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진
- 감독
- 권혁준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김범수, 손용범, 윤승훈, 이설구, 홍지석, 박부건, 정요한, 김종태, 오자훈, 이현우, 홍우석, 윤동하, 문유일, 정재훈, 임우현, 정연, 이정민, 이건창, 서유림
① 동명극장(東明劇場), 대보극장(大寶劇場) 1923년 조선인상공업자로 구성된 함흥상업회 산하 흥행단체 흥화조합(興化組合)에서 건립한 영화관이다. 연극 공연은 물론 함흥의 대표적인 집회장소로 활용되었다. 함흥의 3개 영화관이 경쟁하던 1932년 당시 동명극장의 입장원은 대인 33,667명, 소인 19,646, 금액 7,563원으로 함흥극장보다는 미치지 못하지만 진사관과 비슷한 수준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었다. (<咸興三映畵館七年度成績>, 《朝鮮新聞》, 1933.01.20) 1936년 함흥상업회는 흥화조합을 주식회사 동명극장으로 바꾸었다. 당시 극장운영을 맡았던 김영선연예부(金永善演藝部)는 극장 임대료로 한 주당 12원 50전씩 지불했다. ( <분규 거듭하든 동극(東劇) 문제 단락(段落)>, 《동아일보》, 1936.05.19) 1940년 들어서서 동명극장은 대보극장(大寶劇場)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이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성주(李成周), 지배인은 김하룡(金河龍)이며 총 505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② 진사좌(眞砂座), 진사관(眞砂館), 본정영화극장(本町映畵劇場) 함흥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극장으로 함흥부 본정에 있었다. 진사좌를 운영하던 시마네(敷根角市)는 함흥의 실업인으로 재목점, 운송점과 더불어 진사좌연예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1925년 5월 운영자 시마네(敷根角市)가 기존의 낡은 건물을 수리하여 확장하였다. 1927년 1월 진사좌는 문화연예사 직영의 영화상설관으로 전환된다. 이때 이름을 진사관으로 바꾸었다. 문화영화사는 경성 희락관 악장으로 이름이 높던 시라이(白石蘇山)와 마츠무라(松村英)가 진사관을 경영하기 위해 만든 회사였다. (<眞砂舘の老人優待>, 《朝鮮新聞》, 1927.05.14) 1930년 무렵 진사관의 흥행권을 인수한 쿠니이 (國井勝英)는(<咸興眞砂舘開業一周年>, 《朝鮮新聞》, 1931.05.31) 1931년 5월 개업 1주년을 맞아 낡은 건물을 신축하기로 결정한다. 1931년 8월 신축 허가를 득하고 공사에 들어가 1931년 11월 새로운 건물이 완공되었다. 공사비는 6만원이었다. 이즈음 진사관은 쇼치쿠의 북선 봉절장이었다. (<廣告>, 《朝鮮新聞》, 1933.07.03) 진사관은 1940년대 들어 본정영화극장(本町映畵劇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츠무라(松村茂信)이며 총 505석의 객석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③ 함흥극장(咸興劇場) 1923년 자본금 15만원의 주식회사 함흥극장이 조직되어 이 자금으로 함흥부 대화정에 건립한 극장이다. 공사비 1만 6천여원이 들었다. 초기 운영자는 타마키(玉置省三)였으며, 1928년 4월부터는 츠지(辻平三)가 1년에 3천원 씩의 임대료를 내기로 하고 운영을 시작했다 .(<大咸興の展望>, 《朝鮮新聞》, 1933.07.03) 1933년 당시에는 닛카츠와 신코키네마의 북선 봉절장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츠지(辻ヤス子)였으며 고바야시(小林豊三)이 지배인이었다. 총 755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④ 명보극장(明寶劇場) 1940년 함흥부 소화정에 이기진(李基進, 창씨명 芝山基進)이 건립했다. 3층 콘크리트 건물로 함흥역 가까이 위치했으며 1,050석의 대극장이었다. 박노홍은 경성의 명치좌에 지지 않는 극장이라고 평한 바 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이기진, 지배인은 다케모토(武本光洋)였다. ⑤ 함흥문화극장(咸興文化劇場) 함흥부 소화정에 있었던 문화영화 상영관으로 객석은 200석이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오쿠야마(奧山歲一)였으며 지배인은 하야시(林英一)였다. ⑥ 원산극장(元山劇場), 유락관(遊樂館) 원산극장은 1921년 9월 원산부 천정(泉町)에 설립되었다. 개관 당시 일본 코우카츠(國活)와 제휴하였다. 이후 연극, 영화의 상영은 물론 각종 집회의 장소로도 활용되었으나 1925년 11월 15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다. 