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주말을 맞이하여 서울 곳곳에서 즐거운 나들이를 즐기는 하루
- 제작년도
- 2010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으로 인한 거리두기는 영화 산업의 존립을 위협했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이 매체의 가장 본질적인 체험 행위를 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극장의 위기에 부쳐 내 경우만 고백하자면,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동안 나는 극장에 채 열 번도 가지 않았다. 2020년은 열두 살 이후의 내 인생에서 가장 극장에 안 간 해가 되었다. 교회에 절대 안 가는 기독교인은 자랑스러운 일면조차 있지만, 극장에 통 안 가는 시네필이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 위기가 왔을 때 말이 아니라 육체로 증명할 수 없다면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나의 뜨뜻미지근한 사랑은 그 사실을 절대로 들켜선 안 되는 바로 나 자신에게 뽀록났다(‘뽀록나다’는 속된 표현이나, 엄연한 표준어다). 나는 시네필로 자각할 자격을 상실했다. 지난 봄, 방역 상황을 주시하며 시네마테크와 멀티플렉스의 예매와 취소를 반복하던 중, 설마 확진자와 접촉해 감염되는 한이 있더라도 봐야만 하는 영화가 나타났다. 마침내 나를 극장으로 다시 불러들인 영화는 조지 A. 로메로의 < 시체들의 새벽 >(1978)이었다. 40여 년간 국내 개봉한 적이 없었던, 모든 현대 좀비 장르물의 원본이 하필이면 “이 시국에” 극장에 걸렸다. 이 영화에 대한 내 오랜 사랑과 강박(커버에 “안녕하시었어요?”가 적힌, 출시 제목 <이블 헌터>의 비디오로 접한 이후, 인생이 어떻게 망했는지 글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7855 (오독의 라이브러리, 2017-08-03, cine21)을 쓴 적 있다) 때문에,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극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상한 조바심에 사로잡혔다. 같은 작품의 DVD가 판본별로 있고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뇌내(腦內) 재생할 수도 있지만 꼭 극장이어야 했다. 4월 15일, 나는 전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한 상황에 거의 텅 비다시피 한 쇼핑몰의 극장에서 <시체들의 새벽>을 보았다. 극장엔 개봉 취소나 연기된 영화들의 선전물만 덩그러니 놓인 채 관객은 커녕 표를 확인하는 직원조차 보이질 않았다. < 오메가 맨 >(1971)의 찰턴 헤스턴처럼 객석에 홀로 앉아 “이제 이런 영화는 안 만드는 모양이군!” 읊조릴까 했는데, 나를 포함해 총 네 명의 관객이 들어왔다. 좀비 떼를 피해 아무도 없는 쇼핑몰 안에 숨어드는 영화 속 주인공도 딱 네 명이다. 극장이 선전한 리클라이너가 편안했고, 방역이 아니라 방해받지 말라고 만들어놨던 칸막이가 있는 관람은 쾌적했다. 영화가 끝나고, 똥땅거리는 쇼핑몰 음악과 함께 좀비들이 지상에서 뒤뚱거리며 엔드 크레딧이 오르자 깨달았다. 나는 영화를 보러 왔다기보다 영화를 현실에 재현하러 온 관객이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는 말은 옳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 기침 소리가 들리자 나의 나들이는 심리적 자해처럼 느껴졌고, 픽션은 현실의 고민이 되었다. < 우주전쟁 >(2005)의 말미에 허망하게 고꾸라지던 외계인들처럼 인간이라는 종도 겨우 바이러스에 함락되는가. 세상이 망하기 전에 영화부터 사라질까. 그럼 다 같이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나는 뭘 먹고 사나? 또 언제 극장에 올 수 있을까? 극장이 이렇게 망할 줄이야. 친구의 영화가 결국 극장 개봉 대신 OTT를 택했을 때, 강제 넷플릭스 진출을 축하한다며 주고받은 메시지는 그나마 다행이란 위로에서 어떤 우려로 남았다. 극장이 아니라면 내가 만들고 싶어 하는 영화는 영화일까? 극장 밖에서 영화는 진정으로 존재할까? 혹시나 만약에 정말로 극장이 사라지더라도, 물론 영화까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이미 영화는 어디에든 넘칠 정도로 있다. 