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할머니께
- 감독
- 김정현, 김동욱, 양연나, 엄다경
- 제작년도
- 2019
< 만추 > ( 이만희 , 1966) 우리들이 함께 영화를 보는 공동체라면 영화의 역사가 상상의 시네마테크인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 (적어도 한국영화에서, 우리들에게) 1966년은 이만희 의 < 만추 >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1966년 12월 3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이만희의 영화. 물론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몇 차례이고 한국영화의 대가들을 만나면서 같은 질문을 했다. 한 여름의 무더운 날 오후 수박을 사들고 가서 김기영 감독님을 만나 한참 인터뷰를 한 다음 마지막에 질문하였다. 감독님에게 한국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어떤 작품이었습니까. 잠시 나를 보더니 별로 생각하지 않고 내뱉듯이 별다른 수식을 더하지 않고 대답했다. “<만추>” 아직 대학생이었던 시절 동서영화그룹 친구들과 유현목 감독님을 모시고 가진 술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하였다. 약간 눈을 가늘게 뜨시면서 잠시 생각을 한 다음 대답했다. “ 나운규 의 < 아리랑 >, 이규환 의 < 임자 없는 나룻배 >, 이만희의 <만추>” 라고 하신 다음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이만희 그 놈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어” 임권택 감독님과 긴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같은 질문을 하였다. “나한테는 < 하녀 >와 <만추>요, 그건 내가 만들 수 없는 영화요” 그런 다음 그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사라졌다. 임권택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유일한 예외는 펠리니의 < 길 >뿐이다. 어쩌면 다시 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사라졌다. 하여튼 <만추>는 임권택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다. 영향은 예술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개념이다. 여기에는 미학적 감흥이라는 관계와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흔적이 주변을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통과하지 못하고 거기 남겨진 실패한 지연. 물론 나는 <만추>를 보지 못했다. 그 영화는 도대체 어떤 영화였던 것일까. 그해, 그러니까 1966년 임권택 은 네 편의 영화를 찍었다. < 전쟁과 여교사 >, < 나는 왕이다 >, < 법창을 울린 옥이 >, 그리고 < 닐니리 > 그 중 <닐니리>는 필름이 분실되어 지금은 볼 수가 없다. 나는 여기서 임권택과 이만희 , 혹은 < 만추 >와 1966년의 영화를 서로 과도하게 가까이 다가오게 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 내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다만 이런 질문을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투를 빌려) 다소 잔혹하게 해보고 싶다. 임권택은 그해 겨울 <만추>를 보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는 임권택의 영화들 사이에 세워진 선에 계속해서 칸막이 친 다음 거기서 전술적으로 빈틈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렇게 잠시 멈춰 세우고 그 안에서 예언되는 것에 귀 기울이면서 지금부터 전개되고 있는 것을 쳐다볼 수 있는 기회를 엿볼 것이다. 그렇다. 기회의 도래만이 사건의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형상. 각자의 정당성. 그것이 내가 노리는 것이다. 그때 어떻게 칸막이를 세울 것인가. 우리들의 삶은 예기치 않게 반복적으로 전과 후로 나뉜다. 그때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은 자리를 바꿀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순순히 이뤄지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는다. 종종 자리 바꾸기라는 잘못된 환원에 이끌려 희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운명이라는 자유. 자유처럼 보이는 운명. 하지만 매개 없이 우리가 어떻게 도약을 할 수 있겠는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자. 나는 몹시 위험하게 말하고 싶다. <만추>는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1960년대의 남한이 겪은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빈곤과 혼란은 영화를 찍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만추>는 오직 단 한 번, 거기서 나온 영화라고 나는 믿는다. 그때 거기 있었던 공통의 환경. 함께 주어진 조건. 매일 아침 바라보는 같은 풍경. 하여튼 임권택은 거기 있었다. 나는 약간 소설처럼 써보고 싶다. 그리고 그해 겨울 어느 날 극장에 가서 <만추>를 보았을 것이다. 고유한 현실성. 거기서 이만희는 낯선 장면을 출현시켰다. 세상의 비참함을 함께 살아내면서 <만추>는 갑자기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기호의 체계를 1966년이라는 현실 안에서 창조해냈다. 가능해진 새로운 이미지의 동작들. (후렴구처럼) 다시 한 번. 극장 안의 객석에서 그걸 구경하는 임권택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거기서 결핍된 그 무엇에서 생겨난 공감의 틈. 나는 <만추>가 그때 임권택에게 무언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던 (영화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이 영화를 그렇게 오랫동안 기억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즉각적으로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만추>라는 경험은 그의 영화 안에서 (몹시 양보를 해서 말한다면, 수많은 영화중의 하나로서의) 증환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언제 활동을 개시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의미를 만들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그 자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와 그것을 보는 사람 사이에는 부름의 관계가 있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지 알 수 없게 서로 부르면서 그에 대해서 대답을 할 때 벌어지는 예술적 감응의 프로그램은 끝내 겹치지 않는 평행선 사이에서의 강도가 만들어내는 공명의 이접적 종합이다. 소유하려는 유혹. 맹렬한 저항. 그 사이에서의 각자의 인정투쟁. 종종 부서지는 방어선. 이때 우리는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한 번 1966년 12월 3일. 그건 1954년 9월 7일 <이탈리아 여행> 다음날과 같은 의미에서이다. 가까스로 한국전쟁의 풍경이 지워져가고 있던 시간. 최인훈 이 <광장>을 썼고, 김수영이 시에게 침을 뱉었으며, 김승옥 이 무진에 여행을 다녀온 다음 1964년 서울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다른 사내들과 함께 그해 겨울 어느 날을 하릴없이 보냈다. “버스에 올라서 창으로 내어다보니 안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무언지 곰곰이 생각하며 서있었다” 1966년, 말하자면 그 언저리의 시간. 그 해 17살 소녀 황옥순은 학교도 그만 두고 어머니와 세 동생의 학비와 생계를 위해서 공장 일에 매달리지만 반복되는 빈혈과 빚에 시달리면서 자살을 결심한다. 함께 수면제를 먹은 두 동생은 죽고 살아남은 그녀는 법정에 선다. 임권택은 황옥순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었다. 나는 다소 이상하게 이 영화를 다시 불러보고 싶다. 임권택은 <법창을 울린 옥이>를 <만추>를 보기 직전에 찍었다. 다시 첫 번째 길로 되돌아오자. 우리들은 영화에서 정감을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까. 이 문제를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 비평은 항상 창백한 표정을 짓곤 했다. 혹은 이론은 자신의 영역 바깥에 내버려두곤 했다. 하지만 정감은 감각과 함께 영화와 세계가 서로 접촉할 때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경이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분석에 앞서 거기에 있는 것. 그것 그대로의 체험을 말하는 중이다. 이때 우리들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오류. 할리우드에서 작성된 시나리오 기계들은 그것을 여러 가지 규칙에 따라 조직한 다음 눈물의 형태로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가장 이상한 것은 아직 영화의 촬영이 시작도 되기 전에 정감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전제이다. 그렇다면 촬영 ‘이후’의 영화의 ‘제작’ 과정은 정감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일까. 반대로 정감은 자율적으로 활동한다고 철학자들은 주장한다. 이때 두뇌는 어떻게 활동하는 것일까. 나는 이 질문을 여기서 실험해보고 싶다. 단순하게 말하면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줄거리를 먼저 읽은 사람들에게 다소 당혹스러울 만큼 슬프지 않다. 아니, 차라리 이 가련한 소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보는 사람을 거의 울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 영화는 비극이지만 슬픔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 말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슬픔을 불러일으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불러일으킬 생각이 없(는 것처럼 영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아이러니를 동원한 희극으로 슬픔을 조롱하거나 역설적으로 고양시키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그냥 하나의 세계가 있다. 1966년의 남한. 그런 다음 거기서 긴장상태를 내내 유지하면서 영화가 그것을 견딘다. 