피해액은 6만 5천원이었다 .(<원산극장 전소(全燒)>, 《동아일보》, 1925.11.17) 원산극장이 있던 자리는 한동안 빈터로 있었다. 후쿠이(福井伊三郞)를 중심으로 주식회사 유락관이 설립되어 이곳에 극장건립이 추진된다. 1926년 11월 30일 건물이 완공되어 영업을 시작했고, 1930년 활동사진관 수좌가 등장하여 경쟁체제를 갖추게 되자 닛카츠와 쇼치쿠 등과 계약을 맺고 혁신을 꾀하기도 했다. (<大改革の元山遊樂館披露>, 《朝鮮新聞》, 1930.12.03) 1933년에는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수좌와 합병을 꾀하지만 무산된다. (<元山の兩常設館合併問題具體化>, 《朝鮮新聞》, 1933.10.26) 일제말기까지 원산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있었다. 1943년 당시 흥행주는 후지사와(藤澤正人)이며 지배인은 고이즈미(小泉昇三)였다. 객석수는 750석이었다. 해방 후 신영관(新映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⑦ 수좌(壽座), 대승관(大勝館) 원산부 경정(京町) 36번지에 있던 극장이다. 원산의 토목건축청부업자인 우메다(梅田市治郞)의 주도로 조직된 주식회사 수좌에서 1930년 설립했다. 도아(東亞), 데이키네(帝キネ)의 영화를 상영하며 유락관과 더불어 원산의 양대 일본인 영화관으로 등극했다. 1931년에는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주식회사 유락관과의 합병 문제로 잠시 휴관을 했다. (<元山の毒座>, 《朝鮮新聞》, 1931.06.14) 1933년 주식회사 유락관과 합병 직전까지 갔으나 무산되었고 1935년 6월 21일 새벽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1935년 주식회사 수좌는 소실된 수좌의 재건을 추진한다. 새롭게 건축된 극장의 이름은 대승관(大勝館)이었다. 극장 신축을 위해 주식회사 수좌는 자본금을 12,100원에서 20,000원으로 늘려 주식회사 대승관으로 전환한다. 1943년 당시 대승관의 흥행주는 고이즈미(小泉昇三), 지배인은 요시오카(吉岡玉男)이었다. 객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⑧ 원산관(元山館) 원산부 북촌정에 건립한 활동사진관으로 1928년 1월 23일 구정을 맞아 개장했다. 1927년 1월, 원산시영회(元山市榮會)의 알선으로 공회당 겸 극장을 짓기로 하고 노기만(盧紀萬) 등 원산 거주 조선인 실업가들이 발기하여 조직한 주식회사 원산관이 설립을 맡았다 .(<『원산관』 발기>, 《중외일보》, 1927.01.20) 원산관의 흥행주는 보통 주주총회에서 결정되었는데 설립 이후 김창준(金昌俊) 등이 맡아 운영했다. (<원산관 쇄신>, 《중외일보》, 1930.03.30) 흥행주인 김창준은 1930년 원산관 산하에 원산관연예부를 조직하여 연극 공연 등을 펼쳤는데 호응이 좋아 인근 함흥의 동명극장에서도 공연이 이루어졌다. (<원산관연예부에 초차관(初次舘) 외 출연>, 《중외일보》, 1930.10.04) 1933년 3월 원산관에서는 원산 최초로 토키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자는 김낙진(松平洛鎭)이며 660개의 객석을 보유하고 있었다. 해방 후 원산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⑨ 희락관(喜樂館) 흥남읍 구룡리에 위치한 극장으로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38년 12월 흥남의 교통사고 기사에서 사상자들이 희락관에서 영화를 관람하고 조선질소비료회사 사택으로 가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면 관객의 대부분이 조선질소비료회사의 사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흥남 뻐스열차 충돌사건 상보(詳報)>, 《동아일보》, 1938.12.06) 1943년 당시 흥행주는 마에다(前田長太郞)였으며 지배인은 삼촌건삼이었다. 5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⑩ 흥남관(興南館) 흥남읍 천기리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경성 중앙관의 흥행주인 오이시(大石貞七)이며 지배인은 가메야마(龜山嘉介)였다. 총 56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흥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⑪ 소화관(昭和館) 흥남읍 송상리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0년 11월 극단 고협이 이곳에서 공연 중 극장 2층이 붕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와타(砥綿啓太), 지배인은 타치바나(立花三郞)였다. 