손아귀의 디바이스, 책상 위 모니터, ‘언택트’ 시대를 맞아 거실에 “거거익선”으로 장만한 4K 디스플레이 속에 극장만큼 충분히 친숙하고 또렷하고 거대하게 존재한다. 거의 극장에 있는 것 같은 환경을 구현해주는 VR 어플까지 있다. 영화는 아날로그(필름)가 아니라 생성될 때부터 디지털(파일)이고, 네트는 광대하며 스트리밍은 빠르다. 그러니 둘 중에 하나만 영영 잃어야 한다면,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은 극장의 죽음이다. 만국의 시네필들이여 선택하라. 그러나 이렇게 외치고픈 충동이 울컥할 것이다. 아뇨, 극장에서가 아니면 그건 결코 영화가 아니에요. 영화는 오로지 극장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내 망막에 눈부시게 빛으로 쏟아질 때만 영화예요. 이 빛과 어둠의 예술은 극장에서만 기적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객석에서 모두와 함께 울고 웃으며 다 같이 탄식할 때만! 시네마테크를 향한 내 예전 간증을 지금 다시 적노라니 가슴이 뜨끔하다. 그 믿음은 유효합니까? 6월, 여름 시즌에 내야 할 영화들이 줄줄이 훗날을 기약하고 뒤로 밀리며 눈치만 볼 때 한 영화가 매를 맞아보겠다는 듯 용감히 개봉했다. 극장에 같이 가려 동행을 구했지만 누구도 나서질 않고, 코로나 때문이 아니어도 내가 고립된 인간임을 직시하며 혼자 < #살아있다 >( 조일형 , 2020)를 보러 갔다. 체온을 재고 연락처를 남긴 다음 극장 안으로 들어와, 테이핑으로 간격을 띄워놓은 좌석에 앉으니 이 정도면 극장은 오히려 전에 없이 쾌적한 상태로 지속할 수 있을 걸로 보였다. 처음 이 영화의 정보를 접하고, 미국 작가가 쓴 시나리오지만 한국판 리메이크가 아니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같은 시나리오로 두 편의 영화가 동시에 제작되며, 감독의 연고지도 미국 기반이라고 했다. 나는 괜히 영화사들이 이제부터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외국에서 사오고 모국어만으로는 업계에서 버틸 수 없게 되는 상상을 했다. 캐릭터와 플롯만 정확하게 보고, 모호하게 문장력으로 눙치는 시나리오는 솎아지는 날이 오는 거다. 퇴출 확정이군. 아무튼 티저를 보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틱톡 시대에 도래한 SNS 맞춤 좀비 스릴러일까 싶었는데, 시의적절한 아이템이 시국에 맞춤인 결과로 나왔다. 심지어 감독 역시 코로나 때문에 입국을 못하고 미국에서 화상을 통해 원격 편집과 마스터링을 했다니 거의 언택트 시대의 산물 같은 영화다. 좋든 나쁘든 원하건 말건 간에 세상에 의해 현실이 되는 픽션이 있고, 이 영화도 그렇다. 하루아침에 바깥세상이 망해 집 안에 꼼짝없이 갇힌 남자( 유아인 )가 고립 끝에 별 수 없이 나도 망할까, 하다가 맞은편에 사는 여자( 박신혜 )와 소통하고 함께 살아남고자 서로 돕는다. 좀비 떼를 피해 둘이 도망갈 수 있는 세상의 가장 멀고 높은 곳이란 겨우, 아파트 옥상이다. 이 세팅은 지금 현실과 닮았다. 팬데믹으로 집에 갇힌 우리는 마스크를 끼고 밖으로 나서는 일에 종말이 온 듯 호들갑을 떤다. 이 영화 속 캐릭터의 생존 투쟁도 절박하기보다 호들갑 같다. 영화를 보면서 걸리는 개연성은 이제 나 같은 직업병자 아니면 위키에 비판 항목을 적는 사람에게만 문제일 것이다. 관객 눈에 즉각 보이지 않는 맥락과 읽히지 않는 의미부여 대신, 상황에만 집중해서 단순명쾌하게 콘셉트만 끝까지 밀고 가는데 의외로 산뜻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나는 이렇게 공권력을 긍정하는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국가가 해시태그(#)를 검색해 당신이 SNS에 남긴 생존 증명만으로 헬기에 특수부대원을 태워 구하러 온다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타났는데 어째 그다지 촌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이걸 문제 삼고 싶은 내가 촌스러운 것 같았다. 영화는 무리 없이, 딱 아파트 옥상까지만 도달했고, 살아남았다. 나는 무리를 보길 기대했었다. 영화란 만드는 과정도 그 결과물의 내용도 온통 무리하는 것이라 믿어 왔는데, 그 무리한 욕망을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게 영화 아닌가? 이제 다들 그런 영화는 안 만드나? 개인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긍정하기로 했다. 극장을 나서는 순간 깨끗이 잊히게끔 만든, 딱 그 정도의 적당한 야심을 품은 영화가 주는 미덕을 생각했다. 