년대 내내, 흑백이었지만 텔레비전 보급률이 꾸준히 상승한 반면 전국의 영화관 및 영화 관객 수는 줄어들었다. 불황기, 침체기 그리고 쇠퇴기로 불리는 이 시기, 영화인들은 더 나빠지지 않을 방향을 모색해야만 했다. 1973년 2월, 유신 체제를 반영한 영화법 4차 개정이 있었다. 그 골자는 1)제작사를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전환 2)제작업과 수입업의 통합 3)영화진흥공사의 설립이었다. 1972년 20개이던 영화제작사는 1973년 12개로 줄었고, 그 12개사에 제작권을 부여해 연간 제작편수를 130편으로 묶었다. 47편으로 한정한 수입권도 12개 제작사에만 나눠주었다. 국산영화 3편을 제작하면 외화 쿼터 1편을 부여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영화는 외국영화 수입 쿼터를 받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작사들은 졸속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제작비 대비 흥행 성적이 안정적인 저예산 액션영화 장르가 유행한 이유였다. 특히 이런 유의 영화는 네거티브 필름을 반만 써서 촬영하는 테크니스코프 사이즈로 만들어져, 제작비를 아끼는 대신 완성도는 포기했다. 외화 쿼터를 더 따내기 위한 방법은 정부가 제시하는 ‘국책영화’ ‘우수영화’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었다. 제작사들은 관객보다는 정권의 기호에 부응한 반공영화, 새마을영화를 만들었다. 한편 ‘한국영화의 육성과 발전’을 슬로건으로 내건 영화진흥공사가 발족되어 유신 정권의 지배구조를 영화 산업 내부로 뿌리내리는 역할을 맡았다. 영화계의 불황을 타개하겠다는 당국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불황은 가속화되었다. 1971년까지 200편을 넘겼던 한국영화 편수는, 검열 편수 기준으로 1972년 122편, 1973년 125편, 1974년 141편을 기록했다. 이러한 침체 일로의 영화계에 일순간 활력을 불어넣은 작품이 바로 이장호 의 < 별들의 고향 >이었다. 행운아에서 풍운아로 1945년 5월 서울에서 출생한 이장호 는, 흥미롭게도 영화 검열관이던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영화와 가깝게 지냈다. 홍익대 건축미술학과에 입학했지만 제도권 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부친의 권유로 신필림에 입사하게 된다. 그는 신상옥 감독 등의 연출부 생활을 했으나 적극적으로 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출부를 중도에 그만두기도 하고 극단 생활을 위해 신필림을 들락날락하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일을 모색했다.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한순간에 바뀌었다. 1973년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별들의 고향」의 판권을 우여곡절 끝에 확보한 것이다. 사실 소설가 최인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였는데, 그렇다고 감독 데뷔도 하지 않은 친구에게 덜컥 판권을 넘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장호는 동생의 대학등록금을 최인호의 집에 던져놓고 오는 막무가내로, 결국 승낙을 받아낸다. 영화화 권리는 확보했지만 이후의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스승 신상옥 감독이 데뷔는 시켜주지만 신필름의 노장 이형표 감독에게 촬영을 맡긴다고 하자, 연출권을 확보하기 힘들 것을 직감한 그는 신필림을 도망치듯 떠나 하길종 감독이 소개한 화천공사로 옮긴다. 도제 시스템이 확고하던 시절, 연출부 제2조수 출신의 영화청년이 일순간 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여하튼 기적 같은 일이었다. 눈으로 뒤덮인 광나루의 백사장에 도착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즉흥적으로 장면들을 만들어나간 것이 첫 연출 풍경이었다는 일화처럼 행운과 돌파력, 천재적 기질 사이의 어딘가에서 < 별들의 고향 >이 탄생했고, 이장호는 46만이라는, 당시로는 전무후무한 흥행 성적으로 충무로의 스타 감독이 되었다. 1975년 연배가 위인 하길종, 김호선 등과 결성한 ‘영상시대’를 통해 ‘뉴시네마 운동’의 흐름을 이끌던 그는, 1976년 연예인 대마초 파동으로 감독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촉망받는 젊은 감독에서 순식간에 낭인으로 전락한 4년간의 시간은, 그가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 12월 유신 정권 종식으로 감독 자격을 회복한 그는 그간의 고민을 담아 