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 감독
- 김치훈
- 제작년도
- 1996
2000년대 초반 한국을 포함한 세계 영화계에서 10대 난도질 영화가 호러 장르의 트렌드 세터 역할을 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하얀 소복에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느린 속도로 기어오는 아시아 산(産) 처녀 귀신 스토리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즈음 한국에서는 이런 유행 경향을 의식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공포영화가 등장했다. 윤종찬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 소름 >(2001)은 영적인 요소와 잊히지 않는 서프라이즈의 순간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외로움과 비극적인 과거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불안을 성찰하는 공포영화였다. 이 영화는 낡은 아파트 주민들을 둘러싼 잔인한 고통과 불행을 다루면서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쟁점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장소에 깃든 역사, 공포의 기원으로서 공간의 의미 맥락을 환기하는 신실한 드라마였다. <소름>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어두운 심연에 대한 음울한 이야기이다. 그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연기를 보여준 김명민이 서사의 주동 인물인 택시 운전사 용현을 연기한다. 용현은 돈을 아끼고 직주근접을 실현하기 위해 허물어지기 직전의 낡은 아파트로 이사한다. 겨울의 초입쯤으로 짐작되는 어느 날, 이 을씨년스러운 아파트에 당도하자마자 그는 자신이 빌려 사는 504호에 깃든 비극적인 스토리에 대해 알게 된다. 전 세입자가 의문의 화재로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30년 전에도 같은 방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했고 그때도 화재가 발생했다는 것. 아파트의 내력을 소상하게 알려준 이는 미스터리 소설을 집필 중인 505호 소설가 이 씨(기주봉)이다. 용현은 편의점 점원으로 만난 선영(장진영)이 아래층에 사는 동네 주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어느 날 밤, 퇴근길에 선영을 태워다 준 뒤 도박 중독에 걸린 남편에게 그녀가 학대당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후 피투성이가 된 선영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용현은 남편의 시체처리를 도와준다. 내밀한 비밀을 공유한 두 사람은 가까워 지지만 과거의 무게가 그들을 짓누르고 아파트 곳곳엔 불길한 기운이 감돌면서 30년 전의 미스터리가 새롭게 조명된다. 유령의 집은 수많은 호러 영화들에서 단골 무대를 제공하는 세팅이다. <소름>은 가장 많은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집인 아파트를 미스터리와 악몽의 공간으로 형상화한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부(富)와 편의, 효율, 안전, 청결 따위의 현대적 가치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거주를 목적으로 한 ‘집’이기에 앞서 근대화의 표상이다. 경제성장의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기제로서 아파트 단지는 빠르게 성장해 온 이 국가의 발전을 상징해 왔다. 아파트 시세의 등락이 선거의 결과를 좌우한다는 말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만큼 아파트는 한국인들의 물질적, 정신적 삶을 지배해왔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서울의 아파트 개발은 도시 계획의 핵심을 관통하였고 경제성장의 양적, 질적 성과를 보여주는 국가의 전략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소름>의 무대가 되는 미금아파트 장면들은 1969년 준공되었으나 지금은 역사적 기념비 또는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시 서대문구에 소재한 금화시민아파트에서 촬영하였다. 