만일 슬프다면 그건 이 영화가 그것을 견디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서도 하여튼 무시무시한 무게로 짓누르는 세계의 비참한 중력 아래서 간신히 자신의 시청각적 기호들을 동원해서 자기가 품은 생명을 유지시켜나가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실내장면을 찍은 세트 안에서의 몇 개의 씬을 제외하면 이례적일 만큼 대부분의 장면을 길거리나 공장, 이리저리 이어진 골목길, 그 주변의 가게들, 때로는 (내가 영화를 보면서 명백히 알 수 있었던 장소인)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진행되는 <법창을 울린 옥이>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 아래 놓여있으면서도 그걸 스스로 알지 못한 채 다소 멀리 놓여있는 영화이다. 때로는 그게 너무 희미해서 종종 끈을 놓쳐버린 것만 같은 느낌을 주면서 상투적인 드라마에 빠지려들다가도 현실이 부여하는 실재의 어떤 순간에로 재빨리 돌아오곤 한다. 이때 영화는 기괴한 모순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임권택 은 더도 덜도 없이 여기서 비참한 세계의 조건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황옥순과 그녀의 가족을 그저 마주본다. 물론이다. <법창을 울린 옥이>를 보고 있으면 다른 목표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 가족은 1966년의 남한에서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부서지고 있는 가족. 수 없는 자살. 그런데 거기서 단순하게 그저 하나의 사례라는 차원에로 환원될 수 없는 황옥순의 사건 앞에서 임권택은 이 이야기 안의 무언가가 잘 진행되지 않는 순간들과 반복적으로 마주친다. (나는 다소 바쟁같은 말투로 다시 말하고 싶다) 영화로 잘 옮겨지지 않는 현실의 표면. 그때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생겨난 곡선 사이를 영화는 자기의 점근선으로 계산해야 한다. 위치의 함수. 체자레 자바티니의 경고. 여기서 영화는 세계를 은유의 방법으로 다루면 안 된다. 쳐다볼 때는 아무 모순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서 질문을 시작하자마자 이 세계는 표면 아래 있었던 종종 기괴하고 음산하며 때로는 도착적인 대답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단순하게 보이는 이 사건은 거기서 단지 가난 때문에 생겨난 자살이라는 원인을 초과하는 대상의 과잉과 마주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살은 영화라는 드라마가 만들어낸 허구적 결과가 아니라 반대로 (실패한) 자살이라는 현실 안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라는 드라마가 동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 저편에서 나타난 정감과 감각의 위기. 이때 임권택은 이 과잉을 어떻게 견뎌야 할 것인가,라는 힘겨운 문제를 만난다. 사건의 개요, 혹은 재빠르게 요약된 줄거리. 옥이는 어머니와 중학교에 다니는 남동생, 그리고 그보다 더 어린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한다. 어머니는 식당이 팔리면서 일을 잃었고 집세를 내지 못해 그나마 있던 판잣집에서 쫓겨난다. 직장에서도 제대로 먹지 못해 생긴 빈혈로 종종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게다가 매달 빌린 돈을 받으러 아줌마들이 찾아와 아귀처럼 괴롭힌다. 그녀는 남자친구 철이를 군대에 보낸 다음 날 수면제를 사서 음독자살한다. 하지만 그녀가 먹는 걸 보고 맛있는 군것질 거리라고 생각한 동생들이 함께 먹은 다음 어린 두 명의 동생이 죽고 그녀는 살아남아서 법정에 선다. 황옥순 이야기의 시작은 맨 뒤에서, 그러니까 법정에 선 옥이에서 시작한다. 나는 이 구조가 단지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서 멈추는 것보다 더 멀리 밀고 나아가고 싶다. 여기서 시간은 단지 이야기의 경제성 안에 머물지 않고 반대로 우리에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처음은 어디인가요? 그런 다음 중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리고 마지막 결정의 순간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나요? 옥이는 오로지 자신의 행동으로 그것을 차례로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매 단락마다 생명은 질문할 것이다. 그때마다 생명의 정감. 그리고 삶의 감각.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가 찍을 수 없는 것들. 비가시적인 선들의 매듭. 그러나 임권택 은 그것을 다루어야만 한다. 좀 더 단순하게 설명해보자. 신문에서 이 사건의 기사를 읽었을 때 그녀가 어떤 법정형을 언도받을 것인가 보다는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그런 결심을 한 다음 행동에 옮겼을까, 를 먼저 질문할 것이다. 황옥순은 어린 두 동생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자신만 살아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법의) 판단이 아니라 (행동의) 과정이 궁금해진다. 말하자면 삶과 자살 사이의 틈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때 우리들의 귀납적 호기심은 영화의 구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처음에는 법정에서 사건의 개요를 알려준 다음 플래시백으로 맨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원래의 자리까지 진행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이 과정의 반복이다. 이때 핵심은 검사와 변호사가 서로 반대의 입장에서 그녀의 죄를 기술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가 궁금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황옥순의 변론이다. 그러나 영리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설명하는 대신 플래시백을 이용해서 그녀의 기억의 연대기 안으로 들어간다. 법정에서 황옥순을 지켜보던 이들은 사건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물론 결론은 나쁜 효과일 것이다. 자살이라는 행동. 그때 그녀에게 무엇이 명령을 내렸을까. 여기서 임권택에게 남은 것을 별로 없다. 단 하나로 귀결되는 행동. 피하고 싶지만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시청각 기호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과정의 방법을 보는 영화이다. 플래시백의 첫 장면. 법정에 선 옥이를 위해 변호사가 재판장과 검사에게 선처를 호소할 때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서 본다. 그때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함께 수면제를 먹고 죽은 두 명의 동생이 아니라 요란한 소리를 내는 기름을 잔뜩 친 콘베어 벨트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톱니바퀴이다. 다소 기괴하게도 그런 다음 영화는 옥이의 슬픈 감정을 지은 표정을 보여주는 대신 종종 소스라치는 듯한 두려움에 질린 그녀의 이 표정(close_up)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녀의 놀란 표정은 다시 한 번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짓는 두려움처럼 보인다. 두 번의 자살. 혹은 자살의 반복. 임권택 은 지금 그 일을 수행해야만 한다. 나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임권택의 영화, 아니 < 잡초 > ‘이전’이라고 말해도 괜찮은데, 이상할 정도로 볼 때마다 그 세계가 어두침침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그 ‘이후’의 영화가 환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인상이라는 부정확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런 ‘다음’에는 점점 임권택의 영화는 그 어둠 속에서 빛의 모델을 찾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어두침침하고 게다가 그 빛은 가냘프고 종종 거의 꺼져가는 것 같거나 희미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비로소 시간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했고 역사가 이미지로 떠돌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빛을 임권택이 움켜쥐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빛들이 두 개, 혹은 세 개, 그렇게 점점 많아질수록 임권택의 영화 안의 어둠은 점점 중성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임권택의 영화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세계에 잠겨있는 밤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밤, 그런데 아직 살아있다. 이보다 더 두려운 밤이 있을까. 그때 임권택 이 이 어둠 속에서 견디는 방법은 옥이를 동정하는 대신 (대부분의 영화들은 그렇게 한다) 이 상황에서 느껴보는 옥이의 정감을 약간 기괴하게 쳐다본다. 이 참담한 상황의 수면 아래 옥이가 느껴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를 물어볼 때 현실은 이상하게 비틀려 보인다. 이야기는 진행되다 말고 플래시백 속에서 다시 플래시백이 한 번 더 나온다. 공장에서 일을 하던 옥이는 화창한 점심 휴식 시간에 운동장에서 다른 직공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벽에 기대어 서서 드럼통에 담긴 물에 작은 돌을 던진다. 수면에 파문이 일어나면 좋은 시절의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 전형적인 시간의 입구. 옥이가 아버지와 함께 부유한 집에서 보냈던 행복했던 시간. 여기서 의미의 흐름에 주목을 해주기 바란다. 이때 이 장면은 단지 기억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한 배열을 보여준다. 마치 옥이의 작은 돌을 집어 던지는 행동에 감응이라도 한 것처럼 온 가족이 모여서 홍난파가 작곡한 ‘퐁당퐁당’을 부른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펴져라, 멀리 멀리 퍼져라,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여 주어라” 나는 약간 좀 전의 말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이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옥이의 세 명의 동생들이다. 물론 그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세 명의 동생들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서 옥이를 향해서 마치 그녀에게 그 노래를 바치듯이 부른다. 아버지는 그녀 곁에 서서 그 노래를 아코디온으로 반주하고 있다. 온 가족의 중심. 그때 옥이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자수를 놓으면서 그 노래를 음미한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환기시키고 싶다. 옥이는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생각이 없다. 