연출한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로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작가주의적 인장이 새겨진 < 바보선언 >(1983), < 과부춤 >(1983)의 흥행 실패로 위기감을 느꼈지만, 보란 듯이 < 무릎과 무릎 사이 > (1984), < 어우동 >(1985)을 히트시키며 상업적 감각을 입증하기도 했다. 1987년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이후의 영화는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30대 후반의 이장호 감독. <과부춤> 촬영 현장에서 아마추어리즘이 만든 참신함 1972년 9월 「조선일보」에서 연재를 시작한 「별들의 고향」은 연재 중은 물론이고, 단행본으로 출간된 1973년 한 해에만 15만 부가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장호 가 연출의 기회를 잡고 개봉 초기 관객의 주목을 끌어낸 것은 당대 최고의 소설을 판권으로 확보한 덕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단관 개봉 시절, 국도극장 한 곳에서만 석 달을 상영하며 46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기록은, 영화 자체의 힘이 분명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기성 감독 누군가가 이 영화를 맡았다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 별들의 고향 >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거칠고 투박하지만 신선하고 감각적인 이 영화를 만날 수 있었을까. 당시 충무로의 선배 감독 다수가 판권을 탐내는 상황에서, 특유의 직관과 돌파력으로 이런저런 난관을 이겨낸 이장호는 어떻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사실 그는, 카메라를 직접 잡는 신상옥 감독 특유의 촬영 현장에서 게다가 제2조감독에 머물렀기 때문에 연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구영화를 섭렵했던 영화청년으로서의 세월이 그의 연출 방향을 직관적으로 알려주었다. 그냥 자기 느낌대로 한 것이다. 물론 당대 최고의 촬영기사 장석준 이 함께한 것은 천우신조였다. 이장호는 자신이 즐겨본 일본의 전문 사진잡지 「아사히 카메라」에서 스크랩한 이미지들을 장석준 기사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척하고 구도를 잡아냈다. 영상뿐만 아니라 음악도 큰 몫을 했다. 이전의 한국영화는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영화음악의 대가들이 녹음실에 오케스트라를 불러 잠깐 맞춰본 뒤 일사천리로 음악을 녹음하는 식이었다. 이장호는 고교 후배인 가수 이장희 에게 음악을 맡겼고, 아예 레코드 스튜디오에 자리 잡고 무려 40여 일을 투자했다. 이장희가 작곡하고 노래를 부르고 기타리스트 강근식 이 연주한 <별들의 고향>의 영화음악은, 국내 첫 OST 음반으로도 발매되어 영화만큼 성공을 거뒀다(그 이전의 한국영화 음반은 주제가가 수록된 것이지만, 이 앨범은 문자 그대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었다). 물론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을 벗어나 혹은 잘 몰라서, 신선하게 음악을 배치한 것도 이장호의 감각을 기반으로 했다. 이장희가 부르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소녀가 울고 있네’가 흐르는 장면들의 참신함이 특히 그렇다. 물론 시퀀스 전체를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음악을 전면에 내세워 연결한 장면들은, < 졸업 The Graduate>(마이크 니콜스, 1967) 같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장호가 “아마추어리즘의 승리”라고 규정한 것처럼, <별들의 고향>이라는 희대의 흥행작은 새로운 세대가 그들의 느낌대로 밀고 나간 덕분이었다. 사실 이 영화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와 같은 혁신을 일으켰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운규가 그리피스의 대작 멜로드라마를 염두에 두고 < 아리랑 >(1926)을 만들고, 이만희 가 할리우드의 빼어난 장르영화와 유럽의 예술영화를 소화해 < 만추 >(1966)를 만든 것처럼, 한국 상업영화의 새로움은 늘 서구 영화의 언어와 문법에서 힌트를 찾았다. 