중산층의 신화와 대조적으로 <소름>의 아파트가 소외된 방외자들이 사는 낡고 퇴락한 거주 공간으로 형상화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용현과 이 씨의 첫 번째 대화 장면에서 이 씨는 이 아파트가 곧 재개발에 들어갈 것이라고 알려주는데, 이 씨는 미금아파트의 역사에 기초한 허구의 이야기를 창작하고 있으며 그의 소설에 중심이 되는 것은 용현이 사는 504호이다. <소름>은 모더니티의 표상으로서 아파트를 공포의 기원으로 재설정하려는 프로젝트였다. 이상의 아이디어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다가서는 장면이 있다. 용현이 미금아파트에 도착하는 시간으로 열리는 오프닝은 정교한 카메라 프레이밍과 강렬한 콘트라스트로 설정의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용현의 뒤통수를 잡은 바스트 쇼트로 시작하는 도입은 일군의 아이들이 프레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려가는 방향과 속도를 따라 고개를 돌리면서 초코바를 물어뜯는 용현의 기이한 제스쳐를 보여준 뒤 먼 거리에서 촬영한 미금아파트의 쇼트로 이행한다. 근경과 원경을 왕래하는 인상적인 편집은 낡은 아파트 건물을 비추는 햇살, 기우뚱하게 선 아파트에 짓눌린 용현의 왜소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쇼트의 프레이밍과 구도는 이어지는 쇼트에서 컴컴한 아파트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용현의 뒷모습과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다음 쇼트에서 자신이 머물 504호가 있는 층의 복도에 다다른 용현은 어둡고 긴 복도의 끄트머리에 있다. 용현이 끌고 다니는 기묘한 가방을 강조하던 카메라는 서사의 비밀에 대한 힌트를 주는 사물(천장에 매달린 3구 조명)에 오래 머무른다. 외부에서 내부로, 밝음에서 어둠으로, 평평함에서 깊이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쇼트의 구성과 편집은 서사의 초입에서 관객들이 낯선 공간과 인물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완벽한 설정이다. 시종일관 으스스한 아파트 건물은 의식을 가진 존재처럼 묘사되는데, 복도의 조명이 켜졌다 꺼지면서 가쁜 숨소리가 들리고, 창문은 분노한 얼굴처럼 기묘한 패턴을 형성한다. 인격화된 아파트는 소외된 캐릭터들과 교감한다. 인물의 배후 스토리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제자리를 찾은 후에도 용현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예측불허의 느낌을 준다. 조용한 방에서 그가 이소룡 흉내를 내거나, 거울을 보며 의문의 상처를 살필 때 또는 아파트 복도의 심연 같은 어둠을 응시할 때에도 신경세포를 긁는 것같은 느낌이 전달된다. 헤어스타일부터 줄담배에 이르는 모든 것이 수년간의 학대 끝에 형성된 냉담한 사고방식의 결과인 것으로 추정되는 선영의 언행도 한 맥락 안에 있다. <소름>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공포를 일종의 연쇄적인 사건들의 네트워크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기능 장애가 있거나 가난하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운이 좋지 않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다. 저들은 세대를 이어가는 끝없는 공포의 순환에 갇혀 있다. 여기엔 오랜 시간 최고의 선으로 추구되었던, 개발 이데올로기가 초래한 비극의 연쇄고리가 놓여 있다. 인생에서 겪은 불행의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인물들에게 공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의 한 측면처럼 느껴진다. 세밀하게 디자인된 악몽 같은 설정, 귀기 서린 음악, 놀라서 뛰어오르게 만드는 설정(jump scare)이 등장하는 살인 스토리 등 고전적인 공포영화의 요소도 있지만, <소름>은 공포라기보다는 미스터리 드라마에 더 가깝다. 504호의 비밀, 몰살된 가족, 과거의 귀환은 이 공간의 억압적인 분위기에 녹아있으며 장소의 인격화는 모든 장면에 스며들어 아파트가 하나의 캐릭터로 느껴질 정도로 팽창한다. 어두운 복도와 벗겨진 페인트, 철골을 드러낸 건물의 표면, 눅눅한 계단, 휘갈겨진 낙서 따위를 시각화하는 장면들에서 아파트는 괴물과 살인자, 유령을 대신한다. 스토리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고, 느린 템포는 불안감을 증폭하며, 프레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만큼이나 지나가는 말과 그에 대한 반응이 극의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가 끓고, 머리카락이 솟고, 오싹한 장면들로 압도하는, 뉘앙스에 기초한 공포지만 아파트 주민의 삶에 깊이 빠져들게 하여 그들의 소용돌이치는 운명에 유대감을 형성하는 윤종찬의 연출은 점진적으로 감정의 온도를 비등점으로 향하게 한다. 