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형
- 감독
- 김효정
- 제작년도
- 2004
- 출연
- 김순애, 김병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인 류(신하균)는 신장병을 앓고 있는 누이(임지은)의 수술비를 변통해야 한다. 언어소통의 불가능성은 영화 내내 류와 누이의 대화를 자막이나 내레이션으로 전달하도록 만든다. 이야기의 도입부, 한 라디오 방송에 류가 보낸 사연이 DJ의 목소리를 타고 흐른다. 카메라는 라디오를 든 류의 손, 환자복을 입은 누이의 손을 차례로 클로즈업한 뒤 이어폰 줄을 더듬으며 느리게 올라간다. 류와 누이는 옥상에서 각자의 귀에 이어폰을 하나씩 꽂고 라디오 사연을 듣는다. 마른 눈물이 흐르는 누이의 얼굴, 류의 뒤통수가 보이고, 다음 쇼트에서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 그리고 옥상의 전경이 사선 앵글의 익스트림 롱 쇼트로 제시된다. 액션이 벌어지는 공간을 총체적으로 조망해주지 않고 세부로부터 시작해 전체로 나아가는 쇼트의 위계는 일반적인 장면 구성 방식을 뒤집는다. 원경에서 전경으로 쇼트의 크기를 점진적으로 증감함으로써 공간에 대한 이해를 돕지 않고 익스트림 클로즈업에서 익스트림 롱 쇼트로 또는 그 반대 방향으로 거리를 증감하면서 장소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지연시킨다. 말보다 이미지를 통해 스토리를 기술하는 박찬욱의 시청각적 스토리텔링은 쇼트 구성의 관습을 파괴하고 하나의 언어가 가지는 의미를 두 개 이상의 맥락으로 확장하는 편집의 전략을 구사한다. < 복수는 나의 것 >은 자연스러운 쇼트의 배열이 스토리의 흐름을 매끄럽게 잇는 스타일의 표준 관행을 파괴한다. 다른 기술적 요인들보다 편집은 마음의 눈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새로운 관람의 경험으로 관객을 이끈다. 특별히 이 영화에서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소비에트 몽타주 편집 전통의 재래(再來)를 볼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에이젠슈테인이 ‘어트랙션(attraction)’이라고 부르는 몽타주의 효과는 폭력적인 결말을 향하는 캐릭터의 나선형 여정과 그것을 기술하는 편집 스타일을 통해 보증된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는 관습적인 쇼트-리버스 쇼트 체계를 찾기 어려운데 대화 장면에서 이를 대신하는 것은 카메라를 보고 말하기이다. 카메라를 보고 말하게 하는 것은 정면 클로즈업이 배우의 표정과 그것이 자아내는 인상을 가장 잘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류와 그의 여자 친구 영미(배두나)의 대화 장면에서 카메라는 정면을 향한 두 인물의 얼굴을 수직으로 찍는다. 류는 벙어리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은 영미 혼자이고 말의 내용보다 중요한 건 저들의 표정, 특별히 대사를 읊어주는 영미의 입술 모양이다. 몽타주 체계와 관련하여,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둘 이상의 상황을 나란히 배열하는 평행 편집의 활용이 잦다. 일련의 병렬 편집은 딸 유선(한보배)의 유괴 사실을 알게 된 절망에 빠진 아버지 동진과 류 사이에서 시점을 앞뒤로 이동한다. 여기서 유선의 장난감 인형은 그래픽과 주제를 연결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인형은 캐릭터를 연결하며 장면의 초점을 류에서 동진으로 옮기며 이들의 융합을 예고한다. 어느 시점에서 유선이 가지고 놀던 인형의 클로즈업 쇼트와 함께 동진의 목소리가 “아빠는 유선이를 사랑해요”라고 말하면 “유선이도 아빠를 사랑해요, 진짜”라는 유선의 목소리와 함께 끔찍하게 분장을 한 새로운 인형으로 이행한다. 인형을 둘러싼 조명은 어둡고, 눈에서는 피가 흐르며, 흥정을 위한 몸값 메모가 첨부되어 있다. 인형의 몽타주는 류와 동진을 연결하며 몸값 흥정을 기술하는 서사적 구성 요소로 작동한다. 유선, 류의 누이, 영미가 죽은 후, 류와 동진은 각자의 복수 계획에 의해 인질로 잡혀 이 나란한 이미지들의 뒤틀린 변주를 형성하게 된다. 평행 편집을 활용한 쇼트의 연속성 패턴은 장면을 하나로 모아 캐릭터 개발에 도움이 된다. 영화의 나머지 부분에도 평행 편집이 나타나며 라스트의 강력한 대결 장면에서 류와 동진이 만날 때까지 속도와 강도는 높아진다. 이처럼 해설적이기 보다 묘사적인 편집의 맥락을 따라갈 때 모든 플롯 요소를 하나의 응집력 있는 스토리로 연결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대화가 최소화되기 때문에 관객은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쇼트의 배열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창의적인 사운드 몽타주의 기능이 극대화되는 사례도 있다. 사운드 몽타주는 관객에게 충격을 주고 스토리 세계에 흩어진 위치들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동원된다. 류가 누이의 자살을 알고 울부짖는 신에서 절묘한 사운드 몽타주의 사례가 나온다. 류의 감정적 상처가 깊은 이 신은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시퀀스이다. 누이의 자살 메모와 핏물 속에 잠긴 그녀의 팔을 보고 류는 울부짖는다.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는 유선이 보는 동물 만화가 재생되고 있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세상을 잠식해가는 동안 몸값 거래가 이루어진 공원에서는 검은 비닐이 얼굴에 씌워진 채 묶여 있는 동진의 앞에서 개가 짖고 있다. 그 짐승 소리의 질감과 리듬에 맞춰 동진도 울부짖기 시작한다. 카메라의 주관적인 시점은 비명을 지르는 동진과 멀리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도시를 응시한다. 이 신에서 사운드 편집 및 청각 신호는 다른 위치의 캐릭터들을 나란한 좌표 위에서 연결하고 고도로 양식화된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전개한다. 편집 스타일에 담긴 영화적 효과를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은 동진에게 류가 죽임을 당하는 신이다. 먼저, 관객은 동진이 류를 끌고 냇가를 가로지르는 조감 쇼트를 본다. 두 번째로 물속에서 류의 발목이 보인다. 이어 동진과 류의 투 쇼트로 커팅하여 동진이 복수의 정당성을 고지한다. 탁한 물에 잠기는 동진. 카메라는 방금 절개된 류의 아킬레스건을 클로즈업 쇼트로 잇는다. 류의 소리 없는 절규나 고통받는 노동 계급의 외침을 들을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심이 낮은 시냇물에 빠져 류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진. 핏물이 얼굴에 튀었을 때 동진은 눈을 깜박일 뿐이다. 마침내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된 동진은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다. 자본가의 노동계급에 대한 가혹한 승리를 함축한 류의 죽음 신은 차가운 거리를 유지하면서 ‘복수’라는 아이러니한 주제를 달성하였다. 결국 모든 캐릭터는 복수를 찾는다. 그러나 관객은 복수심에 불타는 캐릭터 둘 다에게 공감하는지, 공감하지 않는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영화는 복수의 길을 택하면 아무도 이길 수 없고 선한 사람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복수는 나의 것>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이들의 죽음과 복수의 아이러니를 그린다. 유선을 인질로 삼으려는 류의 계획을 알게 된 누이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누이의 자살에 이어 류는 유선과 함께 죽음을 향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 결국 유선의 납치는 불필요했고, 누이를 돕기 위한 류의 노력은 연쇄적인 죽음의 원인이 된다. 류가 비극적으로 죽은 누이를 냇가 돌무더기에 안장하며 애도하는 동안 유선은 우발적으로 익사한다. 관객들은 류보다 먼저 위험을 인지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관객들은 류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 전에 상황을 인지하게 된다. 박찬욱은 이 플롯 기법을 자신의 해석적 관점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용하여 스토리와 주제를 연결하도록 촉진한다. 에이젠슈테인에 따르면, 쇼트는 텍스트의 의미를 풍요롭게 만든다. 그러나 <복수는 나의 것>에서 쇼트 간의 전환이 특정 시청각적 자료를 생략하여 관객을 오도하는 것처럼 보일 때 종종 의미는 모호해진다. 시공간을 오고가는 편집은 미지의 상태로 관객을 데리고 가서 인상과 느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캐릭터가 생각하는 것을 해석하도록 한다. 