이장호 영화의 새로움 역시 서구 영화의 고전과 현대작을 섭렵한 영화광 출신의 감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이는 <별들의 고향>에서 표면적으로 보이는 < 네 멋대로 해라 A Bout de Souffle>(장 뤽 고다르, 1959)의 장 폴 벨몽도의 중절모나 < 상하이에서 온 여인 The Lady from Shanghai>(오손 웰스, 1947)의 거울의 방 같은 설정을 넘어서는 문제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기존의 한국영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틀었다는 사실이다.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 같은 대사가 흐르던 바로 그 장면 멜로드라마와 새로움 사이 < 별들의 고향 >은 20대 중반의 순진하고 발랄한 여성 경아( 안인숙 )와 그녀가 만난 4명의 남자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사실 영화는 내러티브의 밀도가 희박한 편으로, 시간순으로 줄거리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소설을 빌려 그 행간을 채워야 한다. 작은 회사 경리인 경아는 직장 선배인 영석( 하용수 )의 구애로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그는 아이까지 지운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두 번째 남자는 중년의 만준( 윤일봉 )이다. 경아는 만준의 두 번째 부인이 되지만, 경아를 닮은 전부인이 의처증으로 자살한 것과 경아의 낙태 경험이 밝혀지면서 파경을 맞는다. 이후 경아는 호스티스가 되고 화가 문오( 신성일 )를 만난다. 삶의 의욕을 잃었던 둘은 동거를 시작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지만, 폭력적으로 그녀에 집착하는 옛 애인 동혁( 백일섭 )이 찾아오면서, 문오도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 고향으로 떠났다 서울로 돌아온 문오는 1년 반 만에 술집에 있는 경아를 만나고, 그녀가 잠든 사이 돈을 두고 나온다. 그리고 1년 후 경아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눈밭에서 죽음을 맞는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문오가 유골함을 들고 경아를 회상하는 장면과 한강에 그녀의 재를 뿌리는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를 촘촘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에 기반을 둔 것이 그 이유겠지만,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연출하며 장면을 만든 결과이기도 했다. 촬영해놓은 필름을 돌려보며 편집실에서 구성을 시작했다는 이장호의 증언처럼, 그는 편집을 통해 아마추어리즘을 참신함으로 바꿔놓았다. 이 영화는 플래시백의 리듬도 균일하지 않고 오히려 복잡하지만 이는 되레 관객에게 긴장감을 주고 영화 속으로 몰입시킨다는 점에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영화의 발전도 계단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별들의 고향>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관객을 한 단계 성숙시킨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별들의 고향> 역시 이전 한국영화의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지금의 감각으로는 영화의 중반부 두 번째 남자 만준과의 에피소드가 특히 그렇다. 하지만 경아로 분한 안인숙의 연기가 이마저도 상쇄시킨다. 아역 배우 출신인 그녀는 여리고 순진하고 발랄하지만 도시의 비정한 남자들에게 버림받는 경아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 영화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이 영화는 여성의 수난담과 성적 과잉을 관음증적 볼거리로 제공하는 호스티스 영화의 출발점으로도 평가된다. 하지만 카메라가 경아를 잡아내는 구도나 쇼트들의 배치를 자세히 보면 여성의 입장에 공감하고 가부장적 폭력을 고발하는 것으로도 읽어낼 수 있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 경아역의 안인숙 호스티스 영화와 청년 영화의 산파가 되다 < 별들의 고향 >이 출현한 덕분에 1970년대 중반의 한국영화와 관객들도 새로운 활력을 얻은 것은 분명하다. <별들의 고향>이 선취한 도시 속 젊은 여성의 이야기는, 김호선 감독에 의해 세련돼졌다. 조선작의 연작소설을 원작으로 한 < 영자의 전성시대 > (1975)가 36만 관객을, 조해일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 겨울여자 >(1977)가 58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과 비평 양쪽을 두루 만족시켰다. 하지만 이 작품들의 성공은 1970년대 후반, 순수한 여주인공이 호스티스로 전락해 여러 남성을 거치는 과정을 관음증적으로 전시하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가 양산되는 계기가 된다. ‘청년 영화’로서의 선명한 줄기는 미국 영화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하길종 이 만들어냈다. 통기타. 청바지.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의 생기에, 당대 청년들의 저항과 체념의 정서까지 담아낸 < 바보들의 행진 >(1975)이 바로 그것이다.