무엇이 한국의 공포영화를 한국적인 것으로 만드는가? 모더니티의 유령들, 근대의 뒤안길에 대한 회고적 성찰, 변화하는 젠더 정치학이 멜로드라마적인 과잉의 수사와 연계되어 어두운 과거를 불러내는 플래시백 구조 따위를 거론할 수 있다. 장르의 스테레오타입에 부정의 자세로 선 <소름>은 여러 등장인물의 절망적인 삶에 깊이 관여하는 어둡고 실존주의적인 작품이다. 복수심에 불타는 유령 소녀가 눈에 머리카락을 달고 관절을 꺾어대는 호러 영화와는 완전히 차별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국적 맥락에서 아파트라는 공간의 사회학적 함의와 공명하면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추구하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암울하게 묘사한다. 무엇보다 비극의 원인을 초자연적인 공포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맥락 안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괴담의 꼴을 한 이야기지만 1995년 6월 29일 발발하여 사망 502명, 5명 실종, 부상 937명의 참사로 기록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아내를 잃은 윤종찬 감독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프로젝트였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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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생 타인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삶이란 어떤 걸까? 그리고 나의 삶을 규정하는 무수한 명명과 논평들을 뚫고 나와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어떤 물질적 조건과 태도가 필요할까? 다큐멘터리 < 나와 부엉이 >(박경태, 2003), < 아메리칸 앨리 >(김동령, 2008), < 거미의 땅 >(김동령·박경태, 2012)을 통해 동두천 기지촌 여성의 삶의 서사화와 그 재현 미학을 지속적으로 고민해 온 김동령·박경태 감독의 최신작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2019)는 바로 이 질문을 던진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주인공이자 영화 속 판타지 서사의 공동 창작자이기도 한 박인순은 소위 ‘양공주’로 칭해져온 ‘미군 위안부’였다. ‘미군 위안부’의 생애는 전쟁과 탈식민, 젠더와 섹슈얼리티, 계급과 지역 같은 한국사회의 주요 쟁점들을 교차하고, 저간의 소문과 험담, 의회와 법정의 증언록, 뉴스보도, 학술저작, 소설·연극·영화 같은 예술매체 등에서 명명되고 의미지어지고 해석되어 왔다. 그러는 동안 정작 당사자들은 각기 다른 서술자들의 관점과 입맛에 맞게 자신들의 삶이 맞춰 깎여나가고 조형되는 것을 목도해왔다. 이렇게 풀려나온 다수의 이야기들은 ‘미군 위안부’에 대한 정형화된 형상을 반복해온 측면이 있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그러한 이야기들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박인순이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장르와 형식으로 이야기를 서술해 나갈 방도를 찾도록 돕는다. 한평생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휘둘려온 박인순은 적어도 죽음만은 자신의 의지와 방식대로 선택하고자 한다. 사실 ‘미군 위안부’에게 있어 죽음조차도, 특히 비극적인 사건이 된 죽음들은 다른 쟁점을 선동하는 도구가 되거나 자극적인 이야깃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박인순은 적어도 죽음의 방식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며 죽음의 메신저들과 대면한다. 영화는 박인순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전에 화면 사이즈와 내레이터를 바꿔가며 그녀에 대해 이야기 해온 화자들이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그 화자들에는 김동령과 박경태 감독도 포함된다. 