스토리의 더 큰 세계로 이끌려가기 위해 이 견인의 과정은 진정한 의미의 어트랙션을 시전하고 있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이 글을 쓰기 얼마 전 나는 하나의 모순된 세계를 다룬 단편영화들을 떠올렸다. 그 영화들은 한 인물의 양면적인 모습, 한 작품 안에서 기묘하게 공존하는 이질적인 두 사건, 하나의 시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차이와 반복 등과 같이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구성하는 모순적인 두 개의 상태를 다루었다. 그것들은 흡사 세계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을 통해서 삶에 대한 앎과 이해, 오해와 착각, 꿈과 몽상 등에 대해서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의 세계는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지면을 활용하여 내가 한동안 매료되었던 그 작품들의 친숙함과 낯섦에 관해 쓰고자 한다. 김태양 감독의 < 달팽이 >는 서울 종로 일대를 배회하는 한 남자가 같은 날 같은 공간에서 두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전반부의 배경은 어느 화창한 여름날 오후이며, 남자는 을지로 3가 근방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어색한 인사, 공허한 말들, 그리고 엇갈린 기억을 통해 이들이 과거에 연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편의상 전반부에 등장하는 그 여인을 과거의 여자라고 해두자. 후반부는 전반부와 같은 날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시간대는 저녁으로 그리고 날씨는 소나기가 내린 뒤 그친다는 것으로 바뀐다. 남자는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던 한 여자를 만나 세운상가로 이동한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친밀한 말투, 신체적 접촉, 서로 일치하는 기억을 통해서 두 사람이 현재 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의상 후반부에 등장하는 그 여인을 현재의 여자라고 해두자. 혹자에게 이 영화는 익숙한 장르적 형식을 가진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나의 작품은 저마다의 영화사를 품고 있다는 질 들뢰즈의 말처럼, 도시를 배경으로 제작된 일련의 영화들이 하나의 느슨한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탓이리라. 초창기 무성영화 시절의 액츄얼리티 필름, 1920년대 독일의 거리영화, 1950년대 전후 유럽에서 등장한 여러 새로운 물결들에 속하는 영화들, 할리우드의 코미디 영화, 필름 누아르, 로드무비 등이 도시를 시각적인 인상이 형성되고 우연적인 사건과 만남이 발생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그런 점에서, <달팽이>가 서울 종로를 작품의 무대이자 배경으로 끌어들이고, 주요 인물들이 계속해서 도시를 걷고, 주인공 남자가 도시에서 우연한 만남을 갖는다는 것 자체는 모종의 영화적 관습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이 영화에 관습만 있고 독창성이 없다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이 영화는 서울의 종로를 오후와 저녁, 옛것과 새것, 소멸과 생성 등으로 구분되는 것들 사이의 기묘한 대립, 공존, 연속을 통해 그린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 전체가 고유의 리듬과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 이 영화의 구성적인 단조로움은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상쇄된다. 이 영화는 전후반을 데칼코마니처럼 겹쳐 놓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주로 물리적인 요소들과 관련이 있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을지로 3가에서 우연히 만나 청계천로를 따라 종로 3가로 이동하며, 후반부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을지로 3가에서 만나 청계천로를 따라 종로 3가를 거쳐 종로 5가의 세운상가로 이동한다. 전후반을 이끌어가는 남자 주인공의 존재, 영화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정 장소와 건물, 그리고 을지로3가에서 종로3가로 이어지는 동선의 일치 등을 통해 이 영화는 반복의 질서를 획득한다. 그 반복은 관객인 우리가 틀린 그림 찾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전반부에 등장하는 과거의 여자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현재의 여자로 대체되고, 화창한 날씨는 소나기가 내리는 날씨로 바뀌고, 관객의 시선을 기준으로 주로 화면 좌측 편에 위치하던 남자는 우측 편에 위치하는 것이 그러하다. 그 일련의 변화는 영화 속 현실에 존재하는 물질적 실재가 지속과 생성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그것은 이 작품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변해가는 도시를 통해서 작품 전체에 차이와 반복의 질서를 구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차이와 반복은 공간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시간적이거나 정신적인 것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와 반복 또한 중요하게 활용한다. 후자의 차이와 반복은 주로 기억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남자와 과거의 여자는 지나간 일들에 관해 담소를 나눈다. 이 대화에서 남자는 오래전 자신이 과거의 여자에게 들려주었던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두 사람이 함께 공유한 순간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의 여자는 과거의 시간 속에 묻혀 있던 여러 기억을 현재로 가져오기 위해 애쓰지만, 정작 그것들은 남자의 기억 속에서 이미 지워져 있거나 불투명한 상태였다. 이 일련의 대화에서 남자와 과거의 여자가 어긋난 기억 그리고 어긋난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후반부에 등장하는 남자와 현재의 여자는 두 사람 사이에 공통의 기억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걷던 중 현재의 여자는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그 이야기를 남자가 알려주었다고 말한다. 남자는 현재의 여자에게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여자는 자기가 기억하고 있으니 괜찮다면서, 어차피 모든 것을 기억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남자와 현재의 여자가 같은 방향으로 걸으면서 같은 시간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전반부의 어긋난 기억과 시간은 후반부의 공유되는 기억과 시간으로 바뀐 것이다. 비유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 영화가 강조하는 시간성은 달팽이의 형상을 하고 있다. 영화 전반부에서 과거의 여자와 함께 길을 걷던 남자는 혼잣말처럼 “변할 게 뭐가 있나, 그냥 시간만 가는 거지”라고 말한다. 남자는 시간의 흐름이 제자리걸음과 같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남자의 생각은 영화가 끝나갈 즈음에 바뀐다. 남자는 현재의 여자와 함께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언제나 제자리인 줄 알았던 시간의 흐름이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현재의 여자가 버스 창문에 나선형 형태의 원을 그리는데, 그것은 달팽이의 껍데기를 보면서 떠올릴 수 있는 나선형과 닮았다. 그것은 분명 차이와 반복 속에서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장면을 보면서 누군가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 현기증 >에서 주인공 남녀가 삼나무 나이테를 바라보던 것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두 작품 모두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를 따라 직선으로 뻗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것을 품으면서 원을 그리듯이 나아가는 것과 같이 묘사된다. <현기증>에서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판이 삼나무였다면, <달팽이>에서 그런 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도시 그 자체이다. 