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 목을 매라
- 감독
- 김민희
- 제작년도
- 1998
- 출연
- 양은수, 전민오
< 연산군: 장한사모편 >(이하 <연산군>)은 제1회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 신영균 ), 여우조연상( 한은진 ), 촬영상 등 여덟 개 부문을 휩쓸었으며, 이후 신상옥 의 대표작 중 한편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신상옥은 자서전 <난, 영화였다>의 한 페이지에서 이 작품을 두고 쓴소리를 길게 써두었다. 그게 어느 정도이냐면, 자신이 북한의 감옥에 있을 때 남한의 형에게 몰래 보낸 편지에 ‘<연산군>의 원판을 찾아서 불살라 버리라’고 부탁했다(<난, 영화였다>의 82페이지). 아마도 이 영화의 제작 과정에 얽힌 불만이 반영된 게 아닌가 싶다. 2개월 만에 찍어 1962년 신정(1월 1일)에 상영된 <연산군>이 흥행에 성공하자, 흥행업자들이 구정(설날)에 맞춰 속편인 < 폭군 연산: 복수, 쾌거편 >(이하 <폭군 연산>)을 내놓으라고 극성을 떨었다고 한다. 그래서 놀랍게도 1개월 만에 <폭군 연산>을 만들어야 했으니 창작자로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연산군>과 <폭군 연산>을 급조된 그저 그런 작품일 것이라고 예상했다간 큰코다친다. 신필름 설립 후 < 춘향전 >(1961)이 거대한 성공을 거두고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가 국내외에서 호평을 얻은 1961년, 신상옥은 본격적인 궁중 사극을 계획한다. <연산군>은 여러 면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대조를 이룬다. 촬영과 미술 등의 규모는 입이 벌어질 정도로 엄청나며, 신필름의 위세를 증명하듯 당대의 유명 배우들이 모두 출연해 영화의 곳곳에 배치되었다. 심지어 중전 역할의 최은희조차 <연산군>의 초반과 <폭군 연산>의 후반에 잠시 나오는 게 전부일 정도로 배우들의 면면이 화려함의 극치다. 장담하건대 지금껏 만들어진 어떤 한국영화에서 이보다 더 대단한 주연급 배우들이 총출동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박종화의 <금삼의 피>를 원작으로 삼았는데, 신상옥의 연작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두 작품이 이후 만들어진 연산군 영화에 끼친 영향은 따로 말할 것도 없다. 역사 속 사건을 영화화했으므로 선점한 영화의 영향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영화의 대사, 연기, 미술 등이 하나의 기준점이 되었음은 이후의 영화들이 곧 방증하는 바다. 신상옥의 <연산군> 2부작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대하드라마 스타일의 전개 방식에 있다. 연산군 영화가 동궁 시절의 융, 즉위 이후의 사건 등을 한 편의 영화에 담으려면 대략 몇 가지의 방안 중에 하나를 취해야 한다. 몇몇 사건이나 인물에 국한해 접근하거나, 그게 아니면 아주 급박하게 전개시키는 방식. <금삼의 피>를 원작으로 삼은 이혁수 의 < 연산군 >(1987)은 연산과 장녹수의 관계에 치중했고, 임권택 의 < 연산일기 >(1987)가 연산의 심리적 측면의 묘사에 집중했다면, 근래에 만들어진 < 왕의 남자 >(2005)나 < 간신 >(2015)에서는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인물로 비친 감이 없지 않다. 신상옥의 2부작은 전후편을 합쳐 265분이라는 상영시간이 드는 만큼 작품의 걸음걸이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인상으로 치면, 연산에 관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연산일기>가 연극적이고 셰익스피어적인 반면, 신상옥의 연작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처럼 죄와 구원의 여정에 방점을 찍는 장편소설을 닮았다. 임권택이 조선실록에 적힌 바를 내레이션으로 삽입해 역사적 사실을 따른 것과 비교해 신상옥의 영화는 일부 허점이 품은 게 분명하다. 즉, 역사에 대한 객관적 서술에는 빈틈이 있을지 모르나, 원작 소설에 맞춰 한 인간에 대한 비극적이고 낭만적 기록으로 읽는다고 치면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지 싶다. 일례로, 영화 초중반에 짐승을 소재로 이야기를 잇는 방식이 눈에 띈다. 동궁 시절의 융이 사냥터로 떠나는 길에 거지 행색의 외조모가 길을 막는데 그는 눈치채지 못한다. 돌아오는 길에 송아지 한 마리가 다시 길에 끼어들자 신하 중 한 명이 죽여버린다. 이를 본 융은 송아지를 잃은 어미 소의 마음을 읽어 그를 죽이고 만다. 