이장호 감독의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마지막 장면에서, 섀도복싱을 하는 덕배( 안성기 )의 잽은 흡사 태양을 두들기려는 듯 보인다. 때맞춰 안빈낙도의 정서를 노래한 김도향의 동명 주제가도 터져 나오지만 사실 덕배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하다. 낯선 서울살이에서 친형제나 다름없었던 두 절친은 각각 감옥과 군대로 끌려갔다. 그 자신은 중국집 배달 일도 그만두고 전업 권투선수의 길로 나섰음에도 스파링에서조차 내내 얻어맞기만 한다. 애먼 태양에라도 화풀이를 해보려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내 카메라는 물러서고 석양은 조롱하듯 멀어진다. 못다 한 화풀이는 1년여 후를 기약해야 했다. 긴급조치와 10월 유신 시국의 1974년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구로동 2인조 카빈 강도 사건’을 영화화하면서, 이장호 감독은 <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1981)라는 강렬한 타이틀을 선택했다. 실화에 대한 감독의 해석인 이 제목 문구는 중의적이다. 그들이 쏜 것은 부도난 희망을 낳은 위선의 태양이자, 또한 사람의 이름이다. 사건의 주인공인 문도석( 이영호 )과 이종배( 박일 ) 2인조에게 있어 태양의 빛이란 만물을 평등하게 내리쬐는 축복이 아니었던 게다. 아울러 경찰에 포위된 이종배가 자살하기 전 손수 총을 쏴서 목숨을 끊은 어린 장남의 이름도 하필이면 ‘태양’이었다. 첫 번째 해석은 범인들의 대담성과 잔인성을 논하기에 앞서 그들을 낳은 사회적 맥락을 돌아보자고 말했던 박완서, 최인호(사건을 각색한 소설 『지구인』을 썼다) 등의 시각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어쩌면 영화라는 예술에 몸담고 있었던 이장호 감독은 그들을 범행으로 내몬 가난보다도, 그 가난으로 인해 좌절된 두 실존 인물의 예술적 야심에 연민을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갓 1차 범행을 마친 두 캐릭터를 정식으로 소개하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종배와 문도석은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해 나오던 어느 가장을 차로 납치했다가 거센 저항에 직면하자 총으로 살해한다. 그 과정에서 도로변에 있던 아기엄마 하나도 오발된 총탄을 맞아 목숨을 잃는다. 이런 급박한 상황 끝에 야산으로 도피한 범인들이건만 문도석은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질 않나, 이종배는 마치 조각을 하듯 세심하게 변장 목적으로 길렀던 수염을 면도하고 있다. 실제 문도석 또한 못 다루는 악기가 없을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고, 이종배는 미술가가 꿈이었으나 생계를 위해 극장 간판을 그려야 했다고 한다. 이렇듯 못 이룬 꿈의 상징들과 어우러져,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도석은 자기연민에 빠지고 종배는 자기도취에 빠져 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자신들의 범행 속보를 들으며 “대낮에 살인강도가 설치고 다니니…”라며 남 얘기하듯 중얼거릴 만큼. 범행을 후회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도석과 주범인 종배의 갈등은 장차 갈대밭에서의 주먹다짐으로 이어진다. 때로는 익스트림 풀 쇼트로 멀어지며 관조적으로 거리를 두는 이 싸움은 글자 그대로 이전투구다. 액션의 박진감과 타격의 쾌감은 약에 쓰려고 해도 없고, 질질 끌리는 발길질과 힘겨운 주먹질에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고통의 신음만 울려 퍼진다. 사회의 혜택이 닿지 않는 버려진 땅에서, 소외된 자의 분노는 또 다른 소외된 자를 향할 뿐이며, 약자들은 서로를 착취하지 않고는 생존하지 못한다. 이후 2차 범행은 이종배 단독으로 진행된다. 손을 씻고 택시 운전을 하며 살아보려 했던 문도석은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 탓에 경제적 곤란을 겪다 다시 종배에게 돌아온다. 2인조가 3차 범행을 모의하는 곳은 사람이 찾지 않는 철 지난 해수욕장. 