총 870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다. ⑫ 흥남문화영화극장(興南文化映畵劇場) 흥남읍 호남리에 있던 문화영화 전용극장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카도타니(門谷淸), 지배인은 마츠오(松尾辰次郞)였다. 3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⑬ 용흥극장(龍興劇場) 흥남읍 용흥리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루야마(丸山野虎雄)였다. 9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⑭ 단천좌(端川座) 단천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오모토(大元貞珪), 지배인은 시라키(白木義信)이었다. 742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⑮ 단천극장(端川劇場) 단천읍 내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설립자는 함흥출신의 최두진(崔斗鎭)으로 흥행계통에서 일하던 인물이다. (<흥행계에 권위 단천극장주 최두진(崔斗鎭)씨>, 《동아일보》, 1939.10.03) 1943년 단천군총력연맹에서 막간 강연을 추진할 장소로 단천좌와 함께 지목된 곳이다. 하지만 1943년 『영화순보』 영화관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영화관이 아닌 연극장으로 구분되었거나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⑯ 혜산극장(惠山劇場) 혜산진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다(安田隆一)이며 객석수는 455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신포극장(新浦劇場) 신포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카야마(中山賢一)이며 객석수는 400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⑱ 고사관(高砂館) 북청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마츠무라(松村康弘)이며 좌석수는 489석이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⑲ 홍원좌(洪原座) 홍원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홍춘선(洪春善, 창씨명洪村春善)이며 4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⑳ 흥락관(興樂館), 고원극장(高原劇場) 흥락관은 고원읍에 있던 극장으로 1936년 12월 23일 어린선(魚麟善), 조경삼(趙京三) 등이 합자하여 7천여원의 경비를 들여 만들었다. 고원을 대표하는 장소로 뒷날 고원극장(高原劇場) 으로 개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교우코쿠(岐谷亮吉)이며 3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1. 삼우회관(三友會館) 천내읍에 있던 극장으로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즈노(水野長一郞)이며 3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2. 영흥극장(永興劇塲) 1935년 10월 12일 영흥군에 건립된 극장으로 개관 당시, 함흥의 동명극장을 경영하던 김영선연예부가 운영을 맡았다 .(<영흥극장 수(遂) 개관>, 《동아일보》, 1935.10.13) 1943년 『영화순보』 영화관 목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연극장으로 구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자료] ≪매일신보≫, 1936.12.29. 고원(高原)에 극장, 입삼일(廿三日) 개관 【고원】 약진도상에 잇는 고원은 발전 여지가 풍만하여 점차 도시의 기풍을 정(呈)하고 잇다. 그러나 아직 오락기관이 업서 간혹 순업흥행단이 차저주면 일대(一大) 울회(鬱懷)를 느끼든 시민의 위안이나 되엿지만 겨우 가설극장에서 풍우설한(風雨雪寒)이면 불편무비(不便無比)하든 바 시내 어린선(魚麟善) 조경삼(趙京三)씨 등 유지 제씨가 합자하야 약 七천여원의 경비로 흥락관(興樂館)이란 극장을 건축하엿는데 거(去) 二十三일에 낙성식을 거행하고 동일(同日)부터 三일간 개관기념을 하게 되여 매야 입장객에게 추첨권까지 배부하여 좌기와 여(如)한 경품을 수여하엿다. 