이 지점에서 <달팽이>가 도시를 작품의 무대 혹은 배경으로 끌고 온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어쩌면 이 영화의 연출자는 우리가 도시라는 삶의 공간 속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어제와 오늘, 만남과 이별, 생성과 소멸을 영화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영화적 시간에 대한 성찰로 연장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도시가 그러하듯, 영화는 지속과 생성으로 이루어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한다. 내게 다시금 비유와 함께 압축을 허락한다면, 나는 이 영화를 달팽이의 시간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으며, 영화는 달팽이의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표현하는 예술인 것이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두 번째 이야기) 두 번째 상황. < 일대종사 >는 < 장군의 아들 >과 정확하게 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쪽이 상승하는 동안 다른 한쪽은 내내 하강한다. <일대종사>는 모두가 추락하는 이야기이다. 그들 모두가 처음 시작했을 때 절정에 올라있었다.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엽문은 간단하게 말한다.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 사부가 얼마나 대단한지, 문파가 잘 났는지, 그런 건 떠들 거 없지, 쿵후, 그건 둘 중 하나지, 수평과 수직, 지면 눕고, 세로로 남는 자, 말할 자격이 있는 법이지, 내 말이 맞지 않나?” 모두가 수직으로 서 있었다. 그런 다음 한 명씩 가로눕는다. 물론 왕가위는 단순하게 엽문의 대결로 이어가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다른 데 있다. <일대종사>는 어떤 의미에서 < 멀홀랜드 드라이브 >, 혹은 < 열대병 >처럼 둘로 잘린 영화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중간에 중단되고 (1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뛴 다음) 그 자리에 머물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플래시백의 형식으로) 돌아본다. 물론 이 시간은 지나가 버렸고 이미 펼쳐져 버린 시간은 다시 그걸 되감싸 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수직으로 진행된 시간. 수평으로 멈춰 선 시간. 이 시간을 감히 누가 이길 수 있을까. 두 개의 힘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걸 익혔을 때 이미 때는 늦었다. 자기가 속해있던 고유한 세계의 법칙이 바뀌었고, 그 안에서 그래도 살아가는 자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간다. 다시 한 번 하는 말. 궁가 64수 노원괘인의 필살기,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영화에서 돌아본다는 말. 플래시백. <일대종사>의 필살기. 회상. 그걸 배운 자는 궁이 뿐이다. 그래서 엽문과 궁이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대결은 궁이의 플래시백으로 펼쳐진다. 엽문과 궁이의 아버지 궁보산이 생각으로 대결했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이걸 엽문은 이번에는 그저 지리멸렬하게 받아칠 수 있을 뿐이다. 엽문은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다. 하지만 이 필살기의 뼈아픈 결점을 깨닫는다. 그는 회한에 차서 말한다. “궁이는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만 졌다” 이 필살기의 결정적 약점은 누구에게도 이길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의 패배라는 점이다. 나는 두 개의 장면, 궁이와 엽문의 금루에서의 대결과, 궁이와 엽문의 플래시백의 대결 안에서의 궁이와 마삼의 대결을 뒤에 다시 다룰 것이다. 사망유희 死亡遊戱 나는 재빨리 금루(金樓)로 되돌아오고 싶다. 왕가위는 여기서 (아마도) 이소룡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 사망유희 >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우리는 금루가 얼마나 높은 건물인지, 이 건물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단 한 쇼트도 금루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금루라는 건물 자체가 정말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말하자면 이 장면 전체가 일종의 실내극이다. 이소룡은 <사망유희>에서 오직 단 하나의 시퀀스를 찍기 위해서 이 영화에 매달렸다. 그건 물론 사망의 탑에 오르는 이소룡과 그와 겨루기 위해서 매 층마다 기다리고 있는 무술의 달인들과의 대결이다. 이소룡의 때 이른 죽음은 <사망유희>를 미처 완성시키지 못했다. 왕가위는 이소룡의 스승 엽문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아마도 조건반사처럼 이 에피소드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내게 금루의 시퀀스 전체가 거꾸로 세운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인다. 스승이 제자에게 보내는 위로. 이소룡의 영화를 본 세대가 보내는 답례. 엽문은 남방 무술계를 대표하여 인사를 드리기 위해 금루에 있는 북방 무술계의 대가인 궁보산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래층부터 차례로 올라와야 한다. 그리고 층마다 엽문을 맞이할 고수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 시퀀스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라는 아쉬움을 안고 있다. 여기서는 왕가위와 보여준 대로 나도 순서대로 쫓아 올라갈 생각이다. 시녀들 여기서 장면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준 사람은 벨라스케스를 읽은 푸코이다. 그는 <말과 사물>의 첫 장의 시작 첫 문장에서 화가는 자기의 캔버스로부터 조금 물러 서 있다, 라고 쓴 다음 바로 가까이 다가선다. 물론 푸코가 목표로 한 것은 단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읽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상호가시성이라는 방법을 배웠다. 내게 약간의 인용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푸코는...) 상호가시성이라는 이 가느다란 선은 불확실한 것과 교환과 전위 같은 것들로 구성된 복잡한 조직을 전체적으로 포괄한다. 화가는 우리가 우연히 그의 주제와 동일한 장소를 차지할 때에만 그저 그의 눈을 우리에게 돌릴 수 있다. 감상자인 우리는 하나의 부가적인 요소이다. (잠시 동안 이 그림을 보아주기 바란다.) 설령 우리가 화가의 시선과 마주쳤다 해도 그 시선은 우리를 그냥 지나쳐 가버릴 수도 있으며 우리에 앞서 거기에 항상 존재했던 것, 즉 모델 그 자체가 우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 그림 밖에서 그에게 직면해 있는 허공으로 향한 화가의 시선은 감상자들이 존재하는 만큼 많은 수의 모델을 용인하고 있다. 바로 이 중립적인 장소에서 응시자와 피 응시자는 끊임없는 교환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 여기서 푸코는 지나쳐가듯이 맞은편의 광경이라는 말을 꺼내 든다. 장 삐에르 우다르는 여기서 봉합(Suture)이라는 개념을 (라캉의 수사를 빌려) 발전시켰다. 나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싶다. 이때 핵심은 시선이 아니라 광경의 내밀성이다. 우리는 개념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종종 의도를 지나쳐서 우리 자신이 느끼는 기쁨의 내밀성 안으로 다가간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거리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그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선 다음 무엇이 나를 멈춰 세웠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나는 맞은편의 광경을 보여주는 것 안에 있는 본 것의 발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발견이라고 쓰는 대신 의도적으로 발명이라고 썼다. 