그저 그들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잘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때 어머니는 어디로 간 것일까. 옥이는 마치 그 아이들의 어머니이기라도 한 양, 마치 곁에 선 남자의 아내이기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이 모습에는 어떤 결핍도 없이 그 자체로 완성된 가족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 장면이 나올 때 만일 동생들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만 옥이가 결혼해서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이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야 부엌에서 어머니는 과일을 모두 깎은 다음 접시에 받쳐 들고 나온다. 사과는 구태여 부엌에서 깎아야 할 이유가 없는 과일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한 것은 이 장면에서 노래를 부를 때 어머니를 포함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 그런 동선이 필요해진 것일까. 영화는 두 번 다시 이 행복한 시간에로 돌아오지 않는다. 약간의 해석. 물론 이 플래시백은 옥이의 주관적 기억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동시에 행복한 기억 속으로 침범한 현실을 본다. 이때 이 현실은 일종의 의무라는 명령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약간만 앞으로 되돌아가보자. 우리는 여기까지 보다말고 갑자기 옥이가 왜 이다지도 열심히 가족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일을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여기서는 단지 가난을 넘어서서 아직 미성년자인 그녀가 거의 죽음을 무릅쓰고 일을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일을 하다 말고 쓰러지고 의사가 더 이상 일을 하는 것은 생명에 위험이 올 수 있다고 경고를 하고 있는데도 제발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매달린다. 그런데 이 생명을 건 하소연은 그녀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정이었을까. 그녀에게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아무도 명령하지 않는다. 누가 그녀에게 그런 의무의 명령을 내리는 것일까. 나는 옥이의 플래시백에서 그녀가 가족 안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자리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 장면은 행복한 시간으로 변장하고 나타나서 황옥순에게 내리는 (유교라는 이름의) 장남(長男)의식의 명령에 다름 아니다. 마치 이 플래시백 장면에 맞대응이라도 하는 것만 같은 현실의 장면이 나온다. (둘째이지만 장남인) 중학생 남동생이 나쁜 친구들의 꼬임에 빠져 소매치기를 하다가 경찰에 붙잡힌다. 담임선생님과 함께 경찰서로 간 옥이는 남동생이 훈방 조치된 것을 보고 다시 공장에 돌아갔다가 (남자친구와 짧은 데이트를 한 다음)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다. 남동생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냐고 묻자 어머니는 어쩐 일이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옥이는 그날 낮의 이야기를 한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갑자기 역정을 내면서 그녀를 꾸짖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대사) “아니, 그 지경이 된 아이를 혼자 보냈단 말이냐, 네가 데리고 오면 다리가 썩는다더냐, 허리가 휜다더냐” “공장 시간에 늦는데 제가 어떻게 데리고 와요” “하루 좀 쉰다고 떼돈을 놓치겠니, 실직을 당하겠니,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인데 그렇게 소홀히 한단 말이냐,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런 꼴 못 본다, 못 봐” “소홀히 하긴 누가 소홀히 한다고 그러세요” “경찰서까지 갔다 온 아이를 홀홀히 보내고, 어쩌니 저쩌니 해도 조상 제사 볼 놈은 그 놈뿐이다. 늘그막에 의탁할 놈은 그 놈 뿐이란 말이다” 사실상 이 집은 이미 거의 부서진 가족의 모습으로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다. 영화에는 단 한 번도 조상 제사를 치르는 장면이 나오지 않으며 어머니의 친정과 시댁 식구들, 혹은 친척들이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 살고 있)는데도 그들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물론 그들도 가난으로 남을 돌볼 겨를이 없어서일 것이다. 이때 어머니가 옥이를 야단치는 말 속에서 지금 집안을 간신히 버티게 일을 하는 옥이는 갑자기 미래의 시간 속에서 괄호 쳐진다. 이 두 개의 장면 사이의 차이에는 명령을 수행하는 옥이의 행복한 시간을 기억하는 플래시백과 현실의 네트워크 안에서 호명하는 어머니의 진술 사이에서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의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구태여 그 호명을 플래시백에서 이미 완결된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 과잉의 잉여처럼 나타난 어머니가 한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명령 속에서 기다리는 최후의 구원을 약속하는 시간은 결국 오지 않을 것이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몇 차례를 반복해서 보아도 언제 옥이가 자살을 결심했는지가 분명치 않다. 단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장면만이 있다. 임권택 은 그 결심의 장면을 찍지 않았다. 물론 상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옥이는 무심결에 13일에 밀린 빚을 갚겠다고 매일처럼 집이고 공장이고 찾아와서 괴롭히는 이웃 아줌마들에게 약속을 했고 그날이 다가왔을 때 약속을 이행할 수 없자 자포자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자살을 해서 이 빚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 몫은 고스란히 가족에게 넘겨진다. 그런데 지금 그걸 누가 갚을 수 있을까. 결국 결론은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여기에는 이제까지 옥이가 짊어져야한다고 믿었던 책임에 대한 포기가 있다. 이제 그 자리는 빈자리에요. 텅 빈 장남의 자리. 서로 다른 두 개의 층위의 네트워크의 교차. 물론 그 장면에서도 자살의 결심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찍지 않았다 할지라도 옥이는 어느 순간에 결심했을 것이다. 나는 그 결심의 순간이 어머니가 옥이에게서 갑자기 의무를 빼앗아가는 이 장면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희생이 무의미하다고 선언할 때 그것은 그녀에게서 의무의 명령이 철수한다는 것을 뜻한다. 옥이는 그 순간 자신을 세상 안에서 버티게 만들어주었던 유일한 초자아의 버팀목이 사라져버리고 갑자기 어둠 속으로 던져졌을 것이다. 혹은 어둠 안으로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S#1 S#2 이제 남은 것은 옥이의 자살이라는 행위뿐이다. 이때 자살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여기서 비로소 자기에게 내려진 명령에서 벗어나 자기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행동이 옥이의 동선을 작동시키고 있다. 모든 인연과 결별하는 행위. < 법창을 울린 옥이 >의 마지막 시퀀스 전체는 작은 빛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임권택 의 모든 영화중에서 가장 어둡지만 (몹시 기괴하게도) 동시에 거의 유일하게 기독교적인 구원에 귀 기울이고 있다. 군대로 떠나는 철이와 마지막 밤을 보내고 난 다음 새벽에 두 사람은 버스 정류장으로 함께 천천히 거의 멈출 듯이 걸어온다. 아, 제발 멈춰 주세요. 당신은 지금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약간 높은 데서 내려다보듯이 멀리서 보이는 두 사람. (high_angle_long_shot) 그때 멀리서 난데없이 교회에서 새벽 종소리가 들린다. 자살은 하느님 앞에서 하는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나쁜 행위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옥이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다. 명백히 이 동네에 살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영화는 교회 종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나는 지금 옥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영화라고 잘못 쓴 것이 아니다. 이때 간절하게 교회는 종을 치면서 옥이의 죽음에 간섭하려고 한다. 아직 이른 길거리는 한산하고 그들이 걸어온 길은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있다. 두 사람의 발걸음. (close_up) 이상하게 두 사람은 약속한 것이 아닌데도 서로 발을 맞춰 걷는다. 말하자면 두 사람의 마음의 쇼트. 어떤 투명성. 하지만 그들은 지금 헤어지기 위해 걸어가는 중이다. 그런 다음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쇼트가 나온다. 갑자기 남자들이 얼어붙은 듯이 거리에 서 있다. 그래서 옥이와 철이가 그들 사이에 들어가서 함께 설 때 마치 정지된 화면 사이로 들어서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다시 한 번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 멈춰 서버릴 것만 같은 세상.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영화는 그녀의 행동을 멈추기 위해서 무언가 필사적이 된다. 나는 임권택이 생명을 소홀히 다루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그저 소멸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반복적으로 보았다. 꺼져가는 빛. 사라져가는 세상. 그때 화면 안으로 침범하는 버스 때문에 서 있는 그들이 출근하기 위해 거기 기다리고 서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올라타지만 철이는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마치 출근하는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아니 차라리 그들이 곁에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듯이 옥이와 철이는 서로 마주본다. (shot_reverse shot) 그때 철이는 (다소 뜬금없이) 옥이에게 마지막 인사처럼 간곡하게 말한다. “마지막 부탁이 있는데, 건강해줘” 우리는 이제부터 옥이가 할 일을 알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철이의 작별인사이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 종소리에 이어서 옥이의 자살을 말리는 두 번째 시도이다. 