이런 하이 콘셉트 영화를 더 많이 더 잘 만들 수 있게 된다면, 언젠가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기분을 선사하는 현실의 우화 같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인 나로선, 다만 그 수준에 도달한 시나리오가 또 어느 미국인이 영어로 쓴 책이 아니도록 애쓰면 될 일이다. <#살아있다>는 코로나 상황의 박스오피스에서 선전하여 초여름의 극장가가 잠시나마 지탱할 수 있도록 견인한 공이 있다. 극장이 살아있고 다녀간 관객이 무탈함을 세상에 알려줬던 것이다. 8월 중순 2차 대 확산이 발생하여 다시 극장이 셧다운을 거듭하는 동안에는 넷플릭스에서 월드와이드 영화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산 콘텐츠 중 최초 기록이라니, 팬데믹 상황의 전 세계 구독자들이 꽤 공명한 것 같고, ‘K-좀비’라는 모호한 장르도 존재감을 확인했다. K-좀비라니, < 괴시 >( 강범구 , 1981) 이후 이런 날이 다 왔다. 그러나 나는 한국산 좀비 영화의 경향에 신체를 물어뜯고 내장을 쏟아내고 그것들을 먹는 직접적인 묘사를 여간해선 하지 않는 것에 의구심을 갖는다. 내가 고어(gore)를 요구하는 건 좀비 영화의 윤리 때문이다. 굳이 보여주지 않을 윤리가 있다면, 마땅히 보여야 할 윤리도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 좀비 영화에 대한 근본주의를 품은 사람의 무리한 요구일 뿐이려나? 뭐 이제 그런 영화는 안 만드는 모양이니까. 암담한 거리두기의 시간을 지나 1단계로 돌아왔지만, 극장의 위기는 여전히 녹록하지 않다. 기대했던 많은 영화들이 끝내 극장을 포기하고 OTT로 돌아서고 있다. 왜 영화를 마땅히 극장에 걸지 않느냐며, 손해를 감수하라고 강요할 순 없다. 영화는 결국 돈을 벌어야 지속할 수 있고, 극장은 믿음이 굳건한 몇몇 시네필에게만 의존하기엔 지나치게 크고 구태의연한 산업이다. 이 구태의연한 행위가 영화를 경험하기에 가장 옳은 양식(樣式)이기에 나는 OTT의 영화 독식도 극장의 명예로운 죽음도 언택트와 뉴 노멀 어쩌고 하는 대단한 변화도 원하지 않는다. <시체들의 새벽>을 극장에서 보며, 앞으로 인류가 지독히도 재수가 없다면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보는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괜찮네? 나다운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이런 감상적인 호들갑보다 <#살아있다>를 보고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으로 극장은 안전해, 다음에 무슨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영화의 구원과 극장의 부활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요상한 맹신의 종교적 호들갑이 하루아침에 막막하게 만들 줄 그땐 몰랐다. 다시 그런 상황이 오는 건 사양한다. 종말, 멸망, 아포칼립스란 그렇게 떠들썩하지 않고 오히려 조용하고 쓸쓸할 거라 생각한다. 집에 갇힌 채 홀로 훌쩍이는 일이 진짜 종말에 가깝다. 이 상황을 탈출해도 별로 대단한 미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예전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행운을 빈다. 그 행운이 너무 힘들게 멀리 있지 않고, 우리가 갇힌 집에서 아파트 옥상 정도의 거리에 있기를.
< 여자가 더 좋아 >는 1965년 6월에 개봉하여 약 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당해 국산영화 흥행 2위에 올랐던 코미디 영화다. 그러나 대중이 이와 같이 호응했음에도 이 영화에 대한 당시 저널리즘과 평단의 반응은 혹독했다. 이 영화에는 “C급 저속 넌센스 소극”이라는 말이 붙어 다녔고, 1) 청소년 범죄를 부추기는 영화로 지목되었으며, 2) 주제가는 「동백아가씨」가 왜색조로 금지될 때 저속하다는 이유로 함께 금지되었다. 3) 이 영화를 제작한 이들은 “바로 오늘만을 살고 스스로 묘혈을 파는 어리석은 장사치의 대표적 유형”이자 심지어 ‘영화반역자’라고 비난받기도 했다. 이때 이 영화의 대척점에 놓인 영화들은 < 자유만세 >(1946), < 성벽을 뚫고 >(1948), < 순교자 >(1964) 등인데,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을 지닌 ‘세계시장을 지향하는 좋은 영화’로 일컬어졌다. 그러니 <여자가 더 좋아>는 그 반대의 ‘나쁜 영화’인 셈이었다. 