두 감독은 기지촌 여성들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두레방’에서 미술치료에 참가한 모습부터(<나와 부엉이>)부터 매일같이 황량한 산등성이와 동네골목을 휘젓고 다니며 미국에 남겨두고 온 딸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낭독하는 풍경까지(<거미의 땅>) 박인순과 20년 가까이 함께 영화작업을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자신들의 기존 작업 혹은 다큐멘터리에 대한 메타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오프닝에서 박경태 감독은 스스로 다큐멘터리 감독을 연기하며 국가배상소송을 위해 실태조사를 하는 교수(변중희)와 영상촬영을 담당한 신진 미술작가를 박인순에게 소개해주기 위해 데려가고 엔딩에서는 산을 올라가는 박인순을 뒤따르는 카메라 뒤의 목소리로 두 감독이 등장하며 박인순이 서사를 함께 만들긴 했지만 이 영화 또한 두 감독의 프레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도입부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박감독은 교수와 미술작가와 함께 차를 타고 마을로 들어가며 미군기지가 이전된 이후 수년 동안 마을이 재개발되면서 일어난 변화와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박인순과 그녀의 동료들, 이름도 적혀있지 않은 여자들의 무연고 비석, 산과 들판 등-에 대해 설명한다. ‘뺏벌’이라 불리는 그곳은 ‘배밭’에서 기원했다는 사료가 있지만 또한 여자들 사이에선 “한번 들어오면 빼도 박도 못하고, 죽어서도 나가지 못하는 곳”이란 의미로 통용되기도 했다. 셋은 마을 어귀에서 오래된 당산나무를 만나게 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랜 시간 뺏벌을 지켜봐 온 당산나무는 재개발에 뽑혀나가거나 굿이 금지되어 당산나무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될 위기에 처해있다. 당산나무는 액자 속의 액자로,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입구의 표지가 된다. 변교수는 법정증거로 제출할 ‘미군 위안부’의 피해기록을 박인순에게서 얻어내려 하지만 박인순의 구술은 일관성이 없고 시간대가 잘 들어맞지 않으며 이름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한 기록은 제도권에서 인정받기 힘들다. 교수는 기지촌 여성들의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 노력하지만 제도권 내에서 일하며 사용가능한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가르고 걸러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전시를 준비하는 젊은 미술작가는 어떨까? 박인순의 이야기에 매료된 그는 이후 홀로 뺏벌을 방문한다. 그는 언어대신 사람들이 버리고 간 현장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예술적 질료로 사용하려 한다. 미술작가는 폐허가 된 클럽의 사진을 찍고 버려진 컵, 미러볼, 낙서된 전단지 등의 소품을 전시에 사용할 요량으로 챙긴다. 그는 남아있는 것들에 매혹되지만 정작 그 공간과 소품들의 주인이기도 한 꽃분이의 유령이 나타나자 공포에 질려 도망친다. 미술작가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려하기보다는 이미지와 소품들을 맥락에서 떼어내 자신의 전시공간에 맞춰 놓으려 한다. 다큐멘터리 감독, 실태조사를 하는 교수, 기지촌 여성에 관심이 있는 미술작가는 모두 좋은 의도를 갖고 있지만, 자기들만의 틀에 박인순을 맞추려 한다. 여러 화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만드는 것에 공조해주던 박인순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자 마침내 직접 스토리텔러로 나서게 된다. 이승에서 배회하는 유령들을 소멸시키고자 저승사자들이 나타나자 박인순도 그들도 함께 동네를 배회한다. 박인순은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버려져 자기의 이름과 나이도 모른 채 포주인 수양엄마에게 팔려왔다. 클럽에서 일하려면 ‘패스’라 불렸던 보건증이 필요했기 때문에 포주는 동네 죽은 여자의 신분을 사서 박인순에게 줬다. 그녀를 가리키는 이름과 나이 자체가 누군가의 이야기 짓기로 구성된 것이다. 화자의 존재 자체가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지표가 된다. 꽃분이를 비롯한 젊은 여자 유령들은 박인순의 젊은 시절인 동시에 죽은 그녀의 동료들이다. < E.T >, <드라큘라>, < 엑소시스트 >를 좋아한 박인순의 취향에 맞게 장르는 호러와 코믹 판타지를 오고간다. 박인순은 자기 죽음의 서사를 원하는 대로 써내려가고자 한다. 방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감독, 교수, 미술작가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터와 저승사자들은 그녀의 이야기에 끊임없이 끼어들어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들처럼 논평을 해댄다. 