물론 이것은 매우 불안정한 설명이다. 나는 여기서 거기 있는 것 이상으로 그 무언가를 덧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의 방점, 장면의 디테일에 이끌릴 것이다. 궁보산 궁이 면의 배경. 이 장면에는 두 개의 시선이 엽문을 바라보고 있다. 한 명은 궁보산이고, 다른 한 명은 궁이이다. 혹은 이 자리는 궁이에게 엽문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련된 자리처럼 보인다. 비 오는 날 궁보산은 엽문이 그에게 도전을 해온 자와 그의 무리들을 수평으로 눕히는 것을 보았다. 이미 궁보산은 엽문이 자기를 눕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자신이 물러날 때가 온 것이다. 금루에 궁이를 데려온 궁보산이 말한다. “세상사 가운덴 안 보면 사라지는 것들이 있지. 봐둬도 나쁘진 않아. 어떤 이는 등불이 어떤 이는 그림자가 되지. 다 시류에 따르는 법. 널 남방에 불러 처음과 끝을 보여주고 싶었다. 잘 봐둬라, 아비가 어떻게 물러나는지” 이제부터 시작될 금루에서의 엽문의 대결 장면 전체가 궁이의 조심스러운 클로즈업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 궁보산의 말을 듣고 궁이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은 다음 조심스럽게, 약간 망설이는 듯한 동작으로, 하지만 마치 이끌리듯이 살짝 고개를 돌리면서 실내 창문 바깥을 내다본다. S#_1 S#_2 S#_3 S#_4 S#_5 하지만 궁이가 시선을 돌린 것은 아버지의 말에 이끌려 돌린 것이지 엽문이 거기 있어서 그곳으로 시선이 향한 것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궁이가 시선을 돌리자 엽문이 도착한다. 마치 궁이의 시선이 엽문을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엽문이 거기에 온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 것일까. 영화 안에서 누가 누구 앞에 있는 것일까. 이 영화가 엽문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자꾸만 궁이가 다가오면 영화의 중심은 엽문에서 궁이에게로 옮겨가는 것만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 S#_1) 금루로 들어서는 엽문. 클로즈업. 이때 엽문을 본다기보다는 반사하는 엽문을 본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거울에 비쳐 보이거나, 혹은 유리에 굴곡을 일으키며 반사하는 엽문. 이때 이것이 궁이의 시선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말하자면 시선의 일방적인 통로. 엽문은 이 시선을 아직 알지 못한다. 금루에 들어설 때 엽문은 그를 반기지 않는 북방 무술계 인사들에 둘러싸인다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시선에 포위된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엽문은 반사를 지나쳐서 금루 안에 들어선다. 그런 다음 멈춰 서는 엽문의 클로즈업은 이상할 정도로 그 앞에서 본 궁보산과 대화하다가 문득 어딘가를 초점 잃은 듯이 보던 궁이의 마지막 쇼트에 대해서 마주 보는 것 같은(reverse_shot) 거리와 크기로 맞은 편의 광경을 채워 넣는다. < 일대종사 >는 여기서 빈 것을 저기서 채워 넣는 다소 이상한 방식의 보충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교환은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마치 쇼트 사이의 행동 프로그램이 작동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은밀하게 하지만 분명히 상호 가시성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걸 좀 더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것은 마치 호랑이 굴에 들어온 가여운 토끼를 반기기라도 하듯이 엽문을 반기면서 두 손을 모으며 “엽(葉)사부, 강호에는 인물이 많지, 오늘 두각을 나타내는 날이라 금루 사람들과 축하해주러 왔네”라고 인사하는 첫 번째 환대의 인사를 하는 쇼트에서 인물은 프레임 바깥에서, 같은 말이지만, 엽문의 시선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다. ( S#_2) 혹은 두 개의 쇼트는 비스듬히 마주한다. 환대가 없는 환대의 자리. 그때 누가 엽문을 환대하고 있는가. 엽문의 표정의 클로즈업. ( S#_3) “고맙습니다. 아저씨” 마치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은 맞은편의 인사. ( S#_4) “별말을, 어려워말고 들어가세” 그제 서야 엽문은 주변을 돌아본다. ( S#_5) 그때 이 시선은 올려다보지 않고 여전히 수평으로 돌아본다. 이 시퀀스는 차례로 엽문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상승의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퀀스에서 왕가위는 단 한 번도 엽문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쇼트를 찍지 않았다. 종합적인 장면과 가시적인 쇼트 사이의 비대칭적 교환. 그는 다음 층으로 이동할 뿐이지 올라가지 않는다. 엽문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S#_6 S#_7 S#_8 S#_9 S#_10 S#_11 하지만 엽문의 시선은 덧없는 것이 된다. 그는 수평으로 돌아보았지만 다음 쇼트는 누군가 위에서 사선으로 계단을 걸어서 내려온다. 우리가 금루에 들어서서 처음 듣는 미메시스의 음악. ( S#_6) 수평의 시선. 사선의 동선. 위에서 아래로, 명백히 지금 막 금루에 들어선 맨 아래층의 엽문을 만나기 위해 내려오는 발걸음.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하고 치파오 의상을 입은 것으로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계단 안쪽에서 찍었고 그녀는 카메라 앞을 순간적으로 지나간다. 이때 여자가 빠져나가자 아래층에 머물던 엽문은 등을 돌리고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돌아보면서 올려다본다. 거의 반사적인 신경. 자기에게 다가오는 공격적인 힘을 느끼는 제스처. 위에서 아래로, 그런 다음 아래서 위로, 동선과 시선의 교차. 이 선을 유심히 보아주기 바란다. 두 개의 선 사이를 마치 파고들듯이 다음 쇼트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온다. ( S#_7) 부채질을 하며 들어온 두 번째 환대의 인물. 치렁치렁 늘어진 구슬커튼 발. 나선형을 그리며 내려가고, 사선으로 아래서 위로 올려다본 다음, 수평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갈 때 금루라는 건물의 미로와도 같은 선이 거미줄처럼 이들을 칭칭 동여매기 시작한다. 얼굴을 드러낸 남자는 거만하게 부채질을 하면서 말한다. ( S#_8) “우리도 기루 아가씨들을 대표해서 축하해주러 왔어요” 이 말에 엽문은 사내를 바라보는 대신 돌아보면서 올려다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엽문의 돌아보고 올려다보는(double_action) 제스처를 연속된 두 개의 쇼트로 나누었다. ( S#_9, S#_10) 물론 이건 쇼트의 낭비이다. 그렇다면 오로지 리듬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여기서 시선의 분산을 느낀다. 왜 분산이 필요해진 것일까. 사방의 시선. 모두가 엽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모두를 찍는 대신 엽문의 시선을 보여주는 쪽이 반대로 경제적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쇼트의 부등가교환은 종종 간접적 장면의 구성이라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왕가위는 이 문제를 때로 우회적으로 해결한다. 이를테면 < 2046 >의 거의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시네마스코프 안의 장면들의 모델들 사이의 교환. 그렇다면 엽문은 무엇을 보기 위해서 올려다본 것일까. ( S#_11) 내려다보는 기루 아가씨들, 정확하게는 올려다보는 엽문. 아름다운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우아한 곡선. 하지만 이 시선은 엽문의 위치가 아니다. 여기서 카메라는 누구의 시선인지 다소 애매하다. 왜냐하면 카메라가 살짝 상승하기 때문이다. 엽문은 그 자리에 서 있고 카메라는 이동한다. 물론 그걸 시선을 올려다보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는 있다. 