앙리 베르그송이 웃음을 논하면서 희극과 예술일반을 비교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일반적으로 예술은 비극이고, 희극은 비극보다 열등한 것으로 오랫동안 간주되어왔다. 식민지에서 분단으로 이어지며 근대 계몽에 대한 욕구와 당위가 비등한 데다 이분법적 인식이 공고했던 한국에서 그러한 경향은 한층 더했다. 검열에서 코미디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했다는 증언은 이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경직된 규율의 눈으로 바라볼 때 코미디는 말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말할 가치도 없는 것, 그야말로 난센스(nonsense)였던 것이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것에도 위계가 있었다. 비현실적이고 개연성 없고 우발성과 과장으로 이루어져 웃음을 유발한다고 해도 마지막에 계몽이나 위로로 귀결될 때에는 희극으로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 웃음이 계몽에 닿으면 풍자가 되고, 위로에 닿으면 유머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4) 그리고 그러한 웃음은 미래지향적이고 건전하며 명랑한 웃음으로 웃음 중에서는 높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이 ‘엎치락뒤치락’ 소동으로 끝날 때, 말도 안 되는 일이 말도 안 되는 상태로 끝난다고 보일 때 그것이 유발한 웃음은 “최저속선까지 철저하게 타락시킨 웃음” 5) 으로 질타되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희극에 못 미치는 ‘저속한 C급 소극’으로 평가되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영화가 <여자가 더 좋아>였다. 이 영화를 시종일관 끌고 가는 것은 코미디언 서영춘 의 페르소나다. 1960년대 초 라디오 방송에서 만담으로 유행어를 연달아 만들어내며 인기몰이를 시작한 서영춘은 1965년에 영화 세편에 출연한다. < 청춘사업 >(4월 개봉), <여자가 더 좋아>(6월 개봉), < 출세해서 남 주나 >(11월 개봉)가 그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흥행한 영화가 <여자가 더 좋아>였다. 제목에서 할리우드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 Some Like it Hot>(1959)를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196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에 ‘여장 남자 코미디’ 유행을 견인한다. 이 영화 이전에 ‘여장 남자 코미디’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1년에 <뜨거운 것이 좋아>가 한국에서 개봉하여 크게 흥행하고 1962년 마릴린 먼로의 돌연한 죽음으로 롱런을 하면서 <뜨거운 것이 좋아>의 번안영화가 제작되었다.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 남자는 안 팔려 >(1963)가 그것인데 눈에 띄게 관객을 동원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2년 후에 <여자가 더 좋아>가 나와 크게 흥행하여 ‘여장 남자 코미디’의 유행을 촉발한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 서영춘이 분한 주인공 규철은 여자직업기술학교에 출강하는 음악 강사다.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체모도 적은 데다 바느질과 요리를 즐기고 말도 얌전하게 하며 입을 가리고 웃는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특징으로 인식되는 이러한 행동 때문에 그는 ‘여성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기술학교 학생 영숙( 최지희 )과 엄연히 연인 사이다. 그는 결혼하기 위해 영숙의 부모님을 만나는데, 의학적으로 여성에 가까운 중성이라는 이유로 파혼을 당한다. 영숙은 박문기( 남궁원 )라는 밴드마스터와 곧바로 결혼하고 이에 상처받은 규철은 복수를 결심한다. 그는 여장을 하고 규화라는 이름의 식모로 영숙의 시집에 들어간다. 영숙의 시아버지( 김희갑 )는 성정이 ‘괴벽스러워’ 식모를 붙어있지 못하게 만드는 영감인데 규화의 ‘서비스’에 만족하여 규화와 잘 지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영숙은 규화(규철)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리지만 규화는 영숙의 남편 박문기와 악단주 선우광( 양훈 )까지 매혹한다. 