一등 一인 백미 一叺 二등 一인 궤종시계 一座 三등 一인 경대 一座 (사진은 건축된 흥락관) [자료] ≪朝鮮新聞≫, 1931.06.14. 元山の壽座 開館に决定 (元山)元山壽座は活動常設遊樂館に對抗し優秀な活動や芝居等を上映興業してフアンを喜ばせるたが突如休館遊樂館に合倂問題が起り一時は一般から成行を注視されてるたが重役會議で開館續行に決定し今後三村敏郞氏が經營の任に當り從來の東亞,帝キネの外新に日活とも特約嶄新なる映畵を上映してフアンの待望にそひ開館隆盛を期することゝなつた [자료] ≪중외일보≫, 1927.01.26. 본보(本報) 독자위안(讀者慰安) 대흥행, 함흥 진사좌(眞砂座)의 개관 기념 함흥에 잇는 극장의 효시로 일반사회에도 공헌이 만튼 진사좌는 근래에 미미(微微) 부진 중에 잇든 바 래(來) 二十五일부터 문화연예사의 직영으로 상설관이 되얏는데 기(其) 벽두로 래(來) 二十五일 야(夜)에는 봉황의 면류관을 봉절할 터이라 하며 래(來) 二十七일 오후 七시반부터는 본보 독자를 위하야 三일간 무료로 흥행하리라는데 단(但) 하족료(下足料)만 받으리라더라(함흥) (우대권은 欄外에) [자료] ≪시대일보≫, 1925.11.20. 원산극장 전소(全燒) 손해(損害) 六만원 【원산】 원산 오락기관의 하나로 또 원산의 유수한 건물인 원산극장은 十五일 오전 三시 四十분에 발화되어 소방대의 전력을 빌엇으나 겨우 五시 三十분에 소화되어 극장은 전소되고 인가(隣家) 二三동까지 소화되엇는데 손해는 약 六만원이라고 [자료] ≪매일신보≫, 1918.10.29. 함흥 활동상설 개관(活動常設 開館) 금춘(今春) 이래 신축 중이던 만세관(萬歲館)은 유유(愈愈) 기(其) 내부의 설치 등이 완성되야 十월 二十五일 야(夜)부터 개관한바 비상한 호평을 박(博)하더라 [자료] ≪동아일보≫, 1935.03.12. 동명관(東明舘) 기념 【함흥】 함흥부 내에서 오직 하나만인 군선인 경영 영화상설관인 동명극장(東明劇場)은 수난에 수난을 거듭하야 이제 개관 八개년 기념으로 자축하는 의미에서 지난 九일 함흥 일반 유지를 춘경원(春慶園)에 초대하야 간담회를 개최하고 고급영화를 일반 부민에게 저렴한 요금으로 공개하엿다는 바 지금은 함흥부내에서 다른 영화관에 손색이 없을만큼 모든 설비를 하엿다고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40.04.28. 흥남에 각 극장 수입, 四개월간 六만여원 【흥남】 지난 四월부터 七월까지 四개월간 흥남읍내 각 연극장에서 흥행한 활동사진과 연극들의 관람료금을 조사한 통게 수자는 六만四천五백六원 五十전으로 이에 대한 인원수는 一六六,七三二명이라 한다. 작년 동기에 비하면 약 二활 증가라 한다.
할리우드의 열여섯 살 소녀들에게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2012년 <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을 시작으로 3편의 시리즈를 성공시키며 승승장구한 <헝거게임> 시리즈의 여전사 캣니스(제니퍼 로렌스)는 어린 여동생의 이름이 호명되자 동생을 대신해 독재국가 ‘판엠’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생존 전쟁 ‘헝거게임’에 참여한다. 군중 속에서 용기 있게 나선 캣니스의 나이가 그때 고작 열여섯 살이었다. 캣니스의 파급력은 제니퍼 로렌스의 인기와 맞물려 급속도로 퍼졌다. 영화 속 전사는 현실에서도 유효했다. 제니퍼 로렌스는 인터뷰에서 “그래, 나 살쪘다. 그렇다고 화면에 잘나오려고 살을 빼지는 않을 거다. 애들이 캣니스처럼 돼야지 하고 밥 안 먹고 생활하는 그런 꼴은 보기 싫다”며 쇼비지니스계의 허상을 똑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똘아이’로 인기를 독식했다. 이렇게 매력덩어리니 안 넘어가고 배길 수 없다. 열여섯 살의 캣니스는 SF 판타지물의 이른바 기준점이 됐다. 디즈니에서 십 대들을 틴에이지 멜로드라마에 활용하느라 열 올리는 동안 패러다임은 바뀌었다. 무장한 전사는 소녀들의 몫이 되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시작된 영 어덜트 소설은 그리하여 초등학생 대신 체력적으로 파워를 가지고, 정신적으로 고뇌를 막 시작한 사춘기의 소녀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캣니스로 각광받은 < 다이버전트 >(2014)의 트리스(쉐일린 우드)도 그렇게 탄생했다. ‘핏줄보다 분파’가 중요한 통제된 사회 모든 구성원이 열여섯 살이 되면 평생 살아가게 될 테스트를 치르게 되는데, 트리스는 그 중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아 금기시되는, 즉 ‘다이버전트’의 운명을 쥐고 태어난 존재다. 시스템의 제어로 통제할 수 없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이단아의 나이는, 역시 사춘기를 통과하는 열여섯 살이다.