이때 이 말은 동시에 여기서 정반대로 기능한다. 이제까지 완전히 잊고 있던 사실, 옥이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들면서 이제 문득 그 시간이 왔음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버스가 도착하고 철이가 떠나갈 때 두 개의 쇼트를 교환한다. 하나는 버스에 올라타서 철이가 바라보는(point_of_view) 옥이의 멀어져가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옥이가 바라보는 멀어져가는 버스의 모습이다. 멀어져가는 옥이와 멀어져가는 버스의 비대칭. 하지만 이 설명에는 놓친 것이 있다. 이때 단순하게 멀어져가는 옥이와 멀어져가는 버스로 교차시키지 않고 갑자기 카메라가 옥이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런 다음 옥이가 버스를 쳐다보았을 때 이미 그 버스는 사라지고 난 다음이다. 이 쇼트의 교환은 매우 기괴하게 보인다. 철이는 멀어져가는 옥이를 보았지만 옥이는 멀어져가는 철이를 보지 못했다. 이때 그 둘 사이에 개입해서 다가가는 카메라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사이에 낀 자율적인 운동. 그녀를 본다기보다는 다가간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동작. 하지만 이때 철이는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마치 반작용처럼 다가간 카메라. 마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는 듯한 이 운동이 일깨우는 것은 정반대로 둘 사이의 텅 빈 공집합의 효과이다. 여기에는 어떤 교환도 없으며 그래서 이 운동은 다가간다기보다는 차라리 밀쳐내는 듯한 반작용의 힘이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운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제부터 옥이가 자살로 향하는 짧은 발걸음을 함께 한다. 옥이는 이 영화에서 몇 번이고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나 매번 멀리서 지켜보거나 그 앞을 지나쳐가거나 이미 지나친 옥이를 쳐다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으로 옥이의 발걸음을 따라 함께 걷는다. 그 발걸음이 멈추는 것은 그녀가 약국으로 들어섰을 때이다. 이때 영화는 자기의 무능력에 대해서 앙상해진다. 교회의 종소리. 철이의 마지막 작별인사. 그저 카메라는 그녀와 동행할 뿐 그녀를 막을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대신 할 수 있는 마지막 침묵을 지킨다. 영화는 옥이가 수면제를 사는 장면을 찍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약국 앞에서 서성거리지도 않는다. 그 대신 그 시간에 집에 어린 두 남매를 남겨놓고 무언가 저녁 찬거리를 위해 채소라도 얻으려 시부모 댁으로 나서는 어머니에로 옮겨간다. 어머니가 막 집 문을 나설 때 옥이는 반대편에서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으로 들어온다. 그때 옥이는 집을 나서는 어머니를 구태여 부를 필요가 없는데도 그녀를 부른다. 여기서 예기치 않게 어머니를 향해서 다시 한 번 가볍게 카메라가 다가간다. 아니 차라리 옥이의 목소리에 실려서 어머니에게 다가가 그녀를 잡으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마치 그 순간 어머니가 무언가 낌새를 알아채고 옥이를 말렸다면, 아니 최소한의 위로를 했다면, 혹시나 완전히 버렸을 자기에게 주어진 명령을 일깨워주기만 했더라면 지금 하려는 행위를 멈추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무심하게 오늘 공장에는 왜 나가지 않았냐고 물어본 다음, 하루 쉬어야겠다고 대답하자,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그래, 라고만 말하고 힘없이 돌아서서 가던 길을 재촉한다. 그녀가 살 수 있는 두 번째 기회, 혹은 자살을 포기할 수 있는 기회. 여기서 걸어가는 어머니를 보는 옥이를 보는 카메라는 두 여자의 등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등으로 바라보는 이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덧없어 보인다. 어머니는 왼쪽 골목으로 들어서려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 옥이 쪽을 돌아본다. 그게 어떤 제스처인지는 분명치 않다. 옥이가 한 대답에서 어떤 낌새를 느낀 때문인지, 아니면 공장도 쉬겠다고 말한 딸이 가엽고 미안한 마음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멀리서 자기를 지켜보는 딸을 문득 쳐다본 것인지를 달리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멈칫 거리는 동작은 이상할 정도로 보는 사람의 마음의 파문을 일으킨다. 어머니가 골목을 돌아서서 사라지자 옥이는 이 불효막심한 딸을 용서하세요, 라는 마지막 작별인사를(voice-over_narration) 한다. 이때 이 인사는 몹시 이상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 어머니는 골목으로 사라진 다음이다. 그러므로 이 인사는 텅 빈 골목을 향해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아직도 남아있을 어머니의 발걸음의 흔적을 향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자 마치 어머니가 돌아보기라도 하듯이 골목에서 옥이를 쳐다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니, 마치 골목이 옥이를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이상한 비인칭의 시선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비인칭으로 느껴보는 정감, 그리고 비인칭으로 건드릴 듯이 다가가는 운동의 감각. 우리는 이미 철이를 태운 버스가 떠나버린 텅 빈 거리가 옥이를 바라보는 장면을 보았다. 옥이는 누군가를 보는데 그녀가 보는 상대방은 그녀를 보지 않은 대신 길거리, 혹은 골목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그녀의 자살을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는 상황. 그때 영화는 옥이의 동선을 따라가는 대신 몇 번이고 다시 영화를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 시작, 혹은 중단된 동선. 여기서 쇼트가 바로 이어지고 있는데도 옥이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따라가는 대신 다음 장면은 두 마리의 병아리를 데리고 놀고 있는 두 어린 남매를 보여준다.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병아리를 보여준다. 옥이에서 병아리로 그냥 넘어온 두 개의 연속된 쇼트는(S# 1_S# 2) 옥이를 가여운 병아리처럼 보이게 한다. 어린 남동생은 병아리를 잡으려다가 그만 죽여 버리고 만다. 어이없는 죽음. 그때 옥이는 죽은 병아리를 보면서 마치 자기의 시체를 미리 보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옥이는 자기 시신을 거두듯이 그 병아리를 집 앞 멀리 모래사장에 작은 구덩이를 파서 묻어준다. 그때 오늘 새벽에 떠나간 철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voice_over) 이 병아리를 키워서 닭이 되면 다시 병아리를 낳게 될 것이며 금방 오백 마리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그 병아리는 옥이의 꿈을 무럭무럭 키워줄 거야, 라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옥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는 그 병아리를 모래 무덤에 덮어주는 것이다. 혹은 지금 꿈을 모래 무덤에 묻고 있는 중이다. 그런 다음 방에 앉아 옥이는 어머니에게 남기는 유서를 쓰기 시작한다. 임권택 은 여기서도 동일한 태도를 취한다. 유서를 쓰는 옥이를 바라보는 대신 재빨리 그 시간에 군것질을 하러 나간 어린 남매를 따라간다. 이때 우리는 매우 잔인한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어린 남매는 군것질을 하라고 준 동전으로 무엇을 사먹어야 할 지 망설이는 중이다. 이 아이들은 지금 거의 먹은 것이 없어서 몹시 허기진 상태일 뿐만 아니라 거의 군것질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오빠는 동전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하마터면 그 귀한 동전을 하수도 맨홀에 빠트릴 뻔 한다. 깜짝 놀란 오빠는 동전을 집어 들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여동생에게 무얼 먹고 싶은지 묻자 번데기라고 대답한다. 오빠는 그러면 번데기를 산 다음 남은 돈으로 자기가 먹고 싶은 만나를 사겠다고 한껏 여유를 부리면서 말한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한묍영오活?떨어트려 이번에는 하수구를 덮어 놓은 맨홀의 구멍 속으로 정확하게 떨어진다. 거의 잃어버릴 뻔한 것을 되돌려준 다음 다시 그것을 빼앗아 갈 때 어린 남매는 잃어버릴 뻔 했던 것을 되찾은 기쁨 자체를 잃어버린다. 이제 어린 남매는 집에 돌아오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 손에 쥐어주었던 동전은 맨홀이 집어삼켰고 배고픈 아이들에게 어쩌면 오랜만에 일찍 들어온 옥이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무언가를 해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때 막 옥이는 수면제를 먹는 중이었다. 어린 두 동생은 제 시간에 도착했다. 왜 그 어린 두 동생은 그보다 좀 더 일찍, 아니면 차라리 (끔찍하게도 자살한 옥이의 모습을 보아야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살아서 볼 수 있는 자리에 남아있을 수 있게) 늦게 도착하지 않은 것일까. 같은 말의 다른 질문, 어떻게 주인공 옥이의 죽음을 가로 막고 그들은 대신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비극적 상황 속에서의 비극적 도착. 그런 다음 두 개의 자리를 바꿔치운다. 죽음과 삶. 이때 이 신비로운 도착은 반대의 방향에서 다시 질문해보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두 동생의 도착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옥이는 병아리의 죽음을 본 다음 그 시체를 매장하면서 이미 자기의 죽음을 경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이 죽음의 과정 자체가 필요 없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이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얼룩은 그녀의 어린 두 동생들뿐이다. 순결한 얼룩.