규화(규철)가 불행한 영숙을 보며 자신의 복수에 대해 회의할 때쯤 선우광의 구애로 정체를 들킨다. 선우광이 규화(규철)에게 수작을 걸 때 현장을 덮친 선우광의 부인 때문에 그는 슈미즈 바람에 가발이 벗겨진 채 마침 나들이에서 돌아오던 영숙과 문기, 영숙의 친정어머니와 시아버지까지 모두 보는 가운데 뛰쳐나가게 되는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프린트에서는 이 상태로 영화가 끝난다. 그런데 시나리오 상으로는 규철이 성전환 수술을 하여 결국 여성이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와 같이 여장 남자로서 남성과 여성을 넘나드는 전개는 서영춘의 규정을 거부하는 ‘난센스 페르소나’를 통해 이분법을 끊임없이 교란하며 웃음을 유발한다. 서영춘의 외양과 태도는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분방한 모호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행동거지와 거기에서 분출되는 에너지는 남녀로 분리된 젠더박스에 진동을 일으키고 균열을 낸다. 이는 1960년대 말 구봉서가 출연했던 ‘남자 시리즈’(< 남자 식모 >, < 남자 미용사 >, < 남자와 기생 >)와 비교해 보면 보다 명확하다. 이 영화들에서 구봉서 는 깔끔하고 자상한 남자로서 여자 흉내를 잘 낼 뿐이지 결국 남자다. 여자로 변장했을 때의 모습과 남자로서 연인과 있을 때의 모습이 확연히 구분되는 데서 젠더 이분법이 잘 드러난다. 그가 여장을 통해 수행하는 것은 발언권이 세진 여성들과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남성들을 동시에 비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영화들은 가부장적인 젠더 질서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안착한다. 이와 달리 <여자가 더 좋아>에서 서영춘이 표상하는 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독자적 섹슈얼리티다. 이에 대해 박선영은 “서영춘의 그로테스크한 신체는 회복되지 않은 남성성과 포기되지 않은 여성성의 기묘한 공존을 시각적으로 전시하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6) 그런데 따져보면 규철은 영숙과 혼인신고만 안 했지 부부와 다름없이 지냈던 것으로 나온다. 그는 불량배를 만났을 때 그들을 물리적으로 물리칠 완력은 없지만 기지와 헌신으로 여성들로부터 떼어놓는다. 그가 다른 남자들처럼 밖으로 나돌지 않고 술 담배도 입에 대지 않기에 영숙은 그를 믿고 좋아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남성으로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음에도 그의 취향이나 태도가 일반적으로 여성들의 것이라 하여 그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너는 남자니? 여자니?’ 라는 질문 속에서 경계의 지점은 용납될 수 없기에 그는 자신 그대로 사회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성전환을 할 수밖에 없다. 이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마지막에 제리(잭 레먼)가 가발을 벗으며 “나는 남자야. I’m a man”라고 고백하지만, 필딩이 “완벽한 사람은 없지. Nobody is perfect”라고 받는 것과 갈라지는 지점으로, 당시 한국사회가 포용할 수 있는 난센스의 한계를 보여준다. 당대에 웃음으로 봉합될 만한 수위 차원에서 결말을 생각해보면 규철이 성전환을 해야 영숙이 오해를 받지 않고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규철에게 매혹되었던 모든 인물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래서 규철의 성전환은 선택이 아니라 다른 인물의 안전과 그에 따른 관객의 안심을 위한 사회적 거세에 해당한다. 이 영화는 1983년에 더스틴 호프만이 여장 남자로 분한 영화 <투시 Tootsie>(1982)가 흥행하면서 7) ‘남자 시리즈’의 심우섭 감독 연출로 리메이크된다. 8) 이 영화에서도 서사의 전개는 유사한데 결말은 오히려 더 계몽적인 양상을 띤다. 