자신의 진짜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랐던 그의 내면을 슬쩍 드러내는 장면이다. 신하를 죽였으나 은연중에 모정을 그리는 애처로운 인물로 묘사된 그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비뚤어진다.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 영화는 또 하나의 동물을 등장시킨다. 성종이 중전을 위해 키우는 사슴이 있었는데, 융은 성종 앞에서 일부러 사슴에 발길질해 반감을 표출한다. 묘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왕위에 오른 뒤 한층 성품이 포악해진 연산은 폐비 윤씨에 관한 전모를 듣고 앞서 등장했던 사슴에 창을 던져 죽어버린다. 영화는 죽은 사슴의 얼굴을 드물게 클로즈업한다. 연산과 성종의 관계가 틀어지다 마침내 선을 긋는 과정을 몇 차례에서 걸친 은유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자칫 영화의 속도가 느릴 거라고 여겨지겠으나, 그것보다는 섬세한 방식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듯하다. 다른 연산군 영화들이 사건을 전하느라 급급해 인물을 불쑥 등장시키는 경우도 잦은데, <연산군>은 다르다. 외조모인 신씨와 폐비 윤씨가 혜택을 입은 대표적 인물이다. 신씨가 거지 행색으로 도성을 돌아다니다 연산과 다시 만나는 과정에 여러 에피소드를 삽입해 감정의 리듬을 확보하고, 영화 초반 융의 꿈에 나타났던 윤씨는 후반에 통째로 시간을 부여받아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으로 화한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전달되는 감정이 두터운 진정성을 얻음은 자명하다. <폭군 연산>의 결말이 역사적 사실과 딴판이면서도 하나의 이야기로서 완결성을 구한 것도 그래서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로 인한 연산군의 슬픔을 다루면서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여주는 것과 반대로, <폭군 연산>은 나쁜 왕으로서 연산군을 지속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연산군>과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던 <폭군 연산>은 결말에 이르러 전혀 색다른 하나의 플롯을 꾸민다. 사악한 행동을 일삼던 연산은 문득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영화 초반에 잠시 나왔다 사라졌던 중전의 방을 찾는다. 여기서 중전의 역할은 흡사 <죄와 벌>의 구원의 인물, 나타샤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에게 내린 벌을 받아들이고 멀리 떠나가는 연산의 모습은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와 <무사>(2001)의 마지막 이미지와 유사한 정서를 전달한다. 일생에 걸쳐 애욕에 시달렸던 인물이 마침내 자유와 평온을 찾은 모습은 앞선 서사 전체와 맞먹는 무게를 지닌다. 촬영 시기가 한국의 산천이 지금처럼 개발되기 전인 1961년인지라 야외에서 촬영된 장면들이 여럿 돋보인다. 특히 전편인 <연산군>은 세트에서 촬영된 부분이 거의 없고, 실내 장면도 대부분 실제 궁궐 등의 현장에서 직접 찍었음을 알 수 있다.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연산이 말을 타고 여기저기 떠도는 장면을 보면, 배경으로 드러나는 옛 한국의 모습에 신기함을 느낄 지경이다. <연산군>은 들과 산이 펼쳐졌던 공간으로서 옛 한국을 기억하게 한다. 한 예로, 연산이 장녹수를 처음 만나는 장면의 흥취는 다른 연산군 영화들이 꿈도 못 꿀 부분이다. 근래 영화들이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기 위해 클로즈업을 구사하는 것과 달리, 이 영화의 촬영은 미디엄 쇼트 이상으로 인물에게 다가가는 법이 거의 없다. 또한 와이드앵글로 넓게 퍼진 이미지를 종종 구사해 시원한 인상을 안겨준다. 전후편을 통틀어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은 영화의 내적인 스케일을 확장하는 역할을 맡는데, 어쩌면 이 부분에서 <연산군>의 단점이 두드러지게 엿보인다 하겠다. 단순하게 말해 연산군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연산군 역의 신영균을 포함해 대다수가 기능적인 연기의 선을 넘지 않는다. 영화의 속도는 분명 빠르지 않은데, 인물들은 여기서 등장해 대사를 내뱉고 저기로 사라지는 데 그친다(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연산의 숙부 역할로 나온 허장강일 것이다). 신상옥의 전작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보았던 넉넉하고 유유자적한 연기는 여기에 없다. 그 결과, 이야기 전체가 주는 힘이 대단하면서도 매 장면에서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는 실패했다. 신상옥이 싫어했던 부분이 바로 그것일까? 모르겠으니 짐작만 할 뿐이다. >> 연산군(장한사모편) 고화질 VOD 보러가기 <<