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비참함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유일하게 어린 두 동생만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벌어진 차이가 주는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이 비참한 조화를 어지럽히는 순결한 존재의 소멸을 목표로 했다면 이보다 더 정확하게 의도하지 않고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달리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이미 벌어진 사건의 메시지를 과도하게 밀고 나아갈 때 우리는 예기치 않은 외설적 지식의 이면과 힘겹게 다투어야 할 것이다. 원래의 광경. 그 모습을 본 막내 여동생이 방안으로 뛰어들면서 “언니 뭐 먹어”라고 묻는다. 이미 약을 먹은 옥이는 수면제에 취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저 비몽사몽간에 “아무 것도 안 먹어”라고 대답하지만 그 말은 배고픈데다가 이미 군것질 할 동전을 잃어버린 어린 두 남매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맛있는 거 있으니까 혼자 먹으려고 그러는 거지”라며 두 남매는 옥이의 손에 한 움큼 쥔 수면제를 빼앗기 위해서 함께 달려들어 손아귀를 벌린다. 이미 약에 취한 옥이는 허기진 두 남매로부터 수면제를 지킬 만한 힘을 빼앗긴 다음이다. 이때 거의 잠들어가는 옥이는 정반대로 마치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듯이 눈을 커다랗게 뜬다. 그녀가 바라보는 두 명의 어린 동생들은 마치 아귀처럼 달려들어서 그녀의 손에서 수면제를 뺏으려고 한다. 죽어가는 옥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모습은 이미지 전체가 기형적으로 휘어서(mirror_focus) 마치 영화 전체의 얼룩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걸 바라보는 옥이는 두 동생을 가련하게 보는 대신 우리가 영화 맨 첫 장면에서 보았던 바로 그 표정, 그 커다랗게 떠진 눈, 두려움에 가득차서 바라보는 얼굴이 된다. 그때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목소리들의 침입. 그런 다음 똑같은 기형적인 이미지로 그녀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모두들 옥이에 대한 원망으로 넘쳐나고 있다. 여기에는 환각이라기보다는, 환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투적인 이미지 뒤에 차라리 어떤 각성의 시선이 있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조차 갑자기 현실이라고 불리는 환상의 장막을 찢고 그 틈새 사이로 얼핏 모습을 드러낸 진실이라는 외설. 가여운 옥이에게 자살은 거의 마지막 피난처였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이 산산조각 나고 난 다음 무의미해진 세상에서 그녀는 의무의 네트워크와 관계를 끊으려고 하지만 이번에는 예기치 않게 대신 두 명의 동생을 죽인 다음 죄의식을 안겨주고 다시 되돌려 보낸다. 그러므로 옥이는 두 번째 삶을 의무보다 더 무거운 죄의식으로 이제부터 살아가야 한다. (의무의) 감옥에서 출소하는 옥이는 지금 (죄의식의) 감옥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현실은 저 바깥에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 있는 중이다. 옥이는 하여튼 그 안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이때 임권택 은 옥이의 삶을 다루는 대신 자살이라는 행위의 과정을 통해서 거기서 말하여지는 네트워크를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그때 무언가 완강하게 그걸 거절하는 것과 마주치고 있다. 그건 직접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그 자리에 불려나온 황옥순의 자리이다. < 법창을 울린 옥이 >는 무언가를 계속 보여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무언가 절반만을 본 것만 같은 결여에 시달리고 있다. 그때 똑같은 무게로 임권택은 이 이야기가 주는 과잉과 마주쳐서 시달린다. 네오리얼리즘이 부여한 현실과 영화 사이의 부등가 교환의 법칙. 그때 중심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대답은 황옥순이라는 간편한 대답을 취하는 대신 그 중심의 안이 사실은 텅 빈 공집합이며 단지 그것이 부서지지 않게 가까스로 유지시키는 힘들의 상태 속에서 정감과 감각이 번갈아 나타난다는 사실만을 영화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불안정한 균형. 아니, 어쩌면 이건 균형이 아닐 지도 모른다. 중심이 검은 구멍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중심인 줄 알았던 얼룩을 지우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임권택에게 정감이라는 구멍과 그것을 느껴보기 위해 얼룩을 둘러싸는 감각의 활동은 점점 까다로운 질문이 될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간극. 그 사이의 공백 속에서 임권택은 느닷없이 맹렬하게 주체를 세워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어렴풋이 어느 순간, 아마도 내 생각에는 자살을 행동으로 옮겨가는 그 마지막 장면 전체에서, 사건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체가 도래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임권택은 느껴본다. 나는 거의 지워질 듯한 어둠 속에서 오로지 이 장면 안에서만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을 보았다. 알 수 없을 정도로 시적인 감흥을 느끼면서 영화의 기호들은 황옥순의 행위에서 분명하게 주체가 자기의 정감을 드러내 보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영화의 감각을 새롭게 일깨우는 힘을 따라 활동하기 시작한다. 몇 번이고 이 장면을 다시 보고 싶다. 분명히 임권택도 몇 차례이고 이 순간에로 되돌아오곤 했을 것이다. (계속) 1966년 100분 흑백 2.35 감독 임권택 아성영화사 각본 이종택 각색 이연진 촬영 김연욱 조명 이한찬 편집 김희수 음악 전정근
권투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 나는 < 나는 왕이다 >를 본 다음 잠시 멈추어 섰다.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1986년 서울에서 제10회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고, 그때 25개의 종목을 10개의 소주제로 해서 9명의 감독이 다큐멘터리로 찍었다. <나는 왕이다>를 찍은 다음 20년 후의 일이다. 그때 임권택 과 이두용 은 그 중 여섯 번째 편인 ‘힘과 기’를 공동 연출하였다. 여기서 복싱과 레슬링, 역도, 펜싱, 태권도를 중심으로 한 격투기를 다루었다. 이때 임권택은 권투만을 찍었다. (나는 이 영화를 편집 직후에 볼 기회가 있었는데 완성 이후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임권택은 수많은 스포츠 중에서 오로지 권투만을 영화로 다루었다. (하지만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장 ‘구경하기를 선호하는’ 스포츠는 축구라고 대답했다) 나는 두리번거리면서 질문했다. 권투는 영화적인가요. 그때 임권택 감독님은 내게 대답을 하는 대신 스포츠 선수들을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 세상과 접촉하는 대신 자기 훈련만을 계속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하고 말하는 사람들이지요, 라는 말로 대신했다. 자기하고 말하는 사람. 혹은 자기의 규칙과 말하는 사람. 세르주 다네는 테니스가 가장 영화적인 스포츠라고 말했다. 쇼트와 리버스 쇼트로 이루어진 운동. 에릭 로메르는 축구를 찍는다는 문제는 영화의 윤리와 마주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불가능한 거리의 중계. 스포츠는 각자의 규칙의 방법으로 영화의 질서 안에 들어선다. 그때 영화는 스포츠의 규칙을 존중해야만 할 것이다. 거기서 영화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그때 임권택은 권투에서 무엇을 다루려는 것일까. 나는 조금 비스듬히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싶다. 권투라는 스포츠의 사회적 자리. < 나는 왕이다 >. 세상의 왕이 된다는 것. 권투의 챔피언이 되었을 때 세상으로부터 왕이라는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시간. 권투 선수 김기수는 1966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이탈리아에서 온 리노 벤베누티를 판정승으로 물리치고 세계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이 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인 1968년 5월 이탈리아에서 산드로 마징가와의 3차 방어전에서 패하고 그 자리를 잃었다. 그가 세계 챔피언의 자리를 지킨 것은 매우 짧은 기간이었지만 김기수는 한국 복싱 사상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었고, 1966년 한국은 세계, 라는 타이틀이 필요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분단으로 두 개의 나라가 되었고, 전후의 빈곤과 동서 냉전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 변방의 작은 나라의 국민들에게 세계적, 이라는 말은 (약간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할지라도)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상상적 동일화의 꿈이 되었다. 김기수는 더군다나 아마추어 복싱 선수 시절 88전 87승 1패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위협받는 공동체. 보잘것없는 국가. 그때 세계 질서 안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 말하자면 일종의 초인적 존재의 간절한 요구. 이 믿음이 다소 기괴하다 할지라도 스포츠의 신화는 한국 사회 안에서 민족적인 사물의 존재인 양 여러 가지 방식으로 믿음을 재생산하였다. 그 승리는 무언가를 의미할 거예요. 물론 아무도 그 무언가가 무언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텅 빈 믿음. 그때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담론들 사이의 맹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물론 지금은 그 전투의 장이 여러 개의 진지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그때 축구는 월드컵을 감히 꿈꿀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농구와 배구는 은행들 사이의 대리홍보전이었다. 야구는 고등학생들의 경기였다. 레슬링은 흥미진진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걸 쇼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권투는 스포츠라기보다 그걸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몸에 관한 일종의 극단적인 자기 수련의 결과로 받아들여졌으며, 선수들은 가난한 삶에서 출발하여 오로지 자신의 몸과 타고난 재능에 의지하여 링 위에서 목숨을 건 인정투쟁을 벌이는 실존적 존재로 종종 사회적 각색이 이루어졌다. 