주인공 유경진(강태기)이 아파트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젊은 부부들에게 건전한 생활을 유도하다 표창장까지 받고 여성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1960년대보다 1980년대가 민주적으로 진보했다고 여겨지나 서영춘이 보여준 난센스와 같은 경계적 특이점이 설 자리는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서영춘은 <웃으면 복이 와요>(1969~1985)가 프로야구 붐으로 돌연 폐지 9) 된 이듬해에 간암으로 타계했다. 10) 그는 한동안 잊혔다가 21세기에 대중문화 장르와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면서 비로소 ‘저질’에서 벗어나 ‘독보적인 코미디언’으로 재평가된다. <여자가 더 좋아>가 ‘말할 가치도 없는 난센스 소극’에서 벗어나, 난센스라는 요동으로 경직된 시스템에 파문을 일으키며 젠더 이분법을 일찍이 뒤흔든 영화로 재발견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재평가와 맥을 함께 한다. >> 여자가 더 좋아 고화질 VOD 보러가기 << 1) 「만화조 넌센스 소극」, 《조선일보》, 1965.7.15.; 「소극붐 수준급 이하의 넌센스들」, 《조선일보》, 1965.11.11.; 「영화 황량한 질 안고 과잉생산」, 《동아일보》, 1965.12.27. 2) 「자극적인 영화제목과 소년범죄」, 《조선일보》, 1965.8.24. 3) 「왜색조를 추방」, 《조선일보》, 1965.9.7.; 「방송음악 日色調 일소키로」 , 《동아일보》, 1965.9.11. 4) 웃음의 유형에 대해서는 박유희, 「총론: 웃음의 서사와 한국 대중문화」,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4.코미디』, 이론과실천, 2013, 22-23면. 5) 「만화조 넌센스 소극」, 《조선일보》, 1965.7.15. 6) 박선영, 『코미디 전성시대』, 소명출판, 2018, 529면. 7) 「추석 극장가 외화가 압도」, 《동아일보》, 1983.9.20. 8) 「방화에도 남성 치맛바람 강태기 여장하고 김환진과 주연」, 《경향신문》, 1983.6.15. 9) 「프로 감축 항의 MBC 코미디언들 파업」, 《조선일보》, 1985.4.25. 10) 「코미디언 서영춘씨 별세」, 《매일경제》, 1986.11.1.
이 사회의 불균형을 이장하다 “장남도 없이 (어떻게) 무덤을 파냐!” 큰아버지( 유순웅 )의 불호령에 아버지 묘 이장을 하러 고향 마을에 막 도착한 네 자매들은 연락이 되지 않은 남동생을 찾아 다시 발길을 돌린다. 그들이 찾아야 하는 장남, 그 이름이 하필 ‘승락’이다. 혜영( 장리우 ), 금옥( 이선희 ), 금희( 공민정 ), 혜연( 윤금선아 ). 승락의 위로 줄줄이 누나들이 모두 왔는데도, 승락의 승낙 없이는 이장이 불가능한 사회. 승락이 아니라 혜연이 사정상 못 왔다면 이장은 진행되었을, 이곳은 뿌리 깊은 가부장제로 여전히 갈등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딸 넷에 막내아들. 이 집은 말 그대로 아들 낳으려 계속 출산을 했을, 오남매는 구성 자체가 딱 가부장제 가족이다. 이쯤 되면 막내딸 이름이 ‘다음 아이는 아들을 얻겠다’는 염원을 담아 딸 이름은 희생되는 ‘후남’ ‘차남’ ‘필남’이 아닌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어쨌든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등 온갖 방법을 다해 찾아낸 승락이 화면에 등장하는 건 영화가 시작된 지 44분 36초 만의 일이다. 전체 러닝타임 94분 중 거의 절반이 지나서야, 카메라는 노트북 앞에 앉은 승락의 뒤통수를 필두로 그의 손가락을 훑어 간신히 그 얼굴을 드러낸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이 모든 상황에 잔뜩 열 받은 첫째 혜영이 승락이 있는 반지하 창문에 돌을 던지면서다. 여자친구 윤화( 송희준 )의 임신에 책임회피 중인 승락은 여러모로 비난받을 여지가 충분하지만, 그럼에도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는 발언권을 가진 중요 인물로 치부된다. 그러니까 그게 남성이 집안의 통솔권을 가지는 이 사회의 가부장제! 사실 큰아버지가 승낙을 데려올 것을 ‘명령’한 건 재개발로 이장을 하게 된 지금, 자신 동생의 묘를 매장 대신 화장하려 하는 조카 딸들의 결정을 번복하기 위해서다. 그는 같은 남자인 장남 만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 믿으며, 또 그런 이유로 장남인 승락에게 더 큰 권위를 부여해 주려 한다. 