신상옥 감독은 < 코리아 >(1954)를 만들면서 영화를 “온 몸으로 배웠다”고 썼다. 석굴암을 촬영하러 올라가다가 지프가 굴러 떨어져 죽을 뻔하기도 했고 추운 창고 건물에서 벌벌 떨면서 포터블 편집기로 편집을 하는 동안 “영화의 흐름과 감각”을 “몸의 한 부분으로 체화”했다는 것이다. 전후의 폐허에서 가산을 털어 만든 이 가난한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신상옥은 뒷날의 많은 “역사극과 문예영화의 기초”가 된 작품이라고 술회한다. 특히 < 무영탑 >(1957)과 < 성춘향 >(1961)은 <코리아>에서 다룬 이야기의 일부를 독립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신상옥, 『난, 영화였다』, 랜덤하우스, 2007, 53~54쪽) 1960년대 초까지 신필름 기술력의 핵심이자 평생의 친구였던 이형표 를 만난 것도 <코리아>의 후반작업을 하면서였다. 최은희 와의 스캔들로 선배 영화인들이 신상옥의 작품에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도움을 주었던 이가 바로 공보처 산하 대한영화사의 사무장이었던 이형표였던 것이다. 당시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이었던 두 청년(신상옥은 1926년 생, 이형표는 1922년 생)은 공통점이 많았다. 식민 말기의 전시체제 아래서 예술에 심취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해방 후에 영화에 입문했다는 점이 일단 그렇다. 10대의 신상옥과 이형표는 둘 다 그림에 몰두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도피주의적 성향과 관련해서 보자면,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탐독하며 유럽의 관념철학에 빠졌던 이형표 쪽이 더 분명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아름다운 것을 쫓아 예술에 탐닉하는 것으로 험악한 세월을 견뎌내기로는 신상옥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유미주의적 성향은 1920년대에 태어나 10대와 20대 대부분을 전쟁 통에서 보냈던, 그럼으로써 일찍부터 삶의 허무를 체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세대 예술가들이 어느 정도는 공유하고 있던 것이다. 영화계에서의 처지 또한 비슷했다. 집단 따돌림을 당했던 신상옥 만큼은 아니지만, 이형표도 선배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영어에 능통했던 이형표는 1950년을 전후한 시기에 미공보원(USIS)에서 일했는데, 이때 이필우 휘하의 기술 인력들은 미공보원의 하청을 받아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미공보원이 영화를 직접 제작하는 조직개편을 하면서 일자리를 잃게 된 영화인들은 그것이 통역을 했던 이형표 탓이라고 생각했고 이형표의 부역 전력을 발고했다. 이로 인해 이형표는 부산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미공보원에서도 해고되었다. 영어 능력을 바탕으로 영향력 있는 미국인들과 교류를 쌓았던 덕에 그 이후에도 커리어를 쌓는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도 그는 선배 영화인들의 미움을 샀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배들과 선을 그으며 활동했던 것은 오히려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전후 한국영화의 새 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보인다. 식민 말기에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영화 만들기를 익혔던 선배들은 도제제도의 강력한 위계관계에 얽매어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기자재에도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전후 원조의 일부로 미국의 아시아재단이 한국에 들여와 설치한 휴스턴 자동현상기가 영화인들의 거부감 때문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던 것은 단적인 예다. <꿈>(1955) 아시아재단의 한국영화 원조 프로젝트를 입안하고 실행했던 존 밀러(John Miller)는 ‘일거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구세대 영화인들 일부가 퍼뜨린 근거 없는 악소문 때문에’ 한국 영화인들 사이에는 자동현상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다고 아시아재단 본부에 보고했다. 