(이 영화의 헤로인 쉐일린 우드는 청춘 멜로 < 안녕, 헤이즐 >(2014)에서도 암 투병 중인 환자이자 민감한 사춘기 연기로 호응을 얻기도 했다.) < 뷰티풀 크리처스 >(2013)의 소녀 리나 역시 강한 힘으로 세상을 끝낼 수도 시작 할 수도 있는 능력자다. 이 엄청난 파워는 열여섯 살 생일이 되면 그 능력이 발휘되는데, 그녀는 선과 악 중 한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소설, 영화, 그리고 각종 머천다이징까지 더해 소비력이 증가한 십 대 팬들을 겨냥한 할리우드의 전략은 알겠다. 하지만 이 거대한 지구의 운명을 이대로 열여섯 살, 순수하고 순진하며 철모르는 소녀들에게 모두 맡겨도 되는지, 좀 불안하기는 하다만. 하여간 <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 > 역시 <헝거게임>에서 출발한 이 열 여섯살 소녀가 바라본 아포칼립스의 시대다. < 라스트 킹 >(2006)을 연출한 케빈 맥도널드의 연출로 원작은 3권의 성장 소설로 영 어덜트 소설계에 파란을 일으킨 멕 로소프의 작품. 미국에 있는 소녀 데이지(시얼샤 로넌)가 영국의 시골 마을에 있는 사촌 집에 놀러왔다 겪게 되는 세계 핵전쟁의 살벌한 풍경을 그린다. 제작진은 애초 <헝거게임> 시리즈를 의도했다고 한다. < 한나 >(2011)로 어린 나이부터 액션에 재능을 보인 그 시얼샤 로넌이 제니퍼 로렌스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굳건하게 믿었으며 그 전략에 꼭 맞게 원작의 열다섯 살 데이지를 영화에서는 열여섯 살로 수정했다. 더불어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사촌 에디(조지 멕케이)의 나이도 맞춤형으로 원작의 열 여덟 살이 아닌 열여섯 살 동갑이 된다. 핵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으로 떠나는 대신 사랑하는 에디와 함께 남기로 한 데이지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열일곱 살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어. 너와 함께 여기 남고 싶어.”라고. 놀랍게도 <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 >의 장르를 결정해 줄 핵전쟁은 열여섯 살 소녀의 머릿속 오만가지 혼란 중 단 하나의 요소가 된다. 그 나이 때는 세계정세나 핵전쟁 말고도 고민할 것도 너무 많고, 그리고 사랑도 처음 시작할 나이라 복잡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딸이 영국 사촌 집에 가든 말든, 잘 도착했는지조차 전화 한번 하지 않는 무심한 아버지를 ‘피해’ 온 소녀는 자기 밖의 세상에 우호적이지 않다. 원래 이름대신, 아예 사촌들에게 “데이지라고 불러줘”라며 자신이 원하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모든 이들에게 까칠하고, 말은 아끼는 데이지가 유일하게 소통하는 것은 세상과 그녀를 단절시켜줄 헤드폰 속 록음악과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환청뿐이다. 뱅 헤어와 진한 마스카라, 요즘 스트리트 패션의 일부인 일부러 구멍 낸 스타킹 차림을 한 미국 십 대, 데이지가 화면에 등장할 때는 쾅쾅 울리는 ‘Do It With a Rockstar''같은 음악과 ‘하루에 8잔 이상의 물을 마셔라’ ‘죽었으면 좋겠어’ ‘인생의 목표를 찾아라’같은 온갖 정체성이 뒤범벅된 사운드가 혼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브루클린 거리나 클럽에서 맞닥뜨릴 것 같은 이 불량한 십 대가 도착한 곳이 바로, 제인 오스틴 소설 속에서나 볼법한 영국의 목가적 전원이라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짜 시작이다. 창밖은 초록이 우거지고,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서 살포시 들어오는 이런 환경에서 블랙 마스카라를 짙게, 더 짙게, 가능한 한 더 두껍게 그리고 있는 데이지의 모습은 그래서 초장부터 상당히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삐딱한 데이지는 어떻게 마스카라를 지우고 영국 목가의 풍경과 어우러지게 되었나로 상당 부분 이 영화의 정체성이 확보된다. 열여섯 살 데이지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게 된 사건이 있는데, 바로 사촌 에디의 존재였다. 매를 다룰 줄 아는 에디는 소 떼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데이지를 위해 동물과 교감을 시도하고 그들을 물러나게 해주는 능력을 발휘한다. 