거기에 꽃분이를 찾아온 미군까지 등장한다. 꽃분이와 미군이 ‘윤씨 종친 무덤’에서 함께 잠을 자면서 박인순이 그린 그림의 제목이기도 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연극처럼 상연되기도 한다. 박인순은 로맨틱한 구원자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미군의 목을 꽃분이와 함께 잘라 복수를 하고 그의 목을 끌고 직접 저승길로 향한다. 내레이터는 읇조린다. “저승으로 가는 아홉 고개를 넘기 위해 그들은 남편의 살과 뼈를 고아 감쪽같이 먹어치우고 머리만 끌고 가기로 했다. 잘린 머리는 저승의 문지기에게 뇌물로 바치기로 했다. 저승사자는 이 무모하고 자신만만한 여자들을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인순이와 꽃분이가 비웃음에 굴하지 않으며 아홉 고개를 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레이터는 그 동네를 지켜보던 당산나무일 수도 있다. 기품 있는 옷을 지어 입은 박인순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씩씩하고 당당하게 활보하며 저승으로 향한다. 박인순은 시작은 그렇지 못했더라도 결말은 자신의 의지대로 맺고자 한다. 박인순의 이야기는 비참에서 비장으로("그런 이유로 나는 죽음을 비장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증언에서 판타지로, 잔여에서 초월로, 운명의 피해자에서 운명의 대결자로, 치유에서 복수로, 이야기 소재에서 이야기하는 자로, 진부하고 교환가능한 피해자의 이야기에서 단독자 영웅의 극적인 이야기로(“인순은 반복되는 지루한 이야기를 참을 수 없었다”) 이동한다. 그러는 동안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그리고 미술, 연극, 영화, 연구조사 등의 미학형식을 오고 간다. 혼란스러운 비연대기적 기억은 환상성 속에서 예민한 실재적 감각으로 살아나며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 가능하도록 만든다. 영화는 더 나아가 기존 페미니즘 미학에서 금기시되어왔던 것을 가시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페미니즘 미학은 잘 들리지 않고 주변화 되어온 존재 양식을 재현하기 위해 유령, 잔여, 지나간 역사, 재현불가능한 트라우마의 미학을 고안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미학적 형식은 반복되면서 때때로 매너리즘에 빠져 그 현존과 물질성이 의도치 않게 지워지기도 했다. 박인순은 여기서 스스로를 통제되지 않고 비규범적이며 제멋대로 구는(unruly) 자신의 신체성을 스펙터클로 내어준다. 카메라는 구석구석 꼼꼼히 씻어 내려가는 목욕하는 나체를 촬영한다. 그 몸은 적당히 살집과 주름이 있어 그 물질성을 묵직하게 감각하게 한다. 성판매를 하며 돈을 벌었던 몸이기도 하다. 박인순의 몸은 단순히 고통과 피해의 증거나 온갖 말들의 전장을 넘어서 팔을 크게 움직이며 동네를 휘젓고 성큼성큼 걸어 다니고, 그림을 그리고, 돈을 벌고, 목욕하는 몸이다. 그것은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신체적 현존이다. 유령들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지속된 것 혹은 침전 중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유령과 저승사자들도 어떤 효과도 없이 뻔뻔하게 보통 인간과 다를 바 없이 표현되고 구분 없이 돌아다닌다. 심지어 동네 여자들은 저승사자에게 쫓기는 옛 친구를 숨겨주기까지 한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미군에게 끔찍하게 살해된 윤금이의 살인 현장 사진을 사용한다. 미국의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분노를 야기하기 위한 수단으로 진보진영은 한때 윤금이 살인 현장 사진을 공론장에서 사용해왔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사진의 사용은 여성의 피해사실을 선정적 스펙터클로 전시하는 2차 가해라고 비판해왔다. 그것은 타당한 비판이었고 페미니스트 예술은 피해 사진을 스펙터클화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거꾸로 그 사진을 스크린에 가시화하며 기존의 관점에 도전한다. 