영어로 소통할 수 있고 영화계의 낡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새로운 기자재에 훨씬 개방적이었던 젊은 영화인들에게 이 미국인 조력자가 더 호의적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존 밀러는 전후 한국영화 중흥의 신호탄이 되었다고 평가받은 이규환 의 < 춘향전 >(1955)이 아니라, 열악한 환경에서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신상옥의 < 꿈 >(1955)에서 한국영화의 미래를 보았다. 탈식민의 과제를 안은 채 냉전체제로 편입되어갔던 1950년대의 시대적 성격을 고려해본다면, 존 밀러가 이규환보다는 신상옥에 주목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신상옥과 이형표 또한 냉전의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에서 미래를 보았다. 멜로드라마로 대중영화의 흥행감각을 익히는 한편으로 영화사를 운영하며 기업적 발전을 모색했던 신상옥이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이형표는 테드 코넌트 (Theodore Conant)와 함께 휴대용 자기녹음기로 다이렉트 시네마 스타일의 < 위기의 아이들 >(1955)을 만들거나 파라마운트사의 <휴전 Cease the Fire)> 촬영에 참여하여 입체영화 기술을 경험하고, 16mm 코다크롬으로 컬러영화를 시도하면서 미국 발(發) 신기술을 통해 시각적 체험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신상옥이 제작, 감독하고 이형표가 촬영한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 <성춘향>(1961)의 성공은 개인적 수준에서는 그들이 각자 1950년대 동안 쌓아온 역량이 결합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좀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식민지 문화로부터 냉전문화로의 변화가 극적으로 발현된 사건이었고 영화계 내부에서는 중심 인력의 세대가 교체되고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모델로 한 새로운 산업 시스템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화기술의 유력한 출처이자 표준으로서 미국영화가 부상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당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상옥- 최은희 의 <성춘향>과 홍성기 - 김지미 의 < 춘향전 >간의 대결이 <성춘향>의 승리로 귀결된 것은, 한국영화사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홍성기는 1924년 생으로 신상옥과 비슷한 연배였지만 일제 말에 만주영화협회에서 영화를 배웠고 선배 영화인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경작(競作) 소동이 영화계의 신구파 대결로 표출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춘향전>을 옹호하는 구파와 <성춘향>의 편에 선 신파의 대결은 신파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며, 이는 곧 신필름이 이끌어갈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구세대의 지원을 받았던 홍성기는 젊은 신상옥에게서 발견되는, 산업과 기술 그리고 영화미학에 대한 진취적인 비전과 모험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고전 ‘춘향전’을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만든다는 기획 자체가 애초에 신필름의 것이었거니와, 뒤늦게 제작에 뛰어든 홍성기 팀은 새로운 미학적 경지를 보여줄 만큼 신기술을 구사하는데 능숙하지 못했다. <춘향전>이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는지 처음부터 산업적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1950년대 말 최고의 흥행감독이었던 홍성기는 한국영화가 새롭게 도약하는 1960년대 초에 영화계의 주도적 위치에서 밀려났다. 