엽문은 사내의 말에 대답하듯이 말한다. “기세가 대단한 걸” 하지만 이 대답은 화면 바깥에서 들린다. (voice_out_of_frame) S#_12 S#_13 S#_14 S#_15 이때 쇼트는 다시 앞으로 돌아간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정체불명의 여자는 아직도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거의 무한정으로 이어진 계단. ( S#_12) 이 신발을 따라오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 겉으로 보기에는 비단결처럼 보이는 이 신발은 마치 쇠로 만든 것처럼 무겁고 둔탁한 울림을 낸다. 그 계단을 따라 이어져 내려올 것 같은 그 신발이 두 걸음을 걸은 다음 갑자기 ( S#_13) 계단 위에서 뛰어내린다. 첫 번째 대결의 상대. 팔괘장의 달인 삼저. 이때 그녀의 낙하는 나선형으로 내려온다. 이 나선형의 동선을 기억할 것. 팔괘의 동작. 삼저의 액션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선형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왕가위는 액션의 인물들에게 선을 부여한 다음 그 선을 따라 다른 선과 다시 이어간다. 그 선이 신체를 이끌고 몸에 붙어있는 손과 발이 법칙에 따라 점에서 시작하여 활동을 시작하는 곡선과 직선으로 이어간다. 쇼트는 그걸 어떻게 이어 붙이고 떼어 낼 것인가의 문제이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긴장. 이들은 서로 다른 법칙의 세계를 동일한 공간 안으로 끌고 들어온 다음 같은 규칙의 경기장에서 수평과 수직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때 계단 위에서 아래로 낙하하는 삼저를 계단 아래서 엽문의 시선으로 올려다 본 다음 ( S#_14)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며 하강하는 삼저를 바라본다. (double_action) 하강, 혹은 낙하. 엽문의 시선과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기루 아가씨들의 시선의 교차. 바닥에 착지하는 삼저의 발, 아니 신발. ( S#_15) 이 장면은 신발의 클로즈업이 아니라 신발이 내려앉는 소리의 클로즈업이다. 이미 우리는 계단에서 이 신발의 무거운 소리를 들었다. 엽문 앞에 뛰어내렸을 때 이 신발은 사뿐하게 내려앉는 대신 무언가 위협적인 소리를 낸다. 이 신발은 그녀의 무기일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녀의 경공술이 아니라 신발이 매우 무거운 것, 아니 차라리 쇠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가벼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소리가 아니다. 한 가지 더.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일종의 중력감이다. 중력을 본다는 문제. 비가시성의 가시성. 이 무거운 신발이 어떤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여덟팔(八)자 걸음으로 옮겨갈 때 그 보폭의 움직임이 그녀의 무술의 일부이며 이제 곧 활동하게 될 팔괘장의 기본 동작임을 알려준다. 신중하지만 자신 있는 걸음. 카메라는 그녀의 발길을 따라 미끄러지듯이 뒤로 물러난다. 마치 이 모든 움직임은 발과 손, 팔과 몸의 안무에 종속된 것처럼 이끌린다. 때로 자석처럼 따라가고 있으며, 때로 마치 너무 빨라서 놓쳤다는 듯이 순식간에 손과 발, 팔과 몸이 빠져나가버리기도 한다. 왕가위의 표현을 빌리면 이 모든 것이 타이밍이다. S#_16 S#_17 S#_18 첫 번째 대결의 시작. 동선이 누구에서 시작하는가, 라는 문제. 삼저가 자세를 먼저 취하는 것을 ( S#_16) 정면으로 바라볼 때 부채를 든 사내가 말한다. 화면 바깥의 목소리. “삼저는 공연단 잡인 중 최고야” (voice_out_of_frame). 차라리 이 목소리는 해설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엽문은 지금 최고 중의 한 명과 마주해야 한다. 공격이 시작될 때는 한쪽이 다른 한쪽의 프레임의 공간 안으로 침입해야만 한다. 액션은 상대를 바라보는 장면(single_shot)과 두 사람이 대결하는 장면(two_shot)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교환 사이의 선택이다. 이때 누가 그 프레임의 주인인가. 누가 그 영역을 침범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점유할 것인가. 거기서 어떻게 나올 것인가, 혹은 쫓겨나는가, 그런 다음 어떻게 다시 들어갈 것인가, 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프레임은 균질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 속에서 동선은 새로운 선을 긋고 그 안에서 새로운 운동들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프레임 그 자체의 힘이 지속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액션은 시간 그 자체이자 힘의 형태이며 선의 운동이다. 우리는 이 형상을 언제나 지속 안에서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삼저의 제스처를 반복해서 보면서(double_action) 재빨리 정반대의 뒷모습을 보여줄 때 비로소 삼저와 엽문은 한 쇼트 안에(two_shot) 교집합을 이루게 된다. ( S#_17) 두 개의 다이어그램을 하나로 합쳐놓을 때 거기서 생겨나는 긴장. 그런데 엽문은 정반대로 그저 뒷짐을 지고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다시 한 번 남자의 목소리. “팔괘장을 좀 하지” 그때 목소리를 배경으로 하여 삼저의 신중하고 날렵하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엽문에게 다가가는 몸동작을 보는 우리는 “...좀 하지”라는 말이 엽문을 업신여기는 경고임을 알아차린다. 거기에 사내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형님이 한 수 알려줘” ( S#_18) 이때 사내는 왼쪽에 서서 오른쪽으로 엽문을 보고 있다. 이 장면은 앞선 장면( S#_8)의 연장이 아니라 그보다 하나 더 앞의 쇼트( S#_7)의 연장이다. 왜 이 장면은 정면으로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 되면 거기서 리듬은 멈출 것이다. 멈춘다는 문제와 빠져나간다는 문제. 마치 시선의 운동은 굴곡을 만들듯이 거기서 우리의 시선을 이끌고 정면으로 들어와서 오른쪽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빠져나간다. S#_19 S#_20 S#_21 S#_22 비로소 삼저를 맞이하는 엽문. ( S#_ 19) 아래서 위로 수직으로 카메라가 살짝 올라갈 때 엽문은 45도로 서 있다. 대화의 구도. 무술의 언어. 대결의 대화. 말하자면 엽문은 이 남자를 보는 게 아니라 삼저를 보고 있는 중이다. 그때 예를 갖추는 것은 삼저만이 아니라 카메라도 함께 예를 다한다. 엽문과 같은 방법으로 카메라가 아래서 위로 올라가면 삼저는 주먹을 손바닥에 가지런히 모아 인사를 하면서 자세를 잡는다. “그럼” ( S#_20) 그러자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만 같은 엽문의 손의 클로즈업. ( S#_21) 그 손은 방어나 공격의 자세를 취한다기보다는 삼저의 말에 대해서 허락의 제스처를 보여준다. 당신의 도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말하자면 대결의 예. 그런 다음 엽문의 얼굴, ( S#_22) 만면에 지은 미소. “그럼”. 사실 이건 중복 쇼트이다. < 일대종사 >에는 액션이 아니라 (그리고 물론 그럴 뿐만 아니라) 제스처의 중복 쇼트를 계속해서 볼 수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중복 쇼트가 하는 역할을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때 중복은 방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시선을 붙들어 매 둔 다음 거기서 우리들의 시선의 경로를 동요시키려는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다. 그때 장면은 쇼트의 중복에 의해서 종종 치명적인 간극이 생길 수도 있다. 왜 다시 이것인가. 갑자기 시선은 분해당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혹은 진부하게도 강요받은 인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중복이 이미지를 영화적인 순간에로 이끈다는 사실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진행을 잠시 뒤로 돌려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왕가위는 의도적으로 허락의 제스처를 말의 허락과 떼어내서 그 사이에 간극을 만들어냈다. 왜 그럴 필요가 생겨난 것일까. 쇼트의 진행은 과정의 디테일이다. 이때 중복은 재현이나 서사의 과정이 아니라 지각의 과정이다. 이것은 하나의 행동을 둘로 나눈 것이 아니라 보고 다시 본 것이다. 