여전히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판단에 있어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음에도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서 한국 페미니스트 예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 사진의 사용은 고통의 전시가 아닌 이미지 정보 과잉의 시대에 거꾸로 그 여성의 고통의 대면과 물질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말에서 박인순은 마침내 죽음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저승사자와 대적한다. 신체성의 감각이 첨예화되는 이 장면은 그로테스크와 어이없는 코믹함이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촛불이 쭉 늘어선 동굴의 연극적인 미장센을 배경으로 “아무도 널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며 “죽어라”라고 명령하는 저승사자에게 박인순은 기합소리 뒤에 갑자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인공적인 기이한 웃음소리를 낸다. 그것은 시원하게 터트리는 통쾌한 웃음도 아니도 그렇다고 소리 없는 비웃음도 아니다. 출처도 알 수 없고 누구의 것인지도 알기 어려운 웃음, 입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의문인 웃음이다. 잌히히히, 앜하하—아앜알, 잌히히키키알앜흐으, 으흐크아하하크오호호. 그러자 화면 밖에서 다른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박인순과 윤금이와 그녀의 동료들이 웃고 운다. 그것은 신체들을 깨우는 오염성 짙은 통제할 수 없고 비규범적이며 제멋대로이고 즉흥적인 웃음이다. 으흐흑아하학, 아하하흑, 이이킥이익. 때로는 울음소리, 분노의 비명소리와 구분되지 않는다. 캐스린 로위는 『제멋대로인 여자: 젠더와 웃음의 장르』(1995)에서 뤼스 이리가레이와 엘렌 시수를 경유해 미하엘 바흐친이 그로테스크의 예시로 든 ‘망령 나서 웃고 있는 임신한 노파 조각상’을 재해석한다. 노파는 왜 웃었을까? 로위는 노파는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몸을 “부적절하게” 노출시켜 “그들 자신을 스스로 스펙터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라는 오래된 금기를 파괴한다고 말한다. 그 웃음은 소수 집단의 기존 권위와 체제를 향한 분노이다. 그 웃음은 기존의 권위와 체제를 위반하며 공간을 자기들의 방식으로 점유하고 신체들을 재배치한다. 그것은 천진난만한 때 묻지 않은 웃음이나 남자들에게 반응해주는 수동적인 웃음과는 다르다. 그녀들의 웃음은 “카니발적인 사회적 실천”이며 자기를 향한 응시를 함께 웃을 수 없는 상대방에게 돌려버리는 공격의 웃음이다. 그로테스크한 웃음으로 체제들을 무너트린 박인순에 대해 내레이터는 말한다. “여자는 혼자 영화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어둠속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고 창녀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아 좋았다. 모두가 거대한 환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신도 사람들 중 일부가 된 것 같아 그제야 편안히 쉴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이야기이자 스펙터클로 만들며 사각의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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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천당의 밤과 안개 >(2018, 정성일 )는 정성일과 왕빙의 영화들이 함께 머무르며 생성되는 터이자 그곳에 세워질 집을 닮았다. 하지만 이 집엔 설계도가 없다. 구획된 면적과 적합한 수치도 없거니와 중요한 재료도 정해지지 않았기에 완성된 집을 가늠할 수 있는 청사진이 존재할 수조차 없는 집이다. 게다가 이 집은 언제 완성될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영화가 짓고자 하는 집은 오랜 시간을 들여도 허름한 형태거나 미완의 상태에 가까울 것 같다. 집의 모양을 고수할 수 있는 굳건한 재료들보다 얽어놓고 간신히 기대놓은 나무들과 부석거리며 바스러지는 흙과 돌덩이의 질감이 드문드문 남아 있을 것이다. 공백과 진공만이 그 영화들에 허용된 재료일지 모른다. 계획이 별 소용없는 상황, 할 수 있는 것들조차 제한적인 상황, 사람의 의지로 이끌어갈 수 없는 상황, 목적지를 찾아가고도 길에서 시간을 버텨내야 되는 상황이 오히려 이 영화의 단호함과 투명함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정할 수 없는 집을 함께 짓기로 결단한 왕빙과 정성일의 단호한 태도 때문에 감동적이고, 좀처럼 나아가지 않은 지체된 순간을 견뎌내는 인내 때문에 특별하다. 