나는 지금 1966년의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누구나 권투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무나 챔피언이 될 수는 없어요. 훌륭한 선수는 언제나 혜성같이 나타났고, 그런 다음 그들은 링 위에서 어떤 방어물도 없이 권투 글러브만을 낀 채 규칙을 지키면서 그 안에서 상대방을 쓰러트려야만 다시 내려갈 수 있다. 링 위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은 끝까지 서 있을 것이며, 다른 한 사람은 결국 누워 있어야 할 것이다. 아무도 기술을 눈 여겨 보지 않았고 사람들은 오로지 피투성이가 된 선수들의 승패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때 모든 신문 기사들은 권투가 진행되는 링을 정글에 비유했다. 선수들은 그러므로 그 위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가 되어야만 했다. 권투는 구경꾼들이 고통을 감상하는 스포츠이다. 세계로부터 잘려나간 일부. 그때 이 구경거리에는 우리가 그 일부로 포함되지 않는 세계가 잠시 동안 일상 바깥에 덧붙여진 것처럼 보인다. 이 세계가 분명히 삶의 일부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는 현실감각의 바깥에서 우리들의 상식적인 리얼리즘을 초월하는 그 무언가가 작동되고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같은 링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기인데도 불구하고 레슬링을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희극적인 기분이 감도는데 비해 권투는 언제나 비극적이고 엄숙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 나는 왕이다 >는 김기수의 전기 영화가 아니다. 그때 이 영화는 챔피언과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렇다면 임권택 은 무얼 찍고 싶었던 것일까. 물론 대답은 권투를 다루려는 것이다. 그때 권투의 어떤 자리를 찍으려는 것일까. 약간 질문을 바꿔보자. 나는 가끔 영화에서 줄거리란 너무 불투명하거나 불확실해서 종종 그 영화의 스타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대부분의 관객들, 때로는 많은 비평들이 줄거리에 매달린 다음 영화 그 자체에서 눈 돌리는 것은 사방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나도 잘 알고 있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종종 영화에서 줄거리는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다. 아니, 어쩌면 대부분 그러하다. 나는 임권택의 영화에서 매번 이야기가 희미해지는 순간과 마주치게 된다. 그때 이야기는 대부분 불연속적이거나 종종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고 고정점이 옮겨가기 시작한다. 이 순간 갑자기 생각지 않았던 무대화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마치 이야기의 틈새 사이로 빠져나온 것만 같은 영화의 기호들이다. 이야기의 외곽에 있었던 것만 같은 형식적으로나 질료적으로 조심스럽게 숨어있었던 잉여들. 우리는 고전영화의 문법이 이 잉여들을 감추기 위한 미학적 문법의 역사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수없이 다양한 잉여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는 수줍은 잉여들. 하지만 종종 이야기를 정리할 때에는 거의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미세하고 우연하며 때로 하찮은 것처럼 취급되었던 것들이 마치 자기 자신의 기회를 붙잡은 것처럼 웅성거리기 시작할 때, 그때 비로소 영화의 시간이 시작된다. <나는 왕이다>를 보고 난 다음 줄거리를 옮겨 쓸 때 나는 수 없이 난처한 순간들과 반복해서 마주쳤다. 처음에는 간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빨리 해치운 다음 다른 영화로 옮겨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영화는 내게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내가 영화를 줄거리로 베껴 쓰려 들 때 어떤 영화들은 그걸 거절한다. 줄거리와 영화 기호들 사이의 부등가 교환. 나는 잠시 망설인 다음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마담과 영철 두호와 영철 마담과 두호 마치 독후감과 같은 방법으로 진술된 줄거리. 아마추어 경기에서 심판의 판정에 불복종하고 링 위에서 주먹을 휘두른 천부적인 복서 영철은 제명을 당한 다음 자기를 돌봐주는 명동 고급술집 ‘BAR 홍콩 쎈타’의 마담을 찾아간다. 마담은 영철의 학비를 대주면서 그가 권투를 그만두고 그냥 편안하게 자기의 기둥서방 노릇을 해주길 바란다. 우연히 술집에서 다툼이 벌어졌을 때 영철은 한 방에 상대방을 쓰러트리고, 역시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가던 ‘고려권투 구락부’ 관장 두호는 한눈에 그가 지닌 권투의 재능을 알아본다. 두호는 영철에게 프로 권투 전향을 제안하고 영철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마담은 영철이 다시 권투를 시작하는 것을 반대하고, 두호는 영철에게 마담과 헤어질 것을 종용한다. 영철은 승승장구하고, 두호의 선수를 빼내려는 돈 많은 다른 구락부의 박 사장이 눈독을 들인다. 두호는 영철과 마담을 헤어지게 만들기 위해 마치 자신과 마담이 정을 통한 듯 꾸미지만 그 일로 배신감을 느낀 영철은 두호를 떠나 박 사장에게 간다. 영철이 떠나자 그 허탈감으로 두호는 쓰러지고, 마담은 영철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이 그를 위한 두호의 생각이었다는 편지를 남기고 멀리 떠난다. 뒤늦게 이 모든 것을 안 영철은 아시아 챔피언 타이틀을 따고 병원으로 달려오지만 두호는 세상을 떠난 다음이다. 자,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투덜거릴지 모른다. 난 이런 줄거리의 영화들을 잘 알고 있어, 그럴 뿐만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진부한 지도 충분히 알고 있어. 물론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당신은 이 뻔한 이야기가 정작, 말 그대로 정작, 요긴하게 사용되어야 할 것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다른 것이 술어를 감싸기 시작할 때, 영화 속에서 무엇이 무엇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면서 얼마나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느슨해진 텍스트. 그때 무엇이 그 사이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는가. 이 말의 방점, 사이. 같은 방법으로 제기할 수밖에 없는 의문(들). < 나는 왕이다 >에는 영철이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수련의 기간이 없다. 그는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가져야 하는 신체적인 훈련의 기간을 갖지 않는다. 혹은 생략되어 있다. 영철은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으며, 그는 별다른 노력 없이 그 자리에 오른다. 자동적인 결과. (그러므로) 이 이상한 과정에서 영철은 마주쳐야 하는 거의 같은 수준의 경쟁자를 갖고 있지 않다. (혹은 가질 필요가 없다) 그는 링에 오른 다음 항상 별다른 위기의 우여곡절을 겪지 않고 차례로 승리를 얻는다.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우리는 단 한 번도 링 위에서 마주칠 영철의 경쟁자에 관한 소개를 받지 못한다. 그래서 마치 영철의 경쟁자들은 링의 일부처럼 보일 정도이다. 권투는 혼자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며 그러므로 링 위에서 영철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권투라는 스포츠의 규칙 일부로서의 경쟁자들이 이 영화에는 없다. 차라리 사라진 대립물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빈자리. 경기라는 드라마. 우리는 스포츠 영화에서 두 개의 드라마를 보게 된다. 하나는 그 영화의 드라마이며, 다른 하나는 경기의 드라마이다. 그런 다음 그 둘 사이를 슬그머니 겹쳐놓기. 따분할 정도로 전형적인 예. < 록키 >. 그 둘은 종종 비스듬히 위아래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이따금 둘 사이에서 화해를 하지만 동일한 것이 아니다. 때로 경기장의 드라마는 공정성을 내세워서 영화의 드라마를 부수기도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 밀리언 달러 베이비 >. 경기의 결과는 미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한쪽에서 드라마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그만큼의 무게를 담고 링 위에서 마주치게 될 상대방도 그 삶 전체를 걸고 거기 올라와서 주인공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링 위에서 주인공이 가져야 할 우선권은 어디에도 없다.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진 한 편의 드라마. 열정의 순간들. 영화를 보는 관객과 경기를 보는 관중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경기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드라마를 인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때로 고통스럽게 관객들이 경기를 보는 동안 관중들은 즐거운 듯, 때대로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걸 구경한다. 이 순간 이따금 링 위에서 참기 어려운 순간을 할 수 있는 한 과장해서 연장시키기조차 한다. 그 어떤 영화보다도 마틴 스콜세지의 < 성난 황소 >. 스포츠 영화의 열린 가능성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스스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혹은 영화 안의 관중에게 외재적인 것이 영화 바깥의 관객에게는 내재적인 것이 된다. 능력과 감정 사이의 모순. 모든 드라마를 비합리적으로 만드는 세상의 합리성. 경기 그 자체에 사유는 없으나 그걸 바라보는 관객에게는 삶의 사유가 요구된다. 그러나 <나는 왕이다>는 이 자리를 시시하게 만든다. 그때 <나는 왕이다>에는 관중의 자리가 함께 사라진다. 이 영화는 권투를 다루면서 이상하게도 경기의 구경꺼리라는 효과가 사라져버렸다. 이 과정은 링 위에서의 드라마의 부재라는 이상한 결과로 이끌리기 시작한다. <나는 왕이다>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링 위에 드라마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임권택 의 영화에서 비밀스럽게 마주치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숨기지도 않는데 이상하리만큼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이따금 신비스럽게까지 여겨지는 어떤 전도에 대해서 건드려보고 싶다. < 나는 왕이다 >는 어떤 방식으로 다시 옮겨 써도 영철의 자리만으로는 줄거리를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순간과 계속 대면하게 된다. 