에디가 울타리에 걸려 손에 피가 난 데이지의 피를 빨아주는 순간, 데이지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에디는 결정적으로 데이지를 향해 “모든 규칙을 다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 내 머릿속의 소음들”이라며, 그녀가 가진 혼란을 읽어 낸다. 그런데 진짜의 혼란은 데이지의 첫사랑과 함께 시작된 핵전쟁에 있었다. 조그만 소녀 파이퍼가 여름날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진을 보며 “눈이 와”하고 소리치는 이 서정적인 장면이, 핵전쟁 발발을 알려주는 신호다. 세상에 이런 전쟁의 시작 장면이라니 좀 반칙이다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첫사랑의 충만함을 알게 된 데이지는 결국 미국 시민의 보호받을 권리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에드먼드와 남는 걸 택한다. 그들이 처음으로 섹스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동안, 중요한 건 완벽하게 어른의 존재가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데이지의 아버지는 무관심했고, 영국에 있는 데이지의 이모이자 에디의 엄마는 데이지의 도착 이후 ‘평화협정’ 건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며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더니, 결국 스위스 바젤 출장 건으로 떠나 완벽하게 아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후 영화 속 잠깐 등장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최악이다. 군인들은 데이지와 사촌들을 남자와 여자로 나눠 격리시켜 결국 이들을 헤어지게 만들며, 데이지가 피난의 과정에서 만나는 남자 어른들은 여성들을 겁탈하고 폭행하는 악인으로 묘사된다. 전쟁의 시작과 진행 상황은 TV와 라디오로만 전달되는 정보일 뿐, 원인이나 주체 역시 불분명하다. 에디와 떨어져 파이퍼와 끌려간 데이지는 이제 부역에 동원되며, 방사선에 오염된 물을 마시기 위해 정제약을 타 먹는 생활을 하다가, 죽음의 공포를 피해 에드먼드와 헤어지기 전에 한 ‘다시 집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린 파이퍼를 데리고 탈출을 시도한다. 파이퍼를 독려하며 쉬지 않고 걷고 또 걷고, 파이퍼를 해하려는 어른들을 제압하고, 여우가 시체의 사지를 뜯어먹는 시쳇더미에서 사촌을 찾으려 발버둥 치는 소녀의 모습은, 이미 열여섯 살 순진한 소녀에게서 한발 벗어나 있다. 데이지가 겪는 대재앙, 종말의 참상은 < 투모로우 >(2004) 같은 블록버스터에서 묘사하는 종말의 풍경과 조금 다르다. 소녀에게는 이 종말을 끝낼 파워가 아닌, 안전한 곳으로 묵묵히 달려나갈 의지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분위기는 오히려 종말의 세상, 식량이 바닥난 잿빛 풍경 속에서 필사적으로 남쪽을 향해 가던 아버지(비고 모르텐슨)과 어린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의 탈주에 더 가까워 보인다. 데이지는 결국 전쟁 전, 자신을 소모하게 만들었던 마음속의 혼란을 접고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다. <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 >를 보면서 과연 많은 사람들이 핵전쟁을 묘사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데이지의 첫사랑, 그리고 성장담에 접목된 이야기를 과연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핵전쟁을 묘사한 후반부에 앞서 영화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서정적 정서와 표현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더불어 시얼샤 로넌의 활약을 보는 건 이 영화에서 빠뜨릴 수 없는 매력 요소다. 그녀가 이 영화로 제니퍼 로렌스의 영역을 이어받으리라는 제작진의 기대는 너무 과했다 싶지만 CIA 첩보원 아버지에 의해 16살 살인무기 소녀로 길러진 한나(< 한나 >)를 통해 봤던 가능성은 여전히 놓지 않고 싶다. 벌써 몇 년 지난 이야기를 꺼내자면 그녀가 <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의 헤로인 ‘레이’역에 탈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난다. J.J. 에이브럼스가 그 역을 시얼샤 로넌에게 맡겼더라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