이 영화는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삶의 가능성과 믿음을 가늠하는 영화이자 흙먼지와 광인들의 뜻 모를 노래와 중얼거리는 말, 농민들이 청하는 술 한 잔, 아이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눈과 안개 속에서 존엄함을 드러내는 영화가 되어간다. 제목에 표기된 천당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한다. 하늘에 있는 낙원 혹은 신의 집을 뜻하는 天堂은 뿌연 먼지로 둘러싸인 남산타워부터 중국의 하늘과 길, 영화의전당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가 스쳐 지나가고 잠시 머무르고 통과하는 모든 곳을 포함한다. 천당은 왕빙을 만나야겠다는 결심과 영화를 찍어가는 여정, 만들어진 영화와 마주하는 극장으로 번져가고 넓어진다. 그뿐 아니다. 중국의 인민들이 살아가는 고산지대와 농촌, 길게 뻗은 길을 따라 높아지는 건물과 공사 현장이 펼쳐지거나 터널을 통과하면 바뀌는 변화무쌍한 햇빛과 나무의 품종, 황갈색으로 변해가는 산세도 천당의 풍광이다. 높은 산을 오르는 노동자들의 사뿐한 걸음걸이,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는 농민의 주름진 얼굴, 타지를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노동자의 볼품없는 살림살이, <세 자매>(2012)를 찍으며 얻은 병으로 몸이 좋지 않은 왕빙이 잠시 누워 밤을 청하는 작은 소파와 정신병원에 갇힌 광인들의 작은 병상도 천당이다. 그리고 스스로 찾아온 스크린을 마주하는 또 한 편의 영화(배우 정인선이 연기한 그녀이기도 하다)와 극장도 천당의 모습으로 변주된다. 2 <천당의 밤과 안개>는 왕빙의 리듬을 헤치지 않으면서 조용히 뒤따르기로 결심한 정성일의 카메라 작동 원칙을 끝까지 고수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카메라는 왕빙의 카메라와 그의 스틸 카메라, 정성일의 카메라인데, 카메라들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카메라를 든 자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과 인민들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삶이란 간접적으로 배울 수 없다는 원칙을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때 카메라들은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지만 프레임 안에 담기는 인물들은 카메라 주위로 몰려들어 빤히 쳐다보거나 흘깃거린 후 프레임을 벗어나며 카메라가 있건 말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그곳에 있지만,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카메라의 투명성은 영화의 인민들뿐 아니라 왕빙과 정성일의 영화(들)에서도 발견된다. 그들은 왕래하지 않고도, 서로 의논하지 않고도, 전작과 작업 중인 영화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도 서로를 향해 개방되어 있다. 왕빙은 정성일의 카메라가 작동을 멈춰야 된다고 생각하면 카메라를 꺼줄 것을 요청하고 정성일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전원을 꺼버린다. 캠코더를 들고 가지 않은 왕빙이 정성일의 카메라를 빌려달라고 말한 후에 이어지는 쇼트는 정성일의 카메라로 왕빙이 촬영한 것인지, 정성일이 이어서 촬영한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두 대의 카메라가 함께 활동하는 데 원칙은 단 하나, 그들의 행동과 그들의 영화에 담길 인민들이나 공간, 그들의 카메라가 투명한 시선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촬영 기계를 들고 있는 행위와 뷰파인더로 인민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두 대의 카메라가 기록하고 있는 시.공간이 관통해서 우리들에게까지 도달한다. 프레임에 카메라가 두 대나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기록 장치인 물질은 망각되고 공간을 채우는 인민들의 모습으로 채워진 영화가 되어간다.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카메라를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정신병원은 사각형의 건물이고 중앙에 마당이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병원의 정문(정신병원이라는 간판)과 마당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광인들이나 병원을 나서는 왕빙의 뒷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전체 공간을 조망하는 쇼트는 등장하지 않는다. 