거의 테크니컬러에 육박하는, 현재까지도 퇴색하지 않은 <성춘향>의 아름다운 색감이 얼마나 대단한 기술적 성취였는지는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일반화된 1960년대 말 이후의 한국영화들과 견주어보았을 때 더욱 분명해진다. 그것은 1950년대 동안 미국영화의 신기술을 탐구해왔던 이형표가 영어로 된 기술서적을 열독하면서 장면마다 일일이 색온도를 재어가며 공들여 찍은 결과였지만, <성춘향>의 기술적 성공은 단지 아름다운 색감으로만 설명될 수는 없다. 유려한 카메라워크와 배우의 매력을 십분 살리는 효율적인 나눠찍기, 깊이 있는 공간구성은, 마치 초기 영화나 발성영화 초기의 작품들처럼 정면 롱 쇼트(tableaux)의 롱 테이크 위주로 구성된 <춘향전>과 현격히 구별된다. 기술이 예술적 표현을 제약하는, 신기술 도입 직후의 일반적인 상황을 뛰어넘은 <성춘향>의 성취는 기술이 예술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비용, 재능과 노력을 과감히 투여한 결과였다. 컬러 시네마스코프는 많은 조명 장비가 요구될 뿐 아니라, <성춘향>에서처럼 커트를 자주 나눌 경우에는 그때마다 현장을 다시 세팅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신상옥은 촬영에 필요한 코닥필름을 미국으로부터 직수입하여 사용했는데 여기에도 많은 돈이 들었다. (당시 많은 한국영화들이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미군부대 주변의 암시장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자투리 필름을 구입해 썼다. 홍성기의 <춘향전> 또한 그와 같은 경로를 통해 필름의 많은 부분을 조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감한 투자는, 결과적으로 서울 개봉관에서 관객 38만 명을 동원한 유례 없는 흥행 성공으로 보답 받았지만, 당시 한국영화의 시장 규모를 가늠했을 때 이는 무모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성춘향> 이전에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은 서울 개봉관에서 불과 10만 명을 동원한 이규환의 <춘향전>이었다. 기존 시장에서는 회수할 수 없는 제작비를 투여한 <성춘향>은 한국영화의 시장규모 자체를 확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마치 할리우드의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를 만들 때 그러했듯이, 신상옥은 <성춘향>으로써 영화시장의 한계에 도전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결과적으로는 시장의 혁신적 성장을 이끌었다. (실제로 셀즈닉은 신상옥이 모델로 삼았던 할리우드의 창의적인 제작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모험을 불사하는 진취적인 기업가 정신이 신상옥의 추동력이 되었음은 분명하지만, 대작 <성춘향>의 기획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성장해온 흥행산업의 잠재력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승산 없는 도박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전쟁 시기와 전후 얼마 동안은 기술과 자본이 아니라 사람의 힘에 의존하는 공연예술이 대중오락의 중심을 이루었다. 1930년대부터 이미 융성했고 전쟁 기간 동안에도 선무공작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공연되었던 악극과 여성국극은 형편없는 기자재와 낮은 기술력, 자본의 빈곤으로 조악한 만듦새를 보여주었던 한국영화를 압도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전후 복구에 투여된 미국 원조자금의 일부가 영화계로 들어오면서 기자재가 갖춰지고 서울의 개봉관과 지방 극장들을 잇는 배급망이 확보됨에 따라 영화산업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악극과 여성국극의 작가와 레퍼토리, 배우들과 그들이 무대에서 발전시켜온 캐릭터들, 조명, 미술, 의상 분야의 스태프들을 흡수하면서 1950년대 말 한국영화는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흥행시장의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었던 <성춘향>의 대중적 흡인력은 기술적 완성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1950년대 동안 대중과 교감하며 쌓아온 공연예술의 자산들을 효과적으로 영화에 끌어들인 결과이기도 했다. 