그때 하나가 객관적인 쇼트라면 이어지는 쇼트는 객관적인 앞의 쇼트에 대한 주관적인 쇼트의 역할이라는 착시의 지각을 불러일으킨다. 왜 여기서 주관적인 쇼트가 필요해진 것일까. 엽문의 미소를 다시 바라보기 바란다. 왕가위는 이 대결에서 액션이 아니라 엽문의 인격을 찍기 원한다. 비가시적인 대상. 그가 취하는 예. 그가 대하는 태도. 다가갈 때와 물러서야 하는 순간의 결정. 이 대결의 마지막 상대가 북방 무술의 최고의 자리에 있으며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대가 궁보산이며, 그와의 대결이 손과 발이 아니라 생각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소는 하나의 기호이자 동시에 신호이다. 그것이 어쩌면 배치 전체를 무너트릴 지도 모른다. 왕가위는 그걸 무릅쓰고 그걸 한다. 두 개의 예술적 결정, 그것. S#_23 S#_24 S#_25 S#_26 S#_27 삼저는 허락을 받자마자 바로 엽문의 프레임 안으로 쳐들어오면서 엽문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 S#_23) 자기의 영토를 침범당한 엽문. 삼저가 밀고 들어올 때 카메라는 삼저를 올려다보면서(low_angle)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다가 멈추고 앞으로 나서자 재빨리 뒤로 물러난다. 마치 자석처럼 따라붙는 카메라. 몹시 가까이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짧은 초점 거리의 렌즈를 사용한 이 촬영은 삼저의 동선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카메라와의 사이의 약속에서 나온 것이다. 마치 다가와도 상관없어요, 전 당신의 무술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럴 뿐만 아니라 당신의 동선 이외의 배경을 모두 지워버릴 거예요, 라는 듯한 거리. 삼저는 엽문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팔괘장의 지식을 일러준다. “팔괘장은 검술을 본땄지” 그러면서 자세를 취하고 한 손을 내밀면서 “단환장은 일검”, 다시 두 손을 모아서 “쌍환장은 쌍검”이라고 말한 다음 한 바퀴 도는 자세를 취하면서 ( S#_24) 그 발이 회전을 하면서(double_action) “여덟 팔(八)자 보법에” ( S#_25) 이어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삼저를 보여주면 그녀가 자세를 취하면서 자신감 넘치는 미소 짓는 얼굴로 덧붙인다. “64개의 변화가 있고”. 이때 엽문의 쇼트는 그녀의 대사 중간을 잘라 들어간 것이다. ( S#_26) 화면 가득한 클로즈업의 미소. 난 준비가 끝났어요, 라는 대답의 표정. 어쩌면 이미 삼저의 약점을 본 것일까. 무언가 이 신비로운 미소는 우리들로 하여금 소설을 쓰고 싶은 유혹을 한다. 물론 이것은 중복 쇼트가 가져온 주관적인 효과가 지금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 순간적인 미소를 본 것일까. 삼저는 한쪽 손을 올리고 다른 손을 내린 다음 웃는 얼굴이 갑자기 바뀌면서 “기습에 유리하지”라고 덧붙인 다음 엽문에게 재빨리 첫수를 내지른다. ( S#_27) 물론 기습에 유리하다고 말한 다음 하는 공격은 이미 기습이 아니다. 말하자면 기습의 예. S#_28 S#_29_A_1 S#_30 S#_31 S#_32 S#_33 S#_34_A_2 대결의 시작. 삼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프레임 인 하면서 대결이 시작된다. 엽문은 그 삼저를 맞는다. ( S#_28) 이때 삼저가 엽문의 공간, 엽문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영화의 규칙은 무협영화가 아니라 무술영화이다. 손과 발이 닿은 거리가 자기의 영토이다. 그 안으로 들어올 때 서로의 무술이 지닌 규칙들이 대결의 구도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이때 대결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엽문과 삼저의 대결이지만 다른 하나는 엽문의 무술과 삼저의 무술, 영춘권과 팔괘장의 술(術)이 각자의 규칙에 따라 활동하면서 만들어내는 선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때 두 개의 선이 부딪치고 때로 엉켜들고 하나가 다른 하나는 끊으려 할 때 다른 하나는 그것을 이을 것이며 다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묶으려 할 때 그것을 풀어헤쳐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동선. 영화는 그 선을 이어가면서 따라갈 것이다. 왕가위는 승패를 따라가지 않는다. 물론 그 결과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장르의 운명을 알고 있다. 만일 여기서 엽문이 패배한다면 이야기는 어떤 수를 써도 더 이상 진행하기 힘들 것이다. 바보들이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왕가위는 그들을 버려두고 쇼트를 진행한다. 여기서 무술의 동선들은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엽문과 삼저는 그 규칙이 활동하는 선의 양태이다. 그때 쇼트는 선의 집합이자 운동의 선이다. 거기서 무엇이 중심에 놓여있는가. 몸이 바로 거기에 있다. 살과 뼈, 신경조직과 피부로 이루어진 하나의 무게. 무술은 결국 몸을 다루는 기술이다. 몸과 몸의 만남. 영화는 몸을 바라보고, 몸에 다가갔다가 떨어져 나가고, 그런 다음 몸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그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다이어그램과 블록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때 마치 엽문과 삼저의 대결 자체가 두 개의 다이어그램의 교환처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다음 쇼트는 천장으로 올라간 다음 수직으로 내려다본다. 두 개의 점. 나는 이 장면을 먼저 A_1 이라고 부르겠다. ( S#_29_A_1) 우리는 이 구도를 이미 < 장군의 아들 >에서도 보았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이 쇼트를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다. 그건 대역을 촬영하기 위한 속임수에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다. 하지만 대역 촬영을 위해서라면 이것 말고도 수많은 방법이 있다. 그리고 < 일대종사 >에서 이 장면은 대역이 아니다. 우선 성립이라는 문제. 이 쇼트는 누가 보는 것인가. 설명을 하려면 난간에 서 있는 기루의 아가씨들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이 대결이 끝날 때까지 기루의 아가씨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reverse-shot) 시선의 교차점. 천장에서 내려다보는 이 쇼트는 앞의 쇼트를( S#_28) 그대로 위로 올린 다음 90도로 내려다본 것이다. 그래서 삼저가 왼쪽에 있고 엽문이 오른쪽에 있다. 그런 다음 다시 내려온 카메라는 재빨리 엽문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 S#_30) 방어하는 엽문. 무엇을? 자기의 공간, 자기의 프레임. 그때 이 공간 안으로, 마치 프레임을 찢듯이, 삼저의 주먹이 왼쪽에서 들어오고 이것을 막는다. 천장에서 엽문의 곁 가까이 다가온 장면 바로 다음 순간 ( S#_31) 갑자기 상상선을 뒤집어서 엽문과 삼저를 배치했다. 그냥 간단하게 그 둘의 위치가 바뀌었다. 왼쪽에 놓인 엽문. 오른쪽에 있는 삼저. 이때 위로 올라간 다음 카메라가 반대 방향으로 내려간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바로 앞 장면( S#_30)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장면은 점프 컷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동선이 엉켰다는 느낌도 없다. 물론 너무 짧아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핵심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때 엽문은 반대로 마치 유리 사이에 비춰 보이면서 거울에 반사되어 보는 것 같다. 이게 거울인지 유리인지는 너무 순간적이어서 분명치 않다. 하지만 유리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사의 구도 바깥에 있는 삼저는 성립되지 않는다. 액션은 멈추지 않았고 동선은 상상선을 넘어서서 끊기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 더 이상한 것은 그런 다음 재빨리 다시 원래의 상상선 반대편으로 넘어와서 ( S#_32) 삼저의 발에서 거슬러 올라가서 오른쪽에 있는 엽문을 공격한다. 말하자면 다시 한 번 뒤집은 것이다. 나는 내 감각을 믿고 싶다. 31번째 쇼트는 인서트가 아니다. 세 개의 쇼트는 정확하게 액션의 동선이 일치한다. 