전체를 찍을 수 없고 보여줄 수 없다는 조건이 이 영화가 방문할 수 있는 장소를 제한했고, <천당의 밤과 안개>는 예측하거나 계획할 수 없기에 카메라가 다가갈 수 없는 곳을 엿보거나 기웃거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복도 이편에 왕빙의 카메라가 있으면 정성일은 건너편에 카메라를 놓아두고 광인들을 촬영하는 왕빙을 바라본다. 왕빙이 자리를 옮기면 정성일도 왕빙(과 광인들)의 동선을 거스르지 않는 위치에 카메라를 놓아둔다. 사각형의 건물을 따라가는 핸드헬드도 예외적으로 등장하고 상황에 따른 기민한 쇼트 전환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는 마치 오즈 야스지로의 인물들처럼 애초에 시선의 마주함이 불가능한 현실에 놓여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오즈의 영화에서 180도 가상선을 침범하는 카메라가 오히려 그들의 공간적 맥락을 지워버리는 것처럼 카메라를 든 두 사람과 이 영화는 카메라를 없는 존재로 여기면서도 프레임 가득 광인 개개인의 리듬으로 움직이는 끊임없는 움직임, 스산한 공간에 스며든 웅성거림과 휘갈긴 낙서들을 빼곡하게 기록한다. 3 <천당의 밤과 안개>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왕빙의 원칙과 태도를 탐구하기 위해 그 현장에 동행한 정성일의 요청이 모두 담긴 결과물이다. 두 사람의 협업이 아님에도 이 영화는 왕빙이 찍었던 영화(<세 자매>(2012))와 찍고 있는 영화(<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2013))와 정성일이 찍었던 < 카페 느와르 >(2010)와 찍게 될 영화(< 녹차의 중력 >(2018))가 공존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같은 공간을 찾아가고 같은 인민의 삶을 지켜보면서 규정될 수 없고 쉽게 파악되지 않는 사건과 마주하면서 그들의 카메라 사이를, 그들의 영화들 사이를 지나가는 힘의 작용이 감지되는 것 같다. 정신병동을 예로 들면, 왕빙의 카메라에 담긴 광인들의 현실이 이편에 놓여 있고 다른 편에 광인을 찍고 있는 왕빙의 현실이 존재한다. 두 대의 카메라는 두 종류의 현실이기도 하지만 <천당의 밤과 안개>는 두 종류의 현실을 동일한 성질의 현실로 생각한다. 왕빙의 말처럼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라 감정의 진실”을 탐구하는 과정이 곧 영화이며 카메라 앞에 있는 사람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과정의 실천이 곧 영화이기 때문이다. 정성일의 결단은 일체의 개입이 불필요한 현실의 힘들이 부딪히고 파열하고 사그라지는 삶의 강력함에 대한 항복이라 부를만하기 때문이다. 두 대의 카메라가 동일한 현실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이 영화의 힘이다. 왕빙의 카메라 지척에 존재하는 광인들, 그들 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있는 왕빙의 카메라, 왕빙의 카메라를 위치삼아 자신의 자리를 조용하게 찾아가는 정성일의 카메라가 거리낌 없이, 불편함 없이, 침범함 없이 그곳에 놓여 있을 뿐이기에 감동적이다. <천당의 밤과 안개>에는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불현듯 나타나고 불시에 사라진다. 나는 왕빙과 정성일이 겪은, 지체되는 상황으로 인해 더 오래 볼 수 있었던 얼굴들과 표정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자꾸만 어긋나는 약속, 정체되는 기다림,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몇 날을 달려가야 하는 머나먼 길, 공사가 한창인 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산과 나무들, 수시로 바뀌는 햇살의 강도와 그림자의 길이, 우연히 만난 농민들의 주름진 얼굴과 친절한 미소, 긴 철근을 어깨에 받치고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는 노동자의 걸음,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고된 생활을 증명하는 살림살이와 얼룩진 벽, 마당을 한가롭게 돌아다니는 닭과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개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광인들의 눈동자와 천진한 미소, 마침내 이름 모를 마을에 멈춰선 정성일의 끈덕진 응시와 같은 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