두 주인공 최은희와 김진규는 나이가 많아서 적역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극을 이끌면서 조연들이 마음껏 개성을 펼칠 수 있는 마당을 만든다. 능청스럽고 익살맞은 악역(변학도)을 맛깔나게 소화한 이예춘 을 비롯하여 방자의 허장강 , 향단의 도금봉 , 그리고 양훈 , 김희갑 , 구봉서 같은 배우들은 악극에서부터 구축해온 캐릭터를 끌어와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고전 ‘춘향전’ 자체가 영화 뿐 아니라 공연예술을 통해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레퍼토리였는데, 특히 여성국극이 그려낸 화려하고 웅장한 스펙터클의 세계는 민족의 과거를 판타지의 무대로 만들곤 했다. 1950년대 후반의 사극영화들 대부분이 레퍼토리와 시각적 효과에서 여성국극에 빚지고 있거니와 특히 화려한 색감과 넓은 화면의 <성춘향>은 여성국극이 보여준 전통의 스펙터클과 판타지로서의 역사를 영화로 가져온 최고의 성공사례라고 할 만하다. 전통의 스펙터클을 통해 역사를 판타지로 구성하는 것은 민족의 역사를 문화의 차원으로 회수하면서 특정한 미의식과 연관시키는 문화민족주의의 소산이다. 독립의 전망이 희미해져갔던 1930년대 이후에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정체성 확보를 주권의 회복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지역의 전통문화로부터 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신상옥이 말했듯이 그는 “일제 치하에서 일본 역사는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한국의 역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났”던 세대, 다시 말해 민족국가의 학교제도 안에서 역사교육을 받는 대신 전통을 미적 대상으로 삼는 문화민족주의를 통해 역사에 대한 초월적인 감각을 습득한 세대에 속했다. 그와 같은 감각은 로컬리즘 담론과 그에 기반한 문학, 영화, 공연예술들을 통해 재생산되었으며, 신상옥이 말했던 것처럼 해방 이후까지도 “역사극과 문예영화의 기초”가 되었다. <성춘향>은 미적 대상으로서 전통이라는 문화민족주의가 미국영화의 테크놀로지를 만남으로써 만개한 작품이었고 그런 점에서 냉전시대의 한국영화가 새롭게 출발하는데 식민의 문화적 유산이 어떻게 전유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탁월한 사례였다. <성춘향> VOD 보러가기
신상옥 의 < 꿈 >(1955)을 동시대 세계영화의 자장 안에서 본다면 시간을 거슬러 만들어진 영화처럼 보일 것이다. 빈번하게 깔리는 배경음악과 그리 많지 않은 대화 장면이 없다면 거의 무성영화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신상옥 자신이 리메이크한 1967년 판 색채 영화 < 꿈 >과 비교해 봐도 서사는 단출한 상태를 넘어 앙상하고 사건을 추동하는 인물의 내적 동력은 거의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그런데도 상대적으로 각본이 훨씬 정교하고 인물의 관계도도 풍부한 색채판 <꿈>에 비해 이 무성영화 비슷한 흑백영화 오리지널이 더 재미있다는 게 신기하다. 이광수의 소설에 기초한 소재지만 이 영화는 서사의 기본 얼개를 여러 이유로 자세하게 축조하는 걸 포기한 인상을 준다. 한국전쟁 직후 폐허에서 시작했을 영화산업의 물적 토대가 그 첫 번째 이유일 것이고 최인규 감독 밑에서 도제식 조감독을 했다고 하나 데뷔작 < 악야 > 이후 세 번째로 장편영화를 연출한 신상옥의 얕은 연출 경험도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일종의 자서전 비슷한 책 「난, 영화였다」에서 신상옥은 “영화는 근원적으로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꿈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미술을 공부하면서부터 내 의식의 내부에는 탐미적인 요소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쓰면서 이 영화가 문학의 영화화를 통해 나름의 영상미를 탐구한 성과라고 자평한다. ‘탐미적인 영상미’의 수준에 오리지널 판 <꿈>이 이르렀는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지만, 기술적 열악함이 화면에 그대로 드러나는 낭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기묘한 정기가 서려 있어 홀린 듯이 빠져들게 되는 매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말장난 같지만 실제로 그렇다. 