물론 그건 영철을 올바르게 이끈다(고 착각하)고 행동하는 두호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두 개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두호의 자리에서 이 줄거리를 완전히 다시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영철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순간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임권택은 여기서 바꿔치기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일종의 평행론. 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바꿔치기라는 방법. 나는 여기서 엄밀하게 개념을 가져왔다기보다 전술적으로 응용하고 있는 중이다. 임권택은 일단 시작하면 둘 혹은 셋을 가져다 놓은 다음 그 사이에서 어떤 우월성도 부여하지 않은 채 그 모든 것이 일시에 작동되기 시작한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이때 이쪽 이야기의 이쪽 칸에서 이쪽 이야기의 저쪽 칸으로 넘어갈 때 반드시 문제가 생겨난다. (여기서 세 개의 이쪽을 유심히 읽어주기 바란다) 종종 이런 이동을 위해서 영화는 몇 가지 트릭을 발명했다. 이를테면 갑자기 끼어드는 꿈 장면, 혹은 씬 자체의 거리를 유발하는 여백으로서의 보이스 오버, 무심한 (척하지만 반복적인) 인서트, 그 사이에서 활동하는 두뇌의 몽타주. 하지만 임권택은 그런 선택을 한 적이 없다. 혹은 마치 그런 방법을 모른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 대신 임권택은 이 평행론의 실천적 의미 속에서 세상이 구성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든다. 자, 이것이 요점이다. 영화에서 어떤 인물도 자기가 행동하는 세계의 상상적 경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없다는 무지를 드러내는 여백의 순간을 블랙홀로 만든 다음 그 행동을 다음 사람, 다른 사람, 이 둘 사이의 장에서 그 무게를 떠맡게 만들 때 이 모든 행동은 상호주관적인 네트워크 안에서 분열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때 분열은 항상 상호주관적인 파국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파국은 상호주관적인 네트워크의 붕괴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그 붕괴를 다시 봉합하면 사건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어질 것인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때 이 둘 혹은 셋 사이의 분열은 서로 같은 수준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둘 혹은 셋 사이의 간극은 결코 좁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 사이의 파국은 결국 각자의 제한적인 관점 때문에 서로에게 비친 자신의 얼굴을 다시 되비쳐보는 각자 자리에서의 각자 행동의 모방의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때 임권택은 각자의 고유한 자리를 유지시키면서 상대방의 자리를 흉내낼 때 자리의 바꿔치기, 바꿔친 자리에서 행동하는 각자의 맥락들, 그들 사이에서 활동하는 상호주관적인 네트워크의 환상의 고리를 작동시킨다. 이것이 처음에는 임권택의 영화에서 희미하거나 종종 도식적으로 구성되었지만(< 잡초 >) 점점 더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나가면서(< 짝코 >) 결국 그의 영화에서 일관되게 시도되는 전도된 운명론으로 이어져나갔다. (< 서편제 >, 그리고 < 천년학 >) 나는 반복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임권택의 영화에서 그것이 부재하면 그것을 제외한 그 모든 것으로 그것을 대신하는 것을 보아왔다. 핵심은 그것의 자리이다. 그때 이 자리는 일종의 대리 충족이 아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밀고 나아갔다면 임권택은 어딘가에서 멈춰서야 했을 것이다. 반대로 이 자리는 그 자체로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알렌카 주판치치가 끌어들인 니체를 다시 인용하여) 정오의 그림자이다. S1 과 S2 의 연쇄 망. 하나가 둘로 변하는 시간. 말 그대로 가운데의 시간.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 둘 사이의 거의(das Beinahe)라고 불러야 할 최소 차이, 최단 경로로서의 빗금. 이때 서로는 서로에 대한 잠재적 부채가 된다. 임권택의 세계는 정확하게 그런 의미에서 부채의 세계이다. 임권택 영화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이 이 셈법에 관한 대차대조표처럼 씌어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 만일 상투적인 셈이었다면 < 나는 왕이다 >는 영철을 사이에 두고 먼저 두호와 마담 둘로 칸을 나눈 다음 다시 주변의 인물들 사이로 여러 개의 칸을 나누었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 그렇게 할 것이다. 임권택 은 영철에게서 시작하지만 금방 그를 그냥 내버려둔다. 그것이 영철에게서 어떤 신체적 훈련을 요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영철의 대립 항을 세워놓지도 않는다. 그 대신 마치 등가물의 이동처럼 영화는 두호에게로 옮겨간다. 그렇다고 여기서 두호의 이야기로 옮겨가거나 혹은 두호의 시선으로 다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두호는 다시 고유한 하나의 칸이 된다. 임권택은 자기 영화가 하나의 총체적인 국면을 갖는 것을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이때 영화의 무대는 매번 하나의 씬에서 하나만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가 자리를 차지하면 다른 하나는 그 자리를 양보해야만 한다. 하나를 둘로 나누는 대신 둘이 번갈아 하나가 되자 그것을 대신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하나는 다른 하나를 항상 포함하게 된다. 임권택의 바꿔치기에는 확장된 형태의 교집합이 항상 매듭을 만든다. 그걸 풀면 갑자기 이야기가 단조롭게 여겨질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 대답은 틀렸다는 것이다. 그걸 풀면 이야기가 중단될 것이다. 왜냐하면 단지 이것이 저것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할 수 없는 것을 저것이 하면서 이야기를 성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영철은 자동적으로 챔피언이 되지만 (왜냐하면 그는 챔피언이 되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링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두호가 없다면 그는 중도에 권투를 포기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되고 싶은 것은 챔피언이 아니라 단지 평범한 건축가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권투 자체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가 막 시작했을 때 영철은 이미 권투를 포기한 다음이기 때문이다. 만일 두호의 칸을 비워놓았다면 <나는 왕이다>는 권투와 아무 상관 없이 영철과 마담의 이야기로 흘러가버렸을 것이다. 여기서 챔피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영철이 아니라 두호이다. 그러나 링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두호가 아니라 영철이다. 두호는 자신이 챔피언 벨트를 차고 찍은 사진을 마치 홀린 듯이 바라보면서 간절하게 그걸 다시 한 번 이루고 싶어 한다. 놓치지 말아야 할 이상한 결정. 영철이 다시 권투를 시작하는 것은 그 자신의 결정이 아니라 두호의 요구 때문이다. 여기에는 부정과 부정의 부정 사이의 불명확한 자기 지시 관계가 있다. 그런 다음 그는 언제든지 권투를 그만 둘 태도를 종종 보인다. <나는 왕이다>는 시련과 극복, 좌절과 승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반대로 어떻게 하면 욕망을 중단하지 않고 챔피언 벨트를 향해서 영철이 마지막까지 링에 오르는 것을 멈추지 않게 하느냐가 이 이야기의 이면이다. 나는 당신에게 이 영화의 몹시 이상한 장면을 환기시키고 싶다. 두호는 영철을 자신의 권투 구락부에 데려온 다음 거의 겁탈이라도 하듯이 웃옷을 벗기고 그의 벌거벗은 육신의 살을 마치 에로틱한 대상을 만난 것처럼 주물럭거리고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면서 거의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더 이상한 것은 그때 영철이 약간 부끄럽다는 듯 몸을 움츠리면서 여성적인 제스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침대에서 영철과 마담이 뒹구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나오지만 이 장면만큼 육감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물론 이 영화는 퀴어(-게이)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두호가 영철에게서 동성애적인 호감을 갖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 역도 아니다. 그런데도 두호는 영철의 육체에 대해서 페티시즘에 가까운 매혹을 느낀다. 누군가는 그냥 단순하게 이걸 두호의 나르시시즘이라고 설명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둘은 하나가 아니라 반대로 서로 겹치려는 둘 사이의 긴장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매우 아쉽기는 하지만 < 나는 왕이다 >는 종종 임권택 자신이 이 영화의 회로가 작동하는 방식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혹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이끌려 나갈 때조차 그저 그 힘을 간과하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는 그 힘이 < 하류인생 >이나 < 취화선 >처럼 잘 통제되지 않는다. 그 대신 임권택은 반영적 관계와 대립적 관계를 사방으로 펼쳐나간다. 영철이 사랑하고 영철을 사랑하는 마담은 몇 번이고 “그 야만적인 권투를 집어치우”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돈은 내가 벌 테니 그저 내 곁에 있기만 해달”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아마도 마담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 그러니까 이미 전에 영철이 링 위에서 권투 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마담은 링 위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몸서리를 친다. 