만일 이 쇼트가 없다 할지라도 두 개의 쇼트는 연결하는데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럴 필요가 생긴 것일까. 나는 두 개의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하나는 장소의 환기이다. 왕가위는 우리들이 단지 동선을 쫓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을 얻는가. 이 장면 전체가 하나의 실내극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장소에서 영화를 진행하는 것이 불편하기라도 한 것처럼 상상선이 문제를 일으킬 때 우리들은 문득 장소를 보게 된다. 다른 하나. 기이하게도 이 쇼트는 동선을 쫓아가다가 마치 상황을 물끄러미 쳐다보듯이 빠져나갔다는 인상을 준다. (establishing_shot) 이때 이 쇼트가 굴곡진 유리를 걸었다는 점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이 쇼트는 궁이의 시점 쇼트라고 말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대결 바깥에 있는 그녀. 비밀의 복도에서 훔쳐보는 시선, 마치 쌓아 올라간 블록 중의 하나가 갑자기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만 같은 쇼트. 돌아온 위치의 쇼트는 재빨리 삼저와 엽문의 대결을 이어받는다. ( S#_33) 같은 크기. 같은 각도. 이어지는 액션. 재빠른 데쿠파주. 순간적인 투 쇼트. 이때 이 쇼트를 받는 것은 재빨리 다시 천장에 올라간 A_2이다. ( S#_34_A_2) 천장에 올라갈 때마다 마치 정확하게 다시 상상선을 복기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왼쪽에 삼저, 오른쪽에 엽문이 있다. S#_35 S#_36_A_3 S#_37 S#_38 S#_39 S#_40 S#_41 S#_42 S#_43 하지만 왕가위가 쇼트 진행을 패턴으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섬광 같은 순간. 삼저가 뒤에 있고 엽문이 앞에 있는데 삼저의 손이 재빨리 허공을 가르고 순간적으로 엽문이 피한다. ( S#_35) 이때 왕가위는 갑자기 슬로우 모션으로 속도를 바꾼다. 이상할 정도로 이 쇼트는 인상적인데 약간의 트릭이 있다. 물론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속도를 변속한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이 쇼트만 사운드가 없다. 그래서 마치 이 장면을 단지 느리게 본 것 이상으로 찰나의 순간을 확장시켜 놓은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순간적인 괄호 치기. 물론 이 장면은 위험하다. 쇼트의 편집이라는 순서의 리듬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 장면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동선이 엉켰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두 개의 쇼트는 잘못된 각도에서 이어받은 것이다. 그때 왕가위는 재빨리 다시 천장으로 올라가서( S#_36_A_3) 마치 상상선을 재설정이라도 하듯이(re-establishing_shot) 다시 고스란히 반복한다. 이 쇼트는 앞의 쇼트( S#_35)를 이어받는다기보다는 더 앞의 쇼트를( S#_34) 연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슬로우 모션으로 파고 들어간 쇼트는 마치 인서트처럼 작동한다. 엽문은 삼저의 팔을 뒤로 꺾고 이때 ( S#_37) 삼저의 얼굴로 다음 쇼트를 받는다. 팔과 손으로 연결된 프레임의 안과 바깥. 엽문은 그 팔의 연결이며 바로 곁에 있다. 카메라의 바로 앞. 이때 그건 삼저의 표정을 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표정의 쇼트.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여기서 승부는 결판이 난 것인가. 그 순간 갑자기 정면으로 찍으면서 삼저는 팔을 비틀어서 엽문의 손을 빠져나간다. ( S#_38) 약간의 현기증. 말 그대로 브레송 효과. 팔과 몸을 분리한 다음 팔의 운동에 대해서 몸이 마치 그 일부처럼, 마치 나사처럼, 회전하면서 빠져나간다. 재빠른 슬로우 모션. 마치 몸과 몸이 부딪쳐서 일으키는 듯한 사운드 효과. 그때 삼저의 팔은 엽문의 손아귀를 나사가 박혀 있다가 비틀어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삼저가 계단을 내려올 때, 그리고 계단에서 뛰어내릴 때, 그런 다음 엽문에게 다가오면서 팔자 보폭을 걸었을 때, 매번 그녀의 동선에서 나선형의 운동을 보았다. 엽문의 금나수(擒拏手), 삼저의 동일한 운동. 말하자면 두 개의 쇼트( S#_35, S#_38)는 서로가 서로를 보충하는 것이다. 만일 앞의 쇼트가 없었다면 뒤의 쇼트는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두 개의 쇼트는 놀라우리만큼 비슷하게 보인다. 물론 그것은 이 두 개의 쇼트가 모두 손의 운동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슬로우 모션의 이미지. 손의 활동. 여기서 방향을 잃으면 안 된다. 엽문과 삼저의 투 쇼트. ( S#_39) 왼쪽에 삼저. 오른쪽에 엽문, 왕가위는 갑자기 상상선을 넘지만 그러나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오는 법을 알고 있다. 왕가위가 때로 법칙 바깥에서 감각적으로 편집을 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대부분 부주의한 비평가들이 편집의 맹점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반대로 그가 지나치게 고전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맹점의 봉합. 경계 사이의 보충. 그는 일단 선을 정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제자리로 돌아온다. 반대로 종종 바깥으로 나간 다음 완전히 새로운 선을 따라가는 것은 차이밍량이다. 나는 그가 때로 원칙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혼란스러운 극장.(< 안녕, 용문객잔 >) 건물 사이의 미로.(< 표정 >) 물론 그렇게 하면서 차이밍량은 완전히 새로운 선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미학적 원칙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 왕가위는 동선을 끊은 다음 재빨리 다시 연결한다. 마치 일사불란한 동작처럼 삼저는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손을 모은 다음 엽문에게 뻗는다. ( S#_40) 왕가위는 삼저와 엽문을 떼어내고 다시 엽문의 쇼트를 만든다. 이때 삼저가 이 쇼트 안으로 침입하듯이 들어온다. ( S#_41) 이걸 재빨리 쇼트를 나누었다. 물론 이건 하나의 장면이다. 그러나 왕가위는 하나의 장면 안에서 하나의 행동을 성립시키는 쇼트의 성격이 다르면 그건 n개의 쇼트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왕가위의 장면은 n개의 쇼트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도 정식화 할 수 있다. 왕가위의 쇼트 나누기의 원칙은 간단하다. 한 씬 안에서 단지 여러 개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액션을 미분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쇼트의 성격이 다르면 그건 서로 각자 공존해야 한다. 대신 그 둘은 하나로 섞이면 안 된다. 그게 같은 방향이건, 같은 사이즈이건 그건 관계하지 않는다. 왕가위는 이미지로 쇼트를 분류하지 않는다. 그걸 <화양연화>에서 우리는 보았뇩?씬 안에서의 분리. 쇼트들 사이의 칸막이. 그뇩옳碩오?여러 개의 쇼트로 나눈 것이 아니라 여러 개로 나눈 쇼트들을 하나로 구성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 일대종사 >는 동일한 원칙을 액션의 장면 안에서 시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 S#_42) 여기서 엽문은 정면을 바라보면서 다가오는 삼저를 어깨로 부딪쳐 바깥으로 내보낸다. 이때 이 구도는 엽문이 마치 프레임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쇼트 사이즈를 더 안쪽으로 밀고 들어간다. ( S#_43) 이때 삼자가 왼쪽에 있는데도 엽문은 정면을 향해 서서 마치 어떤 생각에 잠긴 듯, 그저 영춘권의 무술이 요구하는 동작의 규칙에 따라 지금의 자세를 취한다는 듯이, 쳐다보지도 않고, 심저를 몸으로 밀어 낸다. 그리고 이 몸에 밀려서 삼저가 다시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간다. 말하자면 프레임의 소유라는 문제. 프레임의 안과 바깥. 사방으로 열린 프레임. 통로들. 계속해서 다시 설정되는 공간. 그 중심에 선 몸. 수직과 수평. S#_44 S#_45 S#_46 S#_47 S#_48 S#_49 S#_50 S#_51 S#_52 S#_53 S#_54 S#_55 S#_56 S#_57 S#_58 S#_59 S#_60 S#_61 나는 여기서 제작의 흔적을 복기하고 싶은 유혹마저 느낀다. 