초기 신상옥 영화의 파트너였던 배우 황남 ( 배창호 감독이 연출한 < 꿈 >에서 주연을 맡았던 안성기 와 외모가 비슷한)이 연기하는 승려 조신이 지체 높은 태수의 딸 달례( 최은희 )를 보고 한눈에 반해 파계하는 초반 설정에서 영화는 훌쩍 서사적으로 비약해 그 두 사람이 절에서 멀리 도피해 달아나는 장면으로 치닫는다. 쫓는 쪽은 화면에 나오지 않는데 쫓기는 그 두 사람은 다급하고 절박하다. 화면은 이들의 반쪽짜리 추격전을 10여 분 가량 담아내는데 쫓는 자들과의 대비가 화면에 구현되지 않는데도 장중하고 긴박한 음악이 깔리며 그들은 스스로 위기감을 재촉하면서 열심히 달아난다. 조신(안성기와 외모가 비슷한...황남) 여기서 시간에 대한 공간의 절대적 우세가 형식적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조신과 달례의 욕망의 장의 배경으로 존재하는 자연이라는 조형공간이 그 자체로 서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면서 안티 서사에 가까운 틀을 세우는 결과가 만들어짐으로써 영화를 현대적 기운으로 채우는 작은 기적이 일어난다. 이는 앞서 말한 무성 영화적 외양의 활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인데 서사를 미니멀하게 축조하는 대신 극적 사건의 계기로 작동하지 않는 자연 그 자체를 지속적으로 전경화함으로써 주인공들의 탈주 욕망을 품는 숭고한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조신의 경쟁자인 평목 스님이 등장해 조신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급작스럽게 처리하는 중반부의 성급한 극적 리듬이나 달례의 정혼자인 모레아손 화랑 일행이 후반부에 등장해 본격적인 추격전을 벌일 때에도 어딘가 모르게 어설프고 인위적으로 극적 구성을 꾸미는 걸 감추지 못하는 허술한 완성도를 보완할 만큼, 이 영화만의 특이한 기운이다. 모든 욕망의 대상 달례(최은희) 숭고한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짝을 이루는 것은 달례를 연기한 배우 최은희의 존재감이다. 이 영화에서 최은희는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조신을 연모하는 자신의 욕망을 고백하고 기꺼이 그를 따라 신분을 버린 사랑의 도주를 감행하며 조신의 곁에서 평범한 아내로 그를 보필하면서 아름다운 존재 그 상태로 남아 있다. 조신과의 도주 중간에 조신이 너구리굴에 불을 내어 너구리들을 쫓아내고 그 굴에서 쉬려 할 때 달례는 굴에서 도망쳐 나온 새끼 너구리들을 보며 “아유, 가엾어라.”라고 탄식한다. 달례에게 흑심을 품은 평목을 조신이 죽인 것을 알았을 때도 달례는 그런 조신을 책망한다. 결정적으로 본래의 성정을 잃고 조신이 느닷없이 난폭하게 굴 때조차도 그런 조신을 품어준다. 요컨대 달례는 범접할 수 없고 웅장하며 심술궂은 자연이 아니라 언제나 어머니처럼 생육 번성이 가능한 자연과 비슷한 존재로 누구에게나 욕망을 받는 대상이다. 달례는 모레아손의 부서진 욕망의 대상이며 평목의 욕망을 받았고 심지어 연못가에서 목욕을 하다 (역시 느닷없이 나타난) 불한당의 습격을 받는다. 조신은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달례로부터 욕망의 화답을 받은 인물이지만 그 때문에 결국 자신을 쫓아온 모레아손에게 죽임을 당한다. 모레아손의 칼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조신은 꿈에서 깨어나고 죽음과 삶이 인접한 경계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조신의 욕망과 좌절은 당시 신상옥이 처해 있던 상황을 간접적으로 유추하게 한다. 신상옥은 선배 영화인 김학성 촬영감독의 부인인 최은희와 사랑에 빠졌고 그들의 사랑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신상옥이 최은희를 주연시켜 만든 두 번째 영화 < 코리아 >는 충무로 영화인들이 후반 작업을 거부해 곤란을 겪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꿈>에는 욕망에 따른 과보를 치른다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이 투사된 흔적으로서의 달뜬, 동시에 매혹적인 기운이 서투르지만 맹렬한 영화적 활기로 팽배해 있다.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신상옥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서슴없이 영화적 자양분으로 삼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최은희는 신상옥이 연출한 그 화면 속에서 남자들의 그 비루하고 염치없는 욕망을 당당하게 취사 선택해 스스로 자족하며 존재하는 그런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꿈>(신상옥, 1955) 영화보러가기 →