가령 이미 죽은 오남매의 아버지는 혜영의 말대로 ‘그 인간 죽어서까지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문제를 회피하기 급급한 승락은 ‘우리가 (언제까지) 걔 엄마야?’라는 누나 금희의 독설을 받는 대상이다. 영화는 가부장제 아래 집안의 권위를 부여받은 남자들의 치부를 거침없이 드러내는데, 그래서 이 영화의 남자들은 한편으로는 귀엽거나 사랑스럽게 그려지기도 하지만, 겉으로 볼 때 무섭거나(큰아버지), 비겁하거나(승락), 말 안 듣거나(혜영의 아들 동민) 지질(금희의 남친) 해서 여자들을 자주 괴롭힌다. 물론 아버지 묘의 이장 문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기존 사회 질서에 부합해 흘러가지 않는다.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지만, 남매는 변화하는 현재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들이며, 그래서 지금 심하게 이 사회와 부대끼는 중이다. <이장>의 여성인 네 자매는 그래서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균형을 찾아가려는 이 사회 여성들의 표본을 보는 것 같다. 첫째 혜영은 싱글맘이라는 상황으로 인사 가산점이 깎여 육아휴직 이후 퇴사를 권고받았으며, 둘째 금옥은 남편의 외도를 알고도 떳떳하게 판을 뒤집지 못하는 평범한 주부다. 두 언니의 ‘실패한’ 결혼 생활에도 셋째 금희는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철없는 남친에 갑갑한 채로 N포 세대의 곤궁은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청춘이다. 여성 인권을 외치는 막내 혜연은 학내에 자신이 애써 붙여놓은 대자보 위에 ‘너도 결국 한남의 씨에 불과한 종족이다’라는 테러성 반응에 맞서야 한다.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 단절되어 우울증을 겪는 < 82년생 김지영 >(2019)의 ‘김지영’이 이들의 사촌자매 쯤이라고 해도 어울릴 것 같다. 결국 육아휴직, 남편의 외도, 결혼 문제, 페미니즘 등 대한민국 여성이 겪는 고충의 총합이 이 자매 안에 다 보인다. 정승오 감독은 이장을 하러 오랜만에 모인 남매를 혜영의 미니밴에 탑승시킨다. ‘이장 후 받게 될 500만 원을 누가 갖게 될 것인가’의 문제가 시종 묘한 긴장감을 형성하며 남매간에 그동안 쌓여 있던 갈등을 점화시킨다. 티격태격 가족 로드무비의 원조 격인 < 미스 리틀 선샤인 >(2006)의 ‘미니밴 버전’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네 자매와 혜영의 아들인 초등학생 동민( 강민준 ), 승낙의 전 여자친구 희준도 한 차에 타고 내리고 해서, 차 안은 시종 구성원이 바뀌고 복닥복닥 거린다. 시동이 걸리고 출발을 한 이상 도로 안에서 쉬이 내리는 건 불가능하고, 앉아있는 자리에 따라 맞붙는 ‘말싸움’ ‘몸싸움’의 조합도 새롭게 재편된다. ‘제한된 상황’ ‘다양한 인물’들이 이렇게 새로운 조합으로 영화의 액션과 리듬, 코믹과 드라마를 만드는 재미들이 모여 <이장>의 미니밴을 굴러가게 만든다. <이장>의 이 오밀조밀 갈등이 폭발하는 공간 구성은 사실 정승오 감독의 주특기다. 전작인 단편 <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 >(2016)은 <이장>의 프리퀄 격인데, 입원한 엄마의 병문안을 간 딸들이 모두 엄마의 침대 위에 올라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씬은 가족의 갈등과 화해를 그리는 탁월한 장면 연출이다. 이같은 구성이 독립영화계의 ‘어벤저스급’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가 제대로 빛을 발하는 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 자신 역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라 청년 세대를 거친 남성으로서 정승오는 <이장>의 가족들이, 더 나아가 이 사회가 기울어진 관습과 제도에서 벗어나 모두가 동등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이 역시 새벽녘 오남매가 함께 걸터앉은 좁은 툇마루 씬에 말갛고 기분 좋은 장면으로 연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승낙의 전 여자친구가 승낙의 사과에 보인 일격은 영화를 보는 이들을 위해 남겨둔다. 각자의 가족 깊숙이 공기처럼 스며든 가부장제 사회는 이제 변화하고 있다. 그 관습의 이장을 제안해 주는 영화 <이장>의 질문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