동선과 카메라의 혼연일체. 이 믿기 힘들 정도의 호흡의 일치. ( S#_44) 삼저가 밀려나면서 기둥을 발로 차고 그 반동으로 다시 엽문 쪽으로 향한다. 이때 왕가위는 기둥을 발로 차면서 되돌아오는 삼저를 따라 밀려나갔다가 바로 되돌아온다. 이 짧은 순간에 펼쳐지는 후진과 전진의 운동.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지만 우리에게 이상할 정도로 그 장면을 정확하게 다시 복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사운드의 효과이다. 마치 동선을 설명하는 것만 같은 청각기호들. ( S#_45) 이어지는 쇼트는 44 쇼트의 반복이자 디테일이다. 삼저의 발걸음을 따라서, 팔괘의 팔(八 )자 보행을 따라서, 엽문으로 향하는 발길을 따라서 움직인다. 이것은 정확하게 삼저가 앞서 보여준 여덟 팔(八)자 보행의 재빠른 운동이다. 마치 바닥에 나선형을 그리는 것처럼, 그래서 여덟 팔(八)자를 신발로 쓰기라도 하듯이, 미끄러지듯, 향하는 발걸음. 말 그대로 팔괘장의 활동. 이때 엽문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삼저가 취하는 제스처는 단지 팔괘장의 기본 자세를 보여주는 이상으로 마치 하나의 안무를 보는 것만 같다. ( S#_46) 슬로우 모션. 이때 사운드 효과는 삼저가 엽문의 손아귀를 빠져나올 때의 반복이다. 온 몸을 비틀면서 하나의 나사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은 자세. 말하자면 나선형의 운동. 이 장면은 순간적으로 삼저의 몸 절반을 보여줄 수 있는 정도만큼 물러난 다음(medium_size) 얼굴에서 발 아래로 수직으로 내려간다. (tilt_down) 이 장면은 엽문을 공격하려 든다기보다는 이 자체로 완결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이 쇼트에서 이 제스처에 대한 삼저의 어떤 나르시시즘 같은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뭐랄까, 이건 너무 아름다워서 공격하려는 의도보다는 마치 그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왕가위는 승부에 관심이 없다. 그는 지금 차례로 중화 무술을 전시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걸 이어받을 수 있을까. ( S#_47) 이때 왕가위는 카메라를 엽문과 삼저 사이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다. 삼저는 손을 내밀어 엽문을 공격한다. 순식간에 파고 들어간 이 쇼트는 거의 유일한 선택이다. 마치 하나의 쇼트 안에 두 개의 장면을 접합시키기라도 하는 것만 같은 이음새. 이 쇼트를 재빨리 수평으로 잡아서 엽문이 삼저의 손을 막아내는 것으로 연결하였다. ( S#_48) 이때 엽문은 삼저의 손을 프레임 바깥까지 밀어낸다. ( S#_49) 말 그대로 손과 손. 재빠른 손의 율동들. 하나는 밀고 들어가고 다른 하나는 밀쳐낸다, 두 개의 힘. 우리는 이때 두 개의 손을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는 커녕 이 두 개의 손은 엽문과 삼저 그 자체이며 몸 전체이다. 이 두 개의 손의 속도와 리듬, 그 활동이 만들어내는 선이야말로 순간적으로 이 장면을 시각적인 운동에서 촉각적인 운동에로 옮겨놓는다. 마치 물리적 단위를 벗어난 듯한 활동. 여기서 순식간에 밀려나는 삼저. ( S#_ 50) 삼저의 당황스러운 표정. 이때 이 쇼트는 이상하게도 엽문의 등 뒤에서 삼저를 바라보고 있다. (over_the_shoulder_shot) 동시에 엽문의 등을 통해서 삼저의 표정을 볼 때 그것은 엽문의 표정이기도 하다.(reverse_shot) 말 그대로 투 쇼트. 그때 왜 엽문의 등이 필요해진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삼저의 새로운 공격은 갑자기 바닥에 누우면서 발로 엽문을 걷어차려는 것이다. ( S#_51) 계단을 무겁게 내려오던 그 신발. 위에서 아래로. (C_1) 그때 카메라가 삼저의 공격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구도는 물론 다시 한 번 카메라가 천장으로 올라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다. 천장에서 내려다 본 세 번째 쇼트. 마치 이 공격을 위해서 준비해두었던 것만 같은 구도. 그때 내지른 삼저의 발을 엽문이 붙잡는다. 발과 손의 클로즈업. ( S#_52) 이 대결에서 엽문은 줄기차게 삼저의 공격을 붙잡으려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공격과 방어. 나선형과 포획. 두 개의 힘. 그런 다음 한 쪽의 정지. 누워서 꼼짝 못 하게 된 삼저, ( S#_53) 사실상 여기서 대결은 끝난 것이다. 정확하게 대구라도 이루듯이 엽문이 내려다본다. ( S#_54) “삼저, 가볍게 겨루는 자리인데 건물을 부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 다음 삼저의 발을 놓아준다. 손에서 빠져나간 발. 여기서부터 쇼트는 단순하게 진행된다. 별다른 기교도 없고, 다만 대사를 따라갈 뿐이다. 마치 이 진행은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제 엽문은 겨우 첫 번째 관문을 지나갔을 뿐이다. 더 힘든 상대들이 엽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S#_55) 승부는 끝났고, 패배를 인정해야 할 시간이다. 누워서 웃는 삼저. ( S#_56) 일어나면서 대답한다. ( S#_57) “하도 부숴봐서” ( S#_58) “별일 아니야” (voice_out_of_frame) 그런데 이 대사를 할 때 장면은 삼저를 소개한 부채를 든 사내의 얼굴이다. 별일이 아닌 것이 아닌 표정. 새로운 긴장. ( S#_59) 삼저 웃으면서 덧붙인다. “엽선생, 팔괘는 악랄하니 조심하시오” 엽문은 먼저 삼저를 바라보면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 다음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본다. ( S#_60) 이때 엽문을 찍은 45도의 위치는 삼저를 맞이하던 쇼트( S#_19)의 반복이자 시작에 대한 마무리이다. 하나의 마무리. 두 번째 대결을 준비하는 입구. 더 많은 대결. 이때 엽문을 내려다보는 금루 난간의 아가씨들. ( S#_61) 저 무심한 표정들.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이곳에 와서 겨룬 것일까. 얼마나 많은 대가들이 걸어 들어와서 여기서 수평이 되어 누웠을까. 형의권의 고수 엽문은 다음 층에서 형의권의 고수를 만난다. 그런 다음 궁보산과 대결한다. 가장 높은 산. 이때 궁보산은 무술을 겨루는 대신 생각을 겨루자고 제안한다. 단지 대결만을 놓고 말한다면 이 장면이 끝났을 때 < 일대종사 >에서 엽문의 절정은 지나간 것이다. 궁이와의 대결이 있지만 그다음은 허접한 대결로 허송세월한다. 왕가위는 의도적으로 결정적인 장면을 피했다. 엽문과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악역을 맡은) 마삼의 대결. 대신 궁이와 마삼의 대결이 전부이다. 왕가위는 이 이야기를 인물들의 서사에 내맡기지 않는다. 그들은 시간 속에서, 역사 속에서, 세월 속에서, 스러져간다. 가여운 존재들. 그 존재들이 가여운 것은 < 장군의 아들 >도 다르지 않다. 김두한과 종로패들은 으스대기는 하지만 세월 속에, 역사 속에서, 일제 강점하에서, 제대로 기 한번 펴지 못하고 그렇게 사라져간다. 임권택도, 왕가위도, 그 안에서 디테일의 조화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 대신 각자의 대결의 각각의 장면들에 홀린 듯이 매혹된다. 영화 안의 벡터. 그것은 언제 활동을 시작하는가. 규칙들. 거기서 동선이 시작한다. 그 선이 만들어내는 힘과 개념. 나는 그 힘에서 영화의 이것임, 을 생각하게 된다. 장면 안의 형태들. 이때 이 장면들 속에서 나는 두 사람 사이의 친화성을 느낀다. 쇼트의 진행이라는 방법. 오로지 방법의 세계. 그건 단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액션 그 자체에 대한 두 사람 사이의 매혹의 공감을 발견한다. 나는 거기서 활동사진의 사유를 복구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내게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오로지 방법만을 물어보는 이유이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이들의 창조의 자리, 제작과정, 그 영화를 연출하는 순간을 복원시키고 싶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본 것의 느낌을 고스란히 가져오는 것이다. 장면을 눈앞에 다시 가져오기. 이번에는 다시 임권택의 장면을 가져올 차례이다. (두 번째 이야기 끝, 세 번째 이야기 계속) 장군의 아들 1990년 108분 컬러 1.85 감독 임권택 제작 태흥영화㈜ 각색 윤삼육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박순덕 음악 신병하 박상민 김두한 신현준 하야시 이일재 김동희 방은희 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