그들이 억하심정을 품고 있는 태양의 또 다른 반대말은 물인지라, 두 사람도 이 공간에서만은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파도를 타고 나아가야 할 배 한 척은 모래톱에 엎어져 있을 따름이니, 애초 그들에게 자유란 막다른 배수의 진에서나 가능한 반쪽짜리일 뿐이다. 예술가가 되지 못한 범죄자들을 향한 감독의 연민과 감정이입은 이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는 호러영화 < 너 또한 별이 되어 >(1975)와 스포츠물 < 이장호의 외인구단 >(1986)과 함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드물게 본격 장르 영화로도 회자되는 작품이다. 다만 < 엑소시스트 >를 비롯해 공포영화의 익숙한 관습을 적극적으로 빌려왔던 <너 또한 별이 되어>와 달리 이 작품에서 갱스터 장르는 대체로 서사의 틀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그런데 실화의 리얼리티와 육중한 메시지가 이끌어가던 극은 이 대목에서 뜬금없이 장르를 소환한다. 유유히 은행을 턴 후 직원들에게는 앉았다 일어서기를 시켜놓고 떠나는 강도들의 모습은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흑백화면으로 묘사되었다. 고전 갱스터물의 패러디로 연출된 이 장면은 곧 이종배의 상상임이 밝혀진다. 상상은 현실이 되지 못하고 시뮬레이션의 실패는 파멸의 출발점이 된다. 음악가와 미술가가 되지 못하고 강도가 돼야 했던 것처럼, 이 종합예술 콤비의 영화적 상상력도 현실 앞에서 좌절된다. 신분이 탄로 난 문도석은 아내에게 유서를 남기고 아들과 함께 먼저 자살을 택한다. 유서의 내레이션이 흐르는 플래시백 화면, 그가 아내에게 프러포즈하던 해변의 기억 속 도석의 머리 위에는 아직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허나 경찰에 포위된 어둠 속 종배의 집 위로는 단죄의 벼락만이 내리칠 뿐이다. 저항을 포기한 그는 실제 이종배가 유서에서 밝힌 대로 자신이 살해한 이들의 시신 유기장소를 경찰에게 상세히 고백한 후 동반자살을 원하는 아내를 먼저 쏜다. 그리고 드디어 총구는 어린 맏아들 태양을 향한다. 겁이 난다는 아들에게 종배는 아빠의 이름을 크게 외치라고 시킨다. “이종배!”를 부르짖는 아이에게 “더 크게!”를 종용하는 그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진다. 이 대목은 이전에 등장한 바 있는 놀이터 장면의 반복이다. 술래가 된 아들 태양이 아빠가 탄 회전무대를 돌려줄 때도 부자는 똑같은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쓰고 돌려봤자 회전무대는 제자리로 돌아올 뿐, 결국 지친 태양이는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주길 바랐던 후손 또한 쳇바퀴의 현실에 좌절할 것을 직감했던 종배. 아버지의 이름은 이제 죽음의 이름이 되고, 미래조차 기약할 수 없는 절망은 끝내 태양을 쏘고 만다. < 바람 불어 좋은 날 >로 흔히 리얼리즘 시대라 불리는 2기 필모그래피를 열어젖혔던 이장호 감독은 후속작으로 < 어둠의 자식들 >(1981)과 <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를 동시에 착수했다. 두 영화 모두에 온전한 역량을 투여할 수 없었던 감독은 <어둠의 자식들>에 힘을 싣는 것을 선택했고, 이 작품은 상대적인 저평가의 불운을 떠안아야 했다. 그러나 힘을 뺀 덕분에 오히려 과잉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연출의 미덕은 물론, 이후 감독이 선보일 작가적 탐구의 방향성을 모두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다. 먼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종교적 구원의 가능성이다. 영화의 엔딩에서 살아남은 도석의 아내( 이경실 )는 성당 신부로부터 자신이 살인자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을 듣는다. 이 결말은 시력(빛/태양)을 잃은 후 신에게 의탁한 안요한 목사의 실화극이자 후속작인 < 낮은데로 임하소서 >(1982)의 예고편이나 다름없다. 나아가 당대 불평등 구조의 근원을 좇아 유신 시대의 과거로 떠났던 감독은 이종배의 이력에서 중요한 단서 하나를 얻었다. 영화에서 그는 말한다. “난 어린 시절에 전쟁을 겪었다. 별의별 끔찍한 죽음을 한꺼번에 봤어. 추운 겨울 들판에다가 갓난애를 버리고 가는 지독한 여자도 있었지. 굶주림은 밥 먹는 것보다 많았어. 사흘 굶어 도둑질 안 하는 놈 봤니? 나도 태어날 때부터 강도질하려고 태어난 건 아니야.” 어쩌면 이 모든 참혹한 현실의 첫 단추를 끼운 것이 전쟁과 분단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은, 훗날 감독의 역작인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1987)를 통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