영철을 따르는 거리의 동생 ‘땅콩’은 “오른손에 칼을 맞지만 않았다면 계속 권투를 했을 것”이라고 고백한 다음 “형이 부럽”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우리는 권투가 매우 이상한 자리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나는 맨 처음 질문을 다시 가져올 것이다. 권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 질문에 대한 임권택 감독님의 대답. 스포츠 선수들을 가까이서 보고 있으면 세상과 접촉하는 대신 자기 훈련만을 계속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하고 말하는 사람들이지요. 자기하고만 말하는 사람. 이때 < 나는 왕이다 >에서 임권택이 생각하는 권투하는 사람은 영철이 아니라 두호이다. 권투를 그만두고 명동의 마담을 찾아와서 기둥서방 노릇이나 하면서 지내려는 영철을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이 영화는 권투와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두호는 먼저 이 영화의 방향을 구부러트린다. 그런 다음 두호는 자신의 대립물을 차례로 분할시키거나 소멸시키기 위해 권투 이외의 칸들을 차례로 폐쇄시켜 나가려고 한다. 점점 더 커지는 두호의 칸. 두호는 자신의 칸과 영화 전체의 칸이 동일해질 때까지 팽창시켜 나가고 싶어 한다. 그는 차례로 다른 모든 것을 권투와 등가교환 시키려고 한다. 이때 이 과정을 대부분의 영화는 그 어떤 절대적인 목표를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을 희생시켜나가면서 밀고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차례로 그 목표에 대해서 수긍을 한 다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때 이 목표는 어떤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임권택은 반대로 이 과정에서 두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니, 차라리 두호가 실패하는 과정을 그저 쳐다보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자 여기서 일어나는 전도는 기이하게도 그 희생을 두호에게 요구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을 바꿔치기의 전도라고 부르고 싶다. 이 전도는 임권택 영화 전체에서 우리가 수없이 다시 마주치게 되는 실패이다. 실패? 그렇다. 교환의 실패. 물론 이것은 객관적으로 올바른 교환이 아니다. 그러나 두호는 이 교환을 객관적으로 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하려는 방법은 상대방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과 그 자신이 내세운 목표 사이에서 생겨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주변의 모든 칸을 무효화시키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이때 둘 사이의 모순을 자기와의 동일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두호의 행동은 사실상 그 자신의 상상적 대립 안에서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배제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나아간다. 임권택은 영철이 승리를 거두는 것을 활기차게 바라보는 것보다는 두호가 그렇게 실패의 과정을 거쳐서 그 모두의 관계 안에서 두호의 칸이 부서져 가는 것을 우울하게 바라보는 것에로 관심을 옮겨간다. < 나는 왕이다 >는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영철이 챔피언이 되는 이야기지만 속으로는 두호가 그 스스로 내세운 목표가 다른 모두의 목표와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전체로부터 외부로 빼내가는 실패의 과정을 다룬 이야기이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이 이야기는 결국 자신이 전체 안에서 결핍되어 채워 넣으려고 한 것이 사실상 과잉된 그 무엇이었음을 깨닫고 이 관계 전체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말소시켜나가는 이야기이다. 나는 임권택 이 이러한 역설의 논리에 일관되게 자기의 주인공을 던져 넣는 것을 보아왔다. 주인공들은 이런 내기에 대해서 끝까지 버텨보지만 결국에는 부서져 나간다. 왜냐하면 이 내기는 (다소 따분하게 설명하자면) 스스로를 주체화시켜나가는 행위 자체가 자기 부정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때 핵심은 어느 순간에 자기 존재가 이 구조 안에서 잉여라는 것을 깨닫는가, 라는 그 순간을 임권택은 영화가 다룰만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임권택의 관심은 오로지 거기에 매달려 있다. 그는 줄기차게 실패한 만남에 대한 관심을 가져왔다. 나는 이것을 과도하게 그의 전기와 연결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또한 이 과정을 일반화시켜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이 실패 안에서 임권택은 주인공을 거기에 하나 새롭게 더하는 덧셈의 공존 대신 빼 나가는 뺄셈의 외부, 말 그대로 바깥의 자리에로 밀어낸 다음 그것이 무효화 되어가는 과정을 영화의 경로라고 믿는다. 그때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물론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 대신 우리는 거기서 영화적으로 다룰만한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물어보아야 한다. 존재론적인 대답은 자명하다. 그건 존재의 오류를 다루려는 것이다. 그때 오류는 영화적으로 진리(를 찾으려는 행위)보다 무엇이 더 효과적인가. 임권택은 거기서 한 인물을 둘로 쪼개낸 다음 하나의 해결을 향해서 갈 수 있는 길을 내버려두고 갑자기 제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실제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사이의 미로 안으로 뛰어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왜 그것이 중요한가. 그것만이 현실적인 규정 바깥으로 빠져나와 현실의 구조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하나의 무대 위에서 종종 두 명의 인물을 제시한다. 그런 다음 그가 바꿔치는 것은 단지 이 인물에서 저 인물에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세계를 내버려두고 다른 세계로 옮겨갈 때 거기에는 우리들이 쫓아내 버린 것들, 부정된 것들, 배제된 것들, 나머지 것들, 명백히 동어반복처럼 보이면서도 바깥에 놓여진 것들의 칸이 남는다. 그것을 다루는 것은 영화에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그때 임권택이 서사를 버리고 묘사로 옮겨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하지만 아직은 1966년이다. < 나는 왕이다 >에서 임권택 은 아직 이런 모든 것들을 다소 희미하게 다루고 있다. 나는 여기서 잠시 멈출 것이다. 하지만 이때 이 영화가 내게 흥미로운 것은 언제나 이미 자기와의 동일성이 불가능해져 버린 세상에 대해서 거의 동어반복적인 행동을 하는 인물을 벌써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토록 끈질긴 실패한 만남.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해소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임권택은 여기서 마지막 순간 잉여를 치워버린다. 두호의 죽음. 그런데 그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스산한 공백. 거기에는 감정적인 격앙의 순간도 없고, 어떤 희생의 보답도 없다. 마치 얼룩을 지우듯이 그렇게 이야기에서 빠져나간다. 그때 남은 자들에게 남겨진 질문은 다소 두려워진다. 이 공백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혹시 이 공백 자체가 세상의 연쇄 속에 놓인 다른 가능성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영화에서 이 전체가 공백이며 이제 가까스로 그것을 채웠던 잉여의 칸이 사라지면 남은 세상은 무엇으로 견딜 것인가. 그때 영화는 재빨리 끝난다. 나는 이 바꿔치기를 어딘지 모르게 다른 것을 위한 어떤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떤 것을 위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자, 우리의 원래의 논점으로 돌아가자. 권투는 영화적인가. 그렇다. 그때 임권택이 한 말을 다시 생각하기 바란다. 그는 링 위에서 싸우는 두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승자의 수직선도 없고 패자의 수평선도 없다. 여기에는 두 개의 선이 교차하지 않는다. 혼자 링 위에 올라가서 섀도 복싱을 하면서 그가 자기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의 대상이자 동시에 은유일 것이다. 나는 지금 링이 세상의 은유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정반대를 가리킨다. 링은 세상과 하나의 연쇄 망을 이룰 수 있는 치환이 가능한가. 그것은 S1과 S2의 이음새를 어디서 맺고 어디서 끊는가. 그때 우리는 영화가 만들어내는 고정점의 매듭을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 문자 그대로? 그렇다. 이미지라는 문자. 언제든지 첫 번째 하나이자 두 번째 하나이자 세 번째 하나이자, 라고 이어지는 바꿔치기의 계열. 끝없는 칸들. 칸 사이의 바꿔치기로서의 은유. 임권택의 은유. 그때 은유는 영화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될 수 있는가. 나는 위험한 내기를 하고 싶어진다. 내 대답은 그렇다, 는 것이다. 그때 나는 새로운 유형의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빈 칸을 발견해야만 한다. 빈 칸의 미장센. 이 칸에는 어떻게 들어올 수 있을까. 그런 다음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거기서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까. 사는 법. 그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 바란다. 그 칸에서 자기와 자기 자신의 그림자와 사는 법.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것을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아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하고 싶다. 내게 재치를 허락한다면 임권택의 모든 주인공들은 자기하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 (계속) 1966년 100분 흑백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세기상사 각본 강근식 , 김지헌 촬영 장석준 음악 김용환 미술 박석인 편집 김희수 신성일 최영철 김승호 맹두호 주증녀 두호의 아내 이민자 마담 태현실 춘자 박암 백사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